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빨리가 대체 어느 정도인데요?”“내 귀엔 날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말로밖에 안 들려요.”기성은이 화가 나 씩씩거리는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정확한 시간을 말해줘요. 기성은 씨가 말만 하면 3년이든 5년이든 기다릴 수 있어요. 오래 걸리는 건 상관없어요. 무서운 건 당신한테서 소식이 끊기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뎌야 하는 거예요.”“그런 의미 없는 일 때문에 싸우지 말고 일단 밥이나 먹자고요.”기성은은 빨랫감이 담긴 통을 들고 욕실에 들어가 모두 세탁기에 털어 넣었다.이렇듯 흐리멍덩하게 넘어가도록 가만히 놔둘 소민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욕실에 따라 들어가 그가 세탁기 문을 닫자마자 힘껏 그를 벽에 밀치고는 발뒤꿈치를 들고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도망친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날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하지만 기성은 씨한텐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요. 나와 혼인신고를 하든가, 아니면... 나와 아이를 낳든가.”“어림없는 소리.”기성은이 그녀를 밀쳤다. 소민아는 그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화장실 문을 막아섰다.“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엉켜야만 기성은 씨가 날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래요. 어디에 가든 항상 나랑 우리 아이를 생각할 거잖아요. 기성은 씨, 어젯밤 난 이미 당신 사람이 되었어요. 이제 죽을 때까지 나랑 선 그을 생각하지 말아요.”기성은은 소민아가 고집불통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철없고 아둔한지는 생각지 못했다.기성은이 목덜미를 잡힌 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나랑 결혼하겠다고요? 나에 대해 알기나 해요?”“말해요!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나에 관한 건 사전에 조사를 끝냈을 테니 기성은 씨도 잘 알겠죠. 제 가족관계는 간단해요. 종래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부모님, 절 키워주신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촌 언니 소현아. 기성은 씨도 다 아는 것들이잖아요!”“나한텐 아무것도 없어요. 이 집 밖에는.”소민아가 말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머릿속에 아직 주방에서 끓고 있는 죽이 떠올랐다. 기성은은 알몸으로 삽입한 상태로 한 손으로 소민아를 안고는 달려갔다. 그녀는 흥분감에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주방에 가보니 냄비 안의 죽이 모두 끓어올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마지막 관계를 끝낸 뒤, 소민아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가 한 시간 뒤에야 깨어났다. 시간이 늦어 밖에 나가 저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소민아는 그를 데리고 아파트 맞은편 백화점 안 샤부샤부 가게로 향했다. 지금 같은 겨울철엔 따뜻한 샤부샤부가 딱이다.“저 이미 우리 관계 고모한테 얘기했어요. 고모가 기성은 씨 만나고 싶다고 하시던데 시간 될 때 같이 가줄 수 있어요? 고모도 분명 당신 좋아할 거예요, 기성은 씨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으니까. 하지만 고모 앞에선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줘야 해요.”기성은은 몸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어 매운 것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소민아는 매운 것 절반, 맵지 않은 것 절반으로 주문했다. 또 그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고기와 야채를 골고루 시켰다.소민아는 이제 기성은의 침묵에 많이 익숙해졌다.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만 집중했다.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무언의 동의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이거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어요.”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엄청 평범한 메뉴잖아요. 길에도 널린 게 샤부샤부 가겐데.”기성은의 머릿속에 그의 과거가 떠올랐다.“예전의 나에게 이런 음식은 사치였어요. 내 기억 속 먹고 자던 곳은 어둡고 습한 지하실이었거든요. 거기엔 하수구에서 뛰어나온 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그리고 신체 곳곳이 떨어져 나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당시의 그에겐 배를 곯지 않는 것과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전연우가 없었다면, 그는 평생...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모든 건 더더욱 갖지 못했을 것이다.또한 소민아를 만났을 가능성
샤부샤부를 다 먹은 뒤, 소민아는 줄곧 기성은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하실, 쥐...대체 어떤 과거를 살았단 말인가.저녁 6시, 석양이 펼쳐지고 태양이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길가의 가로등들도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그때, 기성은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숨기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형님, 큰일 났습니다. 저희들의 은신처가 들통났습니다. 지금 경찰이 저희들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전 밀실에 숨어있기는 합니다만, 머지않아 우리 쪽 사람들과 자료들이 모두 경찰의 손에 들어갈 겁니다.”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리고 차갑게 소리를 내질렀다.“물건 다 태우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이번 일의 심각성을 제대로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그 돈에 눈먼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한탕 해 보려고 하는 바람에... 형님, 이만 전화 끊을게요. 경찰이 도착했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기성은은 곧바로 시스템에 접속해 모든 자료를 삭제했다.소민아가 걱정스레 물었다.“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경찰은 또 뭐고요? 기성은 씨,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예전 장씨 집안에서 세운 지하 도박장이에요. 거기에 고위급 인사들의 정보가 숨겨져 있거든요. 지금 내부에 문제가 생겨 관리하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갔어요. 내가 가서 처리해야 해요. 민아 씨는 먼저 돌아가요.”소민아는 급히 떠나려 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무슨 일이 있든 나한테 소식 전해야 해요. 나도 아는 아저씨들 많으니까 기성은 씨까지... 저도 당신을 구해낼 방법 찾아볼게요.”기성은이 소민아의 손을 밀어냈다.“나 말고는 아무에게도 문 열어주면 안 돼요. 자신을 잘 보호해야 해요. 위험한 것 같으면 남원별장에 가 있어요. 거기엔... 대표님께서 남긴 사람들이 있어요. 송시아라도 들어갈 수 없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만약 대표님이 이 모든 것을 예견하셨다면, 그가 가장 보호하고 싶은 건 장소월을 제외하면 남원별장 사람들일 것이다.
송시아가 빨간 입꼬리를 슥 올렸다. 눈가에 얼음장 같은 날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이왕 왔으니까 제 물건 가져가야겠어요.”송시아가 한 걸음 내딛자 주충재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소장님께서 이 집 주인 말고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 몰래 들어가려 한다면 북경 감옥 이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총을 쏠 수도 있습니다. 만에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저희 쪽도 시끄러워집니다.”송시아가 어찌 그 말 속의 위협을 모르겠는가. 그녀는 그저 웃음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전연우, 강지훈에게 남원별장을 지키라고 시킨 거야? 그래 좋아! 강지훈이 언제까지 지킬 수 있나 보자고! 장소월을 찾으면 반드시 그 시체를 네 앞에 가져갈 거야.’자리를 뜨려 몸을 돌리려던 순간, 그녀의 눈에 3층 창가 도우미에게 안겨있는 아이가 들어왔다.그녀는 화들짝 놀랐다.‘그 아이...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 봤을 거야.그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내 착각이 분명해.’송시아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소피아는 이렇게까지 얼이 빠진 듯한 송시아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부대표님, 왜 그러세요?”송시아가 차에 타자 소피아도 얼른 운전석에 올라탔다.“출... 출발해요!”소피아는 송시아의 명령에 따라 액셀을 밟았다.회사에 돌아가는 길, 송시아는 여전히 조금 전 그 장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대표 사무실 안.송시아는 대표 자리에 한참을 앉아있은 뒤에야 침착함을 되찾았다.“그 아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대체 누구죠?”소피아가 말했다.“부대표님, 그 아이는 대표님께서 보육원 문 앞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합니다. 예전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사모님은... 아니, 장소월 씨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 아이는 대표님이 장소월을 붙잡으려 데려왔고요.”“사진! 사진 가져와요!”소피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사진은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아이를
소피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송시아의 분노를 받아내며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얼마 후 송시아에게 대포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부대표님의 말씀대로 지하 암조직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전 장씨 집안의 조직이라는 말씀 왜 안 하셨습니까. 저흰 지금 장씨 집안을 건드렸습니다. 그건 성세 그룹 대표님을 건드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희에게 죄를 물어오면 저흰 살길이 없습니다. 왜 저희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으신 거냐고요!”송시아는 그들의 생사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내가 말했던 물건은? 왜 아직도 못 찾은 거야!”“부대표님, 지금 그 물건이 중요한가요?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부대표님이 찾으시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저희는 한동안 몸을 숨기고 있겠습니다. 더 무언가를 하시려 한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말을 마친 상대방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쓸모없는 것들.”송시아는 책상 위에 놓인 모든 물건을 쓸어내리고 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전연우 씨, 장소월을 위해 그 잡종을 주워오고, 강지훈의 사람들을 데려오면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그년한테 남긴 것들, 그리고 그 잡종까지 모두 숨통을 끊어 묻어버릴 테니까.”전연우의 성격이라면 분명 모든 재산을 장소월에게 넘기려 했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공들여 이룬 것들을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전연우 씨, 나 원망하지 말아요.’...소민아는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줄곧 좌불안석이었다. 가슴 속 불안감은 점점 더 강렬해지기만 했다.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았건만, 기성은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똑똑.소민아가 노크 소리를 들었다.“기성은 씨가 돌아온 건가?”그녀가 불도 켜지 않은 거실 안 소파에서 일어섰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한 순간, 머릿속에 그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내가 없을 땐 불 켜지 말아요. 누가 문을 두드리면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돼요. 상대방이 나에 관한 얘기
“안 돼. 내일 다시 얘기해. 여기 보안 시스템은 내가 잘 알아. 특정 열쇠로 열지 않으면 자동으로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들이닥치면 너한테도 나한테도 안 좋아.”소민아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천천히 멀어져가다가 복도 끝에서 사라진 발걸음 소리도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소민아는 온몸에 힘이 풀려 눈을 질근 감은 채 벽을 타고 스르륵 내려왔다. 지금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날 밤, 소민아는 손에 칼을 들고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집에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아 기성은의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추위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밤이 지나가고 유기견이 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아침 일곱 시였다.어젯밤 일을 떠올린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들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소민아는 서재에 들어가 CCTV 영상이 담긴 기성은의 컴퓨터를 보여주었다. 경찰 두 명은 핸드폰으로 어젯밤 문 앞에 찾아왔던 용의자의 얼굴을 찍었다.소민아는 누군가가 또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경찰에게 남원별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그들이 허락하자 그녀는 얼른 짐을 챙겨 경찰차에 앉았다.백미러로 살펴보니 역시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뒤쪽 차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쫓아오지 않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검은색 승용차 안, 목에 문신을 새긴 남자가 전화로 말했다.“누님, 소민아가 경찰차에 앉아서 가버렸는데 저흰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보아하니 누님 말씀대로 남원별장에 가는 것 같아요.”“알았어. 남은 일은 나한테 맡겨.”‘남원별장에 가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아?’송시아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면 약점이 없어야죠. 약점을 없애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환이 될 뿐이에요. 전연우 씨... 당신이 나한테 알려준 거잖아요.”송시아는
그녀는 강지훈과 맞설 수 없다.‘소민아, 자신 있으면 평생 남원별장에서 기어 나오지 마.’소민아는 경찰차를 타고 남원별장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막아서자 중년 아주머니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이봐요. 그 아가씨는 들여보내요. 내가 잘 아는데 좋은 사람이에요.”그 아주머니는 바로 품에 별이를 안고 있는 은경애였다.주충재가 사진과 소민아를 대조해보았다. 옆에 있던 부하가 그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여서야 소민아를 들여보냈다.소민아는 집에 들어가려던 순간, 풀숲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저 풀숲에서 누군가 몰래 사진 찍고 있어요. 빨리 잡아요.”발각된 그 남자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주충재가 그를 향해 공포탄을 쏘았다.“도망치면 머리에 총알 박아넣을 거야.”그 귀를 찌를 듯한 총성은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도 놀라 퍼덕이며 날아가게 만들었다.남자는 너무 놀라 오줌을 질질 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민아는 그 틈을 타 재빨리 그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살펴보았다. 안엔 별이의 사진들이 가득했다.소민아는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눈치챘다.“당신 누가 보낸 거예요?”“전 몰라요! 전 돈 받고 일만 하는 사람이니까 아무 상관도 없어요. 정말 모른다고요! 죽... 죽이지 말아주세요!”“핸드폰 연락처 보여줘요.”남자가 보여준 낯선 번호에 전화를 걸어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찍으라고 한 사진은 찍었어? 부대표님께서 직접 요구한 사진이야. 일이 잘못되면 가만 놔두지 않을 줄 알아!”소민아는 소피아임을 확신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아이의 사진이다.그녀는 그가 사진을 전송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부숴버렸다.송시아는 참으로 극악무도한 여자다. 아이에게까지 손을 쓰려 하다니. 다행히 소민아가 빠르게 발견했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민아 씨, 물 마시세요.”도우미가 고민에 잠겨 있던 소민아를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민아가 은경
소민아는 발아래 소파 앞 장난감을 쥐고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결혼식 날엔 너무 바빠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오늘 자세히 보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이 아이... 정말 대표님께서 보육원 문 앞에서 주워온 아이 맞나요? 바깥에서 다른 여자랑 낳은 사생아가 아니고요?”“아니면 소월 언니가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는 걸 잊어버렸을까요?”은경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아이고,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대표님의 비서도 증명해주실 수 있어요. 정말 대표님께서 주워온 아이 맞아요. 아가씨가 혼자 집에서 외로워할까 봐 키우라고 데려오셨어요.”“눈썹과 눈이 대표님과 소월 아가씨를 많이 닮았어요. 우연이겠죠.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많잖아요.”소민아가 물었다.“저 안아봐도 될까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별이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장난감을 내려놓고 소민아에게 걸어가 두 손을 벌렸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녀는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 도련님은 정말이지 대표님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그녀는 자세히 아이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눈이 대표님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리고 이 입술... 눈만 가리면 완전히 소월 언니잖아요.”“두 사람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 정말 믿기 힘드네요.”“민아 씨, 도련님이 민아 씨가 좋은가 보네요. 이 별장 안에서 대표님과 아가씨 외에 누구 품에 안겨도 울음을 터뜨리시거든요.”“대표님께선 이 아이와 친자 검증 해보셨나요?”“해보셨을 리가 없죠. 바깥에서 주워왔으니 당연히 혈연관계는 아닐 거잖아요.”소민아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소월 언니와 대표님 두 분 모두 친자 검증 안 하셨다는 거죠?”은경애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집 안에서 소월 언니 머리카락 찾을 수 있어요? 대표님의 것도 상관없어요. 제가 보기에 한 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에 하나... 정말 친자식이면요?”은경애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민아 씨,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제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