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치욕과 분노가 민여진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부추겼다.“뭘 멍하니 서 있어?”문채연이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날카로웠다.“네가 나 좋다고 쫓아다닐 때 했던 말 잊은 건 아니지? 날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하겠다며? 왜? 장남 여자 보니까 동정심이라도 생겨? 확실히 본때를 보여줘야지! 저 악보인지 나발인지는 당장 부숴버려.”문채연의 시선이 날카로웠다.장민혁은 그녀의 지시를 받아들이고 옆 사람들에게 눈짓했다.간신히 바닥을 더듬어 악보를 찾아낸 민여진이 다시 악보를 품에 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남자의 억센 손길이 그녀의 품에서 악보를 다시 빼앗아갔다.팔꿈치에서는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다시 느껴졌지만 그 정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민여진은 다시 악보를 되찾아 오기 위해 손을 뻗으며 애처롭게 부탁했다.“주세요. 제발... 제발 부탁할게요, 네? 제발 돌려주세요. 술 마실게요! 술 주시면 마실게요!”“늦었어.”장민혁은 손에 든 물건을 한 번 바라보았다. 꽤나 묵직해 보이는 그립감에 다시 악보를 힘껏 바닥에 내리꽂았다.“너 술 마시는 건 이제 딱히 안 보고 싶어졌거든. 이거 생각보다 꽤 단단하네. 몇 번이나 밟으면 부서질까?”말을 마친 장민혁은 망설임 없이 발을 올려 악보는 즈려밟았다.처음 밟았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악보 위로 먼지나 조금 내려앉을 뿐이었다.장민혁은 계속해서 악보 위로 발을 올렸다.충격 소리가 커질수록 민여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장민혁의 발이 악보가 아니라 그녀의 심장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민여진이 다급히 손을 뻗었다.“하지 마요! 제발요!”민여진이 간절히 손을 뻗는 순간, 장민혁의 발이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너 미쳤어?”장민혁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민여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생리적인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몸을 웅크리자 퉁퉁 부어오른 손등 위에는 피멍이 내려앉아 있었고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에서는 날카롭고도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온몸이 엉망진창이 된 채 맞고 있던 민여진을 발견하자 박진성의 눈빛은 살기로 물들었다.“네가 진짜 죽고 싶구나.”장민호는 박진성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의 입에서 어떠한 변명이 나오기도 전에 박진성의 주먹이 그대로 장민호의 얼굴을 강타했다.장민호는 고통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다리 힘까지 풀린 채 박진성을 바라보았다.“박진성! 네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양성에서 정말 네가 하늘인 줄 알지? 감히 날 때려? 우리 아빠가 널 가만둘 것 같아?”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박진성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장민혁의 머리를 움켜쥐더니 기름진 음식이 가득한 접시 위로 그의 얼굴을 처박았다. 기름 소스가 그의 얼굴을 적셨고 서늘한 표정의 박진성은 다시 그의 얼굴을 벽으로 끌고 가 박아 버렸다.서원이 말리지만 않았더라면 박진성은 이미 장민혁을 죽였을 수도 있었다.“장민혁 맞지?”이미 피떡이 돼 쓰러진 장민혁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박진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떨어진 거 다 주워 먹어. 그럼 너네 집안은 무사할 거야. 안 먹으면 오늘 저녁부터 이 양성에서 너희 가문은 사라져.”장민혁은 피가 나는 코를 틀어막으며 겁에 질린 눈으로 힘겹게 코피를 닦아냈다.“네가 뭔데? 네가 무슨 염라대왕이야? 네 말이면 내가 다 들어야 해?”같은 룸 안에 있던 남자들은 이미 벽에 바짝 붙어 장민혁에게 간단히 눈짓했다.그 눈빛에 장민혁은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먹으면 되잖아!”그가 바닥을 기려던 그때,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잠깐.”박진성은 무심하게 구두를 들어 밑창으로 음식들을 짓이겨 버렸다. 이미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신발 밑창의 먼지와 뒤섞여 진흙처럼 변해 버렸다.“됐어, 이제 먹어.”“박진성! 사람 모욕해도 정도가 있지! 이딴 식이면 너도 언젠가 꼭 돌려받게 돼 있어. 내가
박진성의 검은 눈동자가 충격에 휩싸인 듯 흔들렸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마음에 상처를 냈고 얼기설기 엉킨 복잡한 감정이 그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그는 생가에 잠겼다. 민여진이 신경 쓰던 게 단지 악보나 피아노가 아니라 자신 때문이었다.자신이 준 악보라서 그토록 소중히 여겼고, 그 악보를 지키겠다고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지고 서럽게 울었던 거였다.박진성의 마음 한켠이 날카롭게 찔린 듯 아려왔다. 그는 민여진을 안아 들고 VIP룸을 나섰다.차 앞까지 도착해 민여진을 조수석에 조심스레 앉혀준 후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운전을 위해 핸들을 잡은 순간, 무심코 백미러를 바라본 그의 눈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였다.차 번호판을 확인한 순간, 박진성의 차갑고 어두운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또 다른 VIP룸의 화장실 안에서 문채연은 온몸을 덜덜 떨며 이를 악물었다.장민혁이 민여진에게 참교육을 시전하고 있던 그때, 무심코 아래층을 내려다본 문채연의 눈에 박진성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예민한 촉이 번뜩이며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문채연을 자극했다. 사람들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틈을 타 그녀는 VIP룸을 빠져나와 다른 룸의 화장실 안으로 숨어들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방에서 난동이 벌어졌다. 창문과 벽을 통해 옆 방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알 수 있었다.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장민혁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장민혁의 아버지는 보스 그룹의 차기 프로젝트 파트너였다. 설마 박진성이 미친 걸까? 고작 민여진 하나 때문에 수백억이 걸려 있는 프로젝트를 내팽개쳤다는 건가?미쳤다는 생각과 함께 질투와 원망이 밀려왔다. 박진성이 여전히 민여진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만약 박진성이 문채연 역시 그 룸 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장민혁을 사주한 것도 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문채연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감히 상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띠리링—”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문채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문채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그 여자가 이 정도로 어려운 존재일 줄은 몰랐다. 친딸인 민여진에게조차 진실을 숨기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이제 민여진에게 직접 손을 쓰는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문채연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조금 이따가 어떤 여자 사진을 하나 보내줄 텐데, 그 사람 뒷조사 좀 해줄래?”...한편, 박진성이 차를 몰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그는 근처 호텔부터 들러 방 하나를 예약했다.민여진의 옷은 이미 기름기 있는 음식물로 더러워져 있었고 머리카락도 산발이 되어 지저분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그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조심스레 민여진의 옷을 벗겨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몸을 움찔하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나 지금 너무 더러워... 안 돼...”“너도 더러운 건 아는구나?”박진성은 민여진의 손을 잡아당기며 그녀의 옷을 단숨에 벗겼다.“샤워도 안 하고 이 상태로 병원 가면, 의사들이 손이나 댈 것 같아?”민여진은 당황한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내가... 내가 알아서 씻을게.”“팔도 다쳤는데 뭘 혼자 씻는대?”박진성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후 낮게 말했다.“괜히 고집부리지 마. 우리가 부부로 산 지도 벌써 3년이야. 네 몸 어디에 점이 있는지도 다 아는데 새삼스레 왜 이래.”박진성은 그대로 민여진을 데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욕조에 조심스레 앉힌 후 머리부터 감겨주기 시작했다.따뜻한 물이 몸에 닿는 순간, 민여진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며 몸을 떨었다.박진성이 눈썹을 찌푸리며 다급히 물었다.“왜? 어디 아파?”민여진은 조심스레 다친 손을 감추려 했지만 박진성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손바닥과 손등을 보는 순간, 박진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차를 타고 오는 내내 민여진은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었지만 박진성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이건 언제 다친 거야?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 악보는 두 동강 나 버렸고 그로 인해 다른 안 좋은 일까지 생길까 봐 두려워졌다.민여진의 마음을 눈치챈 박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 악보 말이야, 심하게 망가진 건 아니었어. 그냥 두 동강 난 게 다야. 전문가만 잘 찾으면 복원 가능할지도 몰라.”“정말이야?”민여진은 몸을 돌려 박진성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이내 손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고통에 오래 잡지는 못했지만 눈빛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어렸다.“응.”박진성이 민여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 한 적 있어?”박진성은 새로 물을 받아 욕조에 채운 후 민여진을 앉혀주었다. 민여진이 몸을 담그는 사이, 박진성은 밖으로 나가 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장민혁 그 자식, 오늘 일 말고도 캐보면 저지른 일 더 많을 거야. 전부 다 조사해서 감옥으로 보내. 걘 고생 좀 해 봐야 해.”박진성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일말의 자비도, 망설임도 없었다. 사실 서원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명령에 따르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대표님, 진심이세요? 장우 그룹 그쪽 땅은 이미 협의까지 다 끝난 상태잖아요. 지금 장민혁을 감옥에 넣어 버리면, 장우 그룹 쪽에서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내가 그깟 땅이 부족할 것 같아?”박진성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 가문을 철저히 밟아버릴 기세를 풍겼다.“장우 그룹이 감히 보스 그룹이랑 맞서려고 한다면, 그 대가는 똑똑히 보여줘야지.”전화를 끊은 박진성이 민여진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다행히 상처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손바닥의 상처는 꽤 심각했지만 다른 곳에 난 상처들은 가벼운 타박상이 다였다.박진성은 민여진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지난 1년 동안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고왔다. 그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의사에게 따로 찾아가 물었다.“흉터 남을까요?”의사가 대답했다.“그건 확답을 못 드립니다. 봉합 후 회복 상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흉터도 안
“내일 간다고요?”민여진은 뒤늦게 정신을 번쩍 차리며 손을 꼭 움켜쥐었다.“이렇게나 빨리요?”“빨리라니. 벌써 여기 2주나 있었는걸. 너무 걱정하지는 마. 치료 다 끝나면 그때 돌아올게.”정수향은 민여진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웃었다.“내가 돌아온 다음엔 진성이랑 너한테서 손주라도 보고 싶다. 기대해도 될까?”민여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말에 가슴이 아리고 쓰려왔다. 그녀는 차마 민영미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자신이 원래 가졌던 그 아이가, 박진성의 뜻을 거슬렀다는 죄로 빼앗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내일 언제 출발하는데요?”“아침에 갈 거야. 10시쯤에. 배웅하러 오려고?”“네!”민여진은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애써 힘주어 대답했다.“다음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엄마, 꼭 건강 잘 챙기고 빨리 돌아와야 해요.”정수향은 민여진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끔 민여진이 정말 자신의 친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곤 했다. 그녀의 진짜 딸은 골칫덩어리였다.그때,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방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녀의 모습에 문밖의 인물이 걸음을 멈추었다.정수향은 눈가를 닦으며 웃어 보였다.“진성아, 왔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네.”정수향은 박진성을 지나쳐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반대쪽 복도에서는 문채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수향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옆에 서 있던 젊은 여자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저 여자... 알아요?”젊은 여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당연히 알죠. 우리 엄만데!”“아?”문채연은 흥미로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정말이야? 착각한 거 아니지? 저 여자는 지금 다른 집에서 엄마 노릇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우리 엄만데 내가 모를 리 없잖아요! 요즘 왜 갑자기 연락이 안 되나 했더니 부잣집에 빌붙어서 새엄마 노릇 하고 있었네.”여자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네 옆엔 내가 있잖아.예전 같았다면 이 말은 민여진에게 위로가 아닌 악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민여진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조용히 박진성을 받아들였다.꽁꽁 얼어붙어 있던 마음속의 얼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그녀는 문득 박진성의 말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민영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다시 돌아옴으로써 한동안 메말라 있던 마음에 다시 생기가 생겼고 이곳에서 꿈을 찾고 목표를 좇을 수 있게 되었다. 민여진은 더 이상 시체처럼 살지 않아도 되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박진성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거나 마음을 의지하려고는 하지 않았다.이런 평범하고 기복 없는 삶이면 충분했다. 엄마의 병을 다 고치면 그녀 역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언젠가 박진성이 자신에게 질린다면 그때는 덤덤히 이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 생각이었다.“응.”민여진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대답했다. 목소리는 작고 희미했지만 박진석은 그 짧은 한마디에 눈빛을 반짝였다.대답한 건가? 민여진이 대답한 건가?민여진은 예전처럼 비웃거나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이런 설마 그녀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그 생각이 들자 박진성의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박진성...”민여진이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손이... 왜 이렇게 떨려?”떨고 있나? 박진성이 떨고 있다고?박진성은 애써 떨림을 억누르며 민여진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깊은숨을 푹 내쉬며 민여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너무 좋아서 그래.”“여진아, 네가 대답해줘서 너무 기뻐. 약속할게. 이제부터는 정말 잘 챙겨줄게. 다시는...”다시는 민여진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민영미의 죽음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했다.민여진은 박진성의 품에 꼭 끌어안겨 그의 온기를 느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조여오듯 답답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좁디좁은 병원 침대가 순식간에 넓어진 것 같았다. 민여진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지금이 몇 시일까? 박진성은 언제 나간 걸까?민여진은 어딘가 아쉬워졌다. 잠들기 전에 박진성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만약 그가 깨어난다면 박진성이 잠결에 한 그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묻고 싶었다.그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민영미인 줄 알았던 민여진이 고개를 들어 환히 웃으며 말했다.“엄마? 지금 몇 시예요? 혹시 아침이에요? 이렇게 일찍...”“엄마? 설마 지금 부르는 사람이 정수향이야?”비웃는 듯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이 어려 있던 민여진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병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문채연, 네가 여긴 왜 왔어!”“여진 씨, 왜 이렇게 예민해요? 난 그냥 네가 꼭두각시처럼 놀아나는 게 안쓰러워서 좋은 마음으로 진실을 말해주려고 온 건데.”“좋은 마음에? 내가 네 수작이 뭔지 모를 것 같아?”민여진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녀의 한 손은 무의식적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좋은 마음이라는 말로 나한테 온갖 지저분한 짓 한 게 한두 번이야?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은 절대 안 당해! 당장 꺼져!”“정말 날 그렇게까지 밀어내고 싶어요?”문채연의 말투가 순식간에 억울한 듯 움츠러들었다.“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인은 아니에요. 여진 씨 엄마는 이미 투신자살로 비참하게 죽어버렸는데, 그렇게 불쌍하게 죽어버린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한테 엄마엄마 하고 있잖아요. 이게 말이 돼요? 죽은 엄마가 불쌍해서 찾아온 거예요.”“닥쳐!”민여진의 이마에는 핏줄까지 불거졌다. 가슴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숨이 거칠게 떨려왔다.“우리 엄마는 잘 살아있어! 다시 나 속이려고 들지 마. 당장 나가. 안 꺼지면 간호사 부를 거야.”민여진이 호출 벨로 손을 뻗자 문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민여진, 나랑 어디 좀 가지 않을래?”“네가
라미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문채연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분명히 박진성을 봤고, 양성에서 안진까지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어떻게 된 거지?’라미연은 문채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또 불을 지폈다.“채연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 여자에게 내줄 셈이야? 민여진은 그저 너랑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고, 널 공식 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이제는 네 남자까지 빼앗으려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너 이러다 다 빼앗길 수도 있다고!”힘들게 지내던 과거가 떠오르자, 문채연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미연아, 고마워.”문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올해 신상으로 나온 핸드백, 사람을 시켜 보내줄게.”라미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양했다.“됐어. 친구 사이에 뭘 이런 것 가지고.”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던 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게 변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는 마치 칼날처럼 문채연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왜? 넌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하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데?’반면 문채연은 이정화가 그 두 해 동안 함께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안 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고 몇 번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었다.‘이정화와의 관계도 끝났는데 박진성마저 잃는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문채연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갔다.박진성의 병세는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며 악화하여 며칠 내내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민여진의 일까지 더해져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문채연이 찾아가자, 서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의 머리가 임재윤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는 향수 냄새였지만, 오히려 민여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다만 애매한 이 자세가 불편했다.두 사람의 행동에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뭐야? 사귀는 사이였어? 요즘 세상에 왜 잘생긴 남자는 다 못생긴 여자랑 붙는지 모르겠네!”여자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떠났다.여자의 말에 임재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민여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익숙해요.”민여진은 임재윤이 자신의 마음이 다친 건 아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스러웠다.임재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민여진 씨가 저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압력으로 글을 쓰는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진심이 어려 보였다.어쩌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민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현준 오빠랑 똑같이 그래요? 현준 오빠는 원래 사람을 잘 달래주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는데, 임재윤 씨는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봐서 제 얼굴이 신기한 건가요?”임재윤은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리고.”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자를 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다른 한편.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라미연은 민여진과 임재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저거 민여진 아니야?’깜짝 놀란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문채연에게 사진과 함께 음성을 보냈다.“채연아, 방금 너한테 사진 보냈는데 봤어? 이 여자 민여진 아니야?”음성을 보내고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라미연은 그제야 민여진 옆에 한 남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등만 찍혀 있었는데 체형으로 보니 박진성인
“하지만...”민여진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짧은 시간 안에는 갚기 어려울 거예요.”민여진에게는 자립할 능력도,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짐이 될 뿐이었다.“그냥 돈을 받아주세요. 현준 오빠한테 빚진 건 언제든 갚을 수 있지만, 임재윤 씨는 휴양지 건설이 끝나면 떠나실 거잖아요. 기간이 너무 짧아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평생 안진 마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었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임재윤은 받지 않고 물었다.“민여진 씨의 뜻은 나더러 안진 마을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건가요?”차가운 기계음 소리는 임재윤이 지금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민여진이 잠깐 멈칫하자, 임재윤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단 가지고 계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갚을 수 있을 거예요.”결국 민여진은 그 돈을 임재윤한테 주지 못한 채 다시 조인화에게 가져갔다.“왜 다시 갖고 왔어? 임재윤 씨가 뭐라고 했는데?”“빌려주는 거래요.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조인화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앞으로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순진한 민여진만이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여기며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었다.“갚지 못하면 어쩌려고?”민여진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임재윤 씨의 말로는, 떠나기 전에 내가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몸으로 갚으라는 거야?”민여진은 흠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이모, 장난치지 마세요.”조인화는 웃으며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아이고, 이 바보.”잠시 후, 포장 되어있는 봉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임재윤이 봉투를 받아 든 뒤, 세 사람은 가계를 나왔다.밖으로 나가던 중 다른 한 가계에서 조인화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민여진이 옷을 내려놓자, 조인화가 다가오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가게로 가요.”“왜? 현준이가 나한테 이 가게를 추천했는데, 겨울옷이 보온성이 좋다더라.”말하던 중 조인화는 뭔가를 깨달은 듯 미소를 지었다.“돈 걱정은 하지 마. 현준이가 너한테 옷을 사주라면서 돈을 푼푼이 보내줬어. 한 푼도 남기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하면서. 그러니까 현준이 말을 들어야겠지?”조인화가 민여진을 데리고 계산대로 가 결산을 하려 하자, 한 직원이 임재윤을 바라보며 말했다.“금액은 저분이 이미 결제하셨습니다. 옷은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주소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따로 배송해 드릴까요?”직원의 말에 조인화와 임여진은 깜짝 놀랐다.임재윤이 시내까지 태워다 준 것만 해도 이미 큰 도움인데 갑자기 옷까지 사준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얼마를 내셨죠?”민여진이 묻자, 직원은 웃으며 대답했다.“이 매장 전체를 살 수 있을 정도예요.”조인화는 탄성을 내뱉었다.“임재윤 씨가 부자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브랜드 매장인데 이 매장을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줬다니, 도대체 얼마를 준 거야?”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대가 없는 호의는 받을 수 없어.'그녀는 차라리 조현준에게 신세를 지더라도 임재윤에게 더 이상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이모, 현금 가지고 계세요? 제가...”“가지고 있지!”조인화는 서둘러 지갑에서 돈을 꺼내 민여진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이모도 알아. 너와 임재윤 씨 사이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걸. 그러니까 이렇게 받는 건 아닌 거 같아. 어서 가서 돌려줘.”민여진은 돈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너무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아 미소를 지었다.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카운터를 짚으며 입구로 향했다.문어 구에 있던 임재윤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가 휴대전화로 물었다.“왜요? 옷 다 골랐어요?”민여진이 손에 든 현금을 임재
“이모...”조인화의 말에 민여진은 당황스러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차가 다시 멈추더니 앞에서 휴대전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도착했습니다.”“임재윤 씨, 고생하셨어요”문을 열려던 조인화는 문득 임재윤에게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날카롭게 각진 그의 턱선은 불편할 정도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미간에 잡힌 가느다란 주름이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임재윤의 태도에 조인화의 머릿속에는 순간 한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임재윤이 휴대전화로 물었다.“돌아갈 방법은 생각해 두셨나요?”민여진이 대답했다.“오후 5시에 안진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가 있어요.”“너무 늦네요.”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다섯 시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저도 할 일이 없으니 같이 쇼핑하다가 다시 모셔다드릴게요.”“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민여진이 사양하려는 찰나, 임재윤은 차가운 표정으로 타자했다.“그냥 이렇게 하는 거로 하죠.”완강한 그의 태도에 민여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수고해 주세요.”조인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재윤과 민여진 사이를 관찰하고 있었다.한 매장에 들어간 뒤 임재윤이 입구에서 기다리자, 조인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여진아, 너랑 임재윤 씨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민여진도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라 두루뭉술하게 답했다.“임재윤 씨는 모두에게 친절하시잖아요.”“글쎄다.”조인화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재윤 씨가 널 보는 눈빛은 분명히 다르더라. 게다가 성격도 원래 냉정한 걸로 보이는데, 우리랑 쇼핑하겠다고 하다니. 분명히 너 때문이야. 그리고...”게다가 민여진이 조현준과 통화할 때, 임재윤은 불편한 기색을 훤히 드러냈다.“그리고요?”민여진은 묻다가 바로 웃으며 말했다.“임재윤 씨는 겉보기에는 차갑지만 속은 따뜻하고 세심한 사람이잖아요. 이모도 그날 축하 자리에서 보셨잖아요.”조인화는
“우리도 좀 태워주시겠어요?”조인화가 말했다.“시내에 가서 여진이 겨울옷 좀 사주려고요.”“그럼요.”진시우는 자신의 차를 잠깐 바라보다가 말했다.“근데 제 차는 자리가 꽉 찼네요. 앞에 차가 임재윤 차인데 저쪽에는 자리 남았을 거예요.”“임재윤 씨요?”조인화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임재윤에 대해 더 이상 거부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편하지는 않아 어색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무슨 소리세요.”진시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다 한 식구 아닙니까. 도움 줄 수 있다면 좋아할 거예요.”“알겠어요.”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잡고 임재윤의 차 옆에 다가가 차창을 두드렸다.임재윤이 차창을 내리자, 날렵하면서도 깔끔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조인화를 스치듯 흘깃 보고는 민여진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조인화는 순간 당황했으나 바로 말을 이었다.“임재윤 씨, 저희 시내에 가서 옷 좀 사려고 하는데 태워주실 수 있나요?”임재윤은 볼품없이 낡아빠진 민여진의 옷을 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조인화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두 사람이 모두 뒷좌석에 타는 건 임재윤을 운전기사 취급하는 것 같아, 조인화는 조수석에 올라탔다.차가 출발하자마자 민여진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받자, 전화기 너머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진아.”“현준 오빠.”의외의 전화에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던 민여진은 운전석에 있는 임재윤이 미동하는 게 느껴져, 그가 시끄럽다고 생각할까 봐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조현준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일 없으면 전화도 못 해?”“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약간 당황해하며 말했다.“전화해 줘서 당연히 반갑죠. 그런데 지금 출근 시간 아니에요?”“맞아.”조현준은 미소를 머금었다.“그런데 갑자기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민여진이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너무 자연스러운 임재윤의 행동에 민여진은 또다시 혼란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털어 버렸다.‘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행동은 박진성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계속 앞으로 걸어가자, 눈은 어깨에도 쌓일 정도로 점점 더 많이 내렸다. 하지만 손이 잡혀 있어서인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문 앞까지 왔을 때, 임재윤은 멈춰 서서 휴대전화로 말했다.“도착했어요.”민여진은 옷에 묻은 눈을 털며 말했다.“고마워요.”민여진이 대문을 여는 순간까지 임재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민여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임재윤 씨, 들어가서 따뜻한 차 한잔하실래요?”“다음에요.”임재윤은 빠르게 글을 쓰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어젯밤, 제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물어볼 말이 있어요. 다음에 만날 때 물을 테니까 그때는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요.”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임재윤의 발소리가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민여진이 안뜰로 들어가자, 불을 피우고 있던 조인화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수건을 들고 와서 그녀의 옷에 묻은 눈을 털어 주며 말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방금 불을 피워 놓고 너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어.”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마당에 마무리할 게 조금밖에 안 남아서, 그냥 두고 오기가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했어요.”“이 바보야, 안 추웠어? 내가 여기 있는 옷 몇 벌만 손보고 나가서 도와줄 테니, 너는 일단 앉아서 불 쬐고 있어. 따뜻한 물 좀 떠올게.”“네.”민여진은 앉아서 얼굴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손을 내밀어 차가웠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아까 임재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뜻은 원래 어젯밤에 할 말이 있었다는 거 아닌가?’민여진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눈이 한번 내리자, 기온은 뚜렷하게 떨어졌다.민여진이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얇은 옷들이었고 유일하게 맞는 건 조인화의 낡은 옷뿐이었다
임재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민여진에게 물었다.“됐어요?”그의 가슴은 여전히 드러난 채 있었고, 귀가 달아오른 민여진은 보이지 않음에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네.”임재윤은 다시 옷을 내려 입고 단추를 채운 뒤, 천천히 글을 썼다.“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그 사람, 저와 매우 비슷한가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마... 조금은요. 하지만 많이 닮진 않았어요.”“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어떤 사람이냐고? 독단적이고 냉혈 하면서도 무자비한 사람.’민여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박진성의 모습은 항상 높은 곳에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살얼음처럼 차가운 모습뿐이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정반대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무슨 황당한 생각으로 두 사람을 겹쳐 본 걸까?“잊어버렸어요.”민여진은 박진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는 생각하기 싫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요.”어쩌면 이건 민여진의 바람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박진성이라는 이름조차 잊고 아픈 과거를 모두 떨쳐내고 새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임재윤은 눈치껏 화제를 바꿨다.“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민여진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교회 내부 구조를 잘 모르는 한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해 줘요.”임재윤은 잠시 침묵했다. 약간 불쾌해 보이긴 했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고 민여진의 손목을 잡은 채 밖으로 이끌었다.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가보니 땅에는 얇게 눈이 쌓여 있었다.민여진이 손을 내밀자, 눈이 손바닥에 닿아 차갑게 녹아내렸다.“집까지 데려다줄게요.”임재윤이 휴대전화로 글을 썼다.“괜찮아요.”민여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안진 마을에 오신 것도 일 보러 오신 거잖아요. 저 때문에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하셨는데 일 보러 가세요. 여기서부터는 길을 아니까
임재윤은 더 이상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지 않았고 대신 조용히 민여진의 손을 붙잡았다.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고 그 사람이 지니던 차가운 손과는 전혀 달랐다. 임재윤의 손은 피부가 델 듯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떨었고 임재윤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쪽으로 이끌었다.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가슴과 복부 사이 어디쯤 조심스럽게 얹었다.마침 그 자리는 심장이 뛰는 곳이었고 손등 너머로 전해지는 맥박은 뜨겁고 강했다. 그 울림에 민여진은 마치 전신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민여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임재윤이 더욱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아래로 이끌었다.그의 허리로 내려간 손끝에는 단단하고 잘 단련된 근육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압도적인 힘과 긴장감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잠시 후,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놓았고 옷을 더 걷어 올렸다.그건 마치 마음껏 확인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피가 터질 것처럼 귀 끝까지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건 그저 확인일 뿐이야. 그 사람인지 아닌지만 알아보면 되는 거야.’하지만 시야가 보이지 않는 만큼 감각은 모든 걸 더욱 생생히 느꼈다.그의 숨소리 피부에서 나는 미묘한 향기 손끝에 닿는 근육의 결까지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예전에 박진성과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그의 몸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그들은 서로의 몸만 공유한 낯선 사이였을 뿐이다.감정도 사랑도 없었다.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임재윤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그제야 민여진도 정신을 차리고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그러고는 손을 그의 왼쪽 허리로 옮겼다.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가 칼을 찔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