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혜궁.정비는 평소의 온화하고 단정한 모습과 달리,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꽃봉오리를 쥐어 부숴버렸다.“알아냈느냐.”추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주인의 분노를 느낀 그녀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백성들이 등문고를 울리며 황후 폐위를 청했지만, 폐하께서는…”그녀는 몰래 정비의 얼굴을 흘끗 보고,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폐하께서는 여론을 무릅쓰시고 민심에 따르지 않으셨사옵니다.”정비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그녀의 웃음은 지극히 온화했다.“폐하께서는 정말 황후를 감싸시는구나.”“마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정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금오가 이미 지고, 날이 저물고 있었다.“폐하가 황후를 지키고 싶으셔도, 수많은 백성과 장병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구나.”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맹 소장군의 죽음은 아직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적어도 북방 지역과 북대영에는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터였다.거기 있는 병사들은 전부 맹교먹의 부하였다.그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면, 북방은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했다.그 소식이 만약 북방에 닿기라도 한다면… 폐하께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못할 것이다.…영화궁.밤 자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봉구안은 궁으로 돌아왔다.그녀는 온몸에 밤행복을 걸치고 내전으로 들어섰는데, 침상에 앉아 있는 소욱을 발견했다.그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돌아올 줄 알았느냐?”입으로는 엄하게 꾸짖었지만, 그의 눈빛은 은연중에 그녀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봉구안은 그에게 가볍게 예를 표했다.“확인할 일이 많아 시간이 늦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아직 쉬지 않으셨사옵니까?”소욱은 화가 치밀어 올라 말했다.“황후가 이렇게 늦게까지 안 돌아오는데, 내가 어찌 잠들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공손하게 대답했다.“겸사겸사 최근 소문을 조사했는데, 모용가와 관련이 있는 듯 하옵니다.”소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모용가가?”그는 눈을 들어
오후.내시가 황제의 명을 받고 흥혜궁으로 가서 교지를 전했다.추홍은 정비와 함께 교지를 들을 준비를 하며 좋은 일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그러나 곧 두 사람의 얼굴은 경악과 당혹감으로 물들었다.“...그러므로 정비의 봉호를 박탈하고, 육궁을 협조하는 권한을 거두며, 귀인으로 강등한다. 즉시 주전에서 이거하도록 하라!”“그럴 리가 없사옵니다!”추홍은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폐하께서 마마를 이렇게 대하실 리가 없습니다!”마마께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는데 어찌 폐위당하실 수 있단 말인가!정비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품위를 유지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교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황제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절을 올렸다.그러나 교지를 전한 내시가 떠나자 그녀는 갑자기 옆의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손은 성지를 꽉 쥔 채로 떨렸다.추홍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마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폐하께서는 분명 마마를 각별히 아끼셨는데... 어떻게 마마의 빈위를 폐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주인과 하인의 운명은 하나로 연결된 법. 추홍은 정비보다 더 조급하고 불안했다.정비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그녀의 눈에는 쓰라림과 함께 희미한 쓸쓸함이 비쳤다.빈에서 귀인으로 강등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하지만... 적어도 이유는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추홍은 평소의 마마와 다른 모습에 당황하며 금세 눈물이 맺혔다.“마마, 제가 지금 만수궁으로 가서 태황태후께 알려드리겠사옵니다!”“태황태후께서는 마마를 그토록 아끼시니, 폐하께서 마마를 폐위시키는 것을 절대 좌시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만수궁.태황태후는 자리에 앉아 얼굴에 분노와 실망을 띠고 있었다.소욱은 그녀의 왼편에 앉아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주변의 궁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태황태후는 소욱을 향해 분노하며 말했다.“나는 동의할 수 없다! 네가 꼭 정비를 폐하려 한다면, 차라리 나도
“마마…”연상이 돌아왔다.그녀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했다.봉구안의 지시대로 도망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누를 끼칠까 두려웠다.하지만 봉구안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함께 고난을 겪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마마, 폐하께서…”연상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하려 했지만, 봉구안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미 알고 있다.”소욱이 그녀의 신분을 숨긴 일로 연상을 탓하지 않을 것이기에, 연상이 궁에 머무르는 것도 무방했다.하지만 연상은 여전히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꼈다.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조금만 더 빨리 도망쳤더라면…”“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하며, 문밖에 서 있는 호위병을 바라보았다.그는 소욱의 사람이었고, 연상은 그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다.최 상궁은 연상이 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다.저 아이가 돌아오면 자신이 봉구안의 신임을 잃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최 상궁은 더욱 서둘러 봉구안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마마, 이틀 후가 화신제를 여는 날이옵니다. 제가 준비한 것들을 한 번 보시겠사옵니까?”연상이 호기심에 물었다.“화신제요? 마마, 그게 무엇인가요?”봉구안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사월 초, 민간에서는 꽃의 신을 기리는 풍습이 있다.”“이번 폐하께서 백성과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크게 준비하셨지…”연상은 신기하다고 느꼈지만, 화신제보다 더 궁금한 것은 봉구안이 과연 궁에 머물기로 결심한 것인지였다.…소욱은 모용선을 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용 가문에도 벌을 내렸다.그녀의 부친 모용회는 관직이 강등되어 변명할 기회조차 없이 황성을 떠나야 했다.만수궁.모용선은 태황태후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글썽였다.태황태후는 그녀를 때릴 수도 없고, 애가 타며 나무랐다.“애당초 너는 총명한 아이라고 여겼는데…”“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너 스스로를 망치고, 가문까지 연루시켰다!”“선아, 정말이지 실망스럽구나!”“네 사
형방 안에서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폐하! 신은… 신은 결코 적국에 투항하거나 나라를 팔아넘기지 않았사옵니다! 신은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으며, 단지 남제의 강산과 사직을 위해… 아! 신은 진심으로 맹 소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사옵니다!”“폐하, 신도 억울합니다…”나무틀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맹교먹이 죽은 후 몰래 사건을 조장했던 몇몇 인물들이었다.공공연히 조정에서 황제를 비난하며 충신을 해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단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숨어서 이간질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린 이들은 진정한 악인이었다.이미 이들을 잡아들였으니,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남제의 조정과 민심을 어지럽힌 자들은 틀림없이 불충의 마음을 품었으며,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 이익을 챙겼을 가능성도 높았다.하지만 며칠 동안 문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오늘, 소욱이 직접 형방을 찾았다.진한길은 공손히 절하며 보고했다.“폐하, 이미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나 그들은 끝까지 자백하지 않고 있사옵니다.”소욱의 날카롭고 깊은 시선이 그 상처투성이의 억울함을 외치는 자들을 스쳐 지나갔다.그들은 황제를 알현하는 기회를 얻어 입을 모아 변명하기 시작했다.“폐하, 신의 충심은 하늘이 알고 있사옵니다… 신은 단지 폐하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길 바랐을 뿐입니다. 맹 소장군은 충신이었사옵니다…”“폐하, 신이 폐하가 충신을 해쳤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은 단지 폐하가 천하인에게 해명을 하길 바랐을 뿐입니다… 신은 결코 반역할 마음이 없었사옵니다…”“폐하, 만약 신을 믿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하지만 신은 죽더라도 떳떳하게 죽고 싶사옵니다!”소욱의 잘생긴 얼굴은 한층 더 냉혹해졌다.그는 천천히 불가마 옆으로 걸어가 뜨겁게 달궈진 인두를 들어 올리며 평온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희가 스스로 결백과 충심을 자처한다면, 짐은 너희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말을 마친 그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미소를 지었다.그들 모두
만수궁.어의들은 머리 위에 칼이 매달린 듯 조심스레 아뢰었다.“폐하, 태황태후께서 뇌졸증으로 인해 갑자기 쓰러지셨사옵니다. 상황이 매우 위중하옵니다!”소욱은 이 말을 듣고 급히 내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의 얼굴은 유난히 어두웠다.세상에 남은 혈육이 많지 않은 그였다.내전에서는 태황태후가 허약한 몸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슬픔과 미련으로 가득 차 있었다.“황상…”소욱은 곧장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할마마마.”그는 참으려 해도 억누르기 힘든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태황태후는 갑작스러운 병환 탓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한 마디를 꺼내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그녀는 온 힘을 짜내듯 목에 핏줄을 세우며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말했다.“나는… 늙었고, 쓸모없어졌구나.”“넌 어릴 적부터 참 고생이 많았다… 나는 그저, 네 곁에 진심으로 널 아껴주는 이가 있길 바랄 뿐이야. 그리고… 아이도 있길…바랐…”“황상도 사람인데, 가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황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단다…”소욱의 감정은 복잡하게 얽혀갔다.“할마마마, 더는 말씀 마십시오.”그는 손에 힘을 주며, 마치 이렇게 하면 염라대왕의 손아귀에서 그녀를 빼앗아 올 수 있을 것처럼 애써 보였다.“아니… 나는 꼭 말해야겠다. 나는 이후로 너와 말할 시간이 없을까 봐 두렵구나…“황상, 선이의 일은 나도 알고 있다.”“허나 너는 나를… 속이면 안 됐었어!”소욱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의 눈에는 서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태황태후는 이어 말했다.“나의 생도 이제 끝에 다다랐구나… 황상, 아니 소욱… 나의 착한 손자야.”“나에게 딱 한 가지 미련이 남아 있다. 나를 봐서라도 선이의 뜻을 이뤄주렴. 안 되겠니?”소욱은 천천히 눈을 들어 태황태후를 응시했다.“할마마마께서는 분명 오래도록 장수하실 것입니다.”그의 얼굴은 깊은 연못처럼 평온해 보였지만, 그 안은 아무도 헤아릴 수 없었다.그가 이 말을 한 지 얼
“시침이라 하였느냐? 내게 잘못 전한 게 아니고?”“태황태후께서 이렇게 위중하신데, 폐하께서 어찌…”유사양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귀인께서 잘못 들으신 것이 아니옵니다. 노비가 잘못 전한 것도 아니옵니다. 이제 돌아가 준비하시옵소서.”모용선은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각의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태황태후께서는 지금 어떠신가? 지금 뵙지 못하면, 돌아가서 마음이 놓이지 않을 듯하네. 한번만 폐하께 말씀 좀 전해줄 수는 없겠느냐.”그녀는 마치 시침 명령에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지만, 태황태후의 병환에 대해서만은 마음이 온통 쏠려 있는 듯했다.유사양은 차갑게 대답했다.“폐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귀인께서도 잠시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제가 더 말해봐야 무의미하옵니다.”모용선은 그제야 물러섰다.만수궁 밖, 궁녀 추홍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귀인, 폐하께서 잠시 후에 귀인을 총애하시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옵니까!”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지금 태황태후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귀인이 총애를 받는다면, 다시 빈으로 봉해지는 날도 멀지 않았을 터였다!“귀인마마, 그 유사양은 정말 개눈으로 사람을 보는 자이옵니다! 예전에 마마께서 정비셨을 때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첨하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건방지게 굴 수 있단 말입니까! 빈의 호봉을 다시 되찾으시면, 그들은 분명 후회할 것이옵니다.”하지만 모용선은 의외로 조용했다.추홍은 몰랐다. 그녀는 한 번도 진짜로 시침을 한 적이 없었다.오늘이 그녀의 첫 시침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그녀는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번 기회에 황실의 자손을 임신해야 했다.그렇지 않다면 태황태후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될 터였다…모용선은 빈의 신분으로 강등된 후에도 여전히 흥혜궁에 머물렀지만,주전이 아닌 서쪽
소탁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우선 봉구안을 데리고 한 주점으로 향했다.봉구안은 의아했다. 사람을 이렇게 경계하지 않다니?“이 정도면 충분히 먹을 수 있겠습니까?”소탁은 그녀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그녀가 왜 그 집에 들어가려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친구처럼 함께 식사를 나누려는 듯했다.심지어 그녀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봉구안은 그를 대충 훑어보았다.그는 평범한 옷차림에, 옷에는 군데군데 헝겊 조각이 덧대어져 있었다.그를 보고 누가 그가 과거 남제의 황태자였을 거라 상상할 수 있었을까?소탁과 소욱은 외모가 약간 닮았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소욱은 위엄 있고 강압적이며 폭력적인 기질이 강했다.반면 소탁은 온화하고 부드러워 사람들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인상이었다.이 점은 오히려 서왕과 더 비슷했다.봉구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공자님은 아까 그 집안 사람들과 아는 사이인가요?”소탁은 그녀에게 직접 술을 따라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부정하지 않았기에, 뭔가 숨기는 게 분명했다.그녀는 문득, 과거 연상이 궁에 팔려 갔던 때를 떠올렸다. 연상은 소탁의 시녀였다.소탁이 연상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봉구안은 즉시 연상의 초상화를 꺼내 보였다.“이 사람, 알고 계신가요?”그녀는 그의 정체를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소탁은 술잔을 다 따라 그녀 앞에 놓으며, 테이블 위의 초상화를 흘깃 보았다.그는 오히려 이렇게 물었다.“소 공자께서는 왜 이 여인을 찾으시는지요?”그는 그녀를 ‘소 공자’라고 불렀다.봉구안은 가면 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소탁은 손을 올려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대명소문한 소환 공자를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뵙자마자 알아보았습니다.”봉구안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지만, 그 순간 소탁이 초상화를 집어 들어 그녀 앞에서 찢어버렸다.“소문에 따르면 소 공자는 정의로운 분이라 들었습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이라면, 제가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봉구안은 담담하
소욱이 이미 전각 문까지 거의 다가갔을 무렵, 봉구안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군주로서 냉정심을 잃지 않아야 할 텐데, 지금 대체 뭘 하시는 것이옵니까?”소욱이 돌아섰다.그는 봉구안이 넘어뜨린 병풍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렇게 무거운 병풍을 그녀는 손쉽게 제압했다.소욱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냉정심을 잃은 것도 다 네 냉정함 때문이다.”그는 그녀의 그 차가운 태도에 질려 있었다.봉구안은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거짓말을 하면, 폐하께서는 기뻐하시겠사옵니까?”소욱은 다소 유치하게 받아쳤다.“그래, 솔직한 너의 심정을 듣는 것 보단 네 거짓말을 듣는 게 더 나을 듯 하구나!”“좋사옵니다. 그렇다면 저는 폐하께서 모용선을 총애하셨다면 정말 상처받고 괴로웠을 것이옵니다.”봉구안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였다.그녀는 처음부터 거짓말이 꼭 듣기 좋지는 않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궁극적으로는 그가 진정해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독을 쓴 범인을 하루빨리 잡고자 했다.소욱은 잠시 멍해졌고, 곧이어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비꼬았다.“그런 허접한 거짓말이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겠구나.”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은 결코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그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이 생각에 이르자, 소욱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은 나를 믿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어야지.”봉구안은 숨을 고르며, 마치 다루기 힘든 큰 아이를 달랜 듯한 표정을 지었다.단회욱과 함께 있을 때는 이렇게 애쓰지 않았었다.그는 감정을 늘 평정심으로 유지했으며, 대개 달래져야 할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그럼 이제 폐하,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소욱은 즉시 진지한 태도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네가 알아낸 것들을 모두 말해보거라.”봉구안은 자잘한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연상은 이미 고인이
오백이 동산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봉구안의 표정은 곧바로 냉엄해졌다. 소욱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일찍 말하지 않은 건, 네가…” “살아 있습니까?” 봉구안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직접 물었다. 소욱은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현재로서는 포로로 잡혀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하니 걱정 말거라. 이미 구출 작전을 진행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오백의 일은 절대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봉구안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 소욱에게 말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단대연을 찾는 것입니다.” 그날 황제는 단대연을 급히 소환했다. 그날 당일.단대연이 어전에 들어서자, 황후 또한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회임한 듯한 작은 배를 살짝 드러낸 모습이었다. 봉구안은 회임한 경험은 없었지만, 수많은 임산부를 보며 체득한 모양인지, 정확하게 임산부의 걸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항상 태아를 신경 쓰는 듯한 몸가짐이었다. 단대연은 공손히 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며칠 전까지 단대연은 거미줄로 불리는 은밀한 조직의 잔당을 찾아다니며, 동방세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십방산의 해독제를 받기 위해 도성에 와 있었고, 진전 상황을 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 급히 부를 줄은 몰랐다.봉구안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단대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날 위해 나서줄 수 있겠느냐.”그녀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단대연은 곧바로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해 주십시오.”그의 태도는 진지하면서도 친근해, 마치 오랜 벗처럼 보였다.봉구안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몇 달 전, 나는 동산국의 비밀 상로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상로는 약쟁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어, 사람을 보내 조사를 진행하였지. 허나 내가 동산국에 보낸 자가 동산국에 붙잡혔다는 소식
진한길이 떠난 뒤, 장순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침상 위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 빼면, 그녀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장순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어머니, 제가 교무당에 들어가게 됐습니다.”“이제부터 매달 조정에서 제게 녹봉을 줄 것이라 합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약을 살 돈이 생겼습니다!”그의 모친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지만,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장순이 과거시험에 목을 매고 관리가 되려 했던 이유도 어머니를 치료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그에게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올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황제가 갑작스레 시험 일정을 앞당겨버리고 말았다.그는 황제에게 크게 원망을 품었고, 그 분노를 풀기 위해 등불에 황제를 비방하는 시구를 써넣었다.등불들이 따로 팔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구가 연결된 것을 발견한 관아가 그를 붙잡았다.칠석날 관아에 잡혀간 그는 며칠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그 시간 동안 그는 깊이 후회했다.그가 붙잡힌 동안 아무도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출소한 후에도 다시 붙잡혀 더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황제는 그를 벌하기는커녕, 교무당 입학을 허락하고 모친을 치료할 어의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이제부터는 황제 폐하를 찬양하는 시를 더 많이 써야겠습니다!”장순이 침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모친은 미동조차 없었다.깨진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휘날리고, 어두운 입술 위로 햇살이 스며들었다.장순이 교무당에 들어간다는 소식은 곧 숙부님 집에도 전해졌다.칠석날 그를 꾸짖으며 거의 연을 끊으려 했던 숙부와 숙모는 황제의 은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소욱은 봉구안의 대답에 눈빛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그는 그녀의 손을 놓기 아쉬운 듯 꼭 붙잡으며 말했다.“내일 바로 이 일을 공표하도록 하마.”그러나 봉구안은 차분히 말했다.“그렇게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남제의 사경이 불안정하니 우선 적군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다. 그럼 이만 식사부터 하자구나. 이 일은 나중에 다시 논하자.”그는 그녀가 오랜 여정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봉구안은 배가 고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폐하께서 제 손을 붙잡고 계시니 제가 젓가락을 어떻게 쓰겠습니까?”소욱은 웃으며 답했다.“그럼 내가 친히 먹여주도록 하마.”“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봉구안은 그의 손가락을 재빨리 풀며 단호히 말했다.……궁으로 돌아가기 전, 봉구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성 외곽의 한 농가.뜰은 난장판이었다.개가 닭을 쫓아가고, 닭은 날아오르며 달걀은 땅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어른스럽게 뜰 구석에 앉아 대나무 바구니를 엮고 있었다.그의 발치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소년의 이름은 장구단, 학명으로는 장순이라 불렸다.그는 낯선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경계하며 바구니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 있던 막대를 집어 들었다.“누구를 찾으십니까!”진한길과 몇 명의 호위병들은 칼을 차고 서 있었고, 이 모습은 순박한 시골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소년의 얼굴은 때가 묻어 칙칙했지만, 검은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났다.그는 진한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 사람이 평범한 이가 아님을 알아챘다.진한길은 소년의 사정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예상보다 훨씬 처참했다.지붕은 기와가 빠져 비 오는 날이면 물이 새기 일쑤일 것 같았고, 기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다.문 옆에 붙은 대련은 소년이 직접 쓴 듯했지만, 형편없는 종이와 먹물로 인해
소욱은 곧바로 봉구안을 일으키려 하며 물었다.“황후, 어서 일어나거라.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그녀가 비응군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다.어느 쪽이든 이렇게까지 격식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봉구안은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폐하, 비응군을 북대영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소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그녀가 이 문제를 위해 이렇게까지 예를 갖추리라곤 생각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구안아, 너와 나 사이에 이런 격식은 필요 없지 않느냐.”“비응군의 일이라면 그냥 내게 따로 부탁했으면 됐을 것이다.”그 말에 봉구안은 품에서 병부를 꺼냈다.그것은 서여국으로 출사하기 전, 소욱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맡겼던 병부였다.봉구안은 그것을 항상 신중히 보관해왔고, 이제 남제로 돌아왔으니 마땅히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소욱은 병부를 받지 않았다.그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부부는 일심동체다. 나의 것은 너의 것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명확히 구분하려 하느냐? 병부는 네가 계속 가지고 있어라.”그러나 봉구안은 단호히 말했다.“여인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병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이 병부는 폐하께 돌려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조정 관료들이 알게 되면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소욱은 그녀의 고집에 결국 병부를 받아들였지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마음을 품은 채 조용히 있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이전처럼 부드럽지 않았다.소욱은 더 이상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구안의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구안, 내가 너를 황후로 맞아들인 건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대영을 자유롭게 이끌던 너에게 이 궁은 분명 답답한 곳이었을 것이다.”“너는 분명 억울했겠지.”“네가 소장군이었다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우고, 심지어 봉왕이나 봉
황성.오늘의 망강루는 유난히 북적거렸다.소욱은 황후가 서여국에 출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그녀의 가짜 회임에 대해 사람들이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썼다. 그 때문에 그는 궁 안에서 비응군을 위한 축하 연회를 열 수 없었다. 대신 궁 밖의 망강루를 빌려 연회를 준비했다. 1층에는 수십 개의 식탁이 놓였고, 비응군은 나눠 앉아 있었다.한편, 은위들은 따로 두 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그 누구도 은칠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그가 워낙 귀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남제로 오는 길 내내 그는 멈추지 않고 글을 써댔다. 그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욕은 욕대로 먹고, 매를 맞기까지 했다.은칠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황후의 출사 기록을 충실히 작성한 것은 자신인데, 얻어맞는 것도 자신이었다.이제야 깨달았다. 사관 노릇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이런 미움을 사는 역할도… 그는 여전히 감당해야 했다.2층, 별실.문 밖에서는 진한길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방 안에서는 황제와 황후가 단둘이 고요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강을 내려다보며 멀리까지 펼쳐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봉구안은 서여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서여국 황제에게는 몇십 년 전에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합니다. 제게 자신의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이게 유일한 단서인데, 부러진 옥비녀 반쪽입니다."소욱은 그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사람을 찾는 일이면 본국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서여국에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그는 그저 황후와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그러나 봉구안의 마음은 여전히 국사에 있었다.그녀는 오히려 남제의 상황을 물었다."제가 없는 동안 담대연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습니까?"소욱은 차분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첩보에 따르면, 겉으로는 남제를 도와 적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는 듯하지만…"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소욱
봉구안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온몸에 보랏빛 옷을 차려입고 눈에 띄게 화려한 소욱이었다.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어 질끈 눈을 감았다.저 사람이 정말 자기 서방이 맞단 말인가? 그 위엄 넘치는 한 나라의 황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봉구안은 못 본 척하고 조용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하지만 소욱은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흩날렸다.비응군은 눈치 있게 물러나 황후와 황제가 단둘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취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황후가 살짝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알아차렸다. “부인!”소욱은 흥분한 얼굴로 봉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공공장소에서 그는 그녀를 황후라 부를 수 없었다.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봉구안은 그의 옷에서 풍기는 강한 향을 느꼈다. 그 향은 다소 자극적이었다.봉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당장 제 몸에서 떨어지세요.”“구안아, 방금 뭐라고 했느냐?”그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봉구안은 억지로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차마 그에게 귀신에게 씌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녀는 왜 이렇게 요란한 옷을 입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토록 화려하게 차려입다니, 예전에 그가 자신에게 골라준 옷 색감은 아주 훌륭했다. 허나 정작 왜 본인은 이런 그릇된 선택을 하는 걸까.봉구안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했다.소욱은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가마에 올랐다.가마 안에서 그는 봉구안의 손을 꼭 붙잡고 입을 맞추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그러나 봉구안은 손을 뿌리치며 그의 얼굴을 의심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의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 사람이 진짜 소욱이 맞는지, 혹시 다른 누군가가 그의 얼굴로 변장한 것은 아
그 손님은 소년을 향해 노발대발하며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어린놈아! 돈을 냈으면 일을 해야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냐?”“내가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어가리라'라고 써달랬으면, 그대로 쓰면 될 걸 왜 이리 말이 많아!” 소년은 창백하고 여위었지만, 붓을 움켜쥔 손과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군가라고요. 전우들끼리 사용하는 것을 어찌 애첩에게 주는 시에 사용을 한단 말입니까!” “그 군가는 이리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손님은 이를 갈며 격분했다. “애첩? 지금 내 부인을 능멸하는 것이냐! 어린 게 버릇없이! 오냐, 좋다! 오늘 내 널 죽여버릴 것이다!” 소년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절 죽인다 해도 나으리께서는 간부음녀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간통한 남자와 음란한 여자라는 뜻이죠. 이미 아내가 있는 주제에 기생과 혼인하려고 하다니, 대장부로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차라리 환관이 되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면 자식도 못 낳을 테니 말입니다!” 그의 말은 사람에게 짐승을 비유하는 것처럼 모욕적이고 날카로웠다. “이 꼬맹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손님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손을 올렸지만, 갑자기 그의 귀를 누군가 잡아챘다. “누구야! 감히 내 귀를…”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그의 정실 부인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아내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내가 널 먹여 살리고, 궁 안에 들어가 시험 보라고 뒷바라지했더니… 감히 기방에서 여인을 만나러 다녀?” 그러고는 그녀는 소년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보게, 정말 고맙네. 자네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난 끝내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걸세. 이 사람이 이렇게 간악한 줄도 모르고 정말 당할 뻔했네.” 소년은 두 손을 모아 진지하게 인사했다. “별말씀을요. 악을 벌하고 선을 드러내는 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봉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취사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라면, 아마 그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녀는 남제의 황후가 되었고, 다시 군대를 이끌 기회는 없을 터였다. 취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모든 말을 털어놓았다. 죽을 각오로 한 이야기였다. "저희는 황후마마께서 조직하시고,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전장에서 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황궁 금군에 편입된 뒤로, 형제들은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마마께서 소장군이 아니시지만,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무당에서 직책을 맡으실 수 있을 정도인데, 어찌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황후마마, 불경한 말인 줄 알지만, 서여국 황제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와 혼인하신 뒤로 실권이 없으시니, 이제 남은 건 자녀를 돌보고 내조하는 일뿐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무예를 그냥 묵히시는 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봉구안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서여국 황제가 너를 찾아온 적이 있느냐?" 취사는 순간 얼어붙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찾아와 설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서여국에 남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마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마마께서 권력을 가지실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하셨습니다."봉구안은 손에 들고 있던 구운 생선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술주머니를 들어 몇 모금 마셨다. 몸은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공허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남제와 서여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황후가 군대를 이끌다니? 이 소식이 알려지면 조정의 신하들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다. 설령 소욱이 그녀를 아무리 용인한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녀 또한 소욱에게 부담이 갈만한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고인이 된 친부 이야기가 나오자, 서여국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어릴 적에, 아바마마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궁 안에는 아바마마의 용모파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나도 그분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꼭 용모파기가 필요하다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난처해졌다.용모파기가 없다는 건 외모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는 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서여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그때 나는 숙연과 겨우 두세 살이었다. 남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들이닥쳤고, 어마마마께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나와 숙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 숨기셨다.”“훗날 자매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옥비녀를 반으로 나누셨지.”“이것이 내가 가진 옥비녀의 반쪽이다.”황제는 흰 옥비녀의 반쪽을 꺼내 보였다. 비녀 머리와 일부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봉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진짜 여동생 분께서 나머지 비녀 조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서여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반쪽 옥비녀와 비단 상자를 봉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을 너에게 맡기마.”이는 서여국 황제가 봉구안을 깊이 신뢰한다는 표시였다.봉구안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받으며 차분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서여국 황제가 손목을 붙잡았다.봉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소장군, 정말로 서여국에 남을 마음이 없느냐?”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듯 물었다.봉구안이 서여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섭정왕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내어줄 의사가 있었다.멀리서 은칠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 했지만, 은이가 이를 눈치채고는 단숨에 붓을 빼앗아 부러뜨렸다.은이는 부러진 붓을 내던지며 말없이 은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