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소욱과 논의한 후, 이 일을 연상에게 고스란히 전했다.그리고 기억을 되찾을지 말지는 연상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연상은 이야기를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마마, 저... 제가 진 대인의 손녀라구요?!”게다가, 그녀의 가족들이 모두 반역죄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도 들었다.그 충격은 너무 커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봉구안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두려워하지 말거라. 폐하께서 너의 죄는 묻지 않기로 하셨다.”그러나 연상은 오히려 봉구안을 먼저 생각했다.“마마,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 구미사 문양을 제가 어릴 때 본 적이 있는 건 맞겠군요.”“그 기억만 되찾는다면 폐하를 독살하려 한 자를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봉구안은 명확히 말했다.“설령 네가 그 기억을 되찾아도 반드시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단다.”“오히려 괜히 고통만 감수하게 될 가능성도 크고…”“나는 억지로 널 강요할 생각이 없다. 그저 네가 원하느냐에 달렸단다.”연상은 오랜 고민 끝에 굳은 의지로 대답했다.“마마, 전 감수하겠습니다!”“다만,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당시 진 가문의 사건 기록을 볼 수 있을까요?”“저는 조부님과 가족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습니다.”봉구안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폐하께 여쭤본 뒤에 대답해 주도록 하마.”연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비록 가족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왠지 그들이 결백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한편, 자진궁에서 진한길은 무릎을 꿇고 연신 소욱에게 사죄하였다.“폐하, 오늘 신이 마땅히 마마를 모시고 보호했어야 했으나... 부주의로 놓치고 말았사옵니다.”소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황후는 경공이 뛰어났고, 진한길은 아직 황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다음 날.화신제는 예정대로 궁 밖에서 열렸다.백화가 만발하고 나비가 춤추고 있었다.황제와 황후가 함께 참석했고, 여러 대신들도 자리를 함께했다.이처럼 화려하게 화신제를 연 것은
무대 위, 첫 번째로 펼쳐진 장면은 맹 소장군이 양나라 군대와 싸우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은 하나같이 열띤 환호를 보내며 박수를 쳤다.곧이어 두 번째 장면이 시작되었다. 황제와 맹성주가 오랜만에 만난 후, 정자에서 바둑을 두고 차를 마시는 장면이었다. 저녁 해가 지고, 맹성주는 일어섰다.그가 소리쳤다.“폐하, 북박은 이미 안정되었사옵니다. 비록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지만, 제 손에는 너무 많은 피가 묻었사옵니다. 부디 제가 은퇴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하지만 만약 남제에 어려움이 생기면, 폐하께서 한 마디만 하시면, 저는 남제를 위해 죽기까지 힘을 다할 것이옵니다.”관객들은 이 대사를 듣고 깜짝 놀랐다.“맹 소장군이 은퇴한다고?”“이건 분명 허구가 섞인 연극일 거야!”무대 위에서, 황제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너의 은퇴를 허락하겠다. 하지만 북방은 너 없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나에게는 한 명의 제자가 있다. 변신술과 모방을 잘하지. 그 자라면 네 행동과 말을 정확하게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를 통해 북방을 안정시키거라!”그리고 세 번째 장면이 시작되었다.이 장면에서 또 다른 맹 소장군이 등장했는데,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붉은 옷이었다. 그가 가면을 벗자, 많은 사람들은 이미 무대에서의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저 붉은 옷을 입은 자는 맹교먹이 아닐까? 연극 속에서 말한 대로, 맹교먹은 진짜 맹 소장군이 아니었구나!”“소문이 사실이었어!”무대 위 멍교먹은 여장군으로 임명되지만, 그녀의 야망은 너무 커서 결국 스승인 맹성주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고, 용호군도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진짜 맹 소장군이 등장하여 맹교먹이 용호군을 해친 증거를 제시하며, 황제는 그녀를 처형하였다.연극이 끝난 후, 관객들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누군가가 외쳤다.“속이는 거야! 맹 소장군은 어리석은 황제에게 죽임을 당했어! 황제는 아직도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구나!”그 말에 사람들은 동
소욱도 지붕 위에 있는 그 맹 소장군이란 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장 공주 또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봉구안을 바라보았지만, 황제가 작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저 손은 또 어디를 두고 있는 거지!정말로 황제다운 품위가 하나도 없다니!그 시각, 소욱은 봉구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그의 궁금증을 한껏 자극하며 딱 한마디만 했다.“맞춰보십시오.”지붕 위, 맹 소장군으로 보이는 사람은 단지 등장만 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곧 지붕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비응군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 담겼고, 그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소욱은 속으로 비웃었다.“저들이 정말 네 장난에 놀아났군. 아직도 누가 진짜 소장군인지 모르는 모양이야.”봉구안은 자신의 허리에 있던 그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남을 비난하는 건 곧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옵니다.”사실 그는 꽤 오랫동안 진실을 모른 채 살아왔다.이번 연극은 사람들로 하여금 숨겨진 진실을 깨닫게 만들었다.봉구안은 그를 상기시켰다.“대사는 다 외우셨사옵니까? 이제 폐하 차례이십니다.”소욱은 낮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정말 모든 사람을 철저히 계획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다만, 그녀가 쓴 대사는 너무 관대했다.곧 소욱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포했다.“방금 연극에서 보여준 내용은 모두 실화이다.”“맹 소장군은 우리 남제의 중요한 신하로, 짐은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그러나 맹교먹은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용호군 300여 명을 죽게 했다. 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지금부터, 누구든 맹교먹을 무고하다고 여기는 자는 그 자와 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맹교먹이 죽고 난 후, 황제가 처음으로 해명한 것이었다.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동시에 이전의 오해에 대해 부끄러워했다.알고 보니 황제는 충신을 죽이는 폭군이 아니었다.알고 보니 맹교먹이야말로 사기꾼이었다!그런 사람이 어찌 영웅총에 묻힐 자격이 있단 말인가!“황
봉구안은 결국 소욱에 이끌려 강변으로 갔다.두 사람 모두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가면을 썼다.다행히 오늘 밤은 가면을 쓰고 나선 사람들이 많아 그들이 따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진한길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며 손에 여러 개의 꽃등을 들고 있었다.강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남녀 커플들도 눈에 띄었다.소욱은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제법 당당하게 꽃등을 던지듯 강물에 내던졌다.하지만, 그 꽃등들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못하고 모두 가라앉았다.소욱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찡그리며 진한길을 꾸짖었다.“도대체 뭘 산 것이냐.”하나도 물 위에 뜨질 않다니!진한길은 억울했지만 말할 용기는 없었다.소욱이 마지막 꽃등까지 던지려 하자, 봉구안이 그를 막았다.그녀는 마치 다른 종족의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폐하께서는 꽃등을 띄워본 적 없사옵니까?”“없다.”그러나 그는 꽃등 하나 띄우는 데 무슨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봉구안은 그를 돋보이게 만들며 꽤 인내심이 있는 듯했다.그녀는 몸을 숙여 꽃등 바닥을 열고, 조심스럽게 물 위에 띄웠다.그녀가 손을 떼자, 그 꽃등은 물 위에 안정적으로 떠올랐다.소욱은 이를 보자마자 물었다.“그 단씨 성 가진 자와 꽃등을 띄운 적이 있는 것이냐?”봉구안은 솔직히 답했다.“그렇사옵니다.”그녀는 그 꽃등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그 자는 참 분위기 파악을 잘 하는 사람이었구나.”하지만, 그가 아무리 좋아도 이제 이미 죽은 사람이지 않는가!진한길의 눈에는 이때 황제가 화를 내는 것보다 웃는 게 더 무섭게 보였다.그의 눈에는 마치 황제의 얼굴이 후궁의 질투심에 사로잡혀 험악해진 얼굴처럼 보였다.밤이 깊어 갈 무렵, 소욱은 봉구안의 손을 잡고 성 안 가장 높은 채성루로 데려갔다.평소 이 채성루는 문인들과 학자들이 모여 시를 짓고 바둑을 두는 장소였다.그러나 오늘 밤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말
남강의 변고는 봉구안의 예상밖의 일이었다.오래 전에 그녀는 완부옥과 상의를 거쳤고 남제가 양국 간의 모순을 해결하겠다고 확답을 주었기에 전쟁까지 갈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현재는 남강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완부옥이 설득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수도 있었다.봉구안이 정색하며 말했다.“폐하, 전쟁을 원하는 것은 북연이고 어쩜 남강은 그들의 이간질에 넘어갔을 수 있습니다. 속히 궁으로 복귀하시어 대신들을 불러 상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소욱은 하늘을 수놓은 공명등이 아쉬웠다.그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무려 삼천 개나 되는 공명등이었다.그리고 그는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남아 있었다.하지만 남부에서 전쟁 보고가 들려온 이상은 사적인 일은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궁으로 복귀한다!”그날, 서재의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서왕이 제안했다.“폐하, 북연 놈들이 너무 괘씸하지 않습니까. 남강을 이용하려 들다니요. 저는 남강 측과 잘 소통을 한다면 전쟁까진 치를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다른 무장들은 의견이 각자 달랐다.“폐하, 소국인 남강이 이토록 건방지게 나오니 이번 기회를 빌어 소탕해 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양나라처럼 남제의 부속국으로 거두어 버리지요!”“폐하, 소신도 의견에 동의합니다!”“폐하, 남강은 이방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입니다. 남제에 귀순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굴복할 리 없으니 협상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북연이 압박을 가하니 남강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어요. 폐하, 지금 고려해야 할 것은 이 전장을 누가 통솔하느냐입니다.”대신들은 각자 견해가 달랐다.자시쯤 되었을 때까지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자, 소욱은 그들을 모두 물리고 측문을 향해 말했다.“이제 나오거라.”곧이어 문 안쪽에서 봉구안이 숙연한 표정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소욱은 미간을 매만지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다 들었으니 의견을 말해보거라.”후궁은 정치에 간섭할 수
봉구안은 지도를 보며 술술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고 소욱은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듣고 있었다.상의가 끝난 후, 그가 말했다.“대신들이랑 그렇게 오랜 시간 상의한 게 무색하군. 다음번엔 차라리 바로 너의 의견을 묻고 결정하는 게 빠르겠어.”봉구안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대신들의 의견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저도 이렇게 빨리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을 겁니다.”소욱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정말 동행 안 할 생각이냐?”계약 기간은 고장 일년이고 이번에 남부에 다녀오려면 최소 두세 달 정도 소요될 것이다.봉구안은 살며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저는 남아서 황후의 본분을 다해야지요.”“아직도 모르는 척할 것이냐? 내 그런 계약을 제안한 이유는 본디 너와 매일을 함께하고 싶어서이거늘.”소욱은 조금씩 그녀를 압박했다.물론 그의 의도를 알기에 동행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봉구안은 겉으로는 공손히 그에게 말했다.“폐하, 현재로서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폐하를 독해하려던 자도 찾아야 하니까요.”“짐이 굳이 너와 동행을 하겠다면…”봉구안은 정색해서 그의 말을 잘랐다.“그럼 폐하는 우매한 군주라는 오명을 얻게 되겠지요. 이번에 폐하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게 된다면 민심을 달래고 백성들 사이에서 위엄을 높이는데도 큰 작용을 할 것입니다. 저와 동행한다면 오히려 득보다는 실이 많을 거고요.”소욱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대체 내가 얻을 게 뭐지? 손가락 하나 못 건들게 하면서!’영화궁.봉구안이 처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묘시가 넘은 시각이었다.곧 있으면 비빈들이 아침 문안을 올 터이니 기껏해야 한 시진 정도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연상은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시중을 들고 침상 옆을 지켰다.아침 조회.소욱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남강으로 간다는 말에 대신들은 저마다 반대했다.“군주의 자리는 비워둘 수 없습니다. 어찌
연상은 꿈속에서 아주 잔혹한 장면을 보았다. 귓가에 아우성소리가 귀를 찢을 것 같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앞에서 죽어갔다.연상은 두려움에 떨었다.갑자기, 그녀는 구명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언가를 꽉 잡았다.곧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따뜻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통스러운 꿈에서 깨어났다.연상은 마치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아이처럼 본능적으로 봉구안의 따뜻한 품으로 파고들었다.“피! 수많은 피가 뿌려져 있었어요…”봉구안은 자리에 서서 자신을 부둥켜안고 있는 연상의 야윈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이제 괜찮다.”연상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마치 그 환경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너무도 생생한 살육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옆에 있던 늙은 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한번에 기억을 되찾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자세를 숙이고 연상과 눈을 맞추었다.“연상아, 내 말을 듣거라. 만약 두렵다면 지금 돌아갈 것이다. 굳이 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니야.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연상은 멍하니 상전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옷깃을 꽉 잡고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이어지는 며칠간, 봉구안은 매일 연상을 데리고 궁밖으로 외출을 나갔다.연상은 하루하루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그렇게 드디어, 그녀는 모든 일들을 기억해냈다.잠에서 깬 그녀는 깊은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그녀의 가족들은 그 대란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진 남동생도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봉구안은 조용한 객잔을 세 맡고 연상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었다.연상은 한시도 기다리기 싫어 떨리는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사실을 전했다.“마마, 소인이 봤어요. 그 구미사 도안을 소인이 봤어요! 그 인간이 조부님을 죽였어요!”봉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말해보거라.”연상은 슬픔이 가득 담긴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그날 밤
봉구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진가의 사건 일지에서는 진 태부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죄책감을 느껴 독을 먹고 자결했다고 썼습니다.”“하지만 연상의 기억을 토대로 돌이켜 보면 진 태부는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소욱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확실하냐?”봉구안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씨 가문이 무고한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필히 누군가가 배후에 숨어서 사건을 조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소욱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그 말도 일리가 있군. 하지만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진범을 잡으려고 해도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봉구안은 솔직히 계획을 말했다.“조사는 관부에서 해야 할 일이고 저는 반지의 주인을 찾을 것입니다.”만약 모든 일을 그녀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면 관부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소욱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만약 가능하다면 진보산을 죽인 진범을 찾아서 진실을 밝히고 억울함이 있다면 풀어주고 죄가 있다면 다시 벌을 내릴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은 남부의 상황이었다.내전을 나오는 소욱의 앞에 연상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폐하 진씨 가문은 필히 억울함을 당했을 것입니다. 소인, 감히 청을 드리건대, 사람을 보내 사건을 재조사해 주십시오!”그녀는 소욱의 앞에 정중히 큰절을 올렸다.소욱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어린시절의 기억 하나로 어찌 사건의 재조사를 가동할 수 있단 말이냐? 황후의 시종인 걸 봐서 이번은 눈감아 주겠지만 앞으로 궁에서 생활할 땐, 항시 본분을 잊지 말고 말을 삼가거라.”연상은 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소욱이 떠난 후, 봉구안도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연상을 바라보며 말했다.“일어나거라.”연상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구슬피 울고 있었다.“마마, 소인이… 무능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