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말 없어.”민여진은 입술 끝을 억지로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할 말이 없는 거야, 아니면 들통나서 더 이상 거짓말을 못 하겠는 거야?”박진성은 다시 물었다.“말해. 그날 누가 민영미가 죽었다고 말했어?”문채연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CCTV를 피해서 민여진을 만났다는 건, 분명 그녀의 마음을 흔들려는 의도였다...박진성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민여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방현수지? 그 자식이 돌아왔어?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려고!”“무슨 소리야?”민여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현수 씨랑 무슨 상관인데?”“방현수가 아니라면 네가 왜 그렇게 숨기려 들었겠어? 채연을 모함하면서도 그 사람의 행방은 끝까지 감추려 했겠냐고!”박진성은 점점 더 확신했다. 다른 도시에 있다고 해도 방현수가 몰래 돌아왔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는 민여진이 절망에 빠지고 우리 사이가 망가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다시 민여진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방현수가 널 만나러 왔지? 너희 둘이 무슨 짓을 했어?”박진성은 술김에 탁자 위에 민여진을 밀어붙이고 그 나름의 처벌을 가했다.다음 날 아침, 민여진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몸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온몸이 차가웠다.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박진성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모든 것을 방현수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민여진 씨, 일어나셨어요? 아침 식사가 다 식었는데 데워 드릴까요?”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침부터 거실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민여진은 몸에 덮인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이거 서원 씨가 덮어 준 거예요?”“네.”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별말씀을요. 신경 쓰지 마세요.”서원은 주방으로 향했다. 민여진은 자신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그나마 박진성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적어도 옷매무새는 단정하게 해 줘서 서원 앞에서 망신당하지는 않았으니까.물론 이미 숱하게 망신을 당했지만
민여진은 초점 없는 눈으로 경찰을 바라보았다.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경찰이 직접 찾아와서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다니. 설마 박진성이 보낸 사람들인가? 드디어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려는 걸까? 민여진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경찰이시라고요? 우리 어머니도 온 거예요? 어디 계세요?”“민여진 씨!”서원의 얼굴빛이 변했고 민여진의 어깨를 움켜쥔 손이 무의식적으로 떨렸다. 그는 힘을 주어 그녀를 뒤로 밀어내며 말했다.“들어가세요!”민여진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반쯤 굳어지더니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며 말했다.“왜 그래요? 서원 씨, 간만에 엄마 소식을 들었는데... 이렇게 좋은 일인데 왜 절 들어가라는 거예요?”서원도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특히 민영미 사건 때문이었다. 민여진이 그녀 때문에 투신한 지 사흘도 안 돼서 갑자기 경찰이 찾아왔으니 말이다.그는 불안한 목소리를 감추려는 듯 작게 말했다.“민여진 씨, 이상하지 않아요? 경찰이 어떻게 여길 알고 왔을까요? 당신 주소도 모를 텐데. 혹시 가짜 경찰일 수도 있어요.”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경찰은 그 말을 똑똑히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친구,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난 경찰증도 있고 내 경찰 번호 조회해 봐도 돼. 유품 전달하러 온 건데 굳이 가짜 경찰 행세를 할 이유가 없잖아.”민여진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유품이요? 무슨 유품인가요?”경찰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모르고 계셨어요? 당연히 민영미의 유품이죠.”순간 민여진은 마치 목이 조여 오는 것처럼 숨이 막혔고 온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마치 지하실로 떨어지는 듯한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뭐라고요?”민여진은 목소리를 떨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뭐라고 했어요! 누구 유품이라고요!”서원의 얼굴도 순식간에 하
서원은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주웠다. 인장 아래 적힌 ‘민영미'라는 이름에 그의 숨이 턱 막혔다.편지는 오래된 것처럼 보였고 위조된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 민영미가 살아생전에 남긴 편지인 것 같았다.그는 앞쪽에 서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았다. 경찰이 떠난 후, 그녀는 철문에 매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벗겨진 외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앙상하게 마른 등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민여진 씨...”서원은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그러자 민여진은 철문에서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초점을 잃은 붉은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거짓말... 분명 거짓말이야! 우리 엄마는 아직 살아 있잖아.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녹음도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일 년 전에 투신자살했다니 말도 안 돼. 이건 분명 문채연의 음모야!”서원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민여진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이미 답을 내렸다.“분명해. 그 경찰은 가짜였어! 나랑 박진성을 이간질하려는 거야. 난 그의 수작에 넘어갈 순 없지. 내가 정말 박진성을 화나게 하면 어머니를 못 만나게 할지도 모르잖아. 서원 씨, 내 말 맞죠?”서원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붉어진 민여진의 눈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민여진은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정해놓은 게 아닐까?’그녀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편지...”민여진은 갑자기 바닥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편지 어디 있어요?”서원은 민여진의 행동을 제지하고 직접 편지를 건넸다.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어디 봐봐요. 이 편지 위조된 건지 아닌지...”그녀는 편지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가 먼지 묻은 손을 수건으로 닦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만졌다. 편지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니,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햇빛도 못 보는 곳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쌓여
박진성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하려는데 민여진이 다시 말했다.“근데 난 그 사람이 가짜 경찰이라는 걸 알아. 오늘 갑자기 뜬금없이 이 별장으로 찾아온 것도 그렇고 하는 말도 그저께 그 사람과 똑같았거든.”“뭐라고?”박진성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가득했다.“무슨 말을 했는데?”“어머니가 1년 전에 투신자살로 돌아가셨다고 했어.”민여진의 말에 박진성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그놈들은 다 헛소리하는 거야!”“어. 알아.”민여진이 말했다.“난 믿어. 당신이 날 속이지 않을 거라는 걸.”박진성은 다시 오랫동안 침묵에 잠겼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그가 물었다.“탁자 위에 있는 편지는 뭐지?”그는 급히 오느라 서원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편지인데 별거 아니야.”난데없이 나타난 편지를 두고 민여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박진성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그는 다가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겉면을 훑어보는 순간 민영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뭐지? 왜 민영미 씨 이름이 적혀 있는 거야?”민여진의 표정이 굳어졌다.“그 가짜 경찰이 만든 가짜 편지예요. 어머니가 투신자살한 후에 남겨진 유품이라고 했어요.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거라고.”“무슨 유품! 다 미친놈들이야!”박진성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는 이 일을 벌인 놈들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문득 그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으며 소리쳤다.“가짜야! 다 가짜라고!”민여진은 편지가 찢어지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박진성에게 달려들었다.“찢지 마! 박진성! 제발, 찢지 마!”박진성은 냉정한 표정으로 편지 봉투를 허공에 흩뿌리며 조각냈다.“뭘 그렇게 안달이야? 다 가짜인데. 그런 거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런 걸 갖고 있어 봐야 의심만 더 깊어질 뿐이야.”그는 민영미의 유품이나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민영미의 옛 지인들이 가져갔다.민여
편지에는 민여진을 향한 축복의 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간략하게 언급했는데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박진성은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다. 이렇게 의미 있는 편지를 자신의 손으로 찢어버리다니. 민여진이 알게 된다면 미쳐버릴지도 몰랐다.그는 복원 전문가에게 연락해 편지를 원래대로 복구해 달라고 부탁했다.민여진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종이 조각들을 찾았다. 하지만 허공에 흩뿌려졌던 종이 조각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민여진 씨, 뭘 찾아요?”서원이 묻자 민여진은 다급하게 말했다.“서원 씨, 바닥에 종이 조각 있는지 좀 봐주세요.”“없어요.”서원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뭐 잃어버렸어요? 찾아드릴까요?”민여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괜찮아요. 중요한 거 아니니까.”서원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민여진이 더 이상 묻지 않자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후 며칠 동안 박진성은 오로지 편지 복원에만 몰두했다.똑같은 복사본을 만드는 건 쉬웠지만 완전히 똑같이 만들려면 시간이 걸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박 대표님, 찾았습니다. 지금 회사 아래에 있습니다. 올려보낼까요?”박진성의 눈에 파문이 일었고 턱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 서류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당장 올려보내!”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렸다. 상우가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여성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전혀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었다.상우가 말했다.“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사람입니다.”박진성은 여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외모는 특별할 것 없었다. 중요한 건 목소리였다. 그는 말했다.“말해 보세요.”중년 여성은 잔뜩 긴장한 채, 앞에 선 남자의 강렬한 기세에 눌려 겨우 입을 열었다.“박... 박 대표님 안녕하세요...”그 어투와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순간, 박진성의 잘생긴 얼굴에
“강 선생님이 허락했어.”민여진은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방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몸에 안 좋으니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라고 하셨거든.”“그렇다고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면 어떡해. 또 감기 걸리겠네. 내일 민영미 만날 기운이나 있겠어?”민여진의 손에서 정원 가위가 떨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박진성을 바라보았다. 텅 빈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소리가 떨렸다.“뭐라고?”“민영미가 곧 올 거라고.”박진성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이미 떠날 채비를 했으니까 열흘 뒤면 여기로 올 거야.”민여진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었다. 그녀는 박진성의 멱살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려 했다.“거짓말하지 마. 박진성. 희망 고문하지 말라고...”“너한테 거짓말할 이유 없어.”박진성은 민여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기쁨과 감격, 여러 감정이 뒤섞여 민여진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했다. 너무나도 진실되고 생생한 표정이었다.박진성은 문득 이 거짓말이 영원히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전에는 병원에서 보존 치료를 받느라 외부와 연락을 완전히 끊고 있었어. 지금은 상태가 많이 안정됐고 예전처럼 아이처럼 굴지도 않아.”“정말?”민여진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걱정스럽게 말했다.“그런데 내 얼굴을 보면 놀라지 않을까?”“괜찮아. 이미 다 설명해 뒀어. 얼굴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할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야.”“그럼 됐어... 다행이네...”민여진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어머니 걱정하시게 하고 싶지 않아... 어머니는 내가 잘 지내고 행복하다는 것만 알면 돼... 내가 잘 지내면 어머니도 안심하실 거니까.”박진성은 말없이 민여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두웠다. 민여진의 중얼거림 속에 담긴 간절한 바람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그가 말했다.“걱정 마.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 어머니는 아
“진정한 사이?”박진성은 불쾌한 듯 물었다.“우리 진정한 사이는 어떤데?”그의 질문에 민여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박진성이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있으니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박진성은 민여진의 손목을 잡고 잘생긴 얼굴을 그녀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민여진, 우리는 부부 사이야. 그 사실만 기억해. 난 여러 여자를 사랑할 만큼 마음이 넓지 않아. 네가 채연에게 쓸데없는 짓만 안 하면 영원히 널 지켜줄 거야. 우린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박진성은 스스로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던 걸까?예전처럼 돌아간다고?민여진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한 채 귓가에는 박진성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무슨 뜻일까? 문채연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걸까?’머리가 지끈거렸고 바깥바람이 너무 매서워 생각하기 힘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박진성이 그녀를 품에 끌어당겼다.코트가 그녀를 감쌌다.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박진성의 체취만 남았다.낯선 감각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다.박진성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고 물었다.“너랑 연기해 달라며?”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나는 배우가 아니라서 네가 뭘 원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오늘부터 연습하는 거야. 네가 만족할 때쯤이면 네 어머니도 눈치 못 챌 거야.”확실히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민여진은 두 사람의 거리가 불편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예전처럼 하면 돼.”“예전이 언제인데?”“결혼한 그 2년 동안.”민여진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박진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때 너한테 잘해 주지 않았는데.”오히려 그 시절은 끔찍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그는 민여진을 단순한 욕구 해소 대상으로 여겼다. 잠자리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서재나 3층으로 향했다.“그걸로 충분해.”
박진성이 민여진에게 끌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첫 반응은 그에게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마치 자신이 섹스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쉬러 왔어.”“쉬러?”“어.”박진성이 말했다.“지금 우리 상태로는 민영미가 금방 눈치챌 거야. 네가 나한테 거부감을 느끼는 게 보여. 다행히 열흘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자연스러워지도록 노력해 보자.”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박진성은 한발 물러섰다.“불편하면 거절해도 괜찮아.”‘거절?’민여진은 잠시 멍해졌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민영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진성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진성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뭐라고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좋은 일이 생겼는데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민영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괜찮아. 당신만 괜찮다면 여기서 쉬어.”그녀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고 박진성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점차 마음이 편안해졌다. 민여진은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박진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민여진이 잠들자 박진성은 눈을 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마음속에 만족감이 차올랐다.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결국 악몽을 불러왔다.악몽 속에서 민여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의 목을 졸랐고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민여진은 끔찍한 얼굴로 울부짖었다.“살인자! 네가 우리 엄마를 죽였어! 그런데도 날 속이려고 해? 절대 용서 못 해! 평생 후회하게 만들 거야!”마지막에 민여진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안 돼! 민여진!”박진성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목에는 아직도 숨 막히는 느낌이 남아 있어 그는 숨을 크게 쉬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팔이 저린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자, 여자가 그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꿈이었다.다행히 꿈이었지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