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봉구안이 소욱의 잘못된 말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났다.그 자리에 선 그녀는 온몸이 싸늘해졌다.그녀가 완부옥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녀의 끈질긴 집착 때문이었다.아무리 차갑게 거절해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런데 이제 황제까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그러나 봉구안은 확신했다.권력과 풍요 속에서 자란 황제가 얼마나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겠는가.아마 주방 도구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다시 화신제 준비를 하기 위해 처소로 돌아갔다.이 축제야말로 중요한 일이었다.이를 통해 맹교먹의 죽음으로 불거진 불리한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한 시진 후.소욱이 돌아왔다.그 뒤로 몇 명의 시위가 각자 접시를 들고 따라왔고, 그 접시들은 정갈하게 식탁 위에 놓였다.다섯 가지 반찬과 한 가지 국, 고기와 채소가 균형 잡혔고, 색과 향, 모양이 모두 흠잡을 데 없었다.봉구안은 어리둥절했다.이 모든 걸 정말 소욱이 했다는 말인가?소욱은 옷에 묻은 연기 냄새를 풍기며 호위들에게 물러가라 명했다.봉구안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그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내가 농사나 밭일을 모를 것 같으냐?”“이 모두가 내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니, 한번 맛보아라.”봉구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젓가락을 들었다.먼저 초록빛 채소를 집어 한 입 먹었다.맛이... 괜찮았다.궁중의 대령숙수가 만든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군영에서 먹던 소박한 음식이 떠오르는 맛이었다.그녀는 국을 한 모금 들이켰다.생선은 부드럽고, 국물은 신선하며 깊은 맛이 났다.고개를 들어 소욱을 바라보았다.그는 여유로웠다.“내가 어릴 적 궁을 떠나 무술을 익혔으니, 그리 여린 황자는 아니지.”“하늘을 나는 새도, 물속의 물고기도 손쉽게 요리할 수 있다.”“믿기 어렵거든,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을 보여주마.”이 모습은 봉구안의 눈에 더 이상 폭군도 아니었고, 오히려 평범한… 요리사 같았다.“믿습니다.”그녀는 그의 소매 끝에 묻은 기름 자국과, 튀긴 기
궁문 밖.진한길이 입을 열었다.“궁문 밖에 많은 백성과 병사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등문고를 두드리며, 맹 소장군을 위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아뢰며, 더불어 폐하께 황후마마의 폐위를 요구하고 있사옵니다.”진한길은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으나, 소욱의 눈빛은 살기를 띠어 마치 한겨울 서릿발처럼 차가웠다.“어찌된 일이냐. 궁 내외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자들은 이미 잡아 들여 조사 중이지 않더냐.”진한길이 대답했다.“그리 하였사오나, 최근 며칠 사이 누군가 또 다시 움직이고 있는 듯하옵니다.”소욱은 목소리를 낮춰 명령을 내렸다.“막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낫다. 흘려보낸다면 그 근원을 찾아야 하느니라. 궁문 밖에 모인 자들은 이용당한 무지한 자들일 뿐. 그들이 더 떠들게 두어라. 떠들수록 허점이 드러날 것이니.”“폐하께서 옳으시옵니다. 곧바로 조처하겠사옵니다!”소욱은 복도 끝에 서서 먼 곳을 응시했다.남제 조정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암수들이 숨어 있었다.맹성주가 군사를 사사로이 움직였다는 모함부터, 군 배치도가 도난당한 일까지, 지금 드러난 자들은 단지 바보 같은 졸개들일 뿐이었다.이번 맹교먹의 사건을 통해, 그 근원을 반드시 샅샅이 밝혀낼 작정이었다.잠시후 소욱은 내전 안으로 들어왔다.그 안에 있던 사람은 아직도 단잠에 빠져 있었다.늘 세상사에 밝은 소욱조차,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느꼈다.조정.대신들은 아침에 벌어진 궁문 밖의 사건에 대해 분주히 논의하고 있었다.“폐하, 등문고가 울렸으니, 이제는 이 일을 더는 덮을 수 없을 듯하옵니다.”“폐하, 백성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소욱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그대들은 민심에 순응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민심을 두려워하는 것이냐?”“폐하, 소신들은 그저…”소욱이 다시 묻는다.“지금 이 일이 마치 내 손으로 맹교먹을 죽였다는 것처럼 번지고 있다. 만약 저들이 폐위를 요구한다면, 그대들 또한 민심이라 여기고 따르겠
황궁.봉구안은 오백이 보낸 소식을 받았다.황성 내의 비단 가게들을 이미 모두 조사했고, 지난 6년 동안 꽃무늬 비단 구매 명부를 얻었다는 내용이었다.그 명부는 이미 한차례 선별을 한 상태로, 독을 넣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이들은 표기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황성 사람들이었고 신원이 확실했다.하지만 남은 이들은 주로 행적이 일정하지 않은 떠돌이 상인들로,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봉구안은 궁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기에, 내일 궁을 나가 볼 계획을 세웠다.바로 그때, 최 상궁이 꽃 한 무더기를 들고 들어왔다.“마마, 이 꽃들은 화신제에 필요한 것들이옵니다. 살펴보십시오.”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준비하거라.”최상궁은 감격하며 고개를 숙였다.“예, 마마! 온 힘을 다해 이 화신제를 잘 준비하겠사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빈과 강빈도 찾아왔다.“황후마마, 요 며칠 간 궁 밖에서 마마를 헐뜯는 험담이 넘쳐납니다. 심지어 조정에서도 황제께 황후 폐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맹 소장군이 국운을 지킨 훌륭한 장군이었다고는 하지만… 소장군의 죽음 때문에 마마께 누명을 씌우다니 말도 안 됩니다!” 가빈은 분개하며 말했다.강빈은 비교적 차분하게 추측했다.“마마, 이런 험담은 최근 며칠 사이 갑자기 퍼진 것이니, 분명 누군가 뒤에서 일을 꾸미고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걱정스러운 건, 황제께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마마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봉구안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조정의 일은 궁 안에서 함부로 입에 담지 말거라.”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예, 황후마마. 죄송합니다… 마마가 걱정되어서 그만…”“저희가 꽃을 엮는 일을 도와드릴까요?”현흥궁.녕비와 현비는 꽃을 감상하며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언니, 이 꽃들을 이렇게 잘 키워 놓고 정말 영화궁으로 보내 황후마마가 화신제에서
봉명헌이 쾅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폐하, 소인을 부디 용서하소서!”소욱의 얼굴은 철처럼 굳어 있었다.이 바보 같은 놈이 감히 자신에게 이런 난잡한 물건을 가져오다니!황제의 곁에서 시중들던 유사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폐하를 이토록 화나게 만든 것일까?봉명헌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끝났다!이번에도 일을 망친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의 남자라면 이런 물건을 마다하지 않을 텐데……봉명헌은 어릴 적부터 임이랑의 밑에서 자라며 교활하게 처세하는 법을 배웠다.또 폐하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외로 좋아한다는 점도 눈치챘다.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형님, 소인을 용서해주세요. 제가 잘못했사옵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사옵니다……”소욱은 그가 연신 ‘형님’이라고 부르자 조금씩 화가 누그러졌다.더군다나, 이번 일은 부적절한 물건을 바쳤을 뿐, 용서받지 못할 큰 죄도 아니었다.“짐이 황후 대신 너를 잘 가르쳐야 마땅하나, 이번이 처음이니 그냥 넘어가겠다.”“이 물건은 압수하도록 하마. 어서 물러가거라!”봉명헌은 황급히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형님!”소욱은 그가 답답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꺼져라!”이 멍청한 놈, 정말 봉가 사람답지 않다.황후의 친 남동생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발로 차버렸을 것이다.봉명헌이 떠난 후, 소욱은 유사양에게 명령했다.“이 물건을 밖으로 가져가 불태워라.”“예, 폐하.”유사양이 조심스럽게 물건을 들고 나가려는 순간, 소욱이 다시 불렀다.“잠깐.”소욱은 마음을 바꾸었다.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봉명헌이 천금을 준다 해도 팔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황제로서 음양 교합의 도리를 배우는 것은 필수 과정이었다.소욱은 15, 16세 때 이미 이런 책을 접하며 자신이 이 도리를 통달했다고 자부해왔다.그러나 이번 물건을 펼쳐 보자,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내용에 사로잡혔다.
봉구안의 얼굴이 굳어졌고, 등은 곧게 편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한 손이 소욱에게 붙잡혔다.그가 무슨 의도를 가진 건지 알아챈 그녀는 곧바로 그의 손을 떼어냈다.소욱은 갑자기 그녀의 턱을 잡아들며 키스하려는 자세를 취했다.봉구안은 바로 뒤로 물러났지만, 그는 간신히 멈춰서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에는 장난기와 조소가 섞여 있었다.“내가 보기엔 너, 낯짝이 두꺼워서 무서울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왜 당황하는 거지? 소장군... 넌 경험도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걸어 올리며 목선이 드러나도록 살짝 고개를 들게 했다.그리고 불쑥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봉구안의 등에는 순간적으로 전율이 흘렀다.“놓아주세요….”소욱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는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너무 답답해서 그래. 나 좀 쉬게 해다오.”마치 극도로 피곤한 사람이 잠시 쉬어갈 안식처를 찾은 듯, 온몸의 긴장을 풀고 있었다.또한 방금 전까지 맹렬히 날뛰던 야수가 이 순간 주인의 무릎 위에 얌전히 웅크리는 것처럼…조금은 차분해졌고, 심지어 조금은 순종적인 모습이었다.잠시 후,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허스키하게 말했다.“나도 어쩔 수 없어. 다 너희 동생 때문이야. 네 동생이 올린 이 해당집이 문제라고.”“황후… 나 정말 너무 힘들어. 어쩌면 좋소?”그가 말을 하며 또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무언가를 하려 하자, 봉구안은 남은 손으로 그의 손을 쳐내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말도 안 되는 짓은 그만하시옵소서. 저를 안고 있으면 더 힘들어질 것이옵니다.”제기랄, 봉명헌!소욱은 팔에 힘을 더 주어 그녀를 더 꼭 껴안았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래도 안고 있어야겠어… 힘들어도, 안고 있어야겠어.”“황후, 정말 그대를 좋아하오.”“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지금도 절제하며 그대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난 그냥, 그대가 알았으면 좋겠어. 내가 그대를
흥혜궁.정비는 평소의 온화하고 단정한 모습과 달리,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꽃봉오리를 쥐어 부숴버렸다.“알아냈느냐.”추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주인의 분노를 느낀 그녀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백성들이 등문고를 울리며 황후 폐위를 청했지만, 폐하께서는…”그녀는 몰래 정비의 얼굴을 흘끗 보고,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폐하께서는 여론을 무릅쓰시고 민심에 따르지 않으셨사옵니다.”정비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그녀의 웃음은 지극히 온화했다.“폐하께서는 정말 황후를 감싸시는구나.”“마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정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금오가 이미 지고, 날이 저물고 있었다.“폐하가 황후를 지키고 싶으셔도, 수많은 백성과 장병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구나.”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맹 소장군의 죽음은 아직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적어도 북방 지역과 북대영에는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터였다.거기 있는 병사들은 전부 맹교먹의 부하였다.그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면, 북방은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했다.그 소식이 만약 북방에 닿기라도 한다면… 폐하께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못할 것이다.…영화궁.밤 자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봉구안은 궁으로 돌아왔다.그녀는 온몸에 밤행복을 걸치고 내전으로 들어섰는데, 침상에 앉아 있는 소욱을 발견했다.그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돌아올 줄 알았느냐?”입으로는 엄하게 꾸짖었지만, 그의 눈빛은 은연중에 그녀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봉구안은 그에게 가볍게 예를 표했다.“확인할 일이 많아 시간이 늦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아직 쉬지 않으셨사옵니까?”소욱은 화가 치밀어 올라 말했다.“황후가 이렇게 늦게까지 안 돌아오는데, 내가 어찌 잠들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공손하게 대답했다.“겸사겸사 최근 소문을 조사했는데, 모용가와 관련이 있는 듯 하옵니다.”소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모용가가?”그는 눈을 들어
오후.내시가 황제의 명을 받고 흥혜궁으로 가서 교지를 전했다.추홍은 정비와 함께 교지를 들을 준비를 하며 좋은 일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그러나 곧 두 사람의 얼굴은 경악과 당혹감으로 물들었다.“...그러므로 정비의 봉호를 박탈하고, 육궁을 협조하는 권한을 거두며, 귀인으로 강등한다. 즉시 주전에서 이거하도록 하라!”“그럴 리가 없사옵니다!”추홍은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폐하께서 마마를 이렇게 대하실 리가 없습니다!”마마께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는데 어찌 폐위당하실 수 있단 말인가!정비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품위를 유지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교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황제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절을 올렸다.그러나 교지를 전한 내시가 떠나자 그녀는 갑자기 옆의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손은 성지를 꽉 쥔 채로 떨렸다.추홍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마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폐하께서는 분명 마마를 각별히 아끼셨는데... 어떻게 마마의 빈위를 폐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주인과 하인의 운명은 하나로 연결된 법. 추홍은 정비보다 더 조급하고 불안했다.정비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그녀의 눈에는 쓰라림과 함께 희미한 쓸쓸함이 비쳤다.빈에서 귀인으로 강등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하지만... 적어도 이유는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추홍은 평소의 마마와 다른 모습에 당황하며 금세 눈물이 맺혔다.“마마, 제가 지금 만수궁으로 가서 태황태후께 알려드리겠사옵니다!”“태황태후께서는 마마를 그토록 아끼시니, 폐하께서 마마를 폐위시키는 것을 절대 좌시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만수궁.태황태후는 자리에 앉아 얼굴에 분노와 실망을 띠고 있었다.소욱은 그녀의 왼편에 앉아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주변의 궁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태황태후는 소욱을 향해 분노하며 말했다.“나는 동의할 수 없다! 네가 꼭 정비를 폐하려 한다면, 차라리 나도
“마마…”연상이 돌아왔다.그녀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했다.봉구안의 지시대로 도망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누를 끼칠까 두려웠다.하지만 봉구안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함께 고난을 겪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마마, 폐하께서…”연상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하려 했지만, 봉구안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미 알고 있다.”소욱이 그녀의 신분을 숨긴 일로 연상을 탓하지 않을 것이기에, 연상이 궁에 머무르는 것도 무방했다.하지만 연상은 여전히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꼈다.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조금만 더 빨리 도망쳤더라면…”“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하며, 문밖에 서 있는 호위병을 바라보았다.그는 소욱의 사람이었고, 연상은 그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다.최 상궁은 연상이 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다.저 아이가 돌아오면 자신이 봉구안의 신임을 잃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최 상궁은 더욱 서둘러 봉구안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마마, 이틀 후가 화신제를 여는 날이옵니다. 제가 준비한 것들을 한 번 보시겠사옵니까?”연상이 호기심에 물었다.“화신제요? 마마, 그게 무엇인가요?”봉구안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사월 초, 민간에서는 꽃의 신을 기리는 풍습이 있다.”“이번 폐하께서 백성과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크게 준비하셨지…”연상은 신기하다고 느꼈지만, 화신제보다 더 궁금한 것은 봉구안이 과연 궁에 머물기로 결심한 것인지였다.…소욱은 모용선을 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용 가문에도 벌을 내렸다.그녀의 부친 모용회는 관직이 강등되어 변명할 기회조차 없이 황성을 떠나야 했다.만수궁.모용선은 태황태후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글썽였다.태황태후는 그녀를 때릴 수도 없고, 애가 타며 나무랐다.“애당초 너는 총명한 아이라고 여겼는데…”“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너 스스로를 망치고, 가문까지 연루시켰다!”“선아, 정말이지 실망스럽구나!”“네 사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