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원에게... 말하지 않을 거예요?”“필요 없어요.”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육상민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하지원이 안성시에서 출장 중인 것을 몰랐다면 나는 그가 현장에 있는 거로 착각할 뻔했다.육상민은 얼른 사람을 시켜 옷을 가져오라 했는데 나는 이 옷을 보자 입을 크게 벌렸다.“저기... 혹시 옷을 잘못 가져온 게 아닌가요?”육성민이 사람을 시켜 가져온 옷은 성욕을 자극할 수 있는 섹시한 메이드 복이었다.미니스커트에 검은색 양말을 신어야 하는 이 옷은 아무리 봐도 춤을 출 수 있는 의상이 아니었다.육성민은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다 이런 옷이에요. 그나마 안나 씨를 위해 제가 특별히 제일 예쁘고 보수적인 옷을 남겼어요.”믿을 수 없었던 나는 밖으로 나가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정말 그랬다.다른 사람의 옷은 더 노출이 심했고 심지어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비키니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육성민은 나를 향해 웃었다.“이젠 믿을 수 있어요? 이 옷이 제일 보수적이에요.”나는 그래도 믿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이게 정말 댄스 대회가 맞아요?”“그럼요. 잠시 후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출 거고 관객들이 투표할 거예요. 득표수가 제일 많은 사람이 우리가 준비한 6억 상금을 가질 수 있어요. 그래서 안나 씨, 6억 상금을 받고 싶으면 열심히 춤을 춰야 해요.”이제야 나는 이것이 단순하고 정규적인 댄스 대회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전문적인 심사도 없었다. 득표수가 많아지려면 춤을 잘 춰야 할 뿐더러 관객들의 환심을 사야 했다.내가 머뭇거리자 육상민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참가하기 싫으면 가셔도 돼요. 6억일 뿐인데 이 돈은 지원이에게 애교만 부려도...”“참가할래요.”나는 육상민의 말을 끊어버렸다.나는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하지원에게 더는 손을 내밀지 않으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나와 하지원의 현재 관계로 내가 손을 내민다는 건 수모를 자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육상민은 껄껄 웃었다.“결정했으면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그 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상민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죽고 싶어? 하 대표님의 여자도 감히 탐내?”“뭐라고? 하 대표님의 여자라고?”그 친구는 안색이 변하며 스스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안 볼래. 바로 나갈게.”그 남자는 줄행랑을 놓았다.나는 육상민에게 다가가서 진지하게 말했다.“앞으로 제가 하지원 씨 여자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지원 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지원 씨가 사랑하는 여자가 알면 큰일 나요.”“네? 지원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안나 씨 아니에요?”육상민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다가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잘생긴 얼굴에는 어색한 표정이 역력했다.아마 하지원의 마음속에 여신이 있는 줄 몰랐을 거라고 짐작한 나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지원 씨가 사랑하는 여자는 저일 수 없어요.”말을 마친 후 나는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육상민의 의혹에 쌓인 혼잣말이 들려왔다.“안나 씨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저는 지원이가 그렇게 비천한 모습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어요.”육상민의 말을 들은 나는 웃음이 났다.하지원이 내 앞에서 비천한 모습을 한 것이 나를 좋아해서일까? 데릴사위가 되어 권력도 돈도 지위도 다 가지고 싶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아직도 비천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다. 이젠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어르신처럼 나의 시중을 받고 있고 내가 시중을 잘하지 못하면 얼굴이 일그러졌다.아무튼 나는 하지원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사실 내가 하지원이었다면 나를 그렇게 억압하고 학대했던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나는 하지원보다 더 잔인하고 냉혹하게 나를 억압했던 모든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그래서 비교해보면 하지원은 나에게 정말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나에게 매혹적인 메이크업을 해 주었는데, 그 메이드복과 함께 어울리니 더욱 야릇한 분위기가 이루어졌다.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힐끗 보고는 눈길을 돌렸다
하지원은 나를 침대에서 3일 밤낮을 들볶았다.그는 천한 데릴사위였는데 나는 평소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발밑에 짓밟았다.하지만 그랬던 나는 지금 초라해졌고 그는 잘나갔다. 복수라도 하듯 그는 나에게 끝없는 힘을 보여줬다....내 남편은 데릴사위였다.원래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의 동생이었는데 동창 모임에서 남편은 내가 취한 틈을 타서 나랑 잤다.이 일은 모든 사람에게 다 알려져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나를 하지원에게 시집보냈지만 그 전제는 우리 집 데릴사위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하지원은 그의 아버지와 전처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혼하고 재혼한 이후로 그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우리 집안은 형편이 너무 좋았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아끼는 공주님이었는데 하지원이 우리 집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건 당연히 아버지가 원하던 바였다.이렇게 해서 우리 둘은 결혼했다.하지만 하지원의 동생을 좋아했던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마음속의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나는 사사건건 그를 겨냥하여 밤에 바닥에서 자게 하며 여태껏 그를 침대에 오르도록 한 적이 없다.밥을 먹을 때도 나와 오빠는 곳곳에서 그를 조롱하고 억압하고, 그가 음식을 집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친구들과 모임을 마치고 나오니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원은 자상하게 우산을 갖다 주었지만 이마저도 나는 그를 한바탕 꾸짖었다.어쨌든 그를 욕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하지원은 참 이상했다. 나와 내 가족이 아무리 괴롭혀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언제나 온화한 모습만 우리에게 보여줬다.하지원은 꽤 잘생긴 편이었다. 단지 학창시절의 그는 너무 내성적이고 성적도 늘 꼴찌였으며 유급까지 해 학교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런 존재였다.하지만 그의 동생은 형과 달리 다정하고 잘생기고 성적도 좋아 학교에선 인기남이었다.나와 하지원의 동생이 방금 피워낸 사랑의 불꽃을 이렇게 끊어버린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은 또 한껏 불
나는 손가락을 꼬며 쑥스럽게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하지원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곧 나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내가 왜 너희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성공할 리 없다는 걸 예상했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안 온 거로 해.”그랬다. 우리가 예전에 그렇게 대했으니 하지원이 우리 집에 복수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어떻게 우리 집을 도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가.내가 얼마나 뻔뻔하면 하지원에게 그에게 부탁하러 올 수 있겠는가.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던 내가 도망치려 하자 하지원이 나를 불렀다.“말해봐. 뭐로 부탁할 거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도와줄 수도 있어.”나는 멍하니 서서 머리를 굴려봤지만 무엇을 걸고 부탁할 수 있을지 생각나지 않았다.‘몸으로?’만약 그가 정말 나에게 충동이 있다면 결혼 3년 내내 수없이 많은 밤을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는데 그에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하지만 지난 3년 동안 하지원은 나에게 한 번도 다가오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떨구고 쑥스럽게 말했다.“내가 오늘 안 온 거로 해.”하지만 하지원이 갑자기 내게로 다가왔다. 키가 큰 하지원이 내 앞에 서니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그는 몸을 살짝 숙여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웃었다.“이렇게 입고 왔으면서 왜 고상한 척하는 거야?”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피가 굳는 듯했는데 수치스러운 마음에 당장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다.하지만 하지원은 갑자기 내 허리를 잡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결혼 3년 차, 난 3년 동안 바닥에서 잤어. 네 몸을 만져본 적이 오래됐는데... 몸으로 나에게 부탁하는 건 어때?”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그에게 물었다.“너... 뭐라고 한 거야?”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이 마치 바다처럼 느껴져 내 마음이 이유 없이 일렁이었다.하지원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드레스의 어깨끈을 걸어 살며시 아래로 내렸다.
“어라? 이분은 옛날 도씨 가문 아가씨, 하 대표님의 아리따운 부인이 아니세요? 왜요? 술 마시러 왔어요? 어... 술 마시러 왔으면 술만 마시면 되지 왜 여기 작업복 입고 있어요?”남자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나는 술 카트의 손잡이를 꽉 잡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휴, 이미 마주쳤고 다들 나를 모욕하려고 작정했으니 도망갈 수 없어. 차라리 억지웃음이나 팔아 팁을 많이 받지 뭐.’지금은 매일 빚 독촉이 심해 아빠는 매일 살고 싶지 않다고 하고, 엄마는 매일 눈물로 지새우며 오빠는 매일 배달 일을 하는데 나의 허무맹랑한 자존심과 교만이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술 카트를 밀면서 어색하지만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다.“참 우연이네요. 이렇게 오신 김에 동생 사업을 좀 도와주세요. 즐겁게 드셨다면, 팁이라도 주시면 감사하죠.”“쯧쯧....”장현수는 고개를 저으며 낄낄거렸다.처음에 그는 항상 나와 오빠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아첨했고 누나, 형이라 부르며 아첨했는데 지금 우리 집이 초라해지자 자신이 뭐라도 된 듯 거들먹거렸다. 그런 그의 간사한 표정을 보며 나는 따귀를 한 대 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제멋대로 할 때가 아니었고 돈을 버는 것이 더 중요했다.나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장현수는 갑자기 몸을 숙여 내게 다가와 기뻐하며 말했다.“아, 이게 누구야? 예전에 안하무인이었던 도씨 가문 아가씨 아니야? 며칠 못 봤더니 왜 이렇게 초라해졌지? 쯧쯧...”갑자기 룸 안에 또 한바탕 웃음소리가 들렸다.이호민도 나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방금 장사를 좀 돌봐달라고 했는데 이런 곳에서 하는 장사면 설마 몸 장사? 하하, 정말 몸 장사라면 먼저 옷을 다 벗고 우리가 검품하도록 해야지. 만약 물건이 너무 썩어 있으면 우리가 손해 보잖아? 하하하...”나는 술병을 꽉 움켜쥐고 하지원을 바라보았다.하지원은 묵묵히 담배를 피워 물며 그들의 욕설을 듣지 못한
나는 입가를 실룩이며 미친 거 아니냐고 욕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지금 잘나가서 더는 모든 사람이 속일 수 있었던 예전의 그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나는 욕설을 참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하 대표님, 농담하지 마.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이호민은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야?”하지원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나는 눈살을 찌푸렸다.“이호민은 되는데 넌 안 된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방금 이호민에게 20억을 가져오면 하룻밤 놀아준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20억을 준다는데 왜 나랑은 하룻밤을 놀아주지 못한다는 거야?”나는 자기도 모르게 하지원을 흘겨보았다.방금 이호민이 내놓은 2천만 원이 전 재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2천만 원도 그의 목숨이나 다름없기에 일부러 20억을 들먹여 이호민을 자극한 것인데 이 남자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니.하지원은 내 앞으로 다가와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너희 집은 지금 돈이 많이 부족하잖아? 네가 하룻밤만 같이 있어 주면 20억은 네 거야. 어때?”나는 몰래 옆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사실 그가 이러는 목적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원은 단지 돈으로 나를 모욕하려는 것이다.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나는 그에게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우리 집은 지금 돈이 많이 부족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돈을 벌지는 않을 거야.”말을 마친 나는 급히 방을 뛰쳐나갔는데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사람의 정서는 정말 이상하다.예전에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저를 아무리 모욕해도 나는 슬프지 않았다.하지만 하지원의 수모는 달랐다. 그의 수모에 나는 쉽게 가슴이 찡하고 아팠다.나는 단숨에 1층 로비로 다려갔는데 배달복을 입은 오빠가 장현수, 이호민 등에게 둘러싸여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오빠는 돈뭉치를 위해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내가 지켜온 자존심과 교만이 와르르 무너졌다.나는
나는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돌렸다가 하지원이 목욕 수건을 두르고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를 가진 그는 신체 비율이 매우 좋았는데 피부가 검지도 않고 허약한 흰색도 아니어서 건강하고 에너지 넘쳐 보였다.나는 예전에 그가 내 앞에서 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창 모임 때 나도 혼란스러워서 잘 몰랐는데 그의 몸매가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다.내가 그의 몸을 보며 넋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난감해져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하지원은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빠르게 앞으로 다가왔다.나는 긴장해서 뒤로 몸을 움츠린 채 더듬거리며 그에게 물었다.“...언제 돌아왔어? 배고파? 아니면 내가... 내가 먹을 거 만들어 줄게.”“음식을 만들어?”하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넌 먹는 것만 알잖아. 어떤 음식을 만들 줄 아는 거야?”이 말은 들은 나는 말문이 막혔다.그의 눈에 나는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일 것이다.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 자신도 말할 수 없다.하지원이 갑자기 내 앞에 다가오자 따뜻한 기운이 내 귓가에 뿜어져 나와 내 신경을 건드렸다.“사실 요리 말고도 날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그의 그윽한 눈동자에는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나는 그의 애인으로서 지금 마땅히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내 손발은 내 두뇌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중요한 건 너무 대조적이어서 나는 여전히 그의 애인이라는 신분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나에게 키스해 왔다.사납고 독한 키스를 퍼붓자 나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거부했다.그는 나를 놓아주고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내가 하석진이라면 거부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하석진은 그의 동생이었다.그런데 이게 하석진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랬다. 예전
그는 갑자기 손에 든 담배를 눌러 끄고 나를 안으며 미친 듯이 입을 맞추었다.얼떨결에 옷이 다 벗겨진 내 몸은 푹신한 침대로 던져졌다...심한 고통이 전해졌을 때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마음속에는 의심이 번쩍였다.‘어떻게 된 거지?’동창 모임 때 이미 잤었는데 왜 아직도...많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의 의식은 점점 멀어져갔다.하지원이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끝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다음 날 정오였고 욕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시큰시큰한 몸을 일으켜나 앉았는데 갑자기 침대 위에 핏자국이 한 줄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라? 어떻게 된 거지?’‘내 첫날 밤은 진작에 하지원에게 주지 않았던가? 왜 아직도 피가 나지?’무언가 떠올린 눈살을 찌푸렸다.그때 하지원이 마침 욕실에서 나왔다.나는 어색하게 입술을 깨물며 마음속의 의심을 물었다.“동창 모임 하던 날 밤에 우리가 관계했어?”“아니.”하지원은 시원스럽게 대답했지만 나는 한 번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그럼 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어?”하지원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너와 내가 알몸으로 껴안고 있는데 설명이 잘 될 것 같아?”“하지만 나랑 가족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었잖아. 만약 네가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도 분명히 너를 우리 집에 들이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 너도...”“왜? 후회해?”하지원이 갑자기 내 앞에 다가와 물었는데 까만 눈동자에 냉기가 서렸다.나는 입술을 감빨며 생각했다.“후회하지 않아? 데릴사위가 되어 우리 집은 물론이고 내게 업신여김을 당했고 여신과도 헤어졌잖아.’하지원은 갑자기 손에 있는 수건을 나에게 건네주었다.내가 얼떨떨해 있을 때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머리 닦아 줘.”“그래...”나는 급히 수건을 받아 반쯤 무릎을 꿇고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가볍게 비볐다.저도 모르게 옛날이 생각 떠올랐다.예전에 나는 머리를 감고 나면 말리는 게 귀찮아서
그 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상민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죽고 싶어? 하 대표님의 여자도 감히 탐내?”“뭐라고? 하 대표님의 여자라고?”그 친구는 안색이 변하며 스스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안 볼래. 바로 나갈게.”그 남자는 줄행랑을 놓았다.나는 육상민에게 다가가서 진지하게 말했다.“앞으로 제가 하지원 씨 여자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지원 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지원 씨가 사랑하는 여자가 알면 큰일 나요.”“네? 지원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안나 씨 아니에요?”육상민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다가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잘생긴 얼굴에는 어색한 표정이 역력했다.아마 하지원의 마음속에 여신이 있는 줄 몰랐을 거라고 짐작한 나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지원 씨가 사랑하는 여자는 저일 수 없어요.”말을 마친 후 나는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육상민의 의혹에 쌓인 혼잣말이 들려왔다.“안나 씨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저는 지원이가 그렇게 비천한 모습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어요.”육상민의 말을 들은 나는 웃음이 났다.하지원이 내 앞에서 비천한 모습을 한 것이 나를 좋아해서일까? 데릴사위가 되어 권력도 돈도 지위도 다 가지고 싶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아직도 비천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다. 이젠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어르신처럼 나의 시중을 받고 있고 내가 시중을 잘하지 못하면 얼굴이 일그러졌다.아무튼 나는 하지원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사실 내가 하지원이었다면 나를 그렇게 억압하고 학대했던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나는 하지원보다 더 잔인하고 냉혹하게 나를 억압했던 모든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그래서 비교해보면 하지원은 나에게 정말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나에게 매혹적인 메이크업을 해 주었는데, 그 메이드복과 함께 어울리니 더욱 야릇한 분위기가 이루어졌다.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힐끗 보고는 눈길을 돌렸다
“정말 지원에게... 말하지 않을 거예요?”“필요 없어요.”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육상민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하지원이 안성시에서 출장 중인 것을 몰랐다면 나는 그가 현장에 있는 거로 착각할 뻔했다.육상민은 얼른 사람을 시켜 옷을 가져오라 했는데 나는 이 옷을 보자 입을 크게 벌렸다.“저기... 혹시 옷을 잘못 가져온 게 아닌가요?”육성민이 사람을 시켜 가져온 옷은 성욕을 자극할 수 있는 섹시한 메이드 복이었다.미니스커트에 검은색 양말을 신어야 하는 이 옷은 아무리 봐도 춤을 출 수 있는 의상이 아니었다.육성민은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다 이런 옷이에요. 그나마 안나 씨를 위해 제가 특별히 제일 예쁘고 보수적인 옷을 남겼어요.”믿을 수 없었던 나는 밖으로 나가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정말 그랬다.다른 사람의 옷은 더 노출이 심했고 심지어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비키니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육성민은 나를 향해 웃었다.“이젠 믿을 수 있어요? 이 옷이 제일 보수적이에요.”나는 그래도 믿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이게 정말 댄스 대회가 맞아요?”“그럼요. 잠시 후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출 거고 관객들이 투표할 거예요. 득표수가 제일 많은 사람이 우리가 준비한 6억 상금을 가질 수 있어요. 그래서 안나 씨, 6억 상금을 받고 싶으면 열심히 춤을 춰야 해요.”이제야 나는 이것이 단순하고 정규적인 댄스 대회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전문적인 심사도 없었다. 득표수가 많아지려면 춤을 잘 춰야 할 뿐더러 관객들의 환심을 사야 했다.내가 머뭇거리자 육상민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참가하기 싫으면 가셔도 돼요. 6억일 뿐인데 이 돈은 지원이에게 애교만 부려도...”“참가할래요.”나는 육상민의 말을 끊어버렸다.나는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하지원에게 더는 손을 내밀지 않으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나와 하지원의 현재 관계로 내가 손을 내민다는 건 수모를 자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육상민은 껄껄 웃었다.“결정했으면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이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는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나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화내지 마. 난 정말 안성시에 가기 싫어.”내일 댄스 대회에 참가해 6억 상금을 타야 했던 나는 안성시로 갈 수 없었다.하지원은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1분 동안이나 음산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라 바라봤다.불안해진 나는 손가락을 꼬며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운 그는 담배를 비벼 끄며 담담하게 말했다.“가기 싫으면 가지 마.”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몸을 곧게 펴고 밖으로 나가다가 내 옆을 지나갈 때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없어도 얌전하게 있어. 날 화나게 하는 짓을 하지 마.”“응. 말 잘 들을게.”나는 약속했다.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곧장 나갔다. 화가 나서인지 그는 온 밤을 서재에서 보냈다.오미수 아줌마는 인삼차를 우린 후 나더러 하지원에게 가져다주라 했다.그의 비위를 맞추는 게 맞는 다고 생각한 나는 환하게 웃으며 인삼차를 가져다주는 나에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따뜻할 때 빨리 마셔야 한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방에 돌아온 후 침대에 누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머릿속에는 예전에 하지원을 못되게 굴던 짓거리가 생각났다. 예전에 그는 나에게 잘 보이려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지만 나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지금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나의 자업자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다음날 눈을 떠보니 하지원은 이미 떠났다.이튿날 아침 일찍이 출장 가는 것을 알면서도 일어나 배웅하지 않는 나를 보고 오미수 아줌마는 내가 양심이 없다고 했다.그러면서 하지원이 떠날 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내가 배웅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나는 오히려 오미수 아줌마가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여신이 배웅해주면 좋아하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의 여신이 아니다. 내가 배웅하면 그를 화나게 할 것이 뻔하다.오후에 나는 육상민에게 문자를
의아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그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또 왜 그래?”하지원은 날카로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댄스 대회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혹시 너도 지원했어?”“아니, 아니야...”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하지원은 쌀쌀하게 웃었다.“아니면 다행이야. 이건 네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거든.”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댄스 대회일 뿐인데 내가 왜 참가할 수 없다는 걸까?그러나 지금은 더 깊이 물어볼 수 없었다.하지원은 나에게 경고를 한 후 또 전화를 받았는데 그의 여신이 걸어온 전화인 것 같다.그는 전화 받으면서 창가로 걸어갔는데 말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여태껏 나에게 한 번도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를 쓴 적이 없다.두 사람이 달콤하게 대화하는 것을 듣기 싫었던 나는 욕실로 갔지만, 욕실에서도 하지원이 내일 안성시로 출장 간다고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그럼 내일 댄스 대회를 볼 수 없겠지?’이렇게 생각한 나는 안심했다.하지원이 여신과 통화를 마친 후 그녀를 찾아갈 줄 알았는데 내가 목욕을 하고 나와보니 그는 여전히 방에 있었다.창가에 기대에 담배를 피우면서 넋을 잃고 창밖을 보고 있는데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 같다.나는 감히 방해하지 못하고 살금살금 침대로 갔다.“이리 와!”침대 끝에 다다르자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멍해 있다가 돌아서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앞에 서자마다 그는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껴안으며 나를 품에 안았다.담담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나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우울한 기색이 드리웠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치 온순한 하지원으로 돌아간 것 같다.그는 말없이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봤는데 그윽하고 집중적인 시선에는 깊은 정이 엿들어 있는 것 같았다.만약 그가 마음속에 여신을 품지 않았다면
나는 황급히 부인했다.“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어찌 그런 남자랑 바람이 날 수 있겠어. 절대 아니야.”하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믿지 않는 눈치였다.나는 정말 후회했다. 하지원이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았으면 육상민의 전화를 받도록 내버려 둘걸 그랬다고 생각했다.마침 이때 육상민의 전화가 또 걸려오자 하지원은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봤다.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어서 받으라는 손짓을 했다.그는 차갑게 웃으며 수신 버튼을 누르더니 일부러 스피커를 열었다. 육상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젠장, 두 번이나 해서 전화를 받다니. 왜? 좋은 일을 방해했어?”하지원은 나를 힐끗 보다가 코웃음 쳤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전화기 너머로 육상민의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무정하게 굴지 마. 난 널 괴롭히던 도안나가 아니야.”나는 어색해서 콧등을 만졌다. 내가 하지원을 못되게 대했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원이 나를 향해 차갑게 웃자 나는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그는 시큰둥하게 말했다.“무슨 일로 전화했어? 용건이 없으면 끊어.”“아이참, 잠시만. 내일 댄스 대회가 열리니 구경하러 와.”“안 가.”하지원이 단칼에 거절하자 나는 오히려 시름을 놓았다.이 육상민도 참, 내가 댄스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면서 또 하지원이 참가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마치 하지원이 내가 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모를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말이다.“내일 와봐. 서프라이즈가 있어. 중요한 서프라이즈.”육상민은 아직도 하지원을 설득하고 있었다.“관심 없어.”하지원이 담담하게 말했어도 육상민은 계속해서 요청했다. 하지원은 아예 전화를 꺼버렸다.나는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 댄스 대회에는 미녀들만 참가할 수 있다고 하던데 너 정말 안 가볼 거야?”하지원은 눈썹을 치켜들었다.“왜? 넌 가보고 싶어?”나는 고개를 저었다.하지원은 내 옆에 앉으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구경하고 싶으면 널
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졌다.‘설마 육상민이 입 가볍게 내가 댄스 대회에 지원한 것을 하지원에게 알려주는 건 아니겠지?’비록 이 일은 비밀이 아니고 하지원에게 알려줘도 상관없다. 하지만 변덕스럽고 나에게 원한이 많았기 때문에 알려주면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돈을 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는 어떤 사고도 허락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하지원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하지원이 전화를 받으려고 할 때 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하지원은 나의 손을 힐끗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왜 그래?”“저기...”나는 그의 휴대폰 화면에서 뜬 이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육상민 씨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안 돼?”하지원의 미간에는 의문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났다.“안 받아도 되는데 이유를 말해 봐.”“그건...”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둘러댔다.“그게 육상민 씨는 소문난 바람둥이야. 지금 너에게 전화한 건 나가서 놀자는 용건일 거야. 나는 네가 이 시간에 나가는 게 싫고 육상민 씨처럼 되는 게 싫어.”하지원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나를 쳐다봤는데 그의 그윽한 눈빛은 나의 영혼마저 꿰뚫어 볼 것 같았다.나는 그의 시선이 불편했다. 이때 하지원이 갑자기 물었다.“왜 내가 육상민처럼 될까 봐 두려워?”“그건... 그건 널 좋아하니까.”이 말을 꺼내자마자 나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역시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은 거짓말하지 말아야 해.’“날 좋아해?”하지원은 나를 보고 웃었다. 또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웃음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이때 전화벨 소리가 끊겼고 하지원은 휴대폰을 만지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할 때 하지원은 내 귓가에 다가와 가볍게 웃었다.“내가 믿을 것 같아?”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마침 그의 쌀쌀하고 비아냥거리는 웃음 볼 수 있었다.그는 몸을 곧게 펴며 천천히 말했다.“그때 넌
육상민은 팔짱을 끼고 웃었다.“이 호텔은 우리 집 거예요. 댄스 대회도 친구 몇 명이 심심해 미녀 구경이라도 하려고 벌린 일이에요. 그 때문에 댄스 대회에 참가하려면 몸매는 물론 얼굴도 아주 예뻐야 해요. 그래서 심사는 우리 친구 몇 명이 직접 하고 있어요. 엄숙하고 진지한 관리 인원이 미녀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겠어요? 우리 안나 씨, 제 말이 맞아요?”‘퉤! 감히 우리 안나 씨라고 부르다니! 양아치가 따로 없네,’나는 마음속으로 비웃었지만, 감히 말대꾸하지 못하고 비위를 맞추느라 웃음을 지었다.“그럼 제가 이 경연에 참여할 조건을 갖췄어요?”육성민은 턱을 만지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몸매와 외모가 모두 완벽하지만...”“그런데 뭐가요?”나는 황급히 물었다.육상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저 지원이가 저를 가만두지 않을까 봐 걱정이에요.”할 말을 잃은 나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저는 이미 지원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괜찮아요.”“그래요? 아이참, 저는 그래도 두려워요. 아시다시피 남자가 미쳐버리면 무섭거든요.”육상민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터치하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육상민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원이 돌아버리면 정말 무서웠기 때문이다.나는 그저 댄스 대회에 참가할 뿐, 하석진과 만나는 것도 아닌데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그리고 그는 지금 여신과 함께 달콤하고 화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나를 관심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6억 상금과 아빠가 진 14억 도박 빚을 떠올린 나는 얼른 육상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지원 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조금 상관이 있다고 해도 저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요.”“아...”육상민은 일부러 길게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요염한 웃음을 날렸다.“정말이죠? 나중에 하지원이 나에게 미친 짓이라고 따지면 그때 저를 도와야 해요.”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육상민이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원이 어떻게 이런 사
‘댄스 대회’라는 네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나는 저도 모르게 전단지를 주었다. 위에 커다랗게 적힌 ‘6억 상금’이라는 글을 보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나는 얼른 아래를 훑어보았는데 알고 보니 몇몇 큰 호텔에서 공동명의로 댄스 대회를주최한다고 했다.경연이 끝난 후 현장에서 투표 방식으로 춤을 제일 잘 춘 댄서를 뽑을 것이며 상금이 6억이라고 했다.상세한 소개를 보고 나는 마음이 설렜다. 이 돈만 있으면 아빠의 도박 빚을 절반이나 갚을 수 있지 않을까?나는 신청 마감 시간을 확인했데 마침 오늘 저녁까지였다.이미 저녁 8시가 되어 조바심이 난 나는 얼른 주소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부근에 있었다.내비게이션을 따라 나는 럭셔리한 호텔 문 앞에 도착했다. 홀에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하지원이다.정말이지 나는 이 남자와 운명적으로 상극인 것 같았다.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이때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고 옆에는 한 여자가 동행했다.긴 생머리를 뒤로 늘어뜨린 여자는 날씬한 몸매를 가졌는데 이 뒷모습만으로도 ‘청순한 여신’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어쩐지 오늘 밤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더라니, 알고 보니 여신과 잠자리를 가지러 온 거네.’마음속으로 걷잡을 수 없는 시고 떫은 맛이 돌았지만 그 속에는 약간의 통증도 있었다.나는 애써 이런 나쁜 감정들을 떨쳐버리고 심호흡을 한 후 프런트 데스크로 걸어갔다.지금은 사랑을 고민할 때가 아니다. 나에게 있어 현재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댄스 대회의 신청을 2층 회의실에서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줬다.2층에 올라온 후 나는 문을 두드렸다.이내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한참을 생각해도 이 목소리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문을 열어보니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들자마자 당구를 치고 있는 남자 몇 명이 보였고 방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옥했다.‘회의실’에서 신청한다더니... 문 앞에는 버젓이
아마 곧 내가 하지원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한때 부잣집 아가씨였던 내가 우스개가 되어 가십거리가 되겠지.부모님은 믿지 못하고 정말 하지원과 이혼했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나의 확실한 대답을 들은 아빠는 하지원은 물론 가족까지 포함해서 욕설을 퍼부었다.오빠는 옆에서 쌀쌀하게 말했다.“이미 우리를 도와 빚을 청산했고 20억도 줬는데 뭘 더 바라세요? 저희가 예전에 어떻게 대했는지 잊었어요? 지금 이렇게 도와준 것만 해도 잘한 셈이에요.”“하지만 출세했다고 조강지처인 안나를 버리면 안 되잖아.”엄마도 씩씩거리며 말했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안돼요? 절 좋아하지도 않고 저한테 빚진 것도 없으니 절 버리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엄마는 나의 말을 듣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아빠는 그제야 당황해서 서둘러 나에게 물었다.“하지원과 이혼했다고 해서 14억을 달라고 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 안나야, 아빠를 도와줘. 응? 3일 후면 그들이 돈 받으러 올 거야. 아빠는 손목이 잘리고 싶지 않아.”엄마도 나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그래, 안나야. 제발 아빠를 도와줘. 하지원한테는 돈이 많으니 옛정을 봐서라도 네가 입을 열면 꼭 줄 거야.”옛정? 이 말을 들은 나는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저와 지원 씨가 언제 정이 있었어요?”아빠와 엄마는 여전히 나를 타이르며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했다.오빠는 보다못해 소리쳤다.“그만 하세요. 안나도 사람이고 우리 집의 귀여운 막내자 한때는 부잣집 아가씨였어요. 어떻게 부모로서 안나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하지원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빌게 할 수 있어요?”엄마가 입을 가리고 통곡하자 아빠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실룩거렸다.오빠는 계속해서 덤덤하게 말했다.“안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사흘 간 내가 열심히 돈 벌더라도 아빠의 도박에 빠진 손을 지켜드릴게요. 그럼 됐죠?”말을 마친 후 오빠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아파트 단지에 내려온 후 오빠는 눈물범벅이 된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