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스튜디오.박원근은 전화를 받고는 허 교수님을 기다리던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교수님께서 일이 생기셔서 조금 늦게 스튜디오에 도착하신대.”방금 스튜디오에 들어온 학생들은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이었다.“오늘 교수님을 만나 뵐 수 있을 줄 알았어요.”“참, 선배님, 소월 선배님은요? 왜 계속 스튜디오에 안 나오시는 거예요?”“맞아요! 지난주에 소월 선배님의 그림이 또 금상을 받았잖아요. 저희 언제 소월 선배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교수님이 제자로 삼은 건 소월 선배님이 유일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하지만 교수님이 제자는 한 명만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제자가 혹시 서소월 씨인가요?”박원근은 연이어 던져지는 질문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대해선 쓸데없는 추측하지 마. 지금은 우선 각자 손에 쥔 일에 열중해. 교수님과 소월 후배가 돌아오면 알게 될 거야.”“서소월과 우리 스카이 스튜디오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됐어. 각자 돌아가 일해.”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박원근은 전화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그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 돌아오셨어. 대체 언제까지 꽁해 있을 거야?”핸드폰 너머로 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다 장소월 편이잖아. 난 실력도 소월이보다 떨어져서 스튜디오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 내가 떠났으니까 소월이를 불러오면 되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지 마. 내가 직접 교수님께 스튜디오를 그만두겠다고 말할게.”“장소월의 능력은 확실히 우리들보다 뛰어나. 그건 명백한 사실이야. 이번 장소월의 수상 소식은 너도 들었을 거야. 그 대회 금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그걸로 장소월의 실력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잖아? 서현아... 소월이는 우리의 막내 여동생이기도 해. 너도 알다시피 소월이는 너무 순진하고 단순해서 사회생활을 잘 못 해. 그리고 네가 소월이를 미워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
이제 허태현이 도착하는 일만 남았다.그가 온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허태현은 오랫동안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업계 최고 거장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분장실에서 서문정은 메이크업을 마치고 전시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태현이 열었던 전시회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성대했다.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얼굴에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건 다 준비됐어요?”“이미 준비됐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이리 가져와 봐요.” 서문정은 허태현이 반드시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확신하는 듯했다. 그녀는 경호원이 가져온 고풍스러운 그림을 펼쳐보았다. 이 그림은 조선 시대 유명 화가의 진품으로서 허태현이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명화였다.이 그림만 있으면 허태현은 반드시 그녀의 체면을 살려줄 것이다.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전연우가 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중, 잠시 한눈판 사이에 별이는 장소월 침대 쪽으로 기어가 옹알이를 했다. “엄마.”별이는 입에 침을 잔뜩 흘리며 장소월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 뽀뽀하려는 모양이다. 전연우는 휴지로 손을 깨끗이 닦은 뒤 한 손으로 별이를 안아 들었다.“나도 못 하는 뽀뽀를 네가 해?”전연우는 아이에게까지 질투를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기성은이 말했다. “대표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네가 빼앗긴 거 다시 가져올 테니 기다려.”별이의 옷도 전연우가 직접 입혔다. 몇 벌을 겹겹이 입힌 탓에 동그랗게 돌돌 굴러갈 것만 같았다.“엄마... 엄마...”별이는 전연우의 어깨에 엎드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울지는 않았다.누구랑 말하고 있는 걸까?“엄마...”“아가...” 장소월이 새하얀 빛이 만연한 한 곳에 서 있었다. 돌연 안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사라
“아이... 내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요!”“제 아이를 구해주세요...”“아가야... 엄마 여기 있어...”장소월은 제자리에 갇혀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그때 밖에서 한 사람이 들어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과 정말 닮았네요. 그 사람은 원래... 내 아내였어요.”“모두 그놈 때문이에요. 그놈이 내 아내를 빼앗아갔어요...”“다행히... 신이 다시 내게 그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당신을 선물해 주셨네요.”한의준은 떨리는 손을 뻗어 성예진과 지극히 닮은 얼굴에 매혹된 듯 몸을 숙여 그녀의 체취를 느꼈다. 그는 예전의 아름다웠던 장면을 추억하듯 눈을 감았다.“아이... 아이...”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가 갑자기 신음소리를 냈다.그녀의 아기는 죽지 않았다...그녀의 아기는 돌아왔다.별이가 바로 그녀의 아기였다.꿈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는지, 4개월 가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장소월이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눈물이 풍성하고 까만 속눈썹을 적셨다.장소월도 심장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느꼈다...옆방 별이의 울음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바닥엔 피가 가득 뒤덮였다...전시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났다.수많은 미디어가 허태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허태현 화가님 설마 안 오시는 건 아니겠죠?”“믿을 수 있는 소식은 맞을까요? 괜히 기다린 걸까요?”기자 중 한 명이 물었다. “서소월 씨, 허태현 교수님 정말 오시나요?”서문정은 마음속의 불만을 감추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이미 모시러 갔으니 마음 놓고 기다려 주세요.”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꼭 오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허태현은 미술 학원을 설립하려 하고 있다. 순조롭게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반드시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오기 싫어도 반드시 와야만 한다.15분 뒤, 허태현이 도착했다. 직접 지도했던 박원근과 주시윤 등 학생들과 함께 말이다.
서문정은 해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옆에 있던 경호원이 흰 장갑을 끼고 배나무로 만든 고풍스러운 색의 그림 상자를 손에 들고 왔다. 서문정이 꺼내려 한 순간, 허태현이 손을 들어 올려 그녀를 제지했다.“오늘은 그림만 보러 왔으니 다른 것은 필요 없어.”허태현은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그리고 웅장하게 넘실거리는 파도가 생동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 그림이 묘사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군. 이런 풍경은 흔치 않잖아.”아는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꽤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스승님, 저와 함께 저쪽으로 가 다른 그림을 보시지요.”허태현은 못마땅한 듯 툭 한 마디 내뱉었다. “어떻게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모를 수가 있어?”소현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건 자기가 그린 게 아니니까요.”허태현이 손을 흔들자 소현아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 그중 눈치를 챈 기자도 있었으나, 허태현이 막는 바람에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서문정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가씨, 말조심하세요. 여기는 마음껏 떠들어도 되는 시장이 아닙니다. 한 번만 더 선을 넘으면 경비원에게 얘기해 강제로 끌어낼 겁니다.”소현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허태현이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 볼까?”“이쪽입니다.” 서문정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의 시선 모두가 거대한 붉은 천으로 막은 그림으로 향했다. 경호원이 붉은 천을 걷어내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서문정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그림 속 인물은 얇은 흰 베일을 허리에 두르고, 매끈한 등을 드러낸 채, 팔짱을 끼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의 등에 흩어져있는 한올 한올 긴 머리카락까지... 모든 부분이 선명하고 뚜렷했다. 허리에 두른 천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까지도 생생히 그려져 있었다. 이는
“난 그냥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야. 초대해 줬으니 헛된 걸음은 하지 말아야지.”옆에 있던 기자들은 이미 오늘 취재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바로 그때, 고급 롤스로이스 세단이 문 앞에 정차하고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하얀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놀랍게도 성세 그룹 대표가 이곳에 온 것이다.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어오는 전연우의 위압적인 아우라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전연우가 입을 열었다.“기성은.”“네, 대표님.”기성은은 앞으로 나와 서문정을 향해 걸어갔다. “서문정 씨, 오늘 대표님께선 그때 서문정 씨가 아가씨에게서 빼앗아갔던 물건을 돌려받으러 오셨습니다.”서문정은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돌연 나타난 전연우를 멍하니 쳐다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기세에 압도되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의 나약함과 소심함 때문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당신들 모두 내가 뭘 훔쳤다고 하는데, 내가 훔치는 거 본 사람 있어요? 당신들 계속 이렇게 루머를 퍼뜨리면 명예훼손으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서문정 씨, 지금은 그렇게 오리발을 내밀 때가 아닙니다. 대표님께선 이미 당신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었습니다. 물론 서문정 씨가 무참히 짓밟아버렸지만요.”“마지막으로 충고하겠습니다. 자신의 물건이 아닌 것은 주인에게 돌려주세요.”소현아는 옆에서 다가오는 전연우를 보고는 두려움에 허태현의 뒤로 조용히 몸을 숨겼다.전연우가 말했다.“내 인내심은 늘 한계가 있어요. 계속 그렇게 고집부린다면, 이번 전시회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 난 보장 못 해요.”남자가 한번 손을 휙 흔들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모두 부숴버렸다.순간 서문정은 미친 듯이 앞으로 나가 소리쳤다.“멈춰! 다들 멈추란 말이에요!"
“찾았어요!”소현아가 약간 해진 핑크색 가죽 화첩을 잡고 위층에서 뛰어 내려왔다.“저 소월이의 화첩 찾았어요. 서문정의 휴게실 가방 안에 있었어요.”그녀가 모든 사람들에게 화첩을 펼쳐 보여주었다.“여러분들, 저 절도범에게 속지 마세요. 여기 보세요. 소월이의 이름도 있잖아요. 절대 서문정의 것이 아니에요.”“아니... 그건 내 화첩이야...”서문정이 달려들어 빼앗으려 하자, 기성은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마지막 한 겹의 가면까지 벗겨져 버린 서문정은 순간 완전히 이성을 잃고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화첩을 다시 빼앗으려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그건 내 것이야!”옆에 있던 허태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전연우를 약간 무서워하는 소현아는 우물쭈물 앞으로 나가 화첩을 건네주었다.“제가 화첩을 찾았어요. 이제... 저 소월이를 보게 하면 안 돼요?”“저번 일은 죄송했어요...”“소월이가 깨어나면 꼭 사과할게요.”전연우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기성은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소현아 씨와 아가씨께선 막역한 사이신데 당연히 병문안 오실 수 있죠.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소현아는 곧바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보조개를 드러냈다.“당연하죠. 우린 평생 소중한 친구일 거라고 소월이가 말했어요. 저 여자가 소월이의 물건을 빼앗아갔는데, 당연히 제가 찾아줘야죠.”“그건... 내 것이라고...”목적을 달성한 전연우는 미련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전시장을 떠났고, 기성은은 잠시 남아 기자들에게 말했다.“오늘 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들 아실 거라 믿습니다. 내일 성세 그룹 네 글자는 신문에 보도되지 말아야 할 겁니다.”기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기성은은 촬영 감독으로부터 메모리를 건네받은 뒤 말했다“저희가 이 안의 내용을 처리한 뒤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은 영상은 알아서 사용하시면 됩니다.”차 안, 전연우는 장소월의 그 두꺼운 화첩을 한 장씩 펼쳐보았다. 그건 전연우가 예전 그녀에게 준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장소월은 차가워진 손을 모으고 초조한 얼굴로 수술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별이가 정말 그녀의 아이인 걸까?별이가 방에서 크게 다쳤을 때, 그 위험이 장소월에게 전해지기라도 한 듯, 심장에서 전해져오는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깨웠다. 꿈속에서... 그녀의 아이는 별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생 그녀가 낳았던 그 아이는 분명 여자아이였다. 어떻게 남자아이로 태어나 별이가 되었단 말인가?아니면 그냥 모든 것이 그녀의 허황된 망상일 뿐인 걸까?아마 그렇겠지.그녀의 아이는 이미 죽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수 있겠는가.장소월은 순간 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 순간, 남자가 빠르게 걸어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장소월의 희미한 시선이 전연우에게 닿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전연우는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여자를 안았다.“의사 선생님! 기성은, 빨리 서철용한테 오라고 해.”기성은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전연우의 모습에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연구원에 있는 서철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철용은 소식을 들은 뒤 모든 일을 미뤄두고 십여 분 안에 병원에 도착했다.서철용은 그녀의 주치의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그의 얼굴에서 예전 같은 정도의 어둠은 보이지 않았다.“한 번 깨어났으니, 이미 거의 회복됐다는 걸 설명해. 조금 전엔 그저 몸이 너무 약해져서 정신을 잃은 거야.”“잠시 쉬게 놔뒀다가 깨어나면 먼저 죽을 먹여 체력을 회복하게 해. 앞으론 마음대로 움직이게 해선 안 돼.”전연우는 소중히 그녀의 손을 잡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성은을 노려보았다.“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다친 건데?”기성은은 변명할 얼굴도 없었다.“급히 나가야 해서 아이를 침대에만 눕혀두고 나왔습니다. 그 뒤의 일은 저도 모릅니다.”서철용은 기성은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저 사람 탓할 필요
아니면 별이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은경애는 재빨리 야채죽을 끓였다.장소월은 누군가 옆에 있음을 감지했다. 링거 바늘을 꽂은 손등에 뜨거운 온도가 느껴져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별... 별이는?”전연우가 대답했다.“이제 괜찮아. 아주머니가 병실에서 보살피고 있어.”“배 안 고파? 뭐 좀 먹을래?”장소월은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실은 지난 3개월 동안,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었다.그리고 깊은 밤, 전연우가 그녀를 품에 안고 했던 자신의 과거를 포함한 모든 말까지...그에게 닥쳤던 불행함 때문에 장씨 집안에 원한을 가졌던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모든 원한을 풀었다. 대체 왜 아직도 아무 죄 없는 사람을 해친단 말인가.너무나도 잔인하다.장소월은 그에게서 시선을 옮긴 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익숙한 화첩을 발견했다. 그런 모습을 본 전연우는 그녀를 부축해 앉히고는 베개를 등 뒤에 놓아 기대게 한 뒤 화첩을 손에 쥐여주었다.“오래전에 잃어버렸었는데 어떻게 찾았어?”전연우는 차가운 그녀 손의 온도를 느끼고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누가 훔쳐 갔더라고. 내가 오늘 가서 찾아왔어.”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화첩을 어루만졌다. 전연우가 손을 뻗어 얼굴 옆으로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뭐 없어진 건 없나 살펴봐.”장소월은 익숙한 페이지를 펼쳐보니 마음속에 옅은 파도가 일었다.“찾아줘서 고마워.”하지만 이제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서울을 떠나있던 4년 동안, 그녀는 이곳들을 모두 여행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네가 깨어났으면 됐어. 배 안 고파? 내가 아주머니에게 죽을 끓이라고 했어. 먹을래?”“그래.”장소월이 전연우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전연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았어. 내가 가져다줄게.”전연우가 숟가락에 담은 죽을 호호 불어 자상하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
과연 정말 그럴까?강지훈이 내뱉은 말, 그리고 소현아 배 속의 아이...소씨 부인을 돌려보낸 후, 규영은 별장 거실로 돌아와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는 주인님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외국에 있는 동안, 사실 주인님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나를?” 어지럽게 흩어졌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도우미들은 처음 보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미경도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 “맞습니다! 현아 아가씨는 병원에서 매일 주사를 맞으셨습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주사 맞는 걸 제일 무서워하십니다. 감기에 걸려 의사가 올 때마다 주인님 품에 숨곤 하셨지요. 현아 아가씨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늘 주인님의 성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현아 아가씨 방에서 주인님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강지훈은 처음으로 옆에 있는 미인을 무시해 버린 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천효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지훈 씨.”규영이 건넨 편지를 받은 뒤, 강지훈은 분홍색 봉투를 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훈 씨,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 당신 없이 사는 거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여기 의사들 매일 나한테 주사를 놔요. 팔이 아파 죽겠다고요! 심지어 머리에도 주사를 놔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의사는 화까지 내면서 주사를 놓는 것도 모자라 밥도 안 줘요. 주사 맞고 나면 팔뚝이 멍투성이가 되는데, 지금 글씨 쓰는 것도 아파요.규영과 미경의 말로는 내 배 속에 아기가 생겼대요. 하지만 이 사실을 강지훈 씨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지훈 씨는 아기를 싫어하기 때문에.흑흑흑... 그럼 나도 아기 안 낳을래요.강지훈 씨, 이 병원 안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집에 가서 아빠랑 엄마 보고 싶어요. 그리고 민아, 소월이...나 언제 데리러 올 거예요!너무 배고파요!규영과 미경은 또 나한테 먹을 것을 아무것도 안 줬어요.강지훈 씨,
“몰라요.”손이준이 짧게 대답했다.강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 멍청이의 일은 더는 미루면 안 된다.강용은 밖으로 나가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하지만 알아보니 가장 번화한 시내로 가려면 100km도 훌쩍 넘는 거리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렌터카 매장에 전화해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차는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한다고 한다.오늘 밤 짐을 정리하고 내일 떠나면 될 것이다.두 남자는 아래층 거실에 남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만 빚어 놓으려고 했건만, 한번 시작하니 한 시간도 훌쩍 넘겨버렸다.서울.강지훈은 소현아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러시아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최고급 호텔부터 기차역,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지하 클럽까지 그의 세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데도 말이다.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다.북경 감옥 전체는 살얼음판을 걷듯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강지훈은 평소 가장 아끼던 여자한테조차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잃고 말았다.“소씨 집안 쪽에선 아직 소식 없어?” 강지훈은 왕좌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부관이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소씨 집안을 며칠 동안 지켜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현아 씨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소현아 씨의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실종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소현아 씨가 돌아와 슬퍼할 테니,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씨 집안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입니다.”규영과 미경이 밖에서 걸어 들어와 보고했다.“주인님, 소씨 집안 사람들이 또 찾아왔습니다.”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돌려보내. 그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지?”“네, 주인님.”그 바보는 임신한 몸으로 대체 어디까지 도망간 걸까?천
강용 역시 장소월이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몰래 항우울제를 복용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씨 집안에 있을 때도, 전연우의 곁을 떠나도...그녀의 병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강용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장소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와 흉터는 이제 모두 옅어졌지만, 마음속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의 손은... 무거운 물건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다른 힘든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그녀는 붓을 쥘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강용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그녀는 가족도 없이 늘 혼자였다...사실 장소월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의,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하디귀한 아가씨였는데...그녀는...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선 안 되는 사람이다.“가끔은 나도 현아처럼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현아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강용... 나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라도 버틸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워.”강용은 너무 마음이 아파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고 온기를 나누어주었다.“아니, 그럴 일 없을 거야. 너한텐 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나 현아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아. 정말이야!”“나는 단지 걔가 너한테 자꾸 들러붙는 게 질투 났을 뿐이야.”“소월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떠나자. 걸어서라도 가지 뭐.”“강용, 나한테 재앙이라고 했던 송시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불행해졌어. 너, 강영수, 인시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