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녀의 입술, 그녀의 손, 술을 마시는 그 동작, 무심코 드러내는 모든 자세, 말투의 습관까지... 그 모든 것이 익숙한 법이다.소장군… 그는 그의 황후 봉구안이었다. 그는 확신하였다.달빛 아래, 소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그를 철저히 속였다.그녀는 전장에서 적을 물리치는 맹 소장군일 뿐만 아니라, 무림을 평정한 부맹주 소환이기도 했다.그 면죄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자신을 위해 구한 것이었다.그러니 어찌 궁에 머무르길 좋아했겠는가?그녀가 보아온 세상은 광활한 북방뿐만 아니라, 끝없는 강호이기도 했다.그녀는 열세 살에 이미 강호를 누볐다.황궁은 그런 그녀에게 너무도 작았다.마치 강과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를 작은 수조에 가두는 것과 같으니, 답답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어젯밤 그녀가 심가오의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어떤 삶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가까이에 그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욱은 점점 더 혼란스럽고 괴로웠다.그는 그녀의 정체를 폭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떠나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모르는 척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는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터였다.다음 날 아침.소군주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그녀는 봉구안의 방 문을 두드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라버니, 우리 이제 황성으로 가요!”봉구안이 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어젯밤, 아마 술을 마신 탓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소욱의 그 아련한 눈빛과 자신이 그립다는 말이 떠올랐다.동방세는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봉구안은 그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났다.그리하여 일행은 심가오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봉구안은 선성의 난 이후, 천룡회가 반드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을 것이라 직감했다.그래서 더 평범한 가면을 쓰고, 말을 타는 대신 가마에 올랐다. 황제와 소군주에게 화를 불러올 위험을 줄
앞쪽 산체가 무너져 더는 길을 갈 수 없게 되었다.관아에서 사람을 보내 돌멩이와 나무더미를 치우고 있었으나, 시간이 걸릴 터라, 봉구안과 일행은 근처에서 잠시 쉬기로 하였다.소군주는 마음이 큰 아이인지라, 잠시 후에는 다시 활짝 웃으며 “황제 오라버니!”를 연발하였다.“황제 오라버니, 여기서 쉬어가는 건가요? 오늘 밤엔 소환 오라버니랑 함께 잘 수 있나요?”비록 소욱이 허락한다 하여도, 봉구안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근처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소군주가 물고기가 먹고 싶다 하자, 소욱은 진즉 진한길에게 가서 물고기를 잡아오라 명하였다.진한길은 솜씨가 제법 있어, 잠시 뒤 크고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왔다.봉구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불을 피워 간단한 나뭇가지로 만든 구이 틀을 설치하였다.소욱은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앉아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소군주는 그의 곁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소환 오라버니는 참 좋으십니다. 황후마마가 되신다면 더 좋을 텐데요!”소욱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의 마음엔 이미 자신이 없을뿐더러, 그녀는 황궁의 삶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그와 그녀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그는 이미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으며, 더는 억지로 붙잡지 않을 터였다.다만 지금은 그녀를 몇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단지 몇 번만이라도...마치 꿈처럼, 황궁으로 돌아가면 이 꿈은 깨어나고 말리라.소욱은 그런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그 꿈 속에 머물고 싶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구안의 곁으로 가, 함께 준비를 거들기 시작했다.그는 능숙한 손길로 나뭇가지를 물고기 몸에 꿰었다.“부맹주는 아마 물고기를 구워보신 적이 없을 터, 이 일은 짐이 하겠소.”봉구안은 실로 물고기를 구워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였고, 물고기 구이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차라리 마른 빵을 먹거나 들에서 과일을 따먹
소욱은 어두운 얼굴로 앞으로 나아갔다.마음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했다.마치 그가 무엇을 하든, 저 여인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 듯했다.단회욱이 구운 생선이 자신이 구운 것보다 맛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갑자기, 그는 뒤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폐하!”걸음을 멈추며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일이냐.”“황제 오라버니! 소환 오라버니가 폐하께 사과드리러 왔답니다!”뒤돌아보니 소군주도 함께 있었다.그녀는 봉구안의 곁에 서서 한 손에는 구운 생선을 들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검은 그을음이 한 바퀴 둘러져 있었다.또 다른 손으로 봉구안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맞죠? 오라버니? 황제 오라버니가 생선을 굽느라 얼마나 힘드셨는데요. 그런데 안 드시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그렇죠? 맞죠?”봉구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소욱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가 곧 표정을 풀며 태연하게 말했다.“짐이 그 정도로 유치한 줄 아느냐. 짐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소군주는 황제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황제 오라버니, 적당히 하셔야죠! 소환 오라버니가 이렇게 와서 사과까지 하시는데, 왜 자꾸 빼고 그러세요? 어서 가서 구운 생선을 먹으러 가요!”소욱은 여덟 살짜리 꼬마에게 훈계를 받을 줄은 몰랐다.그렇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셋이 다시 불가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생선뼈 더미와 배부른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한길이었다.진한길은 무덤덤하게 말했다.“폐하, 부맹주... 두 분이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셨으니, 신하가 보기에 이 구운 생선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먹었습니다.”소군주는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너는 정말 큰 식충이구나! 흥!”소욱 역시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그러나 봉구안은 태연히 말했다.“제가 가서 마른 양식을 가져오겠습니다.”그녀가 돌아서자, 소욱은 차갑게 진한길을 바라보며 물었다.“맛있더냐.”진한길은 진심으로
그날 저녁 소욱 일행은 객잔에 입주했다. 봉구안은 소군주의 방 지붕 위를 지켰다.밤바람이 차가워서 추위가 느껴지자 그녀는 허리춤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 객잔에서 소욱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폐하, 서왕 전하의 밀서입니다.”진한길이 다가와서 아뢰었다.그는 황제와 지붕 위의 검은 인영을 보고 당황스러웠다.‘폐하께서 지나치게 소환을 신경 쓰는 것 같은데.’그는 소환이 사내를 좋아한다던 술 취한 동방세의 말이 떠올랐다.진한길은 신속히 고개를 저었다.소환이 그런 취향이 있다고 해도 황제는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싹틀 리 없었다.소욱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진한길의 손에서 밀서를 받아들었다.서왕은 서신에서 천용회를 언급했다.감옥에서 천용회의 기호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그렇다는 건 흑포가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천용회의 도움이 있었다는 얘기였다.소욱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일정을 앞당겨야겠군. 속히 황성으로 복귀한다.”“예!”진한길은 공손히 답했다.진작에 이랬어야 할 일이었다.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소군주가 갑자기 앓기 시작한 것이다.그녀는 그날 밤부터 고열에 시달리며 의식을 잃었다.진한길은 현지 의원을 불러왔다.의원은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고는 아연실색했다.“이건 극한의 병입니다!”밖에서 기다리던 소욱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소군주의 병증에 대해 그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사정을 아는 진한길은 의원을 보낸 후에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군주의 병을 일반 의원은 치료가 힘든 것 같습니다.”소욱은 침상으로 다가가 파리하게 질린 소군주의 입술과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소환을 불러오거라!”“예!”잠시 후, 봉구안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었기에 의원이 소군주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은 보았지만 그냥 일반 병증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소녀의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보자 그녀는 불길한 느낌이
봉구안은 결연한 표정을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강호의 원칙대로 무고한 자들은 건들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꾸나.”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날이 곧 밝을 무렵, 객잔과 십리 정도 떨어진 수림.봉구안은 한쪽 무릎을 꿇고 검 한자루에 몸을 지탱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바람이 그녀의 머리띠를 흩날리고 있었다.그녀의 주변으로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그들의 붉은 피가 수림을 물들였다.이제 남은 건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뿐.그도 중상을 입고 나무에 몸을 지탱한 채, 손으로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부여잡고 있었다. 가면은 이미 부서져서 초췌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소환은 괴물이 따로 없었다.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괴물!봉구안은 검을 짚고 몸을 일으키고는 싸늘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곧이어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챙그랑!사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눈을 감은 순간,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봉구안을 향했다.그녀는 신속히 몸을 비틀어 화살을 피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높은 지대에 흰 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가면 아래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봉구안이 남부에 있을 때 흑포와 함께 등장했던 그 사내였다.한숨을 돌린 우두머리가 그 백의청년을 향해 달려갔다.하지만 곧이어 사내의 검이 우두머리를 향했다.슉!검은 순식간에 우두머리의 가슴을 뚫어버렸다.우두머리는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마 조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일까?하지만 교주가 아직 출관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척살령은 누가 내렸단 말인가!천용회에 그를 죽일 자격을 가진 자는 몇 없었다.털썩!우두머리는 그렇게 눈도 감지 못하고 쓰러졌다.봉구안은 몸을 솟구쳐 백의 청년에게 손을 뻗었다.사내는 그녀를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그녀는 가볍게 몸을 날려 피했다.그녀의 검이 그에게 닿던 순간,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구안아, 내 사랑.”순간 봉구안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고 검은 방향을 틀었다.곧이어 사내의 장풍이
관부에서는 수림에서 열 명이 넘는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밀보를 받았다.천용회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려 했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암살을 시도한 걸 하필 황제에게 들켰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백포를 입은 자들이 누구인지, 천용회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소욱은 끝까지 조사하기로 했다.이틀 후, 소군주의 병세가 호전되자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봉구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행을 호위했다.일정은 순조로워 3일만에 그들은 황성에 도착했다.봉구안은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성에 도착한 후로 그들과 작별인사를 했다.그녀는 자신이 직접 쓴 책자 하나를 소군주에게 선물로 주었다.“군주, 매일 권법을 연마하면 신체가 건강해질 겁니다.”소군주는 그녀와의 이별이 너무 아쉬운 모양이었다.“오라버니, 황성에 며칠 더 머물면 안 될까요? 황궁 알아요? 엄청 큰 곳이고 뭐나 다 있어요. 저와 황궁에 가시면 매일 기쁘게 해드릴게요. 황제 오라버니도…”소욱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소 부맹주, 나중에 또 보지.”그녀의 마음에는 단회욱뿐이라는 것을 그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더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그녀를 보내주는 것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는 방법이었다.그는 나중에 다시 보지 않기를 바랐다.앞으로 그는 황제의 삶을 살고 그녀는 원하는 대로 강호를 떠돌며 살게 될 것이다.하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봉구안은 그제야 홀가분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나중에 봅시다.”말을 마친 그녀가 뒤돌아섰다.소군주가 울며 달려가서 그녀를 안았다.“오라버니, 가지 마세요! 저 오라버니가 좋아요. 오라버니랑 노는 게 재밌어요. 더 놀고 싶어요…”소욱은 등을 돌려 진한길을 호출했다.“군주를 모시고 오너라.”말을 마친 그는 홀로 황궁을 향해 걸어가며 절대 뒤돌아보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었다.봉구안은 소군주의 손을 놓고 뒤돌아서 정중히 말했다.“군주께서 스무 살 생신 때 꼭 돌아와서 생신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맹세하죠.”그러니 잘 살아가라는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광기와 집착이 숨겨져 있었다.영화궁.궁인들은 기쁨에 겨워 환호했다.“폐하께서 돌아오시자마자 흔빈마마 처소로 걸음하신대요!”그 시각, 내전.연상은 황제를 마주하는 것이 여전히 두려웠다.그녀는 봉구안이 입던 옷과 썼던 장신구들을 상자에 넣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그리움을 달랠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려는 걸까?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되지 않는가?그가 해야 할 것은 흔빈이라는 칭호를 폐하고 영원히 영화궁에 걸음하지 않는 일이었다.사람을 연모하는 것이 극에 달하면 떼어내기 힘들다고 하는데 소욱은 그것을 강제로 떼어내려 하고 있었다.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서랍에서 책자 하나와 옆에 놓여진 봉황 비녀 하나를 발견했다. 그가 선물한 비녀였다.책자를 펼친 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안에는 봉구안이 쓴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그는 한때 그녀에게 매일 어서방으로 그녀를 불러 한 시진을 자리를 지키게 한 적이 있었다.그는 그때도 그녀가 억지로 그곳에 가서 시간만 때운다고 생각했었다.[제왕은 폭력적이지 않고 벌하는 자들은 다 이유가 있다.][제왕은 착한 심성을 가졌지만 해당집은 어울리지 않는다.][몸이 거부하지 않는 자에게 마음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입밖으로 낼 수 없고 확실치도 않으며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일찌감치 끊어내는 게 맞다.]소욱은 마음이 착잡해졌다.그는 그녀의 마음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연상은 황제가 든 것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서랍 안의 물건들은 봉구안이 떠날 때 처리하라고 지시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냥 처리하긴 아쉬워서 몰래 감춰둔 것인데 황제가 그걸 찾아낸 것이다.그녀가 불안에 떨 때, 갑자기 고개를 든 황제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짐이 너에게 입맞춤을 하고 강제로 너를 취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겁에 질린 연상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녀로 목을 겨누었다.“폐하, 소인을 놓아주십시오
봉구안은 살짝 놀란 눈으로 눈앞의 소욱을 바라보았다.또 무슨 일이지?그가 얼마나 굳센 의지로 따라오고 싶은 충동을 눌렀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그는 그녀의 마음에 자신만 품기를 바라지 않았다.그냥 자리 하나만 내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그녀가 마음의 창을 조금이라도 열어준다면 그것을 찢어서라도 비집고 들어갈 것이다.그는 진작에 그 책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하지만 오늘 발견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녀가 멀리 떠나지 않은 시점이라서.봉구안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폐하…”소욱이 갑자기 말했다.“누군가 짐을 죽이려 하고 있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워낙 무예가 뛰어난 소욱이고 신변에 호위무사들도 있는데 자객이 나타나더라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소욱이 말을 덧붙였다.“강호 인사였어. 천용회와 유관하단 것만 알고 있고 다른 단서는 없어. 그래서 짐은… 소 부맹주가 짐을 도와 그자들을 찾아주었으면 한다.”봉구안이 주저하며 말했다.“폐하, 소인은 할 일이 있습니다.”천용회의 일은 줄곧 추적하고 있었다.소욱이 말했다.“알고 있다. 짐은 단지 이 일을 자네가 마음에 두었으면 해서…”그는 자신의 안위를 두고 그녀의 관심을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효과는 미미했다.그녀가 마음에 그를 품었다고 해도 그를 위해 남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소욱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감옥에 천용회의 기호가 있었다. 그러니 흑포는 아마 천용회 사람일 것이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예를 행하고 작별인사를 했다.그녀가 그렇게 무심하게 소욱의 옆을 지나치려는데 사내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그리고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황궁에 천용회 사람이 있다. 숨어 있는 자를 대비하긴 어려운 법이지.”“만약에… 짐이 목숨을 잃는다면 남제에는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 짐에게는 자식이 없으니 각 지방의 왕들이 황위를 두고 싸우겠지.”“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