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욱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북방으로 돌아가신답니다.”소욱은 그들이 서로 아쉬워하며 이토록 우울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는 봉구안의 어깨를 감싸며 맹 부인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구안이는 이제 제 사람입니다. 어떤 위협이나 고통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구안이가 사모님을 찾아가고 싶다면, 저는 막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사모님께서 언제든 궁에 들어와 구안이를 보셔도 좋습니다.”물론, 이 혜택은 맹 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맹 장군은 북방을 지키고 있어 직무를 떠날 수 없었다.맹 부인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황제 폐하, 감사드립니다. 이리 말씀해 주시니, 이제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겠습니다.”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소욱은 제안했다.“같이 저녁을 드시고 가십시오. 오늘을 사모님을 위한 환송연으로 삼겠습니다.”맹 부인은 봉구안을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폐하와 마마께서는 신혼이지 않습니까?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맹 부인이 떠난 뒤, 궁인들은 저녁상을 차렸다.봉구안과 소욱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식사 중에는 두 사람 모두 그 마음을 숨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 식사 후.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폐하…”“구안아, 나…”“폐하께서 먼저 말씀하시지요.”봉구안은 막 말하려던 이야기를 삼켰다.소욱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곧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나도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먼저 말하거라.”봉구안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오늘 아침에 폐하께 말씀드린 약쟁이 무리들과 제 사형의 일 말입니다.”소욱은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그때 그는 신혼의 달콤함에 빠져 그녀에게 자세히 묻지 않았다.“그래, 기억한다. 이어서 말해보거라.”소욱은 그녀에게 유난히도 인내심이 많았다.봉구안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양연삭이 죽은 이후, 약쟁이에 관한 일은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본래 약
소욱은 평생 잊지 못했다. 여섯 살 되던 해, 어머니의 생일이었다.그날 밤, 선황은 그의 어머니의 처소였던 미앙궁에 왔다. 그의 어머니는 몹시 기뻐하며, 이른 저녁에 손수 국을 끓이며 선황을 기다렸다.유모가 자신을 데리고 나가며 다정히 말했다.“황자님, 오늘 밤 마님께서는 황제 폐하와 시간을 보내실 거예요. 어서 가서 푹 쉬도록 하세요.”유모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다시 사랑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미앙궁의 날들도 편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그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화해하길 바랐다. 어머니가 다시는 슬퍼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그날 밤, 달빛이 참 아름다웠다.”소욱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선황께서는 몹시 지친 듯이 보였고, 침상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술에 취할까 염려하여 몸소 해장국을 끓이러 나가셨지.”“그리고 다시 대전에 돌아왔을 때, 선황께서 그 궁녀를 총애하고 계신 모습을 보셨다.”봉구안은 손을 들어 그를 감싸 안았다. 아무 말없이 그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이 모든 것은 소욱이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비밀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였다.“그 궁녀는 그날 이후로 미인으로 승격됐다. 그런데 어머니는 며칠 지나지 않아 뼈만 남은 듯 수척해지셨어.”소욱은 말을 이어갔다.“그날 밤, 눈이 펑펑 내렸다. 꿈을 꾸다가 깨어난 나는 어머니를 찾으려 대전으로 달려갔었지. 그러나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갔다. 그 끝에서, 어머니께서 높은 곳에서 떨어지시는 모습을 보았다.”소욱의 말투는 싸늘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내가 이리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내가 그 궁녀를 불쌍히 여겨 어머니 곁에 두게 했던 내 손길이, 결국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아픔과 후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소욱이 어째서 후궁의 암투와 간사한 여인들을 혐오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그는 어릴 적 이미 속고, 이용당하고, 깊이 상처받았던
어전.서왕은 요녀의 자백서를 올렸다.소욱은 한눈에 대강 훑고, 시선이 ‘북연’ 두 글자에서 멈췄다.서왕의 눈은 건조하고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폐하, 요녀의 말에 따르면, 그 자는 북연의 간첩으로, 과거 선황을 암살하여 남제를 혼란에 빠뜨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그리고 지금 북연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폐하를 암살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소욱은 차갑게 자백서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네 생각에, 그 자가 한 말들 중 몇 할을 믿을 수 있겠느냐?”소욱의 목소리는 냉담했으며, 그의 눈은 티끌 하나 용납하지 않는 냉기를 품고 있었다.서왕은 솔직히 대답했다.“중형 아래에서 얻은 자백이니, 사실이 담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다만 이 자가 정말로 간첩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닐 것입니다. 신 또한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지만 선황께서 이 자의 손에 의해 피해를 입으셨다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신이 선황의 생존 당시의 맥진 기록을 다시 살펴보았는데, 그 자가 독을 쓴 시기와 병증이 딱 들어맞습니다.”소욱의 시선은 겨울의 눈처럼 차가웠다.“이미 모든 걸 자백했다면, 더 이상 살려둘 필요는 없겠구나.”서왕은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예, 폐하.”서왕은 물러날 준비를 하며 몸을 돌렸으나, 소욱이 그를 불러 세웠다.“이번에 자네가 내 모습으로 분장하여 혼자 약속 장소에 나갔다지?”서왕의 몸이 살짝 멈추었다. 황제가 오해할까 염려되어 즉각 설명을 덧붙였다.“폐하께서 혼례를 올리신 직후, 모든 크고 작은 일을 신에게 맡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간첩이 보낸 서신이 신에게 전달된 것입니다.”“신이 서신을 처음 보았을 때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숙비마마의 일을 묻히게 할 수 없었기에, 부득이하게…”말을 하던 서왕은 한숨을 내쉬고 깊이 예를 올렸다.“신이 주제넘게 행동한 듯 싶습니다.”소욱은 천천히 그에게 걸어가 직접 부축했다.“내가 너를 책망하려는 뜻은
감옥.완부옥은 두 손으로 감옥 문을 잡고 있었다. 평범한 죄수들과는 달리 그녀의 행동에는 요염함이 가득했다. 마치 감옥 문에 감긴 아름다운 뱀처럼 곡선미가 돋보였다. 그녀는 문 너머의 서왕을 바라보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전하, 황제 폐하를 연모하고 계십니까?”서왕의 눈동자에 어두움이 드리웠다.완부옥은 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살짝 웃었다.“제 말이 맞죠? 제가 맞춘 거죠?”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황성에 머문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이미 서왕에 대한 정보를 다 조사해 두었다.지난 몇 년 동안, 서왕의 곁에는 특별히 의심스러운 애인이 없었다. 대신 그는 자주 소욱과 함께 있었고, 두 사람은 종종 어마장에서 시간을 보냈다.그런 정황을 보니, 서왕이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황제 소욱이 분명했다!서왕은 그녀의 웃음소리에서 조롱 섞인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완부옥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전하! 잠깐만요! 전하,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러세요?”“얼굴이 그렇게 얇아서야 되겠어요?”“아니면… 제가 이 사실을 폐하께 전해볼까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왕은 다시 발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감옥 문 너머로 그녀의 옷깃을 움켜잡으며 낮게 말했다.“충고하는데, 사람답게 살거라.”완부옥은 겁먹기는커녕 도리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전 전하가 겁쟁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소심하군요.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안 그러면 고생은 결국 전하의 몫이 됩니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낄낄거리며 웃었다.순간 그는 모용란의 조롱섞인 표정이 떠올랐다.모용란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비밀을 쥐고 암암리에 자신을 협박했었다.서왕은 그런 완부옥의 태도를 참을 수 없었다.“그럼 대체 나더러 어찌 하란 말이냐!”완부옥도 결국은 모용란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완부옥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과하게 침착한 것은 좋지
즐거운 날들은 항상 짧기 마련이었다.대혼례를 치른 지 사흘째 되는 날, 소욱은 아침 조회에 나가야 했다.평소라면 정시에 기상하여 단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으나, 이제 옆에 절세의 미인이 누워 있으니 그저 일어나기가 아쉬웠다.전날 밤은 영화궁에서 머물렀다. 소욱은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안으려 했으나, 허공만을 붙잡았다.그는 순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휘장을 걷어 올렸다.“황후는 어디 있느냐!”유사양이 외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소욱의 목소리를 듣고 급히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폐하, 황후마마께서는 동이 트기 전부터 일어나 계셨습니다. 지금은 밖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계십니다.”유사양도 꽤 놀랐다. 역시 군영 출신의 황후다웠다. 황제보다 더 일찍 일어날 줄이야.소욱은 황후가 일찍 일어나 무예를 닦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이른 시각부터 일어날 줄은 몰랐다.궁전 밖.봉구안은 간소한 의복을 입고 머리를 높이 묶었다. 그녀의 머리끝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고, 멀리서 보면 마치 젊은 낭군처럼 씩씩하고 당당해 보였다.먼저 오금희를 통해 몸을 풀고, 새로 얻은 적연검으로 몇 가지 검술을 연마했다. 이후 장창을 잡고 무예를 이어갔다.여명 속 햇살은 마치 그녀를 편애하는 듯 전부 그녀에게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이른 아침 일을 시작한 궁인들은 그녀를 보고 발길을 멈췄다.그들은 곳곳의 구석에 모여 몰래 지켜보았다.“황후마마께서는 정말 대단하시군요!”“예전부터 듣기로는 이 맹 소장군이 창술 하나는 일품이라고 하더니, 직접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하... 뭐라고 할까, 황후마마께서는 사내들보다 더 씩씩하시다니까. 정말 영웅호걸이 따로 없구먼. 내 가슴이 다 두근두근거리네.”“크흠!” 유사양이 일부러 크게 기침하자, 회랑 처마 아래 몰려 있던 궁인들이 놀라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유사양은 소욱을 뒤따르며 몰래 그의 안색을 살폈다.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여인이 지나치게 눈에 띄거나 집안일
소욱은 더 이상 마음속에 맺힌 말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봉구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집요하게 물었다.“나와 단회욱 중, 누구를 더 깊이 사랑했느냐? 네가 그에게는 다정하게 대했으면서, 어째서 나한테는 이렇게 차갑기만 한 것이냐? 네가 단회욱에게 했던 그 말들, 왜 나한테는 한 번도 해주지 않느냐?”소욱은 과거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가장 감정 어린 말이 ‘제 마음은 폐하께 있습니다’라는 짧은 고백이라는 것을 떠올렸다.그때는 그 한마디로도 만족했지만, 이제는 그 이상을 원했다.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싶어졌다.소욱이 마음속 불만을 쏟아내자, 봉구안은 가만히 있다가 단 한 마디를 물었다.“제가 단회욱에게 뭐라고 말했다는 건가요?”그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그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아했다.소욱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그를 '낭군'이라고 부르지 않았느냐...”봉구안의 미간이 점점 깊게 찌푸려졌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차분히 설명했다.“폐하께서는 단회욱과 다릅니다. 폐하는 천자이시니, 제가 폐하께 가벼운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혼인 전에는 가끔 농담 섞인 말도 할 수 있었지만, 혼인 후에는 황후로서의 신분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했다.규칙은 어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소욱은 그녀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나는 네가 나를 제국의 황제로서가 아니라, 네가 사랑하는 사내로 봐주길 바란다.”그의 눈빛에는 간절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봉구안은 그의 말을 이해한 듯했다.갑자기 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을 앞으로 숙여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위압적인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낭군께서는 제가 이렇게 대하는 것을 좋아하시나요?”소욱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랐으나,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려 했지만, 그녀는 몸을 숙여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그 순간, 그의 머릿속
봉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소욱에게 물었다.“폐하의 아이입니까?”소욱은 터무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내 아이가 아니다.”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그는 눈을 좁혔다.“설마…”그가 기억해낸 것은 조묘의 난 당시, 모용란이 자신과 얼굴이 닮은 아이를 데려와 소욱의 자식이라고 속였던 일이었다.천룡회가 대패한 후, 그 아이는 천옥에 갇혔고, 이후 서왕이 조사하여 그 아이가 천룡회에 의해 친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긴 존재임을 밝혀냈다.그 아이의 부모는 천룡회와 관련이 없었기에 서왕은 아이를 친가로 돌려보냈다.……그 아이가 궁문 밖에서 떠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신하 진한길은 아이를 데려와 추궁했다.예상대로 그 아이였다.아이는 그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으나, 얼굴은 창백하고 야위어 있었다.아이는 소욱을 보자마자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바마마,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소욱의 눈빛은 싸늘했다.“내가 또다시 나를 아바마마라 부르면 네 혀를 잘라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한길!”“예, 폐하!”아이는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하지만 그들은 모두 폐하께서 제 아버지라고 했단 말입니다…”소욱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진한길에게 명했다.“저 아이를 다시 부모에게 돌려보내라. 그리고 그들에게 경고하라. 아이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면 더는 키우지 말라고.”그는 냉정히 자리를 떴고, 남겨진 아이는 절망에 빠졌다.그날, 진한길은 아이의 친부모를 찾아냈다.그들은 진한길에게 하소연하며 고개를 숙였다.“우리 아들이 그자들 손에 끌려간 뒤로 이제야 돌아왔는데, 어려운 살림에 적응하지 못하고 황제 폐하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는 훗날 태자가 되어 황제가 될 운명이라며… 저희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진한길은 냉정하게 일갈했다.“폐하께서 아이를 살려주신 것만도 큰 은혜다. 당장 아이를 데려가라!”부부는 아이를 인계받았으나, 그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발견하고 경악했다.“나
“요녀 사건의 배후 주모자는 분명 북연이 아닙니다.” 봉구안이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북연이 아니라면 누가 배후에서 지시한 걸까?이에 대해 봉구안과 소욱 모두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한편, 성 밖 교외의 객잔에서 소박한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창가에 서서 남제 황궁을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천하를 바둑판 삼아, 선수를 쥐는 것이 이치.아쉽게도 그의 상대는 큰 뜻을 잃고, 남의 아내가 되는 것을 선택해버렸다.…요녀 사건은 소욱이 은이에게 맡겨 자세히 조사하도록 했다.천하의 정세는 풍운이 휘몰아친다.소욱이 해야 할 일은 남제를 강성하게 만들어 외적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병이 오면 막고, 물이 들이치면 흙으로 막아내어 두려울 것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그날 밤, 그는 봉구안과 함께 군대 개혁에 대해 늦은 밤까지 논의했다.“맹 장군이 제안한 개혁안이 매우 타당하구나. 하지만 너의 의견도 듣고 싶다.”봉구안은 스승이 쓴 개혁 방안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남제의 모병제는 지방 장군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방지하여 권력을 분산시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전시에는 모병제가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스승님께서 제안한 부병제는 기존 부병제를 완전히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두 제도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방안입니다.”“부병제는 농사와 군복무를 겸하게 하는 제도로, 평소에는 농사를 지어 곡식을 생산하고, 전시에는 전장에 나가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첫째, 백성은 먹을거리가 우선입니다. 근래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인해 조정에서 계속 군사를 징집하자 농업 인력이 줄어들어 곡식 생산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부병제를 시행하면 이 상황을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둘째, 병사를 한시적으로 사용하고 유지하는 데도 큰 비용이 듭니다. 대규모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하루에 수십만 냥씩 들어가게 됩니다. 병사들이 별도의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가지면 조정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이는 스승님께서 선성의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