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누구세요?”“안나야...”이 부드러운 호칭을 듣자 내 마음은 또 긴장되었다.하석진이었다.하석진은 상처받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내 전화도 받기 싫어진 거야?”“무슨 일로 날 찾았어?”사실 그동안 나와 하석진은 명확한 커플은 아니었다.서로에 대한 약속도 없이 알 수 없는 풋풋한 감정일 뿐이었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항상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어젯밤... 너 괜찮아?”내가 어젯밤에 냈던 비명과 통제되지 않는 신음을 그는 다 듣고 무슨 일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 성인 남녀 간의 정상적인 일이잖아.”하석진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한동안 그의 나지막한 숨소리만 들렸다.예전에 나는 그와 서로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 감정이 우리 둘에게 족쇄와 짐이 되었다.나는 전화를 끊고 싶었다.“다른 일 없으면...”“안나야, 나와서 한번 만나자.”갑자기 입을 연 그의 말투에 슬픔이 더해졌다.나는 참기 어려웠지만 하지원의 경고를 떠올리며 거절했다.“미안해. 오늘 밤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쉬고 싶어.”“허...”그는 쓴웃음을 지었다.“나랑 한 번 만나주는 것도 안 되는 거야? 우리 사이가 정말 불가능하더라도 분명히 말해야 하지 않겠어?”맞는 말이었다. 이 일은 확실히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그래야 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끊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하지원의 경고는...“안나야, 나와서 한번 만나자. 네가 나를 따로 만나기 싫은 것을 알고 단비도 불렀어.옛 동창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모여도 되지 않을까?”말투가 비굴하고 슬퍼서 내 마음이 미안하고 괴로웠다.“그래, 주소 줘.”주소는 찻집이었다.내가 갔을 때 조단비와 하석진은 이미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안나야, 서서 뭐 해. 이리 와.”하석진이 나를 보고 얼른 다가와서 끌어당겼다.나는 그의 손을 피해 조단비의 옆에 앉았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는데 그 표정으로 나는 미안함과 허
하석진은 그윽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살짝 조였다.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미안해.”하석진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사과할 필요 없어.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나를 배신한 게 아니야.”나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하석진이 이 말을 할 때 그 부드럽던 눈동자에 음험하고 차가운 눈빛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럴 리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하석진은 한 번도 쌀쌀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는데 어찌 그런 눈빛을 할 수 있을까?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을 거라 생각했다.조단비는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안나야, 너 어떻게 하지원을 좋아할 수 있어? 그때 하지원은 비열한 수단을 써서 너와 결혼했어. 우리가 얼마나 미워했는데 넌 어떻게...”“하지원과 결혼한 지 3년이 지났고 많은 일이 발생했어. 그리고 감정에 관한 일을 누가 알 수 있겠어?”“그렇다면 너희들 왜 이혼했어?”하석진은 갑자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에 놓인손을 꽉 움켜쥐었다.“하지원이 사업이 잘되니 앙심을 품은 거잖아. 이젠 성공했다고 안나를 차버렸어.”“그럼 넌 지금 어떤 신분으로 하지원과 함께 있는 거야?”하석진은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 문제에 대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만약 내가 애인의 신분으로 하지원의 곁에 남아 수모를 받는다는 걸 알게 되면 단비는 아마 칼을 들고 하지원의 회사에 쳐들어갈지도 모른다.원래는 그들에게 모든 일을 깨끗하게 설명하려고 왔는데 지금 보니 아예 설명할 수도 없고 또 말을 다 할 수도 없었다.하석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 오늘 아저씨와 아줌마 뵈러 갔었어.”“응? 아빠 엄마를 보러 갔어?”나는 의아해서 물었다.“두 분은 아직 형이 너와 이혼한 줄 몰라. 그리고 너의 집 빚도 형이 갚아줬다고 했어. 그래서 안나야, 형이 널 원하지도 않는데 네가 명분 없이 형의 옆에 있는 건 신세를 갚기 위해서야?”“난...”
나는 순간 얼음처럼 굳어졌다.‘이 소리! 이 웃음소리! 하지원인가? 재수 없이 가는 곳마다 하지원을 만날 수 있다니. 망했다.’양복 차림을 한 하지원이 도도하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는데 담담한 눈빛에도 위압감이 배어 있어 보는 사람이 두렵게 했다.예전에는 어린 양처럼 순하고 착했지만 이젠 패기와 위압감이 넘쳐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영혼을 갈아치운 것처럼 변화가 너무 큰 이 남자를 보고 나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항상 하지원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에 대해 말할 때마다 씩씩거리던 조단비도 하지원의 위엄에 겁을 먹었는지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하석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형, 병원에 있는 거 아니야?”‘어라? 하지원이 병원에 갔었어? 다쳤어?’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훑어보며 다친 곳이 있는지 살펴봤다.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밤마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이 다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그렇다면 단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그의 여신이 병원에 있다 보니 병문안을 한 게 틀림없다.‘어쩐지 요즘 따라 굶주린 늑대처럼 나와 잠자리를 가지더라니, 알고 보니 여신이 다쳐서 만족하지 못했군.’헛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하지원은 이미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그가 나를 바라보는 음산한 눈빛에 나는 저도 모르게 등이 오싹해졌다.내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조단비는 귓속말로 속삭였다.“우리에게 괴롭힘을 받던 하지원이 맞아? 분위기가 너무 많이 변해서 난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겠어. 역시 사람은 출세하면 바뀌나 봐.”어찌 분위기만 바뀌었을까? 몸매와 얼굴만 빼고 다 변했다.나는 조단비를 향해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원은 음산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하석진이 아까 말한 말을 계속해서 물었다.“너 방금 안나 대신 돈을 갚아주겠다고 했는데 그럼 무슨 자격으로 갚아줄 거야?”하석진은 부드럽게 나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안나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갚아주길 바란다면 그 자격으로 갚아줄 거야.”“쳇!”
분위기가 한창 긴장되었을 때 하석진이 갑자기 하지원에게 물었다.“말해봐. 안나네 가족을 위해 얼마나 갚아줬어? 내가 늦게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 돈은 형이 대신 갚아줄 필요 없었어.”“그래? 내가 아니더라도 너일 순 없어.”하지원이 차갑게 웃었다.“그건 모르지. 내가 국내에 있었다면 안나는 분명 나부터 찾았을 거야.”하석진은 긍정적으로 말했다.하석진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모른다. 가설적인 질문에는 항상 확실한 대답이 없었다.하지원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 그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두드렸는데 시큰둥해 보였지만 실은 냉기가 감돌았다.분위기는 점점 더 팽팽해졌다.하지원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따라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나는 그의 팔을 껴안고 비위를 맞추느라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밥은 먹었어? 아니면 우리 집으로 돌아갈까? 오늘 너를 위해 특별히 요리했거든.”하지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집으로 돌아가자고?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누군가를 만나려고 달려왔는데 순순히 돌아가고 싶겠어?”이 말에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쨌든 그가 본 것은 이러한 것이니 내가 설명하더라도 거짓말처럼 들릴 것이다.하지원은 무뚝뚝하게 내 손을 뿌리친 후 웃는 듯 마는 듯 시큰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나타나 여러분의 즐거운 분위기를 망쳤네.”그런 후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일어나서 떠났는데 우람진 뒷모습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기가 배어 있었다.나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으나 하석진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안나야, 왜 비굴하게 형의 비위를 맞추려고 해? 넌 예전에 이러지 많았어.”조단비도 한숨을 내쉬었다.“안나를 탓할 것도 아니야. 하지원이 출세해서 예전과 달라졌어. 내가 봐도 이렇게 무서운데 하물며 안나는 빚을 졌잖아.”“얼마나 빚졌어? 내가 대신 갚아줄게.”하석진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내가 하지원을 좋아한다고 직
“담배 피우고 가려고 했어.”예전에 그는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담배 중독이 심한 것 같다.정서와 욕망을 참을 수 있었던 사람이 담배 중독을 어떻게 참았는지 나는 궁금해졌다.그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든 쥔 손을 핸들에 가볍게 얹었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앞을 바라보던 그의 얇은 입술에서는 연기가 흘러나왔는데 매혹적이고 섹시한 매력이 엿보였다.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정신을 차리며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 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려.”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바라봤다.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누가 너더러 차에 오르라고 했어. 내려가!”‘이, 이건...’나를 기다리느라고 떠나지 않은 줄로 알았던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고 떠난다’라는 말이 핑계인 줄 알았다. 담배를 피우면서도 운전할 수 있지 않은가?나는 말이 없이 눈치껏 차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는데 이때 그는 갑자기 나를 확 잡아당겼다. 그 힘이 너무 세서 나는 의자에 세게 부딪혔고 머리까지 아찔해졌다.남자의 숨결이 다가오더니 곧 나에게 키스했다.옅은 담배 냄새가 섞인 이 키스는 열광적이고 난폭하며 또 남자의 포악함을 띠고 있었다. 거센 키스에 입술이 아파 난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밀쳤다.그제야 그는 나를 놔주며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내 경고와 벌은 너에게 전혀 쓸모가 없는 것 같아. 어쩐지 매일 히죽거리며 언제 돌아오는지 묻더라니? 결국 하석진을 만날 틈을 노린 거였네!”“그게 아니야. 난 하석진을 만나기 싫었어.”하지원은 코웃음을 쳤다.“결국 만나러 나왔잖아?”‘그래... 내 설명은 아무런 힘이 없네.’나는 아예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원은 갑자기 내 턱을 움켜쥐었는데 힘을 써서인지 아주 아팠다.이 장면은 신혼 밤을 떠올리게 했다. 결혼한 그 날 밤 나도 이렇게 그의 턱을 잡으며 모욕을 줬다.나는 힘껏
그러나 그는 나를 놓아줄 기미가 없이 여전히 악랄하게 물었다.“만약 그때 하석진이 국내에 있었다면 넌 정말 찾아가서 돈을 빌리고 그의 여자가 되었을 거야?”“그럴 수 없어!”그때 하석진을 찾아가든 말든 지금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대답하면 그를 기쁘게 해서 적어도 나의 턱을 그의 손가락에서 떼어낼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는 화를 버럭 냈다.“도안나! 하석진이 너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 그때 널 접근한 것은 단지...”“그만해!”나는 짜증이 났다. 한 사람은 하지원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하석진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했다고 말했다.‘왜? 난 진정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저 농락당하는 노리개일 뿐이야?’하지원은 나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는데 악마처럼 무서운 웃음이었다.그는 나의 턱을 놓고 뒤로 기대며 또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나를 향해 쌀쌀하게 웃었다.“하석진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안달이 났어?”“그것 때문이 아니야.”나는 몸을 곧게 펴며 그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애인 계약이 끝나기 전에 너에게 미안한 짓을 하지 않을 거니까.”“그럼 계약이 끝나면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한다는 거야?”“그렇지도 않아.”“그걸 누가 믿어?”“믿지 못하겠으면 관둬! 게다가 계약이 끝나면 우리 둘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내가 누구랑 함께 있어도 너에게 미안하지 않아.”나는 조용히 말했다.이 말을 하자마자 나는 후회했다.‘이 말 때문에 나와 애인 관계를 끝내지 않으면 어떡하지? 젠장! 화를 내다보니 생각없이 내뱉었어.’하지원은 좁고 긴 두 눈을 천천히 가늘게 뜨며 그 사이로 위험하고 차가운 눈빛이 반짝였다.나는 얼른 차 문을 잡아당겼다.“택시 타고 갈게. 네 앞에서 얼씬거리지 않을게.”이번에 그는 나를 잡지 않고 그저 음산하게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은 마치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
나는 한눈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를 보고 안색이 돌변했다.“어떻게 된 거예요? 누가 때렸어요?”엄마는 울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어쩔 수 없이 아빠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는데 아빠도 침대에서 신음만 낼 뿐 말이 없었다.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말해보세요. 대체 누가 때렸어요? 예전에 빚을 졌던 사람이에요?”내가 조급해하며 얼굴을 붉혀서야 엄마는 울먹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이게 다 실은 네 아빠 탓이야. 도박에 빠졌어.”“뭐라고요?”나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봤다.“도박하러 갔어요? 예전에는 그따위 짓거리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런 것이 망신이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도박하러 가세요?”“나도 조금이나마 돈을 벌어서 재기하고 싶어서 그랬어. 운이 이렇게 나쁠 줄 어떻게 알았겠어? 분명 그놈들의 작간이야.”아빠는 억울한 듯 말했다.나는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그럼 이 상처는 어떻게 생겼어요?”아빠는 미안한 눈빛으로 엄마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엄마는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도박에서 다 잃었을 뿐만 아니라 몇억 빚을 졌어. 돈을 물지 못해서 그놈들이 네 아빠를 때린 거야.”나는 화가 난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심호흡을 한 후 아빠를 바라봤다.“도대체 얼마나 잃었어요?”아빠는 미안해하며 고개를 숙이자 엄마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하지원이 준 20억을 포함해서...”“뭐라고요? 지원 씨에게 돈도 달라고 했어요?””아니야... 그때 우리 집 빚을 갚아준 후 20억을 더 줬어. 난 이 20억을 본전으로 도박해서 몇 배 더 벌면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히려 14억 빚을 졌어...”아버지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아빠! 도박으로 부자 되는 거 봤어요? 왜 이렇게 어리석어요? 34억이나 잃다니, 얼마 되지도 않아 34억을 도박해서 잃다뇨!”“됐어. 버릇없이 굴지 마. 이렇게 아빠를 탓하다니! 몇십
아마 곧 내가 하지원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한때 부잣집 아가씨였던 내가 우스개가 되어 가십거리가 되겠지.부모님은 믿지 못하고 정말 하지원과 이혼했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나의 확실한 대답을 들은 아빠는 하지원은 물론 가족까지 포함해서 욕설을 퍼부었다.오빠는 옆에서 쌀쌀하게 말했다.“이미 우리를 도와 빚을 청산했고 20억도 줬는데 뭘 더 바라세요? 저희가 예전에 어떻게 대했는지 잊었어요? 지금 이렇게 도와준 것만 해도 잘한 셈이에요.”“하지만 출세했다고 조강지처인 안나를 버리면 안 되잖아.”엄마도 씩씩거리며 말했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안돼요? 절 좋아하지도 않고 저한테 빚진 것도 없으니 절 버리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엄마는 나의 말을 듣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아빠는 그제야 당황해서 서둘러 나에게 물었다.“하지원과 이혼했다고 해서 14억을 달라고 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 안나야, 아빠를 도와줘. 응? 3일 후면 그들이 돈 받으러 올 거야. 아빠는 손목이 잘리고 싶지 않아.”엄마도 나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그래, 안나야. 제발 아빠를 도와줘. 하지원한테는 돈이 많으니 옛정을 봐서라도 네가 입을 열면 꼭 줄 거야.”옛정? 이 말을 들은 나는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저와 지원 씨가 언제 정이 있었어요?”아빠와 엄마는 여전히 나를 타이르며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했다.오빠는 보다못해 소리쳤다.“그만 하세요. 안나도 사람이고 우리 집의 귀여운 막내자 한때는 부잣집 아가씨였어요. 어떻게 부모로서 안나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하지원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빌게 할 수 있어요?”엄마가 입을 가리고 통곡하자 아빠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실룩거렸다.오빠는 계속해서 덤덤하게 말했다.“안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사흘 간 내가 열심히 돈 벌더라도 아빠의 도박에 빠진 손을 지켜드릴게요. 그럼 됐죠?”말을 마친 후 오빠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아파트 단지에 내려온 후 오빠는 눈물범벅이 된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 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상민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죽고 싶어? 하 대표님의 여자도 감히 탐내?”“뭐라고? 하 대표님의 여자라고?”그 친구는 안색이 변하며 스스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안 볼래. 바로 나갈게.”그 남자는 줄행랑을 놓았다.나는 육상민에게 다가가서 진지하게 말했다.“앞으로 제가 하지원 씨 여자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지원 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지원 씨가 사랑하는 여자가 알면 큰일 나요.”“네? 지원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안나 씨 아니에요?”육상민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다가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잘생긴 얼굴에는 어색한 표정이 역력했다.아마 하지원의 마음속에 여신이 있는 줄 몰랐을 거라고 짐작한 나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지원 씨가 사랑하는 여자는 저일 수 없어요.”말을 마친 후 나는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육상민의 의혹에 쌓인 혼잣말이 들려왔다.“안나 씨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저는 지원이가 그렇게 비천한 모습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어요.”육상민의 말을 들은 나는 웃음이 났다.하지원이 내 앞에서 비천한 모습을 한 것이 나를 좋아해서일까? 데릴사위가 되어 권력도 돈도 지위도 다 가지고 싶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아직도 비천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다. 이젠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어르신처럼 나의 시중을 받고 있고 내가 시중을 잘하지 못하면 얼굴이 일그러졌다.아무튼 나는 하지원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사실 내가 하지원이었다면 나를 그렇게 억압하고 학대했던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나는 하지원보다 더 잔인하고 냉혹하게 나를 억압했던 모든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그래서 비교해보면 하지원은 나에게 정말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나에게 매혹적인 메이크업을 해 주었는데, 그 메이드복과 함께 어울리니 더욱 야릇한 분위기가 이루어졌다.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힐끗 보고는 눈길을 돌렸다
“정말 지원에게... 말하지 않을 거예요?”“필요 없어요.”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육상민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하지원이 안성시에서 출장 중인 것을 몰랐다면 나는 그가 현장에 있는 거로 착각할 뻔했다.육상민은 얼른 사람을 시켜 옷을 가져오라 했는데 나는 이 옷을 보자 입을 크게 벌렸다.“저기... 혹시 옷을 잘못 가져온 게 아닌가요?”육성민이 사람을 시켜 가져온 옷은 성욕을 자극할 수 있는 섹시한 메이드 복이었다.미니스커트에 검은색 양말을 신어야 하는 이 옷은 아무리 봐도 춤을 출 수 있는 의상이 아니었다.육성민은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다 이런 옷이에요. 그나마 안나 씨를 위해 제가 특별히 제일 예쁘고 보수적인 옷을 남겼어요.”믿을 수 없었던 나는 밖으로 나가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정말 그랬다.다른 사람의 옷은 더 노출이 심했고 심지어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비키니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육성민은 나를 향해 웃었다.“이젠 믿을 수 있어요? 이 옷이 제일 보수적이에요.”나는 그래도 믿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이게 정말 댄스 대회가 맞아요?”“그럼요. 잠시 후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출 거고 관객들이 투표할 거예요. 득표수가 제일 많은 사람이 우리가 준비한 6억 상금을 가질 수 있어요. 그래서 안나 씨, 6억 상금을 받고 싶으면 열심히 춤을 춰야 해요.”이제야 나는 이것이 단순하고 정규적인 댄스 대회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전문적인 심사도 없었다. 득표수가 많아지려면 춤을 잘 춰야 할 뿐더러 관객들의 환심을 사야 했다.내가 머뭇거리자 육상민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참가하기 싫으면 가셔도 돼요. 6억일 뿐인데 이 돈은 지원이에게 애교만 부려도...”“참가할래요.”나는 육상민의 말을 끊어버렸다.나는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하지원에게 더는 손을 내밀지 않으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나와 하지원의 현재 관계로 내가 손을 내민다는 건 수모를 자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육상민은 껄껄 웃었다.“결정했으면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이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는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나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화내지 마. 난 정말 안성시에 가기 싫어.”내일 댄스 대회에 참가해 6억 상금을 타야 했던 나는 안성시로 갈 수 없었다.하지원은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1분 동안이나 음산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라 바라봤다.불안해진 나는 손가락을 꼬며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운 그는 담배를 비벼 끄며 담담하게 말했다.“가기 싫으면 가지 마.”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몸을 곧게 펴고 밖으로 나가다가 내 옆을 지나갈 때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없어도 얌전하게 있어. 날 화나게 하는 짓을 하지 마.”“응. 말 잘 들을게.”나는 약속했다.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곧장 나갔다. 화가 나서인지 그는 온 밤을 서재에서 보냈다.오미수 아줌마는 인삼차를 우린 후 나더러 하지원에게 가져다주라 했다.그의 비위를 맞추는 게 맞는 다고 생각한 나는 환하게 웃으며 인삼차를 가져다주는 나에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따뜻할 때 빨리 마셔야 한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방에 돌아온 후 침대에 누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머릿속에는 예전에 하지원을 못되게 굴던 짓거리가 생각났다. 예전에 그는 나에게 잘 보이려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지만 나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지금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나의 자업자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다음날 눈을 떠보니 하지원은 이미 떠났다.이튿날 아침 일찍이 출장 가는 것을 알면서도 일어나 배웅하지 않는 나를 보고 오미수 아줌마는 내가 양심이 없다고 했다.그러면서 하지원이 떠날 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내가 배웅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나는 오히려 오미수 아줌마가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여신이 배웅해주면 좋아하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의 여신이 아니다. 내가 배웅하면 그를 화나게 할 것이 뻔하다.오후에 나는 육상민에게 문자를
의아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그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또 왜 그래?”하지원은 날카로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댄스 대회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혹시 너도 지원했어?”“아니, 아니야...”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하지원은 쌀쌀하게 웃었다.“아니면 다행이야. 이건 네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거든.”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댄스 대회일 뿐인데 내가 왜 참가할 수 없다는 걸까?그러나 지금은 더 깊이 물어볼 수 없었다.하지원은 나에게 경고를 한 후 또 전화를 받았는데 그의 여신이 걸어온 전화인 것 같다.그는 전화 받으면서 창가로 걸어갔는데 말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여태껏 나에게 한 번도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를 쓴 적이 없다.두 사람이 달콤하게 대화하는 것을 듣기 싫었던 나는 욕실로 갔지만, 욕실에서도 하지원이 내일 안성시로 출장 간다고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그럼 내일 댄스 대회를 볼 수 없겠지?’이렇게 생각한 나는 안심했다.하지원이 여신과 통화를 마친 후 그녀를 찾아갈 줄 알았는데 내가 목욕을 하고 나와보니 그는 여전히 방에 있었다.창가에 기대에 담배를 피우면서 넋을 잃고 창밖을 보고 있는데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 같다.나는 감히 방해하지 못하고 살금살금 침대로 갔다.“이리 와!”침대 끝에 다다르자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멍해 있다가 돌아서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앞에 서자마다 그는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껴안으며 나를 품에 안았다.담담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나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우울한 기색이 드리웠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치 온순한 하지원으로 돌아간 것 같다.그는 말없이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봤는데 그윽하고 집중적인 시선에는 깊은 정이 엿들어 있는 것 같았다.만약 그가 마음속에 여신을 품지 않았다면
나는 황급히 부인했다.“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어찌 그런 남자랑 바람이 날 수 있겠어. 절대 아니야.”하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믿지 않는 눈치였다.나는 정말 후회했다. 하지원이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았으면 육상민의 전화를 받도록 내버려 둘걸 그랬다고 생각했다.마침 이때 육상민의 전화가 또 걸려오자 하지원은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봤다.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어서 받으라는 손짓을 했다.그는 차갑게 웃으며 수신 버튼을 누르더니 일부러 스피커를 열었다. 육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젠장, 두 번이나 해서 전화를 받다니. 왜? 좋은 일을 방해했어?”하지원은 나를 힐끗 보다가 코웃음 쳤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전화기 너머로 육상민의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무정하게 굴지 마. 난 널 괴롭히던 도안나가 아니야.”나는 어색해서 콧등을 만졌다. 내가 하지원을 못되게 대했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원이 나를 향해 차갑게 웃자 나는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그는 시큰둥하게 말했다.“무슨 일로 전화했어? 용건이 없으면 끊어.”“아이참, 잠시만. 내일 댄스 대회가 열리니 구경하러 와.”“안 가.”하지원이 단칼에 거절하자 나는 오히려 시름을 놓았다.이 육상민도 참, 내가 댄스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면서 또 하지원이 참가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마치 하지원이 내가 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모를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말이다.“내일 와봐. 서프라이즈가 있어. 중요한 서프라이즈.”육상민은 아직도 하지원을 설득하고 있었다.“관심 없어.”하지원이 담담하게 말했어도 육상민은 계속해서 요청했다. 하지원은 아예 전화를 꺼버렸다.나는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 댄스 대회에는 미녀들만 참가할 수 있다고 하던데 너 정말 안 가볼 거야?”하지원은 눈썹을 치켜들었다.“왜? 넌 가보고 싶어?”나는 고개를 저었다.하지원은 내 옆에 앉으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구경하고 싶으면 널
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졌다.‘설마 육상민이 입 가볍게 내가 댄스 대회에 지원한 것을 하지원에게 알려주는 건 아니겠지?’비록 이 일은 비밀이 아니고 하지원에게 알려줘도 상관없다. 하지만 변덕스럽고 나에게 원한이 많았기 때문에 알려주면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돈을 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는 어떤 사고도 허락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하지원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하지원이 전화를 받으려고 할 때 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하지원은 나의 손을 힐끗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왜 그래?”“저기...”나는 그의 휴대폰 화면에서 뜬 이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육상민 씨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안 돼?”하지원의 미간에는 의문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났다.“안 받아도 되는데 이유를 말해 봐.”“그건...”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둘러댔다.“그게 육상민 씨는 소문난 바람둥이야. 지금 너에게 전화한 건 나가서 놀자는 용건일 거야. 나는 네가 이 시간에 나가는 게 싫고 육상민 씨처럼 되는 게 싫어.”하지원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나를 쳐다봤는데 그의 그윽한 눈빛은 나의 영혼마저 꿰뚫어 볼 것 같았다.나는 그의 시선이 불편했다. 이때 하지원이 갑자기 물었다.“왜 내가 육상민처럼 될까 봐 두려워?”“그건... 그건 널 좋아하니까.”이 말을 꺼내자마자 나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역시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은 거짓말하지 말아야 해.’“날 좋아해?”하지원은 나를 보고 웃었다. 또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웃음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이때 전화벨 소리가 끊겼고 하지원은 휴대폰을 만지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할 때 하지원은 내 귓가에 다가와 가볍게 웃었다.“내가 믿을 것 같아?”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마침 그의 쌀쌀하고 비아냥거리는 웃음 볼 수 있었다.그는 몸을 곧게 펴며 천천히 말했다.“그때 넌
육상민은 팔짱을 끼고 웃었다.“이 호텔은 우리 집 거예요. 댄스 대회도 친구 몇 명이 심심해 미녀 구경이라도 하려고 벌린 일이에요. 그 때문에 댄스 대회에 참가하려면 몸매는 물론 얼굴도 아주 예뻐야 해요. 그래서 심사는 우리 친구 몇 명이 직접 하고 있어요. 엄숙하고 진지한 관리 인원이 미녀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겠어요? 우리 안나 씨, 제 말이 맞아요?”‘퉤! 감히 우리 안나 씨라고 부르다니! 양아치가 따로 없네,’나는 마음속으로 비웃었지만, 감히 말대꾸하지 못하고 비위를 맞추느라 웃음을 지었다.“그럼 제가 이 경연에 참여할 조건을 갖췄어요?”육성민은 턱을 만지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몸매와 외모가 모두 완벽하지만...”“그런데 뭐가요?”나는 황급히 물었다.육상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저 지원이가 저를 가만두지 않을까 봐 걱정이에요.”할 말을 잃은 나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저는 이미 지원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괜찮아요.”“그래요? 아이참, 저는 그래도 두려워요. 아시다시피 남자가 미쳐버리면 무섭거든요.”육상민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터치하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육상민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원이 돌아버리면 정말 무서웠기 때문이다.나는 그저 댄스 대회에 참가할 뿐, 하석진과 만나는 것도 아닌데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그리고 그는 지금 여신과 함께 달콤하고 화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나를 관심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6억 상금과 아빠가 진 14억 도박 빚을 떠올린 나는 얼른 육상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지원 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조금 상관이 있다고 해도 저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요.”“아...”육상민은 일부러 길게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요염한 웃음을 날렸다.“정말이죠? 나중에 하지원이 나에게 미친 짓이라고 따지면 그때 저를 도와야 해요.”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육상민이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원이 어떻게 이런 사
‘댄스 대회’라는 네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나는 저도 모르게 전단지를 주었다. 위에 커다랗게 적힌 ‘6억 상금’이라는 글을 보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나는 얼른 아래를 훑어보았는데 알고 보니 몇몇 큰 호텔에서 공동명의로 댄스 대회를주최한다고 했다.경연이 끝난 후 현장에서 투표 방식으로 춤을 제일 잘 춘 댄서를 뽑을 것이며 상금이 6억이라고 했다.상세한 소개를 보고 나는 마음이 설렜다. 이 돈만 있으면 아빠의 도박 빚을 절반이나 갚을 수 있지 않을까?나는 신청 마감 시간을 확인했데 마침 오늘 저녁까지였다.이미 저녁 8시가 되어 조바심이 난 나는 얼른 주소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부근에 있었다.내비게이션을 따라 나는 럭셔리한 호텔 문 앞에 도착했다. 홀에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하지원이다.정말이지 나는 이 남자와 운명적으로 상극인 것 같았다.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이때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고 옆에는 한 여자가 동행했다.긴 생머리를 뒤로 늘어뜨린 여자는 날씬한 몸매를 가졌는데 이 뒷모습만으로도 ‘청순한 여신’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어쩐지 오늘 밤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더라니, 알고 보니 여신과 잠자리를 가지러 온 거네.’마음속으로 걷잡을 수 없는 시고 떫은 맛이 돌았지만 그 속에는 약간의 통증도 있었다.나는 애써 이런 나쁜 감정들을 떨쳐버리고 심호흡을 한 후 프런트 데스크로 걸어갔다.지금은 사랑을 고민할 때가 아니다. 나에게 있어 현재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댄스 대회의 신청을 2층 회의실에서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줬다.2층에 올라온 후 나는 문을 두드렸다.이내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한참을 생각해도 이 목소리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문을 열어보니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들자마자 당구를 치고 있는 남자 몇 명이 보였고 방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옥했다.‘회의실’에서 신청한다더니... 문 앞에는 버젓이
아마 곧 내가 하지원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한때 부잣집 아가씨였던 내가 우스개가 되어 가십거리가 되겠지.부모님은 믿지 못하고 정말 하지원과 이혼했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나의 확실한 대답을 들은 아빠는 하지원은 물론 가족까지 포함해서 욕설을 퍼부었다.오빠는 옆에서 쌀쌀하게 말했다.“이미 우리를 도와 빚을 청산했고 20억도 줬는데 뭘 더 바라세요? 저희가 예전에 어떻게 대했는지 잊었어요? 지금 이렇게 도와준 것만 해도 잘한 셈이에요.”“하지만 출세했다고 조강지처인 안나를 버리면 안 되잖아.”엄마도 씩씩거리며 말했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안돼요? 절 좋아하지도 않고 저한테 빚진 것도 없으니 절 버리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엄마는 나의 말을 듣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아빠는 그제야 당황해서 서둘러 나에게 물었다.“하지원과 이혼했다고 해서 14억을 달라고 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 안나야, 아빠를 도와줘. 응? 3일 후면 그들이 돈 받으러 올 거야. 아빠는 손목이 잘리고 싶지 않아.”엄마도 나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그래, 안나야. 제발 아빠를 도와줘. 하지원한테는 돈이 많으니 옛정을 봐서라도 네가 입을 열면 꼭 줄 거야.”옛정? 이 말을 들은 나는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저와 지원 씨가 언제 정이 있었어요?”아빠와 엄마는 여전히 나를 타이르며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했다.오빠는 보다못해 소리쳤다.“그만 하세요. 안나도 사람이고 우리 집의 귀여운 막내자 한때는 부잣집 아가씨였어요. 어떻게 부모로서 안나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하지원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빌게 할 수 있어요?”엄마가 입을 가리고 통곡하자 아빠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실룩거렸다.오빠는 계속해서 덤덤하게 말했다.“안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사흘 간 내가 열심히 돈 벌더라도 아빠의 도박에 빠진 손을 지켜드릴게요. 그럼 됐죠?”말을 마친 후 오빠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아파트 단지에 내려온 후 오빠는 눈물범벅이 된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