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니, 나 눈 안 멀었어. 네 목에 있는 흔적 아주 잘 보인다고.”화를 내자 갑자기 아파오는 머리에 이정화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내 아들 문제라는 거 아니까 아들 관리 똑바로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당장 여기서 나가! 오늘 이후로는 우리 진성이랑 연락도 하지 말고!”“여자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내연녀인 걸 알면서 어쩜 그렇게 떳떳해?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네 행동이 우리 채연이한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는 생각 안 해본 거야?”이정화는 민여진이 엄마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서 저런 모진 말을 들으니 민여진의 눈시울도 점차 빨개졌다.왜 다들 문채연만 감싸고 도는지, 민여진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그리고 박진성과는 아직까지 법적인 부부인데 내연녀라니, 민여진은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사모님, 오해예요. 저는 내연녀가 아니라 진성 씨랑은 법적인...”“어머니!”그때 문채연이 당황한 듯 갑자기 이정화를 부르며 말했다.“저는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진성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저잖아요. 저 여자는 그냥 잠깐 심심해서 만난 사람이니까 다시 저한테 돌아올 거에요. 이제 얼른 가요. 진성 씨가 알게 되면 저한테 뭐라고 할 것 같아요...”자꾸만 자신을 낮추는 문채연에 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이정화가 입을 열었다.“안돼! 남자가 돼서 이정도 책임감도 없는 건 말이 안 되지. 집에 여자를 숨기다니,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웃겠어. 우리 집안에 그런 치욕은 없어야 해.”다시금 민여진을 향한 이정화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진성이는 채연이 남편이야, 나도 채연이만 며느리로 받아들일 거고. 그러니까 다른 생각 말고 뺏을 생각도 말고 떠나. 뺏는다고 네가 가질 수도 없는 자리야. 말해, 얼마 주면 떠날 건지.”이정화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민여진은 누군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마치 자신의 뺨을 한 대 한 대 내리치며 이제 그만 꿈에서
그에 문채연은 말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에요... 여진 씨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성 씨를 너무 좋아해서... 전 용서하기로 했어요.”“저 여자 때문에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 용서라니, 어쩜 이렇게 착해.”이정화는 문채연을 감싸며 번뜩이는 눈으로 민여진을 쳐다보았다.“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을 파탄 내고 사람까지 다치게 해? 처음 봤을 때 너를 아주 좋아했는데, 네가 이런 애일 줄 몰랐네. 당장 나가!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예전엔 유일한 민여진의 편이 되어주던 이정화가 자신을 내치자 민여진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손을 떨었다.“죄송해요...”이렇게 싫어하는 존재가 되어버려서 죄송하다는 의미의 사과였다.민여진은 이 와중에도 얼굴이 망가져 버려서, 이정화가 자신이 2년 동안 함께 하던 문채연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다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런 일은 왜 저질렀어!”눈시울을 붉힌 민여진은 한마디 해명도 없이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하필 그때 민여진에게 핸드폰을 빌려준 서원이 밖으로 나가 통화를 하는 바람에 민여진이 나가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서원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박진성의 차도 별장 앞으로 오고 있었다.바로 별장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이정화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고 있는 문채연이 보였다.문채연은 돌아온 박진성을 보자마자 또 불쌍한 척을 하며 말했다.“진성 씨...”하지만 박진성은 그런 문채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민여진의 행방부터 물었다.“민여진은 어디 있어?”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인영에 조급해진 박진성이 2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이정화가 그를 말렸다.“거기 없으니까 올라갈 필요 없어!”숨을 고르던 이정화가 박진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회사에서 이렇게 급히 온 게 숨겨두던 여자 하나 때문이니? 너는 우리 집안을, 채연이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한 거야! 항상 이성적
박진성의 태도에 멈칫하던 이정화가 또 화를 내기 시작했다.“이미 떠났어. 여긴 너랑 채연이의 별장이야! 이런 곳에 다른 여자를 들이는 게 애초에 말이 안되지 않니? 진작 나가버렸어.”“갔다고요? 보이지도 않는 애한테 어떻게 나가라는 말을 하세요!”정처 없이 흔들리는 박진성의 동공에 이정화도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녀는 태연한 척 말을 이어나갔다.“보이지 않으면 뭐 어때? 바보도 아니고 다 성인인데 전화할 줄은 알겠지. 다른 사람 핸드폰 빌릴 수도 있고, 뭐 걔는 친구나 가족도 없대?”이정화의 말에 박진성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심장이 떨려왔다.친구나 가족이라니, 민여진에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유일한 가족인 엄마는 이미 죽었고 그나마 기대던 이정화까지 그녀를 버렸으며 방현수와는 박진성 때문에 억지로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그러니 그 성격에 밖에서 얼어 죽는다 해도 방현수에게는 절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이미 모든 걸 잃은 상태에서 눈까지 먼 그녀가 밖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먼저 집에 가세요. 전 일단 민여진부터 찾고 나중에 집으로 갈게요.”마음속에 두려움을 안은 채로 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박진성을 문채연이 또 불러세웠다.“진성 씨!”낯빛이 창백해진 문채연은 바로 박진성에게로 다가갔는데 잔뜩 긴장한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그깟 민여진이 뭐라고 이렇게 난리인지.“미안해요! 진성 씨가 내 탓이라고 할 거 알아요. 나는 막았는데 어머니가 꼭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어머니 몸도 안 좋으셔서 일단은 그냥 보내고 나중에 당신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이렇게 온 거예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이내 눈물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며 서원은 등골이 오싹해졌다.다정하고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연기에 도가 튼 사람인 것 같았다.“네 탓한 거 아니야.”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날에 민여진이 얇은 옷차림으로 바깥을 떠돌 생각에 한시가 급했던 박진성은 문채연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누군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민여진은 힘겹게 눈을 떴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밧줄로 묶여있어 움직일 수는 없었다.그때 물을 끼얹던 여자가 민여진을 아래 우로 훑어보며 말했다.“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왔어, 얼굴도 저 모양인데 몸도 바싹 말랐잖아. 이런 걸 좋아하는 손님이 어딨다고, 박 대표님도 너무하시네.”“누님, 이번에 대표님 도와드리면 대표님도 절대 안 잊으실 거에요.”“나도 돕고 싶지. 그런데 저 몰골을 봐, 돼지우리에 넣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얼굴이잖아.”한 손엔 담배를 든 채로 민여진 앞으로 다가간 홍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눈까지 멀었네.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여진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박 대표님이라는 걸 보니 박진성이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것 같았는데 놔줄 때도 그냥 놔주는 법 없이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려 하는 것 같았다.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싫으면 이런 방법을 생각해낼까 싶어 민여진은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자세를 낮춘 홍연이 민여진의 옷을 벗기자 그녀는 당황하게 몸을 비틀었다.“뭐 하는 거야!”“아!”하지만 두 팔이 다 묶여있어 몸이 자유롭지 못했던 민여진은 실수로 홍연을 차버리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치마가 더럽혀진 홍연은 화가 치밀어올라 옆에 있던 남자들에게 눈짓을 했다.남자들이 민여진의 머리채를 잡자 홍연은 그녀가 기절할 때까지 뺨을 때렸다.“됐어. 또 기절하면 돈만 더 깎이지.”그제야 화가 풀린 홍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그래도 목소리는 좋으니까 옷 갈아입히고 가면 씌워서 내보내자. 돈은 얼마 없으면서 밝히기만 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테니까. 이 일은 내가 맡을 테니까 대표님한테 앞으로 우리 일 좀 잘 봐달라고 말해줘.”“당연하죠!”“얘 옷부터 갈아입혀.”민여진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뺨을 맞았지만 의식은 남아있어 그들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른 눈물이 상처에 닿자 안 그래도 아픈 얼굴이 더 아려왔다.옷을 갈아입힌 남자들
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빛내던 남자는 이내 고민하며 말했다.“홍연이가 가면은 벗기지 말랬어.”“... 괜찮으니까 벗기고... 키스해줘요...”입안에 가득한 피 때문에 목소리가 더욱더 떨려오자 그게 더 애교 같아 보였다.목소리가 이렇게 좋은데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쁠까 싶어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남자는 가면 아래에 감춰진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가면을 벗겨버렸다.“그럼 이쁜이 얼굴 한 번 볼까?”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벗긴 가면이었건만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이 흉측하기 그지없어서 남자는 깜짝 놀라며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X발! 저 더러운 건 뭐야!”모든 흥분이 싹 가신 남자는 벌벌 떨며 민여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지금 나랑 장난해? 나한테 저런 흉측한 걸 갖다 줘? 안 만지길 잘했지, 평생 잠도 못 잘뻔했잖아. 나 너 바로 신고할 거니까 각오해!”화가 난 남자가 베란다로 나가 홍연과 말다툼을 할 때 침대 협탁에서 뾰족한 물건 하나를 집어 든 민여진은 빠르게 그걸 손안에 감췄다.예리한 물건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민여진은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와 한 발 한 발 입구로 다가가더니 순식간에 문을 열어젖히고 달려나갔다.하지만 강력한 약효가 고통을 점차 뒤덮고 있어 달려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민여진은 한 남자의 품으로 고꾸라졌다.그에 당황한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도와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여진 씨... 잠깐만...”한편 민여진에게 안겨버린 서원은 옆에서 느껴지는 박진성의 따가운 눈초리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호텔 방에서 나오더니 그대로 서원에게 안겨 도와달라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온종일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하여 잠도 못 자고 민여진을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실명한 상태로 무슨 변이라도 당했을까 봐 폭우도 뚫고 달려왔는데.잠깐 옷 갈아입으러 들어간 새에 저런 야한 옷을 입고 서원에게 안겨있는 민여진을 보고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는가.야
민여진의 말에 이성이 끊겨버린 박진성은 옆에 놓인 양동이를 들어 그녀에게 물을 퍼부었다.온몸을 뒤덮는 한기에 민여진이 정신을 차리려 하자 박진성은 다시 그를 잡고 물었다.“정신 안 차려?! 내가 네 남잔데 나 말고 누굴 원하는 거야! 너 이렇게 천박한 애였어? 다른 사람 손이 닿아도 상관없는 거야?”‘네 남자’라는 말에 민여진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2년 동안 몸과 마음 다 바쳐 사랑한 결과가 이거라고 몸소 보여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박진성에게 남은 건 이제 두려움뿐이라 민여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에 받쳐 말했다.“그래, 너 말고 다른 남자는 다 괜찮아. 그게 누가 됐든 상관없어. 박진성 너만 아니면 돼.”몸이 나른해지는 데도 민여진은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말을 끝마쳤다.“너!”말이 끝나자마자 손이 들리는 게 느껴져 민여진은 뺨을 맞을 줄 알고 눈을 감았는데 오래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미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 거야. 똑바로 대답 안 하면 평생 다른 남자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을 거야.”민여진의 낯빛이 점차 창백해질 때 방문이 열리더니 아까 그 남자가 아랫도리만 입은 채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러다 민여진을 발견한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이 년이 언제 여기까지 나왔어? 도망간 줄 알았잖아! 얼른 들어와!”민여진의 팔을 낚아챈 남자는 자신이 손해라도 본다는 투로 말했다.“생긴 건 별론데 그래도 할 수만 있으면 됐지 뭐. 싸니까 내가 받아주는 거야.”남자가 힘을 주기도 전에 박진성이 그의 손을 뿌리치자 술김에 고개를 들어본 남자는 상대방도 남자인 것에 놀라며 물었다.“설마 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어쩌나, 내가 만 원 주고 산 거라서 오늘 밤은 내 건데. 원하면 줄 서서...”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 파열음이 들려왔다.옆에 있던 경호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두 눈이 빨개진 박진성이 먼저 주먹을 휘둘러
그 한 번의 도발에 제대로 긁힌 박진성은 민여진의 손목을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쥐었다.이글거리는 두 눈만 보면 당장이라도 민여진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나 도발하려는 거면 성공했어 민여진.”민여진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박진성은 그녀를 끌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그리고는 그녀를 딱딱한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에 힘겹게 눈을 떠보니 머리 위로 찬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박진성은 물을 최대로 틀어놓고 그걸 민여진을 향해 쏘아대고 있었다.한기가 감도는 몸에 민여진은 덜덜 떨며 그에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그만... 그만해 박진성!”“그만?”민여진의 말에 코웃음을 친 박진성은 아예 그녀의 턱을 추켜올리고는 얼굴을 향해 물을 뿌렸다.“지금 네 더러운 몸 씻겨주고 있는 거잖아. 이래야 조금이라도 깨끗해지지. 다른 남자의 역겨운 냄새가 나한테도 옮으면 어떡해.”박진성의 손길이 닿았으니 더러워지긴 한 것 같아서 민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반항을 하지 않으니 그것대로 기분 나빴던 박진성은 민여진이 걸치고 있던 천 쪼가리마저 찢어버리려 했다.“그만 좀 해!”그제야 민여진이 소리치며 자신의 몸을 감쌌다.“다른 남자들한테는 멋대로 몸 내주면서 왜 내 앞에서만 고고한 척이야! 넌 이미 더러워진 몸이야. 지금 이렇게 비싸게 굴어봤자 아무 쓸모도 없다고!”작은 몸이 발버둥 치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던 박진성은 그대로 민여진의 치마를 찢어버렸다.그런데 그의 눈앞에 드러난 건 아무런 흔적도 없는 깨끗하기 그지없는 몸이었다.그에 당황한 박진성은 손을 떨며 샤워기를 내려놓았다.남자의 손이 닿았다면 이럴 리가 없는데...“손... 안 댄 거야?”얼음장같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누워있던 민여진은 온몸을 뒤덮는 한기에 손으로 어떻게든 몸을 감쌌다.속눈썹까지 떨릴 정도의 추위에 그녀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에 기쁘면서도 화가 났던 박진성은 다시 민여진을 잡고 따져
서원의 뒤를 따라가던 두 명의 경호원은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대표님 왜 저러셔? 눈먼 여자 하나 잃은 걸로 저렇게까지 화내시고 비 오는 데 찾기까지 하시다니. 저 여자 응급실 들어간 뒤로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만 계시잖아.”“설마 저 얼굴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걱정은 해도 좋아한다니, 그건 너무했지.”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다른 한 명이 답을 했다.“대표님이랑 저 여자는 하늘과 땅 차인데 아예 차원이 다르지. 저런 못생긴 여자한테는 땅이라는 말도 아까워. 그냥...”“말 다 했습니까!”그때 갑자기 입을 열며 소리치는 서원에 경호원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평소에 온화하기만 하던 서원이 화를 내니 그 위압감이 더한 것 같았다.한편 자리에 주저앉은 서원은 자꾸만 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이 떠올라서 괴로워졌다.처음에는 눈이 먼 여자가 얼굴까지 망가졌다는 말에 드는 연민이 전부였는데 이제 보니 모든 비극의 중심에 여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 여자를 향한 박진성의 마음도 아주 복잡해 보였다.그렇게 걱정하면서도 못된 말로 상처를 주고 늘 이성적이던 분이 민여진의 도발은 분간하지 못하고 화를 내다가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낸 게 서원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던 그는 조용히 그들과 함께 수술실에 파란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민여진이 병실로 옮겨지자 박진성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몸에 아주 큰 해가 되는 약을 먹은 상태에서 찬물에 몸을 담갔어요. 저런 몸으로 그걸 버텨낼 수나 있었겠습니까? 가족이 죽을 뻔했는데 보호자가 돼서 도대체 뭘 한 겁니까!”“젊은 나이에 몸이 이렇게 약한 사람은 저도 처음 봐요. 한 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그때는 수술로도 못 살려요.”미간을 찌푸리던 간호사가 자리를 뜨려 하자 박진성은 그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몸에 큰 해가 되는 약이란 게 뭔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호편주라고 기를 허하게 만드는 술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
“그래. 조금 늦게 돌아오는 것도 좋겠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다 막혔거든. 진시우 씨와 임재윤 씨가 거기 있어서 나도 걱정은 안 해.”조인화는 민여진더러 안전에 신경 쓰고 사람 많은 데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한참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민여진은 침대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 조현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 여진아.”너무 빠른 응답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현준 오빠, 왜 이렇게 빨리 받아요?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조현준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몇 시간 자고 지금은 회사로 들어가는 중이야.”민여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죄송해요.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도 바쁜데 피곤하겠어요.”조현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진아, 전화한 이유가 단지 사과하려는 거라면, 차라리 이 전화를 받지 말 걸 그랬어.”민여진도 함께 웃었다. 그녀는 조현준의 친절함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먹먹해졌다.“여진아,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지?”조현준이 물었다.“내가 뭐 도와줄 거라도 있어?”“역시 현준 오빠는 못 속이겠네요.”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워져 있었다.비록 오늘의 오해는 풀렸지만, 민여진은 임재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임재윤이라는 이름과 말을 못 한다는 것 외에 가족 상황은 어떠한지, 집은 어디에 있는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등등 임재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심지어 민여진은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매번 그녀한테 불리한 입장을 안겨주었다.“현준 오빠, 사실 두 사람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서요.”민여진은 긴장하며 휴대전화를 꽉 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했다.“오빠도 동진 출신이시잖아요. 진시우라는 사람을 알아요?”“진시우?”조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잠시만, 동료에게 물어볼게.”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잇는 조현
박진성의 이름과 그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민여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진시우는 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됐어요.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억지로 말하진 마세요.”“고마워요.”민여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때 간호사실의 한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문채연 씨가 오셨을 때 제가 임재윤 씨 병실을 알려드렸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접 가서 말씀드릴까요?”간호 실장이 답했다.“괜찮아요. 위층 간호사에게 알려주면 돼요.”“알겠어요.”목소리들이 점차 사그라들자, 민여진은 문채연이 있을 것 같아 다시 임재윤의 병실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입술을 깨물고 고민했다.이때, 진시우가 말을 꺼냈다.“민여진 씨, 호텔에서 좀 쉬다가 저녁에 오는 게 어때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의도치 않게 진시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민여진은 차 안에서 문득 의문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진시우 씨는 동진 사람이에요?”“그렇죠.”진시우는 태연하게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그런데 왜 안진까지 와서 리조트를 지을 생각을 하신 거예요? 너무 멀지 않아요?”“물론 멀긴 하죠. 하지만 저는 외동도 아니고 가족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대우를 받는 위치도 아니에요. 동진의 사업은 대부분 형이 쥐고 있으니, 생계를 위해서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죠.”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구나.’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또 물었다.“그럼, 임재윤 씨는요?”진시우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민여진 씨, 혹시 임재윤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렇게 돌려서 물어보는 건 아니죠?”진시우의 말에 당황한 민여진은 허둥지둥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무심코 여쭤본 거예요.”진시우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임재윤도 동진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제가 회사를 나와 독립한다고 그러니까 재
찢어질 듯 아파져 오는 가슴에 민여진은 눈가가 뜨거워졌다.‘진실을 알고 싶다고?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날 속였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야?’민여진은 어지러운 머리를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가 힘겹게 다시 뜨고는 맑은 눈동자로 진시우를 응시하며 물었다.“임재윤, 대체 누구예요?”“임재윤이요?”진시우는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아직도 민여진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임재윤은 당연히 임재윤이죠. 짜개 바지 시절부터 저와 함께했던 친구예요. 그에게 다른 신분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민여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간호사실에서 전부 들었어요. 1106호에 박진성 씨가 입원해 있다는데 그곳은 분명 임재윤 씨의 병실이었죠. 즉 그들은 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맞죠? 임재윤이라는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당신들이 나를 속이기 위해 만든 가짜 신분 아니에요? 진시우 씨, 당신과 박진성은 나를 속이기 위해 정말 온갖 심혈을 다 기울였군요.”“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진시우는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반박했다.“임재윤과 박진성이 어떻게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식이라면 나도 임재윤 그 새끼한테 속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사실은 양성 대영그룹의 사람이라고요?”예상치 못한 진시우의 반응에 민여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걸 밝히면 진시우 역시 솔직해질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진시우는 오히려 극도로 화를 내며 그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오늘은 임재윤의 수술 준비보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네요. 따라오세요!”말을 마친 진시우는 민여진을 강제로 끌고 간호사실로 향했다.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희망 때문이었는지, 저항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간호사실로 찾아간 진시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1106호 병실에 누가 입원해 있죠?”“1106호요?”간호사가 기록을 확인하더니 대답했다.“박진성 씨입니다.”민여진은 속
‘1106호? 이건 임재윤의 병실이잖아? 어떻게 박진성의 병실이 될 수 있는 거지? 분명 임재윤이였는데? 내가 방금까지 그곳에 있었는데? 만약...’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공포에 눈동자가 확장되며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만약 임재윤과 박진성이 같은 사람이라면?’민여진은 넋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이건 너무나도 숨 막히는 가정이었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임재윤은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벙어리 행세를 해왔고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다.결국 박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든지 완벽하게 낯선 사람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알레르기 사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박진성의 짓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박진성이 입원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임재윤도 바로 입원했고 마침 또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민여진은 이 모든 걸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벙벙하게 서 있었다. 고통보다 더 큰 건 속임수에 대한 슬픔이었다.‘임재윤은 가짜였고 그의 다정함도 가짜였구나.’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벽을 짚고 눈물을 참으며 밖으로 나갔다.‘도망쳐야 해!’머릿속에 남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멀리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박진성만 없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민여진 씨?”하필이면 휴식을 마치고 돌아온 진시우와 마주쳤다. 그는 민여진한테 다가오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여진 씨, 여기서 뭐 하세요? 아까 문 앞에서 우연히 보고 잘못 본 줄 알았어요. 어딜 가시려고요?”진시우의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에 오히려 오싹함을 느낀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민여진 씨?”민여진의 태도에 당황스러워진 진시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하자, 민여진은 바로 뿌리치며 공포에
‘지켜준다고?’박진성을 만난다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민여진도 잘 알고 있었다.민여진한테 박진성은 기분이 좋으면 웃어주고 기분이 나쁘면 어떻게든 망가뜨리는,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날뛰는 미친놈이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자신을 지켜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왜 하필 임재윤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민여진은 손바닥을 꽉 움켜쥔 채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문지르며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어제 차에서 잘 못 잤거든요.”그녀의 말에 임재윤은 다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진시우가 깨면, 쉴 곳에 데려다주라고 할게요.”“네.”이 기회를 틈타 민여진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박진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었고 그러려면 지금 당장은 박진성이 어느 층, 어느 병실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민여진은 더듬더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걸어갔다.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간호사 한 명이 환자인 줄 알고 질문했다.“눈이 안 보여서 약을 못 받으시는 건가요?”“아니요.”민여진이 설명했다.“저는 환자가 아니에요.”간호사는 잠시 멈칫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그럼 무슨 일로 오셨나요?”“그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박진성 씨가 어느 병실에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민여진의 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그녀를 출세하기 위해 능력 있는 남자에게 아첨하는 여자로 단정 짓고 표정을 확 바꾸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죄송하지만, 환자분의 프라이버시 문제라 가족이 아니라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가족이라. 사망한 전 부인도 포함하나요?’민여진은 이렇게 말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받을 거란 걸 알고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직접 찾아가서 방해하진 않을 거예요.”“찾아가지 않으신다 해도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네가 일부러 우리를 걱정하게 한 건 아니란 걸 알아. 다만 이럴 때 내가 네 곁에 없어서 더 유감스러울 뿐이야.”조현준은 피로가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그런데 임재윤은 누구야?”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다 임재윤에게 잠시 나가야 한다고 설명한 뒤, 더듬더듬 문을 닫고 나와서 대답했다.“막 알게 된 친구예요.”“그 사람은 나에게 큰 거부감을 보이는 것 같더라.”조현준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딘가 진지했다.“내가 네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민여진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찰나, 지나가던 사람들의 흥분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거 알아? 양성의 박진성이 우리 병원에 있대!”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결혼도 안 했다고 하던데. 소문대로 멋지고 품위 있다면 한번 보고 싶다.”“꿈 깨.”옆에 있던 사람이 놀렸다.“결혼은 안 했어도 곧 할 거 아니야. 약혼한다는 소문 몰라? 여자 친구가 엄청 예쁘고 명문가의 규수라고 하던데.”“약혼이 결혼은 아니잖아. 나 같은 스타일을 좋아할 수도 있지.”“됐어. 그것보다.”여자가 물었다.“박진성은 왜 우리 병원에 온 거래? 여기서 양성까지 차로 두 시간은 걸리는데?”“몰라. 들리는 말로는 양성 병원에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불편하다나 봐. 그래서 여기서 요양 중이래.”목소리는 점점 멀어졌지만, 민여진은 한바탕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몸이 떨렸고 머릿속이 하얘졌다.‘박진성이 이 병원에 있다고?’민여진은 박진성의 소유욕과 냉혹함 그리고 입버릇처럼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이가 덜덜 떨리며 몸서리가 쳐졌다.‘만약 박진성이 내가 살아있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도 이 병원에 있단 걸 안다면...’공포와 두려움이 그녀의 이성을 거의 삼켜버릴 무렵, 조현준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돌려놓았다.“여진아? 무슨 일이야?”민여진은 두 다리가 얼어붙은 듯 움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