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장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찌하여 내가 황제에게 활을 가르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소욱의 얼굴에 있던 멍 자국은 이미 사라졌고, 그의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그는 이미 활을 잡고 봉구안을 향해 물었다.“짐의 자세가 맞느냐?”봉구안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멋스러운 자세를 보고는 정색하며 말했다.“음, 큰 차이는 없사옵니다.”그가 쏜 화살은 목표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진한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황제의 화살법은 정확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어찌 황후에게 화살을 배우고 있단 말인가?소욱은 또 다른 화살을 당기며 쐈다.쉭!이번 화살은 더욱 엉뚱하게 날아가버렸다.진한길은 속으로 황제가 너무 많은 조서를 살펴봐서 손목에 무리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번 연속으로 화살이 빗나갔지만, 소욱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그는 봉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려, 평소와 다르게 겸손한 눈빛을 보였다.“짐의 화살 실력이 어떤 것 같소?”봉구안은 그가 교먹에게 화살을 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의 화살법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가 자신에게 화살을 배우기 위해 일부로 자신의 실력을 속이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단호하게 말했다.“여기는 장난치는 곳이 아니옵니다. 진심으로 배우길 원하신다면, 좀 더 진지하게 임해주시옵소서.”그녀의 엄격한 스승 같은 태도는 소욱의 마음속 작은 생각들마저 어디에도 숨길 곳이 없게 만들었다.소욱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평소와는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좋다. 짐이 너의 말을 따르겠다. 진지하게 하자.”그는 한 번도 여인을 위해 이렇게 온갖 수단을 써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그녀만큼은 풍정을 모르는 데다, 강압에도 설득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세 번째 화살을 쏘자, 과녁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었다.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쏠 때마다 화살은 정확히 과녁에 꽂혔다.봉구안은 신하들에
봉구안은 단호하고 엄격하게 말했다.“사람에 따라 가르치는 법도 다르옵니다.궁술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부위가 넓어 명중 확률이 높은 가슴 부위를 겨냥하게 하옵니다.”“그러나 폐하처럼 궁술이 출중한 분께는 머리를 겨냥하도록 하옵니다. 그것이 더욱 정확하고 치명적이니 말입니다.”그녀는 덧붙였다.“머리라 해도 무작정 쏘아서는 아니 되옵니다. 얼핏 이마를 겨냥하는 듯하나, 실제로는 머리 뒤쪽, 두개골 하단, 즉 목덜미 뒤 연수를 노려야 하옵니다.”봉구안이 설명하는 동안, 소욱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넋을 잃고 말았다.자녕궁.장공주는 직접 수놓은 향낭을 황후에게 전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한 궁인이 장공주에게 다가와 말했다.“폐하께서 황후마마께 활쏘기를 가르치고 계신다 하옵니다.”황당무계한 소리였다.분명 궁인들이 잘못 전한 것일 터였다.맹 소장군의 궁술은 천하제일이 아니던가!황제가 감히 황후를 가르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장공주는 분을 참지 못하고 기세등등하게 어마장으로 향했다.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본 장면은, 황후가 황상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었다.장공주는 황제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어릴 적 그의 생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그를 불쌍히 여겨 늘 그를 각별히 챙겼다.그러나 지금의 그는 하는 짓마다 거슬리기만 했다.특히 황후 곁에 가까이 다가가 눈길을 떼지 못하는 모습은 더더욱 눈꼴이 시렸다.당당한 제국의 황제가 이렇게 궁색한 모습이라니!장공주는 마음속으로 늘 황제가 봉구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 웃는 얼굴로 짐짓 물었다.“폐하, 황후, 두 분은 무얼 하고 계십니까?”소욱은 장공주의 목소리를 듣자 미간을 찌푸렸다.“누님, 여기엔 왜 오셨습니까?”장공주는 그의 물음을 무시하고 봉구안의 옆으로 다가섰다.“활쏘기를 하고 계신가요? 황후마마, 저도 배우고 싶사옵니다.”“…”역시나 장공주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차라리 그녀
장공주가 실의에 빠져 물러간 뒤, 봉구안은 다시 소욱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소욱은 어딘가 집중하지 못한 모습이었다.“두통이 심각한 것이더냐?”봉구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허수아비를 정리하며 담담히 답했다.“오래된 병이옵니다. 익숙해져 있사옵니다.”소욱은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의구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예전에 귀비가 두통으로 고생할 때, 그때 너가 준 약… 혹시 그 약이 너가 쓰던 것이었느냐?”그때는 그녀도 두통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때였다.심지어 황 귀비를 위해 그녀에게 모든 약을 내놓으라 강요했던 일도 떠올랐다.봉구안은 귀찮다는 듯 더는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그렇사옵니다.”“폐하, 이제 활쏘기에 집중하시옵소서.”소욱은 활을 내려놓고, 그녀를 깊이 응시하며 말했다.“그때 내게 솔직히 말하지 그랬느냐.”“너도 그 약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을 터인데.”봉구안은 약간의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폐하, 오늘은 제가 폐하께 활쏘기를 가르치는 날이지, 지난날을 회상하는 날이 아니옵니다.”그녀는 마음에 두지 않는 이에게는 정을 주지 않았다.소욱은 마음이 어지러워지자 활쏘기에서도 집중력을 잃었다.휙!화살은 허수아비 머리를 스치며 빗나갔다.봉구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시선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려 마주 보지는 않았다.그는 곧바로 두 번째 화살을 쥐고, 허수아비의 머리를 겨냥했다.이번에는 화살이 예리하게 날아갔으나, 여전히 조금 빗나가 허수아비의 얼굴에 간신히 맞을 뿐이었다.소욱이 다시 활을 잡으려 하자, 그녀가 그의 팔을 가볍게 눌러 내리며 말했다.“자세를 바르게 하시옵소서.”“시선을 고정하시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고요히 하시는 것이옵니다.”그는 그녀의 말에 따라 자세를 바로 했으나 여전히 정확히 맞히지 못했다.봉구안은 한 발짝 다가서더니 그의 자세를 손수 바로잡아 주었다.소욱이 화살을 쏘려는 찰나, 그녀가 불쑥 끼어들며
다음 날, 태황태후는 황제를 불러 훈계를 시작하였다.“나는 너희 두 사람이 금슬 좋게 지내는 걸 못마땅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황후로서의 신분과 체통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황후는 자고로 단정하게 후궁을 다스려야 할 본분이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황후는 놀 궁리만 하는구나. 한낱 여자가 활쏘기를 배웠다지…”“그뿐 아니라 황상을 데리고 정사를 게을리하게 만들었다고 들었다.”“며칠 전에는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다지… 황후가 너를 얼마나 매혹시켰기에 이리 된 것이더냐!”“황상, 너는 탐욕에 빠질 사람이 아니지 않더냐. 그런데 요즘 들어 어찌 이리도 흐려졌느냐!”태황태후는 말을 한참 이어갔지만, 황제는 몸만 앉아 있을 뿐 정신은 딴곳에 가 있는 듯하였다.그 모습을 본 태황태후는 언성을 높였다.“황상!”소욱은 싸늘한 눈빛을 드리우며 말했다.“할마마마께서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그가 방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전혀 듣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태황태후는 숨이 막힐 듯 화가 났다.“나는 네게 황상으로서의 분수를 잊지 말라고 일러주는 것이다.”“또한, 너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잘 다스려야 마땅하다. 황후가 너를 이토록 휘둘리게 해선 안 되는 일이야.”소욱은 조용히 냉소를 띠었다.황후를 자신이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나.겨우 어제 그녀의 뺨에 입 맞춘 일 하나로 그녀는 끝내 냉랭한 태도를 보이며,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한마디 말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지금도 머릿속이 복잡했다.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풀고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그런데 태황태후가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니 앉아 있는 것조차 괴로웠다.“다른 하명이 없으시다면, 짐은 이만…”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태황태후가 서둘러 그의 말을 끊었다.“아직 할 말이 남았다!”“황상은 황후를 총애한 지 꽤 되었는데, 어찌 아직도 그녀에게 태기가 없는 것이냐?”“내 마음이 편치 않구나.”태황태후는 잠시 말을 멈추고,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그가 거부
소욱은 봉구안의 손을 힘껏 잡았다.그의 눈빛에는 전례 없는 진솔함과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황후, 나는 몹시 신경이 쓰이네.”“나는 그저 당신과 아이를 원할 뿐이야.”봉구안은 그의 손을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하게 말했다.“폐하의 이 말씀이 저를 몹시 불편하게 합니다.”소욱도 따라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는 충성스러운 자가 아니던가.”“만약 훗날의 황자, 남제의 미래 군주가 너의 뱃속에서 태어나고, 너가 직접 가르친다면, 그 아이는 틀림없이 명군이 될 것이다.”그는 유혹하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 달콤한 말에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봉구안은 지극히 냉철했다.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반년이 지나면 이 황궁을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소욱과 어떤 연도 맺고 싶지 않았다.그의 아이를 낳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그녀가 떠나려 하자, 소욱이 손을 잡아 막았다.“두려워하지 말거라. 나는 그저 가정해 본 것일 뿐이다.”봉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하며 말했다.“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십니다. 자신을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십시오.”“앞날에는 폐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실 여인을 만날 것이고, 그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옵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속이 답답해졌다.그녀는 정말 냉정했다.그에게는 한 치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만약 그녀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조금은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단지 그 성씨가 단 씨인 자를 좋아하고 있었다.소욱은 문득 세상을 다 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 자의 무덤을 파내고 그의 시신을 채찍질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하지만 곧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만약 자신이 정말 그렇게 한다면, 황후는 아마도 자신에게 채찍질을 할 것 같았다.말도 안 되는 생각처럼 들리지만, 그녀라면 분명 그럴 수 있었다.……흥혜궁정비는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다.맹 소장군이 죽은 이후,
소욱은 봉구안의 팔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마치 그녀가 달아날까 두려운 듯했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답을 요구했다.하지만 봉구안은 단호히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자신의 팔을 빼냈다.그녀는 한 걸음 물러섰고, 맑고 정직한 눈빛으로 말했다.“폐하, 부질없는 말씀은 그만두십시오.”“영비가 폐하의 마음속 여인 아니었사옵니까?”“폐하께서는 영비를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절개를 지키셨사옵니다.”“폐하께서 지금 저를 대하는 마음은 단지 정복욕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장수가 전장에서 적을 오래 공략하지 못할수록 전투 의지가 강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이것은 일시적인 충동일 뿐이옵니다. 설사 뜻을 이루신다 해도, 그것이 오래갈 묘약이 되진 않을 것이옵니다.”“폐하께서 영비에게 보인 그 장구한 정성은 실로 경탄할 만하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오랜 세월 지켜온 모든 것이 저로 인해 무가치해지지 않길 바라옵니다.”그녀의 말은 단호했으며, 만약 그가 더 이상 의미 없는 말을 이어간다면 더는 한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돌아서서 탁자 위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다른 곳으로 향하려 했다.그러나 그녀가 문을 막 넘어설 찰나, 황제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를 붙잡았다.“나와 영비는 죽마고우일 뿐이다. 나와 영비 사이에는 사사로운 남녀 간의 정이 없었느니라!”봉구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남녀 사이의 정이 없었다고?소욱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냉철하고 준엄한 얼굴에는 결단의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한 치의 거짓도 없다.”“그 당시 내가 갓 즉위했을 때, 모용가의 힘으로 조정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느니라.”“영비 또한 나를 돕겠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영비를 후궁으로 들였다.”“나와 영비는 어려서부터 서로를 알았으나, 깊은 우정일 뿐 남녀 간의 사사로운 정은 없었다.”소욱은 정직한 눈빛으로 봉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와 그녀 사이에는 여전히 많은
“폐하!”봉구안이 소욱의 잘못된 말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났다.그 자리에 선 그녀는 온몸이 싸늘해졌다.그녀가 완부옥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녀의 끈질긴 집착 때문이었다.아무리 차갑게 거절해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런데 이제 황제까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그러나 봉구안은 확신했다.권력과 풍요 속에서 자란 황제가 얼마나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겠는가.아마 주방 도구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다시 화신제 준비를 하기 위해 처소로 돌아갔다.이 축제야말로 중요한 일이었다.이를 통해 맹교먹의 죽음으로 불거진 불리한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한 시진 후.소욱이 돌아왔다.그 뒤로 몇 명의 시위가 각자 접시를 들고 따라왔고, 그 접시들은 정갈하게 식탁 위에 놓였다.다섯 가지 반찬과 한 가지 국, 고기와 채소가 균형 잡혔고, 색과 향, 모양이 모두 흠잡을 데 없었다.봉구안은 어리둥절했다.이 모든 걸 정말 소욱이 했다는 말인가?소욱은 옷에 묻은 연기 냄새를 풍기며 호위들에게 물러가라 명했다.봉구안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그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내가 농사나 밭일을 모를 것 같으냐?”“이 모두가 내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니, 한번 맛보아라.”봉구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젓가락을 들었다.먼저 초록빛 채소를 집어 한 입 먹었다.맛이... 괜찮았다.궁중의 대령숙수가 만든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군영에서 먹던 소박한 음식이 떠오르는 맛이었다.그녀는 국을 한 모금 들이켰다.생선은 부드럽고, 국물은 신선하며 깊은 맛이 났다.고개를 들어 소욱을 바라보았다.그는 여유로웠다.“내가 어릴 적 궁을 떠나 무술을 익혔으니, 그리 여린 황자는 아니지.”“하늘을 나는 새도, 물속의 물고기도 손쉽게 요리할 수 있다.”“믿기 어렵거든,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을 보여주마.”이 모습은 봉구안의 눈에 더 이상 폭군도 아니었고, 오히려 평범한… 요리사 같았다.“믿습니다.”그녀는 그의 소매 끝에 묻은 기름 자국과, 튀긴 기
궁문 밖.진한길이 입을 열었다.“궁문 밖에 많은 백성과 병사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등문고를 두드리며, 맹 소장군을 위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아뢰며, 더불어 폐하께 황후마마의 폐위를 요구하고 있사옵니다.”진한길은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으나, 소욱의 눈빛은 살기를 띠어 마치 한겨울 서릿발처럼 차가웠다.“어찌된 일이냐. 궁 내외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자들은 이미 잡아 들여 조사 중이지 않더냐.”진한길이 대답했다.“그리 하였사오나, 최근 며칠 사이 누군가 또 다시 움직이고 있는 듯하옵니다.”소욱은 목소리를 낮춰 명령을 내렸다.“막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낫다. 흘려보낸다면 그 근원을 찾아야 하느니라. 궁문 밖에 모인 자들은 이용당한 무지한 자들일 뿐. 그들이 더 떠들게 두어라. 떠들수록 허점이 드러날 것이니.”“폐하께서 옳으시옵니다. 곧바로 조처하겠사옵니다!”소욱은 복도 끝에 서서 먼 곳을 응시했다.남제 조정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암수들이 숨어 있었다.맹성주가 군사를 사사로이 움직였다는 모함부터, 군 배치도가 도난당한 일까지, 지금 드러난 자들은 단지 바보 같은 졸개들일 뿐이었다.이번 맹교먹의 사건을 통해, 그 근원을 반드시 샅샅이 밝혀낼 작정이었다.잠시후 소욱은 내전 안으로 들어왔다.그 안에 있던 사람은 아직도 단잠에 빠져 있었다.늘 세상사에 밝은 소욱조차,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느꼈다.조정.대신들은 아침에 벌어진 궁문 밖의 사건에 대해 분주히 논의하고 있었다.“폐하, 등문고가 울렸으니, 이제는 이 일을 더는 덮을 수 없을 듯하옵니다.”“폐하, 백성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소욱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그대들은 민심에 순응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민심을 두려워하는 것이냐?”“폐하, 소신들은 그저…”소욱이 다시 묻는다.“지금 이 일이 마치 내 손으로 맹교먹을 죽였다는 것처럼 번지고 있다. 만약 저들이 폐위를 요구한다면, 그대들 또한 민심이라 여기고 따르겠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