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031화

Author: 일설연우
”마마, 며칠째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길을 나설 수가 없습니다. 백 리 안에서는 이 객잔 하나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오백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봉구안은 말의 고삐를 쥐고 뒤따랐다.

눈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소용없었다. 눈발이 매섭게 얼굴을 후려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얼렸다.

객잔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하게 식었던 몸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끼니만 드실 건가요, 아니면 방을 잡으시겠습니까?”

객잔 주인이 따뜻한 차를 들고 다가와 물었다.

“방을 잡지. 두 개. 그리고 술 두 병에 소고기 네 근을 내오도록 하거라.”

봉구안은 털썩 자리에 앉으며 머리카락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알겠습니다, 나리!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객잔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는 봉구안 일행뿐만 아니라 몇몇 장사꾼들도 폭설에 발이 묶여 있었다.

그들은 마차 가득 물건을 싣고 길을 떠나야 했기에, 봉구안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

장사꾼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눈이 언제 멈출까? 이번 물건을 제때 배달하지 못하면 큰 손해를 보게 생겼어.”

“그러게 말이야. 올겨울 교역이 활발해 한몫 잡으려 했는데, 이런 날씨라니. 하늘도 참 야속하군.”

봉구안도 이 눈이 빨리 그치길 바랐다.

서여국의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소욱과 상의해야 했다.

오백은 마구간으로 가서 직접 말에게 먹이를 주고 난 뒤, 본능적으로 뒤뜰을 한 바퀴 돌았다. 돌아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마마, 저 장사꾼들이 가져온 짐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봉구안은 무심히 장사꾼들을 흘겨보고는 오백에게 말했다.

“이만 너도 앉아서 쉬거라. 음식도 좀 먹고…”

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눈보라가 창문을 때렸다.

밤이 깊었지만, 봉구안은 마음이 복잡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몸도 으슬으슬 떨렸다.

그때, 문득 소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차가운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32화

    약 거래.봉구안이 오랫동안 추적해 온 사건이었다.하지만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채, 막다른 길에 부딪히고 있었다.그런데 이런 작은 객잔에서 뜻밖의 단서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봉구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장사꾼은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이제야 상자 속의 물건이 무엇인지 알게 된 듯한 모습이었다.그럼 됐다.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삼켜야 하는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당신들, 대체 누구야! 약쟁이이라니, 무슨 헛소리야! 나는 표사야! 저건 내가 다른 도시에 옮겨 치료받게 할 환자일 뿐이라고!”“크읏!”갑자기 목이 조여왔다.숨이 턱 막히는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살기가 서린 차가운 눈빛.그 순간, 장사꾼은 확신했다.이 여인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말이다.……밤이 길었다.동이 틀 무렵, 객잔 주인이 따뜻한 물을 들고 객잔의 각 방을 돌았다.그러다 한 방 앞에 섰을 때, 문이 열렸다.그런데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문틈으로 보이는 차가운 입술.객잔 주인은 순간적으로 피비린내를 맡았다.착각인가?하지만 곧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이곳은 외진 곳에 있는 객잔. 별의별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다.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객잔 주인은 재빨리 몸을 돌려 떠났다.방 안에는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그리고, 침대 위. 한 명의 장사꾼이 손발이 묶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봉구안은 책상에 앉아, 피가 묻은 단도를 천천히 닦고 있었다.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새어드는 새벽빛. 하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둡고 깊었다.장사꾼은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다.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흐느끼는 듯한 소리만 새어 나왔다.오백은 침대 옆에 서서 검을 안은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의 발밑에는 나무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그 안에는 약쟁이가 들어있었다.위험한 존재였다.당장 풀어둘 수도 없었다.봉구안은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33화

    문이 열리자, 예상대로 소욱이 서 있었다.봉구안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내려놓고,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소욱 역시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마치,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그녀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원래대로라면 그는 곧장 서여국으로 향해야 했다.하지만 은위로부터 그녀가 남제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다.다행히도, 눈보라가 그녀를 붙잡아 두었다.“부인…”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그래서 호칭을 바꿨지만, 담긴 감정만큼은 그대로였다.봉구안은 방 안에 외부인이 있는 만큼, 소욱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그리고 오백에게 계속 감시를 맡긴 뒤, 객잔 주인에게 은화 한 덩이를 건넸다.주인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오늘 밤, 자신이 본 것도, 들은 것도… 그 무엇도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방 안으로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마자, 소욱이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그의 외투는 눈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축축한 모피 깃이 목덜미에 닿자 싸늘한 감촉이 전해졌다.봉구안은 그를 가볍게 밀어내고,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아주었다.“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눈보라가 심한데, 몸은 괜찮으십니까?”소욱은 심한 눈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그런데도 이 험한 날씨를 뚫고 직접 찾아오다니… 그녀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소욱이 그녀의 손목을 조용히 잡았다.그의 눈빛에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나는 괜찮다.”“그보다… 서여국의 일은 어떻게 된 것이냐? 너 정말…”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하지만 봉구안이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까.그녀가 선택한 것은 서여국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었다.그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소욱은 다시 한 번 그녀를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구안아, 너는 언제까지나 내 황후다.”봉구안은 그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서여국의 이야기는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34화

    봉구안은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소욱이… 자신의 황부가 되겠다고?“지금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예상치 못한 말에 그녀는 얼떨떨했다.그러나 소욱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널 찾으러 오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남제와 서여국은 결국 하나가 될 것이다.”“그렇다면, 나는 단지 너를 따라 처가에 몇 년 머무는 것뿐이지 않겠느냐.”“소주와 정국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나면…”“처가요?”봉구안은 어이가 없어 그의 말을 끊었다.“그걸 혼인 후 친정에 가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겁니까?”소욱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이쯤 되면, 황제가 바쁜 정무에 치여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소욱은 변함없이 단호했다.“내 말은 전부 진심이다. 결국, 네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이제 결정하거라.”봉구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듣자 하니, 폐하께서는 저를 몰아세워 선택을 강요하고 계시는군요.”“그리고 황부라니… 설마 제가 그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소욱은 곧장 미간을 좁혔다.“그럼, 네 계획은 무엇이냐?”“설마 서여국에서 다른 사내를 황부로 세울 생각인 것이냐?”같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였다.봉구안은 이마를 짚으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소욱… 아니 폐하 그만하세요.”그녀는 화가 나서 그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이미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소욱이 터무니없는 논리로 몰아붙이니 더 이상 감정을 다스릴 힘조차 없었다.그러나 소욱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구안아, 너는 내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남제는 이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당분간 큰 위기는 없을 것이다.”“오히려, 서여국이 소주와 정국을 평정하고 남제와 연합하여 북연을 견제한다면, 우리는 더욱 강력한 동맹이 될 수 있다.”“그렇다면, 내가 너를 따라 서여국으로 가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너는 황제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35화

    소욱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남제가 북연과 다른 나라들을 정복할 수 있다면, 서여국만큼은 내가 지키도록 하마.”“하지만 내가 막는다고 해서, 후대 황제들이 이를 탐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서여국이 남제와 대등할 만큼 강해지지 않는다면, 결국 남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겠지.”“십 년 내에 스스로 강해지지 않는다면, 서여국의 멸망은 시간문제일 것이다.”“그 원인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겠지.”그의 말은 완곡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명한 경고였다.그녀를 사랑하는 한, 서여국을 위해 힘을 쏟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남제와 서여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는 서여국을 포기할 생각이었다.허나 오직 서여국이 강해져야만 남제의 야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소욱은 말을 마치고, 혹여나 그녀가 화를 낼까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웠다.“구안아, 미안하다.”“내가 남제의 힘을 서여국을 위해 기꺼이 소모하겠다고는 약속할 수 없겠구나.”봉구안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애초에 제가 원한 것도 그런 약속은 아니었어요.”“다만, 저와 서여국의 관계를 떠나서 지금 남제와 서여국이 맞서 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첫째, 북연과 동산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저희는 협력해야 합니다.”“둘째, 서여국은 여성 중심 사회입니다. 남제가 정복한다 해도, 제대로 다스리긴 어려울 겁니다.”소욱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걱정 마라.”“지금 당장은 서여국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하지만 네가 서여국을 지키고 싶다면, 반드시 강한 나라로 만들도록 해라.”봉구안은 가볍게 웃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소욱이지.’그가 '황부' 운운하며 장난을 치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본래의 날카로운 본능을 드러내고 있었다.……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갈망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먼 길을 오셨는데, 배고프지 않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36화

    이틀 후, 거센 눈보라가 잦아들었다.소욱은 이미 조정의 업무를 마무리한 상태였고, 더 이상 궁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느니 직접 동행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장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한편, 약쟁이 매매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 수도로 압송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발견된 약쟁이 또한 황성으로 보내졌다.봉구안과 소욱은 그 약쟁이를 직접 확인했다.얼굴이 심하게 손상된 그는, 허름한 천을 몸에 두른 채 골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흐릿했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마치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존재와도 같았다.그런 상태에서 그가 제대로 된 진술을 할 리 없었다.……장주까지는 최소 보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그러나 소욱은 그 시간을 단순한 여행으로 보내지 않았다.그는 곳곳을 돌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피고, 민정을 조사했다.과거, 여러 나라가 남제를 공격했을 당시 북쪽의 몇몇 성은 일부러 적을 유인하는 데 사용되었다.미리 피신한 백성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집과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다.이에 반해, 북연 군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분풀이하듯 마을을 불태웠다.지금 남제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재정착과 피해 복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소욱은 문서상의 보고만으로는 신뢰할 수 없었다.그의 예상은 정확했다.길을 가며 직접 확인해보니, 조정에서 할당한 복구 비용이 백성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더욱이, 몇몇 관리들은 지주들과 결탁하여 땅을 빼앗고 있었다.전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가난한 백성들을 더욱 착취하고 있던 것이다.풍양현.한밤중, 풍양현 관아에서는 불빛이 일렁였다.몇몇 관리들이 급히 장부를 불태우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손놀림에는 불안이 묻어났다.“황제는 서쪽으로 갔다더니, 왜 갑자기 북쪽으로 온 거야?!”“지금 그걸 따질 때냐? 빨리 태워!”“이게 들키면 우리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쾅!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찬바람이 방 안으로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37화

    장주.연말이 가까워지자, 백성들은 지나간 어려움을 딛고 하루하루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거리마다 등불이 걸리고 집집마다 새해를 맞이할 준비로 활기가 넘쳤다.송가.송 대인이 황성에서 돌아오자, 봉장미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님, 황후마마의 병은 치료할 방법이 있나요?”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황후마마를 뵙지도 못했다.”순간 봉장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상태가 더욱 걱정되었지만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녀는 송려와 함께 약재를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계속 신경이 쓰였다.그 모습을 눈치챈 송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부인.”“황후마마께서는 폐하와 함께 직접 여러 지역을 순시 중이시니, 반드시 무사하실 것...”그러나 봉장미의 불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마마뿐만이 아니에요. 어머니께서도 소식이 없어요.”“분명히 서신을 보내겠다고 하셨는데…”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걱정이 배어 있었다.송려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소.”“장모님께서 가족과 함께 계시느라 잠시 잊으셨을 수도 있으니 말이오.”하지만 봉장미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그때 급하게 뛰어 들어온 하인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도련님, 도련님!!! 마님!”“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마님께서 어서 대청으로 오시라고 하십니다!”봉장미는 여전히 낯선 사람을 응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특히, 송가의 친척들과 마주하는 것은 더욱 부담스러웠다.그녀는 송려의 소매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서방님, 저는 그냥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송려는 그녀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부인, 걱정하지 마시오.”하지만 하인이 급히 덧붙였다.“도련님, 마님 이번엔 꼭 가셔야 합니다!”“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언니가 왔다고요?!”봉장미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아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38화

    봉장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자신이 서여국 황실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 그러니까 서여국은 황실의 혈통이 있어야만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거지?”“황제 자리에 송가의 사람이 앉아 있어야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봉장미는 다시금 고민하다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어머니는?”“그저 송가의 혈통이 필요하다면, 어머니도 가능하지 않아?”“굳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그녀는 확신했다.언니가 자신을 황제로 삼으려는 이유가 단순히 혈통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봉구안은 잠시 침묵한 후, 부드럽게 말했다.“나는 네가 나를 대신하길 원해.”“첫째, 이모님의 유서에는 나에게 서여국을 맡긴다고 적혀 있어.”“둘째, 서여국의 여러 나라들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 얼굴이니까.”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봉장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현재, 약쟁이 사건을 조사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서여국을 직접 다스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그러나 봉장미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하지만 봉장미는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얼굴을 손바닥에 부드럽게 문질렀다.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언니… 정말 많이 힘들었겠어.”그녀는 오랫동안 가만히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몰랐다.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말이다.하지만 단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언니가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결코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그녀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또한, 그녀의 언니는 남제의 황후였다.남제의 황후인 그녀가 어찌 서여국에 가서 왕이 될 수 있겠는가?“갈게.”“언니, 나를 서여국으로 보내줘.”봉구안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러자 봉장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나는 언니와 다르게 서방님과 함께 갈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39화

    송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술을 펼쳐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다.그에게 어디서 치료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하지만 남제를 떠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그는 신중히 고민해야 했다.그러나, 봉장미가 이미 결심한 이상,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그는 봉장미의 지아비였다.아내가 타국으로 떠나려 하는데, 혼자 남을 수는 없었다.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결심한 듯 말했다.“좋아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다만, 부모님께 먼저 말씀드려야겠어요.”봉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물론이지.”이로써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었다.이제 봉구안은 약쟁이 사건을 포함한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같은 시각, 황성에서는 또 다른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황성, 동쪽 교외.그곳에는 적막한 저택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은 싸늘할 정도로 조용했다.서재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한 명은 책상 너머 깊은 그림자 속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조심스레 서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나리, 서쪽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약쟁이를 운반하던 상인이 관아에 붙잡혔고, 현재 황성으로 압송되고 있다 합니다.”책상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살려둘 필요 없다. 알아서 처리하거라”“예, 나으리!”보고를 올리던 남자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이미 처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다만, 이번에는 관청에서 경계를 심하게 강화한 탓에, 그 상인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책상 뒤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상인은 상관없다.”“진짜 제거해야 할 대상은 서쪽에 남아 있는 자들이다.”보고를 올리던 남자의 손이 잠시 움찔했다.서쪽에 있는 사람들.그들은 모두 십 년 넘게 그를 따라온 충성스러운 부하들이었다.그들을 전부 죽인다는 것은 사실상 서쪽에 있는 자신들의 부하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그러나, 이 남자는 결코 약점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보고를 올리

Latest chapter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63화

    방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소욱은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변조하지 못해 지금껏 말을 못 하고 속만 끓이고 있었다.“그 부장문이라는 사람, 여전히 네게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구나.” 소욱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봉구안은 남녀의 연정 따위를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틀 뒤 열릴 무림대회였다.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운산파가 강호에서 가진 세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으니, 이 편이 훨씬 안전한 방법일 터였다.“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냐?” 소욱이 그녀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봉구안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운산파의 실제 실력이 어떨지, 이번 비무대회에서 승산이 얼마나 될지 계산 중입니다.”소욱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고는 귀 가까이 대고 낮게 속삭였다. “내 생각엔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 같구나.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정말 이틀 내내 여기 전진파에 있어야 하는 것이냐?”봉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뿐이니 금세 지나갈 겁니다. 괜히 왔다 갔다 하다가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요.”소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나라의 황제인데 여장을 하고 이렇게 숨어있다니 조상들께 면목이 없구나. 나중에 제대로 보상해 줘야 한다. 알겠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진지하게 말했다. “밖에 있을 땐 행동을 조심하십시오.”한편, 정원아는 새로 온 제자들을 안내하고 나오다가 선배인 방민과 마주쳤다. 방민은 작년 비무대회에서 패한 이후 더욱 부지런히 무공을 닦고 있었다.방민이 정원아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 “부장문께서 새 제자를 들였다던데, 그 사람들 자질은 좀 어떤 것 같으냐?”정원아가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도 참 급하십니다. 오늘 막 들어온 사람들의 자질을 제가 벌써 어떻게 알겠어요?”방민의 얼굴에 근심이 묻어났다. “급하지 않을 수가 없지. 이틀 뒤면 비무대회인데, 부장문께서 굳이 이때 새 제자를 받은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62화

    전진파의 부장문 차선아는 문을 등진 채 흰 옷을 입고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등은 가냘팠지만 결코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차선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맑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문패를 가져오너라.”제자는 그녀 앞으로 돌아가 두 손으로 방문패를 받들어 올렸다.방문패를 보는 순간, 차선아의 눈빛이 흔들렸다.소환? 소환이 직접 전진파에 왔단 말인가?아니면… 소환이 누군가에게 이 방문패를 주고, 그 사람이 전진파의 도움을 청하는 걸까?차선아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손님을 들여보내거라.”“예, 부장문.”제자가 막 나가려는데 차선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차선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올 터이니, 반 시진쯤 지난 후에 손님을 맞이하거라.”제자는 조금 의아했다. 부장문의 옷이 더럽지도 않은데 왜 지금 갈아입으려는 걸까?전진파는 모두 여성 제자들이었고, 일반 제자들은 열 명씩 단체로 거처를 썼지만, 장문과 부장문은 각각 독립된 방이 있었다.차선아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보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을 나서려다 문득 구리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왜 이렇게 얼굴이 이렇게 초췌하지?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나? 안 돼.’‘혹시 소환이 온 거라면, 이런 모습으로 마주할 순 없어.’차선아는 방 안에 별다른 화장품이 없었기에 눈 밑의 푸른 기운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 어이가 없다는 듯 생각했다.‘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소환이 온다 해도 내가 왜 이렇게 신경 써야 하는 거지?’‘그저 오랜 친구가 찾아온 것뿐인데. 너무 깊이 생각한 모양이야.’그 시각, 전진파 문 밖에서는 봉구안이 몇 번이나 소욱을 힐끗거렸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볼 때마다 자꾸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소욱은 얼굴이 시퍼렇게 굳어 그녀 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어젯밤 봉구안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자기도 함께 전진파에 가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61화

    강림의 이 별장은 본래 강호의 벗들을 맞이하려고 사들인 곳이라 객실이 충분했다.봉구안 일행은 각자 방을 골라 휴식을 취했다.소욱은 봉구안과 방을 함께 쓰게 되었는데, 방에 들어서자 문을 닫고 곧바로 물었다.“전진파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냐?”봉구안이 반쯤 농담조로 답했다.“‘옛 정인’을 만나 회포라도 풀까 합니다.”소욱은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가볍게 웃었다. 그는 팔을 뻗어 봉구안을 품에 끌어안고 얼굴을 맞댄 채 살며시 비볐다. 그 모습엔 황제의 위엄이라곤 조금도 없고, 오히려 평범한 낭군 같았다.“나는 소심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네가 이번 일로 위험에 처하지 않을지 걱정될 뿐이지.”“방금 동방세 앞에서는 말을 아끼던데, 지금 우리 둘뿐이니 내게는 솔직히 말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봉구안은 그의 품에서 살짝 물러나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에 그려진 가짜 흉터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엔 어딘가 애틋한 정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진파와 운산파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첫째는 두 문파가 결탁했는지 확인할 겸 정황을 살피고, 둘째는 차선아와 이번 일을 어떻게 대처할지 의논하려 합니다. 셋째로, 이번 무림대회가 운산파에서 열리니 우리가 전진파 제자로서 참가하면 자연스럽게 운산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차선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여전히 찬성하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만약 두 문파가 이미 결탁했다면, 네가 가는 순간 표적이 될 것이다. 전진파가 과연 너를 쉽게 보내주겠느냐?”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전진파 제자가 백여 명이 넘으니 모두를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차선아의 인품이라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이 말을 들으니 소욱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에 강림의 무죄를 입증할 때도 그녀는 같은 말을 했었다. 강림과 차선아라면, 그녀는 그 강호의 친구들을 참으로 신뢰하고 있었다.소욱은 그녀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결심을 굳혔다.“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60화

    봉구안은 몸을 돌려 자신의 친아버지를 바라보았다.“어머니께 아버지의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당초에 아버지께서 저지른 잘못들…”“안다! 알아!” 봉 대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그는 꽤나 흥분한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예전에 잘못한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 탓이지!”“다만 네 어미가 날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 잘하마. 정말 잘하마…”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자기 아내에게 잘하겠다는 게, 대단한 약속이라도 되나요?”여자는 지아비를 내조하며 살림을 돌보는데, 남자는 단지 ‘잘해 줄게’ 한마디로 여자에게 감동을 주려 하다니.이런 공허한 말을 어찌 어머니께 그대로 전할 수 있단 말인가.“차라리 정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머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세요…”봉 대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자존심이 불타오르는 듯했다.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반박했다.“지금 와서 무슨 그리 유치한 말을 하란 말이냐?”“그저 네 어미에게 내가 반성하고 있다는 것만 알리면 충분할 거야.”“게다가 내가 네 어미 없이 살 수 없다는 건 너의 생각일 뿐이지 않느냐. 오늘만 해도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단 말이다!”“네 어미처럼 사방으로 떠도는 사람은 오히려 이혼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라. 난 단지 네 어미에게 체면을 세워주는 것 뿐이란 말이다!”“이제와 이혼이 흔한 세상이지만, 다시 시집갈 수 있는 여자는 대개 젊고 아름다우며 교양 있는 여자들이지. 네 어미처럼 나이 사십, 오십에다 별다른 혼수도 없는 사람은 어디서 그런 기회를 찾겠느냐…”봉구안은 도저히 더 들을 수 없었다.보아하니,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가 하는 말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다.마치 그의 화해 제안이 어머니를 향한 동정이자 은사라도 되는 듯했다.봉구안은 봉 대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충고했다.“지금 하신 모든 말씀을 어머니께 그대로 전할 겁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까지도요. 그러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59화

    죽산진에서 일반 백성들조차 황제의 초상화를 얻어 가졌던 걸 보면, 황제의 미행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듯했다.강주에서 신분이 들킬 것을 우려한 봉구안은 소욱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가짜 흉터를 만들었고, 처음 보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 자신도 반쪽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써 알아볼 수 없게 했다.그러나 성문에서 봉 대인의 눈은 날카로웠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찍이 황제의 미행 소식을 듣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성문을 지나는 외지인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봉구안과 소욱이 나타나자 그는 금세 낯익음을 느꼈다. 하지만 즉시 달려가 인사를 올리진 않았다. 연기를 할 거라면 끝까지 완벽히 해야 했다. 그도 하루빨리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봉 대인의 모습을 본 소욱이 작은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말했다.“그대의 부친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듯하구려.”봉구안은 담담히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일단 성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두 사람이 떠난 뒤 봉 대인은 바로 수하를 불러 그들의 뒤를 쫓게 했다. 그리고 다시 인자한 미소로 백성들에게 죽을 나눠주었다.“어르신 천천히 드시지요! 모두 드립니다. 다들 나눠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백성들은 봉 대인에게 감사해하며 칭송했다.“봉 대인께선 정말 자애로우신 훌륭한 분입니다! 황후마마의 아버님이자 폐하의 장인이시니 역시 다르십니다!”소식을 재빠르게 들은 몇몇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봉 대인, 혼인을 다시 하신다 들었습니다만 제가 아는 중매쟁이가 있는데 새 부인을 소개해 드릴까요?”“저희 집 여동생도 참 괜찮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아직 혼인도 안 했고 스무 살입니다. 대인처럼 연배가 있는 분을 좋아하는데...”“잠깐만요! 저도 있잖아요. 봉 대인, 저 같은 사람도 괜찮지 않으신가요?”봉 대인은 정신이 없었고, 참견하는 사람들을 야단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했다. 지금은 분노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황성으로 돌아가려면 참아야 했다. 하지만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58화

    봉구안 일행이 나간 후, 열무신의 심문 방식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직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동방세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 먹은 산해진미가 다시 역류할 것만 같았다.그는 옆에 있던 진한길을 흘긋 돌아보았다. 진한길은 흔들림 없는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역시 폐하 곁에서 오랫동안 호위를 맡아온 사람이라 다르군’ 하고 속으로 칭찬하는 순간이었다.갑자기 진한길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벽 구석으로 몸을 숙였다.“우웩…”동방세는 생각했다. '역시 어전 호위도 별수 없구나.'곧이어 그도 황급히 다른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고개를 숙여 거칠게 토해내기 시작했다.봉구안은 옆방에 있었지만, 자객의 비명 사이로 들리는 심한 구토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저렇게 토하는 거지?'반 시진이 지나자 옆방의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똑똑.진한길이 다가와 방문을 두드렸다.“폐하, 자백을 얻어냈습니다.”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얼굴은 마치 백지처럼 창백했고, 입술마저 핏기 하나 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오백은 옆에서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 방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열무신이 나오면서 바로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던진 말 한마디는 이러했다.“안 보는 게 좋아. 봤다간 앞으로 며칠은 밥맛을 잃을 테니까.”동방세는 열렬히 공감하며 복도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멍하니 응시했다. 평소 여유롭던 그의 얼굴에 이토록 영혼이 빠진 듯한 표정이 드러난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그때 열무신이 봉구안에게 입을 열었다.“자객의 자백에 따르면, 그들은 운산파 소속이라 합니다.”봉구안의 눈빛이 깊어졌다.운산파.강호에서 꽤 이름이 난 문파다. 그들마저도 이번 약쟁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여전히 넋이 나가 있던 동방세의 등 뒤로 봉구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한가한가 보오?”동방세는 놀라서 얼른 정신을 차리고 돌아봤다.“나더러 말한 것이오?”그는 사실 봉구안의 명을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57화

    생포된 자는 독약을 삼키거나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턱이 빠져 있었다. 호위들은 그의 두 팔을 꽁꽁 묶은 채, 뒤에서 무릎을 걷어차 땅바닥에 꿇렸다. 그의 얼굴에는 칼자국이 한쪽 뺨을 가로질렀고, 피가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빛은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봉구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목숨을 내던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로, 보통의 방법으로는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수를 써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열무신이 갑자기 방의 들보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제가 심문하겠습니다.” 봉구안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사형께서요?” 열무신은 자객의 턱을 들어올리며 그와 눈을 맞춘 채, 봉구안에게 반문했다. “왜, 못 믿으시겠습니까?” “네. 못 믿겠습니다.” 봉구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열무신은 코웃음을 치며 자객의 턱을 놓고, 한쪽 눈썹을 들어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너무 솔직하시군요. 그래도 저흰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 않습니까. 참 제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다.” 소욱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 자… 도무지 겉잡을 수가 없군.’ 그는 과거 맹건이 왜 이 사람과 봉구안을 엮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봉구안은 열무신을 보며 말했다. “사형께서 맡으십시오. 다만, 누군가는 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열무신 혼자만 자객을 심문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열무신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좋습니다. 굳이 장소를 옮길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약에 취해 아무것도 듣지 못하니, 이곳에서 바로 시작하시죠.”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상어 이빨처럼 생긴 역날이 달린 단검을 꺼내 자객의 허벅지 바깥쪽을 강하게 찔렀다. 자객은 대단히 강인한지 소리 한 번 내지 않았고, 눈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하지만 열무신이 단검을 천천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56화

    서여국 궁 안에, 근위병들이 이미 호원아의 사람들로 교체되었다.호원아는 선제의 신임을 받던 인물로 지금은 보정 대신 중 한 명이었다.그녀는 최근 궁에서 직접 경계를 서며 비어 있는 황제의 침전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안했다.그런데 오늘, 새 황제가 드디어 무사히 도착했다.궁문 앞에서 호원아는 근위병들을 이끌고 성가를 맞이했으며, 봉 부인과와 오양련이 좌우에 서 있었다.마차가 멈추자 송려가 먼저 내려왔고 곧이어 가마발을 열고 봉장미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호원아는 그녀를 직접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쌍둥이 자매라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봉장미와 봉구안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사실, 봉장미는 특히나 노력하고 있었다.언니인 봉구안을 대신하기 위해 그녀는 길 내내 언니의 행동과 말투를 따라 연습했다.그저 사람들이 앞에서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미천한 신하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호원아는 즉시 절을 올렸다.봉장미는 급히 입을 열었다.“예를 갖출 필요 없다. 어서 일어나거라.”언니가 서여국의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준 덕분에, 그녀는 눈앞의 이 기품 있는 장군이 호원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봉장미는 다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봉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응시했다.“어머니.”봉 부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옆에 있던 오양련이 앞으로 나섰다.이미 나이가 들어 지팡이를 짚어야 할 만큼 쇠약해 보였지만, 그녀는 말했다.“폐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말을 하며 송려를 바라보았다.“이분이 폐하께서 서신에서 언급한 송 공자이신가요?”송려는 오양련에게 가볍게 예를 올렸다.오양련의 눈빛은 자애로우면서도 날카로워, 송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이 준수한 외모라니, 요염한 소생과는 다르군요. 황부의 자격은 충분하겠습니다.”송려는 약간 굳은 미소를 지었다.서여국에 들어온 그는 다소 불편했다.이곳의 여자들은 남자를 볼 때마다 평가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얼마 전, 그가 마차에서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055화

    봉구안이 열무신을 바라보는 표정은 몹시 냉랭했다.“각자 알아서 하자더니, 무슨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사형.”열무신은 방으로 다시 들어오며 유쾌하게 웃었다.“방금 그건 농담이었습니다, 마마. 마마께서는 도량이 넓으시니 저 같은 소인을 탓하지 않으시겠지요.”봉구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열무신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켰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우리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마마께서 제게 마음을 주시고 폐하를 떠난다. 이에 실망한 폐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신다... 이런 구도라면 어떻겠습니까?”소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어릴 적 친구?”열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습니다, 폐하. 황후께서 어릴 적 친구인 저를 택하시기 위해 폐하를 떠난다는 설정이지요. 그래서 폐하께서 슬픔에 잠겨 황궁으로 돌아가신다… 이런 흐름으로 이어가는 건 어떻겠습니까?”“한 폭의 연극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소욱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봉구안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 후, 단호히 말했다.“그 방법은 효과가 없을 것 같군요.”봉구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차라리 동방세를 선택하겠습니다.”동방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네?”'왜 하필이면 '차라리'를 붙여서...'봉구안은 일어나더니 결단의 목소리로 말했다.“저들은 바보가 아니니 쉽게 속지 않을 것입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소욱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소욱은 이미 소심한 사람이었다.설령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녀가 다른 사람과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또한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서여국에서 봉장미가 자신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따라서 열무신의 계획은 적합하지 않았다.소욱은 마음을 놓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봉구안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걱정했었다.열무신은 아쉬운 듯 어깨를 으쓱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