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침착하게 소욱의 말에 대답했다.“폐하께서는 황실의 명성을 중요시하고, 신첩도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능연이 저지른 죄만 공개하고 피해자의 신분과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서는 생략하시면 됩니다.”이렇게 해도 능연의 죄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소욱은 차갑게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래, 심사숙고했구나…”“짐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 공술서들을 황성 전지에 뿌릴 것이냐?”봉구안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부득이하지 않으면 신첩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폐하께서 능연의 죄를 정리해서 세상에 알린다면 요점만 알리 수 있지만, 만약 제가 세상에 알리게 되면 사실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때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겁니다.”협박 당하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게다가 소욱은 한 나라의 군주이다.소욱은 휙 하고 일어섰다. 온몸에 압박감이 휘몰아쳤고 궁전은 차갑고 잔혹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짐은 이미 능연에게 유배형을 처했다. 뭐가 더 불만이냐?”“능연의 죄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수모하려는 건가? 짐을?”총애하는 비빈이 큰 죄를 저지른 배후에는 군왕의 방임도 있었다.똑똑한 소욱은 봉구안이 그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라고 한 목적을 알아차렸다.봉구안도 부인하지 않았다.봉구안은 담담하게 소욱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능연의 잘못도 있지만 능연의 문제뿐만 아니라 황제의 총애가 있어 능연이 그런 짓을 했을 겁니다.”진한길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황후가 지금 황제를 비난하는 건가?’‘황후 정말 대단해!’봉구안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계속 말했다.“감추고 회피하는 것보다 잘못을 직시해야 합니다.”“황제의 총애가 능연의 의지였습니다. 폐하가 능연을 총애했기 때문에 설지 등 관원들이 떼를 지어 능연에게 달려들었고 그에게 뇌물을 선사했을 겁니다.”“그리고 은총을 독차지하려고 황후 자리까지 넘볼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신첩이 입궁하기도 전에, 신첩이 폐하의 총
곧 명령이 내려졌다.“여봐라! 황후를….”이때, 대전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황후마마를 모셔오라는 태후마마의 명이 있으셨습니다.”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반면 봉구안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마치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대단한 책사 납셨네.’소욱은 진한 살기가 요동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황후, 평생 태후궁에 살 수 있을 것 같더냐.”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에서 온화한 미소는 사라지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변했다.자녕궁.태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황후에게 말했다.“걱정 말거라. 내 평생 널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며칠 시간 끌어주는 것은 가능해. 허나….”태후는 얼굴의 미소를 지우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황상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며칠 시간을 끌려는 거라면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게야. 황후, 더 뾰족한 방법을 생각해야 해.”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취하고는 말했다.“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신첩은 이 기간 동안에 출궁을 할까 합니다.”태후와 황제는 그녀가 시간을 끌려고 자녕궁에 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상 그녀는 따로 계획한 게 있었다.자녕궁에 있는다는 것은 핑계고 궁 밖에 나가서 꼭 할 일이 있었다.태후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출궁을 한다고?”황후가 몰래 출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봉구안은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대전을 나가 편전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떠난 후, 계 상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태후마마, 황후마마께서는 무슨 일로 출궁하려는 걸까요? 태후께서 황후의 출궁을 도왔다는 걸 폐하께서 알면 크게 대노하실 겁니다.”태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황후는 골칫덩어리였던 능연이를 제거해 줬어. 출궁이 아니라 더 무리한 요구를 해도 최선을 다해 도울 거다.”얼마 전, 황후가 갑자기 자녕궁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태후에게 능연이를 제거
말을 마친 소욱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능연이는 바닥에 엎드려 절규했다.“안 돼!”“폐하! 신첩에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왜 이렇게 된 걸까?아무도 해독할 수 없다고 알려진 천수독이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능연이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이대로 유배를 가야 한단 말인가.“안 돼!”자진궁으로 돌아온 소욱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유사양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상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황제가 직접 죄명을 나열한 첩지를 공개했고 귀비가 유배를 당했다.사람들은 충격에 빠졌고 유사양도 마찬가지였다.소욱은 책상 앞에 앉아 속으로 청심주를 읊었다.이것도 그 여자객이 알려준 방법이었다.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시급했다.변방은 여전히 불안정한데 후궁에도 피바람이 불었다.황후를 떠올리면 괘씸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사가 나왔다.능멸을 당한 후에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밝히려는 여인은 흔치 않았고 그 사실을 자신의 부군에게 알리는 여자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세상 여인들이라면 모두 부군의 마음에서 깨끗한 형상으로 남길 원할 것이다.하지만 유독 황후는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밝혀냈다.그녀의 용기는 사내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그런 용기가 황제를 기만하고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다.소욱은 반복해서 속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순결을 잃은 황후를 정녕 이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단 말인가?아무리 그녀를 싫어하고 평생 품을 일이 없는 황후라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고 대외적으로 황제의 정실이었다.정녕 그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묵과할 수 있을까?황후를 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그 후로 그는 또 새로운 황후를 들여야 한다는 것이 현실이었다.다음 황후가 봉장미보다 더 잘한다는 보장이 없었다.그녀가 금인장을 잡은 후로 후궁은 질서 정연하게 돌아갔고 그녀처럼 비빈들을 질투하지 않고 조용히 본
봉구안은 먼저 옆방으로 가서 두 관병을 쓰러뜨린 뒤에 그들의 품에서 공문과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 영패를 챙겼다.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소욱은 결국 옛정을 봐서 능연이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유배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신분을 바꿔 다른 곳에서 살아갈 기회를 준 것이다.하지만 봉장미에게는 그런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봉구안은 공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쓰러진 능연이를 한참 노려보았다.능연이는 인적 없는 무덤가에서 정신을 차렸다.주변에서 시체의 악취가 풍기고 있었고 수풀 속에서 맹수의 눈빛이 언뜰거렸다.주변을 만져보니 뭔가 축축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겁에 질린 능연이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악!”그녀는 재빨리 기어일어나서 도망치려 했다.이때, 섬뜩한 검광이 그녀의 눈앞을 스치더니 발목 쪽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능연이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악! 누구야!”등 뒤에 있던 상대가 천천히 돌아 그녀의 앞에 다가와서 섰다.고개를 든 능연이는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봉장미! 너였구나!”야행복을 입은 봉구안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능연이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긴 머리는 위로 묶은 상태였고 허리춤에는 검집을 차고 있는 모습이었다.능연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너… 검술을 할 줄 알아?”귀족가에서 곱게 길러진 아가씨가 검술을 알다니!서서히 불안감이 찾아왔다.봉구안은 한쪽 무릎을 꿇고 매서운 눈초리로 능연이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저지른 짓들은 만 천하에 알려졌지만 난 복수를 내 손으로 하는 걸 더 선호해.”능연이가 흠칫 놀라며 뒤로 몸을 젖혔다.그리고 악에 받쳐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그걸 만 천하에 떠벌렸어? 피해자가 누군지 밝히지 않으면 사람들이 너인 걸 모를 것 같았어? 누군가는 눈치를 챌 거고 그럼 온 나라 백성들이 네가 당한 짓을 알게 될 거야! 넌 날 망친 동시에 너 자신도 망친 거라고! 폐하는 네 황후 지위를 폐할 거고 너 역시 나처럼 만인의 질타
능연이는 겁에 질려 온몸을 벌벌 떨었다.오백이 손을 풀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잠시 긴장을 추스른 능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봉가는 널 미래의 황후로 키운다고 어릴 때부터 겹겹이 보호했지. 혼례를 올리기 전 가끔 외출하는 것도 비밀에 부쳤어.”“그런 생각은 왜 안 해봤어? 내가 산적을 고용해서 널 해치려 했다고 해도 누군가가 네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난 네가 언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았을까?”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채월을 바라봤다.채월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마마, 능연이 말이 맞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아가씨께 아주 각별하셨죠.”채월은 능연이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말을 돌렸다.“아가씨께서 가끔 외출하실 때면 수행하는 호위는 모두 나으리의 심복이었고 마차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마차를 준비해 주셨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노선도 수시로 바꾸었고 저택 안에서 심복을 제외한 하인들조차 아가씨의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하지만 그 호위들은 모두 나으리께 충실한 자였고 그들 중에는 비밀을 누설할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다 죽고 살아 있는 사람은 소인뿐이고요. 나으리가 비밀을 누설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지요.”봉구안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저택 내부에 밀고자가 있다는 소리였다.“너한테 노선을 밀고한 자가 누구지?”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질문했다.능연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애원했다.“그 전에 기생집에 날 보내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런 곳엔 가기 싫어!”능연이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지만 봉구안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그녀는 다가가서 능연이의 팔뚝에 비수를 꽂고 세게 비틀었다.능연이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미친 년!”봉구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넌 나한테 뭔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어. 사실을 말하면 편히 죽게 해주지.”능연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이… 이거 놔!”“봉장미, 그날 산적들에게 그냥 널 죽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악!”봉구안은 다시 비수를
능연이를 처리한 뒤, 봉구안은 남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면을 썼다. 그리고 채월과 함께 봉장미를 만나러 갔다.봉장미는 송려가 돌보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구석에 숨어 있었다.봉구안이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오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그들이 그녀에게 남긴 상처는 영혼 깊숙이 뿌리내려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쓸쓸한 얼굴로 장막을 내려 시선을 가려주었다.그래도 다행인 점은 송려의 약을 먹고 봉장미의 건강 상태는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적어도 밤에 잠에 들 수는 있었다.다만 불안정한 정신 상태는 여전했다.약간 소리가 나도 그녀는 불안에 떨었다.봉구안은 채월을 방에 남겨둔 뒤, 송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송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외상은 치료가 가능하나 마음의 병은 어려울 것 같소.”봉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요 며칠 사이에 데리고 이곳을 떠날 생각인데 가능하겠나?”송려는 고개를 저었다.“절대 안 될 소리요! 아까 아가씨가 자네를 보고 기겁하는 걸 보면 아마 가는 길이 쉽지 않을 거요. 하물며 낯선 환경에 낯선 사람은 아가씨의 회복에 좋지 않소. 오히려 병증을 악화시킬 수 있소. 조금 더 기다렸다가 아가씨의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봉구안이 물었다.“얼마나 기다려야 하지?”“상황을 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선 최소 반 년이오.”봉구안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하지만 동생을 위해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능연이의 입에서 들은 내용들도 재조사가 필요했다.결국 돌고 돌아 봉장미가 납치당한 날부터 다시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형씨?”송려의 부름에 그녀는 그제야 생각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무슨 일이지?”송려는 그녀에게 약알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몽화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약이오. 지난 번에 자네가 가져온 약이 큰 도움을 주어서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소.”“원래는 10일에 한 알씩 100일 동안 복용하면 완전히 해독할 수 있
봉구안은 채월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일인데 이리 요란법석이냐.”오백이 답했다.“장군께서 시키신 대로 그 여자를 벙어리로 만들어 기루에 팔았는데요.”“거기 어멈은 늘 하던 대로 몸을 검사했었죠. 소인이 밖에서 기다리는데 그 어멈이 씩씩거리며 나오더니 소인을 마구 욕하는 거예요.”“장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나 가시나요?”봉구안은 부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오백은 그제야 말실수를 깨닫고 다급히 답했다.“어멈이 하는 말이 그 여자는 완전한 여자가 아니라 석녀라는 거예요!”그 말을 들은 봉구안의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석녀라니!사내의 시중을 들 수 없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으며 달거리도 없는 여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능연이의 달거리 기록도 조작된 것이었을 것이다.오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장군, 그 여자 폐하의 총비 아니었나요? 어떻게 석녀일 수가 있죠? 대체 그 여자는 무슨 수로 귀비의 자리까지 올라간 걸까요?”그는 황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 의심이 갔다.봉구안도 뜻밖의 소식이 당황스러웠다.합방을 할 수조차 없는 여인은 황제의 시중을 들 수가 없었다.아마 능연이는 이 사실을 가장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사실이 들통나면 그녀가 누렸던 과거의 총애와 영광들이 모두 헛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무덤가에서 채월에게 칼부림을 당할 때도 당황하는 티를 안 내다가 기루에 팔려간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반항했던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그녀는 아마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웠을 것이다.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능연이는 지금 어디 있지?”아마 기루에서도 석녀는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오백이 이를 갈며 답했다.“처음에 어멈은 절대 안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은화를 건네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받더라고요. 입만 살아 있어도… 괜찮다면서요.”봉구안은 고개를 돌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저 안에 능연이에게 능멸을 당해 미쳐버린 동생이 누워 있었다.용서받을 수 없
유사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폐하, 황후마마께서는 태후마마를 보살펴 드리고 계시온데… 혹시 태후께서….”소욱은 고개를 들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태후는 현명하신 분이다. 막무가내로 황후를 감싸고 돌진 않을 거다.”소욱은 이틀이면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했다.자녕궁.봉구안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다.이때,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황후마마, 폐하의 부름이 있습니다.”반 시진 후.봉구안은 장신구를 최대한 덜어내고 소백한 궁복을 입은 채, 황제의 서재를 방문했다.딱 봐도 용서를 구하러 온 모습이었고 사실도 그랬다.그녀는 공손히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죄 많은 신첩이 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스스로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면, 황궁의 법도대로 어떤 벌을 받을지 생각은 해보았느냐.”봉구안은 시선을 내리깔고 답했다.“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유사양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옆에 가서 섰다.그는 황제가 폐후 첩지를 쓴 것을 직접 보았기에 황제가 무조건 황후를 내칠 거라고 생각했다.원칙대로라면 폐후와 같은 중대사는 태후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하지만 원래 독단적인 황제이니 딱히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소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매정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달리 해명할 것은 없느냐.”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동요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신첩은 자신이 중궁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나이다.”소욱이 차갑게 말했다.“너는 항상 분수를 아는 여인이었지.”봉구안의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스쳤다.드디어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소욱이 입을 열려는 순간 대전 밖에서 급보가 들려왔다.“폐하, 남부 변경에 이변이 생겼다고 합니다!”봉구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북방의 양나라도 아직 미지수인데 남부에 또 일이 생겼다니!소욱은 싸늘한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명령했다.“일단 영화궁으로 돌아가거라.”“예.”서재를
“운산파, 풍고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소욱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며,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살한 기운을 느꼈다. 풍고는 술에 취한 듯 흐릿한 눈으로 소욱을 노려보았다.“여자군…”그 음흉한 말투에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풍고의 악명은 이미 다른 문파에도 퍼져 있었다. 수법이 음험하고 독해, 전진파의 제자조차도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평이 자자했다. 하물며 이번은 그의 첫 시합이기도 했기에 체력 면에서도 절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벽력당 측 인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이건 너무하잖소! 애초에 싸움이 되겠습니까!”운산파 부장문은 그저 태연하게 웃었다.“풍고도 우리 운산파의 정식 제자입니다. 어찌 출전하지 못하겠습니까?”벽력당 인사가 다시 차선아를 부추겼다.“차 부장문, 이걸 그냥 넘기시려는 것입니까? 운산파, 이건 명백한 갑질이 아닙니까?”다른 문파 사람들도 거들었다.“풍고가 손을 쓰면 죽든 다치든 뻔한 일입니다! 차 부장문, 정말 제자를 아끼신다면 지금이라도 막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술 대회 하나로 또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풍고는 혀로 입술을 훔치며, 소욱을 노려보았다.“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마음에 듭니다.”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겁먹고 물러섰을 상황이었다.하지만, 소욱이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해 수차례 친정했고, 봉구안과 함께 강호를 누비며 구중탑의 흉인, 천룡회 교주, 지하 투기장의 악인들까지 직접 상대해왔다.그런 자들에 비하면 풍고는 그야말로 하찮은 졸개에 불과했다.시합대 아래서 차선아가 걱정스레 소욱을 바라보다가 봉구안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멈출지 묻는 신호였다.봉구안은 소욱의 눈빛을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를 읽어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차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전진파는 시합을 계속하겠습니다.”운산파 부장문이 비웃듯 중얼였다.“정말, 승부에 제자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여자군.”시합이
비무대 위.소욱의 맞상대는 운산파 제자였다.그 눈빛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무언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관중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외쳤다.“전진파의 그 고수야! 어제도 혼자서 전진파 승리를 이끌었다더라!”“맞아, 나도 싸워봤어! 가면만 썼을 뿐, 체격이 어마어마했지. 여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은사성이 독을 써서 겨우 이긴 상대야.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도 계속 이겼을걸!”하지만 오늘 소욱에겐,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눈 한 번 깜빡할 틈도 없이, 상대의 검을 튕겨낸 소욱은 곧장 배를 노려 발을 찼다.“푸억!”상대는 땅에 구르며 쓰러졌다.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내가 졌단 말인가…”운산파 부장문이 벌떡 일어나,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무슨 짓을 한 거지… 단 한 합 만에 끝났다고?’그 이후로도 경기는 속속 이어졌다.하지만… 누가 올라와도, 결과는 같았다.소욱은 마치 무쇠처럼 단단했고, 폭풍처럼 매서웠다.불과 반 시진 만에 열 판을 내리 이겼다.심지어 피곤한 기색 조차 내비치지 않았다.부장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이대로라면… 운산파가 패배하고 말 거야!’더는 전진파가 이기게 둘 수 없었다.저 여인을 지금 당장 끌어내려야 했다.운산파 부장문은 부랴부랴 제자들을 내세웠다.그러나 출전하는 자마다, 줄줄이 무대 위에서 나가떨어졌다.“전진파, 승!”심판의 외침이 또다시 울려 퍼지자, 운산파 측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마저 할 말을 잃었다.“이게 말이 되나… 저 운산파 제자들이 당해내질 못하는군…”“벌써 열한 판째 연속으로 승리하고 있어. 전진파가 이 정도였어?”“차선아가 돌아온 이유, 이제야 알겠네. 저 고수 하나 믿고 온 거야.”“지금쯤 운산파 부장문,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겠지.”무대 위의 소욱은 검이면 검, 권이면 권. 허술한 틈 하나 없었다.이미 운산파 제자들의 버릇과 약점을 완전히 꿰뚫은 듯했다.이제 싸움은 더 이상 ‘승부’가 중요치 않았다.이 싸움은 소욱의
서여국에서 도착한 편지를 받아든 봉구안은 혹여 장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먼저 걱정이 앞섰다.서둘러 봉투를 뜯고 펼쳐 보니, 편지엔 어머니 봉 부인의 안부가 담겨 있었다.봉장미에 따르면, 봉 부인은 현재 병환을 앓고 있지만 크게 위중한 상태는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다만 현재 봉 부인은 남제 땅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다는 것이었다.봉구안에게 이 일은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억지로 머물게 할 이유도 없었다.봉 부인의 뜻이 정해졌다면, 곧장 사람을 보내 모셔오면 그만이었다.그녀는 곧장 붓을 들어 답장을 써내려갔다.어머니의 뜻을 존중하고, 직접 맞이하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편지를 막 봉했다 싶을 무렵… 방 안에서 소욱이 갈아입은 옷차림으로 나왔다.봉구안이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를 본 순간, 순간적으로 시선이 멈췄다.오늘 그가 입은 옷은 색감이 수수했지만, 오히려 그런 담백함이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긴 머리는 아직 묶지 않아 어깨 너머로 흘렀고, 뒷모습만 보면 전진파 제자라 해도 믿을 만했다.마치 세속을 벗어난 신선 같다고 해야 할까.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려 얼굴이 보이는 순간, 봉구안은 애써 눈길을 거뒀다.그만 보면 좋겠는데, 이상하게도 더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운산파.비무대회는 예정대로 이어지고 있었다.운산파 장문 구학이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된 채, 그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부장문이 대회를 관장하게 되었다고만 알려졌다.오전 내내 각 문파가 격돌했지만, 가장 큰 수확을 거둔 건 운산파였다.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우승에 한 발 더 가까워졌고, 비록 은사성이 사망했지만 그 자리를 채울 인재가 운산파엔 여전히 남아 있었다.그 사이, 벽력당은 가장 먼저 전멸한 상황이었다. 오직 신검종만이 한 번 운산파를 꺾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운산파가 이번에도 무림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그 순간, 전진파가 돌아왔다.산문이 열리자,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는 전진파 제자들이 줄지
“폐하, 조금 지칩니다.”봉구안이 조용히, 그러나 깊은 피로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소욱은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늘 강인하던 그녀가 이토록 나약하고 아득한 얼굴이라니.그는 이내 다가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봉구안은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움켜쥐었다.“사람을 살리고 싶었을 뿐… 저를 좋아하라고도, 대신 죽어 달라고도 한 적 없습니다.”“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소욱은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말했다.“그것이 바로 인연이 아니더냐.”“네가 선한 뜻으로 씨를 뿌렸기에, 그들이 너를 따르는 것이다.”“그리고 네가 살아 있다면, 더 많은 이를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봉구안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이내,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눈빛을 바로 세웠다.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객잔 밖으로 나섰다.가던 길을 멈춘 차선아를 향해 그녀가 소리쳤다.“끝은 내야하지 않겠느냐.”“전진파는 두 번만 더 이기면 된다, 얼마 남지 않았다.”차선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두 사람의 머릿결이 날리고, 봉구안의 음성이 그 틈을 뚫고 나왔다.“많은 이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물러서는 게 올바르다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그 판단이 옳지만은 않았던 것 같구나.”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네게… 말 못한 일을 하나 알려줄까 한다.”그다음, 봉구안은 약쟁이 사건의 시작과 끝을 차근히 풀어냈다.차선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운산파가 그런 일에 가담하고 있었다니요…!”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차선아에게 맡겼다.“약쟁이는 나라를 좀먹는 독이다.”“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어. 더는 미룰 수 없다.”“전진파가 물러설 수도 있겠지만… 다른 선택도 있지 않겠느냐?”차선아는 그녀의 말을 끊고 나섰다.그 눈빛은 한겨울 설산처럼 차갑고 단단했다.“저희가 걷는 길은 정도입니다.”“황후마마. 이토록 중대한 일이라면… 누구도 물러서선 아니 되지
방 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이는 운산파 장문 구학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대신한 엄 장로였다.장막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기마저 서려 있었고, 그의 머릿속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버지의 모습만이 맴돌았다.이불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눈엔 증오가 고였다.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하지만 복수만 좇다간, 남겨진 것을 모두 잃게 될 터였다.운산파를 지키는 것 또한,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람을 약인으로 만들어 팔아넘긴 자들. 그들이 운산파를 더럽혔다.그 뿌리를 반드시 끊어내리라.그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낼 것이라 다짐하였다.……밤은 깊어졌다.운산파에 머무는 외부 문파 제자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혹시라도 운산파 측이 음식을 통해 무언가 꾸민 건 아닐까.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전진파는 하나의 방에 모여 있었고, 그 옆 방엔 벽력당 제자들이 자리했다.정원아의 죽음으로 침통해 있던 그들은 이 와중에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마음이 더 뒤숭숭해졌다.“부장문님… 비무대회, 계속 나가야 하나요?”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 말은, 결국 포기를 암시하는 질문이었다.차선아는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내공을 다스리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하산한다.”방민이 벌떡 일어섰다.“부장문님! 두 경기만 더 이기면 결승이에요! 지금 포기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걸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겁니다!”차선아는 조용하면서도 슬픔이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강호는… 편안하지 않아. 원아는 이미 죽었다.”“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구나.”운산파에 벌어진 일은 소환을 움직였고, 그것은 곧 조정이 직접 나섰다는 뜻이었다.강호와 조정은 본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으나… 이번엔 그 선이 무너졌다.운산파가 저지른 일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이 상황에서 운산파에 머무른다는 건, 전진파도 위험에 휘말릴 수 있다는
봉구안의 느닷없는 한마디에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소욱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고,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닭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화로 옆에서 막 비둘기를 집어 들려던 강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급히 손에 들린 걸 들어 보이며 정정했다.“아니, 말했잖소! 이건 닭이 아니라 비둘기라 하지 않았소?”“그것도 제일 비싼 ‘비천비’라오!”“설마…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혹시… 독이라도 들어간 아니겠지?”강림은 당황한 얼굴로 비둘기를 얼른 내려놓았다.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건 괜찮소. 자네 비둘기 말고… 내가 말한 건 죽산진의 닭이었소.”그녀는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약인독에 꼭 들어가는 약초 중 하나, 홍련초를 다들 기억하시오?”열무신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당연히 기억합니다. 그걸 조사하려고 죽산진에 사람도 남겨뒀는데…”“잠깐, 마마의 말씀은 혹시…”그는 말을 멈췄다.이미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 말인즉, 지금까지 우린 누가 홍련초를 사 갔는지 뒤쫓고 있었지만, 사실 그 약초 자체가 아니라, 그걸 먹고 자란 닭이 진짜 목표였다는 거로군.”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소. 확인이 필요하겠지.”애초에 그녀도 이런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강림이 기르던 ‘비천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죽산진의 닭들이 떠올랐다.비둘기가 특별한 먹이를 통해 효능을 갖게 된 것처럼, 홍련초를 먹은 닭도 무언가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장 소탁에게 전하게. 죽산진에서 유통된 닭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전부 조사하라고.”“알겠습니다.” 봉구안이 짧게 대답했다.이 와중에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한 명… 강림뿐이었다.그는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모두를 쳐다봤다.“…도대체 무슨 소리오? 홍련초가 뭐고, 닭은 왜
소욱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도대체 구안이 준비한 선물이란 게 뭘까.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옥패 하나가 곱게 들어 있었다.투명하게 빛나는 그 옥패는 희고 맑았고, 묘하게도 그의 기품과 잘 어울렸다.황제의 자리에서 진귀한 보물쯤은 셀 수 없이 봐왔지만… 이건 달랐다. 봉구안이 직접 고른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했다.그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좀 촉박했어요. 이 정도밖에 못 구했네요.”소욱은 아무 말 없이 옥패를 목에 걸었다.곧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래도 내 탄신일을 잊지 않았구나. 고맙다.”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그 정도로 기억력 나쁘진 않아요.”소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런 정색스러운 대답 말고, 자기가 듣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그냥 자신이라서, 자신의 탄신일이라서 기억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그는 그녀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똑, 똑.하필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폐하, 강림이 돌아왔습니다!”……원래 강림은 상단을 이끌고 강호를 떠돌고 있었지만, 강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달려왔고, 마침내 때를 맞춘 셈이다.“휴, 아직 안 떠났군!”강림은 선홍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자줏빛 금관을 썼다. 허리에는 값비싼 옥이 매달려 있고, 발에는 자수가 놓인 검은 장화를 신었다.걸음마다 은은한 향과 함께 사치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동방세는 그와 익숙한 사이인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강주 행은 자네의 덕을 많이 봤네. 이 객잔을 쓸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네.”강림은 손을 휘휘 저으며 쿡 웃었다.“뭘 그런 걸 갖고 그래. 형제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소? 아, 폐하께서도 계시다던데?”그는 시선을 넘겨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봉구안 곁에 앉은 소욱을 발견하자, 급히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강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뭐라고요? 가짜라고요?”문을 지키던 제자는 크게 놀라 얼굴이 새파래졌다.관리가 가짜라면, 그럼 장문님은? 장문님이 지금 위험하다는 것이 아닌가!그들은 급히 이 사실을 부장문에게 보고했다.한편, 부장문은 각 문파 인사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장문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술 대회도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부장문님!”한 제자가 급히 뛰어왔다.부장문은 사정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가짜라니?그들이 가짜 관리였단 말인가!그는 즉시 정예 제자들을 소집해 추격을 지시했다.그러나, 오백과 은칠은 이미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열무신의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비밀이 밝혀졌다.구학이 마침내 자백했다.자신이 직접 사부인 엄청송을 죽였다고…이 소식을 들은 엄 장로는 분노에 차 방으로 뛰어들었다.이미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구학이었지만, 엄 장로는 여전히 분을 삭일 수 없었다.그는 구학의 목을 움켜쥐고 외쳤다.“왜! 왜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그분은 사형의 스승이자, 사형을 친아들처럼 길러주신 분이셨습니다! 어찌 양심이 이리도 다 썩어 문드러질 수 있냐 말입니다!”구학은 이미 이가 여러 개 빠져,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그러면서도 힘겹게 웃었다.“그야… 스승님이 멍청했기 때문다.”“그 분은 단순히 병에 걸렸을 뿐이었다. 치료하면 나을 수 있었지...”“하지만 그 분께서 약쟁이와 인신매매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를 관청에 고발하려 했고…”“게다가 내게 준 장문 자리까지 빼앗으려 했어… 난… 난 스승님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엄 장로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이 악랄한 놈!”얼마 지나지 않아, 엄 장로가 방에서 나왔다.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 안에는 봉구안과 소욱도 있었다.엄 장로의 얼굴에는 웃음과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
열무신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안에서는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폐하! 저를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소욱은 문 밖에서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학이 결코 무고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열무신이 직접 심문하는 편이 나았다.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입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같은 시각, 운산파.운산파 제자들은 산문을 지키며 장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비무대회가 중단되자, 다른 문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벽력당에서 비꼬듯 말했다.“운산파는 어쩜 이렇게 말썽이 많은가? 저 구 장문이 정말로 엄 장문을 살해했다면, 운산파는 비무대회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맞소!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악한 문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소!”운산파 제자들은 즉시 반발했다.“우리 장문께선 그런 일을 하신 적 없소! 입 조심하시오!”운산파 부장문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외쳤다.“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오!”그러나 다른 문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이 사건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차 부장문, 어떻게 생각하시오?”그들은 전진파의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운산파를 제외하면, 비무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전진파였으므로, 그녀 역시 속이 탈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차선아는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그들이 전진파를 자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다시 운산파를 향해 몰아세웠다.“결국 문제를 일으킨 건 운산파 아니오. 차라리 대회에서 물러나시오! 우리를 마냥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운산파 제자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기다리기 싫으면 떠나시오! 우리 운산파는 붙잡지 않소!”“너희들…!”운산파 제자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문파들은 더욱 분노했다.그러나 운산파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문하 대제자가 부장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