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태자 소탁은 푸른 천옷을 걸친 채, 이 화려하게 금빛으로 물든 궁궐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치 아련한 구름 봉우리에 불쑥 스며든 한 줄기의 먼지 같았다. 그는 자녕궁 밖에 서서 태후의 소환을 기다리는 듯했다.오늘은 날씨가 유독 좋지 않았다.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몸에 드리워졌다. 강한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흔들고 소매 안으로 파고들어 그의 누더기처럼 기운 소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연상은 복잡한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 그는 존귀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의 모습은…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봉구안이 그런 연상의 이상한 기색을 곧바로 눈치챘다. 연상이 폐태자의 옆모습만으로도 그를 알아본 것이 신경 쓰였지만 굳이 묻지 않고 무심하게 걸음을 재촉했다.연상은 긴장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저 분은 폐…""알고 있다." 봉구안이 평온한 어조로 대답하며, 연상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자신마저 마음이 약해져 머뭇거린다면 다른 이들은 더욱 입을 맞춰 험담을 퍼뜨릴 것이었다."황후마마!" 문을 지키던 호위가 공손히 인사했다.소탁이 그 소리에 고개는 돌리지 않았으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도 분명 과거의 약혼녀를 이곳에서 만나리라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평범한 백성처럼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봉구안은 한 치 흔들림 없이 곧장 자녕궁 안으로 들어갔다.자녕궁 내부. 녕비가 태후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다정하게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봉구안의 등장은 이 친밀한 분위기를 순식간에 깨뜨렸다. 태후는 곧바로 미소를 거두었다."황후, 앉으시오. 오늘 내가 황후를 부른 것은 곧 있을 잔치에 관한 일 때문이오."그때, 우르릉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연상은 불안한 듯 자꾸만 밖을 내다보았다. 녕비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가끔 말을 보탰다.봉구안은 녕비가 딴생각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연상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곧장
궁중에 퍼진 소문을 맞닥뜨리고도 봉구안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비슷한 일을 겪은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문을 다루기보다 중요한 것은 소문의 근원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태황태후가 갑자기 폐태자에게 추석 연회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미 누군가 계략을 세우고 있음을 의미했다. 다만, 그 계략을 꾸민 이가 태황태후이실 리는 없었다. 봉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효헌궁. 녕비는 추석 연회에 나갈 음식 목록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있던 시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마마, 마마께서 기회를 만드시지 않았더라면, 중전마마와 폐태자가 서로 마주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소문이 이렇게 빠르게 퍼진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다만, 중전마마께서 마마를 의심하시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녕비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시녀의 말을 흘려넘겼다. “나를 의심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더냐? 소문이 돌고 있다 해도 나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지 않느냐.” 이상하게도 며칠 후, 소문은 점차 거세게 번졌고, 중전이 계신 영화궁에서도 이를 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긴 녕비는 시녀를 시켜 중전의 반응을 살피도록 했다. 시녀는 잠시 후 돌아와 보고했다. “마마, 추석 연회가 다가오면서 중전마마께서는 지금 연회에 나갈 선물을 준비하느라 무척 바쁘신 듯합니다. 소문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선물 준비가 그리 바쁜 일이라고?” 녕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든 사람이 받을 추석 연회의 선물은 항상 통일된 품목으로 준비되기에 하급 시종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시녀가 덧붙여 말했다. “중전마마께서는 올해 특별히 다른 선물을 준비하신다고 하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저희도 알지 못하지만, 영화궁의 사람들이 그 일로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중전마마께서는 그 소문들을 아직 모르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녕비는 터무니없다
소문이 온 궁에 퍼져도, 봉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추석 연회 준비와 출궁 계획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 혼자만 나가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봉가도 생각해야 했다. 그녀가 홀연히 사라지면 봉가가 곤경에 처할 것이 뻔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죽음을 가장하여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봉가나 소욱 황제 모두 더는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고, 그녀 또한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하지만, 멀쩡한 몸으로 갑자기 죽게 된다면 분명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이었다. 그러니 시기를 고르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황제 폐하, 납시오!"봉구안은 서둘러 정돈한 뒤 일어나 맞이하였다. 소욱은 영화궁에 들어서서 그녀의 눈 밑에 엷은 다크서클이 진 것을 보고 며칠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을 짐작하였다. 그녀가 이 추석 연회를 준비하느라 분명 마음과 힘을 쏟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소욱은 그녀가 그렇게 애쓰는 것이 사실은 출궁을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폐하, 무슨 분부가 있으신지요?" 봉구안의 눈빛은 평온하고 일렁임이 없었다. 소욱은 주상에 앉아 소매의 주름을 매만지며 무심히 말하는 듯하였다."짐이 그 연회 참석자 명단을 보았도다."봉구안은 그가 폐태자의 일에 관해 물을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으나,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가족을 그리워한다 하니, 이번 추석 연회에 그대의 부모도 궁에 들 수 있도록 하겠소.”봉구안은 약간 놀랐다. 그녀가 전에 외가에 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적은 있었으나, 부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그들 곁에서 자라지 않아 애틋한 정이나 끌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욱은 원래 세심하거나 배려심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그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어찌된 일인가, 기쁘지 않은가?"그가 봉가 사람들을 궁에 들게 하겠다고 한 것은 사실 혈육임을 확인하기 위해 혈흔 검사
맹가.다행히 봉구안이 제때에 알려주어, 맹 부인이 미리 준비할 수 있었기에 노부인은 손주의 요절을 모른 채 지낼 수 있었다. 노부인은 침상에 기대어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내 이 늙은 몸뚱이를 왜 그리도 생각해주느라 먼 길을 돌아 추석에 나를 보러 왔느냐."맹 부인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부군 또한 어머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 3년 동안 한 번도 돌아오지 못해, 바라건대 용서해주시옵소서.""군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우리 맹가 자손들의 본분이지. 성주는 어찌 되었느냐? 이번에 양 나라와의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건 아니겠지?"노부인은 손주를 걱정하며 초조한 눈빛으로 맹 부인을 바라보았다. 맹 부인은 안심시킬 마음에 기쁜 소식만을 전하며 애써 슬픈 마음을 숨겼다.잠시 후, 노부인은 다시 말했다."성주도 이미 관례를 치렀으니, 이제 부모 된 이들이 성주의 혼사를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맹 부인은 내심 슬픔을 억누르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남편과 의논해보겠습니다. 다만 성주의 눈이 높아서 누구를 고를지 고민이 많습니다."노부인은 손주를 아끼며 말했다."좋은 말은 좋은 안장을 만나고, 영웅은 미인을 만나는 법이지. 성주는 분명 최고의 짝을 만날 거야!"노부인은 병상에 지친 몸을 기대고 있었기에 말하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맹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인들에게 엄하게 당부했다."잘 모셔드리되, 절대 입이 가볍지 않도록 하거라.""네, 부인."맹 부인이 밖으로 나오자,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하녀 이화가 보였다. 맹 부인은 이화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나, 이 아이가 좋아하는 구안 또한 여인이었기에 이 기회에 단념시키려 했다.…황성.만호후를 책봉하는 것에 대해 소욱은 깊이 생각하였으나, 아직까지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그는 맹성주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녀는 이제 맹교먹이 되었고, 여인이 장군이 되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인만큼, 다시 후에 봉하는 것은
“세상에나! 피야!” 겁이 많은 장빈이 가장 먼저 반응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 궁녀가 들고 있던 도자기 조각이 그만 황후의 손을 벤 것이었다. 황후의 얇은 손가락에서는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궁녀는 더욱 두려움에 떨며 다시 땅에 엎드렸다. 연상이 분노하여 말했다. “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냐!” 용상에 앉아 있던 소욱은 냉랭한 얼굴로 죄를 지은 궁녀를 바라보았다. “건방진 것, 끌어내라!” 궁녀는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이내 다른 궁녀가 나서서 봉구안의 상처를 치료했다. 봉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궁녀의 작은 행동을 못 본 척하며 담담하게 대응했다. 봉 대인과 봉 부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쪽을 지켜보았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봉 대인의 곁에 있던 시녀가 은침을 손에 들고 술을 따르는 척하며 봉 대인이 음식상에 얹은 손을 노렸다. 그녀의 손놀림은 너무 빨라 도무지 방어할 틈이 없었다. 봉 대인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고, 바닥에 딱딱한 딱정벌레가 한 마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저 벌레에 물린 줄로만 여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 소욱이 봉구안에게 말했다. “황후는 옷을 갈아입고 오시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고, 높고 오뚝한 콧날 아래 얇은 입술에는 냉혹함이 담겨 있었다. “예.” 봉구안은 자리를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러 갔고, 연상만을 데리고 떠났다. 봉 부인은 그런 딸을 염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궁중에는 겉과 속이 다른 싸움과 온갖 수단이 난무하고 있었다. 구안이 베인 것이 혹여 누군가의 의도적인 짓이 아닐까? 편전 안. 연상이 추측했다. “마마, 저 궁녀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어전에서 모시는 사람이 그렇게 서투를 리가 없습니다.” 봉구안은 손에 감긴 붕대를 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소욱이 준비한 일이었다. 봉
연회장에서 그 향낭과 손수건을 보자, 소탁의 얼굴빛이 변하며 자신과 황후가 모함당했음을 직감했다. 좌중의 봉 대인과 봉 부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불안해했다. 추석 선물을 뒤엎은 궁인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고 허둥지둥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편 종친 중 어린 소세자가 장난스럽고 활발하게 앞으로 뛰어나와 그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배운 한두 글자가 있다고 여긴 그는 아직 어린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두 기슭 푸른 산이 서로 보내고 맞이하니, 누가 이별의 슬픔을 알겠는가. 그대 눈물 가득하고, 내 눈물 또한 가득하네. 오색 끈으로 맺은 마음의 매듭은 아직 이루지 못했건만, 강머리의 조수가 이미 평온해졌네.”“아버지, 이 시는 참으로 애달파요! 전혀 추석의 단란함과는 다르네요!” 비빈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이 시는 마음이 통했으나 인연을 이루지 못한 슬픔을 표현한 애절한 사랑의 시였다. 이 추석 선물은 황후가 폐태자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황후가 폐태자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했다는 것이 아닌가! 소욱은 싸늘한 시선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황후가 어찌 폐태자에게 정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봉구안은 아무런 표정 없이 듣고 있었으며, 아무도 그녀의 마음속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봉 부인은 참지 못하고 급히 일어나 설명했다. “폐하,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계략이옵니다…” 쾅! 상좌의 태황태후가 갑자기 상을 내리치며 엄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응시하며 질책했다. “황후, 네가 말해 보아라! 이는 대체 무슨 일이냐!”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황태후마마, 신첩은 이 물건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태황태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모른다고?”“이 추석 선물은 네가 친히 준비한 것이 아니더냐!” 봉구안의 모친은 딸을 변호하려 했으나, 옆에 앉은 봉 대인이 그녀의 옷소매를 살짝 당겨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때, 녕비가 마치 물에
황제가 명을 내리자, 모두 어쩔 수 없이 각자 받은 선물 상자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열기 시작하는 순서가 엇갈리며 곧 누군가가 외쳤다. "동상고야! 여기 제 추석 선물 속에 동상고가 한 상자 더 들어 있사옵니다!" 모용선은 이 말을 듣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마침 그녀와 같은 편인 녕비가 나서서 말했다."폐하, 설령 무언가 발견되었다 하여도, 그것이 곧바로 황후마마와 연관된다 단정할 수는 없사옵니다..." “녕비, 이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옆에 있던 가빈이 손이 빠르게 움직여 녕비의 추석 선물 상자를 열었고, 그 속에 의심스러운 물건을 발견하였다.“아니, 어쩌다 죽은 쥐가 들어 있는 것이오?” 녕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이어 다른 후궁들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였다.“이 추석 병과가 쥐에게 갉아먹힌 듯하오! 불결하구나!” “이건 또 무엇이오?” 심지어 태후의 추석 선물 속에는 호위의 허리띠가 들어 있었다. 태후는 태황태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황제에게 말했다.“소첩은 이 나이 먹도록 후궁을 더럽히는 행위는 결코 하지 않았사옵니다! 황상,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주시옵소서!” 순식간에 궁 안은 혼란에 휩싸였다. 모용선은 모두의 반응을 보며 손에 쥔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곧바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어찌하여 이리 되었단 말인가? 황후가 꾸민 짓인가? 봉구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은 모용선의 겉으로 드러나는 자애로운 모습 속에 감춰진 어두운 속내를 비추는 듯하였다. 모용선은 깜짝 놀라 얼굴을 돌려 녕비를 바라보았다. 녕비는 모용선을 향해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으니, 그 속에는 계산이 깃들어 있었다. 그랬다. 그녀가 모용선을 배신한 것이다. 아니었더라면, 황후가 어찌 이런 일을 미리 짐작하고 이렇듯 큰 소동을 일으켜 여러 사람을 연루시켜 상황을 뒤흔들 수 있었겠는가. 녕비는 황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황후에게 특별히 두려움
용상 위에서 소욱은 상소문을 자세히 살피며 한 자도 놓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었고, 처음 시선을 둔 곳은 황후였다. 봉구안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신첩은 이 상소문이 누가 가지고 온 것인지, 어찌 정 귀인의 추석 선물에 들어간 것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녕비는 황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후에게 모용선이 폐태자의 추석 선물에 손을 쓸 계획이라고 알렸다. 그 때문에 황후가 다른 사람의 추석 선물에 손을 대어 혼란을 일으키고자 한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쯤에서 끝내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상소문을 모용선의 추석 선물에 넣다니… 황후의 독한 한 수에 혀를 내둘렀다. 이 순간, 그녀는 황후와 적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늦게나마 알아차린 그녀는 봉구안과 함께 교묘히 입을 맞추었다. “폐하께서 추석 선물을 열어보라 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상소문은 정 귀인이 그대로 가져갔을 것이옵니다. 오라버니에게 불리한 물건을 어떻게 처리했을지 뻔하지 않사옵니까.” 모용선은 돌연 일어섰다. “폐하, 신첩…신첩은 알지 못하옵니다.” “정녕 모르는 일이옵니다.”그녀의 눈물이 맺히자, 이는 오히려 녕비를 독살스러운 여인으로 보이게 했다. 소욱은 침착히 입을 열었다. “죄 없는 자는 억울하게 하지 않을 것이나, 죄 있는 자는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의 엄중한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모용선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태황태후는 황제의 이 상소문에 대한 태도를 알아차리고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황상, 이 상소문에 적힌 일이 진위가 어찌 되었든 내일 조정에서 신하들이 조사하도록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지금 당장 잡아야 할 자는 바로 이 추석 선물에 손을 댄 자라 생각하나이다.”태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황태후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이 자는 심보가 흉악하여, 어쩌면 모용 장군을 모
그녀더러 소욱을 죽이라니?봉구안의 손바닥이 서늘해졌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양연삭에게 되물었다.“이 탑에서 나갈 방도가 있습니까?”말인즉슨, 황제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양연삭은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황제를 당장 죽여라.”봉구안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 소욱을 보호하며 말했다.“보물과 황제, 둘다 필요합니다.”자룡왕은 이미 몸을 가누고 일어서며 양연삭에게 외쳤다.“교주님, 이건 계략입니다! 소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양연삭은 봉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태연하게 고백했다.“저는 소수자입니다. 미남을 좋아하죠. 황제는 제가 아직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만약 황제를 죽이신다면, 여러분 중 누가 이보다 나은 장난감을 저에게 보상해 주시겠습니까?”그녀는 말하며 시선으로 오왕을 훑었다. 마치 물건을 고르듯, 눈빛은 방자하고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참고로, 저는 자극적인 놀이를 좋아합니다. 당신들 중 감당할 자가 있다면, 나이가 좀 많더라도 상관없습니다.”그 말에 자룡왕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양연삭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길을 안내하거라.”봉구안은 마치 아쉽다는 듯 오왕을 흘낏 보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시선을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양연삭은 탑의 제9층에서 떠나지 않고, 자룡왕과 적룡왕에게 봉구안을 따라가라고 명령했다.봉구안은 그들을 탑의 5층 돌계단까지 데려갔다.그러고는 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그녀는 눈앞의 돌벽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입니다.”자룡왕과 적룡왕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즉시 봉구안을 죽이려 하였다.그러나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기억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마도 한 층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자룡왕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소환, 경고하겠다. 잔꾀 부리지 말거라!”봉구안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교주님께서는 보물의 절반을 줄 만큼 후
봉구안은 원래 쓰던 가면이 깨져버려 다른 이의 가면을 대신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형에 조금 맞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좁고 작아 보였다.소욱은 살기를 가득 담은 얼굴로 중앙에 있는 이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양연삭은 가부좌 자세로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어쨌든 그의 곁에는 다섯 명의 왕이 그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다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벌어졌다.봉구안이 뒤에서 기습을 가해 은침 하나를 소욱의 뒷목에 꽂았다.소욱은 검을 쥔 채 동작을 멈추더니 믿기 힘든 듯 뒤를 돌아보았다. 배신감에 휩싸인 표정이었다.“네가 어째서…”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가 들고 있던 검 역시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쇳덩이에 불과했다.천룡회의 다섯 왕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무슨 상황이지?양연삭은 쓰러진 황제를 한 번 보더니 봉구안을 다시 바라보았다.봉구안은 쓰러진 소욱을 무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저는 소환이라 합니다.”자룡왕은 분노에 찬 냉소를 터트렸다.“소환? 네가 감히 여기에 나타나다니! 우리가 누군지 알기는 하느냐?”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에 든 무기를 봉구안의 목에 들이댔다.그러나 그녀는 피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압니다. 여러분들은 천룡회의 사람들이지요.”“예전에 우리 천룡회를 멸망시킨 자가 바로 너구나. 오늘, 네놈을 당장 죽여, 천룡회 일원들의 복수를 할 것이다!”자룡왕이 곧바로 공격하려던 찰나, 봉구안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저를 죽이신다면, 여러분은 보물을 찾을 가능성이 더더욱 없어집니다.”“멈춰라.”양연삭이 직접 말을 꺼냈다.자룡왕은 즉시 공격을 멈췄다.“네놈,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봉구안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룡왕을 지나쳐 교주 양연삭을 향해 말했다.“여러분처럼 저 또한 이번에 구중탑에 들어온 것은 남제 태조 황제가
봉구안이 고개를 돌려 소욱을 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소욱의 새까만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부상을 입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앉은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곧이어 그는 단검을 붓 삼아 땅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봉구안은 그 곁에 앉아 그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선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것이 지도임을 알아차렸다.소욱은 이 나라의 군주답게 남제의 강산 지리에 능통했다.그는 붓 대신 칼을 들고도 능숙하게, 경계선이며 성곽, 산맥과 호수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려냈다.그녀는 그가 왜 이런 걸 그리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부상 탓에 그는 지도의 반쯤을 그리다 기운이 달린 듯 힘들어 보였다.봉구안이 그의 몸을 부축하며 나직이 말했다.“나머지는 제가 그리겠습니다.”봉구안은 강호를 떠돌며 산천초목을 두루 보아왔다.군영에 들어간 이후에는 국가의 지형을 숙지하는 것이 필수였다.소욱은 그녀를 믿고 단검을 건네주었고, 이후 그는 다시 벽에 기대며 가슴을 감싸 안고 힘겹게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두 시진이 지나고 봉구안이 지도를 완성했다.그녀는 돌아보며 물었다.“이제 되었습니까?”소욱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한 폭이 더 남았다.”하지만 그것은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그는 비범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봉구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이건… 선성이 아닙니까?”소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선성에 숨겨진 보물의 지도다.”그는 말하며 단검을 선성의 특정 위치에 꽂았다.봉구안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보물이 이곳… 요호에 있다는 말씀입니까?”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맞아. 요호는 300년 넘게 존재했지. 하지만 남제는 겨우 200여 년 전 건국되었는데, 태조 황제가 어떻게 호수 속에 보물을 숨겼겠느냐?”봉구안이 고개를 숙여 깊이 생각에 잠겼다.확실히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보물을 호수에 묻으려면 호수를 완전히 비우고 물을 다시 채워야 한다.그렇게 큰 움직임이 있었
봉구안은 손에 쥔 깨진 가면을 한 번 보고는 가볍게 내려놓았다. 이미 쓸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얼굴을 가릴 수 없었으나, 그녀는 이곳의 사람들에게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제6층으로 향했다.뒤편에서, 그녀에게 패배한 남자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내가… 내 내공 절반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그제야 봉구안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내공의 일부를 잃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이겼다.앞으로 네 층만 더 오르면 단회욱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싸움에 그녀는 몸이 너무 지친 상태였다.소욱이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잠시 쉬거라.”그러나 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곧…”소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쳐서 잠시 그녀를 기절시켰다.그는 그녀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계속 싸운다면, 아홉 번째 층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녀는 탈진하여 목숨을 잃을 터였다.그는 기절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네가 필요 없다고 해도, 가끔은 나에게 기대도 괜찮지 않겠느냐.”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봉구안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차가운 돌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소욱의 얼굴이 보였다.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손등은 특히 끔찍했다. 살갗이 벗겨져 하얀 뼈마저 드러나 있었다.봉구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폐하… 어찌하여… 여긴 대체 어딥니까!”소욱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오랜 시간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한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여기는 제8층이다. 마지막 층을 앞두고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를 찾았다.”“폐하 혼자서 8층까지 올라왔다고요?” 봉구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전, 구중탑의 입구가 열렸을 때, 모두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진한길은 단정이 옳다고 생각했다.입구가 열릴 수 있다면, 당연히 안에 있던 사람들도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그러나 남산왕은 냉소하며 말했다.“그렇게 간단했다면, 구중탑이 구중탑이라 불렸겠느냐.”“구중탑의 입구는 단순히 문을 열고 닫는 문제가 아니다.”“지금 너희가 본 것은 외문이지.”“그 안에는 내문이라는 것이 또 있느니라.”“보통 외문이 닫혀 있으면, 내문은 열린 상태일 것이다. 허나 외문이 열리면, 내문은 먼저 닫히고, 내외문 사이에는 단방향 만화살 진법이 작동하지…”“그걸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진한길은 구중탑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그는 남산왕에게 간청했다.“남산왕 전하, 제발 입구를 열어 주십시오. 저희가 들어가 황제 폐하를 보호하겠습니다!”남산왕의 시선은 차가웠다.“안 된다.”규칙은 어길 수 없었다.진한길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았다.하지만 남산왕은 한 번 당해 본 터라, 이미 방비를 마친 상태였다.그의 한마디 명령에 십이사명이 나타나, 진한길과 그의 호위병들을 철저히 막아섰다.남산왕은 냉정하게 말했다.“탑에 들어가려면 규칙을 지켜야 한다.”“십이사명조차 이기지 못하면, 탑에 들어가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진한길은 남산왕의 이런 고지식함이 이해되지 않았다.“남산왕 전하, 황제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셨습니다. 이럴 때 규칙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단정은 거침없이 말했다.“규칙을 어길 만한 실력이 없는게 아니겠습니까.”봉구안도 결국 남산왕을 협박해서 들어가지 않았던가.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천룡회 사람들.단정은 확신했다. 남산왕이 십이사명을 제압할 힘이 있었다면, 그 역시 규칙을 어겼을 것이다.진한길의 표정은 냉랭해졌다.“남산왕 전하, 전하께서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소인도 감히 전하께 무례를 범하겠습니다!”단정은 두 팔을 가슴에 모으고 비웃듯 말했다.“뭘 그리 길게 말하십니까. 그냥 처리하면 될 일입니다.”“저
바둑판 위에는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승려의 두 발은 잘려 나갔고, 그의 눈은 분노와 공포로 뒤집혀 있었다.소욱은 칼을 든 채 서서, 잔인하고 난폭하게 웃었다.“계속 수를 두어 보거라.”봉구안조차도, 소욱이 이렇게 잔혹하고 단호한 방식으로 이 대국을 끝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바둑의 흐름이 어긋나지 않도록 유지하면서도, 승려의 두 발을 잘라냈다.주변의 사람들은 이 광경에 격분하여 들고일어났다.봉구안은 냉소하며 말했다.“뭐야, 지는 걸 못 참겠다는 것이냐?”이 한마디는 그들의 남아 있던 자존심을 건드렸다.승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놈들을 보내라!”이렇게 해서, 그들은 가볍게 두 번째 층을 통과했다.그들이 떠난 뒤, 승려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옆으로 물러섰다.승려는 냉랭하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사층 위부터가, 구중탑의 진정한 꽃이라 할 수 있지...”…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쾅!봉구안은 내팽개쳐져, 등을 벽에 부딪혔다.소욱은 두 눈으로 이를 똑똑히 보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다.왜냐하면, 이것이 네 번째 층의 도전 규칙이기 때문이었다.도전자는 눈을 가리고 맨손으로 근접 전투를 해야만 했다.규칙을 지키고 상대를 이긴다면, 그들은 통과할 수 있었다.하지만 규칙을 어기면, 그들의 적은 무려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될 터였다.소욱은 깊이 고민한 끝에 감정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위급한 상황일수록,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되는 법이었다.더군다나, 봉구안은 전장을 수없이 경험한 사람이었다.그녀가 이렇게 쉽게 패배할 리 없었다.소욱의 눈빛은 점차 차갑게 변했다.봉구안의 상대는 건장한 거구의 남자였다.그녀는 유사한 적을 만난 적이 있었다. 예컨대, 양나라의 ‘괴두’라 불리던 자가 그러했다.하지만 이 자는 괴두보다 훨씬 건장했고, 공격 속도도 빨랐다.더군다나 그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시야를 차단당한 봉구안은 단시간 내에 적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은 모두 환호하며 소리를 질러
세 개의 주사위 중 어느 하나도 부서지지 않았다.하지만…세 개의 주사위 중 열여덟 면의 숫자가 모두 사라지고, 매끈한 표면만 남아 있었다.“뭐야. 숫자가 다 사라졌잖아?”아까까지 시체를 처리하던 노인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숫자가 전부 사라졌다고?”임육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그 주사위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보물이었다!“이놈을 죽여버릴 것이다!”소욱이 바로 나섰다.임육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겠다고? 죽고싶어?”봉구안이 차분히 말했다.“말한 대로 주사위를 부순 적은 없지 않느냐? 결과를 인정하거라.”임육은 목이 졸린 채로도 봉구안을 향해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이 망할 녀석아!”노인이 임육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됐네, 패배를 그만 인정하거라.”그는 다시 봉구안과 소욱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두 사람은 이만 위층으로 올라가거라.”그제야 소욱은 임육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봉구안은 이 노인이 이 층의 진정한 실권자임을 알아차렸다.그의 말은 묵직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봉구안은 그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며 물었다.“혹시 망서화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노인이 살짝 미소 지었다.“들어본 적이 없네. 이 층엔 꽃이나 풀 같은 건 본 적이 없어.”봉구안은 그러면 됐다며 작별 인사를 남겼다.임육은 숫자가 사라진 주사위를 쥔 채, 땅에 주저앉아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있었다.노인은 두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고개를 저었다.“경솔했구만.”젊은이의 도박 실력은 임육만 못했으나, 주사위 소리를 구분하는 모습만 봐도 그녀가 신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첫 두 판은 일부러 져 주었다.세 번째 판에서 작은 점수를 내겠다고 한 순간, 임육의 승산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었다.도박은 열 번 하면 아홉 번은 잃는다고 한다. 잃는 것은 단지 돈과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임육은 노련한 도박꾼이라 상대방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러나 눈앞의 청년은 눈빛이 차갑고 깊어 보였으며, 마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노련함을 지닌 것 같았다.임육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돼지우리, 미끄럼구덩이, 아니면 허리 맞추기 중에 뭐로 할까?”돼지우리는 네 개의 주사위를 사용하고, 미끄럼구덩이는 세 개를 사용하며, 허리 맞추기는 여섯 개 중 특정 방식으로 노는 것을 뜻했다.소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봉구안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미끄럼구덩이로 하자구나.”임육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좋지. 미끄럼구덩이.”말을 마치고 나서 임육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젊은이, 주사위를 많이 굴려본 적은 없겠구먼?”봉구안은 가면 아래로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상대의 의도를 탐색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시합이 시작되었고 삼세판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하지만 임육은 자신의 도박 기술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젊은이, 세 판 중 한 판이라도 나를 이길 수 있다면 그 판을 네가 이긴 것으로 하지.”임육은 손가락을 풀며 느긋하게 주사위 통을 들었다. 몇 번 흔들어 세 개의 주사위를 통 안에 넣었다.그의 손목이 돌면서 주사위가 통 안에서 맑은 소리를 냈다.과연 ‘광도선’이라는 이름답게, 그의 손놀림은 신출귀몰했다.봉구안은 모든 감각을 집중하며 특히 귀를 곤두세웠다.주사위 통이 탁자 위에 놓였다.임육은 악의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이긴다면, 네 팔 하나를 가져갈 것이다.”그리고 통을 열자, 주사위는 3, 4, 5가 나왔다. ‘화순’이었다.봉구안은 그가 여유롭게 일부러 실력을 감춘 것을 알 수 있었다.이번엔 봉구안 차례였다.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사위 통을 들었지만, 몇 번 흔들고 바로 통을 내려놓았다.통을 열자, 임육의 일행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1, 2, 3! 소부도, 벌칙이네!”임육은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탁자 위로
봉구안과 소욱은 잔뜩 긴장을 한 채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굽은 등을 한 노인이 걸어 내려오는데, 그의 눈빛은 음산하고도 갈망에 찬 빛을 내며 그들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노인은 기대에 차 있던 눈빛을 곧바로 잃고 말았다.“그들이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봉구안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소욱이 설명했다.“조정에서 보낸 죄인은 탑에 들어갈 때 음식을 함께 가지고 들어오게 되어 있다.”그들은 급히 탑에 들어간 탓에, 남산왕이 사전에 먹을 것을 준비할 틈이 없었다.봉구안은 이해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노인에게 말했다.“저희 형제는 급히 탑에 들어오느라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노인은 코웃음을 치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조정에서 새로운 이를 보낸 지가 꽤나 오래되었지... 괜찮다, 괜찮아.”그의 행동은 비정상적이었다. 말할 때도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놓인 시체 하나를 붙잡아 그 다리를 끌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봉구안과 소욱은 눈빛을 교환한 뒤 곧장 그를 따라 올라갔다.그들은 구중탑의 두 번째 층에 도달했다.이 층에는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두 사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아까 그 노인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손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내 모두 경계하며 손에 쥔 무기를 꺼내들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노인은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시체의 옷을 능숙하게 벗겨내며 봉구안과 소욱에게 말했다.“몇 달 전에도 너희처럼 먹을 것이 없는 자들이 왔었지. 그리고 이 구중탑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갔어...”그가 말을 다 채우기도 전에 갑자기 힘을 주더니, 시체의 팔 하나를 단번에 뜯어내 버렸다.그 옆에서는 다른 사람이 그 팔을 받아 능숙하게 몇 번 칼질을 해 고기를 조각내더니, 냄비에 넣었다.봉구안은 눈썹을 찌푸렸다.노인은 뒤돌아 보며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신입이시니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