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가.다행히 봉구안이 제때에 알려주어, 맹 부인이 미리 준비할 수 있었기에 노부인은 손주의 요절을 모른 채 지낼 수 있었다. 노부인은 침상에 기대어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내 이 늙은 몸뚱이를 왜 그리도 생각해주느라 먼 길을 돌아 추석에 나를 보러 왔느냐."맹 부인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부군 또한 어머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 3년 동안 한 번도 돌아오지 못해, 바라건대 용서해주시옵소서.""군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우리 맹가 자손들의 본분이지. 성주는 어찌 되었느냐? 이번에 양 나라와의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건 아니겠지?"노부인은 손주를 걱정하며 초조한 눈빛으로 맹 부인을 바라보았다. 맹 부인은 안심시킬 마음에 기쁜 소식만을 전하며 애써 슬픈 마음을 숨겼다.잠시 후, 노부인은 다시 말했다."성주도 이미 관례를 치렀으니, 이제 부모 된 이들이 성주의 혼사를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맹 부인은 내심 슬픔을 억누르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남편과 의논해보겠습니다. 다만 성주의 눈이 높아서 누구를 고를지 고민이 많습니다."노부인은 손주를 아끼며 말했다."좋은 말은 좋은 안장을 만나고, 영웅은 미인을 만나는 법이지. 성주는 분명 최고의 짝을 만날 거야!"노부인은 병상에 지친 몸을 기대고 있었기에 말하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맹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인들에게 엄하게 당부했다."잘 모셔드리되, 절대 입이 가볍지 않도록 하거라.""네, 부인."맹 부인이 밖으로 나오자,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하녀 이화가 보였다. 맹 부인은 이화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나, 이 아이가 좋아하는 구안 또한 여인이었기에 이 기회에 단념시키려 했다.…황성.만호후를 책봉하는 것에 대해 소욱은 깊이 생각하였으나, 아직까지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그는 맹성주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녀는 이제 맹교먹이 되었고, 여인이 장군이 되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인만큼, 다시 후에 봉하는 것은
“세상에나! 피야!” 겁이 많은 장빈이 가장 먼저 반응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 궁녀가 들고 있던 도자기 조각이 그만 황후의 손을 벤 것이었다. 황후의 얇은 손가락에서는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궁녀는 더욱 두려움에 떨며 다시 땅에 엎드렸다. 연상이 분노하여 말했다. “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냐!” 용상에 앉아 있던 소욱은 냉랭한 얼굴로 죄를 지은 궁녀를 바라보았다. “건방진 것, 끌어내라!” 궁녀는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이내 다른 궁녀가 나서서 봉구안의 상처를 치료했다. 봉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궁녀의 작은 행동을 못 본 척하며 담담하게 대응했다. 봉 대인과 봉 부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쪽을 지켜보았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봉 대인의 곁에 있던 시녀가 은침을 손에 들고 술을 따르는 척하며 봉 대인이 음식상에 얹은 손을 노렸다. 그녀의 손놀림은 너무 빨라 도무지 방어할 틈이 없었다. 봉 대인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고, 바닥에 딱딱한 딱정벌레가 한 마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저 벌레에 물린 줄로만 여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 소욱이 봉구안에게 말했다. “황후는 옷을 갈아입고 오시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고, 높고 오뚝한 콧날 아래 얇은 입술에는 냉혹함이 담겨 있었다. “예.” 봉구안은 자리를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러 갔고, 연상만을 데리고 떠났다. 봉 부인은 그런 딸을 염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궁중에는 겉과 속이 다른 싸움과 온갖 수단이 난무하고 있었다. 구안이 베인 것이 혹여 누군가의 의도적인 짓이 아닐까? 편전 안. 연상이 추측했다. “마마, 저 궁녀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어전에서 모시는 사람이 그렇게 서투를 리가 없습니다.” 봉구안은 손에 감긴 붕대를 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소욱이 준비한 일이었다. 봉
연회장에서 그 향낭과 손수건을 보자, 소탁의 얼굴빛이 변하며 자신과 황후가 모함당했음을 직감했다. 좌중의 봉 대인과 봉 부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불안해했다. 추석 선물을 뒤엎은 궁인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고 허둥지둥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편 종친 중 어린 소세자가 장난스럽고 활발하게 앞으로 뛰어나와 그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배운 한두 글자가 있다고 여긴 그는 아직 어린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두 기슭 푸른 산이 서로 보내고 맞이하니, 누가 이별의 슬픔을 알겠는가. 그대 눈물 가득하고, 내 눈물 또한 가득하네. 오색 끈으로 맺은 마음의 매듭은 아직 이루지 못했건만, 강머리의 조수가 이미 평온해졌네.”“아버지, 이 시는 참으로 애달파요! 전혀 추석의 단란함과는 다르네요!” 비빈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이 시는 마음이 통했으나 인연을 이루지 못한 슬픔을 표현한 애절한 사랑의 시였다. 이 추석 선물은 황후가 폐태자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황후가 폐태자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했다는 것이 아닌가! 소욱은 싸늘한 시선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황후가 어찌 폐태자에게 정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봉구안은 아무런 표정 없이 듣고 있었으며, 아무도 그녀의 마음속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봉 부인은 참지 못하고 급히 일어나 설명했다. “폐하,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계략이옵니다…” 쾅! 상좌의 태황태후가 갑자기 상을 내리치며 엄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응시하며 질책했다. “황후, 네가 말해 보아라! 이는 대체 무슨 일이냐!” 봉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황태후마마, 신첩은 이 물건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태황태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모른다고?”“이 추석 선물은 네가 친히 준비한 것이 아니더냐!” 봉구안의 모친은 딸을 변호하려 했으나, 옆에 앉은 봉 대인이 그녀의 옷소매를 살짝 당겨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때, 녕비가 마치 물에
황제가 명을 내리자, 모두 어쩔 수 없이 각자 받은 선물 상자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열기 시작하는 순서가 엇갈리며 곧 누군가가 외쳤다. "동상고야! 여기 제 추석 선물 속에 동상고가 한 상자 더 들어 있사옵니다!" 모용선은 이 말을 듣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마침 그녀와 같은 편인 녕비가 나서서 말했다."폐하, 설령 무언가 발견되었다 하여도, 그것이 곧바로 황후마마와 연관된다 단정할 수는 없사옵니다..." “녕비, 이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옆에 있던 가빈이 손이 빠르게 움직여 녕비의 추석 선물 상자를 열었고, 그 속에 의심스러운 물건을 발견하였다.“아니, 어쩌다 죽은 쥐가 들어 있는 것이오?” 녕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이어 다른 후궁들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였다.“이 추석 병과가 쥐에게 갉아먹힌 듯하오! 불결하구나!” “이건 또 무엇이오?” 심지어 태후의 추석 선물 속에는 호위의 허리띠가 들어 있었다. 태후는 태황태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황제에게 말했다.“소첩은 이 나이 먹도록 후궁을 더럽히는 행위는 결코 하지 않았사옵니다! 황상,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주시옵소서!” 순식간에 궁 안은 혼란에 휩싸였다. 모용선은 모두의 반응을 보며 손에 쥔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곧바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어찌하여 이리 되었단 말인가? 황후가 꾸민 짓인가? 봉구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띠었다. 그 눈빛은 모용선의 겉으로 드러나는 자애로운 모습 속에 감춰진 어두운 속내를 비추는 듯하였다. 모용선은 깜짝 놀라 얼굴을 돌려 녕비를 바라보았다. 녕비는 모용선을 향해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으니, 그 속에는 계산이 깃들어 있었다. 그랬다. 그녀가 모용선을 배신한 것이다. 아니었더라면, 황후가 어찌 이런 일을 미리 짐작하고 이렇듯 큰 소동을 일으켜 여러 사람을 연루시켜 상황을 뒤흔들 수 있었겠는가. 녕비는 황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황후에게 특별히 두려움
용상 위에서 소욱은 상소문을 자세히 살피며 한 자도 놓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었고, 처음 시선을 둔 곳은 황후였다. 봉구안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신첩은 이 상소문이 누가 가지고 온 것인지, 어찌 정 귀인의 추석 선물에 들어간 것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녕비는 황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후에게 모용선이 폐태자의 추석 선물에 손을 쓸 계획이라고 알렸다. 그 때문에 황후가 다른 사람의 추석 선물에 손을 대어 혼란을 일으키고자 한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쯤에서 끝내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상소문을 모용선의 추석 선물에 넣다니… 황후의 독한 한 수에 혀를 내둘렀다. 이 순간, 그녀는 황후와 적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늦게나마 알아차린 그녀는 봉구안과 함께 교묘히 입을 맞추었다. “폐하께서 추석 선물을 열어보라 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상소문은 정 귀인이 그대로 가져갔을 것이옵니다. 오라버니에게 불리한 물건을 어떻게 처리했을지 뻔하지 않사옵니까.” 모용선은 돌연 일어섰다. “폐하, 신첩…신첩은 알지 못하옵니다.” “정녕 모르는 일이옵니다.”그녀의 눈물이 맺히자, 이는 오히려 녕비를 독살스러운 여인으로 보이게 했다. 소욱은 침착히 입을 열었다. “죄 없는 자는 억울하게 하지 않을 것이나, 죄 있는 자는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의 엄중한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모용선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태황태후는 황제의 이 상소문에 대한 태도를 알아차리고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황상, 이 상소문에 적힌 일이 진위가 어찌 되었든 내일 조정에서 신하들이 조사하도록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지금 당장 잡아야 할 자는 바로 이 추석 선물에 손을 댄 자라 생각하나이다.”태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황태후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이 자는 심보가 흉악하여, 어쩌면 모용 장군을 모
"폐하를 지켜라!" 진한길이 황제 앞에 나서며 외쳤다.소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내려다보며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전 안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고, 곧 혼비백산하여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소욱은 명령을 내렸다. "우선 태황태후를 모시고 나가라!"그 말을 들은 태후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봉 부인은 제일 먼저 딸을 떠올렸으나, 봉 대인이 억지로 끌어내며 질타했다. "여기 수많은 호위들이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는 겁니까, 부인!"봉구안은 자주 암살을 겪었기에 주위를 살피며 이 암살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예감했다. 어지럽게 쏘는 화살들은 아마도 눈속임이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수법일 터였다. 진정한 살수는 예상치 못한 곳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문득, 그녀의 눈에 그것이 보였다! 어수선한 틈을 타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내시 차림의 자가 황제를 겨냥해 소매 안에서 은밀히 화살을 드러낸 것이다.봉구안의 얼굴에서 더 이상 평정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뇌리에는 오직 '호위' 한 단어만 떠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곧장 소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소욱 또한 무공이 높은 자였다. 암살자의 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그는 그것을 보았다.그러나 순식간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 앞으로 날아들었다. 다른 후궁들이 모두 제 목숨을 구하는 데에만 급급할 때, 황후는 굳건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마치 끊어진 연처럼 중상을 입고 그 앞에 쓰러졌다.찰나의 순간, 그 화살이 마치 그의 가슴을 찌르는 듯해 소욱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했다.몸은 이미 그 어떤 의지보다 먼저 움직였고, 그는 황후를 받쳐 들었다."마마!" 군중 속에서 연상은 경악하여 외쳤다. 그녀는 봉구안이 언제 그리로 달려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봉 부인은 그 광경을 보고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소리쳤다.이때 봉구안의 의식은 매우 또렷했다. 자신이 목숨을 잃을 위기는 없을 것이다.
비록 황후가 직접 나서서 화살을 빼야 한다고 말했으나, 그녀의 몸은 황제의 것이었으므로 어의는 황제의 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소욱의 얼굴은 얼음같이 차갑게 굳어 있었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빼거라.”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어의는 정확한 각도와 힘으로 그 화살을 뽑아냈다. 봉구안은 몸 밑의 이불을 단단히 움켜쥐고, 단 한 번 억눌린 신음만 내었을 뿐, 더 이상의 고통스러운 소리는 내지 않았다. 굵은 땀방울이 그녀의 관자놀이와 머리카락을 적셨다. 어의는 곧 그 철촉을 검사하더니, 갑자기 손을 떨며 소욱에게 말했다. “폐하, 역시 소인의 예상대로 이 화살에는 독이 묻어 있습니다!” “목숨에 지장은 없겠느냐?” 소욱이 물었다. 어의가 대답했다. “다행히 빨리 뽑아내어, 마마께서는 큰 위험에 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어의는 곧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소욱은 침상 곁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의가 봉구안의 등을 드러내기 위해 옷을 자르고, 특제 약수를 몇 차례 뿌려 상처에 남은 독을 씻어낸 후 약가루를 뿌려 붕대로 감쌀 참이었다.“중궁마마, 상당히 아프실 수 있습니다. 참아주십시오.” 봉구안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베개에 반쯤 얼굴을 기대고, 창백하고 쇠약해진 모습이었으나 눈빛은 굳건했다. 약수가 상처에 닿자 수천 마리의 개미가 피부를 물어뜯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 채 한마디의 비명도 내지 않았다. 어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내도 참기 힘든 고통을 여인이 이렇게 잘 참다니…그는 동작을 재빨리 마무리하고 독혈을 짜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정상적인 붉은 피가 나오자 멈췄다. 봉구안은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어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로서 남녀 구분 없이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지만, 필경 상대는 황후였다... 상처를 붕대로 감싸려면 가슴 둘레를 한 바퀴 감아야 했기에, 황후의 옷을 벗겨야 했다. 어
녕비는 바로 땅에 엎드려, 얼굴엔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다. 태후는 예전의 자애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앉은 자리에서 얼굴에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오늘 밤의 일, 네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 제대로 말해라!”녕비는 부정하려 했다.“마마, 저는 절대로...”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소문이 돌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뭔가 수상하다고 느꼈다.”“황후와 폐태자가 자녕궁에서 서로 만나 옛정을 되새겼다고들 떠들어댔지만, 그날 폐태자는 사실 나를 찾아왔었지.”“그날 밤, 나는 폐태자를 만나주지 않겠다고 전하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폐태자는 기어코 늦은 새벽까지 궁 문 밖에서 날 기다렸지.”“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자녕궁 안에 손을 뻗을 수 있는 건 너 하나뿐이었느니라. 네가 내 뜻을 가장해 전한 것이 아니더냐?”녕비는 황급히 변명했다.“마마, 저는…”“말 끊지 마라! 아직 할 말이 남았다!“나는 네가 그저 황후를 못마땅히 여겨 조금 장난을 치는 정도라 여겼느니라.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지. 오늘 밤… 솔직히 말해보거라. 폐태자에게 보내는 예물에 네가 손을 대지 않았느냐?”녕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부정했다.“아닙니다! 마마, 이번 일은 정말로 저에 대한 오해십니다!”태후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아까만큼은 분노하지 않고 다소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네 짓이 아니더냐?”녕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마마, 이는 모두 정 귀인의 생각이었습니다. 정 귀인이 저를 이용해 황후를 함께 해치려 한 것입니다.”태후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모용선이?’그 애가 쉽지 않은 인물임을 직감했다!그녀는 이내 녕비에게 명하였다.“이제 일어서거라.”녕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후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한층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찌 정 귀인을 쉽게 믿겠습니까?” “정 귀인은 저를 이용하려 했지만, 정작 뒤에서 웃는 이는 바로 저였답니다.” “정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