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들은 사람을 보내 맹성주를 청해오라고 하였으나 맹성주의 장막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들은 놀라 탄복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맹성주가 군사를 거느리고 갔다고?”같은 시각.장막에 있던 교먹은 이미 주둔지를 떠나 경공을 이용하여 최대한 빨리 한산비탈로 달려갔다.척후병이 “이겼다”라고 말했을 때, 교먹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또 소장군이라는 말을 듣고 사저가 돌아왔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교먹이 계속 여기 있으면 바로 들통날 것이다.그래서 교먹은 바로 돌아가야 했다.주둔지.장군들은 놀라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모여 있는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맹성주의 이번 작전은 너무 훌륭하오. 그런대 우리까지 속이는 것은 너무하오.”“그러니까… 이렇게 떠들썩하게 한산비탈을 떠난 후 자신이 십여 명의 장병을 데리고 양나라 군영을 공격하다니… 그런데 날이 밝으면 우린 계속 행군해야 합니까? 아니면 제자리에서 기다려야 합니까?”“그래도 한산비탈 일대를 통째로 점령한다는 것은 뜻밖의 수확이오. 난 맹씨 녀석을 탄복하오.”…양나라 군영.양나라의 12만 병사들이 항복하거나 죽었다. 그저 몇몇 가치가 있는 장령들만 생포되었다.장막 안, 부장들은 짓눌려 땅에 무릎 꿇고 있었다. 봉구안은 주장의 목 뒷덜미를 잡고 그의 얼굴을 모래판에 밀어 넣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양나라의 주장은 죽을지언정 말하지 않았다.그러나 부장 중 한 명이 고통을 견디지 못했다.“맹 소장군님, 제가 맹장군님이 어디 계신지 알려드리지요. 맹 장군님은 바로 뒤에 있는 웅덩이에 있습니다. 제가 데려다 드릴 테니 제발 저를 살려주시오!”양나라 주장이 화를 내며 호통쳤다.“개자식! 나라를 배반하고, 적에게 투항하고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그 부장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12만 대군이 전멸했다!다른 지역의 양나라 장병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앞으로 맹성주와 북영군에 더 두려워할 것이다. 싸우기도 전에 먼저 패배
교먹은 가면을 벗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무거운 짐을 풀은 듯 한 홀가분한 표정이었다.“사저, 드디어 돌아왔어!”봉구안은 엄숙한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사부님, 사모님, 그리고 장병 2만 명을 버리고 십만 대군을 거닐고 동쪽으로 가다니… 어떻게 생각한 건가?”교먹은 울먹거리며 급히 해명했다.“그들을 버릴 생각은 없었어. 특히 사부님.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이것 다 여러 장군들이 의논한 결과야!”“나… 난 사저가 아니야. 난 잠시 군심을 안정시키려고 사저인 척 했을 뿐이야.”“난 아무것도 할 줄 몰라.”봉구안은 자신의 사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겁 많고 자기 주견이 없었다.교먹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겨우 예닐곱 살이었다. 배가 고파 맹 부인 앞에 쓰러졌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교먹을 살린 후, 그녀를 보내려 했다.그런데 봉구안의 부탁에 그들은 교먹을 남겨두고 제자로 받아들였다.교먹은 낯가림이 심하고 안정감이 없었다. 그래서 사저인 봉구안 뒤에만 붙어 다녔다.후에 그들은 사부님과 사모님을 따라 군영에 왔다.그들 사이의 정이 매우 깊다. 둘이 같이 있는 사간은 봉구안과 친동생 장미와 같이 있는 시간보다 더 길었다.2년 전, 교먹이 자신을 단련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둘은 갈라졌다.봉구안은 계속 교먹을 보호해왔다. 교먹에게 거의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 교먹의 행동은 그녀를 실망하게 했다.“최선은 다하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하는 건가?”교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사저, 내가 잘못했어… 난 태어날 때부터 쓸모없는 사람이야.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저와 사부님, 사모님이 나를 구하고 나에게 가족이 되어 주었는데… 내… 내가 목숨을 걸고 사부님을 구했어야 하는데…”봉구안이 정정했다.“사부님뿐만이 아니다. 양나라 군영에서 얼마나 많은 장병이 죽었는지 아니?”교먹은 마치 영혼이 가출한 것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도 이러기 싫어! 사저, 나 정말 그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았
십여 만 대군은 십 리 밖에 주둔하고 있었다.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았다.“그들도 틀림없이 양나라 군영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늦어도 내일 날이 밝으면 사람을 보내서 물어볼 것이오.”“구안아,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양나라 공격 전략에 대해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십여 만 대군은 계속 동쪽으로 행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아니면 되돌아와서 한산비탈을 일대로 북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봉구안은 모래판 지형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한참 후, 봉구안 머릿속에 방법이 생각났다.“오늘 밤의 전투에서 양나라 군은 큰 패전을 당했습니다.”“그러니 우리는 속전속결해야 합니다.”“비영군이 앞장서서 양나라의 남대문을 열고 십여 만 대군이 뒤를 이어 쳐들어 가는 겁니다. 이번 목표는 양나라 도성입니다.”봉구안은 양나라 도성에 꽂힌 깃발을 뽑았다. 봉구안의 눈빛에서 반드시 성사시키겠다는 빛을 내비쳤다.맹 장군은 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의 전술과 똑같네.”“그때 양나라가 갑자기 전쟁을 멈추고 화해를 구하는 바람에 지체되었지. 그때 아군은 승리는 취산골에서 멈추었지. 그리고 한산비탈로 후퇴했고.”“만약 네가 이번에 제때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 한산비탈마저 빼앗겼을 것이다.”옆에 있던 교먹은 머리를 빨리 돌렸다.“다 제 탓입니다. 제가 한산비탈을 지키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부님이 양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맹 장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 일은 여기서 그만하자. 앞으로 누구도 다시는 언급하지 말거라.”“다음 전략이 가장 중요하다.”봉구안이 덤덤히 말했다.“예. 사부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교먹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저도 사부님의 말씀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이때 맹 장군이 취산골을 가리키며 말했다.“빙빙 돌아서 다시 여기로 올 줄이야…”“지난번에도 여기를 쉽게 공략하지 못했는데…”“이번에 같은 방법으로는 안 될 것이다. 양나라 군도 멍청하지는 않으니,
조정에서 관리들이 소곤소곤 얘기하고 있었다.“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정말 남제가 이긴 겁니까? 양나라가 아니고?”“12만 양나라 군이 지다니요?”“허위보고는 아니지요? 맹성주가 정말 장병 만 명으로?”다들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용상 위에 앉아 있는 소욱의 얼굴은 냉엄해 보였다. 한산비탈의 전쟁으로 마냥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소욱이 명령을 내렸다.“맹성주를 이번 전쟁에서 주장으로 발탁한다. 또한 이번에 양나라를 함락시키면 제후로 봉하고, 식읍 만호를 포상한다.”관원들은 부러우면서 질투가 났다.누군가가 나서서 간언을 했다.“폐하! 안 됩니다! 맹성주는 원래부터 공로를 믿고 자부했습니다. 만약 정말로 만호후로 봉한다면 나중에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옵니다.”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폐하, 맹성주를 주장으로 발탁하면 위에 그를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 제멋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맹성주가 용맹하기는 하지만 대국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다른 장군들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폐하 재고하여 주십시오.”“폐하, 맹성주의 공은 천자보다…”소욱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더 말하는 자는 군심을 동요하는 죄로 처할 것이다.”후궁.태황태후의 만수궁.편전 안, 모용선은 이곳에 머물러 병 수발을 들었다.시녀 추홍이 분개해 하며 말했다.“귀인, 맹성주가 공로를 다 차지했습니다.”“맹성주가 용감하다고는 하지만 모용 장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군은 남경에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맹성주가 만호후가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모용선이 꽃 한 송이를 꺾으며 웃었다.“공로가 너무 크면 주인의 노여움을 살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질투도 사는 법이지. 중간에서 방해할 사람도 많을 것이고… 그들은 남제의 실패를 볼지언정 맹 소장군만 공을 세우는 꼴은 참지 못할 것이다.”추홍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역시 귀인은 생각이 깊습니다.”모용선은 잘 다듬은 꽃을 묶었
황궁에서 대소사까지는 두 시진 거리이다.유사양은 바로 돌아왔다.“폐하, 황후마마께서 폐관하여 기복하셔서 마마를 뵙지 못하고 시녀 연상만 만났습니다. 연상은 마마께서 부족한 것 없이 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소욱은 미간이 찌푸렸다.“기복하는데 폐관이 왜 필요한 것이냐?”‘황후 뭐 하고 있는 거야?’대소사.연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연상은 마마가 없다는 것이 들킬까 봐 선실의 문과 창문을 꼭 닫아걸었다. “마마, 제발 일찍 돌아오십시오…”‘폐하도 이상하게 괜히 사람을 보내고… 뭔가 의심하고 있는 건가?’…남제와 양나라의 전쟁이 한창이다.며칠 후, 또 다른 승전보가 남제 도성에 전해졌다.“폐하, 맹 소장군께서 30명의 병력으로 취산골을 공략해냈습니다.”이 소식은 백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30명? !!“폐하, 이것은 틀림없이 거짓입니다. 30명이 어떻게 취산골 그 험지를 공략해낼 수 있겠습니까?”3만 명이면 몰라도…소욱을 탄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중 맹성주가 한 사람이다.젊은 나이에 이런 전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남제를 보우하여 이렇게 훌륭한 장수를 하사한 것이다.한 쪽의 희열과 한 쪽의 수심이 비교가 되었다.양나라 조정은 난장판이 되었다.양나라 황제는 나이가 많고 성질도 나날이 나빠지고 있었다.그는 용의의 팔걸이를 치며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병사를 달라고 해서 줬다. 황금으로 자객을 고용한다고 해서 황금도 줬다.”“말해 보거라. 그 큰 취산골에 그렇게 많은 수비군이 있었는데 맹성주가 어떻게 고작 30명의 병사를 데리고 공략할 수 있는가?”“짐이 늙어서 멍청하다고 생각하냐? 그래서 거짓 소식으로 짐을 화내게 하고… 짐이 화나서 죽으면 짐의 황위를 차지하려고… 그런 건가?”문무백관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폐하, 노여움을 푸십시오.”가장 앞에 선 승상의 얼굴은 창백했고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고, 벌린 입은 오랫동안 다물지 못했다.“승상, 말해보
봉구안 지도 하의 남제 대군은 기세가 등등했다.한 달 만에 양나라의 두 도시를 함락시켰다.이 속도는 양나라 사람들을 놀래고 불안하게 했다.양나라 황제는 수년 동안 주색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금욕하고 금주하였으며 분향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조상님의 제사 때 눈물까지 보였다.“만약 양나라가 이번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짐은 앞으로 반드시 분발하여 나라를 다스리겠습니다.”조상님의 제사를 지내는 행사가 끝나자, 척후가 말을 타고 와서 소식을 전했다.“폐하, 천성이 함락되었습니다!”양나라 황제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백 년 천성도… 못 지켜냈단 말인가?”황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격렬하게 질문했다.“정녕 양나라를 멸하시려는 겁니까? 짐이 무슨 잘못을 하였습니까?”천성은 양나라의 마지막 방어선이다.양나라 도성이 위태롭다.전쟁도 치열하고 조정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취산골 전쟁 후, 조정에서 맹성주에 대한 잡담이 점점 많아졌다.소욱이 엄격한 수단을 사용하여 제지하였지만 잡담은 계속 되었다.봉구안이 양나라 도성을 공략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유언비어가 심해졌다.심지어 그녀와 요비 능연을 엮어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그녀가 능연에게 뇌물을 선사했다는 말이 나왔다.소욱은 이런 상주서를 볼 때마다 무시했다.황제로서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않고,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았다.하물며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생각하지 않아도 누군가 일부러 맹성주를 노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황제로서 뭔가를 해야 했다.소욱은 서왕을 불렀다.“도성에 양나라의 첩자가 있다. 가서 조사해 보거라.”그가 가장 믿는 사람은 서왕이다.서왕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닷새도 안 되어 양나라의 첩자 몇 명과 양나라 관원 한 명을 잡았다.소욱은 그들을 성문 앞에서 참수하라고 명령했다.그 관원은 보통 첩자와는 달리 죽기 직전까지 소리를 질렀다.“제황, 이 강산의 주인이 곧 바뀔 것이다!”“다들 맹성주만 알고 제황은 모른
남부군은 의리가 있어서 다들 나왔다.“손 장군님, 장군님의 체면을 봐서 벌을 받겠다만, 저희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렇습니다. 저희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우리는 남부군 인데, 왜 북영군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까?”손 장군은 자신의 부하들을 감쌌다. 그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이들의 말도 일리가 없지 않지요. 맹 소장군, 북영군에는 북영군의 규칙이 있지만 우리 군영에도…”봉구안의 눈빛이 매서웠다.“손 장군, 싫다는 뜻인지요?”손 장군은 잠시 멍했다.“싫은 게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벌을 줬다가 장병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인심이 흩어질까 두려워서…”다른 장군들도 나서서 조정했다.“맹 소장군, 그렇게까지 하는 건… 양나라 백성들을 위해 우리 남제의 병사들을 난처하게 할 필요가 있겠소?”“손 장군님, 병사들에게 대충 벌을 내리시오. 이제 곧 양나라 도성을 공략해야 하는데… 수하에 병사를 잘 관리하셔야지요. 맹 소 장군을 난처하게 하지 말고.”“그래요. 다들 한 발씩 물러서시죠.”손 장군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그래요. 장군님들 말대로 남부군은 다들 한 대씩 맞겠습니다.”손 장군도 자신의 병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군영에 군기가 있다. 그 여자들은 대부분 패전한 도시의 여자들이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가웠다.이때 맹 장군이 그녀 옆에 와서 나지막이 주의를 주었다.“양나라 도성을 먼저 공략하고, 다른 일은 전쟁이 끝난 후에 따져도 늦지 않다.”구관이 명관이다.추후 결산은 양쪽에 다 좋다고 할 수 있다.지금 남부군을 군법에 따라 처벌한다면 며칠 후에 참전할 수 없어 큰 손실을 입을 것이다.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그녀는 참을 수 있었다.“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란다.”그녀는 이 말을 내던지고 돌아서서 장막으로 돌아갔다.손 장군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장병 예를 갖추었다.그리고 남부 군들에게 경고했다.“다들 행동을 조심하거라! 양나라 도성을 공략하면,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을 수 있
가면 뒤에 있는 봉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소녀의 얼굴이 순간 봉장미로 보였다.그 소녀의 옷은 몸을 가리지 못했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피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소녀는 죽기 전에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부릅뜨고 말에서 내려온 소장군을 보고 있었다.봉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망토를 풀어 소녀의 몸에 덮었다. 봉구안의 눈에는 한기가 가득했다.소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봉구안의 손을 잡고 손톱으로 그녀의 손등을 후비며 한을 풀었다.입을 벌리자, 피가 그녀의 입에서 콸콸 쏟아져 나왔다.“왜… 왜?”결국, 한을 품고 죽었다.이 모든 것은 잠깐 사이에 벌어졌다.오백이 고개를 들어 위로 올려다보니 병사 몇 명이 허둥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그들이 사라져 버렸다.봉구안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소녀의 눈을 감아주고 일어나 술집으로 향했다.오백이 뒤를 따라 술집에 들어간 후, 자연스럽게 문을 걸어 잠갔다.술집에는 허둥지둥 옷을 정리하는 병사들이 있는가 하면,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아무 일 없는 듯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허리띠를 잃은 채 바짓가랑이를 손에 쥐고 2층에서 내려오는 사람도 있었다.“소장군도 술 마시러 오셨습니까? 주인장, 술을 빨리 내놓으세요.”슥!보검이 칼집에서 나와 눈이 있는 것처럼 방금 2층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을 향했다.검은 그들의 발 앞에 있는 나무판자에 꽂혀 그들을 움직임을 멈추게 하였다.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을 보고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서서 적개심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제일 앞에 선 병사가 건방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맹 소장군!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봉구안의 시선은 싸늘하고 조용했다.“이긴 사람은 이 문으로 나갈 수 있다.”그렇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는 건가?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서로 쳐다보았다.그들이 맹성주의 능력을 의심하기는 했지만 정말 맹성주와 맞설 용기는 없었다.봉구안은 손목에 있는 보호대를 풀었다.오백은 이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