이제 허태현이 도착하는 일만 남았다.그가 온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허태현은 오랫동안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업계 최고 거장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분장실에서 서문정은 메이크업을 마치고 전시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태현이 열었던 전시회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성대했다.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얼굴에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건 다 준비됐어요?”“이미 준비됐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이리 가져와 봐요.” 서문정은 허태현이 반드시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확신하는 듯했다. 그녀는 경호원이 가져온 고풍스러운 그림을 펼쳐보았다. 이 그림은 조선 시대 유명 화가의 진품으로서 허태현이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명화였다.이 그림만 있으면 허태현은 반드시 그녀의 체면을 살려줄 것이다.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전연우가 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중, 잠시 한눈판 사이에 별이는 장소월 침대 쪽으로 기어가 옹알이를 했다. “엄마.”별이는 입에 침을 잔뜩 흘리며 장소월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 뽀뽀하려는 모양이다. 전연우는 휴지로 손을 깨끗이 닦은 뒤 한 손으로 별이를 안아 들었다.“나도 못 하는 뽀뽀를 네가 해?”전연우는 아이에게까지 질투를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기성은이 말했다. “대표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네가 빼앗긴 거 다시 가져올 테니 기다려.”별이의 옷도 전연우가 직접 입혔다. 몇 벌을 겹겹이 입힌 탓에 동그랗게 돌돌 굴러갈 것만 같았다.“엄마... 엄마...”별이는 전연우의 어깨에 엎드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울지는 않았다.누구랑 말하고 있는 걸까?“엄마...”“아가...” 장소월이 새하얀 빛이 만연한 한 곳에 서 있었다. 돌연 안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사라
“아이... 내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요!”“제 아이를 구해주세요...”“아가야... 엄마 여기 있어...”장소월은 제자리에 갇혀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그때 밖에서 한 사람이 들어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과 정말 닮았네요. 그 사람은 원래... 내 아내였어요.”“모두 그놈 때문이에요. 그놈이 내 아내를 빼앗아갔어요...”“다행히... 신이 다시 내게 그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당신을 선물해 주셨네요.”한의준은 떨리는 손을 뻗어 성예진과 지극히 닮은 얼굴에 매혹된 듯 몸을 숙여 그녀의 체취를 느꼈다. 그는 예전의 아름다웠던 장면을 추억하듯 눈을 감았다.“아이... 아이...”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가 갑자기 신음소리를 냈다.그녀의 아기는 죽지 않았다...그녀의 아기는 돌아왔다.별이가 바로 그녀의 아기였다.꿈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는지, 4개월 가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장소월이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눈물이 풍성하고 까만 속눈썹을 적셨다.장소월도 심장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느꼈다...옆방 별이의 울음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바닥엔 피가 가득 뒤덮였다...전시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났다.수많은 미디어가 허태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허태현 화가님 설마 안 오시는 건 아니겠죠?”“믿을 수 있는 소식은 맞을까요? 괜히 기다린 걸까요?”기자 중 한 명이 물었다. “서소월 씨, 허태현 교수님 정말 오시나요?”서문정은 마음속의 불만을 감추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이미 모시러 갔으니 마음 놓고 기다려 주세요.”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꼭 오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허태현은 미술 학원을 설립하려 하고 있다. 순조롭게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반드시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오기 싫어도 반드시 와야만 한다.15분 뒤, 허태현이 도착했다. 직접 지도했던 박원근과 주시윤 등 학생들과 함께 말이다.
서문정은 해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옆에 있던 경호원이 흰 장갑을 끼고 배나무로 만든 고풍스러운 색의 그림 상자를 손에 들고 왔다. 서문정이 꺼내려 한 순간, 허태현이 손을 들어 올려 그녀를 제지했다.“오늘은 그림만 보러 왔으니 다른 것은 필요 없어.”허태현은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그리고 웅장하게 넘실거리는 파도가 생동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 그림이 묘사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군. 이런 풍경은 흔치 않잖아.”아는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꽤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스승님, 저와 함께 저쪽으로 가 다른 그림을 보시지요.”허태현은 못마땅한 듯 툭 한 마디 내뱉었다. “어떻게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모를 수가 있어?”소현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건 자기가 그린 게 아니니까요.”허태현이 손을 흔들자 소현아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 그중 눈치를 챈 기자도 있었으나, 허태현이 막는 바람에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서문정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가씨, 말조심하세요. 여기는 마음껏 떠들어도 되는 시장이 아닙니다. 한 번만 더 선을 넘으면 경비원에게 얘기해 강제로 끌어낼 겁니다.”소현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허태현이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 볼까?”“이쪽입니다.” 서문정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의 시선 모두가 거대한 붉은 천으로 막은 그림으로 향했다. 경호원이 붉은 천을 걷어내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서문정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그림 속 인물은 얇은 흰 베일을 허리에 두르고, 매끈한 등을 드러낸 채, 팔짱을 끼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의 등에 흩어져있는 한올 한올 긴 머리카락까지... 모든 부분이 선명하고 뚜렷했다. 허리에 두른 천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까지도 생생히 그려져 있었다. 이는
“난 그냥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야. 초대해 줬으니 헛된 걸음은 하지 말아야지.”옆에 있던 기자들은 이미 오늘 취재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바로 그때, 고급 롤스로이스 세단이 문 앞에 정차하고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하얀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놀랍게도 성세 그룹 대표가 이곳에 온 것이다.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어오는 전연우의 위압적인 아우라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전연우가 입을 열었다.“기성은.”“네, 대표님.”기성은은 앞으로 나와 서문정을 향해 걸어갔다. “서문정 씨, 오늘 대표님께선 그때 서문정 씨가 아가씨에게서 빼앗아갔던 물건을 돌려받으러 오셨습니다.”서문정은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돌연 나타난 전연우를 멍하니 쳐다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기세에 압도되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의 나약함과 소심함 때문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당신들 모두 내가 뭘 훔쳤다고 하는데, 내가 훔치는 거 본 사람 있어요? 당신들 계속 이렇게 루머를 퍼뜨리면 명예훼손으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서문정 씨, 지금은 그렇게 오리발을 내밀 때가 아닙니다. 대표님께선 이미 당신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었습니다. 물론 서문정 씨가 무참히 짓밟아버렸지만요.”“마지막으로 충고하겠습니다. 자신의 물건이 아닌 것은 주인에게 돌려주세요.”소현아는 옆에서 다가오는 전연우를 보고는 두려움에 허태현의 뒤로 조용히 몸을 숨겼다.전연우가 말했다.“내 인내심은 늘 한계가 있어요. 계속 그렇게 고집부린다면, 이번 전시회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 난 보장 못 해요.”남자가 한번 손을 휙 흔들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모두 부숴버렸다.순간 서문정은 미친 듯이 앞으로 나가 소리쳤다.“멈춰! 다들 멈추란 말이에요!"
“찾았어요!”소현아가 약간 해진 핑크색 가죽 화첩을 잡고 위층에서 뛰어 내려왔다.“저 소월이의 화첩 찾았어요. 서문정의 휴게실 가방 안에 있었어요.”그녀가 모든 사람들에게 화첩을 펼쳐 보여주었다.“여러분들, 저 절도범에게 속지 마세요. 여기 보세요. 소월이의 이름도 있잖아요. 절대 서문정의 것이 아니에요.”“아니... 그건 내 화첩이야...”서문정이 달려들어 빼앗으려 하자, 기성은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마지막 한 겹의 가면까지 벗겨져 버린 서문정은 순간 완전히 이성을 잃고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화첩을 다시 빼앗으려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그건 내 것이야!”옆에 있던 허태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전연우를 약간 무서워하는 소현아는 우물쭈물 앞으로 나가 화첩을 건네주었다.“제가 화첩을 찾았어요. 이제... 저 소월이를 보게 하면 안 돼요?”“저번 일은 죄송했어요...”“소월이가 깨어나면 꼭 사과할게요.”전연우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기성은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소현아 씨와 아가씨께선 막역한 사이신데 당연히 병문안 오실 수 있죠.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소현아는 곧바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보조개를 드러냈다.“당연하죠. 우린 평생 소중한 친구일 거라고 소월이가 말했어요. 저 여자가 소월이의 물건을 빼앗아갔는데, 당연히 제가 찾아줘야죠.”“그건... 내 것이라고...”목적을 달성한 전연우는 미련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전시장을 떠났고, 기성은은 잠시 남아 기자들에게 말했다.“오늘 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들 아실 거라 믿습니다. 내일 성세 그룹 네 글자는 신문에 보도되지 말아야 할 겁니다.”기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기성은은 촬영 감독으로부터 메모리를 건네받은 뒤 말했다“저희가 이 안의 내용을 처리한 뒤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은 영상은 알아서 사용하시면 됩니다.”차 안, 전연우는 장소월의 그 두꺼운 화첩을 한 장씩 펼쳐보았다. 그건 전연우가 예전 그녀에게 준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장소월은 차가워진 손을 모으고 초조한 얼굴로 수술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별이가 정말 그녀의 아이인 걸까?별이가 방에서 크게 다쳤을 때, 그 위험이 장소월에게 전해지기라도 한 듯, 심장에서 전해져오는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깨웠다. 꿈속에서... 그녀의 아이는 별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생 그녀가 낳았던 그 아이는 분명 여자아이였다. 어떻게 남자아이로 태어나 별이가 되었단 말인가?아니면 그냥 모든 것이 그녀의 허황된 망상일 뿐인 걸까?아마 그렇겠지.그녀의 아이는 이미 죽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수 있겠는가.장소월은 순간 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 순간, 남자가 빠르게 걸어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장소월의 희미한 시선이 전연우에게 닿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전연우는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여자를 안았다.“의사 선생님! 기성은, 빨리 서철용한테 오라고 해.”기성은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전연우의 모습에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연구원에 있는 서철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철용은 소식을 들은 뒤 모든 일을 미뤄두고 십여 분 안에 병원에 도착했다.서철용은 그녀의 주치의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그의 얼굴에서 예전 같은 정도의 어둠은 보이지 않았다.“한 번 깨어났으니, 이미 거의 회복됐다는 걸 설명해. 조금 전엔 그저 몸이 너무 약해져서 정신을 잃은 거야.”“잠시 쉬게 놔뒀다가 깨어나면 먼저 죽을 먹여 체력을 회복하게 해. 앞으론 마음대로 움직이게 해선 안 돼.”전연우는 소중히 그녀의 손을 잡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성은을 노려보았다.“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다친 건데?”기성은은 변명할 얼굴도 없었다.“급히 나가야 해서 아이를 침대에만 눕혀두고 나왔습니다. 그 뒤의 일은 저도 모릅니다.”서철용은 기성은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저 사람 탓할 필요
아니면 별이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은경애는 재빨리 야채죽을 끓였다.장소월은 누군가 옆에 있음을 감지했다. 링거 바늘을 꽂은 손등에 뜨거운 온도가 느껴져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별... 별이는?”전연우가 대답했다.“이제 괜찮아. 아주머니가 병실에서 보살피고 있어.”“배 안 고파? 뭐 좀 먹을래?”장소월은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실은 지난 3개월 동안,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었다.그리고 깊은 밤, 전연우가 그녀를 품에 안고 했던 자신의 과거를 포함한 모든 말까지...그에게 닥쳤던 불행함 때문에 장씨 집안에 원한을 가졌던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모든 원한을 풀었다. 대체 왜 아직도 아무 죄 없는 사람을 해친단 말인가.너무나도 잔인하다.장소월은 그에게서 시선을 옮긴 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익숙한 화첩을 발견했다. 그런 모습을 본 전연우는 그녀를 부축해 앉히고는 베개를 등 뒤에 놓아 기대게 한 뒤 화첩을 손에 쥐여주었다.“오래전에 잃어버렸었는데 어떻게 찾았어?”전연우는 차가운 그녀 손의 온도를 느끼고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누가 훔쳐 갔더라고. 내가 오늘 가서 찾아왔어.”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화첩을 어루만졌다. 전연우가 손을 뻗어 얼굴 옆으로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뭐 없어진 건 없나 살펴봐.”장소월은 익숙한 페이지를 펼쳐보니 마음속에 옅은 파도가 일었다.“찾아줘서 고마워.”하지만 이제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서울을 떠나있던 4년 동안, 그녀는 이곳들을 모두 여행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네가 깨어났으면 됐어. 배 안 고파? 내가 아주머니에게 죽을 끓이라고 했어. 먹을래?”“그래.”장소월이 전연우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전연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았어. 내가 가져다줄게.”전연우가 숟가락에 담은 죽을 호호 불어 자상하
전연우는 그에게 있는 모든 인내심을 장소월에게 쏟고 있었다.그는 병실을 나서자마자 벽에 붙어 어쩔 줄 모르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차갑게 시선을 거두고 자리를 떴다. 소현아가 도둑처럼 살금살금 코너를 돌아 나왔다.얼마 후, 그녀는 전연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경호원들은 이번엔 그녀를 막지 않았다.그녀가 조심스레 장소월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장소월은 문밖 인기척을 듣고 전연우가 다시 돌아온 줄로 알았다. 소현아가 왔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장소월을 보자마자 소현아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장소월이 번쩍 눈을 떴다.“현아?”장소월은 기침하며 손을 짚고 침대에서 일어났다.“네가 어떻게 왔어?”소현아는 곧바로 장소월의 품에 뛰어들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소월아,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네가 병 난 거야.”장소월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소현아를 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자책하지 마. 영수 일은 고마웠어.”아니면 그녀는 평생 전연우에게 속았을 것이다.“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소월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제일 친한 친구를 잃어버릴까 봐 너무 무서웠어.”소현아가 너무 꽉 안았던 탓에 장소월은 숨쉬기조차 어려웠다.“현아야, 나 이제 괜찮아. 병도 다 나았으니까 울지 마.”그녀가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장소월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내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얘기해줄 수 있어?”소현아는 곧바로 눈물을 닦았다. 장소월이 누워있을 때, 전연우는 아무에게도 병원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그녀의 말엔 전연우의 막무가내 행동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그동안 전연우는 매일 청연사로 가 불경을 드렸다. 장소월은 그가 정확히 무엇을 빌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모든 행동이 누구를 위해서였는지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이름으로 희망 어린이 재단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