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는 온몸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관계가 처음이었으니 적응되지 않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새 잠옷을 갈아입고 살펴보니 옆에 누워 있던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밖에서 전해져오는 인기척을 들은 소민아는 침대에서 일어서려다가 멈추었다. 침대 옆엔 연고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이었다.기성은도 이렇게 세심할 때가 있다.그의 상처가 떠오른 소민아는 얼른 신발을 신고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거실 식탁 위 쓰레기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기성은은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소민아가 살금살금 다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좋은 아침이에요! 내... 남자친구!”기성은이 말했다.“냄비 안에 죽 있으니까 먼저 먹어요.”소민아는 그의 말투에서 부자연스러움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틀림없이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다. 이미 귀까지 새빨개져 있지 않은가.두 사람의 몸에선 같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바로 어젯밤 그 바디워시의 향기다.이제 그녀는 진정으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소민아는 그가 직접 만든 죽을 맛보았다. 농도가 걸쭉해 한 그릇 먹으니 배가 불러왔다.기성은은 아직 소파 쪽 어지러운 곳을 치우고 있었다. 무언가에 물든 카펫을 본 그는 들어 올려 빨래통에 넣었다.“그건 내가 빨게요. 거기에 놓으면 돼요.”그때, 기성은이 말했다.“나 한동안 떠나있어야 해요.”“어디로요?”“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야죠.”대표님은 지금 송시아의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소민아가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기성은 씨 머릿속엔 회사랑 대표님밖에 없어요? 당신과 내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본 적 있어요? 나랑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 꾸리고, 귀여운 아기도 낳는... 그런 건 전혀 생각도 안 하나요?”그의 침묵은 소민아에게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대답이 되어주었다.“기성은 씨, 나랑 결혼할 거예요, 말
“최대한 빨리가 대체 어느 정도인데요?”“내 귀엔 날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말로밖에 안 들려요.”기성은이 화가 나 씩씩거리는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정확한 시간을 말해줘요. 기성은 씨가 말만 하면 3년이든 5년이든 기다릴 수 있어요. 오래 걸리는 건 상관없어요. 무서운 건 당신한테서 소식이 끊기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뎌야 하는 거예요.”“그런 의미 없는 일 때문에 싸우지 말고 일단 밥이나 먹자고요.”기성은은 빨랫감이 담긴 통을 들고 욕실에 들어가 모두 세탁기에 털어 넣었다.이렇듯 흐리멍덩하게 넘어가도록 가만히 놔둘 소민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욕실에 따라 들어가 그가 세탁기 문을 닫자마자 힘껏 그를 벽에 밀치고는 발뒤꿈치를 들고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도망친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날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하지만 기성은 씨한텐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요. 나와 혼인신고를 하든가, 아니면... 나와 아이를 낳든가.”“어림없는 소리.”기성은이 그녀를 밀쳤다. 소민아는 그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화장실 문을 막아섰다.“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엉켜야만 기성은 씨가 날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래요. 어디에 가든 항상 나랑 우리 아이를 생각할 거잖아요. 기성은 씨, 어젯밤 난 이미 당신 사람이 되었어요. 이제 죽을 때까지 나랑 선 그을 생각하지 말아요.”기성은은 소민아가 고집불통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철없고 아둔한지는 생각지 못했다.기성은이 목덜미를 잡힌 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나랑 결혼하겠다고요? 나에 대해 알기나 해요?”“말해요!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나에 관한 건 사전에 조사를 끝냈을 테니 기성은 씨도 잘 알겠죠. 제 가족관계는 간단해요. 종래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부모님, 절 키워주신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촌 언니 소현아. 기성은 씨도 다 아는 것들이잖아요!”“나한텐 아무것도 없어요. 이 집 밖에는.”소민아가 말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머릿속에 아직 주방에서 끓고 있는 죽이 떠올랐다. 기성은은 알몸으로 삽입한 상태로 한 손으로 소민아를 안고는 달려갔다. 그녀는 흥분감에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주방에 가보니 냄비 안의 죽이 모두 끓어올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마지막 관계를 끝낸 뒤, 소민아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가 한 시간 뒤에야 깨어났다. 시간이 늦어 밖에 나가 저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소민아는 그를 데리고 아파트 맞은편 백화점 안 샤부샤부 가게로 향했다. 지금 같은 겨울철엔 따뜻한 샤부샤부가 딱이다.“저 이미 우리 관계 고모한테 얘기했어요. 고모가 기성은 씨 만나고 싶다고 하시던데 시간 될 때 같이 가줄 수 있어요? 고모도 분명 당신 좋아할 거예요, 기성은 씨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으니까. 하지만 고모 앞에선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줘야 해요.”기성은은 몸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어 매운 것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소민아는 매운 것 절반, 맵지 않은 것 절반으로 주문했다. 또 그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고기와 야채를 골고루 시켰다.소민아는 이제 기성은의 침묵에 많이 익숙해졌다.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만 집중했다.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무언의 동의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이거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어요.”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엄청 평범한 메뉴잖아요. 길에도 널린 게 샤부샤부 가겐데.”기성은의 머릿속에 그의 과거가 떠올랐다.“예전의 나에게 이런 음식은 사치였어요. 내 기억 속 먹고 자던 곳은 어둡고 습한 지하실이었거든요. 거기엔 하수구에서 뛰어나온 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그리고 신체 곳곳이 떨어져 나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당시의 그에겐 배를 곯지 않는 것과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전연우가 없었다면, 그는 평생...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모든 건 더더욱 갖지 못했을 것이다.또한 소민아를 만났을 가능성
샤부샤부를 다 먹은 뒤, 소민아는 줄곧 기성은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하실, 쥐...대체 어떤 과거를 살았단 말인가.저녁 6시, 석양이 펼쳐지고 태양이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길가의 가로등들도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그때, 기성은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숨기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형님, 큰일 났습니다. 저희들의 은신처가 들통났습니다. 지금 경찰이 저희들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전 밀실에 숨어있기는 합니다만, 머지않아 우리 쪽 사람들과 자료들이 모두 경찰의 손에 들어갈 겁니다.”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리고 차갑게 소리를 내질렀다.“물건 다 태우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이번 일의 심각성을 제대로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그 돈에 눈먼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한탕 해 보려고 하는 바람에... 형님, 이만 전화 끊을게요. 경찰이 도착했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기성은은 곧바로 시스템에 접속해 모든 자료를 삭제했다.소민아가 걱정스레 물었다.“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경찰은 또 뭐고요? 기성은 씨,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예전 장씨 집안에서 세운 지하 도박장이에요. 거기에 고위급 인사들의 정보가 숨겨져 있거든요. 지금 내부에 문제가 생겨 관리하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갔어요. 내가 가서 처리해야 해요. 민아 씨는 먼저 돌아가요.”소민아는 급히 떠나려 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무슨 일이 있든 나한테 소식 전해야 해요. 나도 아는 아저씨들 많으니까 기성은 씨까지... 저도 당신을 구해낼 방법 찾아볼게요.”기성은이 소민아의 손을 밀어냈다.“나 말고는 아무에게도 문 열어주면 안 돼요. 자신을 잘 보호해야 해요. 위험한 것 같으면 남원별장에 가 있어요. 거기엔... 대표님께서 남긴 사람들이 있어요. 송시아라도 들어갈 수 없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만약 대표님이 이 모든 것을 예견하셨다면, 그가 가장 보호하고 싶은 건 장소월을 제외하면 남원별장 사람들일 것이다.
송시아가 빨간 입꼬리를 슥 올렸다. 눈가에 얼음장 같은 날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이왕 왔으니까 제 물건 가져가야겠어요.”송시아가 한 걸음 내딛자 주충재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소장님께서 이 집 주인 말고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 몰래 들어가려 한다면 북경 감옥 이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총을 쏠 수도 있습니다. 만에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저희 쪽도 시끄러워집니다.”송시아가 어찌 그 말 속의 위협을 모르겠는가. 그녀는 그저 웃음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전연우, 강지훈에게 남원별장을 지키라고 시킨 거야? 그래 좋아! 강지훈이 언제까지 지킬 수 있나 보자고! 장소월을 찾으면 반드시 그 시체를 네 앞에 가져갈 거야.’자리를 뜨려 몸을 돌리려던 순간, 그녀의 눈에 3층 창가 도우미에게 안겨있는 아이가 들어왔다.그녀는 화들짝 놀랐다.‘그 아이...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 봤을 거야.그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내 착각이 분명해.’송시아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소피아는 이렇게까지 얼이 빠진 듯한 송시아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부대표님, 왜 그러세요?”송시아가 차에 타자 소피아도 얼른 운전석에 올라탔다.“출... 출발해요!”소피아는 송시아의 명령에 따라 액셀을 밟았다.회사에 돌아가는 길, 송시아는 여전히 조금 전 그 장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대표 사무실 안.송시아는 대표 자리에 한참을 앉아있은 뒤에야 침착함을 되찾았다.“그 아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대체 누구죠?”소피아가 말했다.“부대표님, 그 아이는 대표님께서 보육원 문 앞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합니다. 예전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사모님은... 아니, 장소월 씨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 아이는 대표님이 장소월을 붙잡으려 데려왔고요.”“사진! 사진 가져와요!”소피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사진은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아이를
소피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송시아의 분노를 받아내며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얼마 후 송시아에게 대포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부대표님의 말씀대로 지하 암조직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전 장씨 집안의 조직이라는 말씀 왜 안 하셨습니까. 저흰 지금 장씨 집안을 건드렸습니다. 그건 성세 그룹 대표님을 건드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희에게 죄를 물어오면 저흰 살길이 없습니다. 왜 저희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으신 거냐고요!”송시아는 그들의 생사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내가 말했던 물건은? 왜 아직도 못 찾은 거야!”“부대표님, 지금 그 물건이 중요한가요?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부대표님이 찾으시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저희는 한동안 몸을 숨기고 있겠습니다. 더 무언가를 하시려 한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말을 마친 상대방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쓸모없는 것들.”송시아는 책상 위에 놓인 모든 물건을 쓸어내리고 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전연우 씨, 장소월을 위해 그 잡종을 주워오고, 강지훈의 사람들을 데려오면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그년한테 남긴 것들, 그리고 그 잡종까지 모두 숨통을 끊어 묻어버릴 테니까.”전연우의 성격이라면 분명 모든 재산을 장소월에게 넘기려 했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공들여 이룬 것들을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전연우 씨, 나 원망하지 말아요.’...소민아는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줄곧 좌불안석이었다. 가슴 속 불안감은 점점 더 강렬해지기만 했다.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았건만, 기성은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똑똑.소민아가 노크 소리를 들었다.“기성은 씨가 돌아온 건가?”그녀가 불도 켜지 않은 거실 안 소파에서 일어섰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한 순간, 머릿속에 그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내가 없을 땐 불 켜지 말아요. 누가 문을 두드리면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돼요. 상대방이 나에 관한 얘기
“안 돼. 내일 다시 얘기해. 여기 보안 시스템은 내가 잘 알아. 특정 열쇠로 열지 않으면 자동으로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들이닥치면 너한테도 나한테도 안 좋아.”소민아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천천히 멀어져가다가 복도 끝에서 사라진 발걸음 소리도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소민아는 온몸에 힘이 풀려 눈을 질근 감은 채 벽을 타고 스르륵 내려왔다. 지금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날 밤, 소민아는 손에 칼을 들고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집에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아 기성은의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추위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밤이 지나가고 유기견이 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아침 일곱 시였다.어젯밤 일을 떠올린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들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소민아는 서재에 들어가 CCTV 영상이 담긴 기성은의 컴퓨터를 보여주었다. 경찰 두 명은 핸드폰으로 어젯밤 문 앞에 찾아왔던 용의자의 얼굴을 찍었다.소민아는 누군가가 또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경찰에게 남원별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그들이 허락하자 그녀는 얼른 짐을 챙겨 경찰차에 앉았다.백미러로 살펴보니 역시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뒤쪽 차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쫓아오지 않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검은색 승용차 안, 목에 문신을 새긴 남자가 전화로 말했다.“누님, 소민아가 경찰차에 앉아서 가버렸는데 저흰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보아하니 누님 말씀대로 남원별장에 가는 것 같아요.”“알았어. 남은 일은 나한테 맡겨.”‘남원별장에 가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아?’송시아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면 약점이 없어야죠. 약점을 없애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환이 될 뿐이에요. 전연우 씨... 당신이 나한테 알려준 거잖아요.”송시아는
그녀는 강지훈과 맞설 수 없다.‘소민아, 자신 있으면 평생 남원별장에서 기어 나오지 마.’소민아는 경찰차를 타고 남원별장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막아서자 중년 아주머니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이봐요. 그 아가씨는 들여보내요. 내가 잘 아는데 좋은 사람이에요.”그 아주머니는 바로 품에 별이를 안고 있는 은경애였다.주충재가 사진과 소민아를 대조해보았다. 옆에 있던 부하가 그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여서야 소민아를 들여보냈다.소민아는 집에 들어가려던 순간, 풀숲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저 풀숲에서 누군가 몰래 사진 찍고 있어요. 빨리 잡아요.”발각된 그 남자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주충재가 그를 향해 공포탄을 쏘았다.“도망치면 머리에 총알 박아넣을 거야.”그 귀를 찌를 듯한 총성은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도 놀라 퍼덕이며 날아가게 만들었다.남자는 너무 놀라 오줌을 질질 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민아는 그 틈을 타 재빨리 그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살펴보았다. 안엔 별이의 사진들이 가득했다.소민아는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눈치챘다.“당신 누가 보낸 거예요?”“전 몰라요! 전 돈 받고 일만 하는 사람이니까 아무 상관도 없어요. 정말 모른다고요! 죽... 죽이지 말아주세요!”“핸드폰 연락처 보여줘요.”남자가 보여준 낯선 번호에 전화를 걸어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찍으라고 한 사진은 찍었어? 부대표님께서 직접 요구한 사진이야. 일이 잘못되면 가만 놔두지 않을 줄 알아!”소민아는 소피아임을 확신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아이의 사진이다.그녀는 그가 사진을 전송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부숴버렸다.송시아는 참으로 극악무도한 여자다. 아이에게까지 손을 쓰려 하다니. 다행히 소민아가 빠르게 발견했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민아 씨, 물 마시세요.”도우미가 고민에 잠겨 있던 소민아를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민아가 은경
강용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태연하게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 같네요!” “손님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죠? 아까 싸움을 벌였던 놈들은 이 지역 갱단이에요. 그놈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부정당한 수단으로 돈을 벌어놓고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싸움이 벌어진 거더라고요. 이곳 밤은 위험하니까 함부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고를 꺼내 등에 나 있는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강용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귀로 들었죠.” 그의 등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 두 군데가 더 있었다. 장소월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 아까는 제가 신세를 졌어요.” 그는 차갑게 거절했다. “됐어요. 당신들 같은 외지인들은 알아서 몸조심이나 하세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었다. 조금 전 난동을 부린 사람들은 이미 경찰차에 태워져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경찰들과 현지 방언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아는 무서움에 딸꾹질을 하며 장소월의 뒤에 몸을 숨겼다. “소월아, 저 사람들 뭐라고 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묻는 것 같아. 저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설명해 주고 있어.” 바깥에 있던 가게 사장도 구급차에 실려 갔다. 시끄러움이 가라앉은 뒤 문밖에 나가보니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엔 핏자국이 흥건했고, 아까 총을 맞은 사람의 허연 뇌수까지 흩뿌려져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경찰들이 떠나자 그가 몸을 돌려 말했다. “이제 돌아가도 돼요.” 이어 그는 부엌에서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 핏자국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그의 분주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느낌이 틀린 걸까? 그래. 오만하기 그지없는 전연우가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분명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정말로 전연우라면 저토록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밤 8시 30분, 강용은 갑자기 확인하려는 충동이 생겼는지 야식을 먹으러 건너편 국숫집으로 향했다. 이 시간대에는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막 근처라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녔지만, 밤에는 목도리를 둘러야 했다. 장소월은 니트 롱스커트와 옅은 색 코트 차림에, 목에 두른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으로 여행 온 한국인들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반년 이상 머무른 주민들이었다. 가게 밖에선 손님들이 작고 낮은 의자에 앉아 야식을 즐기고 있었고, 그 옆에선 사장이 기타를 들고 이곳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장소월은 거의 6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간신히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기 중에는 꼬치구이를 만들 때 피어오른 짙은 연기가 매캐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소현아는 임신 중이라 이런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몸에 해롭기 때문에 따로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주었다. 장소월은 또다시 낮에 주문했던 만둣국을 시켰다. 가게에는 종업원이 한 명, 요리사가 두 명 있었다. 만둣국이 나오자 장소월은 만두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강용이 물었다. “왜 그래? 맛이 없어?”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럼 말해 봐. 내가 만든 거랑 이것 중에 뭐가 더 맛있어? 말 잘해. 아니면 다신 안 해줄 거야.”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어.” “그래야지.” “다 못 먹겠으면 나한테 줘. 먹던 거라도 상관없어.” 이 만두의 맛, 그리고 안에 들어간 속 재료까지, 전생에 그녀가 만들었던 만두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갑자기 앞 테이블에 있던 술 취한 남자 두 명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주먹까지 오가기 시작하자 사장이 재빨리 달려가 말렸다. 결국 두 사람 싸움은 패싸움으로 번졌고,
장소월이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간단히 대답을 마치고 차갑게 몸을 돌렸다. 강용이 탁자 위에 국수를 올려놓았다. 장소월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국수 위에 떠 있는 파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용은 재빨리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그녀 옆에 앉았다. “너 많이 못 먹잖아. 남은 건 내가 처리해줄게.” 소현아가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위층에서 내려와 킁킁거리며 말했다.“음! 맛있는 냄새! 소월아, 뭐 먹고 있어? 나도 먹을래.” “바보야, 정신 차려! 겨우 국수 한 그릇인데, 세 명이서 나눠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소현아가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조금만 먹을게.” 소현아는 얼른 달려가 젓가락을 가져왔고,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장소월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강용이 말했다. “국물만 좀 남겨줘.” 소현아가 말했다. “나도 국물.” “파 싫으면 나한테 줘.” “파 싫으면 나한테 줘.” “바보야, 남의 말은 왜 따라해!”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얘 나한테 욕했어. 그러니까 얘한테 면 좀 조금만 주고 나한테 많이 줘.”장소월이 말했다. “그래. 내 국수 나눠줄게.” “역시 소월이가 최고야!” 건너편 국숫집 안,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별이는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여자아이 변장을 하고 있어 본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딸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넌 계속 이런 모습으로 지내.” 별이는 손으로 유리를 긁으며 작은 얼굴 전체를 유리에 바짝 붙인 채 조용히 맞은편 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눌한 발음으로 옹알거리고 있었다. “엄마...”“괜찮아, 곧 만나게 될 거야.” “소월아...” 장소월은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줄곧 지워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다. 최근 예민함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걸까. 세 사람은 국수 한 그릇을 2분
“아니요. 저희가 새로 고용한 요리사 딸입니다. 와이프가 전 재산 다 훔쳐서 도망갔다고 하더라고요. 돈 한 푼 없이 저희 가게에 와서 일자리를 구하길래, 딱한 마음에 거둬서 일을 시키고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요리 솜씨는 정말 일품입니다. 저녁에는 바깥에 나오기 싫으신 손님들을 위해 야식 배달 서비스도 제공합니다. 가정식 요리는 뭐든 다 가능합니다.” “아기 안아 보셔도 돼요.” 장소월은 손목을 만지작거리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 팔이 안 좋아서요. 떨어뜨릴까 봐 겁나요.” “아... 엄마...” “안아...”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이름이 뭐니?” “태명은 월이라고 하더라고요. 밤에 태어나서 대충 그렇게 지었대요.” 월이라고? 정말 우연인 걸까? 띵. “국수 나왔습니다.” 낯선 목소리였다. 장소월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리사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짧게 자른 머리, 그리고 뒷모습이 그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장소월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피어올랐다. “아가씨, 국수 나왔습니다.” “저... 저 안 먹을래요.” 장소월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황급히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이봐요. 아가씨, 돈도 이미 내잖아요.” 장소월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앞만 보고 뛰어갔다. 사장이 쫓아 나가 보니, 그녀는 한 민박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참나, 내가 이 가게를 10년 넘게 운영해왔지만, 요리사 보고 도망가는 사람은 처음이야.” 사장은 투덜거리며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냄비를 씻고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보며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당장 저 국수 조금 전 아가씨한테 갖다 줘. 국수가 불어서 내 가게 체면 떨어지면, 월급 제대로 못 받을 줄 알아.” 강용은 장소월을 찾아 나서려던 참에 막 국숫집에서 돌아온 그녀를 발견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래?”
전연우는 깨어났고, 아무런 탈 없이 병원에서 퇴원했다고 한다. 대형 스크린에는 그의 뉴스가 쉴 새 없이 보도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전연우가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고, 회사 전체를 기성은에게 넘겼다는 소식도 포함되어있었다! 처음에는 강용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성세 그룹...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짓밟고 올라선 그 자리를 지금 순순히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고? 그렇다면 과거 그가 했던 모든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장소월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강용은 그녀를 데리고 옆으로 빠져나와 양손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더는 그놈 생각하지 마! 지금 삶이야말로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어? 네가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데! 설마 다시 그놈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지?” 장소월은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한 채,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얼른 돌아가자. 우리가 오랫동안 안 보이면 현아 걱정할 거야.” 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전연우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 공포, 두려움, 안도감, 그리고 안타까움... 그녀는 전연우가 아니다. 당시 그녀는 분명 전연우를 죽일 생각이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어쩌면 전연우의 말처럼, 그녀는 영원히 약해빠진 마음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약함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화를 입을 수도 있다.불안한 한 달이 흘러갔다. 그 시간 동안, 장소월은 그의 소식을 다시 들을까 봐 두려워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소현아의 배는 점점 더 불러왔고, 병원 검사 결과 이란성 쌍둥이로 판명되었다.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 한 명 모두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식사량도 점점 늘어났다. 소현아는 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위층에서 허둥지둥 뛰어 내려왔다. “큰일 났어, 큰일 났어... 강용, 소월이가 없어졌어.” 강용은 즉시 소파에서
장소월은 장을 보러 시장에 나갔다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강용은 이미 부엌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동안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강용이 직접 요리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전에 했던 말 때문인지,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다. 이런 평온한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계속 그녀 곁에 있는 것은 강용에겐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강용이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보고 싶으면 가까이 와서 봐.” “그렇게 몰래 훔쳐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데.” 장소월이 안으로 들어가 손에 들고 있던 식재료를 내려놓자, 강용은 자연스럽게 받아들고 씻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계속 그녀 곁에 머물 생각인 걸까?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됐어. 그런 건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강용이 팔을 걷어 올려 팔뚝을 드러내며 말했다. “장소월, 경고하는데 또다시 날 버리고 떠날 생각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런 적 없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거야. 그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장소월은 간단하게 몇 가지 요리를 했다. 현아는 임신한 몸이라 충분한 영양을 보충해줘야 하기에 족발과 백숙도 준비했다.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척박한 환경에서 이런 재료를 구했다는 건 여간 운 좋은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남원 별장. 전연우는 회사 일에 완전히 손을 떼고 모두 기성은에게 일임했다. 서재에서 전연우가 별이를 무릎에 앉히고 글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별이는 벌써 세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성은이 물었다. “대표님,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별이는 전연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 이토록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느낌... 장소월은 처음이 아니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선 강용이 보였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를 향해, 장소월은 심호흡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언제 왔어? 소리도 없이!” 강용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바람 때문에 문이 열렸더라고. 소리가 들려서 와봤어.” “그럼 현아는?” 강용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걔 걱정은 안 해도 돼. 돼지처럼 쿨쿨 자고 있어.” 장소월의 말투가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용!” “알았어, 알았어. 최대한 참아볼게. 하지만 말인데,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설마 정말 아이까지 낳게 하려고? 나중에 결국 우리 둘 중 한 명이 키울 거잖아. 소현아 한 명 데리고 다니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장소월이 말했다. “그 아이는 현아의 목숨, 더 나아가 소씨 가문의 운명까지 구할 수도 있어.” 강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강지훈은 전연우보다 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이야. 전연우라면 어쩌면 살아남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강지훈은 가차 없이 죽여버릴 거야. 그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살길을 열어주지 않거든. 혹시 어느 날 현아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어쩌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 용서해줄지도 몰라.” “하지만 강지훈이 아예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건데? 소현아와 배 속 아이 모두 화를 입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도 했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없어. 강지훈이 현아를 마음에 두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면 현아를 해치지 않을 테고, 아이는 더더욱 무사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그 아인 강지훈의 핏줄이잖아.” “강지훈은 승부욕이 센 사람이라 전연우와 겨루는 걸 좋아해. 전연우에겐 아이가 있는데 그 사람에겐 없잖아. 그래서 좀 더 확신하게 된 거
남원 별장 버려진 창고 안, 전연우는 눈앞 당황함에 어쩔 줄 모르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너도 무서운 건 있는가 보네.” 이곳은 예전 장소월이 갇혀 있던 곳이다. 그 오랜 시간 얼마나 외롭게 버텨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여자가 울부짖으며 애원하고 있음에도,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자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른 전생의 기억들이 그가 장소월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는 장소월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그녀의 사랑을 함부로 짓밟고 그녀의 모든 것을 무시해 버렸었다. 그녀가 혼자 외롭게 병들어 죽어간 그 순간에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죽어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숨을 거둔 순간 그녀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8년의 결혼 생활 동안,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한 번, 또 한 번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제 그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돌아왔다. 지금의 송시아를 포함해 과거 그녀의 등에 칼을 꽂은 놈들 모조리 그의 손으로 직접 제거할 생각이었다. “여기 들어오고 싶어 했던 거 아니었어? 목적을 달성했는데 기쁘지 않아?” 송시아의 주위엔 험악한 인상의 건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전연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이어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신 애초부터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날 감쪽같이 속인 거고요? 난 당신한테 최선을 다했어요. 전연우 씨... 내 뱃속에 우리 아이가 있다는 거 잊으면 안 돼요.” “또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송시아... 전생에 쓰던 그 더러운 수법이 이번에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전생... 그 단어가 전연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송시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말도 안 돼. 당신까지 환생했을 리 없어.” 남자는
언제부터 문밖에 서 있었는지 모를 강용이 갑자기 나타나 시선을 내리깔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소월은 소현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밥 먹고 있어.”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가서 그릇이랑 젓가락 갖춰놓을게.” 장소월이 문 앞까지 걸어 나가자 강용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그건 너무 위험해. 강지훈이 세상 곳곳을 뒤져서 소현아의 행방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소현아에, 그 아이까지 계속 곁에 두는 건, 우리 위치를 드러내는 꼴밖에 안 돼. 너... 설마 다시 잡혀가고 싶은 건 아니지?” “그 외에 우리한테 다른 방법이 있을까? 나는 현아가 서울로 돌아가 강지훈에게 잡혀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강지훈은 그 사람과...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거든! 절대 현아의 아이를 살려두지 않을 거야. 어쩌면 현아까지 목숨을 잃게 될 지도 몰라.” “강용, 강지훈이든 그 사람이든 모두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놈들 말 한마디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어. 저항할 수 없으니,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현아는 바보가 아니야, 그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일 뿐이지. 누군가 천천히 가르쳐 준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네가 현아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난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강용이 되물었다. “소현아 때문에 다시 잡혀가게 될까 봐 두렵지도 않아?”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두려운 건,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너희 모두 위험에 빠지는 거야. 강용... 나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5년 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어, 내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하지만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사실 그녀가 낙일 마을에 간 이유는 강영수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