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가, 전각.봉 대인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슴 한켠에 쌓인 울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속이 답답해 한숨만 내쉬었다.하인은 그의 곁에서 몸을 낮추며 식은땀을 흘렸다.황후가 그렇게 분노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장차 새로 들어올 부인이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참장부까지 찾아가 소란을 일으키고, 며느리를 때릴 수 있었던 걸까?결국 봉 대인 역시 궁지에 몰려 있는 셈이었다.하인은 조용히 탄식했다.한 가지 일이 해결되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터지다니, 이 난국을 어찌 수습한단 말인가.그때 하인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대인! 도련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봉안진이 무거운 기세를 뿜으며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알릴 겨를도 없이 곧바로 달려온 봉안진의 표정은 이미 단단히 결심한 사람의 얼굴이었다.봉 대인은 그의 굳은 표정을 보자마자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봉 대인은 앉아 있는 것도, 일어서서 맞이하는 것도 불편했다.대체 왜 오늘만 이리도 일이 꼬인단 말인가!봉안진은 관복을 입은 채 한가운데에 서더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감히 묻겠습니다, 아버님. 제 부인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맞아야 했습니까?”그는 오늘 예상보다 일찍 퇴근했고, 집에 돌아오자 부인의 부어오른 뺨을 보며 난동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그 난동을 부린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가 새로 맞아들이려는 여인이었다.내 부인이 이런 모욕을 받게 놔둘 수는 없다.봉 대인은 속으로는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화를 내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인지 네 부인에게 직접 물어봐야지, 왜 나한테 따지느냐!“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네 부인이 잘 처신하고, 윗사람을 공경했더라면…”봉안진은 그의 말을 끊었다.“그럼, 아버님께서는 제 부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그의 눈빛은 노기를 띠고 있었다.하인은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느끼고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도련님, 지금 상황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
봉가, 전당.유영은 봉가 전당으로 들어서며 마치 자신의 집인 양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연꽃 둥지를 시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거 좀 끓이거라.”시녀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하인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돈은 참 잘 벌지만, 쓰는 것도 보통이 아니군. 봉가의 살림을 맡기면 이 집안이 과연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유영은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막대한 돈을 들여 피부 관리를 해온 덕에 나이보다 7~8살은 젊어 보였다. 오늘은 유행하는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는 황제가 황후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옷으로 알려져 있었다. 유영은 자신의 이런 차림새가 상업계에서 ‘여성 거물’로서의 품격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고 여겼다.그런데 긴 복도를 걷다 보니, 모퉁이에서 임씨와 그녀의 시녀가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녀는 약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마님, 대인께서 그렇게 화가 나셨으니, 저 유씨가 곤란을 겪을 게 뻔해요.”임씨는 눈에 독기를 품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꽉 쥐며 당장이라도 찢어버릴 듯 힘을 주었다.‘저 여인이 우리 집 문턱도 못 넘게 해야 할 텐데!’……유영은 전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봉 대인의 매서운 시선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당장이라도 꾸짖고 싶다는 듯 날카로웠다.왜 저렇게 화가 난 걸까?유영은 그의 불편한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손을 부채질하듯 하며 담담히 말했다.“밖이 참 덥네요. 그쵸? 대체 무슨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쾅! 봉 대인이 테이블을 세게 치며 분노를 드러냈다. 유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아직도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느냐?” 봉 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네가 오늘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보아라!”유영은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미 그가 참장부에서 벌어진 일을 문제 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난 그저 언니를 찾
봉 대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널 속일 것 같으냐?”“유영, 넌 아직 우리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소동을 일으키고 있구나. 앞으로는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냐?”“오늘 참장부에 가서 사과하지 않는다면, 혼사는 없던 걸로 하겠다!”유영은 손이 떨리고 얼굴이 어두워졌다.“알았어요! 사과하면 되잖아요.”“하지만 제 뜻으로 하는 거지, 대인에게 위협받아서가 아니에요.”“전 대인을 아끼니까, 봉가의 명성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하는 겁니다.”봉 대인은 그녀의 속내를 꿰뚫고 냉소를 머금었다.“진짜 날 생각했다면, 나를 몰아붙여 널 맞이하게 만들진 않았겠지.”유영은 이 말에 마음이 찔리는 듯했지만,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제가 대인에게 혼인을 강요했다고 생각하시나요?”“혼인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거 아닌가요?”유영은 권력과 재산을 원했다.여러 나라의 교역로를 열기 위해 황후의 이모라는 신분만으로는 부족했다.그녀는 딸을 더 높은 자리로 올려야 했다.봉 대인 또한, 말 잘 듣는 아내와 봉가의 황자를 낳아줄 여인을 원했다.봉 대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유영을 뒤로한 채 옷자락을 휘날리며 나가버렸다.……건물 밖.시녀가 임씨에게 말했다.“마님, 대인께서 나오셨어요.”임씨는 전당을 바라보며 물었다.“그 여인은?”시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아마 대인께 야단을 맞고 울고 있는 중일 겁니다.”임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럴 만도 했다. 평소라면 저 여인이 대인에게 들러붙어 틈만 나면 함께 다녔을 텐데 말이다.“마님, 저기 보세요. 저 여인이 나오네요!”……황궁.소욱은 상소문을 읽고 영화궁으로 갔다. 그러나 봉구안은 없었다.“황후는 어디 있느냐?”그는 분명 황후가 궁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는데.만추가 공손히 대답했다.“폐하, 황후마마께서는 자진궁에서 목욕 중이십니다. 저희에게 따로 시중들지 말라 하셨습니다.”만추는 약간 억울한 듯했다.황후는 목욕이나 옷을 갈아입는 일도 그녀를 곁에 두지 않는 경우가 많았
참장부.봉안진은 어머니를 생각해 어쩔 수 없이 그 소위 이모라는 사람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주씨도 마찬가지로 시어머니를 생각해 지난 일은 묻어두고 예를 갖춰 깍듯하게 대했다.유영은 마치 잘못을 뉘우친 듯 술잔을 들고 일어났다.“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거예요.”“우리는 한 가족인데, 이렇게 시끄럽게 만든 건 제 잘못이예요.”“언니, 제가 부모님과 아우를 생각하며 너무 감정이 북받쳐 그만 예의 없는 행동을 했어요.”“부디 제 잘못을 용서해주세요.”그녀는 술잔을 봉 부인에게 내밀었다.봉 부인은 마음이 약해져 술잔을 받았다.“유영아, 우리 둘은 친자매잖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봉 부인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까지 모시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기에, 유영이 그 이야기를 들먹여도 탓하지 않았다.“언니를 위해 이 잔을 바칠게요!”유영은 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웠다.봉안진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저녁식사가 끝나고 온 가족이 이모를 배웅한 후,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저는 이모와 더 이상 깊은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도 앞으로는 거리를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봉 부인은 약간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안진아, 그래도 저 아이는 내 친동생이고, 친정에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란다.”봉안진이 더 말하려는데, 주씨가 나서서 그를 제지했다.“서방님, 며칠 뒤면 추석입니다. 부모님께 보낼 선물을 골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둘이 방으로 돌아간 뒤, 주씨는 남편을 나무랐다.“서방님, 어머님의 일에는 너무 간섭하지 마세요.”“어머님께서는 아버님과 헤어지신 후 늘 불안정한 처지에 계셨잖아요. 이제 친정에서 동생이라도 왔으니 당연히 잘해주고 싶으실 거예요.”“이모님께서 어떤 사람이든, 어머님께는 기쁨이니까 그분의 단점을 지적한다고 해서 어머님이 좋아하시겠어요? 괜히 어머님과 서방님의 관계만 껄끄러워질 뿐이에요.”봉안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를 달랬다.“알겠습니다, 부인.
추석이 가까워지자, 봉안진은 하루 휴가를 내고 주씨와 함께 장인의 집을 찾아 미리 선물을 전할 계획이었다.주씨가 봉안진의 허리띠를 매어 주는 동안, 시녀가 방으로 들어와 병풍 너머로 조심스레 말했다.“대인, 부인… 유 부인이 또 찾아오셨습니다.”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난감한 표정이었다.봉안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여인은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온 것이냐?”“마님을 뵈러 오셨다고 합니다.”봉안진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보이자, 주씨가 그의 팔을 살짝 눌러 진정시키며 부드럽게 말했다.“서방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어머님의 손님이시니 우리가 나서서 쫓아내는 건 좋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나을 듯해요.”봉안진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만을 꾹 참았다.곧 장인의 집으로 가야 하기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하인에게 단호히 일렀다.“어머님을 잘 지켜라.”“예, 대인!”봉 부인은 별채에서 머물고 있었다.그녀는 유영과 함께 참장부를 둘러본 뒤 별채로 돌아왔다.도착한 유영은 봉 부인의 손을 잡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어제는 제가 참 어리석었어요.”“집안과 연을 끊었다는 생각에 화가 나 언니를 원망했지만, 정작 언니의 입장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사실, 안진이가 봉가에 와서 협박하지 않았더라도, 저는 사과하러 올 생각이었어요.”“참장부를 떠나고 나니 계속 마음이 불편했거든요.”“곰곰이 생각해보니, 언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았을 거예요. 혼인 후엔 봉가 사람이 되었으니 친정을 계속 도울 수는 없었겠지요.”“언니도 원해서 우리와 연을 끊었던 게 아니었겠죠… 그때 어머니께서 언니를 많이 힘들게 하셨잖아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말을 마친 유영은 무릎을 꿇으려 했다.봉 부인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유영아, 이게 무슨 소리니? 이럴 필요 없어.”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설령 살아 계셨더라도 봉 부인은 그들에게 품었
봉구안은 수백 명의 신병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곧바로 오백에게 명령했다.“이들의 병법 시험 점수는 전원 0점이다.”오백은 자신감 넘치게 목을 뻣뻣이 세우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신병들은 동공이 커지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입영 신병들이 치르는 군사 시험에는 병법, 기마술, 지도 제작 등이 포함되며, 그 점수는 그들이 어디로 배치될지를 결정 짓는다.중군은 가장 우수한 부대. 좌군과 우군은 그다음 우수한 부대이다.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자들은 취사병이나 무기 관리병으로 배치되어, 전장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하지만 지금 황후의 단 한마디로 병법 점수가 전부 0점 처리되고 말았다!이건 명백히 권력으로 누르는 것처럼 보였다.“황후마마, 어찌하여 그러십니까?”봉구안은 길게 설명하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여인들이 군에 입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도, 너희는 지금 주어진 기회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여인들에게 밀렸다고 자존심 상해 화를 내고 불만을 터뜨리니, 내가 너희를 향해 ‘너희는 분명 크게 성장해 부녀군을 능가할 것이다’라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겠느냐?”“전원, 병영 주위를 백 바퀴씩 돌아라!”신병들은 그녀의 위압감에 눌려 결국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백은 그녀를 대신해 분노하며 물었다.“마마, 왜 저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십니까? 동방이 함락된 건 마마께서 일부러 적을 유인하기 위해 내세운 계책이었잖습니까?”봉구안은 그를 흘끗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모든 것을 내가 직접 설명해야 한다면,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겠느냐?”그곳에는 9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있었다.그중 몇백 명이라도 입을 열어 질문했다면,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오백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런데 마마, 요즘 마마의 이모님께서 계속 참장부에 드나들고 계십니다.”봉구안은 멀리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띄웠다.“우선 궁으로 돌아가자.”……황궁.봉구안은 추석
참장부.봉 부인은 여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유영이 처음으로 부탁을 해왔고, 그것은 추석 궁중 연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봉 부인은 어떻게든 유영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 그녀는 궁으로 들어가 황후를 찾았다. 영화궁.모녀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시중을 드는 이는 단 한 명, 만추뿐이었다. 봉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구안아, 이제 내 친정 식구는 유영이뿐이란다. 하나뿐인 내 친여동생이지… 그동안 내가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나. 서방을 일찍 여의고 어린 딸을 혼자 키우며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니.”봉구안은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딸의 단호한 태도에, 봉 부인은 망설였다. 딸이긴 했지만, 오랜 세월 함께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그녀가 군영에서 오랫동안 강한 기질을 키운 탓인지, 봉 부인은 딸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말했다. “추석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잖니. 유영이가 궁중 연회에 꼭 참석하고 싶다 하더구나. 혹시 유영이 모녀가 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줄 수 있겠니?” 봉구안은 어머니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유영이 과거에 저지른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또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던가. 봉구안 자신도 만약 동생 장미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차마 그녀에게 가혹하게 대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봉구안은 어머니의 판단이 흐려 보이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봉구안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모가 왜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않고 굳이 봉가에 시집오려 했는지 아시나요?” 봉 부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나이 든 이들의 복잡한 사연을 딸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봉 부인은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자신의 친동생이 오래전부터 봉 대인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니.유영이 지금 봉 대인과 혼인하는 것까지는 용납할 수 있었다.그러나 자신을 속이고 배신했던 과거의 일까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정희의 나이는 봉안진과 비슷했다.만약 봉구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와 봉 대인이 신혼이던 그 시절 유영은 이미 봉 대인과 관계을 맺었을 터였다…봉 부인은 가슴이 답답하고 손이 떨려왔다.그녀는 봉구안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구안아, 이게 정말이니? 그들 사이에 정말 아이가 있었다고?”봉구안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어머니. 모두 사실입니다.”단순한 주장만으로는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었다.구안은 진실을 뒷받침할 증인을 준비해 두었다.한 시간 후, 오백이 나이 많은 한 여인을 데리고 영화궁으로 들어왔다.그 여인은 머리가 백발이었고 걸음걸이는 몹시 느렸다.오백은 전각 바깥에 멈춰 서서 그녀가 직접 들어가게 했다.노부인은 봉구안에게 예를 올렸다.오랜 세월에 몸에 밴 단정한 예법이 여전히 눈에 띄었다.“황후마마를 뵙습니다.”노부인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치아도 몇 개 빠져 있었지만, 봉 부인은 그녀를 금방 알아보았다.“설마… 자네는?”원 아주머니는 봉가에서 오래전부터 일했던 사람으로, 봉 대인의 어머니, 즉 봉구안의 할머니를 모셨던 분이었다.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원 아주머니는 봉가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봉 부인은 봉가에 처음 시집왔을 때 규칙도 잘 몰라 어려움을 겪었는데, 시어머니와 원 아주머니가 성심껏 가르쳐주었던 기억이 생생했다.그런 원 아주머니를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봉 부인이 원 아주머니를 알아보고 놀라는 동안, 원 아주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마님을 뵙습니다.”그녀는 몸을 떨며 예를 올리려 했고, 봉 부인은 급히 그녀를 막았다.“아니,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냐?”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쇠약해질 리는 없었다.혹시 가족들이 그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
황제는 용좌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무백관을 훑었다.“과인이 황성을 비운 지 몇 달이 되었다. 그 사이 그대들은 더욱 해이해졌구나.”문무백관들은 몸을 낮추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다.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정에서 명하여 각지에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 했거늘. 과인이 묻겠다. 너희는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대부분의 신하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사건 수사는 지방 관아의 일 아닌가.그들은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그중 몇몇 관료만이 그나마 성의를 보이며 대답했다.“폐하, 신이 아는 바에 따르면 이 약쟁이 사건은 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독에 중독되면 사람은 이성을 잃고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예전에 천용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약쟁이로 구성된 군단이 실제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할 사안입니다.”“폐하, 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동산국이 비밀리에 약쟁이를 양성하고 있으며, 병력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약쟁이 독도 동산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소욱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향해 눈빛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약쟁이 사건은 백성의 생사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도 관련된 일이다. 너희 가문의 안위와도 맞닿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이리 무감각할 수 있느냐.”꾸짖음을 들은 관료들은 줄줄이 엎드려 스스로 죄를 청했다.“부끄럽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소욱은 그들을 곧장 벌하지는 않았다.대신 명을 내렸다.“과인이 너희들에게 직접 수사하라 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오늘부터 약쟁이 사건에 연루된 자가 있다면 스스로 고하라. 훗날 과인이 직접 밝혀낸다면 그 자는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며 구족이 멸문당하게 될 것이다.”이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그중 몇몇은 속삭였다.“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봉구안이 약쟁이의 본거지가 황성에 있을 것이라 단언한 것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남제 전역의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설명했다.“정말 막다른 길에 몰려야 그들도 허점을 보입니다.”“이번에 문제가 생긴 도시들. 그 위치와 거리로 계산해 보면, 명령이 어디에서 내려졌는지 역산할 수 있어요.”지도 위에는 이미 여러 곳의 약쟁이 거점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최근 발생한 약쟁이의 운송 경로와 이동 시간, 중간에서 방향을 바꾼 흔적까지 더하면 본거지가 어느 지역인지 대략 짚어낼 수 있었다.이런 판단력은 전장을 누비는 장수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었다.봉구안은 시간과 거리의 계산만으로도 적의 주둔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그래야 곧장 본진을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이라니… 정말 그곳인가.”역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그들은 황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죽산진을 들렸다.황성으로 돌아가기 전 소탁을 보기 위함이었다.보아하니 소탁은 눈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어 실명에 위험까지 있었다.소욱은 그를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가 태의에게 맡기기로 했다.이 작은 죽산진에서는 명의라 할 만한 자를 구하기도 어려웠다.자객의 습격을 떠올린 소탁은 마음이 무거웠다.그는 형인 소욱을 걱정하며 말했다.“약쟁이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폐하께선 이번 여정 내내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결국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자신의 상처보다 제왕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봉구안은 하얀 천으로 눈을 가린 소탁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이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그녀가 물었다.“열무신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소탁은 고개를 저었다.“그 자객을 쫓아 한참을 달아났습니다. 호위들도 따라잡지 못했지요. 혼자서 움직였으니, 살아있다면 다행이고… 혹시 도중에 남긴 흔적이라도 있다면 좋겠습니다.”봉구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도,
그 닭장수들은 고문을 당해 사람 꼴이 아니었다.그들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 그 닭들을 거래한 뒤, 그걸 어디에 쓰는지도 몰랐습니다.”“누가 높은 값을 제시하길래,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열무신은 무고한 이를 죽이지 않았다.그들이 실토한 이상 그는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마침 소탁과 마주쳤다.소탁은 내내 문밖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소탁은 성품이 부드럽고 인자했다.이런 고문이나 심문 같은 일은 애초에 잘하지 못했다.황제가 곁에 붙여준 암위들도 제법 실력은 있었지만, 닭장수들을 떨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열무신은 달랐다.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지옥불에서 기어나온 귀신 같았다.맑은 날임에도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존재감 하나로 공포를 자아냈다.소탁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저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군요.”열무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손에 묻은 피를 닦고, 수건을 바닥에 던지듯 놓으며 말했다.“잔챙이들이지. 아무리 캐물어도 쓸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닭장수 몇 명을 잡아봤자 소용없었다.열무신의 마음엔 짙은 짜증이 피어올랐다.약쟁이의 수법은 치밀하고 조심스러웠다.겹겹이 함정을 깔아놓은 듯, 쉽게 뿌리를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어둡게 눈을 떴다.속이 타들어갔고, 분노를 쏟아낼 데도 없었다.소탁은 그의 좌절과 혼란을 읽고 조심스레 말했다.“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 집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드시고 길을 나서시지요.”그의 말 뜻은, 강주로 돌아가 황제와 황후에게 상황을 전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어쩐지 그 말은 사형수에게 마지막 식사를 권하는 것처럼 들렸다.열무신은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이런 와중에도 밥이 넘어간단 말입니까.”소탁은 전혀 언짢은 기색 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제
봉구안은 자신의 친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몰랐다.그가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지녔고, 내용을 명확히 꿰뚫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그런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하지만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었다.지나치게 총명하면 오래 못 간다.그래서 그는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억눌렀고, 남 앞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다만 집중만 한다면, 단 한 번 본 것도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이 십수 년간 강성에 들어온 외지인들의 성씨, 이름, 무슨 일로 들어왔는지, 머문 날짜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우선 가족을 동반하거나, 노약자와 함께 들어온 이들은 제외했습니다. 대부분은 친척을 만나거나 생계를 위해 온 이들이니까요.”“그리고 또 걸러냈습니다. 강주에 지인이 있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런 이들은 약쟁이와 같은 은밀한 조직과는 어울리지 않지요. 저들은 언제나 혼자 움직이니까요.”봉 대인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결국 그의 탁월한 기억력이 있었기에, 수많은 인원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대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최근 2년간 입성한 외지인에 대해서는 여관마다 숙박 기록이 남아 있어, 그것도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었다.물론 개인적인 판단이 섞이긴 했지만, 봉구안은 이 명부가 충분히 쓸 만하다고 보았다.봉 대인은 말을 덧붙였다.“폐하, 특히 수상하다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붉게 표시해 두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알겠다. 만약 이 명부에서 약쟁이의 흔적을 찾아낸다면, 자네는 큰 공을 세운 셈이니라.”그러자 봉구안이 단호하게 나섰다.“설령 단서가 나온다 해도, 그건 시작일 뿐입니다.”“이전에 잡은 자들도 그랬지만, 약쟁이는 각자 다른 방식과 규율을 따르고 있어, 흔적을 따라간다 해도 본거지에 닿기는 어렵습니다.”소욱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장인어른에게는 현재 채찍보다는 당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봉 대인의 얼
맹건은 갑작스레 봉 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단서라도 잡으셨습니까?”봉 대인은 옷깃을 한 번 여미더니,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며칠 전부터 실종자 명단을 정리하라는 명을 받았어.”“근데 그 일은 다른 동료들이 거의 다 끝내버렸더라고. 그래서 난 좀 색다른 방법을 생각해봤지.”맹건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그쳤다.“요점만 말씀해 주십시오. 뭘 찾으신 겁니까?”봉 대인은 그의 다급한 말투에 살짝 통쾌함을 느꼈다.하지만 지금은 공과 사를 구분해야 될 때였다. 감정에 휘말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특히 맹건의 아들 맹성주는 훌륭한 장군이었다. 그런 식으로 목숨을 잃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그는 곧 말을 이었다.“외지인 명단을 전부 뒤져봤지. 대조를 거듭해서, 수상한 인물들을 걸러냈어. 강주의 실종 사건은 바로 그 사람들이 오간 이후부터 부쩍 많아졌거든. 그들 중에 분명 뭔가 수상한 놈이 있어.”맹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하지만 곧 의문을 품은 듯 봉 대인을 바라보았다.“이렇게 중대한 일인데, 어째서 폐하께 보고하지 않으셨습니까?”봉 대인의 이마가 일그러졌다.“그걸 자네가 왜 캐묻는 거야?”사실 그는 오늘 황제 폐하께 생신 예물을 드리며 이 이야기를 꺼내 큰 공을 세우고자 했다.하지만 그 꼴을 당하고 나니, 더는 얼굴을 들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차라리 이 늙은 맹건에게 전부 넘겨주고, 알아서 하게 시키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황제와 황후 앞에서 또 체면 깎을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는 이내 품속에서 장부 한 권을 꺼내 맹건에게 건넸다.맹건은 몇 장을 넘겨보더니 감탄한 듯 봉 대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형님 정말 잘하셨습니다.”수년 많게는 십수 년간의 외지인 유입 기록을 추려낸 이 장부는 보통 정성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었다.기억력이 나쁘거나 끈기가 없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이 사람… 제법인데? 역시 명문가 출신은 다르군.’맹건은 그 길로 장부를 들고 황제와 황
방 안.봉 대인은 몸을 돌려 맹건에게 등을 보인 채 옆으로 누웠다.더는 이 늙은 영감과 말 섞기 싫었다.지금 그는 고집불통 아이 같았다.무슨 말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맹건은 애써 인내심을 눌렀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형님, 이 나이에 싸우고 삐칠 일이 뭐가 있습니까.”“두 딸 일로 사이가 틀어진 거 저도 잘 압니다.”“인정할 건 합니다. 구안인 저랑 아내가 십수 년을 키웠습니다.”“친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여겨왔지요. 그때 형님께선 그 애를…”“우린 버린 게 아니야!”봉 대인이 벌떡 소리쳤다.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맹건이 되물었다.“그렇다 해도 구안이를 저희 맹가에 맡긴 건 사실 아닙니까.”“저희가 키웠고, 저흴 부모라 불렀습니다. 그 아인 그렇게 저희 딸이 된 거죠.”봉 대인은 말이 막혔다.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맹건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이젠 우리 곁에 남은 건, 구안이 하나뿐입니다.”“장미는 어쩔 수 없이 저희 성을 따랐지만, 마음은 여전히 친부인 형님께 있죠.”“하지만 구안은 달라요. 성주가 죽고, 그 애가 아니었으면… 제 아내도 아들을 따라갔을 겁니다.”“그러니 형님이 불편하다고 해서, 저희가 구안이와 정을 끊을 순 없습니다.”“우리 마음속에서, 구안이는 진짜 딸이나 마찬가지입니다.”“이 일은 형님이 잘못하셨습니다.”“지금 형님께서는 저희 아이를 뺏으려 하시는 겁니다.”봉 대인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곧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건 불만의 표시였고, 동시에 나가라는 뜻이었다.맹건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형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형님이 부럽습니다.”“딸 둘에 아들 하나.”“누굴 더 아끼고 덜 아끼고를 떠나,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이지요.”“성주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그 아이가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든 기꺼이 받아들였을 겁니다.”남자라면 통하는 감정이었다.맹건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봉 대인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이
봉 대인은 오늘 봉구안의 탄신일을 맞아 직접 발걸음을 옮겼다.비록 궁에 몸을 두진 못하지만, 아비 된 도리로 성의는 보이고 싶었다.며칠을 두고 장터를 돌며 고르고 또 골라, 마침내 고운 비취 하나를 준비했다.객잔에 도착하자, 마당에서 강림이 그를 맞이했다.“폐하와 황후마마께선 지금 배 타고 나가셨습니다. 금세 돌아오진 않을 듯하니, 대인께서 맡겨주신다면 선물을 대신 전달해드리겠습니다.”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 대인은 품 안의 비단 상자를 바짝 끌어안았다.눈빛에는 노골적인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강림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내 꼴이 무슨 도둑이라도 된단 말인가?’“나중에 직접 다시 오지.”봉 대인은 짧게 대꾸한 뒤 등을 돌렸다.그의 눈에 강림 같은 자들은 그저 싸돌아다니는 무림객일 뿐이었다.딸의 성정이 저리도 제멋대로가 된 이유 중 절반은 맹건 같은 무사놈 때문이고, 나머지 절반은 저런 하류들과 어울려서라고 여겼다.그는 강림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직접 찾는 편이 빠르리라 생각하였다.황제와 황후가 함께 나갔다면, 배를 띄운 곳은 정해져 있었다.강주에 그런 호수는 딱 하나뿐이었다.강주, 천자호.호숫가에 도착한 봉 대인의 발걸음이 멈췄다.그가 마주한 광경은, 생각보다 훨씬 쓰라렸다.화려한 화선이 고요히 물가에 정박해 있었고, 그 위에서 몇몇 인물들이 막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그중 한 명, 황제를 그는 단박에 알아보았다.봉구안이 강주에 내려온 사실을 감추고자 했고, 출입 시엔 분장을 하거나 신분을 감췄다는 것도 알고 있던 터라, 그녀를 곧장 알아보지 못한 건 납득할 만했다.그러나,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맹건.그 자가, 여기에 있다니.쾅.봉 대인의 가슴이 요동쳤다.심장을 그대로 움켜쥐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황제가 부른 것이겠지.황제가 그 무사 하나를 위해 이토록 정성을 들인 건, 결국 봉구안 때문이지 않겠는가.황제는
“북방으로 가겠다고?”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곧장 봉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말이 진심인지, 그녀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그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봤지만, 봉구안이 아이를 위해 북방으로 간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택이었다.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 한다.황제와 황후… 부부가 멀리 떨어져 지내는 일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맹 부인 또한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봉구안의 지아비는 그저 그런 사내가 아니었다.한 나라의 군주였고, 궁궐엔 이미 수많은 후궁이 있었다.그가 과연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세상일은 알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그렇다.지금은 아무리 다정해도, 시간이 지나고 자리가 비면 변할 수도 있는 일.그녀는 봉구안이 훗날 후회하는 상황만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남자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연 같아서,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 않은가.맹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께서 북방으로 태교를 가신다면, 저희 부부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기꺼이 도와드릴 일이긴 하나… 결국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한 번쯤 폐하와 다시 상의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그녀는 느꼈다.황제의 반응만 봐도 이건 미리 상의된 결정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그러자 봉구안은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사모님, 오해십니다.”“실제로 북방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그녀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안에는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굳이 떨어져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도 외로웠고, 두려웠다.봉구안은 또렷하게 덧붙였다.“그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서여국이든 남제든, 지금은 그 어느 쪽도 방심할 수 없는 때입니다.”“그래서 양쪽 모두를 잠시 속이는 수밖에요. 지금은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속인다는… 말씀입니까?”맹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뇌었다.하지만 소욱은 가장 먼저 그 뜻을 깨달았다.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