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주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황후가 과거 자신을 구했던 그 맹 소장군이라니!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일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맹교먹의 말만 믿고 황후에게 시비를 걸고 황후가 가짜라는 것까지 끄집어내려 했다니!맹교먹 같은 사칭범에게 속아서 하마터면 진짜 구명 은인을 죽일 뻔했던 것이다.장공주는 깊은 후회가 몰려와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봉구안은 손목에 끼워진 팔찌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스치는 생각이 있어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장공주는 착잡한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황후…”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은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졌다.“소장군의 팔목 굵기는 내가 직접 쟀습니다. 지금도 아니라고 할 것입니까?”장공주는 절박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며 말했다.봉구안도 미간을 찌푸렸다.“장공주…”장공주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제가 참 바보였습니다. 맹교먹 같은 간신배의 말을 믿고 황후께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요. 저를 탓하시고 못 믿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러서 더 이상 황후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네요!”장공주는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봉구안은 애써 침착하며 장공주를 불렀다.“장공주…”장공주가 재차 그녀의 말을 잘랐다.“당신은 분명한 맹 소장군입니다. 그런데 여태 부인하고 계시는 이유가 군주를 기만한 죄 때문입니까? 하긴, 폐하는 고집스러운 분이라 진짜 신분을 알게 되면 필히 용서하지 않을 테지요.”“걱정하지 마세요.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평소의 교만하고 고고했던 장공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팔찌를 빼서 상대에게 돌려주었다.장공주는 팔찌의 갈라졌던 부분을 매만지며 추억에 잠겨 말했다.“그러고 보니 참 이상합니다. 멀쩡하던 팔찌가 황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파열되었어요. 흠집이 있어서 창고에 두고 맹교먹에게 선물하지
장공주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맹교먹이 순조롭게 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비영령 덕분이었다.사실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황제가 이렇게 빨리 알아낼 줄은 뜻밖이었다.게다가 자신에게 심문 어조로 캐묻고 있는 황제의 태도도 처음이었다.곧이어 소욱은 화제를 돌려 정중하게 그녀에게 경고했다.“누님, 이 일로 누님의 죄를 캐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영화궁에는 적게 걸음하셨으면 합니다.”장공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녀는 소욱을 빤히 쳐다보며 당당히 말했다.“폐하, 즉위한지 7년 정도 되었지요? 아직도 자식을 보지 못한 게 이상합니다. 할마마마께 들었는데 황후가 회임을 하기 전에는 다른 후궁을 품지 않겠다고 하셨다면서요?”“누이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폐하께선 능연이에게 총애를 주셨고 정비도 품었지요. 하지만 회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가 후궁에 있는 것 같지 않은 것은 이 누이의 착각일까요?”소욱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장공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잔소리하듯 말했다.“누이인 나니까 폐하께 이런 간언도 드릴 수 있는 거지요. 지금은 황후를 괴롭힐 것이 아니라 옥체부터 잘 보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다가는 회임을 하더라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토양이 좋아도 종자가 제 구실을 해야 말이지요.”황제의 등 뒤에 선 유사양은 그 말을 듣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아무리 황제의 누이라고 할지언정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소욱의 주변으로 차가운 기운이 퍼져나갔다.다른 사람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면 진작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짐이 명하노니, 내일부터 장공주를 위해 부마 후보를 알선하도록 하거라.”장공주의 안색이 급변했다.“폐하! 어찌…”소욱이 냉소를 지었다.“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란 여인이라면 계속 친정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물며 누이는 장공주의 신분이지 않습니까.”말을 마치 그는 장공주를 지나쳐 영화궁으로 들어갔다.
소욱은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서 빛을 보았다.그녀가 이런 눈을 하고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한다면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물론 그건 그 혼자만의 생각이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잠깐의 침묵 후에 그는 평소의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짐이 즉위한지 2년째가 되었을 때, 4개국이 연합해서 남제를 침략했지. 짐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갔다. 전장이 끝난 후 귀국하는 길에 안개숲을 지난 적 있다.”“그 숲에는 자객 무리가 매복하고 있었지. 자객과 교전 중에 한 자객이 벌레처럼 생긴 무언가를 꺼내들었고 그것이 짐의 팔을 깨물며 중독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게 천수독이었다고 하더군.”천수독이란 매일 토용이라는 벌레에게 특제 독약을 먹여 길러졌으며, 일정 기간이 지나 그 벌레가 극독물인 천수가 된다는 사실을 봉구안은 알고 있었다.천수 한 마리를 육성하는데 최소 10년이 소요됐다.육성한 토용이 모두 독극물을 흡수하고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그랬기에 천수독은 극히 보기 드문 독약이었다.그녀는 계속해서 소욱의 말을 들었다.“벌레에 물린 후로 그것을 두 동강을 내버렸지. 그리고 그 주인의 몸에서 옷자락을 찢어냈다.”봉구안이 물었다.“폐하께서 말씀하신 단서가 그 옷자락에서 찢어진 옷감인가요?”소욱은 고개를 끄덕였다.“흔히 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더군. 그것을 통해 천수독의 주인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봉구안은 살기어린 눈을 하고 그에게 물었다.“그 옷감, 아직 있습니까?”“그래.”그 말을 들은 봉구안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욱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이 일을 조사하고 싶은 것이냐?”봉구안은 즉시 그를 향해 예를 행했다.“허락하여 주십시오.”소욱은 티 나게 불쾌감을 드러냈다.“이 일을 조사하려면 궁을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후궁 업무는…”봉구안은 확신에 찬 얼굴로 답했다.“뒤처지지 않게 잘 처리하겠습니다.”소욱은 진심으로 후궁 업무를
봉구안이 진실을 공개하자고 한 이유는 백성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함이었다.그런데 소욱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그럴 필요까진 없다.”그녀는 더욱 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어차피 명성에 해가 되는 일인데 왜 굳이 진실을 감추려는 것일까?소욱이 정색해서 말했다.“맹교먹이 사칭범이란 사실을 공개하면 맹씨 가문은 그 죄를 면할 수 없다. 북대영의 천만장수들도 마찬가지다.”그들이 진실을 몰랐다고 하여도 공범으로 몰릴 것은 뻔했다.간사한 인간이 나서서 이 일을 이용해 크게 만든다면 북대영은 또다시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이 비밀을 지켜져야만 소욱은 북대영과 맹씨 가문을 비호할 수 있었다.만약 진실이 공개된다면 그는 절차대로 처벌할 사람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봉구안은 그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솔직히 그녀 역시도 사부를 걱정하고 있었다.그런데 소욱이 천하 백성의 오해를 사면서까지 그들을 지키고자 했을 줄은 정말 몰랐다.물론 소욱이 꺼리는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맹성주는 북대영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지. 그의 죽음이 얼마나 큰 혼란을 불러올지도 직접 보고 싶구나. 황실에 반심을 품은 자들을 이 참에 속출해 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살기등등하던 그의 눈빛은 봉구안에게 닿자마자 평소처럼 변했다.“어찌됐건 이 일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너는 짐과 동침해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평온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답했다.“예.”한 시진 후, 자진궁.목욕을 마치고 나온 소욱은 봉구안을 찾다가 침전의 누각에서 그녀를 발견했다.그녀는 이미 이불을 펴고 잠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소욱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서 잔다고?”봉구안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소욱이 또 물었다.“이곳은 하인들이 잠자는 곳인 건 알고는 있겠지?”“상관없습니다.”어차피 강호를 유람할 때 풀숲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다.그녀가 보기에 야간에 황제의 안전을 수호하려면 시위들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었
흥혜궁정비는 공허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추홍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마마 시간이 늦었습니다.”정비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그래, 늦었구나.”아직도 황후가 시침을 하고 있을까?처음에는 황후도 그녀처럼 황제가 관료들을 응대하기 위한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가짜였다면 황후를 자진궁으로 불렀을 리 없었다.그곳은 과거의 영비마저도 밤중에 잘 걸음하지 않는 곳이었다.그만큼 황제가 황후를 총애한다는 증거였다.‘그럼 난 뭐지?’황제의 시선을 한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하지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다음 날, 조회.뭇 대신들은 아직도 맹교먹의 죽음을 놓고 아웅다웅하고 있었다.“폐하, 맹 소장군은 백성들이 선망하는 영웅입니다. 그녀의 죽음으로 민간에서 폐하의 성망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이 일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폐하, 용호군의 가족들마저도 맹 소장군은 죽으면 안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폐하, 맹교먹이 중죄를 저질러서 죽여야 했다면 공개적인 심판을 진행했어야 합니다. 폐하께서 사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민심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소욱은 싸늘한 얼굴을 하고 용상에 앉아 있었다.어젯밤 일은 이미 대비를 해두었기에 몇몇을 제외하고 관원들은 맹교먹이 탈옥을 시도한 것과 비영군이 탈옥에 방조한 일을 모르고 있었고 맹교먹이 소장군을 사칭한 일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그들이 보기에 맹교먹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공신이었다.황제가 공신을 죽였으니 폭군이라고 불려 마땅하고 쓴소리를 듣는 것도 당연했다.평소에는 항상 소욱과 뜻을 함께하던 서왕마저도 오늘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서왕은 맹 소장군에게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그래서 맹교먹의 죽음에 대해 황제의 행보를 지지할 수 없었다.그녀가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세운 공로라면 충분히 죽을 죄를 면할 수 있었다.그녀는 영웅의 무덤에 묻혀야 마땅하지 아무도 찾지 않는 난장강에 버려지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한 나이 든
“소신도 그냥 소문만 들었을 뿐입니다. 맹 소장군은 군의관 한명과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둘이 혹시 동성애자가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잠시 숨을 고른 서왕은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소신은 헛소문이라고 봅니다. 그냥 깊은 우정이겠지요.”하지만 소욱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그 군의관이 이름이 무엇이고 지금은 어디 있느냐?”“소신의 기억에 단씨였던 거로 기억합니다.”익숙한 성씨에 소욱은 천우비침을 떠올렸다.그 군의관이 단씨 일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컸다.황제의 생각을 모르는 서왕은 이곳에 온 이유를 꺼냈다.“폐하, 맹교먹이 진짜 맹 소장군이 아닌 사칭범이라면 왜 그 일을 만천하에 알리시지 않은 겁니까?”소욱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짐에게 다 생각이 있다.”그는 머릿속으로 그 군의관을 생각하고 있었다.서재 밖.진한길은 밖으로 나온 서왕에게 공손히 예를 취했다.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서왕처럼 뭇 여인들의 흠모를 한몸에 받는 사내마저도 사랑의 고민을 앓고 있다니.서왕이 평소에 궁인들에게 잘해준 것을 봐서 진한길은 그를 위로해 주기로 했다.“전하, 꽃도 각자 피는 계절이 있기 마련입니다.”서왕은 어리둥절했다.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자녕궁.장공주는 평소의 오만함을 내려놓고 친히 향낭을 수놓고 있었다.녕비가 물었다.“언니, 폐하께 드리려고 만드시는 건가요?”향낭에는 하늘을 힘차게 나는 매가 수놓아져 있으니 필이 사내에게 선물하려고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장공주 신변에 사내가 없으니 녕비는 상대가 황제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 질문을 들은 장공주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아무리 친동생이라지만 남녀 사이에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향낭 같은 것을 함부로 선물하겠니?”녕비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렇죠? 제가 실언을 하였네요. 그럼 이건…”“황후께 드리려는 거다.”그 말을 들은 녕비와 옆에 있던 궁녀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여인에게 주는 향낭
대전 안에서 아찔한 비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멍청한 것! 누가 아프단 거야? 누가 정신착란이래? 나 멀쩡하거든?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장공주의 과격한 반응에 못이겨 태후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묶도록 했다.잠시 후, 장공주는 온몸이 묶인 채로 침상에 누워 불편한 자세로 몸부림치고 있었다.“엄마마마, 살려주세요!”태후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소기야, 이게 널 돕는 일이야.”장공주는 어이가 없었다.향낭을 수놓다가 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황후… 황후를 찾아가거라!”장공주가 시종에게 명령했다.태후 옆에 서 있는 녕비도 조마조마했다.‘대체 황후를 왜 찾는 거지? 언니가 드디어 미친 건가?’영화궁봉구안은 고대 서적을 펼치며 구미사 도안에 대한 단서를 찾고 있었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최 상궁이 숨을 헐떡이며 아뢰었다.“마마! 큰일 났습니다! 자녕궁 쪽에… 장공주께서… 소란을 피우고 있답니다!”봉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지?”“맹 소장군의 죽음에 너무 상심한 장공주께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고 태후께서 태의를 불러 진료를 보게 하였는데 공주께서 저항이 심하셔서 밧줄로 묶었다고 합니다.”자초지종을 들은 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장공주는 교먹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기에 상심하여 착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태후는 장공주의 생모이니 정도껏 할 것이고 황후가 나설 이유가 없었다.자녕궁.장공주는 드디어 발악을 멈추었다.그리고 체념한 얼굴로 태의의 진료를 받고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태후는 속이 타들어갔다.“소기야, 맹교먹이 죽어서 상심한 건 알겠어. 하지만 너에겐 어미도 있잖니.”녕비도 옆에서 거들었다.“그래요, 언니. 화가 난 걸 털어만 내면 괜찮을 거예요. 저희가 언니를 해칠 리 없잖아요.”장공주는 어이없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잠시 후, 태의가 일어나서 아뢰었다.“태후마마, 소신이 자세히 진료를 본 결과 공주께서는 간열이 일반인보다 높으시지만 다른 이상은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하지만 그
그날 밤, 자녕궁.소욱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황후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에게 물었다.“뭐가 그리 재미 있어서 하루종일 보고 있는 것이냐?”봉구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나화 비단의 구매 명책을 확보하라 지시하였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구미사 도안에 대한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책을 빼앗고는 담담히 말했다.“그냥 흔히 보이는 도안일 수도 있다.”“그럴지도 모르지요.”봉구안이 책을 향해 손을 뻗는데 갑자기 소욱이 물었다.“북대영에 단씨 성을 가진 군의관이 있다고 하더군. 천우비침은 그자에게서 배운 것이냐?”봉구안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소욱은 계속해서 말했다.“짐은 진실만을 원한다. 그자이냐?”봉구안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답했다.“예.”소욱은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단씨 일족의 천우비침은 절대 가족이 아닌 외부인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일반 친구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소욱이 떠보듯이 물었다.“단씨 일족은 반역죄를 저지르고 구족을 멸하는 처벌이 내려진 걸 알고 있느냐? 그 사람이 단씨의 여당이라면 죄인이란 말이다.”봉구안은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답했다.“알고 있습니다.”“알면서도 관부에 넘기지 않은 것이냐? 네가 만약 죄인을 숨겨주는 거라면…”“죽었습니다.”봉구안은 아주 평온하게 그에게 말했다.너무 예상밖의 답이라 소욱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봉구안은 전혀 상심하지 않은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천수독에 당해서 죽었지요.”소욱이 흠칫하며 물었다.“네가 말한 친구라는 사람이 그자란 말이냐?”봉구안은 솟구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답했다.“예.”곧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말했다.“이미 죽은 사람이고 그 사람의 죄를 따지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소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짐은…”그러려고 시작한 얘기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들어
오백이 동산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봉구안의 표정은 곧바로 냉엄해졌다. 소욱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일찍 말하지 않은 건, 네가…” “살아 있습니까?” 봉구안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직접 물었다. 소욱은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현재로서는 포로로 잡혀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하니 걱정 말거라. 이미 구출 작전을 진행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오백의 일은 절대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봉구안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 소욱에게 말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단대연을 찾는 것입니다.” 그날 황제는 단대연을 급히 소환했다. 그날 당일.단대연이 어전에 들어서자, 황후 또한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회임한 듯한 작은 배를 살짝 드러낸 모습이었다. 봉구안은 회임한 경험은 없었지만, 수많은 임산부를 보며 체득한 모양인지, 정확하게 임산부의 걸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항상 태아를 신경 쓰는 듯한 몸가짐이었다. 단대연은 공손히 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며칠 전까지 단대연은 거미줄로 불리는 은밀한 조직의 잔당을 찾아다니며, 동방세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십방산의 해독제를 받기 위해 도성에 와 있었고, 진전 상황을 보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 급히 부를 줄은 몰랐다.봉구안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단대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날 위해 나서줄 수 있겠느냐.”그녀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단대연은 곧바로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해 주십시오.”그의 태도는 진지하면서도 친근해, 마치 오랜 벗처럼 보였다.봉구안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몇 달 전, 나는 동산국의 비밀 상로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상로는 약쟁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어, 사람을 보내 조사를 진행하였지. 허나 내가 동산국에 보낸 자가 동산국에 붙잡혔다는 소식
진한길이 떠난 뒤, 장순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침상 위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 빼면, 그녀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장순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어머니, 제가 교무당에 들어가게 됐습니다.”“이제부터 매달 조정에서 제게 녹봉을 줄 것이라 합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약을 살 돈이 생겼습니다!”그의 모친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지만,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장순이 과거시험에 목을 매고 관리가 되려 했던 이유도 어머니를 치료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그에게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올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황제가 갑작스레 시험 일정을 앞당겨버리고 말았다.그는 황제에게 크게 원망을 품었고, 그 분노를 풀기 위해 등불에 황제를 비방하는 시구를 써넣었다.등불들이 따로 팔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구가 연결된 것을 발견한 관아가 그를 붙잡았다.칠석날 관아에 잡혀간 그는 며칠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그 시간 동안 그는 깊이 후회했다.그가 붙잡힌 동안 아무도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출소한 후에도 다시 붙잡혀 더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황제는 그를 벌하기는커녕, 교무당 입학을 허락하고 모친을 치료할 어의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이제부터는 황제 폐하를 찬양하는 시를 더 많이 써야겠습니다!”장순이 침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모친은 미동조차 없었다.깨진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휘날리고, 어두운 입술 위로 햇살이 스며들었다.장순이 교무당에 들어간다는 소식은 곧 숙부님 집에도 전해졌다.칠석날 그를 꾸짖으며 거의 연을 끊으려 했던 숙부와 숙모는 황제의 은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소욱은 봉구안의 대답에 눈빛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그는 그녀의 손을 놓기 아쉬운 듯 꼭 붙잡으며 말했다.“내일 바로 이 일을 공표하도록 하마.”그러나 봉구안은 차분히 말했다.“그렇게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남제의 사경이 불안정하니 우선 적군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다. 그럼 이만 식사부터 하자구나. 이 일은 나중에 다시 논하자.”그는 그녀가 오랜 여정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봉구안은 배가 고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폐하께서 제 손을 붙잡고 계시니 제가 젓가락을 어떻게 쓰겠습니까?”소욱은 웃으며 답했다.“그럼 내가 친히 먹여주도록 하마.”“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봉구안은 그의 손가락을 재빨리 풀며 단호히 말했다.……궁으로 돌아가기 전, 봉구안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성 외곽의 한 농가.뜰은 난장판이었다.개가 닭을 쫓아가고, 닭은 날아오르며 달걀은 땅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어른스럽게 뜰 구석에 앉아 대나무 바구니를 엮고 있었다.그의 발치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소년의 이름은 장구단, 학명으로는 장순이라 불렸다.그는 낯선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경계하며 바구니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 있던 막대를 집어 들었다.“누구를 찾으십니까!”진한길과 몇 명의 호위병들은 칼을 차고 서 있었고, 이 모습은 순박한 시골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소년의 얼굴은 때가 묻어 칙칙했지만, 검은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났다.그는 진한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 사람이 평범한 이가 아님을 알아챘다.진한길은 소년의 사정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예상보다 훨씬 처참했다.지붕은 기와가 빠져 비 오는 날이면 물이 새기 일쑤일 것 같았고, 기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다.문 옆에 붙은 대련은 소년이 직접 쓴 듯했지만, 형편없는 종이와 먹물로 인해
소욱은 곧바로 봉구안을 일으키려 하며 물었다.“황후, 어서 일어나거라.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그녀가 비응군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다.어느 쪽이든 이렇게까지 격식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봉구안은 일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폐하, 비응군을 북대영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소욱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그녀가 이 문제를 위해 이렇게까지 예를 갖추리라곤 생각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구안아, 너와 나 사이에 이런 격식은 필요 없지 않느냐.”“비응군의 일이라면 그냥 내게 따로 부탁했으면 됐을 것이다.”그 말에 봉구안은 품에서 병부를 꺼냈다.그것은 서여국으로 출사하기 전, 소욱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맡겼던 병부였다.봉구안은 그것을 항상 신중히 보관해왔고, 이제 남제로 돌아왔으니 마땅히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소욱은 병부를 받지 않았다.그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부부는 일심동체다. 나의 것은 너의 것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명확히 구분하려 하느냐? 병부는 네가 계속 가지고 있어라.”그러나 봉구안은 단호히 말했다.“여인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병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이 병부는 폐하께 돌려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조정 관료들이 알게 되면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소욱은 그녀의 고집에 결국 병부를 받아들였지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마음을 품은 채 조용히 있었다.방 안의 분위기는 이전처럼 부드럽지 않았다.소욱은 더 이상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구안의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구안, 내가 너를 황후로 맞아들인 건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대영을 자유롭게 이끌던 너에게 이 궁은 분명 답답한 곳이었을 것이다.”“너는 분명 억울했겠지.”“네가 소장군이었다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우고, 심지어 봉왕이나 봉
황성.오늘의 망강루는 유난히 북적거렸다.소욱은 황후가 서여국에 출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그녀의 가짜 회임에 대해 사람들이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썼다. 그 때문에 그는 궁 안에서 비응군을 위한 축하 연회를 열 수 없었다. 대신 궁 밖의 망강루를 빌려 연회를 준비했다. 1층에는 수십 개의 식탁이 놓였고, 비응군은 나눠 앉아 있었다.한편, 은위들은 따로 두 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그 누구도 은칠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그가 워낙 귀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남제로 오는 길 내내 그는 멈추지 않고 글을 써댔다. 그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욕은 욕대로 먹고, 매를 맞기까지 했다.은칠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황후의 출사 기록을 충실히 작성한 것은 자신인데, 얻어맞는 것도 자신이었다.이제야 깨달았다. 사관 노릇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이런 미움을 사는 역할도… 그는 여전히 감당해야 했다.2층, 별실.문 밖에서는 진한길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방 안에서는 황제와 황후가 단둘이 고요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강을 내려다보며 멀리까지 펼쳐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봉구안은 서여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서여국 황제에게는 몇십 년 전에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합니다. 제게 자신의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이게 유일한 단서인데, 부러진 옥비녀 반쪽입니다."소욱은 그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사람을 찾는 일이면 본국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서여국에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그는 그저 황후와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그러나 봉구안의 마음은 여전히 국사에 있었다.그녀는 오히려 남제의 상황을 물었다."제가 없는 동안 담대연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습니까?"소욱은 차분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첩보에 따르면, 겉으로는 남제를 도와 적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는 듯하지만…"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소욱
봉구안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온몸에 보랏빛 옷을 차려입고 눈에 띄게 화려한 소욱이었다.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어 질끈 눈을 감았다.저 사람이 정말 자기 서방이 맞단 말인가? 그 위엄 넘치는 한 나라의 황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봉구안은 못 본 척하고 조용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하지만 소욱은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흩날렸다.비응군은 눈치 있게 물러나 황후와 황제가 단둘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취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황후가 살짝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알아차렸다. “부인!”소욱은 흥분한 얼굴로 봉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공공장소에서 그는 그녀를 황후라 부를 수 없었다.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봉구안은 그의 옷에서 풍기는 강한 향을 느꼈다. 그 향은 다소 자극적이었다.봉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당장 제 몸에서 떨어지세요.”“구안아, 방금 뭐라고 했느냐?”그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봉구안은 억지로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차마 그에게 귀신에게 씌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녀는 왜 이렇게 요란한 옷을 입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토록 화려하게 차려입다니, 예전에 그가 자신에게 골라준 옷 색감은 아주 훌륭했다. 허나 정작 왜 본인은 이런 그릇된 선택을 하는 걸까.봉구안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했다.소욱은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가마에 올랐다.가마 안에서 그는 봉구안의 손을 꼭 붙잡고 입을 맞추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그러나 봉구안은 손을 뿌리치며 그의 얼굴을 의심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의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 사람이 진짜 소욱이 맞는지, 혹시 다른 누군가가 그의 얼굴로 변장한 것은 아
그 손님은 소년을 향해 노발대발하며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어린놈아! 돈을 냈으면 일을 해야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냐?”“내가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어가리라'라고 써달랬으면, 그대로 쓰면 될 걸 왜 이리 말이 많아!” 소년은 창백하고 여위었지만, 붓을 움켜쥔 손과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군가라고요. 전우들끼리 사용하는 것을 어찌 애첩에게 주는 시에 사용을 한단 말입니까!” “그 군가는 이리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손님은 이를 갈며 격분했다. “애첩? 지금 내 부인을 능멸하는 것이냐! 어린 게 버릇없이! 오냐, 좋다! 오늘 내 널 죽여버릴 것이다!” 소년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절 죽인다 해도 나으리께서는 간부음녀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간통한 남자와 음란한 여자라는 뜻이죠. 이미 아내가 있는 주제에 기생과 혼인하려고 하다니, 대장부로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차라리 환관이 되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면 자식도 못 낳을 테니 말입니다!” 그의 말은 사람에게 짐승을 비유하는 것처럼 모욕적이고 날카로웠다. “이 꼬맹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손님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손을 올렸지만, 갑자기 그의 귀를 누군가 잡아챘다. “누구야! 감히 내 귀를…”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그의 정실 부인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아내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내가 널 먹여 살리고, 궁 안에 들어가 시험 보라고 뒷바라지했더니… 감히 기방에서 여인을 만나러 다녀?” 그러고는 그녀는 소년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보게, 정말 고맙네. 자네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난 끝내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걸세. 이 사람이 이렇게 간악한 줄도 모르고 정말 당할 뻔했네.” 소년은 두 손을 모아 진지하게 인사했다. “별말씀을요. 악을 벌하고 선을 드러내는 건 누구나 해야 할 일입니다.”
봉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취사가 이런 말을 꺼낼 정도라면, 아마 그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녀는 남제의 황후가 되었고, 다시 군대를 이끌 기회는 없을 터였다. 취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모든 말을 털어놓았다. 죽을 각오로 한 이야기였다. "저희는 황후마마께서 조직하시고,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전장에서 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황궁 금군에 편입된 뒤로, 형제들은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마마께서 소장군이 아니시지만,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무당에서 직책을 맡으실 수 있을 정도인데, 어찌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황후마마, 불경한 말인 줄 알지만, 서여국 황제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와 혼인하신 뒤로 실권이 없으시니, 이제 남은 건 자녀를 돌보고 내조하는 일뿐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무예를 그냥 묵히시는 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봉구안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서여국 황제가 너를 찾아온 적이 있느냐?" 취사는 순간 얼어붙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찾아와 설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서여국에 남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마의 뛰어난 무예 실력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마마께서 권력을 가지실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하셨습니다."봉구안은 손에 들고 있던 구운 생선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술주머니를 들어 몇 모금 마셨다. 몸은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공허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남제와 서여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황후가 군대를 이끌다니? 이 소식이 알려지면 조정의 신하들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다. 설령 소욱이 그녀를 아무리 용인한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녀 또한 소욱에게 부담이 갈만한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고인이 된 친부 이야기가 나오자, 서여국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어릴 적에, 아바마마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궁 안에는 아바마마의 용모파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나도 그분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꼭 용모파기가 필요하다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봉구안은 난처해졌다.용모파기가 없다는 건 외모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는 건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서여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그때 나는 숙연과 겨우 두세 살이었다. 남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들이닥쳤고, 어마마마께서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나와 숙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 숨기셨다.”“훗날 자매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옥비녀를 반으로 나누셨지.”“이것이 내가 가진 옥비녀의 반쪽이다.”황제는 흰 옥비녀의 반쪽을 꺼내 보였다. 비녀 머리와 일부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봉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렇다면 진짜 여동생 분께서 나머지 비녀 조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서여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반쪽 옥비녀와 비단 상자를 봉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을 너에게 맡기마.”이는 서여국 황제가 봉구안을 깊이 신뢰한다는 표시였다.봉구안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받으며 차분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서여국 황제가 손목을 붙잡았다.봉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소장군, 정말로 서여국에 남을 마음이 없느냐?”그녀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듯 물었다.봉구안이 서여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섭정왕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내어줄 의사가 있었다.멀리서 은칠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려 했지만, 은이가 이를 눈치채고는 단숨에 붓을 빼앗아 부러뜨렸다.은이는 부러진 붓을 내던지며 말없이 은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