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월’이 허태현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이 신문의 주요 헤드라인을 장식했다.기성은은 장소월과 똑같은 얼굴로 성형한 서문정을 쳐다보다가 문득 뒤쪽 벽에서 낯익은 그림을 발견했다. “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 예전 본 것 같은 그림이에요.”전연우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네 말은 저 뒤에 있는 이 그림들이 장소월 화첩 속 그림과 비슷하다는 거야?”기성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선 예전 늘 화첩을 몸에 지니고 다니셨습니다. 가장 아끼던 물건이셨으니까요. 하지만 제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잊어버리셨다고 했어요. 제 생각엔 이 여자가 주워간 것 같아요.”사실 전연우도 그 화첩을 찾고 싶었었다. 장소월은 아직 색을 올리지 않은 화첩을 넘기며 이곳들은 실제 존재하는 장소인데,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고 했었다. 잃어버린 그 화첩이 서문정의 손에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다 준비됐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증거는 거의 다 모았습니다. 서창수는 수년간 거액의 공금을 횡령했습니다. 밖에서 살림을 차린 상간녀들에겐 수억 원 상당의 고급 승용차도 몇 대 있다고 합니다...”“전시회는 언제 열린대?”“7일 뒤, 허태현이 귀국할 겁니다.”“그래.”며칠 전부터 장소월의 상태가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전연우는 그녀 곁에 머물러야 했다.전연우는 면봉에 물을 묻혀 장소월의 입술에 발라주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오빠가 그깟 쓰레기들 깔끔하게 치워줄게.”전연우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든 그녀의 장밋빛 입술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고개를 숙여 입맞춤했다.그때, 돌연 문이 열리고 별이가 갈색 곰돌이 패딩을 입고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두 귀까지 쫑긋 세우니 뒷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동물원에서 도망쳐 나온 아기곰이었다.별이는 꼬물꼬물 침대 옆으로 기어가다가 길을 제대로 보지 않았는지 머리를 침대에 찧어버렸다 ...이제 거
그때, 병실로 돌아온 전연우는 열려 있는 방문을 발견하고는 어두운 눈동자로 문 앞에 서 있는 경호원에게 물었다.“오늘 누가 왔었어?”“은경애 씨가 장을 보고 돌아온 것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전연우는 불안한 마음에 방 안의 감시카메라를 찾았다. 화면 속에 나타난 아이를 보자 전연우의 긴장했던 얼굴이 잠시 풀렸다. 하마터면 이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요즘은 장소월 때문에 별이를 완전히 잊고 살았다.백화점.서문정은 며칠 뒤 전시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피팅하고 있었다. 허리에 살이 한 주먹 더 붙은 데다 이 드레스를 소화하기에 그녀의 몸매는 조금 빈약했다. 그녀는 가슴 확대 수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매가 드러나는 흰색 롱드레스를 선택했다...그때 문득 무언가 생각난 경호원이 말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성세 그룹 쪽에는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제 아가씨도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서문정이 웃으며 말했다.“그럴 것 같았어요. 아버지는 성세 그룹이 시장을 독점하려 하기 때문에 윗사람들의 불만스러운 눈총을 받고 있다고 했어요. 회사도 불안정하다고 들었는데 전연우가 성세 그룹 대표직을 수호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아요.”“전연우는 그저 사업가일 뿐이에요. 아버지가 조금만 인맥을 동원하면 성세 그룹에서 제출한 프로젝트는 절대 통과하지 못하죠. 그때가 되면 나한테 구걸이라도 해야 될걸요? 감히 날 망신 주려 했다면 그 자격부터 먼저 갖추었어야죠!”안하무인 오만한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서문정은 가슴에 무언가 꽉 막혀버린 것 같은 불쾌함이 몰려왔다.쇼핑 기분마저 사라져버렸다.“좋았는데 갑자기 전연우 얘기는 왜 꺼내요? 젠장! 방금 입어본 옷 다 들고 따라와요.”서문정이 경호원과 함께 백화점을 나서려던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막아섰다.“이 도둑년아, 소월이 물건 내놔.”소현아는 불같이 화를 내며 눈앞 여자를 쏘아보았다.“당신 누구야? 어디서 온 미친년이야? 당장 끌어내!”경호원이 움직이자 소현아는 소
강지훈은 조금 전 문 앞에서 모든 과정을 목격했었다. 소녀는 꽤나 대담했다.소현아는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장소월의 오빠를 마주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두 사람 모두 나쁜 놈 같았다.그녀는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서문정의 경호원들이 이미 차를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감히 차에서 내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소현아는 목을 움츠리며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죄... 죄송해요... 아저씨 차가 제 차랑 너무 많이 닮아서요... 절대 일부러 탄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 여잔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절 차에서 쫓아내지 않으면 안 돼요?”아저씨?강지훈의 매서운 눈동자에 순식간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못마땅한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진 않았다. 다만 피에 굶주린 듯한 섬뜩한 기운은 무시하기 어려웠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은 그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선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특히 눈 위에 남아있는 흉터는 그의 악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서문정의 기세를 보니 당장이라도 차를 부술 것 같았다.차 유리는 선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은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앞에 앉아있던 보좌관이 갑자기 차 창문을 내렸다.보좌관의 어깨에 달린 훈장을 본 경호원은 순간 멈칫했다.“아가씨, 차를 망가뜨리면 후과를 책임져야 해요.”서문정은 운전기사의 어깨에 달린 훈장을 발견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뒷좌석 밑에 웅크리고 있는 소현아를 바라보며 분노에 찬 표정으로 손을 휘젓고 몸을 돌렸다.소현아는 떠나는 그들을 조심스럽게 살핀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이야, 무서워 죽겠어...” 그녀는 잔뜩 겁먹은 토끼처럼 소심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 강지훈은 여느 여자의 향기와는 다른, 아주 자연스러운 달콤한 체취를 맡았다. 이는 그로 하여금 얼굴을 찌푸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이 꿈틀거리게 했다.소
강지훈은 여자를 무릎에 앉히고는 거친 손을 여자의 치마 밑으로 집어넣었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이러지 말아요. 사람 있잖아요.”여자의 향기가 강지훈의 코에 흘러들어왔다. 조금 전 여자의 냄새와는 다른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고급 향수 냄새였다.강지훈 주변의 여자들은 늘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쫓겨났다. 시간이 지나면 신선함을 잃어버리는 강지훈에게 말이다.중간 칸막이가 서서히 올라갔다.“지훈 씨, 제가 서비스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치마가 어지러워질까 봐요.”남자가 다리를 벌리자 여자가 나른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집에 돌아온 소현아는 어떻게 하면 서문정을 처단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장소 월의 물건을 훔쳐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소현아는 어느덧 돼지 인형을 껴안고 곤히 잠이 들었다. 꿈속 그녀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무서운 짐승들까지 쫓아오고 있었다.돌연 무서운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철창에 가두고 수갑과 쇠사슬을 채웠다. 그러고는 복종하지 않으면 영원히 가두겠다고 윽박질렀다.얼굴이 선명해질 때까지 뚫어지라 쳐다보니, 바로 그 남자였다!소현아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 속, 딸기 잠옷은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었다.그녀는 불을 켜고 돼지 인형을 꼭 껴안고는 부들부들 떨었다.“왜 꿈에 그 사람이 나타난 거야!”소현아는 자신의 얼굴을 내리쳤다. “너무 무서웠어! 꿈이라 다행이야.”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새벽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소월이를 보러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소현아는 서둘러 돼지 인형을 안고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다시 잠에 들었다.서문정이 허태현의 첫 제자가 된다는 소식은 서울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 하지만 그들은 허태현은 이미 마지막 제자를 받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며칠 후.서울 공항.허이준은 허태현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갔다. 차 안에서 허태현은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며 혀를 끌
스카이 스튜디오.박원근은 전화를 받고는 허 교수님을 기다리던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교수님께서 일이 생기셔서 조금 늦게 스튜디오에 도착하신대.”방금 스튜디오에 들어온 학생들은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이었다.“오늘 교수님을 만나 뵐 수 있을 줄 알았어요.”“참, 선배님, 소월 선배님은요? 왜 계속 스튜디오에 안 나오시는 거예요?”“맞아요! 지난주에 소월 선배님의 그림이 또 금상을 받았잖아요. 저희 언제 소월 선배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교수님이 제자로 삼은 건 소월 선배님이 유일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하지만 교수님이 제자는 한 명만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제자가 혹시 서소월 씨인가요?”박원근은 연이어 던져지는 질문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대해선 쓸데없는 추측하지 마. 지금은 우선 각자 손에 쥔 일에 열중해. 교수님과 소월 후배가 돌아오면 알게 될 거야.”“서소월과 우리 스카이 스튜디오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됐어. 각자 돌아가 일해.”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박원근은 전화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그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 돌아오셨어. 대체 언제까지 꽁해 있을 거야?”핸드폰 너머로 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다 장소월 편이잖아. 난 실력도 소월이보다 떨어져서 스튜디오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 내가 떠났으니까 소월이를 불러오면 되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지 마. 내가 직접 교수님께 스튜디오를 그만두겠다고 말할게.”“장소월의 능력은 확실히 우리들보다 뛰어나. 그건 명백한 사실이야. 이번 장소월의 수상 소식은 너도 들었을 거야. 그 대회 금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그걸로 장소월의 실력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잖아? 서현아... 소월이는 우리의 막내 여동생이기도 해. 너도 알다시피 소월이는 너무 순진하고 단순해서 사회생활을 잘 못 해. 그리고 네가 소월이를 미워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
이제 허태현이 도착하는 일만 남았다.그가 온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허태현은 오랫동안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업계 최고 거장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분장실에서 서문정은 메이크업을 마치고 전시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태현이 열었던 전시회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성대했다.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얼굴에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준비하라고 한 건 다 준비됐어요?”“이미 준비됐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이리 가져와 봐요.” 서문정은 허태현이 반드시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확신하는 듯했다. 그녀는 경호원이 가져온 고풍스러운 그림을 펼쳐보았다. 이 그림은 조선 시대 유명 화가의 진품으로서 허태현이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명화였다.이 그림만 있으면 허태현은 반드시 그녀의 체면을 살려줄 것이다.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전연우가 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중, 잠시 한눈판 사이에 별이는 장소월 침대 쪽으로 기어가 옹알이를 했다. “엄마.”별이는 입에 침을 잔뜩 흘리며 장소월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 뽀뽀하려는 모양이다. 전연우는 휴지로 손을 깨끗이 닦은 뒤 한 손으로 별이를 안아 들었다.“나도 못 하는 뽀뽀를 네가 해?”전연우는 아이에게까지 질투를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기성은이 말했다. “대표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네가 빼앗긴 거 다시 가져올 테니 기다려.”별이의 옷도 전연우가 직접 입혔다. 몇 벌을 겹겹이 입힌 탓에 동그랗게 돌돌 굴러갈 것만 같았다.“엄마... 엄마...”별이는 전연우의 어깨에 엎드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울지는 않았다.누구랑 말하고 있는 걸까?“엄마...”“아가...” 장소월이 새하얀 빛이 만연한 한 곳에 서 있었다. 돌연 안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사라
“아이... 내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요!”“제 아이를 구해주세요...”“아가야... 엄마 여기 있어...”장소월은 제자리에 갇혀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그때 밖에서 한 사람이 들어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과 정말 닮았네요. 그 사람은 원래... 내 아내였어요.”“모두 그놈 때문이에요. 그놈이 내 아내를 빼앗아갔어요...”“다행히... 신이 다시 내게 그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당신을 선물해 주셨네요.”한의준은 떨리는 손을 뻗어 성예진과 지극히 닮은 얼굴에 매혹된 듯 몸을 숙여 그녀의 체취를 느꼈다. 그는 예전의 아름다웠던 장면을 추억하듯 눈을 감았다.“아이... 아이...”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가 갑자기 신음소리를 냈다.그녀의 아기는 죽지 않았다...그녀의 아기는 돌아왔다.별이가 바로 그녀의 아기였다.꿈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는지, 4개월 가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장소월이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눈물이 풍성하고 까만 속눈썹을 적셨다.장소월도 심장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느꼈다...옆방 별이의 울음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바닥엔 피가 가득 뒤덮였다...전시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났다.수많은 미디어가 허태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허태현 화가님 설마 안 오시는 건 아니겠죠?”“믿을 수 있는 소식은 맞을까요? 괜히 기다린 걸까요?”기자 중 한 명이 물었다. “서소월 씨, 허태현 교수님 정말 오시나요?”서문정은 마음속의 불만을 감추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이미 모시러 갔으니 마음 놓고 기다려 주세요.”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꼭 오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허태현은 미술 학원을 설립하려 하고 있다. 순조롭게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반드시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오기 싫어도 반드시 와야만 한다.15분 뒤, 허태현이 도착했다. 직접 지도했던 박원근과 주시윤 등 학생들과 함께 말이다.
서문정은 해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옆에 있던 경호원이 흰 장갑을 끼고 배나무로 만든 고풍스러운 색의 그림 상자를 손에 들고 왔다. 서문정이 꺼내려 한 순간, 허태현이 손을 들어 올려 그녀를 제지했다.“오늘은 그림만 보러 왔으니 다른 것은 필요 없어.”허태현은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그리고 웅장하게 넘실거리는 파도가 생동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 그림이 묘사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군. 이런 풍경은 흔치 않잖아.”아는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꽤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스승님, 저와 함께 저쪽으로 가 다른 그림을 보시지요.”허태현은 못마땅한 듯 툭 한 마디 내뱉었다. “어떻게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모를 수가 있어?”소현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건 자기가 그린 게 아니니까요.”허태현이 손을 흔들자 소현아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 그중 눈치를 챈 기자도 있었으나, 허태현이 막는 바람에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서문정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가씨, 말조심하세요. 여기는 마음껏 떠들어도 되는 시장이 아닙니다. 한 번만 더 선을 넘으면 경비원에게 얘기해 강제로 끌어낼 겁니다.”소현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허태현이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 볼까?”“이쪽입니다.” 서문정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의 시선 모두가 거대한 붉은 천으로 막은 그림으로 향했다. 경호원이 붉은 천을 걷어내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서문정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그림 속 인물은 얇은 흰 베일을 허리에 두르고, 매끈한 등을 드러낸 채, 팔짱을 끼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의 등에 흩어져있는 한올 한올 긴 머리카락까지... 모든 부분이 선명하고 뚜렷했다. 허리에 두른 천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까지도 생생히 그려져 있었다. 이는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