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봉구안의 얼굴 그 어디에도 초췌하거나 상심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자녕궁 대문 앞에 나타났다.청초하지만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는 눈동자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상위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피부는 황성 여자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아니라 건강한 윤기가 나고 분홍빛을 띠는 홍조가 생기를 더했다.청초하지만 귀티가 넘치는 오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영비와 닮은 비빈들만 봐온 궁인들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황성 제일 미녀라는 소문에 걸맞게 그녀에게서는 비범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반면 봉구안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호를 떠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변장을 하고 생활했다.미모는 그녀에게 짐만 될 뿐이었는데 특히나 군영에서 더욱 심했다.사모는 그녀가 아까운 얼굴을 괴롭힌다고 꾸중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봉구안의 뒤를 따르는 연상은 저절로 어깨가 올라가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대청으로 들어간 봉구안은 태후의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신첩, 어마마마를 뵈옵니다.”태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황후, 예의 차릴 것 없으니 편히 앉거라.”곧이어 태후는 주동적으로 황제 얘기를 꺼내며 봉구안을 위로했다.“황상은 정무가 바쁘셔서 황후에게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예, 어마마마.”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태후는 황후가 예상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안면근육이 굳은 것처럼 딱딱하고 태생이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분명 연회 때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사실 상 봉구안은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어릴 때는 그녀의 웃음 한번 본다고 사모가 짖꿎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그녀는 유치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다.나중에 장군이 되면서 여자인 것을 들
우상은 봉구안의 신념을 한 걸음씩 부수기 시작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소환, 넌 세상의 악인을 다 없애고 싶다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야.”“너는 이 지하 투기장이 존재하는 걸 조정이 정말 모를 거라 믿어? 여기 관할하는 관리 중에서 이걸 묵인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느냐? 왜 그럴까?”“그들은 돈과 권력을 원하니까, 그리고 치적을 쌓고 싶으니까.”“그럼 넌? 넌 또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너 우리를 다 반짝이는 너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라고 생각하지? 우리를 이겨서 더 많은 사람들이 너를 대영웅이라 칭송하기를 바라는 거겠지.”“하지만 내가 묻겠다.”“그렇게 말하는 정의란 도대체 뭐냐? 악인은 또 누구냐?”“내가 악인이라면, 죄악을 방조하는 조정은 악인이 아니겠냐?”“그래, 넌 날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사람 마음속의 악념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내가 너한테 알려주지. 악념이 존재하는 한, 죄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너 따위 필부가 뭔데 사람 본성을 상대로 싸운다는 거냐?”“넌 내가 악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선행을 해본 적 있다.”“예를 들면, 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산토끼를 살려준 적도 있지.”“네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냐?”“악념 하나 품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 칠정육욕 아래 완벽한 인간이란 없단다.”“소환, 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해. 그건 정의가 아니야…”철창 밖, 차선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소환, 제발 이겨야 해!’강림은 돈주머니를 단단히 움켜쥐고 속으로 빌고 있었다.‘제발, 소환만 무사하면 십 년 동안 뭐든 다 망해도 상관없어!’소환에게 돈을 건 관중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는 지금 우상에게 짓밟힐 위기였고, 사람들은 소리쳤다.“내가 쟤한테 돈을 걸었으면 안 됐어!”“야, 네가 이기라고 했잖아! 빨리 일어나라고!”“야, 이기든 지든 너무 보기 안 좋잖아!”“잠깐… 뭐야? 무슨 일이
우상이 철창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자신의 집 마당이라도 되는 양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시합장으로 여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철창 문이 닫히고서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봉구안에게 물었다.“소환, 저것들 봐라. 니가 이길 거라 믿는 사람이 있긴 한 거지?”봉구안은 냉정한 얼굴로 대답을 삼켰다.그 순간, 철창이 천천히 끌어올려졌다. 땅에서 떨어진 철창은 하늘 중간쯤에 멈췄다.그 후에도 우상은 움직이지 않았다.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채,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설교하듯 말했다.“소환, 넌 여전하구나. 아직도 저렇게 젊은 혈기로 설쳐대다니.”“이런 식으로 싸우면 안 되잖아.”“내가 네 속셈 모를 줄 아나? 네가 원하는 건 입맞춤 따위가 아니잖아. 너는 이 기회를 틈타 정원아란 계집을 구하려는 거겠지.”봉구안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둘이 철창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관중들에겐 들리지 않았다.우상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걱정 마라. 내가 굳이 이걸 폭로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싸움이 뭐가 재밌겠어? 반 시진 동안, 내가 쓰러지든지, 아니면 네가 죽든지... 난 이곳에서 너와 끝장을 볼 거야.”그가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웃음을 지은 순간, 손에 힘을 모아 공격을 날렸다.봉구안은 날렵하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우상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오… 좀 실력이 늘었네?”이어지는 두 번째 공격.이번엔 번개같이 빠르고 맹렬했다.봉구안이 또 한 번 피했지만, 이번엔 처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우상은 여전히 웃었다.“보아하니, 실력이 꽤 늘었구먼.”그는 마음을 무너뜨리는 데서부터 싸움을 시작했다.관중석은 숨을 죽인 채 철창을 응시했다.봉구안은 우상을 보며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들을 떠올렸다.그녀의 분노가 타올랐다. 주먹을 꽉 쥐며 공격에 나섰다.그러나, 그녀의 주먹이 그의 몸에 닿자, 아파한 것은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다.
강림은 멍하니 우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평범하게 생긴 남자, 군중 속에 섞이면 금세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남자를…“무림맹이 처음 설립될 당시, 강호에 세 명의 악귀가 나타났는데, 우상이 바로 그들 중 우두머리였소.”“그들은 소림의 속가 제자로, 방화와 약탈, 강탈, 살인을 일삼으며 악행을 저질렀지. 무림맹은 이 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숭화산에서의 결전을 벌였소.”“그 전투에서 무림맹은 합심하여 두 명의 악귀를 처치했지만, 우상의 무공은 너무 강해서 그만 도망치고 말았소.”“소환은 그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상은 동방세의 신부를 납치했소…”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강림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몸이 오싹해졌다.평소 장난스럽고 가벼운 그의 태도와는 달리, 그는 잠시 멈칫하며 목이 메인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놈은 동방세의 부인을 토막으로 나눠서 매일 한 조각씩 보냈었소. 그 일로 동방세는 거의 미쳐버릴 뻔하였소.”“나중에 소환이 우상을 찾아내 결투를 벌였지만, 그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다만, 그 싸움에서 소환이 패배했다는 것만 알려졌소.”“소환은 원래도 부맹주라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싸움 이후로는 아예 무림맹을 떠나버렸소.”“그 후 몇 년 동안 동방세는 계속 우상을 찾아다녔는데, 오늘 여기서 저 놈을 보게 될 줄이야.”강림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그는 그 시절 겨우 열몇 살의 어린 소년으로, 무공도 대단치 않았고, 고작 곁에서 한마디 거들며 허세나 부리던 아이에 불과했다.그러나 우상의 잔혹함은 그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었다.동방세의 부인의 죽음은 지금도 무림맹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그것은 분명히 소환의 가슴 속 깊이 박힌 한 가시일 터였다.강림은 지금이라도 소환과 함께 우상을 죽이고 싶었다.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소욱의 마음도 무거워졌다.그는 봉구안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 모든 풍류와 연애는 그녀가 겪은 수많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함을 쳤다.“보여줘! 보여주라고!”“제기랄, 우리 이렇게 많이 네 승리에 돈을 걸었는데 네가 기권하면 우린 다 쫄딱 망한다고!”“정원아를 어서 끌어내! 나도 그 여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고 싶으니 말이야!”봉구안의 한 마디가 사람들을 불안하고 동요하게 만들었다.사회자는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조용, 조용! 다들 조용하시오!”“여러분에게 보장하겠소. 정원아는 분명 살아 있으니 어서 진정하시오…”봉구안은 단호하고 냉랭하게 말했다.“정원아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저는 경기를 포기하겠습니다.”그녀가 두 판을 연달아 이긴 후, 그녀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포기한다면 그들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셈이었다.사람들은 그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정원아를 끌어내라!”“맞아, 안 그러면 우린 돈 돌려달라고 할 거야!”천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외치는 소리에 사회자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그는 슬며시 자리를 떠나 비밀문으로 들어가 안쪽에서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나타났다.“좋소. 우리 주인께서 말씀하시길, 정원아를 먼저 데리고 나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하셨소.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실 수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다만, 여러분들은 추가로 돈을 더 걸어야 할 것이오!”관중들은 일제히 환호했다.“좋아!”전진파의 사람들은 얼굴이 굳었다.그들 또한 정원아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곳에서 다시 철창 하나가 내려왔다.이번 철창은 조금 작았다.안에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고, 그녀는 힘없이 구석에 기대어 있었다.철창이 땅에 닿자, 전진파의 제자들이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원아! 정원아!”“사매님!”희미하게 정신이 든 정원아가 눈을 떴다.“다행이다, 부관장님! 사매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사회자는 봉구안을 향해 물었다.“어떻소?”그는 곧바로 신호를 보내 철창을 다시 올리려
봉구안은 더 이상 방어에만 치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그녀는 갑자기 이전에 ‘피박쥐’ 고원처럼 철장에 매달려 위로 올라갔다.상대가 주먹을 위로 치켜올리자, 봉구안은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몸 전체의 무게를 실어 내리눌렀다.그 과정에서 상대의 권법을 깨부수고 손목뼈까지 탈구시켰다.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살인 실을 빼앗아 목에 감았다.봉구안은 실을 세게 조여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찰나의 순간, 관중석에서는 모두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봤다.누군가의 목이 떨어지는 모습을 간절히 기다리는 눈빛이었다.그러나 봉구안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상대를 간신히 기절시키는 선에서 멈췄다.“죽여라! 죽여!”“내 돈 걸었어! 재미있는 장면을 보여줘야 할 거 아냐!”관중들의 불만 섞인 고함이 철장을 울렸다.하지만 봉구안은 그 모든 소음을 무시하고, 차갑게 무대의 주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음 상대를 내놔.”주최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수환 승!”소욱은 긴장이 조금 풀린 듯 숨을 내쉬었다.이제 다음 도전자를 선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무대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강림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전진파 제자들에게 외쳤다.“뭐하고 있어? 빨리 나가야지! 너희는 남은 수들이 많잖아!”전진파 제자들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그러나 명문 정파로서 그들은 정정당당히 싸우고 이기고 싶었고, 속임수를 쓰거나 억지로 나서기를 꺼려했다.하지만 이들이 반드시 봉구안을 이겨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그저 시간을 충분히 끌며 그녀를 더 강력한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목표였다.그 순간, 진한길이 황제와 함께 도전자 대열로 나서는 것을 보았다.그는 황제의 의도를 즉각 파악하고 그를 따라갔다.강림도 망설이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죽으면 죽지! 최악의 경우 소환에게 지는 거겠지!”“부관장!”차선아 역시 앞으로 나섰다.그러나 주최자는 여러 사람 중 몇 명만 선발했고, 소욱은 결국 선택되
차선아는 누군가에게 안긴 채로 몸을 안정적으로 기댔다.그녀는 곧바로 뒤돌아섰다.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녀는 경계하며 손을 칼처럼 세워 방어 태세를 갖췄다.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상대를 보고 그 손칼을 순식간에 거뒀다.“소환! 네가 왜 여기에!”봉구안이 그녀의 등을 받쳐주며 바닥에 안전히 착지하도록 도왔다.차선아의 눈가가 순간 붉어졌다.그녀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소환이 하늘에서 내려올 줄은 말이다.차선아만이 아니었다.소욱과 강림 역시 깜짝 놀랐다.분명 바로 옆에 있던 소환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소욱은 곧바로 몸을 날려 봉구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무대 위, 향은 이제 겨우 절반이 타들어간 상태였다.도전자들은 마치 홍수처럼, 또는 메뚜기 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그들을 멈출 수는 없었다.전진파의 제자들은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이 모든 것을 반드시 멈춰야 했다!봉구안은 차선아를 내려놓고 소욱의 제지를 무릅쓰고 무대로 날아올랐다.차선아는 눈을 크게 뜨며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그러나 소욱은 알고 있었다.봉구안이 결국 참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봉구안은 차갑게 선언했다.“도전하겠소!”그 말이 떨어지자,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싸움을 멈추고 주목했다.전진파의 제자들은 신속히 차선아 곁으로 몰려들어 그녀를 보호했다.“부관장님, 괜찮으십니까!”그들은 봉구안을 경계하며 무대를 바라봤다.무대 위.철장이 열리자 봉구안은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고 나서도 방민은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알아보겠어. 당신이 바로 소환이군.”그녀가 아직 부관장이 되기 전, 단 한 번 마음을 두었던 남자.방금 그녀는 소환이 차선아를 구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봉구안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절 믿으십시오.”방민은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정원아는 여전히 그들의 손에 있었다.전진파의 제자들이 이 순간
봉구안은 강림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강림은 그녀가 손찌검할까 두려워 얼른 소욱 쪽으로 몸을 돌렸다.“대체 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이오? 차선아랑 완부옥,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다퉜던 이야기를 누가 모르겠소?”“만약 완부옥이 차선아의 행적을 전진파의 장문인에게 고자질하지 않았다면, 장문인이 그녀를 직접 데리러 오지도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자네는 지금쯤 두 여자를 모두 품에 안고 살고 있었을 것이오!”“이렇게 젊은 나이에 부관장이 되다니, 참 대단하지 않소?”소욱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주먹을 살짝 쥐었다.‘참으로,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다투었다니.’그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의 소장군이란 사람은 정말 매력적이구나.만약 그녀가 남자였다면, 이미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아니, 잠깐.만약 그녀가 남자라면, 그는 오히려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소욱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다가 정신을 가다듬었다.봉구안은 낮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강림, 남의 집 아씨 명예를 자네 같은 놈이 망쳐놓은 것이오. 입 놀리는 걸 멈추지 않으면, 자네 입을 찢어놓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니 그런 줄 아시오.”강림은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억울함이 가득했다.틀린 말도 아니지 않는가?차선아는 당시에 소환 때문에 전진파를 떠나려 했고, 그녀가 소환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그는 문득 소욱과 소환이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설마...!’강림은 한순간 깨달음을 얻었다.‘이거였군! 소환은 이미 새 연인을 찾았고, 그래서 소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거였어!’‘그렇다면... 둘이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란 말인가?’‘소환이 언제부터 남자를 좋아했지?’강림은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한편, 차선아는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로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그녀의 몸은 낮췄지만, 이는 결코 굴욕적인 태도가 아니었다.그녀 뒤에 서 있던
향 하나가 다 타려고 할 때, 전정파는 제자 한 명을 파견하여 패검을 벗고 단상에 오르게 하였다.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바였다.강림은 무대 위 올라온 사람에 대해 견식이 좀 있는지 봉구안과 소욱에게 그녀를 소개했다.“저 자는 전정파 사람 중 하나인 방민이오. 그녀의 검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바람처럼 빠르지...”봉구안도 방민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속공을 요령으로 하여 검객의 체형, 천부적인 재능에 대해 모두 극히 큰 입문요구를 갖고있었다.소욱은 방민을 좋게 보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저 무대 위에서는 무기를 휴대하고 겨루어 볼 수 없으니,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강림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저 고원이 여인에게 약한 사람이길 바랄 수밖에 없겠군.”방민은 걸음걸이가 침착하여 철장에 들어갔을 때 전정파의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스승님, 저 악당을 죽이십시오!”“사매, 우선 저 놈의 수법을 먼저 간파하셔야 합니다!”방민은 베일을 쓰고 손에 칼을 꽂지 않았더라도 두 눈은 여전히 확고하고 힘이 있었다.철장 속에서, 고원의 눈빛은 마치 입에 닿을 고기를 훑어보는 것처럼 그녀를 음산하게 훑어보고 있었다.“과연 미인이군... 헤헤, 난 미인을 좋아하지…”방민의 동공이 움찔하며 수축되었다.고원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손에 내공을 급히 모아 한 줄기의 내공을 만들어내었다.내공은 순식간에 고원을 강타하며 그를 쓰러뜨렸다.봉구안은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전진파의 내공은 참으로 깊구나. 방민이 침착함만 유지한다면, 고원이 결코 어려운 상대는 아닐거야.’몇 번의 격렬한 공방 끝에, 방민은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고원은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약점을 찾으려 애썼다.“미인들은 참으로 향기로워...”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철창을 붙잡았다.순간, 마치 벽을 타듯 몸을 날려 철창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그리고는 재빠르
봉구안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철창 안, 그 마른 사내는 상대의 얼굴에서 살점을 뜯어냈다. 상대가 몸부림을 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상대 위에 올라타서는 내려오지 않았다. 얼굴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귀, 코, 심지어는 눈까지 파내어 생으로 삼켜버렸다.이토록 피비린내 나는 광경은 단지 한 잔의 차를 마실 정도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동안 관중석의 환호는 끊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듯, 봉구안 일행을 완전히 삼켜버린 듯했다.주변의 함성과 휘파람 소리에 귀가 먹먹해진 봉구안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들리는 것은 광기에 찬 박수와 환호성뿐이었다.소욱은 이미 전쟁터의 잔혹함을 본 적이 있었다. 기근 속에서 서로의 자식을 바꿔 먹는 광경도 목격했다. 구중탑 안에서 약쟁이들이 시체를 뜯어 먹는 장면조차 익숙했다.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선택이 아니라 단지 ‘승리’를 위해 상대를 뜯어먹는 이 마른 사내의 모습은 그조차도 경악하게 만들었다.더욱 소욱의 속을 뒤집어놓은 것은, 그런 장면을 보고 환호하는 관중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손으로 이런 광기를 만들어낸 자들이다.소욱은 점점 더 봉구안의 손을 꽉 쥐었다.“네가 저곳에 들어갈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정원아도, 양연삭도 데려올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놈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 너만 안전하면 돼.”소욱은 당장이라도 봉구안을 이 자리에서 끌고 나가고 싶었다.하지만 봉구안은 여전히 침착했다.그녀는 소욱의 손을 부드럽게 풀어내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소욱은 잠시 혼란스러웠다.‘지금… 나를 위로하는 건가?’철창 안에서 울려 퍼진 것은 커다란 비명소리였다. 그 덩치 큰 사내는 이제 눈알까지 잃었고, 피가 흐르는 눈구멍이 참혹했다. 그는 철창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기어나오려 했지만, 목청껏 외칠 수 있는 말이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