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먹은 먼저 걱정 어린 마음으로 물었다. “기양아, 며칠 못 봤는데, 그동안 잘 지냈느냐?” 장기양은 그녀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날 그녀가 했던 상처 주는 말들이 떠올라 더 이상 예전의 존경심을 품고 그녀를 대할 수 없었다. 그는 예의를 지키며 대답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그는 사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께서 굶주림과 병고로 인해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그녀는 바로 이어서 물었다. “너는 어떻게 소환을 알게 되었느냐?” 장기양은 대충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저 우연히 만났사옵니다.” 아무래도 그는 사저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사저 역시 그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를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곧이어 교먹은 상심한 표정을 지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기양아, 내가 그날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너를 전쟁터에 보내 목숨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단다.”“너의 아버지와 나는 오랜 친구였지. 장군의 일은…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단다.”“너는 장군의 유일한 혈육이니, 나는 네가 무사하고 평안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겠느냐?” 장기양은 그녀에게 여전히 남다른 감정이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동경하던 영웅은 바로 명 소장군이었다. 지금도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을 알았기에, 설령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소장군님, 그래도 저는 군에 들어가고 싶사옵니다. 이제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더는 저를 말리지 마시옵소서.” 교먹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에게 먼저 말하도록 하여라.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으니라. 나는 네 아버지와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사이이니, 네 안전을 반드시 지켜주마.” 장기양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그는 입을 떼어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상자 안에는 다름 아닌 현영석이 있었다. 봉구안은 의아했다. 소욱이 왜 자신에게 이 물건을 보낸 것일까? 유사양은 현영석과 상자를 내려놓으며, 황제가 이 돌을 냉궁으로 보내라고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황제가 내려주는 물건은 모두 은혜로운 하사품이라 할 수 있지만… 돌 하나를 냉궁에 있는 황후에게 보내다니, 그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엔, 그는 황후마마가 말 타는 것을 좋아하니, 황제가 말의 형태를 띤 이 돌을 선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황제는 그때 무겁게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황후의 성격은 이 돌과 같아, 고집 세고 완강하지.” 황제의 이 말을, 유사양은 황후에게 전하지 않았다. 감히 한 자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후마마, 황제께서는 마마를 늘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봉구안은 그 속 뜻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현영석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그것은 그녀의 제자 장기양이 자신의 스승에게 보낸 진심의 선물이었다. ……감찰위.교먹은 방에 틀어박혀 우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날 장기양을 내쫓은 것을 후회하고, 현영석 광산을 손에 넣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제 그 모든 공적은 다른 사람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이 감찰위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틀 후. 장기양은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 이미 스승과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고 전했다. 어전에서 이 전갈을 들은 서왕이 그 말을 듣고 근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폐하, 저 소환이라는 사람이 궁에 들어와 어전을 뵙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폐하께서 궁 밖으로 나가 만나야 한다 하니, 혹여 매복이 있을까 염려되옵니다.” 소욱의 깊은 눈동자는 담담하게 비쳤다. “그는 의로운 협객이니, 군왕을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 감히 말씀드리건대, 그래도 조심하심이 좋겠사옵니다.” “알겠다.” 소욱은 가
봉구안은 훗날 진실이 밝혀질 때 황제가 스승을 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면권을 구하고자 했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면권을 얻기 위해서는 큰 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지금 당장 주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언젠가 폐하께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시면, 평안 전당포로 저를 찾아주시면 되옵니다.” 말을 마친 후, 그녀는 탁자 위에 은화 한 덩이를 올려놓고, 걸상 옆에 둔 긴 칼을 들고 유유히 떠나갔다. 밖에 서 있던 진한길은 그녀와 마주쳤다. 그는 이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영귀살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 뒤에 황제가 나왔다.진한길은 한 걸음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소욱 황제는 앞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게 된 양가의 자녀들을 사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예!” 진한길이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현영석 광산의 일은 협의가 마무리되자, 관청에서는 본격적으로 광산 개발을 시작했다. 장기양은 정식으로 군영에 입성하기 전, 매일 밤 봉구안은 궁을 나와 그의 무예를 지도하고 병법을 가르쳤다.그는 상당한 재능이 있어, 금방 깨우쳤다. 그러던 중, 어느 평범한 맑은 날, 강빈의 부친이 궁에 들렀다. 오랜만에 만난 부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팔이…” 강빈은 아버지의 비어있는 소매를 보고 슬픔이 치밀었다. 그러나 강 대인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 팔 하나를 내어주고 얻은 승리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강빈은 등을 돌려 눈물을 감췄다.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녀는 진지하게 물었다. “아버지, 북방이 어느정도 평정되었다고 하옵니다. 이제 황성으로 돌아오실 수 없겠사옵니까? 더는 불안에 떨고 싶지 않사옵니다…” 강 대인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으나, 곧 신중하게 대답했다. “북방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나,
“이 냉궁이 이리도 떠들썩할 수 있는 곳이었다니.” 소욱은 황후와 강빈이 한데 껴안고 있는 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강빈은 그 시선에 놀라 울던 것도 잊은 채 얼어붙었다.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어쩔 줄 몰라하며 절을 올렸다. “신, 신첩… 신첩,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봉구안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절을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소욱은 곧장 의자에 앉아 시선을 강빈에게 고정했다. “어찌하여, 냉궁에 와서 황후를 돕고 싶은 거냐?” 강빈의 두 눈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소욱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강빈은 두려움에 떨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첩은… 신첩은 황후마마께서 하루 빨리 냉궁에서 나올 수 있도록 원하나이다!” 소욱은 냉소를 지으며 봉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가 그렇게 간청을 해도, 황후는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 강빈은 무심코 대꾸했다. “그… 그럴 리 없사옵니다!” 어찌 냉궁에 남기를 원하는 자가 있겠는가. 봉구안은 묵묵히 서서 부정하지 않았다. 소욱은 다시 강빈을 향해 말했다. “물러가라! 짐의 허락 없이는 다시는 냉궁에 들지 말라!” 강빈은 서둘러 떠났지만, 마음속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밖에 나와서야, 황제가 냉궁에 왜 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냉궁 안. 연상은 차를 올렸다. 소욱이 한 모금 마셨으나, 차의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는 ‘쾅’ 하고 차를 내려놓았다. 연상은 숨을 죽이며 서 있었다. 역시나 폭군이 나타나면 좋을 리 없었다… 이어 소욱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남제가 새로운 현영석 광산을 발견하였으니 이는 큰 경사다.”“승려의 말에 따르면, 네가 이 황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운명이라 하더군.” “할마마마께서도 이제 더는 이
사람이란 모이면 헤어지고,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법. 봉구안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가르쳐 주시는 것임을 알게 된 장기양은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언젠가는 군영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봉구안은 그에게 이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특히 병법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별의 순간, 봉구안은 그에게 긴 창을 선물로 주었다. 이 선물을 받은 장기양의 두 눈이 반짝였다. “스승님, 어찌 제가 긴 창을 좋아하는 줄 아셨사옵니까!” 그는 즉시 한 번 써보았고,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긴 창이 공기를 가르며 땅에 닿자, 힘이 넘치고 용맹해 보였다. 그것은 마치 그의 몸의 일부가 된 듯했다. 그는 한 번도 이렇게 손에 딱 맞는 무기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장기양의 눈동자가 점점 붉어지며 흥분이 감돌았다. 그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제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옵니다!” 그는 반드시 이 창을 들고 공을 세워, 스승님의 명성을 빛낼 것을 다짐했다. 봉구안은 그 창을 들고 설명했다. “이 긴 창은 우근목으로 만들었으며, 단단하고 유연함을 지녔다. 창끝은 쇠를 뚫고 지나갈 정도지…” 장기양은 우근목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창을 제작할 때 가장 좋은 재료로 여겨지며, 값비싼 나무였다. 모든 우근목이 창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반듯하고 옹이 하나 없는 것을 선별해 쓰는 것이며, 그런 나무는 백 중 하나 꼴로 찾아볼 수 있었다. 맹 소장군이 자주 쓰던 붉은 깃과 은으로 빛나는 창도 우근목으로 제작되었다. 곧이어 장기양을 더욱 놀라게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봉구안이 창의 끝부분을 가볍게 돌리자 날카롭기 그지없는 단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봉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긴 창은 근접전에 부적합하다. 말에서 떨어지거나 궁지에 몰렸을 때는 후속 무기가 필요하지.” 장기양은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단검을 빼어들어 보았다. 장기양은 갑자기
‘완부옥이라고!?’ 가면을 쓴 남자는 놀랄 새도 없이 목이 잘려 떨어졌다. 소리를 듣고 장기양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완부옥…’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았다. 그녀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장기양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스치더니 얼음같이 차가운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부드럽지만 무시무시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너가 바로 소환이 새로 들인 제자더냐?” ‘스승님을 알다니?’ 장기양은 끝내 대답을 피했다. 여인은 웃음을 흘렸다. “속이 아주 단단한 녀석이군. 괜찮다. 뭐 시간은 많으니…” 그녀의 길고 날카로운 손가락이 그의 머리를 조이자, 장기양은 머릿속에 있는 핏줄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장기양은 이를 악물고, 단 한 마디의 애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여인은 흥미를 잃었는지 손을 거두며 그를 아래로 밀쳤다. 그리고 그의 턱을 슬쩍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어린 것 치고는 대단하군.” “그래, 이만두지. 소환은 자기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지. 내가 나중에 혼나지 않으려면 오늘은 이쯤하고 널 놓아줘야겠지.” 장기양의 이마는 차가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매우 짙은 향이 뿜어져 나왔고, 그는 그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왜 스승님을 찾는 것이옵니까?” 완부옥의 눈매는 짙은 살기를 띄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탄탄하고 매끄러워 절대 나이를 먹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 위에 손가락을 슬쩍 올려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내가 바로 네 사모다. 네 스승이 내 이야기를 안 했단 말이더냐?” 장기양은 본능적으로 믿기 힘들었다. 완부옥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갑자기 화를 내며 그를 힘껏 밀쳐버렸다. 얼굴에는 화염같은 분노가 떠올랐고, 그녀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소환, 두고 보아라. 너를 찾아내면 너의 피부를 벗기고 뼈를 발라내어 갈기갈기 찣어버릴
녕비는 영화궁에 당도하였으나, 황후가 취침 중이라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불이 났거늘, 황후께서는 어찌 태평하게 자고 계실 수 있단 말인가? 녕비는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계속 기다렸다. 한 시진이 지나고서야 궁인이 말을 전하러 왔다. “녕비마마, 황후마마께서 잠에서 깨어나셨사옵니다. 안으로 들라 하옵니다.” 녕비는 이번에 온 목적이 분명하여,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봉구안에게 예를 올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마마께서 냉궁에 계셨던 사이, 정비가 무척이나 득의양양하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각지에서 들어온 진귀한 공물들을 모두 정비에게만 주셨사옵니다.”“송구하오나, 심지어 마마께서 황손을 품고 계셨을 때조차 이토록 많은 하사품을 받으신 적은 없지 않사옵니까?” “정비는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데 도가 튼 자이옵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물건들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며, 자신이 총애받고 있음을 자랑하고 다니고 있사옵니다. 이런 꼴을, 마마께서 참을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신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사옵니다!” 봉구안은 주인의 자리에 단정히 앉아 차를 마시며, 녕비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나직히 물었다. “너는 참을 수 없어 날 찾아온 것이더냐? 내가 나서서 정비를 혼내주길 바라는 것이냐?” 녕비는 말이 너무 과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즉시 부인하였다. “아니옵니다, 신첩은 그저 마마께 충심을 품고 있사옵고, 그저 마마가 걱정이 되어…” 봉구안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이어갔다. “정비가 총애받는 것은 그녀 나름의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진정으로 나에게 충심이 있다면 조신히 행동하고, 말썽을 일으키지 말거라.” 녕비는 다시 꾀어내려 하였다. “황후마마, 만일 정비가 황손을 해친 것이라면 어떠시겠사옵니까?” 봉구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녕비는 황후가 이 일을 무척 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예전에 잡혀간
소욱은 차가운 표정으로 중엄 있게 봉구안에게 말했다.“그대에게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정비를 궁의 일을 돕도록 지시한 것은 할마마마의 뜻이지, 본래 내 뜻이 아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러니까… 폐하께서는 정비를 탐탁지 않게 여기신다는 말씀이옵니까?”소욱은 숨을 조금 거칠게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녀를 봉장미라고 부를 게 아니라 봉돌이라 불렀어야 했구나! 그는 그녀가 궁중의 헛소문에 흔들려 자신이 정비를 편애한다 믿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가 오해하든 말든 자신이 굳이 해명할 이유가 없었다.소욱은 차갑게 말했다.“오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거라.”……그날 밤, 황제는 흥혜궁에 들렀다. 황제의 냉랭한 기운에 주변에서 시중을 드는 자들은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정비조차 침묵을 지켰다. 저녁상을 마치고 황제가 떠나려 하자, 정비는 용기를 내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소욱의 얼굴에 곧바로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리자, 정비가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뗐다.“전하, 들으니 오늘 밤 월식이 있사옵니다. 폐화와 함께 달을 감상하고 싶사옵니다.”소욱은 엄숙히 반문했다.“달이 사라지거늘, 무엇을 감상하겠다는 것이냐?”정비는 당황해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왜 하필 감상을 운운했던가.“폐하…”그녀가 말을 고치려 하였으나, 소욱은 그녀의 손을 흔들어 뿌리치며 냉정하게 말했다.“짐은 아직 결재해야 할 주서가 산더미 같으니,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가하지 않다.”정비는 즉시 얼굴에 죄송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신첩이 경솔하였사옵니다.”황제가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함께 한 것만으로도 이미 큰 은총임을, 나아가 침소에 들기를 고대해서는 아니 되었다. 정비는 그가 흥혜궁 밖으로 나설 때까지 끝까지 공손히 배웅하였다.……소욱은 원래 바로 어전으로 가려 했으나, 잠시 마음을
옥령산.양연삭은 어지럽게 얽힌 바위 틈에서 뛰쳐나왔다.병사들은 적을 만난 듯 경계태세에 들어갔다.동방세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혼자서 양연삭을 저지해, 그를 그냥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곧이어 산을 지키는 십이사명이 출동해 진을 결성하였고, 양연삭을 가두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봉구안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격전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며 이어졌다.병사들이 활과 화살로 공격했지만, 양연삭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봉구안은 가면을 쓰지 않고 본래 얼굴을 드러냈다.그때 양연삭은 소욱을 알아보았고, 더불어 맹성주도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의 아들 양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였다.맹성주가 아니었다면, 양소도 그렇게 비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양연삭의 가면 속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즉시 십이사명의 포위를 뚫고 소욱과 봉구안을 향해 돌진했다.봉구안은 장검을 뽑아 정면에서 맞섰다.소욱과 동방세는 양쪽에서 협공했다.세 사람은 마치 화살처럼 날카로운 진형을 이루었다.진한길과 병사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양연삭의 공격을 저지하며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양연삭의 목표는 분명했다. 먼저 소욱을 죽이고, 그다음 맹성주를 죽이는 것이었다.그는 전투 중 바위 파편에 의해 이미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마공은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해가 되는 한 사명을 붙잡아 그들의 내공을 전부 흡수했다.나머지 열한 사명이 분노하며 외쳤다.“마두야! 목숨을 내놔라!”동방세는 가장 먼저 봉구안의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예전 같지 않았다.양연삭의 함정에 빠진 봉구안이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동방세가 다급히 외쳤다.“비켜! 소환!”양연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소환?동방세가 맹성주를 소환이라 불렀다?설마… 맹성주와 소환이 같은 사람인가!?양연삭은 순간 타오르는 분노에 휩싸였다.새로운 원한과 옛 원한이
단회욱은 죽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기력이 다해 있었다.그동안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다섯 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이제, 그의 구안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곁에는 친구와 연인이 있는 것을 본 이상, 자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완전히 힘을 놓아버렸다.그는 이 생에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단정의 울부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찢어발겼다.온 왕부가 암울한 그림자에 휩싸였다.소욱은 뜰에 서서, 창백한 달을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마음이 불안해졌다.만약 단회욱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까?그들과 단 며칠 함께했을 뿐이고, 나눈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그는 왜 봉구안이 과거에 단회욱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토록 온화한 군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인을 생각했다.소욱은 봉구안이 단회욱 때문에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뭐 하나 잡히지도 않고,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남산왕은 왕부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단회욱을 위해 묻을 자리를 찾겠다고 나섰다.하지만 단정은 이를 거절했다.그는 형을 옥령산에 묻고 싶지 않았다.양연삭도 옥령산에서 죽었으니, 형이 죽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단정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북방에 묻겠다고 했다.그곳은 형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곳이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형님께서는 살아 있을 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어서만큼은 북방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단정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삼키며 봉구안에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단회욱의 시신이 화장되던 날, 소욱도 자리에 있었다.그의 시선은 내내 봉구안을 향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줄곧 무표정이었다. 두 눈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어찌 이런 일이!”봉구안은 손이 떨려왔다.의사가 말하길, 단회욱은 이미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그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그가 이 순간 세상을 떠난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말았다.봉구안은 곧장 남산왕부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단회욱은 침상에 누워 기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준수한 얼굴엔 생기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단정은 침상 곁에 무릎 꿇고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형, 형님! 잠들지 마세요! 겨우 형님을 구해냈습니다… 형님!”봉구안은 한 걸음 한 걸음 굳은 몸으로 다가가, 단회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오라버니…”침대 시트는 이미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그는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마치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듯…“구안아, 난 괜찮아.”그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봉구안의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몸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심지어, 그에게는 숨을 쉴 때마다 마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이 따랐다.그녀는 마음이 풀리며 조용히 침상 곁에 앉았다.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정이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천룡회도 이미 소탕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이제는 마음 편히 쉬세요.”단회욱은 봉구안을 향해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그 안에는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구안아, 아직도 가끔씩 머리가 아프니? 미안해. 더는 약을 만들어 주지 못하겠구나… 너와 혼례를 올리지 못해서, 너에게 행복한 삶을 주지 못해서…… 매일 밤 너를 기다릴 남편이 되어 주지 못해서…”“미안해… 정말로, 널 평생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어.”“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티기 힘들었어. 하지만 혹시, 혹시라도 죽기 전에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 하늘이 날 불쌍히 여긴 거야.”“정말 다행이야. 널 보고 갈 수 있
동방세가 웃으며 말했다.“좋소. 조금 고생하는 건 괜찮소만, 진짜 양연삭이 도망친다면 골치 아플 일이오.”한 시진 뒤, 봉구안은 남산왕부로 돌아왔다.그녀는 단회욱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침상 옆에 있던 단정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오늘 황제 폐하께서 형님을 찾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다녀가신 이후, 형님이 피를 토하셨습니다.”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단회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이의 허튼소리를 듣지 말거라. 내 상태와 폐하는 무관하니...”“그저 내 몸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이다. 구안아, 교주의 시신은 찾았느냐?”봉구안은 차분하게 답했다.“혹시라도 누군가 도망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에게 지키게만 하고 시신을 파헤치지는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희의 눈을 피해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단회욱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나는 교주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야. 구안아, 반드시 조심하고, 방심하지 말거라.”“만약 정말 그가 도망쳤다면, 기억하거라… 만건성법은 너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오발에… 쿨럭, 쿨럭!”단회욱은 너무 허약해 한 번에 말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목에서 비릿한 기운을 느꼈다.그는 피를 토할 것 같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려 봉구안이 보는 걸 피하려 했다.“구안아, 조금 쉬고 싶구나… 이만 침소로 돌아가거라.”그러나 그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피가 샘처럼 목에서 솟구치며 터져 나왔고,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피는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왔다.“오라버니!”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그 장면을 보고는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형님!” 단정도 급히 반응해 침대 아래에서 숙련된 동작으로 대야를 꺼내 들고, 형의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 피를 뱉도록 도왔다.봉구안도 손수건을 꺼내 단
소욱이 방문하자, 단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그는 병색이 짙은 얼굴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단정을 나무랐다.“정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너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구나.”단정은 형이 폭군과 단둘이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가 얼마나 잔혹한지 이미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소욱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거침없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너희 둘 중 누구든 들어도 상관없다. 내가 할 말은 숨길 것이 없으니...”단회욱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소욱은 자리에 앉아 기세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네 성을 보아하니 너는 단씨의 후손이구나.”“단씨 일족이 반역죄로 멸문당했지만, 너희 형제가 목숨을 건진 것은 하늘의 은혜다.”“봉구안, 그녀는 나의 황후다.”단정은 이 말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폐하, 형수님은 더 이상 폐하의 황후가 아니십니다! 두 분께서 이혼하신 사실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를 차갑게 흘겨보았으나 더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황후를 생각해 너희 형제를 용서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천민 신분을 벗고 정식 신분을 되찾게 해 주도록 하마.”단정은 뜻밖의 선처에 어리둥절했다.폭군이 이렇게 관대한 이유는 그의 형에게 형수님을 포기하라는 암시를 주려는 것이 아닐까?병든 단회욱은 여전히 고운 품성을 유지한 채, 소욱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일뿐 아니라, 지난번 구중탑에서 구해주신 은혜 또한...”그러나 소욱은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말했다.“나와 너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너를 구한 것은 오로지 황후 때문이다.”“나는 네가 황후와 다섯 해 약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내가 황후를 향한 감정도 결코 네 것보다 적지 않다.”“네가 빨리 몸을 회복해야 황후도 괴로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단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하고 고통스러웠
봉구안은 추측했다.“남산왕 전하께서는 구중탑에 들어간 악인들이 봉맥을 양육하기 위해 희생된 줄 알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당시 태조께서는 옥석비의 살기를 평정하려고 생자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그래서 그 악인들에게 왕공귀족의 의복을 입혀 황실 자손의 안전을 바꾼 것이죠.”하지만 왜 굳이 악인을 골랐던 것일까?곧 그녀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첫째, 태조 황제가 아직 양심이 있어 이런 악인들은 어차피 십악불사, 어떻게 죽어도 그들에게는 큰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둘째, 구중탑에 흉악범들을 가두면서 보물을 노리는 자들의 마음을 꺾고자 했으니,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추측을 인정했다.“태조 황제는 남산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남산왕의 가문은 자신들이 봉맥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인간의 본능입니다.”“제왕으로서 자신이 단순히 돌덩이 하나를 두려워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이 말을 하며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회욱 오라버니께서 말하길, 양연삭이 진나라의 후손이라더군요. 그가 한 모든 일이 부국을 위해서였으며, 옥석비를 훔친 것 또한 전쟁에 사용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소욱의 눈썹이 찌푸려졌다.“오라버니?”그녀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게 참 친근하게 들렸다.소욱은 내심 불쾌했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진나라.그가 다스리고 있는 이 강산은 남제 이전에는 진나라이었다.그러나 진나라는 이미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부흥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니.그는 본래 천룡회가 단지 강호의 마교로서, 고작해야 자신의 형제 중 누군가와 몰래 손잡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정도일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 진나라와 연관되었다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그런 비밀을 단회욱은 어떻게 알았지?”소욱의 말에는 의심이 묻어났다.
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두 왕은 소욱에게 절을 올렸다.노왕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봉구안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마마, 봉맥이 끊어진 것은 저도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마께서 다시 황제 폐하께 시집을 가신다면…”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욱도 그녀가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고려할 겨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괜히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를 더 번거롭게 할 뿐이었다.그는 노왕의 말을 가로막았다.“본론부터 말하거라.”봉구안은 자신의 신분이 부적합하다고 느껴 물러나려 했다.하지만 소욱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예.”남산왕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폐하, 신과 부친이 찾아온 것은 보물과 옥석비에 대해 상의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중탑이 무너져 그것들이 전부 지하에 묻혔는데, 이를 다시 발굴해야 할지 청하러 왔습니다.”소욱은 차분히 물었다.“옥석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남산왕은 답 대신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이렇게 대단한 신물이 태조 황제가 억눌러두어야 할 물건이었다니.이전에 동방세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구중탑으로 숨겨둔 물건이라면, 결코 다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그의 기억 속 옥석비는 흉물이 아니었다.어쩌면 부친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봉구안 또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그러자 노왕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제가 아는 바로는, 옥석비는 가히 건국의 공신이라 칭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당시 태조 황제께서 전장에 옥석비를 들고 나갔을 때, 그 어떤 적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가장 전설적인 것은 양수 전투였는데, 태조 대군이 포위당하고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적군이 싸우지 않고 물러났던 일도 있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그 옥석비의 전쟁신의 영혼이 현현했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남제 건국 이후, 그 옥석비에 붙어있던 영혼이
옆방.단회욱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그는 단정의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마치 버드나무처럼 연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쌍의 옥처럼 맑던 눈동자는 이제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를 보며 봉구안은 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뼛속까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병사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늘 부드럽게 대했다.그는 군의관으로서 항상 인내심이 넘쳤다.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고요한 세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서 그가 천룡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 것들은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그의 신분과 과거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그녀는 한 사람을 좋아할 때 언제나 현재만을 바라보았다.그를 좋아했던 일에 대해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었다.봉구안은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한때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정말로 다시 보게 되자 수많은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그녀는 그에게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은 손수 적어낸 기록에 상세히 쓰여 있었다.“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단회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한층 단단해진 냉엄함이 더해져 있었다.그녀의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생겼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단정은 두 사람의 눈빛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회욱을 눕혀놓고 말했다.“형님, 약을 좀 다려 올게요.”그가 있으면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단회욱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봉구안의 마음이 순간 떨렸다.단회욱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한쪽 팔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잘생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시체처럼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형님!”단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드디어, 드디어 형님을 찾았어요!”단회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멀리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오라버니…”단회욱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온화했다.“구안아…”“폐하!”진한길이 놀라 외쳤다.봉구안은 급히 뒤돌아보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으로 달려갔다.“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나 소욱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진한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전 구역에 틈이 생겨 폐하께서 낙석에 팔을 맞으셨습니다!”그때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과인은 괜찮다…”남산왕은 급히 외쳤다.“어서 사람을 구하라! 균형이 깨지면 안전 구역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만약 안전 구역이 무너지면, 그 이후의 위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단정은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형님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그를 업었다.그러다 형님 얼굴에 찍힌 뺨 자국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형님, 누가 형님을 때린 겁니까!”단회욱은 이전에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나 그가 말했다.“누구든 상관없다…”그는 오로지 봉구안만 걱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소욱이 드디어 구조되었다.남산왕은 중얼거렸다.“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습니다.”그러나 소욱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팔은 옷과 살점이 뭉개져 엉망이었다.진한길은 마음이 아팠다.봉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