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는 오랜만에 평온하게 다음 날 아침까지 숙면을 취했다. 이불 속에서 허리를 펴다가 차갑게 식은 옆자리에 손이 닿은 순간 무언가 생각났는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단번에 잠을 깨고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거실로 달려나갔다.주방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옷 차림의 그가 한 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르려 하자 그녀는 빠르게 뛰어가 그의 손에서 주전자를 빼앗고 컵에 따라주었다.“여기요.”소민아가 건네준 컵을 받은 뒤, 기성은의 시선이 슬리퍼도 신지 못한 그녀의 맨발에 닿았다.“집에서도 이미지 챙겨야죠. 얼른 가서 신발 신어요.”소민아는 금방 잠에서 깨었던지라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작게 중얼거렸다.“성은 씨가 도망쳤을까 봐 놀라서 그랬잖아요.”그녀는 기성은의 뒤를 따라 주방에서 나갔다. “기성은 씨 상처는 2주 정도는 지나야 회복될 거예요. 집에 붕대도 다 떨어졌으니까 같이 사러 나갈래요? 나가서 가끔씩 햇빛 쪼임도 해야 해요. 집에만 있어도 안 좋아요.”기성은은 늘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아이에게 훈계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기성은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갑 침대 옆에 있으니까 가져가서 사고 싶은 거 사요. 난 할 일이 있어요.”“안 돼요. 꼭 저랑 같이 나가야 해요. 아니면 저 이제 밥 안 할 거예요.”그녀를 보고 있는 기성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사람에겐 종래로 보인 적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기성은은 결국 빠져나가지 못하고 소민아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섰다. 그녀는 출발하기 전 그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머리 좀 숙여봐요. 기성은 씨 키 너무 커요.”기성은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민아는 목도리를 그의 어깨에 올린 뒤 힘껏 당겨와 끝을 묶었다. 힘이 꽤나 셌는지 기성은의 몸이 흔들거렸다.“앞으로 또 이상한 생각 하면 밧줄로 목을
송시아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3일 안에 끝내.”상대방이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네, 부대표님.”장소월, 영원히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내가 절대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너를 도운 사람들은 모두 전생에서 네 편에 섰던 사람들처럼 너 때문에 죽어갈 거야.송시아는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난 뒤 병원으로 향했다.경호원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병실 안, 간호사가 혼수상태의 남자에게 주사를 놔준 뒤 의료용품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그때 마침 병실로 향하고 있던 송시아와 마주쳤다.“부대표님.”간호사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본 송시아의 이마가 조금 찌푸려졌다.“고생했어요. 연우 씨 상태는 어떤가요?”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듯한 처음 보는 간호사였다. 송시아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아래위로 그녀를 훑어보았다.간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의 몸은 이제 거의 회복되었고, 위험에선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대표님은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고 계시니 틀림없이 빠른 시일 내에 깨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송시아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말을 꽤 잘하네요. 앞으로는 연우 씨 담당 간호사로 일해줘요.”“안됩니다. 병원엔 규정이 있어 간호사가 단독으로 환자 한 명만 케어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임시로 이곳에 옮긴 것뿐입니다.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다면 수간호사님께 말씀드려 더 실력 좋은 간호사로 바꾸셔도 됩니다.”보아하니 그녀의 대답은 송시아를 비교적 만족시킨 듯했다.“알겠어요. 일 봐요.”“네, 부대표님.”간호사가 떠난 뒤, 송시아는 순식간에 확 바뀐 얼굴로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앞으로는 그게 누구든 여자는 절대 접근하게 해서는 안 돼. 담당 간호사도 남자 간호사로 바꿔.”“네, 부대표님.”송시아가 병실로 걸어 들어갔다. 안엔 그녀 혼자만 남아있었다.
병실 안에 간사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장소월은 다시 태어나 모든 것을 바꾸려 했겠죠. 하지만 결국 바뀐 게 뭐죠? 장씨 집안은 무너졌고, 장해진은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내 옆에 남게 되었고요. 또한 성세 그룹도 내 수중에 들어왔죠.”“당신이 장소월을 위해 남긴 그 유서만 찾아낸다면, 당신이 깨어나기 전 말끔하게 뿌리까지 뽑아버릴 수 있어요.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도 절대 두 사람 만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송시아는 전연우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한 마디 내뱉었다.“이건 저번 생에서 당신이 나한테 진 빚이에요.”...카트를 밀고 가던 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것이다.소민아는 이런 느낌을 자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안함이 생길 때마다 늘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곤 했다.소민아는 어렵게 그와 함께 평온한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는 오늘 밤 럭셔리 만찬을 준비하려 식자재들도 한가득 사 왔다. 또 기성은이 와인 창고에 넣어두었던 값비싼 와인까지 꺼냈다.한 병에 몇백만 원은 족히 하는 와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한 잡지에서 이 연도에 생산한 와인은 시중에 몇 병 나오지 않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그녀는 와인 뚜껑을 연 뒤 스테이크를 구웠다.기성은은 조금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서재로 직행했으니 말이다.그녀 혼자서만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띵동.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가 장미꽃 한 다발을 주문했던 것이다.문을 열어보니 배달원이 도착해 있었다.소민아는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물기를 닦은 뒤 빨간색 장미꽃을 꽃병에 꽂고는 식탁 중앙에 올려놓았다. 그 옆 금색 촛대에는 빨간색 초 두 대를 꽂았다.한 시간 뒤, 기성은이 물컵을 들고 서재에서 걸어 나왔다. 로맨틱한 분위기가 만연하는 거실을 보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지
소민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나치게 솔직한 목석같은 남자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기성은 씨 바보예요? 센스가 왜 그렇게 없어요? 난 그냥 오늘 예쁘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어요?”소민아가 두 손으로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쓸어내리며 말했다.“저 섹시하지 않나요? 예쁘지 않아요?”기성은은 분노에 씩씩거리는 그녀를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난 그런 거 볼 줄 몰라요.”“음식 다 만들었으면 밥이나 먹죠.”잠옷 차림의 남자는 이미 일어나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어두운 거실 안, 조명 몇 개가 남아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빛을 밝히고 있었다. 식탁 옆엔 장미꽃 꽃잎까지 흩뿌려져 있었다.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라면, 이 생화와 촛불을 본 순간 설레는 감정을 느낄 것이다.하지만 기성은은 목석 그 자체였다.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조명을 켰다.“이렇게 어두운데 밥 어떻게 먹어요? 하나도 안 보이잖아요!”소민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걸어가 스위치를 껐다.“몰라요. 난 오늘 꼭 불을 끄고 밥 먹을 거예요. 그래도 켜고 싶으면 먹지 말아요.”기성은은 의자에 앉아 익숙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었다.“마음대로 해요.”소민아는 자리에 앉아 와인 한 모금 마시며 화를 가라앉혔다.“기성은 씨가 다치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목 졸라 죽였을 거예요.”소민아는 고급 와인으로 숙성시킨 스테이크를 먹어서인지 순간 얼굴에 취기가 피어올랐다. 흐릿한 정신으로 휘청이다가 기성은의 몸에 쓰러지고 말았다.“난... 기성은 씨랑 같이 먹고 싶다고요. 그리고... 당신 진짜 낭만이라는 것도 모르고 연애하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제 눈이 뼜나 봐요. 왜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까요?”소민아는 기성은의 무릎에 앉아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이미 메이크업이 살짝 지워졌던 얼굴에 화장을 덧칠했다. 몽롱한 두 눈동자에는 남자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밥 다 먹으면 우리...
분출하고 싶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그 기분은 그야말로 사람을 미쳐버리게 했다.기성은은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보았다. 필경 사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것이 돈과 여자니 말이다.성욕을 참기 힘든 상황도 적잖게 마주했지만, 그는 종래로 여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름다운 미모의 여자일수록 더더욱 그랬다.예쁘고 배경이 없는 여자는 결국 거래의 도구로 사용되기가 일쑤기 때문이었다.깨끗하지 않은 일엔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기성은이다.“소민아 씨,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그만 해요.”소민아는 식탁 위 와인잔을 들어 반 잔 정도 입에 넣고는 그의 입술을 벌려 안에 넣어주었다.“이렇게 비싼 와인을 마시지 않는 건 낭비잖아요.”그녀는 다시 와인병을 들어 잔을 채우려다 조심하지 않은 척 일부러 그의 목에 쏟아버렸다.“전 왜 이렇게 허둥댈까요. 와인을 기성은 씨 몸에 다 쏟아버렸어요. 제가 깨끗이 핥아줄까요?”딱딱한 그곳을 누르고 있는 소민아의 하반신은 움직일 때마다 그곳에 자극을 주었다. 기성은은 온몸에서 피가 펄펄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거기다 따뜻한 액체가 부드럽게 그를 휘감고 있으니 정신이 아찔해졌다.소민아는 조금씩 그의 몸을 점령해나갔다. 급기야 조금 전 그녀가 키스했던... 남자의 가장 나약한 곳에까지 다다랐다.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극이 기성은의 모든 세포를 흥분시켰다.기성은은 이제 자신의 몸에 나 있던 상처까지 모두 잊어버렸다. 소민아는 여전히 끊임없이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위험이 눈앞에 닥친 것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저 왔어요! 너무 좋아요! 이제 안 움직이고 싶은데 기성은 씨가 움직여주면 안 돼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기성은의 넓은 어깨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최고조에 다다른 오르가즘이 그녀로 하여금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그녀는 이제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하지만 괴로운 사람은 기성은이다.이대로 끝내겠다고?기성은은 어느새 묶여 있던 팔을 풀고 한 손으
소민아는 온몸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관계가 처음이었으니 적응되지 않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새 잠옷을 갈아입고 살펴보니 옆에 누워 있던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밖에서 전해져오는 인기척을 들은 소민아는 침대에서 일어서려다가 멈추었다. 침대 옆엔 연고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이었다.기성은도 이렇게 세심할 때가 있다.그의 상처가 떠오른 소민아는 얼른 신발을 신고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거실 식탁 위 쓰레기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기성은은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소민아가 살금살금 다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좋은 아침이에요! 내... 남자친구!”기성은이 말했다.“냄비 안에 죽 있으니까 먼저 먹어요.”소민아는 그의 말투에서 부자연스러움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틀림없이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다. 이미 귀까지 새빨개져 있지 않은가.두 사람의 몸에선 같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바로 어젯밤 그 바디워시의 향기다.이제 그녀는 진정으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소민아는 그가 직접 만든 죽을 맛보았다. 농도가 걸쭉해 한 그릇 먹으니 배가 불러왔다.기성은은 아직 소파 쪽 어지러운 곳을 치우고 있었다. 무언가에 물든 카펫을 본 그는 들어 올려 빨래통에 넣었다.“그건 내가 빨게요. 거기에 놓으면 돼요.”그때, 기성은이 말했다.“나 한동안 떠나있어야 해요.”“어디로요?”“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야죠.”대표님은 지금 송시아의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소민아가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기성은 씨 머릿속엔 회사랑 대표님밖에 없어요? 당신과 내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본 적 있어요? 나랑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 꾸리고, 귀여운 아기도 낳는... 그런 건 전혀 생각도 안 하나요?”그의 침묵은 소민아에게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대답이 되어주었다.“기성은 씨, 나랑 결혼할 거예요, 말
“최대한 빨리가 대체 어느 정도인데요?”“내 귀엔 날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말로밖에 안 들려요.”기성은이 화가 나 씩씩거리는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정확한 시간을 말해줘요. 기성은 씨가 말만 하면 3년이든 5년이든 기다릴 수 있어요. 오래 걸리는 건 상관없어요. 무서운 건 당신한테서 소식이 끊기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뎌야 하는 거예요.”“그런 의미 없는 일 때문에 싸우지 말고 일단 밥이나 먹자고요.”기성은은 빨랫감이 담긴 통을 들고 욕실에 들어가 모두 세탁기에 털어 넣었다.이렇듯 흐리멍덩하게 넘어가도록 가만히 놔둘 소민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욕실에 따라 들어가 그가 세탁기 문을 닫자마자 힘껏 그를 벽에 밀치고는 발뒤꿈치를 들고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도망친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날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하지만 기성은 씨한텐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요. 나와 혼인신고를 하든가, 아니면... 나와 아이를 낳든가.”“어림없는 소리.”기성은이 그녀를 밀쳤다. 소민아는 그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화장실 문을 막아섰다.“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엉켜야만 기성은 씨가 날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래요. 어디에 가든 항상 나랑 우리 아이를 생각할 거잖아요. 기성은 씨, 어젯밤 난 이미 당신 사람이 되었어요. 이제 죽을 때까지 나랑 선 그을 생각하지 말아요.”기성은은 소민아가 고집불통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철없고 아둔한지는 생각지 못했다.기성은이 목덜미를 잡힌 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나랑 결혼하겠다고요? 나에 대해 알기나 해요?”“말해요!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나에 관한 건 사전에 조사를 끝냈을 테니 기성은 씨도 잘 알겠죠. 제 가족관계는 간단해요. 종래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부모님, 절 키워주신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촌 언니 소현아. 기성은 씨도 다 아는 것들이잖아요!”“나한텐 아무것도 없어요. 이 집 밖에는.”소민아가 말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머릿속에 아직 주방에서 끓고 있는 죽이 떠올랐다. 기성은은 알몸으로 삽입한 상태로 한 손으로 소민아를 안고는 달려갔다. 그녀는 흥분감에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주방에 가보니 냄비 안의 죽이 모두 끓어올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마지막 관계를 끝낸 뒤, 소민아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가 한 시간 뒤에야 깨어났다. 시간이 늦어 밖에 나가 저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소민아는 그를 데리고 아파트 맞은편 백화점 안 샤부샤부 가게로 향했다. 지금 같은 겨울철엔 따뜻한 샤부샤부가 딱이다.“저 이미 우리 관계 고모한테 얘기했어요. 고모가 기성은 씨 만나고 싶다고 하시던데 시간 될 때 같이 가줄 수 있어요? 고모도 분명 당신 좋아할 거예요, 기성은 씨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으니까. 하지만 고모 앞에선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줘야 해요.”기성은은 몸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어 매운 것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소민아는 매운 것 절반, 맵지 않은 것 절반으로 주문했다. 또 그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고기와 야채를 골고루 시켰다.소민아는 이제 기성은의 침묵에 많이 익숙해졌다.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만 집중했다.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무언의 동의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이거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어요.”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엄청 평범한 메뉴잖아요. 길에도 널린 게 샤부샤부 가겐데.”기성은의 머릿속에 그의 과거가 떠올랐다.“예전의 나에게 이런 음식은 사치였어요. 내 기억 속 먹고 자던 곳은 어둡고 습한 지하실이었거든요. 거기엔 하수구에서 뛰어나온 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그리고 신체 곳곳이 떨어져 나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당시의 그에겐 배를 곯지 않는 것과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전연우가 없었다면, 그는 평생...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모든 건 더더욱 갖지 못했을 것이다.또한 소민아를 만났을 가능성
두 남녀의 뜨거운 열기에 달도 부끄러운 듯 구름 뒤에 몸을 숨겼다...소민아는 숨을 헐떡이다 배에 통증이 느껴져 그를 멈춰 세웠다. “이랑 씨, 나 배가 너무 아파요. 생리 시작하려는 것 같아요.”신이랑은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내가 약 가져다줄게요.”소민아는 이불 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침대 무드등이 켜져 있어 상반신을 벗고 있는 신이랑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소민아는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바로 돌렸다. “괜찮아요. 프런트에 전화해서 생리대 좀 가져다 달라고 해줘요. 화장실 한 번 가야겠어요.”“내일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봐요.”소민아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그냥 생리 날짜가 다가와서 그래요.”하지만 흘러나온 피를 보니 생리혈 같지는 않았다.화장실에서 다시 소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죠?”소민아는 변기에 앉은 채, 잠옷 차림으로 생리대를 들고 다가오는 신이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줄까요?”“괜찮아요. 들어오지 말아요. 부끄러워요.”“그래요.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신이랑은 발코니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여우림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여우림은 컴퓨터로 메일을 보며 말했다. “이랑 씨가 보낸 메일 봤어요. 그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이랑 씨,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건 거짓말이에요. 민아 씨가 이 일을 알면 이랑 씨를 원망할 거예요...”“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진실을 말해줘요.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민아 씨에게 맡겨야 해요.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든 만회할 여지가 있을지도 몰라요.”소민아는 물을 마시고 싶어 불편한 배를 움켜쥐고 방에서 나왔다. 진실, 여지 등 단어들이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왔다.신이랑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민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부엌에 들어가 컵에 물을 따랐다.하지만 물의 온도가 차가워 전기 포트 전원을 눌렀다.“많이 아파요? 병원에 가볼까요?”소민아는 거절했다.
소민아가 혼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 키를 들고 문을 열려고 할 때, 돌연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이미 떠난 줄 알았던 그 사람이었다.눈앞에 기성은이 나타난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아까 가지 않았어요? 여기엔 왜 또 나타난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축하해요.”그에게서 축하 인사를 받으니 우습기도, 슬프기도 했다. “축하할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내가 축하해 줘야죠. 곧 시장님의 사위가 될 거잖아요. 앞으로 우리는 같은 계층의 사람이 아니겠네요.”“저 피곤해서 쉬러 올라온 거예요. 빨리 가요. 이랑 씨가 올라와서 당신을 보면 안 되잖아요.”“그리고 앞으로는 오지 말아요. 그 사람이 오해하는 거 싫어요.”기성은이 말했다. “나랑 주가은 씨는 민아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그 입 다물어요!” 소민아는 갑자기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뒤돌아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말했다. “이제야 변명하는 거예요? 기성은 씨, 내가 신이랑 씨와 결혼하기 전엔 대체 어디에 있었어요?”“내가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 하나 없었잖아요. 송시아가 당신이 죽었다고 말했을 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당신이 정말 죽었다면 나도 같이 죽으려고 했단 말이에요. 휴대폰 메시지로도 다 이야기했잖아요, 이랑 씨와 결혼한 건 그냥 속임수일 뿐이라고. 근데 기성은 씨는요? 나한테 신경도 안 썼어요!”“기성은 씨, 일이 이미 벌어진 뒤엔 후회하고 변명한다고 한들 되돌릴 수 없어요.”“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앞으로 난 이랑 씨와 잘살아 볼 생각이니까 또다시 나타나 내 삶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기성은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텅 빈 복도 안 희미한 조명이 그의 어두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알겠어요.”기성은은 뒤
“집이 작다고 생각되면, 결혼식 끝나고 신혼집 구하러 가요.”소민아는 그의 다리 위에 누워 감자칩 봉지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건 됐어요. 이 아파트 조용하고 환경도 좋잖아요.”“그래요, 민아 씨 말대로 해요...”그때, 무언가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신이랑의 옷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담배 피웠어요? 안 피우는 거 아니었어요?”“이제 안 피울게요.”신이랑은 정직하게 주머니 속 담배와 지갑 속 돈 전부를 소민아에게 건넸다.“앞으로 내 재산은 민아 씨가 모두 관리해요. 은행 비밀번호는 민아 씨 생일이에요.”“저 돈 관리 못 해요... 망쳐버릴지도 몰라요...”“괜찮아요. 천천히 해나가면 돼요. 출근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동안 민아 씨랑 같이 집에 있을게요.”“그래요.”또 한 주가 지나 소민아의 결혼식이 다가왔다.결혼식은 교회에서 5개 테이블 정도만 차려놓고 소규모로 진행되었다.그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찾아왔다.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이랑의 팔짱을 낀 채 경건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소민아의 눈에 기성은과 주가은이 들어왔다.주가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초대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일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민아 씨, 내가 준비한 신혼 선물이에요.”주가은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목소리까지도 기품 있게 부드러운 것이 한눈에 봐도 명문가 귀한 아가씨임을 알 수 있었다. 예전 기성은도 주가은과 그녀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랬다. 주가은이 나타나기만 하면, 기성은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에게 향했었다.신군회는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주 시장님 몸은 괜찮아지셨는지요?”주가은은 신군회가 다가오자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기성은 뒤로 숨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저 고마움을 전하고자 선물을 드리고 싶어 온 것이니 더는 방해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신이랑은 많은 식재료를 사 들고 아파트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완전히 신이랑의 집으로 이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슬리퍼를 갈아 신고 겉옷을 가지러 안방에 들어갔다. 옷장을 열어보니 안엔 그녀의 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이랑의 옷은 평소 자주 입는 셔츠와 긴 바지 몇 벌뿐이었다.그 아래 열려있는 서랍을 살펴보니 그녀의 속옷들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소민아는 옷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연 밀려오는 답답함에 들고 있던 잠옷을 침대에 던져버리고 머리를 움켜쥔 채, 불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텅 비어버렸다.그때 신이랑이 들어왔다. “민아 씨, 왜 그래요?”소민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요. 괜찮아요. 좀 쉬면 나아질 거예요.”“잠깐 눈 좀 붙여요. 밥 다 되면 깨워줄게요.”신이랑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민아는 돌연 몸을 돌려 신이랑의 무릎 위에 올라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한바탕 격렬한 키스가 끝난 뒤.“이랑 씨, 우리 한 번 더 할까요?”“민아 씨, 이런 식으로 그 사람 잊으려고 하지 말아요. 후회할 거예요.”소민아는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 자신에게 후회할 여지조차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랑 씨, 난 어렸을 때부터 반항아였어요. 부모님이 늘 옆에 안 계셔서, 그분들이 날 버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듣지 않았어요.”“이랑 씨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신중하게 골라주신 남편감이에요. 이번에는... 한 번 부모님의 말씀대로 해보고 싶어요.”“기성은 씨... 단순히 그 사람을 잊기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진심으로... 이랑 씨와 안정적인 생활을 해보고 싶어요.”“나 거절하지 말아요. 네?”신이랑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소민아와 코를 맞대고 눈을 감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민아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소민아
신이랑은 사진작가들에게 촬영을 잠시 멈추라고 말했다.2층 휴게실로 돌아온 뒤, 소민아는 바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나 옷 갈아입으러 갈게요.”“내가 도와줄까요?”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신이랑도 별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이었다.“미안해요. 내가...”“괜찮아요. 그럼 와서 지퍼 좀 풀어줄래요? 손이 닿지 않아서 걱정이었는데, 잘됐네요.”이제 결심도 내렸고, 그녀와 신이랑은 엄연한 부부 사이다. 또한 지난번에 볼 것은 다 보지 않았던가?소민아는 신이랑의 손을 잡고 탈의실로 향했다. 안에 들어선 순간, 신이랑이 그녀를 문에 밀치고는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민아 씨,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마음 변함없을 거예요.”소민아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요. 믿을게요. 이랑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변함없을 거라는 신이랑의 그 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 묻어나왔다.신이랑, 그는 분명 좋은 남편이 될 것이다...사실 모두의 말이 맞다. 신이랑은 분명 평생을 함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탈의실에서 나왔을 때, 소민아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져 있었다.소민아는 화장실 위치를 묻고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달려나갔다.그렇게 침착하고 차분하고 선비 같은 사람이 이토록 낯 뜨거운 행동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소민아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손을 씻었다. 이후 볼일을 보고 나와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끄고 고개를 들었을 때, 등 뒤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기성은은 예전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슴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소민아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손을 닦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주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성은 씨... 저 반지 잃어
소민아는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결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들은 서둘러 결혼 준비를 해야 했다. 이번 결혼식은 많은 사람을 초대하지는 않지만, 매우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었다.촬영 스튜디오로 가는 길, 소민아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말했다.“이랑 씨, 우리 휴대폰 매장에 잠깐 들렀다 가요.”신이랑은 별다른 질문 없이 대답했다.“그래요.”휴대폰 매장에 들어간 뒤, 소민아는 새로운 번호를 받고 기존 번호는 해지해 버렸다.사직서를 내는 일은 이미 송시아의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절차에 따라 반나절 만에 짐을 정리하고 회사를 떠났다. 신이랑도 그녀와 함께 회사에 동행했다.휴대폰 매장에서 나오면서, 소민아는 최신 모델 휴대전화 두 개를 구입했다. 신이랑과 커플로 맞춘 것이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신이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처음으로 이랑 씨에게 주는 신혼 선물이에요. 이랑 씨, 우리 결혼하면...나도 이랑 씨한테 잘해주도록 노력할게요...”신이랑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민아 씨는 그럴 필요 없어요. 결혼해 주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기뻐요.”“나한테 와줘서 고마워요!”소민아는 그의 품에 안겨 힘차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녀는 예전 사용했던 유심카드를 부러뜨렸다.‘기성은 씨, 이제 우린 완전히 끝이에요!’‘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요.’‘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갈게요.’‘이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예요.’유심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 소민아는 완전히 마음을 비워냈다.스튜디오에 들어가 보니, 유리 진열장엔 신이랑이 준비한 웨딩드레스들이 가득 줄지어 있었다.소민아는 먼저 메이크업을 한 후, 탈의실로 가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신이랑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민아가 탈의실에서 나온 순간, 신이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소민아는 처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지라 자신 없이 쭈뼛거리
연락처를 삭제하고 한바탕 괴로움이 지나가고 나니, 이어 처음 가져보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예전 기성은과 함께하고 싶어 했던 마음의 강렬함 만큼이나, 포기의 결심 또한 단호했다. 단 1초 만에 그를 놓아버린 것이다.그녀와 기성은은 이런 면에선 비슷한 사람이다. 쉽게 결정하지도,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만약 정말로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돌아보지 않고 깨끗이 끊어낸다.호텔.“민아 씨가 오해하고 있네요. 기성은 씨, 제가 소민아 씨한테 가서 설명할게요. 당신이 나랑 약혼하는 이유는 그저 주 씨 가문을 노리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함일 뿐이라는 걸요. 민아 씨도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도 민아 씨 많이 좋아하잖아요, 안 그래요?”기성은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주가은은 그의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냉정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기성은이지만, 그 역시 사람이기에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다만 그들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됐어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아가씨, 편히 쉬세요.”기성은은 호텔 방을 떠난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민아는 신이랑의 품에 안겨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가만히 누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신이랑은 지난밤 그녀를 밤새도록 간호했다. 해열제를 먹었음에도 자정 전까지 반복적으로 고열에 시달렸다.이제 그녀는 완전히 나았다.소민아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걸어갔다. 어지러웠던 거실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소파 위에 놓여 있던 담요도 정연하게 개어져 있었다.신이랑은 몇 시간 자지 못했음에도, 옆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일어나 거실로 달려갔다. 소파에 앉아 평소처럼 웃으며 TV를 보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신이랑이 비현실적인 느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소민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랑 씨, 방금 엄마한테 전화 왔어요. 점심
그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평소 여드름이 자주 나는 소민아에겐 너무나도 부러운 피부였다.소민아는 한바탕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마음속 모든 것을 모조리 털어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침대에 올라와서 잘래요?”신이랑이 기쁨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소민아는 이미 이불을 들어 올렸다. 신이랑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민아 씨...”“싫으면 됐어요.”신이랑이 침대에 올라간 뒤, 두 사람은 나란히 함께 누웠다. 그의 팔에 기댄 순간, 감기에 걸렸는지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아무리 자도 끝없이 잠이 쏟아졌다.“뭐라도 좀 먹을래요?”소민아가 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먹고 싶지 않아요.”“좀 더 자고 싶어요.”“그래요, 자요. 내가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그 사람이 주가은과 약혼을 한다고 하니, 예전 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어요. 이랑 씨, 미안해요. 여전히 날 받아줄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랑 씨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이제 더 이상 불안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아요. 한 사람과 안정적으로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그래요. 우리 행복하게 잘살아 봐요.” 신이랑이 소민아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민아 씨, 어디 아파요? 이마가 왜 이렇게 뜨거워요?”신이랑은 자신의 볼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녀의 체온은 확실히 정상이 아닌듯했다.신이랑은 침대에서 내려가 체온계를 가져왔다. 체온을 재보니 38.5도로 펄펄 끓고 있었다.신이랑은 급히 물을 끓이고 그녀에게 해열제를 먹인 후 죽을 만들었다.그는 소민아를 부축해 자신의 품에 기대어 앉게 했다. “일단 이것 좀 먹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요.”소민아는 힘없이 눈을 뜨고 천천히 한 입 삼켰다.그녀는 며칠 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데다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하여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
“네.”그녀의 짤막한 대답에 백혜진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소민아가 정말로 신이랑을 받아들인 걸까?아니면 기성은에게 약혼녀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포기해버린 걸까?지금은 차가 막히는 시간이다.신이랑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소민아는 쇼핑몰 입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신이랑을 기다리고 있었다.신이랑은 우산을 들고 소민아 앞에 섰다. “민아 씨,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자신을 향한 신이랑의 시선을 느낀 백혜진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편집장님,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택시도 불렀어요. 바로 회사에 복귀할 거예요.”신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동안 민아 씨 돌봐줘서 고마웠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요.”백혜진이 말했다. “괜찮아요. 얼른 민아 씨 집에 데려다주세요. 또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그때 소민아의 눈에 쇼핑몰에서 걸어 나오는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영혼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신이랑을 따라 떠났다.신이랑은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탄 뒤에야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내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에 도착했다.거실은 평소처럼 약간 어질러져 있었다.신이랑은 우산을 접어 현관에 두고,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 소민아는 초점 없는 멍한 눈빛으로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신이랑은 현관에서 깨끗한 슬리퍼를 가져온 뒤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 끈을 풀고 양말까지 벗겼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소민아는 고개를 숙인 채 신이랑을 바라보며 억눌렀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잘해줘요?”“민아 씨는 내 아내니까요.”그 짧은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소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면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한다.신이랑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고백한 적이 없다. 심지어 ‘좋아한다’라는 말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