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는 서류와 사진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자신과 신이랑이 함께 회사에서 나오는 사진을 보니 심장이 떨려왔다.“왜 이런 사진을 찍은 거예요? 기성은 씨, 뒤에서 무슨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한테 알려줄래요? 내가 도울 수도 있잖아요.”기성은이 덤덤하게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민아 씨뿐만 아니라 송시아의 일거수일투족도 내 통제하에 있어야 해요. 이번 일은 안다고 해도 민아 씨한테 좋을 것 없어요. 난 민아 씨한테 이 사진의 목적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민아 씨는 이미 오래전에 이번 일에 연루되었어요. 이제 와 벗어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송시아는 언제든 민아 씨한테 손을 쓸 수 있어요. 알겠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저도 그리 나약한 사람은 아니에요.”그녀는 기성은의 옆에 앉아 차가운 그의 손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무슨 일이든 난 성은 씨와 함께 견뎌내고 싶어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성은 씨는 절대 날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나한테 무슨 위험이 닥치든 바로 달려와 구해줄 거잖아요.”“정말 겁도 없는 여자라니까.”한결 부드러워진 기성은의 말투에서 소민아는 그가 마음속으로 자신을 받아들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성은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기성은의 깊은 눈동자에 예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소민아의 모습이 담겼다.“참, 이 서류는 뭐예요? 아까 저랑 상관있다고 했으니까 뜯어봐도 되죠!”기성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다음번에요. 서류 잘못 가져왔어요.”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물었다.“그럼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거예요? 대체 누가 성은 씨를 해친 거예요? 우리... 신고 안 해요?”신고? 기성은은 이렇듯 순진한 사람은 종래로 본 적이 없다.그가 말했다.“송시아가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그게
“대표님의 유서에는 대체 뭐가 쓰여 있길래 송시아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성은 씨 상처만 보면 마음 아파 미치겠다고요!”기성은은 하나하나 그녀의 질문에 답하며 모든 것을 정리해 나갔다.“사고가 있던 날, 모든 사람들은 당황하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유독 나만은 그럴 수 없었어요. 만약 대표님이 다쳤다는 소식이 새어나가면 성세 그룹 국내외 백여만 명의 직원들이 영향을 받게 될 테니까요.”그의 말에 소민아는 예전의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곧 그가 무정하다며 원망만 했지, 얼마나 큰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지는 헤아리지 못했다.“만약 정말 유서라고 해도 이상하잖아요! 성은 씨는 대표님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에요. 왜 성은 씨한테 얘기하지 않았겠어요? 제일 궁금한 건 유서에 무슨 내용을 썼느냐예요. 설마 유산 상속일까요?”소민아는 조심스레 기성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대표님한테 대체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있어요?”“알고 싶어요?”“그냥 궁금해서요. 단지 돈이 많다는 것만 알지 그 액수는 상상도 못 하겠어요. 대표님이 소월 언니한테 준 그 결혼반지만 해도 몇백억이잖아요.”“장소월을 찾으면 다 알게 되지 않겠어요?”“하지만, 제가 소월 언니를 찾는 순간 송시아도 찾게 될 거예요. 그럼 소월 언니가 위험해지는 거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몇 년 동안 편히 지내게 하다가 대표님이 깨어나셨을 때 다시 얘기하는 게 나아요.”기성은은 피곤함이 깃든 얼굴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이 여자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있단 말인가?“나가요. 나 쉬고 싶어요.”“이 늦은 시간에 쫓아낸다고요?”기성은의 잠옷을 몸에 걸친 소민아는 뻔뻔하게 이불을 들어 올리고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오늘 밤엔 같이 자요! 저도 피곤하단 말이에요.”기성은은 침대에 앉아있었음에도 그녀보다 빠르지 못했다. 소민아가 머리만 이불 밖에 빼꼼 내놓고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공간 조금만 내어주면 안 돼요? 기성은 씨 상처에 닿을까 봐 걱정돼요.”
소민아는 오랜만에 평온하게 다음 날 아침까지 숙면을 취했다. 이불 속에서 허리를 펴다가 차갑게 식은 옆자리에 손이 닿은 순간 무언가 생각났는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단번에 잠을 깨고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거실로 달려나갔다.주방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옷 차림의 그가 한 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르려 하자 그녀는 빠르게 뛰어가 그의 손에서 주전자를 빼앗고 컵에 따라주었다.“여기요.”소민아가 건네준 컵을 받은 뒤, 기성은의 시선이 슬리퍼도 신지 못한 그녀의 맨발에 닿았다.“집에서도 이미지 챙겨야죠. 얼른 가서 신발 신어요.”소민아는 금방 잠에서 깨었던지라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작게 중얼거렸다.“성은 씨가 도망쳤을까 봐 놀라서 그랬잖아요.”그녀는 기성은의 뒤를 따라 주방에서 나갔다. “기성은 씨 상처는 2주 정도는 지나야 회복될 거예요. 집에 붕대도 다 떨어졌으니까 같이 사러 나갈래요? 나가서 가끔씩 햇빛 쪼임도 해야 해요. 집에만 있어도 안 좋아요.”기성은은 늘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아이에게 훈계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기성은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갑 침대 옆에 있으니까 가져가서 사고 싶은 거 사요. 난 할 일이 있어요.”“안 돼요. 꼭 저랑 같이 나가야 해요. 아니면 저 이제 밥 안 할 거예요.”그녀를 보고 있는 기성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사람에겐 종래로 보인 적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기성은은 결국 빠져나가지 못하고 소민아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섰다. 그녀는 출발하기 전 그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머리 좀 숙여봐요. 기성은 씨 키 너무 커요.”기성은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민아는 목도리를 그의 어깨에 올린 뒤 힘껏 당겨와 끝을 묶었다. 힘이 꽤나 셌는지 기성은의 몸이 흔들거렸다.“앞으로 또 이상한 생각 하면 밧줄로 목을
송시아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3일 안에 끝내.”상대방이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네, 부대표님.”장소월, 영원히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내가 절대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너를 도운 사람들은 모두 전생에서 네 편에 섰던 사람들처럼 너 때문에 죽어갈 거야.송시아는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난 뒤 병원으로 향했다.경호원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병실 안, 간호사가 혼수상태의 남자에게 주사를 놔준 뒤 의료용품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그때 마침 병실로 향하고 있던 송시아와 마주쳤다.“부대표님.”간호사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본 송시아의 이마가 조금 찌푸려졌다.“고생했어요. 연우 씨 상태는 어떤가요?”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듯한 처음 보는 간호사였다. 송시아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아래위로 그녀를 훑어보았다.간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의 몸은 이제 거의 회복되었고, 위험에선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대표님은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고 계시니 틀림없이 빠른 시일 내에 깨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송시아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말을 꽤 잘하네요. 앞으로는 연우 씨 담당 간호사로 일해줘요.”“안됩니다. 병원엔 규정이 있어 간호사가 단독으로 환자 한 명만 케어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임시로 이곳에 옮긴 것뿐입니다.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다면 수간호사님께 말씀드려 더 실력 좋은 간호사로 바꾸셔도 됩니다.”보아하니 그녀의 대답은 송시아를 비교적 만족시킨 듯했다.“알겠어요. 일 봐요.”“네, 부대표님.”간호사가 떠난 뒤, 송시아는 순식간에 확 바뀐 얼굴로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앞으로는 그게 누구든 여자는 절대 접근하게 해서는 안 돼. 담당 간호사도 남자 간호사로 바꿔.”“네, 부대표님.”송시아가 병실로 걸어 들어갔다. 안엔 그녀 혼자만 남아있었다.
병실 안에 간사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장소월은 다시 태어나 모든 것을 바꾸려 했겠죠. 하지만 결국 바뀐 게 뭐죠? 장씨 집안은 무너졌고, 장해진은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내 옆에 남게 되었고요. 또한 성세 그룹도 내 수중에 들어왔죠.”“당신이 장소월을 위해 남긴 그 유서만 찾아낸다면, 당신이 깨어나기 전 말끔하게 뿌리까지 뽑아버릴 수 있어요.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도 절대 두 사람 만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송시아는 전연우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한 마디 내뱉었다.“이건 저번 생에서 당신이 나한테 진 빚이에요.”...카트를 밀고 가던 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것이다.소민아는 이런 느낌을 자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안함이 생길 때마다 늘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곤 했다.소민아는 어렵게 그와 함께 평온한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는 오늘 밤 럭셔리 만찬을 준비하려 식자재들도 한가득 사 왔다. 또 기성은이 와인 창고에 넣어두었던 값비싼 와인까지 꺼냈다.한 병에 몇백만 원은 족히 하는 와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한 잡지에서 이 연도에 생산한 와인은 시중에 몇 병 나오지 않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그녀는 와인 뚜껑을 연 뒤 스테이크를 구웠다.기성은은 조금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서재로 직행했으니 말이다.그녀 혼자서만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띵동.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가 장미꽃 한 다발을 주문했던 것이다.문을 열어보니 배달원이 도착해 있었다.소민아는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물기를 닦은 뒤 빨간색 장미꽃을 꽃병에 꽂고는 식탁 중앙에 올려놓았다. 그 옆 금색 촛대에는 빨간색 초 두 대를 꽂았다.한 시간 뒤, 기성은이 물컵을 들고 서재에서 걸어 나왔다. 로맨틱한 분위기가 만연하는 거실을 보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지
소민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나치게 솔직한 목석같은 남자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기성은 씨 바보예요? 센스가 왜 그렇게 없어요? 난 그냥 오늘 예쁘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어요?”소민아가 두 손으로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쓸어내리며 말했다.“저 섹시하지 않나요? 예쁘지 않아요?”기성은은 분노에 씩씩거리는 그녀를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난 그런 거 볼 줄 몰라요.”“음식 다 만들었으면 밥이나 먹죠.”잠옷 차림의 남자는 이미 일어나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어두운 거실 안, 조명 몇 개가 남아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빛을 밝히고 있었다. 식탁 옆엔 장미꽃 꽃잎까지 흩뿌려져 있었다.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라면, 이 생화와 촛불을 본 순간 설레는 감정을 느낄 것이다.하지만 기성은은 목석 그 자체였다.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조명을 켰다.“이렇게 어두운데 밥 어떻게 먹어요? 하나도 안 보이잖아요!”소민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걸어가 스위치를 껐다.“몰라요. 난 오늘 꼭 불을 끄고 밥 먹을 거예요. 그래도 켜고 싶으면 먹지 말아요.”기성은은 의자에 앉아 익숙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었다.“마음대로 해요.”소민아는 자리에 앉아 와인 한 모금 마시며 화를 가라앉혔다.“기성은 씨가 다치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목 졸라 죽였을 거예요.”소민아는 고급 와인으로 숙성시킨 스테이크를 먹어서인지 순간 얼굴에 취기가 피어올랐다. 흐릿한 정신으로 휘청이다가 기성은의 몸에 쓰러지고 말았다.“난... 기성은 씨랑 같이 먹고 싶다고요. 그리고... 당신 진짜 낭만이라는 것도 모르고 연애하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제 눈이 뼜나 봐요. 왜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까요?”소민아는 기성은의 무릎에 앉아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이미 메이크업이 살짝 지워졌던 얼굴에 화장을 덧칠했다. 몽롱한 두 눈동자에는 남자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밥 다 먹으면 우리...
분출하고 싶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그 기분은 그야말로 사람을 미쳐버리게 했다.기성은은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보았다. 필경 사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것이 돈과 여자니 말이다.성욕을 참기 힘든 상황도 적잖게 마주했지만, 그는 종래로 여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름다운 미모의 여자일수록 더더욱 그랬다.예쁘고 배경이 없는 여자는 결국 거래의 도구로 사용되기가 일쑤기 때문이었다.깨끗하지 않은 일엔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기성은이다.“소민아 씨,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그만 해요.”소민아는 식탁 위 와인잔을 들어 반 잔 정도 입에 넣고는 그의 입술을 벌려 안에 넣어주었다.“이렇게 비싼 와인을 마시지 않는 건 낭비잖아요.”그녀는 다시 와인병을 들어 잔을 채우려다 조심하지 않은 척 일부러 그의 목에 쏟아버렸다.“전 왜 이렇게 허둥댈까요. 와인을 기성은 씨 몸에 다 쏟아버렸어요. 제가 깨끗이 핥아줄까요?”딱딱한 그곳을 누르고 있는 소민아의 하반신은 움직일 때마다 그곳에 자극을 주었다. 기성은은 온몸에서 피가 펄펄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거기다 따뜻한 액체가 부드럽게 그를 휘감고 있으니 정신이 아찔해졌다.소민아는 조금씩 그의 몸을 점령해나갔다. 급기야 조금 전 그녀가 키스했던... 남자의 가장 나약한 곳에까지 다다랐다.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극이 기성은의 모든 세포를 흥분시켰다.기성은은 이제 자신의 몸에 나 있던 상처까지 모두 잊어버렸다. 소민아는 여전히 끊임없이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위험이 눈앞에 닥친 것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저 왔어요! 너무 좋아요! 이제 안 움직이고 싶은데 기성은 씨가 움직여주면 안 돼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기성은의 넓은 어깨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최고조에 다다른 오르가즘이 그녀로 하여금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그녀는 이제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하지만 괴로운 사람은 기성은이다.이대로 끝내겠다고?기성은은 어느새 묶여 있던 팔을 풀고 한 손으
소민아는 온몸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관계가 처음이었으니 적응되지 않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새 잠옷을 갈아입고 살펴보니 옆에 누워 있던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밖에서 전해져오는 인기척을 들은 소민아는 침대에서 일어서려다가 멈추었다. 침대 옆엔 연고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이었다.기성은도 이렇게 세심할 때가 있다.그의 상처가 떠오른 소민아는 얼른 신발을 신고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거실 식탁 위 쓰레기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기성은은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소민아가 살금살금 다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좋은 아침이에요! 내... 남자친구!”기성은이 말했다.“냄비 안에 죽 있으니까 먼저 먹어요.”소민아는 그의 말투에서 부자연스러움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틀림없이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다. 이미 귀까지 새빨개져 있지 않은가.두 사람의 몸에선 같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바로 어젯밤 그 바디워시의 향기다.이제 그녀는 진정으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소민아는 그가 직접 만든 죽을 맛보았다. 농도가 걸쭉해 한 그릇 먹으니 배가 불러왔다.기성은은 아직 소파 쪽 어지러운 곳을 치우고 있었다. 무언가에 물든 카펫을 본 그는 들어 올려 빨래통에 넣었다.“그건 내가 빨게요. 거기에 놓으면 돼요.”그때, 기성은이 말했다.“나 한동안 떠나있어야 해요.”“어디로요?”“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야죠.”대표님은 지금 송시아의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소민아가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기성은 씨 머릿속엔 회사랑 대표님밖에 없어요? 당신과 내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본 적 있어요? 나랑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 꾸리고, 귀여운 아기도 낳는... 그런 건 전혀 생각도 안 하나요?”그의 침묵은 소민아에게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대답이 되어주었다.“기성은 씨, 나랑 결혼할 거예요, 말
민아 씨...신이랑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소민아에게 덮쳐졌다. 입술 위에 부드럽게 포개지는 키스에 신이랑 또한 남자였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소민아는 온몸이 화로에서 뒹구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깊은 밤, 신이랑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들어가 샤워를 시킬 때도 소민아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소민아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밥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몸을 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복부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어... 어떻게 된 거지?”두 다리 사이가 시큰하고 뻐근한 이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 백혜진과 함께 있었고, 그 이후의 일은 술에 취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민아 씨, 일어났어요?”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소민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아 씨, 욕실에 있어요?”소민아는 곧바로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오지 말아요!”문을 두드리던 손은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왔다. 신이랑이 실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민아 씨... 미안해요.”“가요. 이랑 씨 말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민아 씨,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잖아요!”소민아는 눈을 질근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이랑 씨, 미... 미안해요! 이랑 씨
“내가 돌아왔다는 거 민아 씨한테 말하지 말아요.”백혜진은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예전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 비서님, 그럼 회사에는 다시 안 돌아오실 건가요?”“알아서 할 테니, 혜진 씨 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떠난 후, 백혜진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 비서님이 돌아왔지만, 소민아는 신 편집장님과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기 비서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민아는 분명 너무나도 힘들어할 것이었다.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안겨 병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신이랑은 다행히 지체하지 않고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선명한 붉은색 액체가 옷을 흠뻑 적셨다. 소민아는 수술대에 실려 가고 한 시간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소민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사가 앞에 있는 남자에게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내에게 이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요? 임신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걸 모른다고요?”“게다가 술까지 마시게 하다니요!”신이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아이는 일단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빨리 오셨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신이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의사가 모두 떠난 후, 소민아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기... 기성은 씨... 너무 힘들어요.”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려던 기성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천천히 감추었다.“민아 씨, 곧 괜찮아질 거예요.”“미안해요. 내가 잘 보살폈어야 했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