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그녀는 멍해졌다. 말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 같아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일단 앉아 있어. 기사님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저기...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서 자고 갈게요.”핸드폰을 들고 있던 그가 그 말에 고개를 들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어색한 분위기에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졸려요. 게스트룸이 어디예요? 일찍 쉬어야겠어요.”“저쪽 두 번째 방.”“네.”게스트룸으로 향하던 그녀는 갑자기 뭔가 떠올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저... 갈아입을 옷이 없어요.”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에서 셔츠를 가지고 나왔다. 그의 셔츠인 걸 보고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거실의 조명이 밝은 탓에 조금 붉게 물들여진 여자의 얼굴을 그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새것이야.”“아... 고마워요.”셔츠를 건네받고 그녀는 게스트룸으로 들어갔다. 한편, 진태하는 국수 한 그릇을 다 먹은 뒤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의 있는 약 박스와 쪽지에 떨어졌고 그가 다시 한번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언젠가부터 그의 입술이 희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잠자리를 옮기면 잠을 설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푹 잤고 다음 날 아침 알림 소리에 깨어났다.욕실에 말려두었던 옷도 이미 다 마른 상태였다.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씻은 뒤 그녀는 집을 나서려고 했다.그런데 방문을 연 순간, 그가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 소리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아침은 식탁에 있어. 얼른 먹어. 다 먹고 내가 데려다줄게.”몰래 나가려고 했는데 그가 그녀보다 일찍 일어나 있을 줄은 몰랐다.보아하니 그는 이미 아침을 먹은 것 같았고 그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모르겠다.식탁 위에는 여러 개의 포장 용기가 있었다.만두, 팥죽, 군만두, 초밥, 피자, 샌드위치, 소고기 국수 등등...중식에서부터 시작해 서양
그날, 가게에 일하고 있던 오서린은 아줌마의 전화를 받고 바로 택시를 타고 강씨 가문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장순묘가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장순묘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배정숙과 강인헌이 그녀가 집을 나갔가는 소식에 엄청 화를 내고 있다면서 지금 안에서 강지후를 혼내고 있다고 하였다. “서린 씨, 집에 다시 돌아와요. 사모님께서 서린 씨를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여행 다녀오시면서 서린 씨 선물도 사 오셨더라고요. 도착하자마자 서린 씨부터 찾았어요. 도련님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으셨고요. 사모님께서는 정말 서린 씨를 친딸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사모님의 마음속에는 도련님보다 서린 씨가 더 중요한가 봐요.”장순묘의 이런저런 얘기에도 오서린은 아무 말이 없었다.문 앞에 가까이 다가가니 안에서 한 남자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를 우리 집안에 들이는 건 꿈도 꾸지 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되니까.”철썩.무엇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강인헌이 강지후의 뺨을 세게 때리고 있었다. 장순묘는 얼른 다가가서 강인헌을 막아섰다.“회장님, 뭐 하시는 겁니까? 좋게 좋게 말씀하세요. 왜 손을 대시는 건가요?”장순묘는 강지후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왔었다. 비록 그가 평소에 좀 못된 짓을 하긴 하지만 어찌 됐든 강씨 가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 않는가? 부자 간의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되는 일이었다. “서린이 왔니?”배정숙은 오서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배정숙의 모습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모.”“너도 참. 왜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아저씨랑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죄송해요. 두 분이 모처럼 결혼기념일에 맞춰 여행을 가신 건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어쩜 이리 속이 깊은 건지. 억울한 게 있으면 나한테 다 얘기해. 내가 네 편이 되어줄 거야.”배정숙은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
“얘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배정숙은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오서린이 어떤 아이인지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강지후와 함께 있을 때마다 오서린은 사랑에 빠진 듯한 그 눈빛을 숨길 줄 몰랐다.“엄마, 지금 아들 말도 못 믿으시는 거예요? 서린이한테 직접 물어보시든가요.”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곧장 오서린에게 쏠렸다.오서린도 자신을 오랫동안 키워준 이모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강지후 같은 쓰레기와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모,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그 말을 들은 배정숙은 꽤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서린아, 너 지후랑 잘 지내는 거 아니었니?”‘설마 남편이랑 잠깐 자리를 비운 그 6개월 사이에, 각자 애인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저랑 지후 오빠는... 사실 예전부터 계속 평범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왔어요. 그렇고 그런 감정이 생긴 적도 없었고요.“강지후는 복잡한 감정이 잔뜩 어린 눈빛으로 오서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전에 이모가 너한테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올 생각 없냐고 물어봤을 때는 엄청 좋아했잖아.”“그땐 제가 철이 없었죠. 오빠를 멋있다고 생각하고 동경했던 것뿐인데, 좋아하는 줄로 착각했던 것 같아요. 이젠 진짜 사랑이 어떤 건지 알게 됐고, 생각 정리도 끝났어요.”배정숙은 뭐라 더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강인헌이 먼저 선수를 쳤다.“애들이 서로 안 사랑한다는데 뭘 어쩌겠어. 자꾸 억지로 이어주려 하지 마”배정숙은 곧장 입을 꾹 다물고는 남편을 바라보았다.“넌 나랑 서재로 가자. 서린이랑 엄마 단둘이 얘기 나눌 수 있게 둬.”강인헌이 어두운 표정으로 계단을 오르자 강지후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어느새 거실에는 고요한 적막만 가득했다.장순묘도 조용히 자리를 뜨며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왔다.오서린의 손을 꼭 잡은 배정숙이 소파에 앉아 물었다.“서린아, 지금 여긴 우리 둘만 있으니까 이모한테 솔직하게
배정숙의 말에 오서린은 코끝이 찡해졌다.그녀가 강지후와 사귀려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식으로 이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배정숙과 강인헌은 정말 오서린을 친딸처럼 아껴주고 있었다.“서린아, 이모도 더는 너랑 지후 일에 신경 안 쓸게. 하지만 이거 하나는 꼭 얘기해야겠어. 다시 집으로 들어와.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흉흉한데, 너 혼자 밖에서 사는 건 너무 위험해. 내가 어떻게 널 혼자 둬.”“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사실 지금 은채랑 같이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제 걱정은 마세요. 이모 생각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어요!”“은채?”배정숙은 오서린과 가장 친한 친구가 주씨 가문의 그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걔도 집 나와서 따로 살아?”“네, 은채가 집을 샀거든요. 지금은 저도 그 집으로 이사해서 같이 살고 있어요. 엄청 재밌게 잘 지내고 있어요.”배정숙은 주씨 가문의 재력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주은채는 그 가문의 유일한 딸로서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의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란 아이였다. 오서린이 그런 아이와 함께 지낸다고 생각하니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배정숙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그래도 네가 집에 없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잖아. 차라리 지후를 내보내는 게 어때? 넌 이 집에서 나랑 같이 살자.”그 말에 오서린이 가볍게 웃었다.“제가 보고 싶어 지면 언제든 편하게 전화 주세요. 오늘처럼 바로 달려올게요. 어차피 멀지도 않은데, 보고 싶다고 하면 오죠.”“같이 사는 거랑 보러 오는 거랑 같아?”배정숙은 오서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강지후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저한테 이모랑 아저씨는 영원히 제일 소중한 분들이에요.”배정숙은 잠시 멍한 얼굴로 오서린의 순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흘렸다.“울지 마요, 이모.”오서린은 휴지를 꺼내 배정숙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배정숙은 그런 오
“주워다 키운 양딸이 친아들보다 중요하다고 하시면, 그냥 제가 짐 싸서 집 나갈게요.”강지후는 말을 끝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배정숙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강지후, 너 진짜 후회하고 싶어!”그 말에 강지후는 잠시 멈칫하는 듯했지만 다시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집에서 멀어졌다....오서린은 밀크티 사 들고 매장으로 돌아왔다.돌아와 본 매장 분위기는 왜인지 모르게 싸늘했다. 오서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아까 사장님이 왔다 가셨어.”오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주은채가 매장으로 온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지금은?”“다시 가셨는데.”동료는 밀크티를 직원들에게 나눠주고는 자신의 밀크티에 빨대를 꽂고 한 모금 들이켰다.“오늘 사장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어. 화를 얼마나 내시던지, 혜원이는 막 울었다니까?”“내가 언제 울었다고.”“에이, 방금까지만 해도 눈 빨갛더만!”다른 동료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무서웠어. 나는 진짜 말도 못 꺼냈다니까. 생리 시작하셨나?”한 달에 며칠씩 겪는 그 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라면 다들 이해해줄 수 있었다.“설마. 생리 주기가 지금이 아닌데? 내가 봤을 땐, 남자친구랑 싸우신 것 같아.”그 말에 모두가 오서린을 바라보았다.“서린아, 너 사장님이랑 친구잖아. 혹시 무슨 일 있는지 아는 거 없어?”오서린은 자연스럽게 어제 일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몰라.”잠시 수다를 떨던 사람들은 밀크티를 다 마시자마자 다시 일을 시작했다.오서린은 화를 잔뜩 내고 갔다던 주은채의 생각에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전화라도 걸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건드렸다가는 기분만 상하게 할까 봐 꾹 참았다.오후 다섯 시, 오서린은 다른 타임 동료와 교대를 마친 후 퇴근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신선한 돼지갈비를 구매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던 주은채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걸음이 한층 빨라졌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서기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탔고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도 계속 바뀌었다.어느새 버스정류장에는 오서린 홀로 남게 되었다.그녀는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몰라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때,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익숙하고도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타.”갑작스러운 진태하의 등장에 잠시 멍해 있던 오서린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가방을 챙겨 조수석에 올라탔다.진태하의 차는 천천히 정류장을 벗어났다.차가 예상 못 한 방향으로 가자 오서린이 급히 입을 열었다.“그냥 아무 호텔이나 찾아서 내려주면 돼요.”잠깐의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굳이 좋은 호텔 갈 필요는 없고요, 그냥 대충 잠만 잘 수 있는 곳이면 돼요. 하룻밤에 4-6만 원 정도 하는 데로 가 주세요.”사거리 신호등에 걸려 차를 잠깐 멈춘 진태하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싸웠어?”오서린은 얼굴을 붉힌 채 급히 진태하의 시선을 피했다.“아... 아니요... 그냥 은채가 남자친구랑 같이 있길래,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그녀의 반응에 진태하는 이내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눈치채고 눈썹을 찌푸렸다.신호가 다시 파란 불로 바뀌자 그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곧이어 근처에서 별로 안 비싸 보이는 호텔 하나를 발견한 오서린이 외쳤다.“여기요, 여기서 내려주세요!”하지만 진태하는 못 들은 척 차를 멈춰주지 않았다.10분 정도 지나자 차는 어느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오서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태하를 바라보았다.진태하는 그녀의 시선을 말끔히 무시하고는 주차를 마친 후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집에 빈방 있어.”진태하의 집에 빈방이 있다는 것쯤은 오서린도 알고 있었다. 당장 어제 그 방에서 머물렀으니 말이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라고요?”오서린은 놀란 표정으로 눈
오서린은 그제야 어떻게 진태하의 냉장고가 가득 차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진태하는 식사를 책임져줄 가사 도우미를 고용한 상태였다. 는 냉장고에서 아직 먹을 수 있는 식재료들을 꺼내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그거 다 버리시는 거예요?”“선생님께서 위가 안 좋으셔서요. 하루 지난 건 못 드세요.”오서린은 방금 그 하루 지난 식재료들로 요리를 했다. 시장이나 마트에서 파는 식재료들도 정말 싱싱한 게 맞는지 장담할 수 없는데, 진태하가 괜히 까다롭게 구는 것처럼 보였다.“아주머니, 그거 다 저 주세요. 제가 내일 가져갈게요.”김혜숙은 잠시 진태하를 바라보며 망설였다.“냉장고에 더 있으니까 그냥 가져가세요.”“아, 네.”봉투를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서던 김혜숙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선생님이 집에 여자분을 데리고 오는 건 또 처음 보네요. 여자친구분이시죠? 너무 예뻐요!”오서린은 예쁘다는 말을 처음 듣는 게 아닌데도 괜히 진태하의 여자친구라는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저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그...”하지만 뭐라고 설명해줘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이 시간에 남자 혼자 사는 집까지 따라온 것도 그렇고, 단둘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김혜숙은 오서린이 괜히 부끄럼을 타는 줄로만 알고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향했다.문이 닫히자 오서린은 진태하를 돌아보며 물었다.“저렇게 음식 낭비하는 거 안 아까워요?”“그럼 내일 냉장고에 남는 거 다 가져가든가.”“그런 뜻이 아니잖아요!”“나한테 신경 끄고 너나 잘 챙기지 그래?”짜증 섞인 진태하의 말에 오서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자신은 남의 집에서 신세 지고 있는 처지였던지라 더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었다.오서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다시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진
비율 좋고 훤칠한 진태하의 실루엣이 문틈으로 보였다.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오서린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진태하도 순간적으로 넋을 잃은 듯 멍하니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그 자리에 3초 정도 얼어붙어 있던 오서린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두 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쏠려 머리끝까지 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외쳤다.“왜... 왜 노크도 안 하고 들어와요?”진태하는 조금의 회피도 하지 않은 채 오서린의 알몸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낮게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비서한테 옷 좀 사 오라고 했어...”오서린은 그제야 진태하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확인했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너무 대담하고 노골적이었다.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는 오서린이 소리쳤다.“그거 그냥 바닥에 두고 문 닫아요, 얼른!”진태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숙여 쇼핑백을 방 안까지 들여보냈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다시 오서린에게 향했다. 이윽고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오서린은 갑작스러운 문소리에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문밖에서는 진태하가 문고리를 꽉 쥐고 있었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 관절은 이미 하얗게 질려있었고, 거센 호흡 역시 불규칙적이었다.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아랫배로 몰려드는 열기를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방금 목격한 오서린의 모습이 다시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백옥같은 피부, 곧게 뻗은 긴 다리, 그리고 봉긋하게 올라온 가슴...놀란 듯 얼어붙은 오서린의 표정 역시 그동안 억눌러왔던 진태하의 욕망을 자극했다. 그날 호텔에서 맡았던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다시금 코를 맴도는 것 같았다.진태하는 뒤늦게 자신이 뭘 떠올리고 있는지를 자각하고는 뒤늦게 고개를 숙여 잔뜩 성난 자신의 것을 바라보았다.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오서린은 진태하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정말 네가 알아서 했다면 내가 지금 이런 전화를 하고 있겠니?”송미경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이면엔 걱정과 조바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태하야, 넌 우리 집안 하나뿐인 아들이야. 네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면 그럼 진씨 가문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니?”그때였다.“저 여자 친구 있어요.”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말에 정작 진태하 본인도 놀랐다.생각보다 감정은 빠르게 입으로 이어졌고 그 말이 실수였단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니? 여자 친구가 있다고? 어느 집 딸이야? 왜 난 처음 듣는데?!”송미경은 놀란 나머지 새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근데 왜 오늘 그 연회장에 따라온 거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노력 중이에요.”“진짜야?”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금방 감을 잡았다.아들은 거짓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올해 설에 데리고 갈게요.”“좋아. 그럼 당분간은 맞선 안 잡을게. 근데 태하야, 엄마 속이면 진짜 가만 안 둬. 알았지?”“네.”통화를 끝낸 진태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짧은 숨을 토해냈다.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아랫배에 남은 뜨거운 잔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한참 뒤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지나 옆방으로 향했다.오서린의 핸드백과 휴대폰을 조심스레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잔잔하게 들리는 숨소리, 흰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머리카락.진태하는 조용히 이불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다음 날 아침.오서린은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든 사이에 흘러간 밤을 되짚었다.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옷도 말끔히 입고 있었다.‘별일 없었던 건가?’그
사실 진태하 역시 오서린에게 아무 생각이 없던 게 아니었다.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맥주 두 병을 사 오는 걸 그렇게 쉽게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오서린이 잠들었더라면 진태하도 그녀를 그냥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서린은 깨어있었고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얇은 슬립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고 얇은 천 사이로 드러나는 곡선은 꽤 적나라했다.샤워를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기는 껍질을 막 벗긴 과일처럼 유혹적이었다.진태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너, 술 취했어.”“나 안 취했어요!”오서린은 오히려 그의 목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그리고 들뜬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정적으로 말했다.“그쪽이 인정 안 해도 상관없어요. 나 알아요. 일부러 나 데리러 온 거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사님들도 그랬어요. 그쪽, 원래 그런 자리에 안 나온다면서요. 근데 오늘은 나 때문에 왔죠? 결국 날 데리러 온 거였잖아요.”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조잘거림.술기운에 발그레 물든 입술이 흔들리며 단어마다 꿀처럼 흘러내렸다.진태하의 목 안쪽이 바짝 말라왔고 혀끝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스쳤다.그가 자부하던 자제력은 언제나 그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오서린. 너 계속 이러면 나 진짜 장담 못 해.”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속삭였다.“나 오늘 부모님 생겼어요.”그 순간, 진태하의 굳어가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오서린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오늘 나, 딸로 받아줬어요.”“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그 집엔 강지후가 있어서 같이 살 수는 없어요...”“친구도 있긴 한데 은채도 이제 남자 친구 생겨서 그 집에도 못 얹혀살아요.”“나, 혼자인 거 너무 싫어요. 외로운 건 더 무섭고. 근데 지금이 그쪽이 있어서
빨간불에 차량은 천천히 멈춰 섰다.무심코 고개를 돌린 진태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렷한 시선을 느꼈다.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오서린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잘생겼으니까요.”스물둘, 한창 생기가 얼굴 가득한 나이였다.선홍빛 입술에 하얀 치아,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그 미소는 햇살처럼 눈 부셨다.진태하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낮고 짙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앞으론 그런 옷 입지 마.”오서린은 눈을 깜빡이며 당황했다.고개를 숙이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깊은 가슴골이었다.순간, 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당황한 나머지 옷깃을 위로 끌어올렸지만 이 옷은 애초에 그런 디자인이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슬그머니 손을 내린 오서린은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러던 중, 차가 포장마차 앞을 지나가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배고파요.”결국 두 사람은 꼬치와 맥주를 사 들고 진태하의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오서린은 배정숙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벗고 샤워를 한 뒤 민소매 상의에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그녀가 집에서 가장 편하게 입는 차림이었다.며칠 전, 진태하의 집에서 처음 밤을 보내고 난 후 오서린은 결심했다.‘이 집에 자주 올 일이 생길 거야. 그럴 거면 아예 옷 몇 벌쯤은 갖다 두자.’매번 그의 옷을 빌리는 것도 번거롭고 어색했다.그녀의 이런 행동을 진태하는 말리지 않았고 입으로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운운하면서도 그의 눈빛과 행동은 달랐다.오늘 밤도 그랬다.오서린이 “TV 좀 볼게요.”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머리를 말리고 번 헤어로 단정히 묶은 오서린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얼굴을 한 번 훑어본 뒤, 만족한 듯 방문을 열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저.. 어머님과 같이 가게 됐어요.]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송미경의 차에 올라탔다.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송미경은 곱게 차려입은 그녀를 한 번 흘긋 보더니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배 여사는 정말 복도 많지. 이렇게 예쁜 딸을 뒀으니 말이야.”그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예전에 네가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갔으면 지금쯤 나도 아들이랑 딸 하나씩 두고 있었을 텐데... 서린아, 아예 아줌마 딸 할래?”송미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오서린은 머쓱하게 웃었다.그 순간, 앞자리의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기 도련님 차 같은데요.”송미경이 고개를 돌리자 마당 한 켠에 아직 떠나지 않은 진태하의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순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아직 안 갔잖아? 급한 일 있다고 했던 거 다 거짓말이었네. 그냥 출발해요!”송미경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고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자신이 보낸 메시지는 그대로 읽음 표시도 없이 남아 있었다.‘봤을까? 봤겠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지?’오서린은 틈날 때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를 살폈다.차가 큰 도로로 접어들어도 진태하의 차량은 따라오지 않았다.‘혹시 메시지를 또 보내야 하나...’그 생각이 스치려는 찰나 송미경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뭐라고요! 쓰러져요? 의사 선생님은 오셨어요? 네,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송미경은 전화를 끊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기사에게 물었다.“근데 이 길 아니잖아요, 잘못 든 거 아니에요?”기사는 당황한 듯 말했다.“그게... 사모님께서 오서린 양 먼저 데려다주신다고 하셔서요.”순간, 송미경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스쳤고 그걸 눈치챈 오서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여기서 저 그냥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갈게요.”“안 돼. 밤길에 어떻게 혼자 보내.”“요즘은 앱으로 금방
“맞아, 이제 막 왔으니까 금방 가지는 않을 거야. 얼른 딸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겠다. 지금 출발하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여인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그 대화 너머 살짝 떨어진 자리에서 오서린은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표정은 담담했지만 귀 끝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 순간. 오서린의 핸드백 안에서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보자 단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갈 거야?]보낸 사람은 진태하였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오서린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아무 말도 없었지만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그의 눈빛은 담담했고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듯 차분했다.오서린은 손에 쥔 휴대폰을 꾹 쥐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짧고 단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갈래요.]곧이어 다시 메시지 한 줄이 도착했다.[밖에서 기다릴게.]그 말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어보니 진태하는 이미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오서린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어머니를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얘가 겨우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가겠대?”그때 송미경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이번엔 뭔가 달라질 줄 알았지. 정신 좀 차리고 여자 친구 하나 진지하게 만나려나 했더니 내가 또 괜히 기대만 했네. 그렇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옆에 서 있던 배정숙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태하가 요즘 얼마나 바빠요. 병원 일에 회사 일까지 맡고 있다던데. 워낙 책임감이 강한 애니까 이해해 줘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오라고 하면 되죠.”“지금 벌써 스물여덟이에요. 나이가 적으면 말도 안 하지...”송미경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이대로 두면 서른 넘기고 마흔 넘길까 봐 두려워요. 나는 대체 언제쯤 며느리 한 번 보나 몰라. 손자 하나 안고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임다정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하게 물었다.“누구시죠?”찬물이 정수리에 쏟아진 듯 임다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그녀는 얼어붙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눌렀다.“나 기억 안 나요?”진태하의 조각 같은 얼굴은 무표정했다.잠시 그녀를 살피던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무심하게 되물었다.“환자였나?”그 말에 임다정의 얼굴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수치심과 참을 수 없는 절망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죄송합니다. 지금은 제 근무 시간이 아니라서요. 다른 일정이 있습니다.”진태하는 딱 잘라 말한 뒤,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 옆을 지나쳐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임다정은 마치 텅 빈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몇 년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던 이름과 사진첩에 몰래 저장했던 그 미소, 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우리 아들 왔네!”연회장 안, 송미경의 목소리가 환한 미소와 자부심을 머금은 채 울려 퍼졌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귀부인들은 앞다퉈 딸들을 앞으로 내세우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리를 탐색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서린의 혼처 얘기에는 외면하던 얼굴들은 이제는 딸을 진태하 옆에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정숙의 속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미소 속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오서린은 진태하의 등장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그 순간, 송미경의 한마디가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난 또 의사들은 다 여자 만날 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 서린이 남자 친구도 의사라며?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잘만 하던데? 그런데 너는 스물여덟이 되도록 왜 이러니 진짜.”한순간에 연회장 안의 시선이 모두 오서린을 향했다.진태하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얗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고 가슴은 쿵쿵
“서린이 이 옷을 입으니까 정말 예쁘네요. 내가 뭐랬어요? 분홍색은 서린이한테 찰떡이라니까요!”한 여자가 연신 칭찬을 늘어놓자 배정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우리 딸이 워낙 예쁘잖아요. 뭘 입혀도 다 잘 어울리죠.”“딸?”옆에 있던 송미경이 살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러자 곧장 주위 사람들이 웃으며 상황을 설명해 줬다.“아, 이번에 정식으로 양녀로 들였대요. 오늘 발표도 했고요.”송미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그런데 전에 서린이를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그녀는 남의 뒷말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최근 강지후와 오서린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배정숙은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사실 그녀도 요즘 들어 괜히 아들과 오서린의 관계를 이리저리 떠벌려 결국 오서린이에게 상처만 준 건 아닐까 싶어서 후회하고 있었다.“우리 아들이 그럴 복이 없었나 봐요.”배정숙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서린이가 그 아이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났거든요.”“그래요?”송미경은 흥미로운 듯 오서린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래서 남자 친구가 의사라며?”그 말에 오서린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이미 한 번 뱉어버린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송미경의 다음 질문이 두려워졌다.“어느 병원에서 근무해?”그 순간, 오서린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설마 병원 이름 얘기하면 어느 의사인지 까지 물어보는 거 아니야?’다행히도 그때 배정숙이 기지를 발휘했다.“송 여사님, 그런데 아드님은 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잖아요.”송미경이 가볍게 핸드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조금 늦는다더니 혹시 깜빡했나? 내가 전화 좀 해볼게요.”그 시각, 연회장 바깥.임다정은 조용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차 안은 담배
라수아는 주변에 모여 있던 여자들을 쓱 훑어보았다.하성시에서 이름 좀 있다고 하는 인사들은 죄다 이 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녀들 사이에서는 종종 남편이나 자식 이야기가 대화의 주요 소재였다.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네 아들이 오서린과 사귄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이 모임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사실은 날마다 경쟁이 치열한 무대나 다름없었다.자식 혼사는 당연히 신중하게 따져야 했고 며느리는 백번 천번 골라야 하며 딸은 반드시 상위 집안으로 시집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존재했다.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물었다.“서린아, 오늘은 남자 친구 안 데리고 왔어?”배정숙의 체면을 생각한 오서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일이 바빠서요. 오늘은 못 왔어요.”“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도 일한다고?”몇몇 사모님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막고 수군거렸다.그 모습을 본 배정숙은 속이 다 타는 기분이었다.‘이럴 땐 그냥 대충 둘러대지, 어쩜 저렇게 솔직하냐고...’“그래? 남자 친구는 무슨 일 하는데?”그 질문에 오서린은 가장 먼저 진태하를 떠올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의사예요.”“의사라, 어쩐지.”사모님들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그들 자식 중 의사인 남자는 없었고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의사는 성실한 직일 수는 있어도 ‘상류층 자제’들에게 흔한 직업은 아니었으니까.‘역시 배 여사가 사윗감 보는 눈이 없구먼.’그들 눈빛 속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어느 병원에 있어?”누군가 집요하게 물었고 배정숙의 얼굴엔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그때였다.“어머, 저기 송 여사 아니야?”누군가의 말에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연회장이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송미경.하성시의 최상위 재벌 가문 중 하나인 송씨 가문의 안주인이자 진태하의 어머니였다.귀부인들은 경쟁하듯 딸을 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고 라수아도 딸을 이끌고 빠르게 가서 환한 미소로 인사를
오서린은 배정숙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뭉클해졌다. 그동안 마음 한편에 조용히 묻어두었던 외로움이 감사와 애틋함으로 바뀌며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그녀는 이 자리에서 배정숙 부부가 난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눈물로 가득한 눈을 꾹 감은 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외쳤다.“아빠, 엄마...”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정숙은 오서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고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강인헌 역시 눈가가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이며 오서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착한 딸...”행사가 마무리되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 배정숙은 오서린을 데리고 재벌가 사모님들 모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딸’을 데리고 등장한 그녀를 향해 모두가 진심 어린 칭찬과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넸고 배정숙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근데 말이에요, 라 여사님. 양도준 군은 오늘 왜 안 왔어요? 이런 좋은 자리에 한 번쯤 얼굴 비출 법도 한데?”순간,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고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라수아를 향했다.오서린은 어머니가 왜 갑자기 양도준의 이름을 꺼낸 건지 알 수 없었고 라수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 애가 이런 모임 별로 안 좋아해서요.”배정숙은 가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웃었다.“내가 듣기론 그 아이가 우리 서린이를 꽤 좋아한다던데요? 오늘 나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그 말에 라수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우리 아들이 그런 말 한 적 없어요.”단호하고 건조한 말투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느껴졌다.배정숙도 그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는 속으론 불쾌함이 밀려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그럼, 여러분 댁에 괜찮은 청년 있으면 우리 서린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