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다 짜냈으니까 조금 아플 겁니다. 절대 물 묻히지 말고, 매운 음식은 당분간 피해주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흉터는 체질에 따라 다를 거예요.”“감사합니다.”간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한 뒤, 정리를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병실은 숨이 막힐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박진성은 손가락 마디를 꽉 쥐고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정말 네 말이 다 사실이면, 왜 한 번이라도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았어?”민여진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한 마디만 해도 비웃고 모욕하는데, 내가 왜 또 말해야 해? 또 그런 꼴을 당하고 싶어야 말이지.’박진성은 스스로도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했다.“민여진, 네가 예전에 했던 일도 있는데, 솔직히 너를 믿기가 쉽겠어?”“그만해. 나 너무 피곤해. 정말 좀 쉬고 싶어.”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박진성은 그녀가 절대 잠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박진성이 다시 물었다.“그날 밤, 왜 채연이를 그렇게 목 졸랐어?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별일 없었어.”민여진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설명한다고 해서 바뀔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또 똑같은 결말일 텐데...’박진성은 답답함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다시 참았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민여진, 나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그 말에 그녀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떴다.“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따져 묻기 전에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지 않았어. 그때 나는...”“미안할 필요 없어.”민여진은 그의 말을 끊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네가 나를 믿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믿고 싶은
“손 좀 내밀어.”박진성은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를 감쌌지만, 오늘만큼은 그 얼굴에서 한 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의 목소리조차 싸늘했다.“손은 왜... 무슨 일이에요?”문채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뭐가 그렇게 심각한 건지, 정말 걱정 되네요.”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이틀이 지나면서 손톱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양옆이 사선으로 깎여 있었으며, 중앙 부분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이 상태에서 힘을 주어 누군가를 움켜쥔다면, 단순히 살이 파이고 긁히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한 덩이가 뜯겨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손톱에 손댔어?”박진성은 그녀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네?”문채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재빨리 거둬들였다.“요즘 네일숍에서 디자인을 바꾸려고 다듬어서 그런 거예요.”박진성은 그녀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여진이의 손에 난 상처, 네가 한 짓이야?”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며칠 전 일이잖아. 왜 이제 와서 이걸 들춰내는 거야?’“상처라니요?”문채연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여진 씨, 또 다쳤어요? 어디 다친 거예요? 괜찮아요?”박진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채연을 지켜보았다.문채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눈물이 고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성 씨... 그 눈빛은 무슨 뜻이에요?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박진성은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애초에 믿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라면 의심하지 않는 쪽이 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몰랐다.“민여진 손에는 깊게 파인 상처가 가득해. 19일, 그날 너희 둘은 손을 맞잡은 적이 있었잖아.”문채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고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진성 씨, 그래서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제가 일부러 여진 씨 손을 그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민여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민여진은 손끝을 힘껏 쥐었다. 예전엔 그녀도 박진성이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라는 걸 믿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게 되었다.‘만약 그가 정말 문채연의 복수를 위해 이 일을 꾸몄다면, 왜 문채연에게 사과를 강요했을까?’“대답해. 맞아? 아니야?”“아니야.”박진성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결국 짧게 대답했다. 그 후 입술을 얇게 일그러뜨렸다.“네 머릿속에서 나는 그런 놈이야? 피도 눈물도 없이 널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인간으로 보여?”‘아니라고?’민여진의 머릿속이 엉켜버렸다. 이때 손목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다시금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민여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널 납치한 거라면, 내가 하루 종일 눈도 붙이지 않고 폭우 속에서 널 찾아다닐 이유가 뭐야? 그 남자를 보내버릴...”그는 순간 말을 멈췄다. 눈빛이 흔들렸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방금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뭐라고?”민여진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물었다.“어디로 보냈다는 거야?”박진성은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드러냈다.“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거짓말할 필요 없지.’박진성은 어차피 자기 손바닥 안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내가 당한 그 모든 일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날 속이기 위해 벌인 연극이었나?’순간, 그녀의 가슴 속이 뒤집히듯 요동쳤다. 잘못된 사람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민여진!”갑자기 몸을 돌려 눕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아직 나한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답하지 않았어!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어? 이 납치 사건이 내가
박진성은 유서 위에 종이를 덮으면서, 그의 눈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저기요, 뭐 하는 분이시죠?”서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박진성이 고개를 들자, 멀리서 한 여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서원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문채연 씨... 제발 저를 경찰서에 넘기지 말아주세요...”서원은 잠시 멈칫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그 눈먼 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딱해 보여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일이 문채연 씨를 죽음으로 몰게 될 줄은 몰랐어요...”박진성,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듯 벌떡 일어나며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먼 여자라니!”그 여자는 박진성의 강렬한 기세에 움찔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박 대표님! 박 대표님, 제가 다 말할게요! 그 여자가 시켰어요! 다 그 여자가 시킨 대로 한 거예요!”“대체 누구의 말을 따랐다는 거야!”박진성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여자는 간신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전 원래 이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어요. 19일, 평소처럼 각 병실을 돌며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1209호실에 들어갔을 때... 그 방에 있던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갑자기 저에게 애절하게 부탁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제 손을 세게 움켜쥐고 어떻게든 피 나고 살집이 뜯기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나중에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자, 문채연 씨를 쫓아내고 박 대표님을 다시 자기 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고 했어요.”“그게 정말이야?”“네! 문채연은 불륜녀라고 하면서 자기가 배신당한 조강지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욱하는 마음에 그 여자를
“서원아! 그만해!”박진성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단호하게 서원의 말을 끊으며 이를 악물었다.“너도 그 여자한테 속은 거야.”씁쓸한 웃음이 그의 입가를 스쳤다.“민여진이 네게 나를 찾아가서 일러바치라고 했겠어? 처음부터 모든 걸 계획한 게 그 여자인데? 나를 죄책감에 빠뜨리고 채연이에게 책임을 묻게 하려고 했어! 그런 위선적인 여자에게 속아서 나는 채연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다고!”분노와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쥐어뜯었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아득할 정도였다.박진성은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민여진의 병실로 달려갔다.문을 거칠게 발로 차자, 안에서 조용히 누워 있던 민여진이 깜짝 놀라 움찔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박진성이 성큼 다가와 손을 뻗어, 단숨에 그녀의 목을 거칠게 조아붙였다.“윽!”목이 조여오자,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됐다. 숨이 막혀 전신에 전율이 퍼졌고 조금만 더 힘이 가해지면 목이 부러질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박진성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민여진! 너 같은 악독하고 역겨운 여자는 차라리 죽어버려야 해!”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숨을 쉬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곧 질식할 것만 같았고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박진성이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민여진은 가차 없이 침대 위로 내던졌다.“쿵!”충격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그녀는 그 아픔도 잊은 채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을 들썩였고 목에서는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그러나 박진성의 살기 어린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도... 도대체 왜 또 이러는 거야...”그녀가 힘겹게 말을 뱉자, 박진성은 비웃음을 흘렸다.“무슨 일이냐고? 네가 짠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소리야!”그는 한 발짝 다가오며 그녀의 다친 손 위에 거칠게 발을 올렸다.
“박진성! 진성 씨!”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박진성이 방현수를 해칠 거라는 걸 직감한 순간, 본능적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제발... 제발 그러지 마! 채연 씨가 죽을 뻔한 일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내가 사과할게. 채연 씨가 그랬던 것처럼 수면제를 먹을 테니까...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한테까지 화풀이하지 마! 무슨 벌을 내리든 내가 다 받을게...”“죄 없는 사람?”박진성이 비웃으며 몸을 숙이더니 눈물로 범벅진 그녀의 볼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죄 없는 사람? 채연이는 무슨 죄가 있는데?”그는 이를 악물었다.“네가 얌전히 내 말에 따르기만 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왜 이 사단을 만든 거야! 도대체 왜 채연이를 모함한 거야? 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냐고!”그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거침없이 그녀를 밀쳐냈다.“윽!”침대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가 울릴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다시 그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아니라고! 그런 짓 하지 않았어! 거짓말도, 모함도 한 적 없어!”“거짓말이 아니라고?”박진성이 걸음을 멈췄고 그의 시선엔 냉소와 혐오감만 가득했다.“네가 사주한 공범이 방금 죄책감을 못 이기고 직접 찾아와서 이실직고했는데도 너는 태연하게 끝까지 잡아떼는 거야?”‘공범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곧이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박진성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쾅!”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찬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이 말했던 공범은 대체 누구일까? 내가 뭘 속였다는 거지?’“민여진 씨!”문이 열리며 서원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서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께서 이렇게 만든 거예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박진성의 머릿속에는 오직 문채연의 안위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녀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사흘이 지날 동안 민여진은 박진성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박진성은 서원까지 회사로 불러들였다.서원을 대신해서 온 사람은 간병인이었다.새로 온 간병인은 민여진이 시각장애가 있고 돌봐 줄 사람조차 없다는 걸 알고는 더욱 거칠게 대했다. 음식을 가져와서는 자기 배부터 채운 뒤, 반쯤 남은 것을 건네며 먹으라고 했다.민여진은 간병인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 그녀가 건네는 음식을 밀쳐냈다.“어이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서 음식까지 가려 드시겠다? 정나미가 떨어지긴 했어도, 아직 여진 씨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역겹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는데...”간병인은 빈정대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가진 것도 없고 부모도 없는 주제에 누가 돌봐 주기라도 하면 감지덕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디서 감히 입맛을 따져?”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간병인은 속에 쌓아 둔 화풀이를 민여진에게 쏟아냈다.“안 돼! 이거 다 먹어! 나중에 박 대표님께서 내가 밥을 굶겼다고 오해라도 하게 되면 어떡해? 그러니까 남김없이 먹으라고!”간병인은 억지로 밥그릇을 들이밀었다.민여진은 필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저항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휘두른 손끝에 밥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야! 미친년이 감히 그릇을 내팽개쳐?”간병인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바닥에 쏟아진 찌꺼기를 집어 민여진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으려 했다.바로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박진성이었다. 그는 점잖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늘했다.간병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급히 손을 거두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박... 박 대표님...”그녀는 움찔거리며 박진성을 올려다봤다.‘이렇게 비참해 보여도 여진 씨는 박 대표님이 직접 맡긴 환자였다. 괜히 일이 커질까 두
“그만해!”박진성이 성큼 다가와 민여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이제 그만하면 됐어! 불쌍한 척하는 데 온 힘을 다 쏟네? 민여진,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가증스러워... 박진성, 넌 나를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아직도 내가 가식 떠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민여진의 상처는 칼로 도려내듯 쓰라렸다. 손이 떨릴 정도로 통증이 심했지만, 아직 그의 명령을 다 따르지 못했다는 생각에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제 손 좀 놔 줄래?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남았잖아.”“정리는 개뿔!”박진성이 거칠게 발길질하자, 쓰레기통이 넘어졌고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간병인을 향해 차갑게 명령했다.“직접 손으로 치우세요. 피 흘리기 전까진 멈추지 말라고요!”간병인의 얼굴이 순간 새파래졌다.그러나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박진성은 이미 민여진을 강제로 끌고 치료실로 향하고 있었다.민여진이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 거칠게 눌러 앉히더니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내가 지금 널 살려주려는 건 줄 알아? 착각하지 마! 민여진, 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야. 네가 치러야 할 대가가 남아 있으니까.”‘치러야 할 대가? 그게 무슨 뜻이지?’순간 민여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진성이 비웃음을 흘렸다.“이제야 무서운가 보네?”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박진성, 난 이미 네가 시키는 대로 했어. 제발... 현수 씨는 건드리지 마.”박진성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조여왔다.‘결국 방현수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였어? 그놈이 다칠까 봐 벌벌 떠는 거였어?’화가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박진성은 손아귀를 더욱 세게 쥐었다. 깨진 조각이 살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아픔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그는
진시우는 말을 이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 정말 하나같이 고집이 세네요. 한 사람은 어떻게든 가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 목숨이 무슨 장난인 줄 아세요?”민여진은 낮에 들은 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박진성이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임재윤의 연락 두절이 너무나도 우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두 남자는 성격부터 행동 방식까지 완전히 달랐다. 박진성은 독선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강제하던 인물이었고, 임재윤은 온화하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만약 그녀가 조현준에게 전화하는 것을 박진성이 목격했다면, 그는 폭력적으로 핸드폰을 빼앗은 뒤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임재윤은 그러지 않았다.기분이 상했을지라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며 자신의 기분을 추슬렀다.어쩌면 임재윤은 정말로 어제 전기 배전함을 수리하다 감기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였고 깨어나자마자 민여진이 생각나 안진 마을로 오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있던 민여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물었다.“임재윤 씨는 괜찮아요?”“별로 좋지는 않아요.”진시우는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임재윤은 원래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자주 졌어요. 게다가 고열에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상태가 더 나빠 진 거죠. 오늘 쓰러지지 않았다면 여기 온 사람은 제가 아니라 임재윤이였겠죠.”진시우의 말에 민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옷을 벗어 자신에게 걸쳐주던 임재윤의 모습이 떠올랐다.그 추운 날,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를 버텼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여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제때 왔으니 다행이지. 이 추운 날씨에 계속 밖에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말 안 해도 알죠?”진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제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진시우 씨
민여진은 임재윤이 비록 자신의 전화번호를 몰랐다고는 하지만, 마을 이장이나 주민들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고 진시우의 인맥을 생각하면 연락처를 못 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게 아니라면, 오는 길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늦어지는 거로 생각하며 민여진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잠시 후 휴게실 문이 열렸다. 민여진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들어온 건 마을 사람이었다.“여진아, 9시야.”“늦게까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민여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약봉지를 들고 나섰다.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마을 사람이 말했다.“같은 길이니 내가 데려다줄게. 이런 날씨에 혼자 가기 힘들 거야.”민여진은 잠시 망설이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먼저 가세요.”“너 설마 더 기다릴 생각인 거야?”마을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너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기다렸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안 오면 그건 분명히 바람맞힌 거야. 아무리 날씨가 이렇다고는 해도, 계속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온다고 했으니 꼭 올 거예요. 그 사람은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그녀는 추운 날 옷까지 벗어준 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안 오는 줄 알고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면 어떡해?’민여진은 이런 추운 날에 임재윤이 헛걸음이라 할까 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눈이 점점 더 심하게 오고 있고 날도 추우니까 길어도 30분만 더 기다려. 그 이상은 위험해.”“네. 걱정하지 마세요. 10분만, 정말 10분만 더 기다릴게요.”마을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민여진은 문 앞에 웅크려 앉았다. 처마가 눈은 많이 막아주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져 그녀는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조금만 더, 조
“아이고.”조인화가 죽을 마시며 의아한 듯 말했다.“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다쳤다고? 무슨 일이야? 저런 사람들은 항상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지 않나? 설마 암 같은 건 아니겠지?”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파져 오는 마음에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마셨다.이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덮어졌고 조인화는 오락프로에 빠져 웃음꽃을 피웠다.아침 식사를 마친 민여진은 얼굴을 씻은 뒤 도구를 들고 말했다.“마당에 잠깐 다녀올게요.”눈이 내린 마당에는 정리할 게 별로 없을 터였지만, 민지연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조인화는 만류하지 못하고 그저 안전에 유의하라고 재삼 당부했다.“정말 할 일이 없으면 이내 들어와. 밖이 너무 추워서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오늘 일기예보 보니까 하루 종일 눈 온다던데.”“네, 조심할게요.”민여진은 특히 조심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먼저 쌓인 눈을 치우고, 마당에 놓인 물건들을 가능한 한 모두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일을 하다 보니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차츰 몸에서 땀이 나기까지 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민여진은 조인화가 준비해 준 약을 가지고 교회로 향했다.교회 안에는 마을 사람들만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사람을 설득해 휴게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소파에 앉아 두 시간을 기다리다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다시 앉아 기다렸다.그러던 중 누군가 문을 열고 물었다.“여진아, 누구 기다리니? 진시우 씨 일행은 눈 오는 날엔 오지 않아.”민여진은 어색해하며 말했다.“알아요.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거예요.”“다른 사람?”마을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마. 우리도 저녁이면 문 닫고 가야 해.”“네, 너무 늦지는 않을 거예요.”민여진은 임재윤이 말한 오후는 어쩌면 네시나 다섯 시일 수
민여진은 마당 왼쪽에 있는 물탱크 쪽으로 가서 벽을 더듬으며 말했다.“여기 있을 거예요.”임재윤이 휴대전화 불빛을 비추자 바로 전기 배전함이 보였다.전기 배전함을 열어 살펴보던 임재윤은 단순한 누전이 아니라 조금 복잡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다행히 공구 상자가 근처에 놓여 있었다.“휴대전화 좀 들어줄 수 있나요?”그는 불빛을 비춰줄 사람이 필요했다.“네.”민여진이 휴대전화를 받아 들자, 임재윤이 적당한 위치로 조정해 주었다.마당에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지만, 추위는 여전히 그녀를 떨게 했다. 갑자기 임재윤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남자의 체온이 배어 있는 외투가 그녀의 몸을 감싸자, 순간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하지만 민여진은 임재윤도 옷을 얼마 입지 않은 것 같아 머뭇거리며 말했다.“임재윤 씨, 이럴 거 없어요.”임재윤은 고집스럽게 단추까지 채워준 뒤에야 작업을 계속했다.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민여진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백화점에서 끝내지 못한 대화가 떠올랐다.‘그때 임재윤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걸까?’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당시 임재윤이 일부러 다가온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착각인 건지 알 수 없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백화점에서 임재윤 씨가 다가오셨죠?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거예요?”그 순간, 공구를 다루는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조인화가 문을 열며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고 외치자, 임재윤은 작업을 마치고 민여진의 휴대전화를 돌려받아 글을 입력했다.“내일 오후, 교회 휴게실에서 만나요. 그때 말할게요.”침대에 누운 민여진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었길래 내일이 되어야만 말할 수 있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마치 큰 결심을 내리기라도 하듯, 그 말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한 채 민여진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8시였다.민여진이 새로 산 옷을
임재윤은 길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로 ‘알겠습니다’라는 음성을 재생했다.집에 도착하자,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민여진이 차 문을 열자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그녀의 손목을 스쳤다.세 사람은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조인화는 숯을 가져다 임재윤의 방에 화로를 먼저 설치했고, 민여진은 이불을 가져와 임재윤의 침대를 정리하며 이불 커버를 씌웠다.그녀는 눈에 젖은 외투를 벗어 던진 후 분주히 이리저리 움직였다.임재윤은 주변을 둘러보던 중 책상 위에 놓인 사진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 여자와 한 명의 소년,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카메라를 향해 브이 사인을 하며 환하게 웃는 소녀는 사진 속 모든 빛을 독차지한 듯 눈부셨다. 그 옆의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지 못한 감정을 눈가에 묻어두고 있었다.임재윤은 손가락 끝으로 소녀가 있는 위치를 살며시 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임재윤 씨, 잠깐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 이불 모서리 좀 잡아주세요.”민여진이 부르는 소리에 임재윤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액자를 내려놓고 이불 모서리를 잡아주러 갔지만, 민여진은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무슨 일 있으세요?”“아니에요.”임재윤은 글을 입력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민여진 씨의 열일곱, 여덟 살 때 사진을 봤어요. 그땐 잘 웃었네요.”“사진이요?”민여진은 기억이 나지 않아 되물었다.“무슨 사진이요?”임재윤이 설명했다.“가족사진 같은 거예요. 한 여자는 젊은 시절의 조인화 씨로 보이고, 소녀는 민여진 씨, 소년은 조현준 씨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한 분은 민여진 씨의 어머니인 것 같던데요. 많이 닮았더군요.”조현준의 방에 그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민여진은 멍하니 있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디 있어요?”임재윤이 사진을 건네주자, 민여진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세게 문지르며 두 눈을 크게 떠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그렇다면 사진 속의 그 남자가 누구든 문채연은 상관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민여진이었다.그전까지 박진성의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 온갖 수를 다 썼지만 소용없었는데, 민여진이 안진에 있다니.문채연은 살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밖으로 나가 라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건 싫어요.”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머리는 하얘졌다. 조현준에 대한 그의 반감은 차가운 기계음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다.민여진은 마음이 조여와 입술을 깨물었다.“왜... 왜요? 현준 오빠를 아직 못 봐서 그래요. 나중에 한 번 만나보시면 좋을 거예요. 정말 좋은 사람인데...”“아니요.”임재윤은 민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민여진 씨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을 텐데요.”‘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임재윤의 말에 그녀는 순간 답을 알 것도 같았지만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설마, 아닐 거야.’조현준이 그녀를 좋아하는 건 과거의 그녀를 알았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라지만 임재윤은 달랐다. 그들은 고작 며칠 안 된 친구 사이일 뿐,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건 너무 황당했다.생각을 접은 민여진은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제가 알고 싶지 않을 거라고?”임재윤이 글을 쳤다.“그럼 알고 싶어요?”그의 시선은 민여진의 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민여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네.”그녀의 대답을 듣고도 임재윤은 즉각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가왔다.뜨거운 숨결이 민여진의 속눈썹에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입술이 떨렸고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하지만 임재윤은 마치 처음부터 다가온 적도, 그런 생각도 없었던 사람처럼 미련 없이 물러섰다.“여진아, 임재윤 씨, 너무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안에서 이것저것 고르느라 시간
라미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문채연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분명히 박진성을 봤고, 양성에서 안진까지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어떻게 된 거지?’라미연은 문채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또 불을 지폈다.“채연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 여자에게 내줄 셈이야? 민여진은 그저 너랑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고, 널 공식 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이제는 네 남자까지 빼앗으려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너 이러다 다 빼앗길 수도 있다고!”힘들게 지내던 과거가 떠오르자, 문채연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미연아, 고마워.”문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올해 신상으로 나온 핸드백, 사람을 시켜 보내줄게.”라미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양했다.“됐어. 친구 사이에 뭘 이런 것 가지고.”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던 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게 변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는 마치 칼날처럼 문채연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왜? 넌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하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데?’반면 문채연은 이정화가 그 두 해 동안 함께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안 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고 몇 번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었다.‘이정화와의 관계도 끝났는데 박진성마저 잃는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문채연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갔다.박진성의 병세는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며 악화하여 며칠 내내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민여진의 일까지 더해져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문채연이 찾아가자, 서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의 머리가 임재윤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는 향수 냄새였지만, 오히려 민여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다만 애매한 이 자세가 불편했다.두 사람의 행동에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뭐야? 사귀는 사이였어? 요즘 세상에 왜 잘생긴 남자는 다 못생긴 여자랑 붙는지 모르겠네!”여자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떠났다.여자의 말에 임재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민여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익숙해요.”민여진은 임재윤이 자신의 마음이 다친 건 아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스러웠다.임재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민여진 씨가 저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압력으로 글을 쓰는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진심이 어려 보였다.어쩌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민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현준 오빠랑 똑같이 그래요? 현준 오빠는 원래 사람을 잘 달래주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는데, 임재윤 씨는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봐서 제 얼굴이 신기한 건가요?”임재윤은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리고.”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자를 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다른 한편.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라미연은 민여진과 임재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저거 민여진 아니야?’깜짝 놀란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문채연에게 사진과 함께 음성을 보냈다.“채연아, 방금 너한테 사진 보냈는데 봤어? 이 여자 민여진 아니야?”음성을 보내고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라미연은 그제야 민여진 옆에 한 남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등만 찍혀 있었는데 체형으로 보니 박진성인
“하지만...”민여진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짧은 시간 안에는 갚기 어려울 거예요.”민여진에게는 자립할 능력도,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짐이 될 뿐이었다.“그냥 돈을 받아주세요. 현준 오빠한테 빚진 건 언제든 갚을 수 있지만, 임재윤 씨는 휴양지 건설이 끝나면 떠나실 거잖아요. 기간이 너무 짧아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평생 안진 마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었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임재윤은 받지 않고 물었다.“민여진 씨의 뜻은 나더러 안진 마을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건가요?”차가운 기계음 소리는 임재윤이 지금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민여진이 잠깐 멈칫하자, 임재윤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단 가지고 계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갚을 수 있을 거예요.”결국 민여진은 그 돈을 임재윤한테 주지 못한 채 다시 조인화에게 가져갔다.“왜 다시 갖고 왔어? 임재윤 씨가 뭐라고 했는데?”“빌려주는 거래요.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조인화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앞으로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순진한 민여진만이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여기며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었다.“갚지 못하면 어쩌려고?”민여진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임재윤 씨의 말로는, 떠나기 전에 내가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몸으로 갚으라는 거야?”민여진은 흠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이모, 장난치지 마세요.”조인화는 웃으며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아이고, 이 바보.”잠시 후, 포장 되어있는 봉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임재윤이 봉투를 받아 든 뒤, 세 사람은 가계를 나왔다.밖으로 나가던 중 다른 한 가계에서 조인화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