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빛내던 남자는 이내 고민하며 말했다.“홍연이가 가면은 벗기지 말랬어.”“... 괜찮으니까 벗기고... 키스해줘요...”입안에 가득한 피 때문에 목소리가 더욱더 떨려오자 그게 더 애교 같아 보였다.목소리가 이렇게 좋은데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쁠까 싶어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남자는 가면 아래에 감춰진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가면을 벗겨버렸다.“그럼 이쁜이 얼굴 한 번 볼까?”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벗긴 가면이었건만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이 흉측하기 그지없어서 남자는 깜짝 놀라며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X발! 저 더러운 건 뭐야!”모든 흥분이 싹 가신 남자는 벌벌 떨며 민여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지금 나랑 장난해? 나한테 저런 흉측한 걸 갖다 줘? 안 만지길 잘했지, 평생 잠도 못 잘뻔했잖아. 나 너 바로 신고할 거니까 각오해!”화가 난 남자가 베란다로 나가 홍연과 말다툼을 할 때 침대 협탁에서 뾰족한 물건 하나를 집어 든 민여진은 빠르게 그걸 손안에 감췄다.예리한 물건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민여진은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와 한 발 한 발 입구로 다가가더니 순식간에 문을 열어젖히고 달려나갔다.하지만 강력한 약효가 고통을 점차 뒤덮고 있어 달려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민여진은 한 남자의 품으로 고꾸라졌다.그에 당황한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도와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여진 씨... 잠깐만...”한편 민여진에게 안겨버린 서원은 옆에서 느껴지는 박진성의 따가운 눈초리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호텔 방에서 나오더니 그대로 서원에게 안겨 도와달라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온종일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하여 잠도 못 자고 민여진을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실명한 상태로 무슨 변이라도 당했을까 봐 폭우도 뚫고 달려왔는데.잠깐 옷 갈아입으러 들어간 새에 저런 야한 옷을 입고 서원에게 안겨있는 민여진을 보고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는가.야
민여진의 말에 이성이 끊겨버린 박진성은 옆에 놓인 양동이를 들어 그녀에게 물을 퍼부었다.온몸을 뒤덮는 한기에 민여진이 정신을 차리려 하자 박진성은 다시 그를 잡고 물었다.“정신 안 차려?! 내가 네 남잔데 나 말고 누굴 원하는 거야! 너 이렇게 천박한 애였어? 다른 사람 손이 닿아도 상관없는 거야?”‘네 남자’라는 말에 민여진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2년 동안 몸과 마음 다 바쳐 사랑한 결과가 이거라고 몸소 보여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박진성에게 남은 건 이제 두려움뿐이라 민여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에 받쳐 말했다.“그래, 너 말고 다른 남자는 다 괜찮아. 그게 누가 됐든 상관없어. 박진성 너만 아니면 돼.”몸이 나른해지는 데도 민여진은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말을 끝마쳤다.“너!”말이 끝나자마자 손이 들리는 게 느껴져 민여진은 뺨을 맞을 줄 알고 눈을 감았는데 오래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미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 거야. 똑바로 대답 안 하면 평생 다른 남자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을 거야.”민여진의 낯빛이 점차 창백해질 때 방문이 열리더니 아까 그 남자가 아랫도리만 입은 채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러다 민여진을 발견한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이 년이 언제 여기까지 나왔어? 도망간 줄 알았잖아! 얼른 들어와!”민여진의 팔을 낚아챈 남자는 자신이 손해라도 본다는 투로 말했다.“생긴 건 별론데 그래도 할 수만 있으면 됐지 뭐. 싸니까 내가 받아주는 거야.”남자가 힘을 주기도 전에 박진성이 그의 손을 뿌리치자 술김에 고개를 들어본 남자는 상대방도 남자인 것에 놀라며 물었다.“설마 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어쩌나, 내가 만 원 주고 산 거라서 오늘 밤은 내 건데. 원하면 줄 서서...”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 파열음이 들려왔다.옆에 있던 경호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두 눈이 빨개진 박진성이 먼저 주먹을 휘둘러
그 한 번의 도발에 제대로 긁힌 박진성은 민여진의 손목을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쥐었다.이글거리는 두 눈만 보면 당장이라도 민여진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나 도발하려는 거면 성공했어 민여진.”민여진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박진성은 그녀를 끌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그리고는 그녀를 딱딱한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에 힘겹게 눈을 떠보니 머리 위로 찬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박진성은 물을 최대로 틀어놓고 그걸 민여진을 향해 쏘아대고 있었다.한기가 감도는 몸에 민여진은 덜덜 떨며 그에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그만... 그만해 박진성!”“그만?”민여진의 말에 코웃음을 친 박진성은 아예 그녀의 턱을 추켜올리고는 얼굴을 향해 물을 뿌렸다.“지금 네 더러운 몸 씻겨주고 있는 거잖아. 이래야 조금이라도 깨끗해지지. 다른 남자의 역겨운 냄새가 나한테도 옮으면 어떡해.”박진성의 손길이 닿았으니 더러워지긴 한 것 같아서 민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반항을 하지 않으니 그것대로 기분 나빴던 박진성은 민여진이 걸치고 있던 천 쪼가리마저 찢어버리려 했다.“그만 좀 해!”그제야 민여진이 소리치며 자신의 몸을 감쌌다.“다른 남자들한테는 멋대로 몸 내주면서 왜 내 앞에서만 고고한 척이야! 넌 이미 더러워진 몸이야. 지금 이렇게 비싸게 굴어봤자 아무 쓸모도 없다고!”작은 몸이 발버둥 치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던 박진성은 그대로 민여진의 치마를 찢어버렸다.그런데 그의 눈앞에 드러난 건 아무런 흔적도 없는 깨끗하기 그지없는 몸이었다.그에 당황한 박진성은 손을 떨며 샤워기를 내려놓았다.남자의 손이 닿았다면 이럴 리가 없는데...“손... 안 댄 거야?”얼음장같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누워있던 민여진은 온몸을 뒤덮는 한기에 손으로 어떻게든 몸을 감쌌다.속눈썹까지 떨릴 정도의 추위에 그녀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에 기쁘면서도 화가 났던 박진성은 다시 민여진을 잡고 따져
서원의 뒤를 따라가던 두 명의 경호원은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대표님 왜 저러셔? 눈먼 여자 하나 잃은 걸로 저렇게까지 화내시고 비 오는 데 찾기까지 하시다니. 저 여자 응급실 들어간 뒤로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만 계시잖아.”“설마 저 얼굴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걱정은 해도 좋아한다니, 그건 너무했지.”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다른 한 명이 답을 했다.“대표님이랑 저 여자는 하늘과 땅 차인데 아예 차원이 다르지. 저런 못생긴 여자한테는 땅이라는 말도 아까워. 그냥...”“말 다 했습니까!”그때 갑자기 입을 열며 소리치는 서원에 경호원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평소에 온화하기만 하던 서원이 화를 내니 그 위압감이 더한 것 같았다.한편 자리에 주저앉은 서원은 자꾸만 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이 떠올라서 괴로워졌다.처음에는 눈이 먼 여자가 얼굴까지 망가졌다는 말에 드는 연민이 전부였는데 이제 보니 모든 비극의 중심에 여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 여자를 향한 박진성의 마음도 아주 복잡해 보였다.그렇게 걱정하면서도 못된 말로 상처를 주고 늘 이성적이던 분이 민여진의 도발은 분간하지 못하고 화를 내다가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낸 게 서원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던 그는 조용히 그들과 함께 수술실에 파란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민여진이 병실로 옮겨지자 박진성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몸에 아주 큰 해가 되는 약을 먹은 상태에서 찬물에 몸을 담갔어요. 저런 몸으로 그걸 버텨낼 수나 있었겠습니까? 가족이 죽을 뻔했는데 보호자가 돼서 도대체 뭘 한 겁니까!”“젊은 나이에 몸이 이렇게 약한 사람은 저도 처음 봐요. 한 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그때는 수술로도 못 살려요.”미간을 찌푸리던 간호사가 자리를 뜨려 하자 박진성은 그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몸에 큰 해가 되는 약이란 게 뭔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호편주라고 기를 허하게 만드는 술
박진성은 회피하지 않고 이정화 앞에 마주 앉았다.“그 사람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세요?”“누가 민여진한테 약을 먹여서 강간까지 당할뻔했어요. 몸에 치명적인 해가 되는 그 약 때문에 방금 죽다 살아났다고요. 좀 전에 수술실에서 나왔고 아직도 의식을 못 찾는 상태예요.”“뭐라고?!”박진성이 애써 화를 참으며 사실을 서술하자 이정화도 깜짝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요즘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어!”“어머니가 모르신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에요.”날이 선 박진성의 말투에 이정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지금 내 탓이라고 나한테 화내는 거야? 걔는 너랑 채연이 사이를 갈라놓고 또 채연이 다리도 다치게 한 애야. 도대체 왜 걔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뭐 그럼 내가 내쫓기 전에 집도 해주고 간병인도 붙여줬어야 하는 거니?”“어머니, 민여진이 사실은...”“진성 씨!”모든 걸 다 털어놓으려는 듯한 박진성의 말에 문채연은 다급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여기서 사실을 말하면 문채연의 처지가 곤란해지기에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다.가까스로 진정한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머니 탓하지 말이요. 그냥 다 내 탓 해요. 여진 씨 안 잡은 내 잘못이죠. 여진 씨랑 당신 사이 방해한 내가 잘못한 거예요.”“채연아, 무슨 그럴 말을 해.”문채연의 말에 가슴이 아파 난 이정화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민여진 씨가 그런 일을 당한 건 내 잘못 맞아. 그런데 너는, 정말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거야?”“채연이가 널 구해준 뒤로 나는 보상만 해주려고 했어. 네가 2년 동안 채연이를 집에 데려오면서 날 감동시킨 거잖아. 그렇게 받아낸 허락인데, 내가 어떻게 인정한 며느리인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도 처자식 버리는 네 아빠 닮아서 다른 여자랑 살림 차리겠다는 거야?”안 좋은 일을 꺼내자 이정화도 더는 우아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말에 기운이 빠진 박진성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
“걔는 나 못 떠나요.”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의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예전에는 민여진이 박진성을 떠나지 못했던 게 맞았다.매일 저녁 박진성만을 기다리며 전화도 몇 통씩하고 박진성이 귀찮아할 때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던 민여진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나가라는 말 한마디에 미련 없이 떠나고 그러다가 누가 약을 먹여도 민여진은 박진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둘 사이에 일어난 그 변화들이 박진성을 불안하게 했다.“정신 차려 박진성!”머리가 어지러웠던 이정화가 소리를 치자 잠시 당황하던 문채연이 다급히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어머니, 괜찮으세요?”“진성 씨, 그만하고 나가요. 어머니 몸도 안 좋으신데 이러다가 입원까지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말을 하고 난 문채연도 불안감에 휩싸였다.평소에는 누구보다 이정화의 건강을 걱정하던 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그녀에게 반기까지 드니 민여진이라는 존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전 이만 나갈게요. 어머니 화나게 한 건 제 잘못 맞으니까 해 뜰 때까지 밖에 서 있을 게요. 하지만 제 대답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희 일에 그만 신경 쓰시고 엄마 몸부터 챙기세요.”말을 마친 박진성이 밖으로 나가자 문채연은 이정화를 방으로 모셨다.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아래를 보니 정말 박진성이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쌩쌩 부는 날에 오직 민여진을 위해 그렇게 서 있었다.민여진을 박진성의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정화를 끌어들인 건데 오히려 박진성의 결심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 두려웠던 문채연은 다급히 옷을 가지고 내려갔다.“밖에 추우니까 옷이라도 걸치고 있어요. 진성 씨까지 아프면 나 진짜 마음 아플 것 같아서 그래요.”박진성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한 채 문채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민여진 때문에 다리 다친 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네가 말한 거야?”갑자기 들어온 남자의 질문에 문채연은 당황하기
별장을 나설 때 민여진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분명 드디어 자신에게서 벗어나 방현수를 찾을 수 있다고 좋아했을 것이다.하지만 재수 없게도 방현수에게 연락도 하기 전에 이상한 사람들에게 잡혔을 뿐이지.가슴이 이렇게나 먹먹한데도 박진성은 웃음이 나왔다.칼바람과 함께 전해지는 추위도 차가워진 심장보다는 덜한 것 같았다.온몸에 뿌리를 내린 한기에 박진성은 입술을 덜덜 떨었다.끓어오르는 분노를 눈에 가득 담은 박진성은 당장이라도 큰일을 저지를 사람 같아 보였다.“진성 씨, 괜찮아요?”민여진이 떠나길 원했다는 말을 듣고 이런 표정을 짓는 박진성에 문채연 또한 화가 치밀어올랐다.“괜찮아.”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던 박진성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냥 전처럼 차갑고 매정한 눈빛이 전부였다.“얼른 들어가. 너 몸도 안 좋은데 추운 데 있다가 더 아파.”“같이 들어갈 거죠?”문채연은 박진성의 마음에 정말 자신이 있는지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그를 시험해보려 했다.“민여진 씨가 그렇게 가고 싶다는 데 왜 안 놔주는 거예요? 당신이 빚진 건 두 눈뿐이잖아요. 그런데 민여진 씨가 보상을 바라지 않는데 왜 굳이 옆에 두냐고요. 당신한텐 내가 있잖아요. 난 항상 당신 옆에 있을 거예요.”문채연은 이내 박진성의 손을 잡으며 발그스레한 얼굴로 말했다.“난 영원히 당신 안 떠날 거예요.”바람을 너무 오래 맞아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가, 고백하는 건 문채연인데 박진성의 머릿속에는 민여진뿐이었다.똑같은 말을 민여진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오늘날의 민여진은 방현수를 위해서, 고작 방현수 따위를 위해서 박진성을 버리려 하고 있다.“들어가.”“엄마한테 이미 한 말은 지켜야지.”“진성 씨...”“들어가 얼른.”정면적인 대답은 회피했지만 박진성이 전하려는 의도는 명백했다.그 말을 듣는 문채연도 표정이 얼어버렸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럼... 난 들어가서 어머니 좀 말려볼 테니까 몸조심해
“저 좀 더 쉬고 싶어요.”민여진이 대답을 피한다는 걸 알아챈 서원은 몇 마디 당부만을 남기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그가 병실 문을 닫고 나올 때 박진성이 온몸으로 한기를 뿜어내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있었다.어제 옷차림 그대로 다시 나타난 박진성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고 눈도 빨간 것이 꼭 어디 아픈 사람 같았다.“대표님.”“민여진은 깨어났어?”“네, 방금요.”오자마자 민여진의 안부부터 묻는 박진성이었지만 그런 그가 걱정되었던 서원은 한마디 더 할 수밖에 없었다.“혹시 어제 못 주무셨어요? 어디 아프신 분 같아요. 진료 예약 잡을까요?”“괜찮아. 난 민여진 좀 보고 올게.”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들어가던 박진성은 눈을 감고 있는 민여진을 보고는 바로 문을 닫아주었다.“자?”민여진이 안 잔다는 걸 알고 물은 거지만 그녀의 대답이 들리지 않아도 박진성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이틀 밤을 지새운 채로 가을밤의 바람까지 고스란히 맞고 나니 몸살이 난 것만 같았던 그는 겉옷을 벗고 민여진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좁은 1인용 침대에 굳이 올라가 민여진을 품에 안자 박진성은 그제야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에 남자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게 된 민여진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그녀의 심장도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코끝으로 전해지는 박진성과 문채연의 향기에 민여진은 몸을 떨었다.문채연과 한번 하고 나서 또 자신에게로 오는 박진성의 저의를 몰라서, 도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어이가 없어서 모든 게 역겨워 났던 민여진은 더는 자는 척을 할 수가 없어 박진성을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곧이어 눈을 번쩍 뜬 박진성이 화난 듯한 얼굴로 민여진을 바라보았다.“민여진, 나 지금 많이 참고 있으니까 나 열 받게 하지 마.”차가운 음성에는 협박의 의미가 다분히 담겨있었다.그에 민여진도 하는 수 없이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하지만 그녀는 박진성이 화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분명 죽다 살아난 건 민여진인데 왜 박진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
“그래. 조금 늦게 돌아오는 것도 좋겠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다 막혔거든. 진시우 씨와 임재윤 씨가 거기 있어서 나도 걱정은 안 해.”조인화는 민여진더러 안전에 신경 쓰고 사람 많은 데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한참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민여진은 침대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 조현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 여진아.”너무 빠른 응답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현준 오빠, 왜 이렇게 빨리 받아요?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조현준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몇 시간 자고 지금은 회사로 들어가는 중이야.”민여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죄송해요.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도 바쁜데 피곤하겠어요.”조현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진아, 전화한 이유가 단지 사과하려는 거라면, 차라리 이 전화를 받지 말 걸 그랬어.”민여진도 함께 웃었다. 그녀는 조현준의 친절함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먹먹해졌다.“여진아,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지?”조현준이 물었다.“내가 뭐 도와줄 거라도 있어?”“역시 현준 오빠는 못 속이겠네요.”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워져 있었다.비록 오늘의 오해는 풀렸지만, 민여진은 임재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임재윤이라는 이름과 말을 못 한다는 것 외에 가족 상황은 어떠한지, 집은 어디에 있는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등등 임재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심지어 민여진은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매번 그녀한테 불리한 입장을 안겨주었다.“현준 오빠, 사실 두 사람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서요.”민여진은 긴장하며 휴대전화를 꽉 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했다.“오빠도 동진 출신이시잖아요. 진시우라는 사람을 알아요?”“진시우?”조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잠시만, 동료에게 물어볼게.”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잇는 조현
박진성의 이름과 그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민여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진시우는 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됐어요.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억지로 말하진 마세요.”“고마워요.”민여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때 간호사실의 한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문채연 씨가 오셨을 때 제가 임재윤 씨 병실을 알려드렸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접 가서 말씀드릴까요?”간호 실장이 답했다.“괜찮아요. 위층 간호사에게 알려주면 돼요.”“알겠어요.”목소리들이 점차 사그라들자, 민여진은 문채연이 있을 것 같아 다시 임재윤의 병실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입술을 깨물고 고민했다.이때, 진시우가 말을 꺼냈다.“민여진 씨, 호텔에서 좀 쉬다가 저녁에 오는 게 어때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의도치 않게 진시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민여진은 차 안에서 문득 의문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진시우 씨는 동진 사람이에요?”“그렇죠.”진시우는 태연하게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그런데 왜 안진까지 와서 리조트를 지을 생각을 하신 거예요? 너무 멀지 않아요?”“물론 멀긴 하죠. 하지만 저는 외동도 아니고 가족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대우를 받는 위치도 아니에요. 동진의 사업은 대부분 형이 쥐고 있으니, 생계를 위해서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죠.”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구나.’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또 물었다.“그럼, 임재윤 씨는요?”진시우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민여진 씨, 혹시 임재윤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렇게 돌려서 물어보는 건 아니죠?”진시우의 말에 당황한 민여진은 허둥지둥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무심코 여쭤본 거예요.”진시우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임재윤도 동진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제가 회사를 나와 독립한다고 그러니까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