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린은 어렸을 때부터 예쁘장한 외모로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그녀가 연두색 나비 무늬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자마자 시끌벅적하던 룸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다들 주변에 모여들어 아부하기 급급했고,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기대했던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누군가 이를 보고 농담을 건넸다.“강지후 찾아?”오서린이 부인하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마도 지금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을 거야.”“서프라이즈?”상대방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오서린은 어리둥절했다.“무슨 서프라이즈?”“몰랐어?”인형처럼 정교한 이목구비와 생기발랄한 느낌의 원피스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줬으며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똑같은 옷을 입는다고 해도 분위기만큼은 흉내 낼 수 없다는 사실은 속으로 뻔했다.비록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이따 강지후가 와서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오늘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라고 했거든. 서린아, 혹시 무슨 얘기인지 알아?”오서린이 고개를 저었다.“오늘 서린이 생일인데 뻔하지 않겠어? 프러포즈하려고 준비하는 거겠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서린은 깜짝 놀라더니 심장이 점점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사실 이번 생일 파티도 강지후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심지어 오늘 오후 전화까지 와서 저녁에 예쁘게 꾸미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서프라이즈가 곧 프러포즈일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철이 들어서 서로 알고 지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며 오랜 시간 함께해온 만큼 인생의 동반자로 굳게 믿고 있었다.그런데 며칠 전 강지후의 어머니께서 얼른 혼인신고 하라고 했더니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었다.오서린은 그가 아직 결혼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한 줄 알았다.그런데 몰래 준비하고 있었다니?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신이 나서 휴대폰을 꺼냈다. 절친인 임다정에게 희소식을 전하며 언제 오냐고 물었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혹시 무
클럽.진태하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만 자리를 비우려고 일어섰다.정혁수가 깜짝 놀랐다.“이제 9시인데 벌써 가요?”“별로 재미없어.”“왜요? 예쁜 여자들이 이렇게나 많잖아요. 병원에서 야간 근무하는 것보다 백 배 낫지!”이내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있는 젊은 남녀를 가리켰다.“저 행복해하는 표정 보이죠? 정녕 하나도 안 부러워요?”진태하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싸늘한 눈빛으로 어깨를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이거 놔.”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정혁수는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진태하가 동기 중에서 얼굴 담당이라 어쩔 수 없었다.만약 오늘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이성의 연락처조차 따지 못했을 것이다.정혁수의 말투가 한결 누그러졌고 애처로운 얼굴로 부탁했다.“형, 저 이제 27살이에요. 엄마가 올해도 솔로라면 지금 사는 집을 팔아버리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설마 쫓겨나는 꼴을 마냥 지켜볼 정도로 매정하진 않겠죠?”“그러니까! 저도 혼기가 꽉 차서 이번에도 여자 친구를 못 만나면 설에 돌아오지도 말라고 했어요.”“나도 연애하고 싶어요. 형,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다른 사람도 질세라 한 마디씩 보탰다.진태하는 눈살을 찌푸려다.정혁수가 말을 이어갔다.“이게 다 형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심지어 저보다 한 살이 더 많은데 어머님께서 얼마나 손자를 보고 싶어 하겠어요?”정혁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 시대 사람은 대를 잇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돈을 아등바등 모아 고향에 있는 집까지 팔아서 하성시에 10억짜리 30평 아파트를 사주었다.결국 은행에서 대출받은 4억을 갚는 신세까지 갔다.부모님만 떠올리면 안쓰러운 마음에 서로를 헤아릴 줄 아는 반쪽을 만나 인생 제2막을 함께하고 싶은 건 매한가지였다.“돌아가서 잘래.”의사한테 가장 부족한 게 바로 수면이다.물론 이는 정혁수도 공감하는 바이다.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형
“삼촌이라 부른다고 해서 진짜 날 조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제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오서린은 간신히 욕조에서 기어 나왔다.그동안 다정하게 챙겨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텔에 같이 온 자체가 실수였다.“그런 꼴로 나간다고?”등 뒤로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문을 열자마자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었다. 여름 원피스는 원단이 얇아 몸에 찰싹 달라붙어 불편했을뿐더러 속옷 패드까지 비뚤어져 특정 부위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이런 모습으로 밖에 나가는 건 말이 안 되었다.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가린 다음 문을 벌컥 열었다.물론 가만히 서서 싸늘한 목소리로 진태하를 쫓아냈다.“얼른 나가요. 이제 그만 잘래요.”진태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이리 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봐.”안 그래도 기분이 씁쓸한데 하필이면 아픈 곳을 찌르다니.지금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의욕이 당최 없었다. 특히 진태하 앞에서 더더욱.그의 얼굴만 봐도 임다정이 떠올랐고, 대신 진태하에게 연애편지를 전해줬던 기억까지 되살아났다.당시 물과 불처럼 상극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임다정을 위해 자존심마저 기꺼이 내려놓았다.그런데 어찌 뒤통수를 칠 수 있단 말이지?오서린은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어느덧 술기운이 점점 올라왔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자 임다정을 4년 동안이나 짝사랑하고도 끝내 마음을 얻지 못한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임다정이 그녀의 남자친구를 빼앗았으니 진태하와 관계를 하면 보란 듯이 한 방 먹이는 셈이지 않은가?충동에 휘말리는 건 찰나였다.오서린은 욱한 마음에 문을 닫고 손을 내린 뒤 진태하를 향해 걸어갔다.물에 젖은 원피스는 여자의 굴곡진 몸매를 여실히 드러냈다.22살이면 이제 꽤 성숙했다고 볼 수 있다.진태하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눈앞의 유혹적인 광경에도 꿈쩍하지 않고 똑바로 응
진태하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오서린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10시까지 질질 끌었다.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체크아웃 시간이 되었다고 찾아오는 직원도 없었다.지금쯤이면 떠나지 않았을까?이내 방문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고 심호흡한 뒤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밖에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는데 눈앞에 희뿌연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고개를 돌리는 순간 칠흑 같은 눈동자와 맞닥뜨렸다.진태하는 손에 든 담배를 비벼껐다.“조식 먹으러 가자.”그러고 나서 앞장서서 걸어갔다.오서린은 입만 달싹였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갔다.1층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자 직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다가왔다.오서린은 대충 주문하고 다시 돌려주었다.방 안에서 가방을 찾지 못해 휴대폰으로 시간을 때우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이내 뻘쭘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창밖의 분수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한편, 주문을 마친 진태하는 직원이 자리를 피하고 나서야 맞은편에 앉은 무심한 표정의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그리고 한참 후에 기괴한 침묵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책임질게.”오서린의 동공이 문득 커졌고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말까지 더듬었다.“뭐라고요? 책임이 웬 말이죠?”진태하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네가 술 취한 틈을 타서 저지른 일이니까 만약 책임을 묻는다면 뭐든지 할게.”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말뜻을 어찌 모르겠는가?비록 자기 잘못처럼 얘기했지만 따지고 보면 어젯밤 먼저 생떼를 부린 사람은 그녀였다.그냥 해본 말까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특히, 진태하의 약속이면 더더욱.오서린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테이블 밑에 놓인 손가락을 불끈 움켜쥐고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니요. 필요 없어요.”진태하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어차피 원나잇이잖아요. 다 큰 어른인데 이해해요.”그리고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어갔다.“어제 취했거든요. 태하 씨도 내가 술 마신
오서린은 카페를 나서는 임다정을 바라보았다.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종업원에게 계산을 부탁하고 일어나서 자리를 떠났다....택시에서 내리자 휴대폰이 울렸고 낯선 번호였다.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받기 싫어서 그냥 끊어버렸다.그리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자마자 벨 소리가 다시 울렸고 아까 그 번호였다.결국 짜증이 나서 전화를 받고 한 소리 하려던 찰나 상대방이 먼저 쏘아붙였다.“오서린! 네가 다정이한테 헤어지라고 얘기한 거야?”강지후는 웬만해서 풀네임을 부르지 않았다.아침에 확인한 문자만 보더라도 그녀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다.하지만 지금은 임다정을 위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오서린은 심장이 따끔거렸고, 아파트 정문에 멈춰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강지후, 앞으로 임다정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헤어지든 말든 알아서 해. 나랑 상관없으니까 더 이상 연락하지 마.”“다정이가 널 만났다고 했어!”강지후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지금 이런 모습이 눈에 진짜 거슬리는 거 알아? 네가 상처받을까 봐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결혼을 강요하는 거야? 난 단지 여동생으로...”“여동생?”또다시 언급하자 오서린은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눈을 뜨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강지후, 여동생한테 스킨십하는 오빠를 본 적 있니? 대체 어떤 남매가 키스하지? 어제는 내 체면을 생각해서 사람들 앞에서 참고 넘겼지만 감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모욕해?”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찌 됐든 너랑 결혼할 생각은 없어. 다정에게 사과하고 이제부터 남매로 지내자, 예전처럼 널 챙겨줄게.”“내가 왜 사과해야 하지? 그리고 넌 또 무슨 낯짝으로 명령하고?”“지금 우리 집에 살고 있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볼 텐데 꼭 그렇게 서로 얼굴을 붉히며 지내야겠어?”오서린은 머뭇거리다가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이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리고 대답
오서린은 다시 주은채의 집으로 돌아왔다.거실 한쪽에 캐리어를 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한참이 지나서 휴대폰이 울리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신인을 확인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아줌마, 왜요?”“서린 씨, 그게... 도련님이 방을 확인해보라고 했는데 옷과 액세서리가 없어진 것 같다고 하네요. 그리고 악어가죽 가방 두 개가 사라졌대요. 당장 돌려주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해서라도 받아낸다고...”장순묘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고 누가 봐도 마지못해 하는 말이었다.오서린도 충격을 금치 못했다. 강지후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곧이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씩씩거리며 말했다.“전 가져간 적이 없어요. 캐리어도 확인했잖아요. 본인이 직접 목격하기라도 했대요?”“서린 씨, 진정하세요. 도련님이 너무한 건 사실이지만 제가 보기에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길 원하는 듯싶어요. 밖이 아무리 좋아도 제집만큼 하겠어요?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잖아요. 도련님 때문에 화가 났다면 사모님이 돌아온 다음 말씀드려 보세요. 대신 한 바탕 화풀이해주실 거예요.”“거긴 우리 집이 아니거든요?”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장순묘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강지후와 어머님이 사는 집에서 어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이좋게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겠는가?게다가 강지후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역겨울 정도였다.“아줌마! 대체 언제 물건 돌려준대요?”휴대폰 너머로 강지후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오서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전 가져간 적이 없으니까 경찰에 신고하라고 해요.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죠. 태생이 바른 사람인데 그따위 물건을 왜 탐내겠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그리고 휴대폰을 소파에 내동댕이친 다음 얼굴을 감싼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곧이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늦은 밤.사람들이 모여서 포커를 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이번에도 망한 패가 걸린 강지후는 미간을 찌푸렸고, 옆에서 담뱃갑을 집어 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하도윤이 힐긋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금연한다더니, 왜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강지후는 묵묵부답했고, 누군가 농담을 건넸다.“그러니까, 금연한다고 하지 않았어? 담배 냄새가 잔뜩 배어서 집에 갔다가 서린한테 문전 박대당하면 어떡해?”“젠장! 조용히 있으면 어디 덧나냐?”버럭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하도윤이 발로 농담한 친구를 걷어차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지후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여자 친구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속상해할지도 모르니까 앞으로 입 조심해.”다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다. 평소에 허물이 없을 정도로 친했기에 서로를 비웃는 일이 잦아도 대개 농담으로 여기고 그냥 넘기곤 했다.강지후가 이토록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다.남자는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상황인지 속으로 뻔한 하도윤은 게임을 재개하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오늘 단톡방에서 한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았어?”강지후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내 일에 신경 꺼.”“어차피 얘기해줘도 안 듣잖아. 가까운 사이일수록 선을 지켜야지, 설령 여자 친구를 만난다고 해도 어떻게 임다정과 사귀냐? 서린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가다가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면 어떡하려고?”“닥치고 포커나 해. 왜 이렇게 말이 많지?”강지후는 카드를 내동댕이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떠나기 전에 옆에 있는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 누구랑 사귀든 내 맘이야. 걔가 뭐라고 동의까지 받아야 해?”“이게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잖아.”하도윤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서린이 진짜 남자친구 생겼어?”강지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언제까지 지껄일래?”하도윤이 양도준을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도준이가 서린을 좋아하는 걸
오전 진료 마지막 환자를 보낸 후 진태하는 가운을 벗고 손을 깨끗이 씻은 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금방 갈게.”이내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고 정혁수가 목청을 높였다.“형, 전 이미 식당에서 밥 먹고 있어요. 조카가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데 모처럼 왔으니 맛있는 거나 사줘요.”휴대폰을 들고 걸어가 손잡이를 잡는 순간 진태하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조카?”“네, 그저께 밤에 클럽에서 만난 예쁜 여자요. 형을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정혁수는 밀지 말라고 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형한테 알려주려고 했는데 괜찮다네요.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밖에서 기다린다며, 어찌나 철이 들었는지.”“이제 제 차례가 왔으니 이만 끊어요. 얼른 조카 데리고 밥 먹으러 가요. 점심때 식당들이 대기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서둘러요.”그러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진태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살을 찌푸렸다.문을 열자 휴게실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오서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인스타를 다시 다운 받아서 한창 눈팅하던 중이었다. 오전에 파파라치가 임다정과 강지후의 연애 소식을 폭로하고 당사자가 직접 인정까지 하자 네티즌들은 두 사람의 과거를 파헤치며 지지글을 올리기 시작했다.소꿉친구, 찰떡궁합, 천생연분...오서린은 목격담을 보고 나서야 작년 크리스마스에 강지후가 임다정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출장 간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광고 촬영이 있다고 해서 당시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임다정이 올린 로맨틱한 저녁 식사 사진 속 남자는 손목에 그녀가 선물한 아르마니 시계를 차고 있었다.오서린은 화가 나서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이때, 늘씬한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고 고개를 들자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를 발견했다.그는 오늘 검은색 셔츠를 입고 바지도 같은 계열의 색상을 매치했으며 단추는 목 끝까지 채웠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자체만으로 남성미를 물씬 풍겼다.진태하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정말 네가 알아서 했다면 내가 지금 이런 전화를 하고 있겠니?”송미경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이면엔 걱정과 조바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태하야, 넌 우리 집안 하나뿐인 아들이야. 네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면 그럼 진씨 가문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니?”그때였다.“저 여자 친구 있어요.”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말에 정작 진태하 본인도 놀랐다.생각보다 감정은 빠르게 입으로 이어졌고 그 말이 실수였단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니? 여자 친구가 있다고? 어느 집 딸이야? 왜 난 처음 듣는데?!”송미경은 놀란 나머지 새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근데 왜 오늘 그 연회장에 따라온 거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노력 중이에요.”“진짜야?”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금방 감을 잡았다.아들은 거짓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올해 설에 데리고 갈게요.”“좋아. 그럼 당분간은 맞선 안 잡을게. 근데 태하야, 엄마 속이면 진짜 가만 안 둬. 알았지?”“네.”통화를 끝낸 진태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짧은 숨을 토해냈다.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고 아랫배에 남은 뜨거운 잔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한참 뒤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지나 옆방으로 향했다.오서린의 핸드백과 휴대폰을 조심스레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잔잔하게 들리는 숨소리, 흰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머리카락.진태하는 조용히 이불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다음 날 아침.오서린은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든 사이에 흘러간 밤을 되짚었다.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옷도 말끔히 입고 있었다.‘별일 없었던 건가?’그
사실 진태하 역시 오서린에게 아무 생각이 없던 게 아니었다.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맥주 두 병을 사 오는 걸 그렇게 쉽게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오서린이 잠들었더라면 진태하도 그녀를 그냥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서린은 깨어있었고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얇은 슬립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고 얇은 천 사이로 드러나는 곡선은 꽤 적나라했다.샤워를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기는 껍질을 막 벗긴 과일처럼 유혹적이었다.진태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려 손을 뻗었다.“너, 술 취했어.”“나 안 취했어요!”오서린은 오히려 그의 목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그리고 들뜬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정적으로 말했다.“그쪽이 인정 안 해도 상관없어요. 나 알아요. 일부러 나 데리러 온 거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사님들도 그랬어요. 그쪽, 원래 그런 자리에 안 나온다면서요. 근데 오늘은 나 때문에 왔죠? 결국 날 데리러 온 거였잖아요.”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조잘거림.술기운에 발그레 물든 입술이 흔들리며 단어마다 꿀처럼 흘러내렸다.진태하의 목 안쪽이 바짝 말라왔고 혀끝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스쳤다.그가 자부하던 자제력은 언제나 그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오서린. 너 계속 이러면 나 진짜 장담 못 해.”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속삭였다.“나 오늘 부모님 생겼어요.”그 순간, 진태하의 굳어가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오서린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오늘 나, 딸로 받아줬어요.”“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그 집엔 강지후가 있어서 같이 살 수는 없어요...”“친구도 있긴 한데 은채도 이제 남자 친구 생겨서 그 집에도 못 얹혀살아요.”“나, 혼자인 거 너무 싫어요. 외로운 건 더 무섭고. 근데 지금이 그쪽이 있어서
빨간불에 차량은 천천히 멈춰 섰다.무심코 고개를 돌린 진태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렷한 시선을 느꼈다.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오서린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잘생겼으니까요.”스물둘, 한창 생기가 얼굴 가득한 나이였다.선홍빛 입술에 하얀 치아,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그 미소는 햇살처럼 눈 부셨다.진태하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낮고 짙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앞으론 그런 옷 입지 마.”오서린은 눈을 깜빡이며 당황했다.고개를 숙이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깊은 가슴골이었다.순간, 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당황한 나머지 옷깃을 위로 끌어올렸지만 이 옷은 애초에 그런 디자인이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슬그머니 손을 내린 오서린은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러던 중, 차가 포장마차 앞을 지나가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배고파요.”결국 두 사람은 꼬치와 맥주를 사 들고 진태하의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오서린은 배정숙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벗고 샤워를 한 뒤 민소매 상의에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그녀가 집에서 가장 편하게 입는 차림이었다.며칠 전, 진태하의 집에서 처음 밤을 보내고 난 후 오서린은 결심했다.‘이 집에 자주 올 일이 생길 거야. 그럴 거면 아예 옷 몇 벌쯤은 갖다 두자.’매번 그의 옷을 빌리는 것도 번거롭고 어색했다.그녀의 이런 행동을 진태하는 말리지 않았고 입으로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운운하면서도 그의 눈빛과 행동은 달랐다.오늘 밤도 그랬다.오서린이 “TV 좀 볼게요.”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머리를 말리고 번 헤어로 단정히 묶은 오서린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얼굴을 한 번 훑어본 뒤, 만족한 듯 방문을 열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저.. 어머님과 같이 가게 됐어요.]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송미경의 차에 올라탔다.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송미경은 곱게 차려입은 그녀를 한 번 흘긋 보더니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배 여사는 정말 복도 많지. 이렇게 예쁜 딸을 뒀으니 말이야.”그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예전에 네가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갔으면 지금쯤 나도 아들이랑 딸 하나씩 두고 있었을 텐데... 서린아, 아예 아줌마 딸 할래?”송미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오서린은 머쓱하게 웃었다.그 순간, 앞자리의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기 도련님 차 같은데요.”송미경이 고개를 돌리자 마당 한 켠에 아직 떠나지 않은 진태하의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순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아직 안 갔잖아? 급한 일 있다고 했던 거 다 거짓말이었네. 그냥 출발해요!”송미경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고 오서린은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자신이 보낸 메시지는 그대로 읽음 표시도 없이 남아 있었다.‘봤을까? 봤겠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지?’오서린은 틈날 때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를 살폈다.차가 큰 도로로 접어들어도 진태하의 차량은 따라오지 않았다.‘혹시 메시지를 또 보내야 하나...’그 생각이 스치려는 찰나 송미경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뭐라고요! 쓰러져요? 의사 선생님은 오셨어요? 네,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송미경은 전화를 끊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기사에게 물었다.“근데 이 길 아니잖아요, 잘못 든 거 아니에요?”기사는 당황한 듯 말했다.“그게... 사모님께서 오서린 양 먼저 데려다주신다고 하셔서요.”순간, 송미경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스쳤고 그걸 눈치챈 오서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여기서 저 그냥 내려주셔도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갈게요.”“안 돼. 밤길에 어떻게 혼자 보내.”“요즘은 앱으로 금방
“맞아, 이제 막 왔으니까 금방 가지는 않을 거야. 얼른 딸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겠다. 지금 출발하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여인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그 대화 너머 살짝 떨어진 자리에서 오서린은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표정은 담담했지만 귀 끝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 순간. 오서린의 핸드백 안에서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보자 단 한 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갈 거야?]보낸 사람은 진태하였다.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오서린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아무 말도 없었지만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그의 눈빛은 담담했고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듯 차분했다.오서린은 손에 쥔 휴대폰을 꾹 쥐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짧고 단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갈래요.]곧이어 다시 메시지 한 줄이 도착했다.[밖에서 기다릴게.]그 말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어보니 진태하는 이미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오서린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어머니를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얘가 겨우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가겠대?”그때 송미경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이번엔 뭔가 달라질 줄 알았지. 정신 좀 차리고 여자 친구 하나 진지하게 만나려나 했더니 내가 또 괜히 기대만 했네. 그렇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옆에 서 있던 배정숙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태하가 요즘 얼마나 바빠요. 병원 일에 회사 일까지 맡고 있다던데. 워낙 책임감이 강한 애니까 이해해 줘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오라고 하면 되죠.”“지금 벌써 스물여덟이에요. 나이가 적으면 말도 안 하지...”송미경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이대로 두면 서른 넘기고 마흔 넘길까 봐 두려워요. 나는 대체 언제쯤 며느리 한 번 보나 몰라. 손자 하나 안고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임다정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하게 물었다.“누구시죠?”찬물이 정수리에 쏟아진 듯 임다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그녀는 얼어붙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눌렀다.“나 기억 안 나요?”진태하의 조각 같은 얼굴은 무표정했다.잠시 그녀를 살피던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무심하게 되물었다.“환자였나?”그 말에 임다정의 얼굴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수치심과 참을 수 없는 절망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죄송합니다. 지금은 제 근무 시간이 아니라서요. 다른 일정이 있습니다.”진태하는 딱 잘라 말한 뒤,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 옆을 지나쳐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임다정은 마치 텅 빈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몇 년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던 이름과 사진첩에 몰래 저장했던 그 미소, 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우리 아들 왔네!”연회장 안, 송미경의 목소리가 환한 미소와 자부심을 머금은 채 울려 퍼졌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귀부인들은 앞다퉈 딸들을 앞으로 내세우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리를 탐색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서린의 혼처 얘기에는 외면하던 얼굴들은 이제는 딸을 진태하 옆에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정숙의 속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미소 속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오서린은 진태하의 등장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그 순간, 송미경의 한마디가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난 또 의사들은 다 여자 만날 시간 없는 줄 알았는데, 서린이 남자 친구도 의사라며?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잘만 하던데? 그런데 너는 스물여덟이 되도록 왜 이러니 진짜.”한순간에 연회장 안의 시선이 모두 오서린을 향했다.진태하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오서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얗던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고 가슴은 쿵쿵
“서린이 이 옷을 입으니까 정말 예쁘네요. 내가 뭐랬어요? 분홍색은 서린이한테 찰떡이라니까요!”한 여자가 연신 칭찬을 늘어놓자 배정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우리 딸이 워낙 예쁘잖아요. 뭘 입혀도 다 잘 어울리죠.”“딸?”옆에 있던 송미경이 살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그러자 곧장 주위 사람들이 웃으며 상황을 설명해 줬다.“아, 이번에 정식으로 양녀로 들였대요. 오늘 발표도 했고요.”송미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그런데 전에 서린이를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그녀는 남의 뒷말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최근 강지후와 오서린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배정숙은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사실 그녀도 요즘 들어 괜히 아들과 오서린의 관계를 이리저리 떠벌려 결국 오서린이에게 상처만 준 건 아닐까 싶어서 후회하고 있었다.“우리 아들이 그럴 복이 없었나 봐요.”배정숙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서린이가 그 아이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났거든요.”“그래요?”송미경은 흥미로운 듯 오서린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래서 남자 친구가 의사라며?”그 말에 오서린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이미 한 번 뱉어버린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송미경의 다음 질문이 두려워졌다.“어느 병원에서 근무해?”그 순간, 오서린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설마 병원 이름 얘기하면 어느 의사인지 까지 물어보는 거 아니야?’다행히도 그때 배정숙이 기지를 발휘했다.“송 여사님, 그런데 아드님은 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잖아요.”송미경이 가볍게 핸드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조금 늦는다더니 혹시 깜빡했나? 내가 전화 좀 해볼게요.”그 시각, 연회장 바깥.임다정은 조용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차 안은 담배
라수아는 주변에 모여 있던 여자들을 쓱 훑어보았다.하성시에서 이름 좀 있다고 하는 인사들은 죄다 이 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녀들 사이에서는 종종 남편이나 자식 이야기가 대화의 주요 소재였다.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네 아들이 오서린과 사귄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이 모임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사실은 날마다 경쟁이 치열한 무대나 다름없었다.자식 혼사는 당연히 신중하게 따져야 했고 며느리는 백번 천번 골라야 하며 딸은 반드시 상위 집안으로 시집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존재했다.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물었다.“서린아, 오늘은 남자 친구 안 데리고 왔어?”배정숙의 체면을 생각한 오서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일이 바빠서요. 오늘은 못 왔어요.”“이렇게 늦은 시간까지도 일한다고?”몇몇 사모님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막고 수군거렸다.그 모습을 본 배정숙은 속이 다 타는 기분이었다.‘이럴 땐 그냥 대충 둘러대지, 어쩜 저렇게 솔직하냐고...’“그래? 남자 친구는 무슨 일 하는데?”그 질문에 오서린은 가장 먼저 진태하를 떠올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의사예요.”“의사라, 어쩐지.”사모님들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그들 자식 중 의사인 남자는 없었고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의사는 성실한 직일 수는 있어도 ‘상류층 자제’들에게 흔한 직업은 아니었으니까.‘역시 배 여사가 사윗감 보는 눈이 없구먼.’그들 눈빛 속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어느 병원에 있어?”누군가 집요하게 물었고 배정숙의 얼굴엔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그때였다.“어머, 저기 송 여사 아니야?”누군가의 말에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연회장이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송미경.하성시의 최상위 재벌 가문 중 하나인 송씨 가문의 안주인이자 진태하의 어머니였다.귀부인들은 경쟁하듯 딸을 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고 라수아도 딸을 이끌고 빠르게 가서 환한 미소로 인사를
오서린은 배정숙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뭉클해졌다. 그동안 마음 한편에 조용히 묻어두었던 외로움이 감사와 애틋함으로 바뀌며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그녀는 이 자리에서 배정숙 부부가 난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눈물로 가득한 눈을 꾹 감은 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외쳤다.“아빠, 엄마...”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정숙은 오서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고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강인헌 역시 눈가가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이며 오서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착한 딸...”행사가 마무리되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 배정숙은 오서린을 데리고 재벌가 사모님들 모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딸’을 데리고 등장한 그녀를 향해 모두가 진심 어린 칭찬과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넸고 배정숙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근데 말이에요, 라 여사님. 양도준 군은 오늘 왜 안 왔어요? 이런 좋은 자리에 한 번쯤 얼굴 비출 법도 한데?”순간,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고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라수아를 향했다.오서린은 어머니가 왜 갑자기 양도준의 이름을 꺼낸 건지 알 수 없었고 라수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 애가 이런 모임 별로 안 좋아해서요.”배정숙은 가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웃었다.“내가 듣기론 그 아이가 우리 서린이를 꽤 좋아한다던데요? 오늘 나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그 말에 라수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우리 아들이 그런 말 한 적 없어요.”단호하고 건조한 말투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느껴졌다.배정숙도 그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는 속으론 불쾌함이 밀려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그럼, 여러분 댁에 괜찮은 청년 있으면 우리 서린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