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침착하게 소욱의 말에 대답했다.“폐하께서는 황실의 명성을 중요시하고, 신첩도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능연이 저지른 죄만 공개하고 피해자의 신분과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서는 생략하시면 됩니다.”이렇게 해도 능연의 죄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소욱은 차갑게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래, 심사숙고했구나…”“짐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 공술서들을 황성 전지에 뿌릴 것이냐?”봉구안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부득이하지 않으면 신첩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폐하께서 능연의 죄를 정리해서 세상에 알린다면 요점만 알리 수 있지만, 만약 제가 세상에 알리게 되면 사실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때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겁니다.”협박 당하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게다가 소욱은 한 나라의 군주이다.소욱은 휙 하고 일어섰다. 온몸에 압박감이 휘몰아쳤고 궁전은 차갑고 잔혹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짐은 이미 능연에게 유배형을 처했다. 뭐가 더 불만이냐?”“능연의 죄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수모하려는 건가? 짐을?”총애하는 비빈이 큰 죄를 저지른 배후에는 군왕의 방임도 있었다.똑똑한 소욱은 봉구안이 그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라고 한 목적을 알아차렸다.봉구안도 부인하지 않았다.봉구안은 담담하게 소욱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능연의 잘못도 있지만 능연의 문제뿐만 아니라 황제의 총애가 있어 능연이 그런 짓을 했을 겁니다.”진한길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황후가 지금 황제를 비난하는 건가?’‘황후 정말 대단해!’봉구안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계속 말했다.“감추고 회피하는 것보다 잘못을 직시해야 합니다.”“황제의 총애가 능연의 의지였습니다. 폐하가 능연을 총애했기 때문에 설지 등 관원들이 떼를 지어 능연에게 달려들었고 그에게 뇌물을 선사했을 겁니다.”“그리고 은총을 독차지하려고 황후 자리까지 넘볼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신첩이 입궁하기도 전에, 신첩이 폐하의 총
곧 명령이 내려졌다.“여봐라! 황후를….”이때, 대전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황후마마를 모셔오라는 태후마마의 명이 있으셨습니다.”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반면 봉구안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마치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대단한 책사 납셨네.’소욱은 진한 살기가 요동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황후, 평생 태후궁에 살 수 있을 것 같더냐.”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에서 온화한 미소는 사라지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변했다.자녕궁.태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황후에게 말했다.“걱정 말거라. 내 평생 널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며칠 시간 끌어주는 것은 가능해. 허나….”태후는 얼굴의 미소를 지우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황상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며칠 시간을 끌려는 거라면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게야. 황후, 더 뾰족한 방법을 생각해야 해.”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취하고는 말했다.“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신첩은 이 기간 동안에 출궁을 할까 합니다.”태후와 황제는 그녀가 시간을 끌려고 자녕궁에 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상 그녀는 따로 계획한 게 있었다.자녕궁에 있는다는 것은 핑계고 궁 밖에 나가서 꼭 할 일이 있었다.태후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출궁을 한다고?”황후가 몰래 출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봉구안은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대전을 나가 편전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떠난 후, 계 상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태후마마, 황후마마께서는 무슨 일로 출궁하려는 걸까요? 태후께서 황후의 출궁을 도왔다는 걸 폐하께서 알면 크게 대노하실 겁니다.”태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황후는 골칫덩어리였던 능연이를 제거해 줬어. 출궁이 아니라 더 무리한 요구를 해도 최선을 다해 도울 거다.”얼마 전, 황후가 갑자기 자녕궁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태후에게 능연이를 제거
말을 마친 소욱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능연이는 바닥에 엎드려 절규했다.“안 돼!”“폐하! 신첩에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왜 이렇게 된 걸까?아무도 해독할 수 없다고 알려진 천수독이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능연이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이대로 유배를 가야 한단 말인가.“안 돼!”자진궁으로 돌아온 소욱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유사양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상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황제가 직접 죄명을 나열한 첩지를 공개했고 귀비가 유배를 당했다.사람들은 충격에 빠졌고 유사양도 마찬가지였다.소욱은 책상 앞에 앉아 속으로 청심주를 읊었다.이것도 그 여자객이 알려준 방법이었다.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시급했다.변방은 여전히 불안정한데 후궁에도 피바람이 불었다.황후를 떠올리면 괘씸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사가 나왔다.능멸을 당한 후에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밝히려는 여인은 흔치 않았고 그 사실을 자신의 부군에게 알리는 여자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세상 여인들이라면 모두 부군의 마음에서 깨끗한 형상으로 남길 원할 것이다.하지만 유독 황후는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밝혀냈다.그녀의 용기는 사내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그런 용기가 황제를 기만하고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다.소욱은 반복해서 속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순결을 잃은 황후를 정녕 이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단 말인가?아무리 그녀를 싫어하고 평생 품을 일이 없는 황후라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고 대외적으로 황제의 정실이었다.정녕 그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묵과할 수 있을까?황후를 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그 후로 그는 또 새로운 황후를 들여야 한다는 것이 현실이었다.다음 황후가 봉장미보다 더 잘한다는 보장이 없었다.그녀가 금인장을 잡은 후로 후궁은 질서 정연하게 돌아갔고 그녀처럼 비빈들을 질투하지 않고 조용히 본
봉구안은 먼저 옆방으로 가서 두 관병을 쓰러뜨린 뒤에 그들의 품에서 공문과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 영패를 챙겼다.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소욱은 결국 옛정을 봐서 능연이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유배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신분을 바꿔 다른 곳에서 살아갈 기회를 준 것이다.하지만 봉장미에게는 그런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봉구안은 공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쓰러진 능연이를 한참 노려보았다.능연이는 인적 없는 무덤가에서 정신을 차렸다.주변에서 시체의 악취가 풍기고 있었고 수풀 속에서 맹수의 눈빛이 언뜰거렸다.주변을 만져보니 뭔가 축축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겁에 질린 능연이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악!”그녀는 재빨리 기어일어나서 도망치려 했다.이때, 섬뜩한 검광이 그녀의 눈앞을 스치더니 발목 쪽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능연이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악! 누구야!”등 뒤에 있던 상대가 천천히 돌아 그녀의 앞에 다가와서 섰다.고개를 든 능연이는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봉장미! 너였구나!”야행복을 입은 봉구안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능연이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긴 머리는 위로 묶은 상태였고 허리춤에는 검집을 차고 있는 모습이었다.능연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너… 검술을 할 줄 알아?”귀족가에서 곱게 길러진 아가씨가 검술을 알다니!서서히 불안감이 찾아왔다.봉구안은 한쪽 무릎을 꿇고 매서운 눈초리로 능연이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저지른 짓들은 만 천하에 알려졌지만 난 복수를 내 손으로 하는 걸 더 선호해.”능연이가 흠칫 놀라며 뒤로 몸을 젖혔다.그리고 악에 받쳐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그걸 만 천하에 떠벌렸어? 피해자가 누군지 밝히지 않으면 사람들이 너인 걸 모를 것 같았어? 누군가는 눈치를 챌 거고 그럼 온 나라 백성들이 네가 당한 짓을 알게 될 거야! 넌 날 망친 동시에 너 자신도 망친 거라고! 폐하는 네 황후 지위를 폐할 거고 너 역시 나처럼 만인의 질타
능연이는 겁에 질려 온몸을 벌벌 떨었다.오백이 손을 풀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잠시 긴장을 추스른 능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봉가는 널 미래의 황후로 키운다고 어릴 때부터 겹겹이 보호했지. 혼례를 올리기 전 가끔 외출하는 것도 비밀에 부쳤어.”“그런 생각은 왜 안 해봤어? 내가 산적을 고용해서 널 해치려 했다고 해도 누군가가 네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난 네가 언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았을까?”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채월을 바라봤다.채월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마마, 능연이 말이 맞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아가씨께 아주 각별하셨죠.”채월은 능연이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말을 돌렸다.“아가씨께서 가끔 외출하실 때면 수행하는 호위는 모두 나으리의 심복이었고 마차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마차를 준비해 주셨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노선도 수시로 바꾸었고 저택 안에서 심복을 제외한 하인들조차 아가씨의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하지만 그 호위들은 모두 나으리께 충실한 자였고 그들 중에는 비밀을 누설할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다 죽고 살아 있는 사람은 소인뿐이고요. 나으리가 비밀을 누설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지요.”봉구안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저택 내부에 밀고자가 있다는 소리였다.“너한테 노선을 밀고한 자가 누구지?”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질문했다.능연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애원했다.“그 전에 기생집에 날 보내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런 곳엔 가기 싫어!”능연이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지만 봉구안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그녀는 다가가서 능연이의 팔뚝에 비수를 꽂고 세게 비틀었다.능연이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미친 년!”봉구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넌 나한테 뭔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어. 사실을 말하면 편히 죽게 해주지.”능연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이… 이거 놔!”“봉장미, 그날 산적들에게 그냥 널 죽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악!”봉구안은 다시 비수를
능연이를 처리한 뒤, 봉구안은 남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면을 썼다. 그리고 채월과 함께 봉장미를 만나러 갔다.봉장미는 송려가 돌보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구석에 숨어 있었다.봉구안이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오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그들이 그녀에게 남긴 상처는 영혼 깊숙이 뿌리내려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쓸쓸한 얼굴로 장막을 내려 시선을 가려주었다.그래도 다행인 점은 송려의 약을 먹고 봉장미의 건강 상태는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적어도 밤에 잠에 들 수는 있었다.다만 불안정한 정신 상태는 여전했다.약간 소리가 나도 그녀는 불안에 떨었다.봉구안은 채월을 방에 남겨둔 뒤, 송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송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외상은 치료가 가능하나 마음의 병은 어려울 것 같소.”봉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요 며칠 사이에 데리고 이곳을 떠날 생각인데 가능하겠나?”송려는 고개를 저었다.“절대 안 될 소리요! 아까 아가씨가 자네를 보고 기겁하는 걸 보면 아마 가는 길이 쉽지 않을 거요. 하물며 낯선 환경에 낯선 사람은 아가씨의 회복에 좋지 않소. 오히려 병증을 악화시킬 수 있소. 조금 더 기다렸다가 아가씨의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봉구안이 물었다.“얼마나 기다려야 하지?”“상황을 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선 최소 반 년이오.”봉구안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하지만 동생을 위해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능연이의 입에서 들은 내용들도 재조사가 필요했다.결국 돌고 돌아 봉장미가 납치당한 날부터 다시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형씨?”송려의 부름에 그녀는 그제야 생각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무슨 일이지?”송려는 그녀에게 약알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몽화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약이오. 지난 번에 자네가 가져온 약이 큰 도움을 주어서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소.”“원래는 10일에 한 알씩 100일 동안 복용하면 완전히 해독할 수 있
봉구안은 채월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일인데 이리 요란법석이냐.”오백이 답했다.“장군께서 시키신 대로 그 여자를 벙어리로 만들어 기루에 팔았는데요.”“거기 어멈은 늘 하던 대로 몸을 검사했었죠. 소인이 밖에서 기다리는데 그 어멈이 씩씩거리며 나오더니 소인을 마구 욕하는 거예요.”“장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나 가시나요?”봉구안은 부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오백은 그제야 말실수를 깨닫고 다급히 답했다.“어멈이 하는 말이 그 여자는 완전한 여자가 아니라 석녀라는 거예요!”그 말을 들은 봉구안의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석녀라니!사내의 시중을 들 수 없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으며 달거리도 없는 여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능연이의 달거리 기록도 조작된 것이었을 것이다.오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장군, 그 여자 폐하의 총비 아니었나요? 어떻게 석녀일 수가 있죠? 대체 그 여자는 무슨 수로 귀비의 자리까지 올라간 걸까요?”그는 황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 의심이 갔다.봉구안도 뜻밖의 소식이 당황스러웠다.합방을 할 수조차 없는 여인은 황제의 시중을 들 수가 없었다.아마 능연이는 이 사실을 가장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사실이 들통나면 그녀가 누렸던 과거의 총애와 영광들이 모두 헛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무덤가에서 채월에게 칼부림을 당할 때도 당황하는 티를 안 내다가 기루에 팔려간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반항했던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그녀는 아마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웠을 것이다.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능연이는 지금 어디 있지?”아마 기루에서도 석녀는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오백이 이를 갈며 답했다.“처음에 어멈은 절대 안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은화를 건네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받더라고요. 입만 살아 있어도… 괜찮다면서요.”봉구안은 고개를 돌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저 안에 능연이에게 능멸을 당해 미쳐버린 동생이 누워 있었다.용서받을 수 없
유사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폐하, 황후마마께서는 태후마마를 보살펴 드리고 계시온데… 혹시 태후께서….”소욱은 고개를 들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태후는 현명하신 분이다. 막무가내로 황후를 감싸고 돌진 않을 거다.”소욱은 이틀이면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했다.자녕궁.봉구안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다.이때,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황후마마, 폐하의 부름이 있습니다.”반 시진 후.봉구안은 장신구를 최대한 덜어내고 소백한 궁복을 입은 채, 황제의 서재를 방문했다.딱 봐도 용서를 구하러 온 모습이었고 사실도 그랬다.그녀는 공손히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죄 많은 신첩이 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스스로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면, 황궁의 법도대로 어떤 벌을 받을지 생각은 해보았느냐.”봉구안은 시선을 내리깔고 답했다.“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유사양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옆에 가서 섰다.그는 황제가 폐후 첩지를 쓴 것을 직접 보았기에 황제가 무조건 황후를 내칠 거라고 생각했다.원칙대로라면 폐후와 같은 중대사는 태후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하지만 원래 독단적인 황제이니 딱히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소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매정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달리 해명할 것은 없느냐.”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동요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신첩은 자신이 중궁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나이다.”소욱이 차갑게 말했다.“너는 항상 분수를 아는 여인이었지.”봉구안의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스쳤다.드디어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소욱이 입을 열려는 순간 대전 밖에서 급보가 들려왔다.“폐하, 남부 변경에 이변이 생겼다고 합니다!”봉구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북방의 양나라도 아직 미지수인데 남부에 또 일이 생겼다니!소욱은 싸늘한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명령했다.“일단 영화궁으로 돌아가거라.”“예.”서재를
아침 식사 후, 최 상궁은 잠시 영화궁에 들렸다.최 상궁은 눈에 띄게 피곤한 모습의 연상을 보며 환심을 사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소인, 흔비마마를 뵙사옵니다!”“어젯밤 수고가 많으셨으니, 이는 제가 직접 고아온 보양탕이옵니다. 부디 몸 보하시옵소서...”최 상궁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계집아이를 내가 너무 우습게 봤구나.’‘아무리 말려도 영화궁을 떠나려 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높은 가지에 오르려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높은 가지가 되려 했구나!’최 상궁은 연상의 얼굴을 재차 훑어보았다. 그녀는 경국지색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단정하고 깨끗한 이목구비는 제법 이 황궁과 어울리는 듯했다.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만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눈길을 줄 만도 했다.최 상궁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며 말했다.“마마, 신첩은 옛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마마께서는 이제 믿을 만한 사람도 곁에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첩을 다시 곁에 두시어 모시게 하심이 어떠실지요?”그러나 연상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필요 없다!”최 상궁은 연상의 이러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며, 날카로운 말투로 은근히 그녀를 찔렀다.“마마께서는 처음의 처지를 잊으셨나이까?”“타인들이 마마를 어떻게 보는지 아시옵니까? 폐비마마께서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미 용상을 차지했다며, 주인을 배신한 노예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하옵니다.”“이 궁궐은 홀로 싸워나가는 곳이 아니옵니다. 마마 곁엔 사람이 필요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폐하께서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실 때, 영화궁은 다시 냉궁이 될 것이옵니다!”연상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모든 억울함을 꾹꾹 눌러 참았다.“당장 나가거라!”그들은 전혀 몰랐다. 황제가 폐비 봉씨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핑계로 정당하게 영화궁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또 그녀는 어젯밤 황제의 승은을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황제의 계획에 협조했을 뿐이었다.그녀의 마음속 고통은, 누구에게도 말
영화궁.교지를 전하는 이는 유사양이었으니, 황제가 이 흔비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엿볼 수 있었다.교지를 읽고 난 유사양은 미소를 띠며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어서 더는 무릎 꿇지 말고 교지를 받으십시오.”“이건 하늘이 내린 큰 은혜입니다! 노비가 궁에 들어온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바로 빈에 봉해지는 사례는 처음 봅니다.”황제가 영화궁을 자주 찾으신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이전 황후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여인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유사양의 눈에는 감탄과 경외가 어렸다.이 궁중에서는 아무도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는 걸 그는 다시금 깨달았다.누가 알았겠는가. 한때 황후마마의 곁을 지키던 궁녀가 이제 신분을 바꾸어 흔비가 되리란 것을.연상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저는… 저는 안 됩니다. 감히 교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그녀가 어떻게 황제의 빈이 될 수 있단 말인가!갑자기 연상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그녀는 무서웠다.황제는 정말 미쳤다!유사양은 난생처음 이런 상황을 보았다.“설마 기뻐서 그러시는 겁니까? 잘못 들으신 거 아닙니다. 이는 비로 봉하는 교지입니다. 어서 일어나시죠…”“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연상은 마치 도망치듯 뛰쳐나갔다.유사양은 깜짝 놀라 외쳤다.“여봐라! 흔비마마를 막아라!”연상은 머리를 감싸 쥐고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나는 아니다! 나는 흔비가 아니야! 아아아! 다가오지 말거라…”어전.진한길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눈앞의 황제는 짐승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황제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연상을 비로 봉한 일은, 전 황후가 듣는다면 분노하지 않을까?마치 곁에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심정일 테니 말이다.황제는 왜 이런 일을 하는가? 연상의 실언에 대한 복수인가, 아니면 황후에 대한 복수인가.……견가 저택.견여해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확인했다.“뭐라고? 황제가 궁녀를 비로 봉했다고?”진부인은 견여해의 팔을
연상은 황제의 한 방에 오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내뱉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최 상궁에게 그 견씨 집안 여인의 일을 듣고 나서야, 그 말이 맞음을 깨달았다.남자의 진심은 한순간에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예전에는 구안 아가씨가 약간 모질다 생각했었다.황제의 진심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황제가 그럴 만한 일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만약 황제가 그렇게 쉽게 놓아줄 수 있었다면, 그토록 구안 아가씨를 가둬두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단 말인가?지금 와서는 또 왜 그녀를 잊지 못하는 모습으로 영화궁에까지 오는가?최 상궁은 다리가 풀려 겁에 질렸다.“폐하, 연상의 뜻은 그저…”“물러가거라.”소욱의 눈빛은 차갑고도 잔혹하여, 마치 격렬히 일렁이는 분노의 바다 같았다.최 상궁은 황제의 노여움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으므로 급히 물러났다.영화궁에 남아 있던 몇몇 궁인들 또한 모두 물러가며,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뜰 안에는 황제와 연상 둘만이 남았다.황제는 천하를 다스리는 군왕의 위엄을 지녔으며, 용포는 그를 더욱 고고하고 냉혹하게 돋보이게 했다.그런 황제가 한 걸음씩 연상을 향해 다가왔다.“누구를 위해 분노하는 것이냐?”“너의 눈에는, 과인이 폐비에게 무슨 죄를 지은 듯 보이는 것이냐!”“명심하거라. 과인이 비록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다 한들, 폐비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폐비가 과인을 떠나고자 한 것이며, 폐비가 결정한 것이다.”“설마 과인이 폐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만큼 천하의 하찮은 사람이란 말이냐!”연상은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은 채로, 황제의 노여움을 묵묵히 견뎌냈다.소욱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문득 그 여인이 떠올랐다.그녀 또한 이렇듯 냉랭하게, 그가 무엇을 말하든 단지 “예” 한 마디만 했었다.황제는 시선 끝에 보이는 썩어 문드러진 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연못 같은 눈에 서늘한 빛을 띠었다.잡을 수 없다면… 다 흩어져야 하는
황제는 군영을 순시한 후 궁으로 돌아갔다.몇몇 무장들은 사적으로 견여해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견 장군, 현명한 딸을 너무 깊이 숨겨두신 것 아니오? 일찍 궁에 들어갔더라면 좋았을 텐데.""아직 늦지 않았소! 황제의 총애를 받으셨으니 앞날이 촉망되는구려!"견여해의 마음은 마치 어린 사슴이 제 몸 안에서 뛰어다니는 듯 두근거렸다.그가 황제의 장인이 되다니!오늘은 정말 전화위복의 날이로구나!견진은 이런 말들을 듣고 믿기 힘들어 아버지를 옆으로 끌어당겼다."아버님, 어찌하여 황제께서 갑자기 저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것입니까?"견여해는 딸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창을 휘두를 때, 황제께서는 눈을 깜빡도 하지 않고 바라보셨다. 이보다 더 관심이 있다는 증거가 어디 있겠느냐? 딸아,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황제께서는 일찍이 후궁을 자진해서 들이지 않으셨다고 하니."견진은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준수하고 용맹해 보였다.그러나 곧 불편한 기색으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제 뜻은 여장군이 되는 것인데요..."견여해는 딸의 말을 듣지 못한 채 아름다운 상상에 빠져 있었다.그날로 어명이 견가에 도착했다.견가 전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과 기대에 휩싸였다.견부인은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장군, 혼인 파기의 어명이 도착했으니 곧 입궁하라는 어명도 내려오겠죠?"견여해는 대문 쪽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그렇게 빨리 될 리가 없소. 봉비는 절차를 거쳐야 하니. 게다가 들어오자마자 비빈의 자리에 책봉되는 선례는 없었소. 적어도 귀인의 위치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오."견부인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장군께서는 많이 아시는군요. 하마터면 저작거리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습니다." " 아, 늘 제 말을 듣지 않던 진이가 이번엔 정말 큰일을 해냈군요." " 장군, 진이의 초상화를 일찍 궁에 보냈더라면 지금쯤 비빈의 자리에 올랐을 지도 모르겠네요…"견여해 역시 후회스러운 심정이었다.다른 한편, 혼인
견가의 부녀는 황제가 이토록 좋은 심기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견진은 고개를 들어 아름다운 얼굴로 침착하게 대답했다.“폐하, 소녀는 어릴 적부터 장창을 연마해 왔사옵니다.”소욱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마치 그녀를 통해 다른 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장창은 익히기 어려운데, 그대가 이 정도 경지에 이르렀으니 실로 귀중하구나.”곁에 선 유사양은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황제는 오래도록 이렇게 평온하고 상냥하게 대화한 적이 없었고, 더군다나 누군가를 칭찬한 적은 더욱 드물었다.이 견가의 여식은 아마도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이일 터였다.견진은 그간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군 입대에 대한 포부를 오늘 황제로부터 인정받은 듯했다. 마치 평생의 동지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폐하, 소녀는 남녀를 불문하고 나라에 헌신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소녀의 창술은 진정한 고수를 만나면 그저 말뚝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옵니다.”“하지만 소녀의 마음만은 진심이옵니다.”“북대영에 여장군이 있듯이, 소녀는 황성에도 여장군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견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고, 그 눈빛은 젊고 준수한 황제를 바라보며 기대에 찼다.그의 아버지 견여해는 초조해하며 말했다.“폐하, 소녀의 이런 황당한 말씀은 들어주지 마소서. 신이 곧 데리고 가서 엄히 꾸짖겠나이다...”소욱은 갑자기 손을 들어 제지했다.그의 시선은 견진에게 고정되었고, 깊고 탁월한 눈빛은 기쁨과 분노를 가늠하기 어려웠다.“견여해, 그대 딸의 말이 참으로 내 마음에 드는구나.”견여해는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다.견진은 너무나 기뻐 제정신이 아니었다.“폐하, 폐하께서는 고루하고 완고한 남자들과는 너무나 다르십니다!”소욱은 그녀의 눈에서 존경과 기쁨을 보았다.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그 냉혹한 여인에게 버림받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그 밀정은 이미 천룡회를 떠난 지 오래되어, 세속의 생존 본능에 물들어 자신을 위한 생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살고 싶었기에, 봉구안에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고백했다.“교주께서 소장군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장군께서 교주의 유일한 아들을 해치셨기 때문입니다!”봉구안의 얼굴빛이 차갑게 굳어들었다. ‘천룡회 교주의 아들?’“언제, 어디서였느냐.”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밀정은 이를 갈며 힘겹게 버티며 몇 마디 말을 내뱉었다.“운산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소장군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십니까?”봉구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것은 오년 전, 그녀가 스승과 함께 북방에 도착한 직후였다. 아직 정식으로 군영에 들어가기 전이었다.운산촌을 지나가던 중, 그녀는 끔찍한 멸문지변을 목격했다.사건을 저지른 자는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년이었는데, 그의 태도는 오만하고 포악했다.그날 마을에는 경사가 있었다. 그 악동은 몇몇 수하들과 함께 소란을 피우며 신랑에게 자신 앞에 무릎 꿇으라고 명령했다. 신랑이 따르지 않자, 그 악동은 수하들에게 신랑을 죽이고 신부를 공공연히 능욕하도록 했다.그 신혼부부의 부모가 저지하려 하자, 그 악동은 그들을 산 채로 끓는 가마에 삶아 죽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그 고기를 먹고 국물을 마시라고 강요했다.마을 사람들이 거부하자, 그들 역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그녀가 지나가던 중, 하늘을 뒤덮은 불꽃을 보고 불이 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악동이 횃불을 들고 불 속에서 미치광이처럼 웃고 있는 모습과, 그의 앞에 묶여 애원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그런 악한은 나이가 어리다 해도 용서될 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그의 수하들을 죽이고, 그 아이를 때려 기절시켜 불 속에 던져버렸다.그 악동이 천룡회 교주의 아들이었단 말인가.회상이 끝나자, 봉구안의 얼굴은 차갑고 멀어졌다.오늘날까지도 그녀는 그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천룡회가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를 알고 나니, 그녀의 마음속에 계획이 서
장군부.맹 부인은 직접 봉구안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특히, 눈에 관한 치료가 중요했다.다행히도 제때 치료를 받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했다.그녀는 봉구안의 눈에 붕대를 감고, 짧은 시간 동안 강한 빛을 피하고 물에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잠시 후, 문 밖에서 맹 장군이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 맹 부인의 목소리는 차갑고 엄격했다.맹 장군이 들어와 봉구안을 한 번 살펴본 뒤, 급히 맹 부인에게 물었다.“눈에 상처는 좀 어떻소?”맹 부인은 마음속에 아직도 불안함이 가득했다.“어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전에 이미 잘 준비해놨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구안이가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예요? 이번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만약 그 독약이 정말로 극도로 독했다면, 평생 볼 수 없을 뻔했으니 말이예요… 정말 큰일이 날 뻔 했어요…”맹 장군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봉구안의 눈이 다쳤을 때, 그 역시 걱정이 컸다.봉구안은 차분히 설명했다.“사모님,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스승님께서는 저희 집안 내에 있는 첩자를 잡으시려 했습니다.”“게다가 상대는 저 하나만 보내라고 해서…”맹 부인이 재촉했다.“그 첩자는 잡혔나요?”맹 장군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부인 걱정하지 마시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잡았으니…”맹 부인은 봉구안의 손을 꼭 쥐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상상도 못했구나. 천룡회가 장군부에까지 손을 뻗쳤다니!”“다행히도 구안이 네가 기민하게 문제를 파악했기에 큰일을 막을 수 있었어.”검은 옷을 입은 자객에게 들킨 후, 봉구안은 천룡회가 어떻게 자신이 맹 소장군의 정체를 알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그녀는 군영에서 지내던 동안 항상 조심했으며, 가면을 벗은 적이 없었다.그렇다면 문제는 아마도 장군부 안에 있을 터였다.맹 장군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부인, 나도 일조하였소.”“오백이 부인의 분장을 하게 하여 그들을 끌어낸 건 바로 나
산 정상은 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봉구안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그녀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이 자들을 상대하기에 맨손이면 충분했다.다만, 맹 부인이 적의 손에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잠시 뒤, 유천은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며 깨달았다.눈앞의 이 여인이 어째서 북대영의 전신이라 불리는지.그는 원래 조정의 장군들이란 대개 무능한 자들이며, 부하들에게 명령만 내리는 허수아비라 여겼다.그러나 이제야 깨달았다. 적어도 이 맹 소장군만큼은 진정한 실력을 가진 자라는 것을 말이다.유천은 자신의 부하들이 하나씩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급히 맹 부인 목에 칼을 겨누고는 봉구안을 향해 외쳤다.“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이 여인을 죽이겠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봉구안은 행동을 멈췄다.그 순간, 눈앞으로 영문 모를 하얀 가루가 뿌려졌다. 그 하얀 가루는 다름 아닌 독약이었다.그녀의 눈은 즉시 극심한 통증에 휩싸였다.유천은 이 틈을 타 다른 부하들에게 외쳤다.“모두 달려들거라! 저 년을 당장 죽여라!”하지만 눈이 다쳐도 봉구안은 여전히 소리를 통해 상대의 위치를 판별할 수 있었다.그녀는 상대의 공격을 민첩하게 피했다.유천은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빈틈을 찾으려 했지만, 이때 자신이 묶여 있던 기절한 맹 부인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몰래 손칼로 밧줄을 끊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산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유천은 싸움에 직접 뛰어들었다.그는 무공이 뛰어난 자로, 거대한 칼을 능숙히 다뤘다.시야가 흐릿한 터라, 봉구안은 주로 회피하며 맞섰다.갑자기 멀리서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이 소리는 그녀의 감각을 흐트러뜨렸다.그 틈에 유천이 허점을 파고들어 칼을 휘둘렀다!아무리 봉구안의 반응이 빨라도 왼팔은 칼날에 베여 피가 흘렀다.붉은 피가 그녀의 옷을 물들였다.봉구안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나뭇가지 높은 곳에는 피리를 든 한 여인이 서 있었다.그녀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손에는 옥피리를 쥔 채 달
맹 부인이 납치되었다. 범인은 한 통의 서신을 남겼는데, 반드시 소장군 본인이 직접 열어볼 것을 요구하였다.봉구안이 장군부에 도착했을 때, 스승은 정청에 앉아 얼굴 가득한 걱정으로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책을 고심하는 모습이었다.“스승님...”“이 편지, 네가 한 번 보거라.” 맹건은 그녀에게 서신을 건네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신은 이미 뜯겨 있었다. 봉구안은 서둘러 편지를 펼쳐 그 내용을 확인했다.요지는 다름 아닌, 그녀가 단신으로 오양산에 와야만 맹 부인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제가 가겠습니다!” 봉구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맹건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막았다.“냉정해지렴! 부인이 납치당했으니, 나라고 더 걱정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이렇게 무턱대고 가다간, 적들에게 너마저 넘어갈 뿐이다.”맹건은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인물로, 이는 명백히 봉구안을 노린 덫임을 간파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서신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아마도 천룡회 잔당들의 짓일 것입니다.”맹건은 고개를 끄덕였다.“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더욱 조급해할 필요 없다. 너도 이미 서신으로 알리지 않았더냐? 나와 부인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북방에 충분한 인원을 배치해둔 것도 알고 있다만...”봉구안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제 계획은 적을 유인해 섬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께서 이렇게 그들에게 잡혀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인을 지키도록 보낸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그녀가 이렇게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며 화를 내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맹건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가운 표정과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우리는 적을 맞을 준비를 충분히 했다. 하지만 적들 또한 바보는 아니지. 그들이 빈틈을 파고든 것은 불가피하다. 이미 벌어진 일이지 않느냐. 원망하고 탓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지금은 적들을 어떻게 격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