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찌를 듯한 무림의 성지, 무애산 수무대.그곳, 깊은 고요 속에서 한 명의 백발 노인이 좌선하고 있었다.그는 바로 무애산의 주인이자 소욱의 스승인 현릉풍이었다.수무대 입구.한 제자가 조심스레 다가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스승님,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도착하셨습니다.”“지금 바로 뵙기를 원하시는데, 어찌 하시겠습니까?”세속의 규율대로라면, 황제가 직접 찾아왔다면 마땅히 문 앞까지 나가 맞이해야 했다.그러나 현릉풍은 속세를 초월한 은둔 고수였다.황제라 해도, 그에게는 예외가 아니었다.그렇다고 손님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잠시 후,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그리고 평온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들을 들여보내거라.”“예, 스승님.”수무대 밖.봉구안은 높은 곳에서 끝없이 펼쳐진 산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봉우리 위로 구름이 바람에 흩날리며 마치 신선의 거처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소욱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아름다우냐?”봉구안은 시선을 멀리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그야말로 인간계의 신선경이라 할 만하군요.”소욱은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버려진 아이였다.아버지에게 미움받고, 황궁에서 내쳐진 채 이 산에 던져졌다.그에게 무애산은 절망과 고립의 상징이었다.그는 무애산을 증오했다.그러나 지금 그는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 있었다.“너와 함께 이곳에 서 있다니… 감회가 새롭구나.”그는 조용히 손을 더욱 꽉 쥐었다.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구안아, 스승님은 인자한 분이지만, 규율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야.”“정말로 그분을 설득할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봉구안은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제가 언제 이 곳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했습니까?”소욱의 이마가 순간적으로 찌푸려졌다.“무슨 뜻이냐?”그때, 제자가
고요하던 수무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현릉풍의 미소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방금… 황후가 뭐라고 했는가?황제의 몸에 이상이 있어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니?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황제의 몸 상태는 완벽했다.그 어디에도 문제가 없었다.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소욱이었다.그는 봉구안이 한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내 몸이… 문제였다고?”한순간 혼란스러웠다.그러나 곧 깨달았다.부부는 하나다.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는 두 사람의 문제이다.그리고, 봉구안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이해하는 순간, 소욱은 즉시 반응했다.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바로 스승을 향해 말했다.“스승님, 제 몸을 진찰해 주십시오.”그 순간, 현릉풍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허…”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거, 참…”제자와 황후. 어쩜 이렇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지.그러나, 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현릉풍이 이 진료를 거부하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그가 이미 두 사람의 방문 목적을 알고 있었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보내 직접 마중하게 했다면?그것은 이미 치료를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다만, 무애산의 규율이 걸림돌일 뿐이었다.잠시 후. 현릉풍은 갑자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허허허!”그는 흰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그의 눈빛이 번뜩이며 소욱을 바라보았다.“겉으로는 황제를 위한 치료라니…”“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속셈을 숨기고 있구나!”그러나, 소욱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에는 혼란이 가득했다.현릉풍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보아하니, 저 애송이는 전혀 모르고 있었군.’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황후의 단독 계획이었다.그녀는 이미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승부를 결정지어 놓았던 것이다.소욱을 키우며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릉풍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제자가 완전히 당하
오양련은 깊은 주름이 패인 얼굴에 단호한 기백을 담고 있었다.“황제께서는 숙연과 닮지 않았습니다.”“한 명은 어머니를, 한 명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셨지요.”“하지만 오늘 직접 확인해 보니, 저 아이는 황제 폐하의 부친을 닮은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그 아이는… 가짜입니다!”정전 안이 한순간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모신 상궁은 주춤하며 머뭇거렸다.“대인, 오늘은…”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께서 숙연 대인을 찾은 날입니다.”“오늘 하루 황제께서 기분이 유독 좋아 보이셨고, 덕분에 병세도 호전될지 모릅니다.”“그런데 이렇게 바로 숙연 대인의 신분을 의심하신다면…”그러나, 황제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조용히 손을 들었다.그 순간, 모신 상궁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오양련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폐하, 저는 알고 있습니다.”“폐하께서는 그 아이를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시지요.”“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진짜 정체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부디 신중히 조사하신 후,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황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좋다. 그렇다면 그 반쪽짜리 옥비녀는 어떻게 설명하겠느냐?”오양련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그 비녀가 진짜라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였다.황제는 비녀가 가짜일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단호한 이유는 단 하나.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었다.황제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 옥비녀는 진짜다.”“그렇다면, 저 아이가 진짜 숙연의 행방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오양련과 모신 상궁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황제는 이미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아무런 의심도 드러내지 않고, 유영을 받아들였다.이유는 단 하나였다.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진짜 숙연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오양련은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해 두셨군요.”그러나 그 순간
무애산에 지내는 제자들은 서른 명 남짓.그중 다수는 소욱과 함께 자란 이들로, 서로 거리낌 없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다.이날, 드물게 방에서 나온 소욱은 정면에서 한 사형제를 마주쳤다.상대는 약을 들고 있었는데,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폐하, 약은 따뜻할 때 드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참자.’소욱은 묵묵히 약을 받아 들었다.그러나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사형제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폐하, 그래서 그동안 후사가 없었던 거였군요. 진작에 스승님께 오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순간, 소욱의 이성이 흔들렸다.그가 고개를 홱 돌리는 순간, 그 사형제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저 놈들이 감히!!”이를 악문 소욱은 살기를 삼키며 방으로 돌아왔다.그러나 방 안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봉구안이 있었다.소욱은 즉시 얼굴을 부드럽게 풀며,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구안아, 약 먹을 시간이구나.”겉으로는 자신이 먹을 약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봉구안은 주저 없이 약 그릇을 들어 올렸다.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소욱은 예전에 이 약을 맛본 적이 있었다.상상 이상으로 쓴 약이었다.그녀가 매일 이렇게 삼켜야 한다는 사실에 소욱은 속이 쓰려왔다.“괜찮느냐?”그러자, 봉구안은 덤덤하게 말했다.“약이 쓰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겠지요.”그러고는 바로 물었다.“소군주 역시 한때 한냉증을 앓았다고 들었습니다.”“그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적은 없으십니까?”소욱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당시 태의가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기에, 먼 길을 오지 않았다.”“그리고, 소아의 병세와 너의 병세는 달랐다.”“그 아이가 필요로 하는 약재는 무애산에는 없었지.”“결국,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소욱이 그렇게 말하며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는 천지설산에서 있었던 그녀의 일을 떠올렸다.그의 시선이 깊어졌다.그
서녀국 황제의 밀서에는 유영에 대한 모든 의혹이 담겨 있었다.봉구안은 조용히 서신을 읽었다.그리고, 문득 눈을 들어 소욱을 바라보았다.“서녀국에서도 유영이 진짜 숙연이 아닐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이 예상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며칠 전, 그녀는 이미 유씨 가문의 초상화를 받아보았다.동방가문이 각종 정보를 취합해 그려낸 초상화 속 유씨 부부와 죽은 막내아들이 있었다.봉구안은 초상화를 면밀히 살폈다.유영과 그녀의 남동생은 부모와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그러나 유영의 어머니만은 달랐다.그녀는 유씨 가문의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었다.왜냐하면, 유영의 나이는 숙연과 정확히 일치했다.과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분명, 이 안에는 숨겨진 진실이 존재할 터였다.봉구안은 조용히 서신을 접었다.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황궁 내부.정희는 궁을 거닐며 어머니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어머니, 다들 그러던데요.”“황제 폐하께서 황위를 어머니께 넘기실 거라고요!”유영은 미소를 머금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이미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서녀국 황제는 젊은 시절 심한 부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태중의 아이를 잃었다.그 후로 병이 깊어져 더 이상 후사를 볼 수 없었다.그렇기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 서녀국을 이을 자가 아무도 없었다.유일한 후계자는 동생 숙연 뿐이었다.그렇지 않다면 나라를 위해 재능 있는 자에게 왕좌를 물려줘야 했다.그러나, 그 어떤 황제도 스스로 권좌를 포기하지 않는다.결국 서녀국의 황위는 반드시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그녀는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유영은 차를 천천히 마시며, 정희에게 단단히 당부했다.“이 이야기는 절대 입 밖에 내선 안 된다.”“특히, 네 이모 앞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정희는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알아요, 어머니. 성급하게 굴어선 안 되죠.”“폐하께서 직접 선포하기 전까지는 신중
남제 황성.봉부.임씨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오열하고 있었다.“내 아들의 명예가 이렇게까지 추락하다니!”그녀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그런데 그 옆에서 봉명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어머니, 전 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임씨는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소리쳤다.“네가 봉가를 떠나, 청루의 여인을 맞아들인다고?!”“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봉명헌 역시 답답한 심정이었다.그러나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영이는 그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이제 그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이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듯했다.겉으로는 봉가에서 쫓겨난 신세지만, 그의 몸에는 봉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언젠가 그가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면, 아버지와 형이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통곡하고 있었다.임씨는 머릿속이 하얘졌다.‘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서방이 떠나기 전, 그녀에게 내명을 맡기며 가정을 잘 다스리고 아들을 보살피라고 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한단 말인가?이제 그녀의 봉가 정실 부인이 될 꿈은 더욱 멀어진 듯했다.……강주의 관청을 순찰하던 봉 대인은 집에서 온 서신을 받아들자마자 눈이 뒤집혔다.“이 놈 자식이! 감히 청루 출신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내가 죽은 줄 아느냐!”하지만 그는 강주에 있는 이상, 직책을 벗어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그날 밤, 봉 대인은 급히 서신을 써서 봉안진에게 보냈다.장남에게 꼭 이 혼사를 막아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봉안진 역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참장부.부인 주씨는 봉안진의 옷을 정리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서방님, 오늘 둘째 도련님의 혼례 초청장이 도착했어요. 자희도 가야 할까요?”봉안진은 묵묵히 책상 위의 초청장을 바라보았다.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에는 한숨과도 같은
자신이 또다시 이상해지고 있음을 감지한 서왕은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그 순간, 완부옥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불렀다.“전하~ 어디 가세요? 이리 와보시죠.”서왕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이 여자,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군!그는 이를 갈았다.반드시 이 ‘정충이’을 뽑아내고야 말겠다!……참장부.그즈음, 봉 부인이 장주에서 도성으로 돌아왔다.그러나 불과 두 달 사이,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그녀는 처음부터 유영이 봉 대인과 혼인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봉구안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봉 대인은 혼약을 파기했고, 유영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봉 부인은 얼굴이 굳었다.“유영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 그리고 황후는? 황후를 만나려면 어찌해야 하느냐?”그녀는 초조한 눈빛으로 아들 봉안진을 찾았다.주씨가 그녀를 조용히 달랬다.“어머니, 너무 걱정 마세요.”“이모님은 아마 강주로 돌아가셨을 거예요.”“황후마마께서는 폐하와 함께 각지를 순행 중이라 언제 돌아오실지 아직 알 수 없다고 들었어요.”“서방님께서 저녁에 돌아오시면 자세히 이야기해 드릴거예요.”……그날 저녁, 봉안진이 귀가하자, 봉 부인은 조급한 얼굴로 다그쳤다.“안진아, 솔직히 말해 보거라.”“네 아버지와 이모가 떠난 게 정말 황후 때문이냐?”봉구안은 분명 그녀에게 유영 모녀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었다.그런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이유는 무엇인가?봉안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어머니, 후궁은 정사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아버지가 강주로 부임한 것은 황후마마의 뜻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뜻입니다.”“그럼 이모는? 네 이모와 네 아버지는 왜 혼례를 안하기로 한 것이냐?”봉안진은 어머니의 말을 끊고 조용히 말했다.“어머니,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와 이모께서 떳떳하셨다면, 황후께서 그들을 방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황후는 제 친누이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친딸이죠.”“설마 어머니께 해를 끼칠 사람이라
서여국.최근 서여국에 한 명의 신의가 찾아왔다.그의 뛰어난 의술 덕분에 황제의 병세가 한결 나아졌다.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기쁜 일이 생기면 정신도 맑아지는 법이지.”황제는 오랜 세월 떨어져 있던 숙연과 다시 재회하며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편전 안.그러나 유영의 얼굴은 어두웠다.분명 황제는 오래지 않아 죽을 터였다.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갑자기 병세가 호전되다니!그 빌어먹을 의원은 대체 어디서 굴러온 자란 말인가?이대로라면 황제는 당분간 죽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그녀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안 돼!’그녀는 이렇게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유영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침전 안.황제는 막 약을 다 마신 참이었다.유영은 침상 앞까지 다가가, 공손하게 몸을 숙였다.“언니.”황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숙연이구나. 무슨 일이냐?”시녀가 둥근 의자를 가져오자, 유영은 자연스럽게 앉으며 말을 꺼냈다.“언니께서 건강을 회복하셨다니, 이제야 안심이 됩니다. 다만, 중요한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무슨 일이냐?”유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언니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제 남제는 예전과 다릅니다. 대전이 끝난 후, 여러 나라가 남제에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수많은 상업 통로가 열렸습니다.”“심지어 동산국조차도 남제와의 교역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 서여국에도 절호의 기회입니다.”황제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으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유영은 미소를 머금고 계속해서 말했다.“상업이 활성화되면, 남제는 본국의 물품을 다른 나라에 판매하고, 다른 나라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건 모든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우리 서여국 역시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됩니다. 우리도 이
송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술을 펼쳐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다.그에게 어디서 치료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하지만 남제를 떠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그는 신중히 고민해야 했다.그러나, 봉장미가 이미 결심한 이상,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그는 봉장미의 지아비였다.아내가 타국으로 떠나려 하는데, 혼자 남을 수는 없었다.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결심한 듯 말했다.“좋아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다만, 부모님께 먼저 말씀드려야겠어요.”봉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물론이지.”이로써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었다.이제 봉구안은 약쟁이 사건을 포함한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같은 시각, 황성에서는 또 다른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황성, 동쪽 교외.그곳에는 적막한 저택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은 싸늘할 정도로 조용했다.서재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한 명은 책상 너머 깊은 그림자 속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조심스레 서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나리, 서쪽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약쟁이를 운반하던 상인이 관아에 붙잡혔고, 현재 황성으로 압송되고 있다 합니다.”책상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살려둘 필요 없다. 알아서 처리하거라”“예, 나으리!”보고를 올리던 남자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이미 처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다만, 이번에는 관청에서 경계를 심하게 강화한 탓에, 그 상인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책상 뒤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상인은 상관없다.”“진짜 제거해야 할 대상은 서쪽에 남아 있는 자들이다.”보고를 올리던 남자의 손이 잠시 움찔했다.서쪽에 있는 사람들.그들은 모두 십 년 넘게 그를 따라온 충성스러운 부하들이었다.그들을 전부 죽인다는 것은 사실상 서쪽에 있는 자신들의 부하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그러나, 이 남자는 결코 약점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보고를 올리
봉장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자신이 서여국 황실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 그러니까 서여국은 황실의 혈통이 있어야만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거지?”“황제 자리에 송가의 사람이 앉아 있어야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봉장미는 다시금 고민하다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어머니는?”“그저 송가의 혈통이 필요하다면, 어머니도 가능하지 않아?”“굳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그녀는 확신했다.언니가 자신을 황제로 삼으려는 이유가 단순히 혈통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봉구안은 잠시 침묵한 후, 부드럽게 말했다.“나는 네가 나를 대신하길 원해.”“첫째, 이모님의 유서에는 나에게 서여국을 맡긴다고 적혀 있어.”“둘째, 서여국의 여러 나라들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 얼굴이니까.”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봉장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현재, 약쟁이 사건을 조사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서여국을 직접 다스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그러나 봉장미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하지만 봉장미는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얼굴을 손바닥에 부드럽게 문질렀다.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언니… 정말 많이 힘들었겠어.”그녀는 오랫동안 가만히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몰랐다.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말이다.하지만 단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언니가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결코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그녀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또한, 그녀의 언니는 남제의 황후였다.남제의 황후인 그녀가 어찌 서여국에 가서 왕이 될 수 있겠는가?“갈게.”“언니, 나를 서여국으로 보내줘.”봉구안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러자 봉장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나는 언니와 다르게 서방님과 함께 갈
장주.연말이 가까워지자, 백성들은 지나간 어려움을 딛고 하루하루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거리마다 등불이 걸리고 집집마다 새해를 맞이할 준비로 활기가 넘쳤다.송가.송 대인이 황성에서 돌아오자, 봉장미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님, 황후마마의 병은 치료할 방법이 있나요?”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황후마마를 뵙지도 못했다.”순간 봉장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상태가 더욱 걱정되었지만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녀는 송려와 함께 약재를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계속 신경이 쓰였다.그 모습을 눈치챈 송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부인.”“황후마마께서는 폐하와 함께 직접 여러 지역을 순시 중이시니, 반드시 무사하실 것...”그러나 봉장미의 불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마마뿐만이 아니에요. 어머니께서도 소식이 없어요.”“분명히 서신을 보내겠다고 하셨는데…”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걱정이 배어 있었다.송려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소.”“장모님께서 가족과 함께 계시느라 잠시 잊으셨을 수도 있으니 말이오.”하지만 봉장미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그때 급하게 뛰어 들어온 하인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도련님, 도련님!!! 마님!”“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마님께서 어서 대청으로 오시라고 하십니다!”봉장미는 여전히 낯선 사람을 응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특히, 송가의 친척들과 마주하는 것은 더욱 부담스러웠다.그녀는 송려의 소매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서방님, 저는 그냥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송려는 그녀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부인, 걱정하지 마시오.”하지만 하인이 급히 덧붙였다.“도련님, 마님 이번엔 꼭 가셔야 합니다!”“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언니가 왔다고요?!”봉장미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아
이틀 후, 거센 눈보라가 잦아들었다.소욱은 이미 조정의 업무를 마무리한 상태였고, 더 이상 궁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느니 직접 동행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장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한편, 약쟁이 매매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 수도로 압송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발견된 약쟁이 또한 황성으로 보내졌다.봉구안과 소욱은 그 약쟁이를 직접 확인했다.얼굴이 심하게 손상된 그는, 허름한 천을 몸에 두른 채 골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흐릿했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마치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존재와도 같았다.그런 상태에서 그가 제대로 된 진술을 할 리 없었다.……장주까지는 최소 보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그러나 소욱은 그 시간을 단순한 여행으로 보내지 않았다.그는 곳곳을 돌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피고, 민정을 조사했다.과거, 여러 나라가 남제를 공격했을 당시 북쪽의 몇몇 성은 일부러 적을 유인하는 데 사용되었다.미리 피신한 백성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집과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다.이에 반해, 북연 군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분풀이하듯 마을을 불태웠다.지금 남제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재정착과 피해 복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소욱은 문서상의 보고만으로는 신뢰할 수 없었다.그의 예상은 정확했다.길을 가며 직접 확인해보니, 조정에서 할당한 복구 비용이 백성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더욱이, 몇몇 관리들은 지주들과 결탁하여 땅을 빼앗고 있었다.전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가난한 백성들을 더욱 착취하고 있던 것이다.풍양현.한밤중, 풍양현 관아에서는 불빛이 일렁였다.몇몇 관리들이 급히 장부를 불태우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손놀림에는 불안이 묻어났다.“황제는 서쪽으로 갔다더니, 왜 갑자기 북쪽으로 온 거야?!”“지금 그걸 따질 때냐? 빨리 태워!”“이게 들키면 우리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쾅!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찬바람이 방 안으로
소욱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남제가 북연과 다른 나라들을 정복할 수 있다면, 서여국만큼은 내가 지키도록 하마.”“하지만 내가 막는다고 해서, 후대 황제들이 이를 탐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서여국이 남제와 대등할 만큼 강해지지 않는다면, 결국 남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겠지.”“십 년 내에 스스로 강해지지 않는다면, 서여국의 멸망은 시간문제일 것이다.”“그 원인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겠지.”그의 말은 완곡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명한 경고였다.그녀를 사랑하는 한, 서여국을 위해 힘을 쏟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남제와 서여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는 서여국을 포기할 생각이었다.허나 오직 서여국이 강해져야만 남제의 야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소욱은 말을 마치고, 혹여나 그녀가 화를 낼까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웠다.“구안아, 미안하다.”“내가 남제의 힘을 서여국을 위해 기꺼이 소모하겠다고는 약속할 수 없겠구나.”봉구안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애초에 제가 원한 것도 그런 약속은 아니었어요.”“다만, 저와 서여국의 관계를 떠나서 지금 남제와 서여국이 맞서 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첫째, 북연과 동산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저희는 협력해야 합니다.”“둘째, 서여국은 여성 중심 사회입니다. 남제가 정복한다 해도, 제대로 다스리긴 어려울 겁니다.”소욱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걱정 마라.”“지금 당장은 서여국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하지만 네가 서여국을 지키고 싶다면, 반드시 강한 나라로 만들도록 해라.”봉구안은 가볍게 웃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소욱이지.’그가 '황부' 운운하며 장난을 치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본래의 날카로운 본능을 드러내고 있었다.……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갈망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먼 길을 오셨는데, 배고프지 않
봉구안은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소욱이… 자신의 황부가 되겠다고?“지금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예상치 못한 말에 그녀는 얼떨떨했다.그러나 소욱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널 찾으러 오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남제와 서여국은 결국 하나가 될 것이다.”“그렇다면, 나는 단지 너를 따라 처가에 몇 년 머무는 것뿐이지 않겠느냐.”“소주와 정국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나면…”“처가요?”봉구안은 어이가 없어 그의 말을 끊었다.“그걸 혼인 후 친정에 가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겁니까?”소욱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이쯤 되면, 황제가 바쁜 정무에 치여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소욱은 변함없이 단호했다.“내 말은 전부 진심이다. 결국, 네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이제 결정하거라.”봉구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듣자 하니, 폐하께서는 저를 몰아세워 선택을 강요하고 계시는군요.”“그리고 황부라니… 설마 제가 그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소욱은 곧장 미간을 좁혔다.“그럼, 네 계획은 무엇이냐?”“설마 서여국에서 다른 사내를 황부로 세울 생각인 것이냐?”같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였다.봉구안은 이마를 짚으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소욱… 아니 폐하 그만하세요.”그녀는 화가 나서 그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이미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소욱이 터무니없는 논리로 몰아붙이니 더 이상 감정을 다스릴 힘조차 없었다.그러나 소욱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구안아, 너는 내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남제는 이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당분간 큰 위기는 없을 것이다.”“오히려, 서여국이 소주와 정국을 평정하고 남제와 연합하여 북연을 견제한다면, 우리는 더욱 강력한 동맹이 될 수 있다.”“그렇다면, 내가 너를 따라 서여국으로 가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너는 황제
문이 열리자, 예상대로 소욱이 서 있었다.봉구안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내려놓고,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소욱 역시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마치,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그녀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원래대로라면 그는 곧장 서여국으로 향해야 했다.하지만 은위로부터 그녀가 남제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다.다행히도, 눈보라가 그녀를 붙잡아 두었다.“부인…”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그래서 호칭을 바꿨지만, 담긴 감정만큼은 그대로였다.봉구안은 방 안에 외부인이 있는 만큼, 소욱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그리고 오백에게 계속 감시를 맡긴 뒤, 객잔 주인에게 은화 한 덩이를 건넸다.주인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오늘 밤, 자신이 본 것도, 들은 것도… 그 무엇도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방 안으로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마자, 소욱이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그의 외투는 눈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축축한 모피 깃이 목덜미에 닿자 싸늘한 감촉이 전해졌다.봉구안은 그를 가볍게 밀어내고,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아주었다.“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눈보라가 심한데, 몸은 괜찮으십니까?”소욱은 심한 눈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그런데도 이 험한 날씨를 뚫고 직접 찾아오다니… 그녀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소욱이 그녀의 손목을 조용히 잡았다.그의 눈빛에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나는 괜찮다.”“그보다… 서여국의 일은 어떻게 된 것이냐? 너 정말…”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하지만 봉구안이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까.그녀가 선택한 것은 서여국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었다.그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소욱은 다시 한 번 그녀를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구안아, 너는 언제까지나 내 황후다.”봉구안은 그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서여국의 이야기는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약 거래.봉구안이 오랫동안 추적해 온 사건이었다.하지만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채, 막다른 길에 부딪히고 있었다.그런데 이런 작은 객잔에서 뜻밖의 단서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봉구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장사꾼은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이제야 상자 속의 물건이 무엇인지 알게 된 듯한 모습이었다.그럼 됐다.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삼켜야 하는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당신들, 대체 누구야! 약쟁이이라니, 무슨 헛소리야! 나는 표사야! 저건 내가 다른 도시에 옮겨 치료받게 할 환자일 뿐이라고!”“크읏!”갑자기 목이 조여왔다.숨이 턱 막히는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살기가 서린 차가운 눈빛.그 순간, 장사꾼은 확신했다.이 여인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말이다.……밤이 길었다.동이 틀 무렵, 객잔 주인이 따뜻한 물을 들고 객잔의 각 방을 돌았다.그러다 한 방 앞에 섰을 때, 문이 열렸다.그런데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문틈으로 보이는 차가운 입술.객잔 주인은 순간적으로 피비린내를 맡았다.착각인가?하지만 곧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이곳은 외진 곳에 있는 객잔. 별의별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다.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객잔 주인은 재빨리 몸을 돌려 떠났다.방 안에는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그리고, 침대 위. 한 명의 장사꾼이 손발이 묶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봉구안은 책상에 앉아, 피가 묻은 단도를 천천히 닦고 있었다.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새어드는 새벽빛. 하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둡고 깊었다.장사꾼은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다.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흐느끼는 듯한 소리만 새어 나왔다.오백은 침대 옆에 서서 검을 안은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의 발밑에는 나무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그 안에는 약쟁이가 들어있었다.위험한 존재였다.당장 풀어둘 수도 없었다.봉구안은
”마마, 며칠째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길을 나설 수가 없습니다. 백 리 안에서는 이 객잔 하나밖에 찾지 못했습니다.”오백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봉구안은 말의 고삐를 쥐고 뒤따랐다.눈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소용없었다. 눈발이 매섭게 얼굴을 후려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얼렸다.객잔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하게 식었던 몸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어서 오십시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끼니만 드실 건가요, 아니면 방을 잡으시겠습니까?”객잔 주인이 따뜻한 차를 들고 다가와 물었다.“방을 잡지. 두 개. 그리고 술 두 병에 소고기 네 근을 내오도록 하거라.”봉구안은 털썩 자리에 앉으며 머리카락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알겠습니다, 나리!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객잔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이곳에는 봉구안 일행뿐만 아니라 몇몇 장사꾼들도 폭설에 발이 묶여 있었다.그들은 마차 가득 물건을 싣고 길을 떠나야 했기에, 봉구안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장사꾼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이 눈이 언제 멈출까? 이번 물건을 제때 배달하지 못하면 큰 손해를 보게 생겼어.”“그러게 말이야. 올겨울 교역이 활발해 한몫 잡으려 했는데, 이런 날씨라니. 하늘도 참 야속하군.”봉구안도 이 눈이 빨리 그치길 바랐다.서여국의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소욱과 상의해야 했다.오백은 마구간으로 가서 직접 말에게 먹이를 주고 난 뒤, 본능적으로 뒤뜰을 한 바퀴 돌았다. 돌아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마마, 저 장사꾼들이 가져온 짐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무심히 장사꾼들을 흘겨보고는 오백에게 말했다.“이만 너도 앉아서 쉬거라. 음식도 좀 먹고…”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눈보라가 창문을 때렸다.밤이 깊었지만, 봉구안은 마음이 복잡해 쉽게 잠들지 못했다.추운 날씨 때문인지 몸도 으슬으슬 떨렸다.그때, 문득 소욱의 모습이 떠올랐다.그가 자신의 차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