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는 서류와 사진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자신과 신이랑이 함께 회사에서 나오는 사진을 보니 심장이 떨려왔다.“왜 이런 사진을 찍은 거예요? 기성은 씨, 뒤에서 무슨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한테 알려줄래요? 내가 도울 수도 있잖아요.”기성은이 덤덤하게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민아 씨뿐만 아니라 송시아의 일거수일투족도 내 통제하에 있어야 해요. 이번 일은 안다고 해도 민아 씨한테 좋을 것 없어요. 난 민아 씨한테 이 사진의 목적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민아 씨는 이미 오래전에 이번 일에 연루되었어요. 이제 와 벗어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송시아는 언제든 민아 씨한테 손을 쓸 수 있어요. 알겠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저도 그리 나약한 사람은 아니에요.”그녀는 기성은의 옆에 앉아 차가운 그의 손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무슨 일이든 난 성은 씨와 함께 견뎌내고 싶어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성은 씨는 절대 날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나한테 무슨 위험이 닥치든 바로 달려와 구해줄 거잖아요.”“정말 겁도 없는 여자라니까.”한결 부드러워진 기성은의 말투에서 소민아는 그가 마음속으로 자신을 받아들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성은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기성은의 깊은 눈동자에 예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소민아의 모습이 담겼다.“참, 이 서류는 뭐예요? 아까 저랑 상관있다고 했으니까 뜯어봐도 되죠!”기성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다음번에요. 서류 잘못 가져왔어요.”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물었다.“그럼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거예요? 대체 누가 성은 씨를 해친 거예요? 우리... 신고 안 해요?”신고? 기성은은 이렇듯 순진한 사람은 종래로 본 적이 없다.그가 말했다.“송시아가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그게
“대표님의 유서에는 대체 뭐가 쓰여 있길래 송시아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성은 씨 상처만 보면 마음 아파 미치겠다고요!”기성은은 하나하나 그녀의 질문에 답하며 모든 것을 정리해 나갔다.“사고가 있던 날, 모든 사람들은 당황하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유독 나만은 그럴 수 없었어요. 만약 대표님이 다쳤다는 소식이 새어나가면 성세 그룹 국내외 백여만 명의 직원들이 영향을 받게 될 테니까요.”그의 말에 소민아는 예전의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곧 그가 무정하다며 원망만 했지, 얼마나 큰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지는 헤아리지 못했다.“만약 정말 유서라고 해도 이상하잖아요! 성은 씨는 대표님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에요. 왜 성은 씨한테 얘기하지 않았겠어요? 제일 궁금한 건 유서에 무슨 내용을 썼느냐예요. 설마 유산 상속일까요?”소민아는 조심스레 기성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대표님한테 대체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있어요?”“알고 싶어요?”“그냥 궁금해서요. 단지 돈이 많다는 것만 알지 그 액수는 상상도 못 하겠어요. 대표님이 소월 언니한테 준 그 결혼반지만 해도 몇백억이잖아요.”“장소월을 찾으면 다 알게 되지 않겠어요?”“하지만, 제가 소월 언니를 찾는 순간 송시아도 찾게 될 거예요. 그럼 소월 언니가 위험해지는 거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몇 년 동안 편히 지내게 하다가 대표님이 깨어나셨을 때 다시 얘기하는 게 나아요.”기성은은 피곤함이 깃든 얼굴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이 여자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있단 말인가?“나가요. 나 쉬고 싶어요.”“이 늦은 시간에 쫓아낸다고요?”기성은의 잠옷을 몸에 걸친 소민아는 뻔뻔하게 이불을 들어 올리고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오늘 밤엔 같이 자요! 저도 피곤하단 말이에요.”기성은은 침대에 앉아있었음에도 그녀보다 빠르지 못했다. 소민아가 머리만 이불 밖에 빼꼼 내놓고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공간 조금만 내어주면 안 돼요? 기성은 씨 상처에 닿을까 봐 걱정돼요.”
소민아는 오랜만에 평온하게 다음 날 아침까지 숙면을 취했다. 이불 속에서 허리를 펴다가 차갑게 식은 옆자리에 손이 닿은 순간 무언가 생각났는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단번에 잠을 깨고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거실로 달려나갔다.주방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옷 차림의 그가 한 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르려 하자 그녀는 빠르게 뛰어가 그의 손에서 주전자를 빼앗고 컵에 따라주었다.“여기요.”소민아가 건네준 컵을 받은 뒤, 기성은의 시선이 슬리퍼도 신지 못한 그녀의 맨발에 닿았다.“집에서도 이미지 챙겨야죠. 얼른 가서 신발 신어요.”소민아는 금방 잠에서 깨었던지라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작게 중얼거렸다.“성은 씨가 도망쳤을까 봐 놀라서 그랬잖아요.”그녀는 기성은의 뒤를 따라 주방에서 나갔다. “기성은 씨 상처는 2주 정도는 지나야 회복될 거예요. 집에 붕대도 다 떨어졌으니까 같이 사러 나갈래요? 나가서 가끔씩 햇빛 쪼임도 해야 해요. 집에만 있어도 안 좋아요.”기성은은 늘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아이에게 훈계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기성은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갑 침대 옆에 있으니까 가져가서 사고 싶은 거 사요. 난 할 일이 있어요.”“안 돼요. 꼭 저랑 같이 나가야 해요. 아니면 저 이제 밥 안 할 거예요.”그녀를 보고 있는 기성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사람에겐 종래로 보인 적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기성은은 결국 빠져나가지 못하고 소민아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섰다. 그녀는 출발하기 전 그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머리 좀 숙여봐요. 기성은 씨 키 너무 커요.”기성은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민아는 목도리를 그의 어깨에 올린 뒤 힘껏 당겨와 끝을 묶었다. 힘이 꽤나 셌는지 기성은의 몸이 흔들거렸다.“앞으로 또 이상한 생각 하면 밧줄로 목을
송시아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3일 안에 끝내.”상대방이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네, 부대표님.”장소월, 영원히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내가 절대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너를 도운 사람들은 모두 전생에서 네 편에 섰던 사람들처럼 너 때문에 죽어갈 거야.송시아는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난 뒤 병원으로 향했다.경호원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병실 안, 간호사가 혼수상태의 남자에게 주사를 놔준 뒤 의료용품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그때 마침 병실로 향하고 있던 송시아와 마주쳤다.“부대표님.”간호사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본 송시아의 이마가 조금 찌푸려졌다.“고생했어요. 연우 씨 상태는 어떤가요?”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듯한 처음 보는 간호사였다. 송시아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아래위로 그녀를 훑어보았다.간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의 몸은 이제 거의 회복되었고, 위험에선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대표님은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고 계시니 틀림없이 빠른 시일 내에 깨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송시아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말을 꽤 잘하네요. 앞으로는 연우 씨 담당 간호사로 일해줘요.”“안됩니다. 병원엔 규정이 있어 간호사가 단독으로 환자 한 명만 케어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임시로 이곳에 옮긴 것뿐입니다.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다면 수간호사님께 말씀드려 더 실력 좋은 간호사로 바꾸셔도 됩니다.”보아하니 그녀의 대답은 송시아를 비교적 만족시킨 듯했다.“알겠어요. 일 봐요.”“네, 부대표님.”간호사가 떠난 뒤, 송시아는 순식간에 확 바뀐 얼굴로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앞으로는 그게 누구든 여자는 절대 접근하게 해서는 안 돼. 담당 간호사도 남자 간호사로 바꿔.”“네, 부대표님.”송시아가 병실로 걸어 들어갔다. 안엔 그녀 혼자만 남아있었다.
병실 안에 간사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장소월은 다시 태어나 모든 것을 바꾸려 했겠죠. 하지만 결국 바뀐 게 뭐죠? 장씨 집안은 무너졌고, 장해진은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내 옆에 남게 되었고요. 또한 성세 그룹도 내 수중에 들어왔죠.”“당신이 장소월을 위해 남긴 그 유서만 찾아낸다면, 당신이 깨어나기 전 말끔하게 뿌리까지 뽑아버릴 수 있어요.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도 절대 두 사람 만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송시아는 전연우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한 마디 내뱉었다.“이건 저번 생에서 당신이 나한테 진 빚이에요.”...카트를 밀고 가던 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것이다.소민아는 이런 느낌을 자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안함이 생길 때마다 늘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곤 했다.소민아는 어렵게 그와 함께 평온한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는 오늘 밤 럭셔리 만찬을 준비하려 식자재들도 한가득 사 왔다. 또 기성은이 와인 창고에 넣어두었던 값비싼 와인까지 꺼냈다.한 병에 몇백만 원은 족히 하는 와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한 잡지에서 이 연도에 생산한 와인은 시중에 몇 병 나오지 않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그녀는 와인 뚜껑을 연 뒤 스테이크를 구웠다.기성은은 조금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서재로 직행했으니 말이다.그녀 혼자서만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띵동.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가 장미꽃 한 다발을 주문했던 것이다.문을 열어보니 배달원이 도착해 있었다.소민아는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물기를 닦은 뒤 빨간색 장미꽃을 꽃병에 꽂고는 식탁 중앙에 올려놓았다. 그 옆 금색 촛대에는 빨간색 초 두 대를 꽂았다.한 시간 뒤, 기성은이 물컵을 들고 서재에서 걸어 나왔다. 로맨틱한 분위기가 만연하는 거실을 보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지
소민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나치게 솔직한 목석같은 남자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기성은 씨 바보예요? 센스가 왜 그렇게 없어요? 난 그냥 오늘 예쁘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어요?”소민아가 두 손으로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쓸어내리며 말했다.“저 섹시하지 않나요? 예쁘지 않아요?”기성은은 분노에 씩씩거리는 그녀를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난 그런 거 볼 줄 몰라요.”“음식 다 만들었으면 밥이나 먹죠.”잠옷 차림의 남자는 이미 일어나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어두운 거실 안, 조명 몇 개가 남아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빛을 밝히고 있었다. 식탁 옆엔 장미꽃 꽃잎까지 흩뿌려져 있었다.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라면, 이 생화와 촛불을 본 순간 설레는 감정을 느낄 것이다.하지만 기성은은 목석 그 자체였다.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조명을 켰다.“이렇게 어두운데 밥 어떻게 먹어요? 하나도 안 보이잖아요!”소민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걸어가 스위치를 껐다.“몰라요. 난 오늘 꼭 불을 끄고 밥 먹을 거예요. 그래도 켜고 싶으면 먹지 말아요.”기성은은 의자에 앉아 익숙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었다.“마음대로 해요.”소민아는 자리에 앉아 와인 한 모금 마시며 화를 가라앉혔다.“기성은 씨가 다치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목 졸라 죽였을 거예요.”소민아는 고급 와인으로 숙성시킨 스테이크를 먹어서인지 순간 얼굴에 취기가 피어올랐다. 흐릿한 정신으로 휘청이다가 기성은의 몸에 쓰러지고 말았다.“난... 기성은 씨랑 같이 먹고 싶다고요. 그리고... 당신 진짜 낭만이라는 것도 모르고 연애하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제 눈이 뼜나 봐요. 왜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까요?”소민아는 기성은의 무릎에 앉아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이미 메이크업이 살짝 지워졌던 얼굴에 화장을 덧칠했다. 몽롱한 두 눈동자에는 남자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밥 다 먹으면 우리...
분출하고 싶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그 기분은 그야말로 사람을 미쳐버리게 했다.기성은은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보았다. 필경 사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것이 돈과 여자니 말이다.성욕을 참기 힘든 상황도 적잖게 마주했지만, 그는 종래로 여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름다운 미모의 여자일수록 더더욱 그랬다.예쁘고 배경이 없는 여자는 결국 거래의 도구로 사용되기가 일쑤기 때문이었다.깨끗하지 않은 일엔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기성은이다.“소민아 씨,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그만 해요.”소민아는 식탁 위 와인잔을 들어 반 잔 정도 입에 넣고는 그의 입술을 벌려 안에 넣어주었다.“이렇게 비싼 와인을 마시지 않는 건 낭비잖아요.”그녀는 다시 와인병을 들어 잔을 채우려다 조심하지 않은 척 일부러 그의 목에 쏟아버렸다.“전 왜 이렇게 허둥댈까요. 와인을 기성은 씨 몸에 다 쏟아버렸어요. 제가 깨끗이 핥아줄까요?”딱딱한 그곳을 누르고 있는 소민아의 하반신은 움직일 때마다 그곳에 자극을 주었다. 기성은은 온몸에서 피가 펄펄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거기다 따뜻한 액체가 부드럽게 그를 휘감고 있으니 정신이 아찔해졌다.소민아는 조금씩 그의 몸을 점령해나갔다. 급기야 조금 전 그녀가 키스했던... 남자의 가장 나약한 곳에까지 다다랐다.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극이 기성은의 모든 세포를 흥분시켰다.기성은은 이제 자신의 몸에 나 있던 상처까지 모두 잊어버렸다. 소민아는 여전히 끊임없이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위험이 눈앞에 닥친 것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저 왔어요! 너무 좋아요! 이제 안 움직이고 싶은데 기성은 씨가 움직여주면 안 돼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기성은의 넓은 어깨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최고조에 다다른 오르가즘이 그녀로 하여금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그녀는 이제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하지만 괴로운 사람은 기성은이다.이대로 끝내겠다고?기성은은 어느새 묶여 있던 팔을 풀고 한 손으
소민아는 온몸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관계가 처음이었으니 적응되지 않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새 잠옷을 갈아입고 살펴보니 옆에 누워 있던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밖에서 전해져오는 인기척을 들은 소민아는 침대에서 일어서려다가 멈추었다. 침대 옆엔 연고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이었다.기성은도 이렇게 세심할 때가 있다.그의 상처가 떠오른 소민아는 얼른 신발을 신고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거실 식탁 위 쓰레기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기성은은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소민아가 살금살금 다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좋은 아침이에요! 내... 남자친구!”기성은이 말했다.“냄비 안에 죽 있으니까 먼저 먹어요.”소민아는 그의 말투에서 부자연스러움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틀림없이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다. 이미 귀까지 새빨개져 있지 않은가.두 사람의 몸에선 같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바로 어젯밤 그 바디워시의 향기다.이제 그녀는 진정으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소민아는 그가 직접 만든 죽을 맛보았다. 농도가 걸쭉해 한 그릇 먹으니 배가 불러왔다.기성은은 아직 소파 쪽 어지러운 곳을 치우고 있었다. 무언가에 물든 카펫을 본 그는 들어 올려 빨래통에 넣었다.“그건 내가 빨게요. 거기에 놓으면 돼요.”그때, 기성은이 말했다.“나 한동안 떠나있어야 해요.”“어디로요?”“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야죠.”대표님은 지금 송시아의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소민아가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기성은 씨 머릿속엔 회사랑 대표님밖에 없어요? 당신과 내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본 적 있어요? 나랑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 꾸리고, 귀여운 아기도 낳는... 그런 건 전혀 생각도 안 하나요?”그의 침묵은 소민아에게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대답이 되어주었다.“기성은 씨, 나랑 결혼할 거예요, 말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