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날 오후, 의사는 약재를 사러 나갔고 저택에는 민여진 혼자뿐이었다.방 안 공기가 답답했던 민여진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도착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처음에는 의사가 돌아온 줄 알았지만 곧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문채연이 거만한 모습으로 문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민여진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문채연의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민여진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문채연이 너무 늦게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문채연을 무시하고 소파에 앉았다. 문채연은 코를 찌르는 냄새에 비웃으며 말했다.“웬 한약 냄새가 이렇게 진동하지? 민여진, 너 죽기라도 하니?”집에 아무도 없자 문채연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여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널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아. 이 약은 내가 임신을 못 해서 박진성이 의사를 통해 지어준 거야. 꽤 보약이라고 하더라. 생각 있으면 너도 마셔 봐.”“뭐라고?!”문채연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고 정교한 얼굴이 일그러졌다.‘단지 민여진이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박진성이 의사를 불러 특별히 약을 달여 주기까지 했다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요즘 그녀는 박진성을 만나기조차 어려웠다.“거짓말! 네가 아이를 못 갖는 게 박진성하고 무슨 상관이야?”잠시 후, 문채연은 평정심을 되찾고 비웃었다.“민여진, 네가 어떤 위치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박진성은 내가 네 그 강아지의 배를 갈라 사지를 잘랐다는 걸 알면서도 날 용서했어. 그건 내가 그의 아내로서 첫 번째 후보라는 뜻이지. 그런 그가 뭐하러 중요하지도 않은 여자의 임신 여부에 신경이나 쓰겠어?”민여진이 답할 틈도 주지 않고 문채연은 잔뜩 비틀린 얼굴로 덧붙였다.“설사 그가 네 임신에 정말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건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임신이 힘들고 박씨 가문에는 후계자가 필요하기 때문일 뿐이야!”민여진은 순간 멍해졌다. 문채연의 말이 귓가에 똑똑히 박혔고 그 순간 박진성이 왜 그토록 그
그러나...곧 문채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통쾌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그 일을 알고 나면 민여진이 여전히 그렇게 날카로운 말을 할 수 있을까?’그녀는 기대했다.민여진은 문채연과 아래층에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잠깐만!”문채연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서둘러. 내가 오늘 온 건 다른 할 말이 있어서야.”“필요 없어.”민여진은 계속 위층으로 향했다.문채연은 길게 말을 끌었다.“정말 필요 없어? 이 일은 너의 어머니와 관련된 일인데.”민여진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어머니?’문채연이 하는 말에 좋은 소식은 없을 거라 짐작했지만 민여진은 어머니에 대한 소식이 너무나 궁금해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박진성은 항상 모든 것을 철저히 숨겼고 그날 주치의와 통화했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민여진은 뒤돌아보며 물었다.“뭔데?”문채연은 붉은 입술을 의기양양하게 올리며 말했다.“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직접 들어봐.”그녀는 준비해 온 녹음기를 켰다.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 서동구 은하타운 209호 별장에서 중년 여성 한 명이 3층에서 추락해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민여진의 눈빛은 멍해졌다. ‘서동구 은하타운 209호... 어째서 이 주소가 이렇게 익숙하게 들리는 걸까...’녹음은 계속 이어졌다.“알려진 바에 의하면, 추락 사고를 당한 여성은 정신질환 환자로 집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실수로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으로....”‘정신질환 환자?’갑작스럽게 민여진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그녀는 문채연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다.“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문채연, 경고하는데 우리 어머니 목숨 가지고 장난치지 마! 은하타운은 예전에 어머니가 살던 곳이야. 어머니는 이미 거기서 나오셨다고! 그런데 어떻게 추락사를 해!”문채연은 멍하고 무너진 민
자칫 숨이 넘어갈 뻔한 문채연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민여진이 다시 달려들었지만 남자가 막아섰다. 문채연은 말했다.“민여진, 박진성이 왜 너와 민영미를 만나게 해 주지 않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당연히 죽었으니까 그런 거지! 시신도 이미 화장했고! 그러니 네가 아무리 말을 잘 들어도 죽은 사람을 만날 순 없어.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직접 박진성에게 가서 물어봐. 뭐라고 대답하는지.”말을 마친 문채연은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남자와 함께 돌아섰다.민여진은 혼자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온몸으로 냉기가 스며들었지만 그녀는 멍하고 두려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박진성은 내가 죄를 뒤집어쓰면 어머니를 꼭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실 수 있단 말이야? 어떻게?”민여진은 몇 번이고 자신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머릿속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민영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박진성은 몹시 싫어하며 수많은 핑계를 댔다. 심지어 목소리 한 번 듣게 해 달라는 부탁도 거절했었다...민여진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돌아온 강태화는 차가운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민여진을 보고 들고 있던 약재를 내려놓고 달려왔다.“민여진 씨, 왜 바닥에 앉아 있어요? 몸도 안 좋은데 이렇게 찬 바닥에 앉으면 안 됩니다!”그는 다급하게 민여진을 부축하려 했다.민여진은 강태화의 손이 닿는 순간 그의 손을 붙잡고 핏발 선 눈으로 물었다.“박진성은 어디 있어요?”“박 대표님이요?”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대답했다.“동진으로 출장 가셨습니다. 3일 후에 돌아오실 겁니다.”‘3일 후?’민여진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당장 박진성에게 전화해요. 물어볼 게 있으니까!”강태화는 민여진의 상태가 좋지 않고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판단하여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연속 두 번을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그가 말했다.“민여진 씨, 박 대표님
“내 질문에만 답해 줘. 어머니께서 정말 살아 계시기는 한 거야?”민여진은 감정이 무너져 내렸고 쓴 눈물은 입속으로 스며들었다.“박진성! 당신 약속했잖아! 내가 문채연 대신 죄를 뒤집어쓰면 우리 어머니를 잘 돌봐 주겠다고!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야!”‘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야!’박진성의 마음도 흔들렸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목소리는 차가워졌다.“민영미는 살아 있어. 병원에 있다고! 민여진, 너 이상한 소문에 휘둘리지 마. 스스로 생각해야지. 민영미가 죽었다면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뭐 하러 너를 속이겠어?”민여진은 흐느껴 울며 고개를 저었다. 거의 미쳐가는 듯한 모습이었다.“나도 모르겠어...”박진성이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녹음과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은 민여진으로 하여금 문채연의 말을 믿게 만들었다.“살아 있다면 지금 당장 만나게 해 줘.”“안 돼!”박진성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설명했다.“민여진, 주치의가 분명히 말했잖아. 민영미는 지금 너를 만날 수 없어. 네 어머니가 너 때문에 흥분해서 병세가 악화되는 걸 원해?”물론 민여진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핑계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으면 직접 만나야 하고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보고 싶었다.“난 이미 얼굴이 망가졌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우리 둘만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날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거야.”민여진은 쇄골 부분에 힘을 주며 눈가의 붉은 기를 애써 감췄다.“그냥 어머니를 별장으로 데려와서 잠시 이야기만 나누게 해 줘. 살아 계신 것만 확인하면 돼... 박진성,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마지막에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민여진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박진성은 마음이 복잡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진실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하지
여기서 떨어지면 2층에서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갈비뼈 몇 대 부러지고 병원에서 나와 다시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이 층에서 떨어진다면 죽을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바람을 느끼는 민여진의 마음속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난간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허공에 드리웠다.이 순간,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했다. 빈민가 연못가에서 물장난을 치던 그때처럼,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편안함이 가득했다.강태화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2층에서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민여진 씨! 제발 충동적인 행동은 하지 마세요! 빨리 내려오세요!”“가까이 오지 마세요.”민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텅 빈 눈빛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뛰어내릴 거예요!”강태화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그야말로 살아날 길이 없었다.그는 민여진을 최대한 달랬다.“안 갈게요, 안 갈게요! 하지만 민여진 씨, 여기는 정말 위험합니다. 바람을 좋아한다면 제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 드릴게요. 여기는 너무 위험해요. 떨어지면 어떡합니까?”“떨어지면 어떡하냐고?”민여진은 잠시 멍한 듯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죽겠죠. 하지만 강 선생님, 내가 무서울 것 같아요? 이렇게 사는 게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그녀의 말투는 차분했고 조급함이 없었다. 마치 다음 순간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강태화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얼굴 근육이 씰룩거렸다.“민여진 씨, 그런 생각 마세요. 세상에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닙니까!”그 말은 민여진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소중한 사람? 소중한 사람 하나는 박진성 때문에 미래를 잃었고 다른 하나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데.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이 누가 남았단 말인가?’“나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박진성에게 전화해서 당장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하세요.”민여진은
“급한 일이 생겼어. 미뤄!”서원은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대표님! 이 프로젝트는 대표님께서 반년 넘게 공들여 오신...”“미루라고 했어! 당장 양성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예매해!”서원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양성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민여진이 별장 3층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하고 있어.”비행기 표를 예매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시간에는 항공편이 없었고 가장 빠른 항공편도 새벽에 출발했다.무려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하지만 민여진의 몸 상태로는 다섯 시간은커녕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세 시간도 버티기 힘들 것이었다.박진성은 하는 수 없이 전용기를 수배했다. 양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시간 넘게 지난 후였다. 별장까지 가는 길에 신호등에 계속 걸렸고 간신히 별장 정원에 도착했을 때 3층에서 여자의 수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흰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완강하게 미동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올라가 강태화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왜 민여진을 3층에 올라오게 한 거야!”강태화는 울먹였다.“3층에 이렇게 위험한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그럼 끌어내리기라도 했어야지! 눈도 안 보이는 사람 하나 못 말려?”강태화는 울상을 지었다.“시도는 해 봤습니다. 하지만 민여진 씨는 청력이 매우 예민해서 제가 조금만 다가가도 앞으로 물러서는데 어떻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박진성은 어지러울 정도로 화가 났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민여진, 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죽음도 두렵지 않아?’그는 3층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여자의 앞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의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박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민여진!”박진성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당장 내려와!”민여진은 눈을 떴다. 몸은
민여진이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는 순간, 서원은 반사적으로 달려가 손을 뻗어 민여진의 손목을 잡았다.손목을 잡는 순간 서원은 깜짝 놀랐다. 여자는 너무 말라 뼈밖에 없는 것 같았다.“민여진 씨! 다른 손도 주세요! 빨리!”서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절망에 잠겨 있던 민여진의 얼굴에 비로소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며 그녀는 고개를 들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서원 씨, 제가 평소에 잘해드렸잖아요. 정말 날 위한다면 이 손 놔 주세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젠 어머니 곁으로 가서 효도하고 싶어요.”서원은 가슴이 너무 아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두 눈에 핏발이 선 박진성이 달려와 민여진의 팔을 꽉 붙잡았다.아무도 몰랐지만 서원이 민여진의 손목을 잡았을 때 추락하던 그의 심장도 함께 멈췄다. 만약 민여진이 떨어졌다면 그 역시 평생 지옥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서원아, 어서 민여진의 다른 쪽 손을 잡아!”그는 다급하게 명령했다.민여진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돌멩이를 손에 쥐고 박진성의 손에 미친 듯이 내리쳤다.날카로운 돌멩이는 손등에 핏자국을 남기며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만들었다.박진성은 날카로운 통증에 움찔했지만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민여진은 그런 박진성을 보며 눈물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박진성, 왜 날 구하는 거야? 너랑 문채연에게 애 낳을 도구가 필요해서 그래?”“닥쳐!”박진성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이유 같은 건 없어. 난 그냥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그는 생각할 겨를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제멋대로였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민여진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살길 바란다고? 우리 어머니가 죽기 전에 이렇게 열심히 구했으면 어머니가 투신했을까? 넌 모든 걸 가졌으면서 나한테 남은 얼마 안 되는 것까지 하나하나 빼앗아 갔어. 죽어야 마땅한 건 바로 너야!”“네가 평생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기를
“살아 있어야 희망이 있다고?”민여진에게 그 말은 엄청난 조롱처럼 들렸다.그녀는 늘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 결과는 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뿐이었다.“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난 이 꼴이 됐는데... 내게 무슨 희망이 있다는 거죠?”그녀는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서원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절망적인 삶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서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박진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진정하고 민여진을 쏘아보며 물었다.“누가 네 어머니가 죽었다고 했어?”“이제 와서 또 날 속이려는 거야?”민여진은 증오와 절망에 찬 눈으로 박진성을 바라보았다.“어머니가 살아있다면 왜 여기 데려오지 않았어? 박진성, 날 속이고 어머니를 이용해서 날 협박하는 게 그렇게 즐거워?”그녀의 절규에 박진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민영미의 죽음은 그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단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 이상이었다. 민여진은 살아갈 희망을 잃고 영원히 그를 미워하고 거부할 터였으니까.그건 박진성이 절대로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내가 말했지. 내가 널 속일 이유가 없다고. 네 어머니가 짧은 시간 안에 병원에서 나와 널 찾아오는 게 가능할 것 같아? 못 믿겠으면 들어봐!”박진성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병원에 부탁해서 녹음한 거야.”그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잡음과 함께 민영미의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내 딸? 응, 참 착하고 예쁜 아인데. 근데 나랑 같이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아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많이 보고 싶지만 사람들이 이제 다 큰 애니까 엄마 곁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화도 못 했고... 난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우리 딸이 내 생각이 나서 언젠가 날 한 번만 보러 와주면 좋겠어...”테라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녹음된 목소리는 매우 또렷하게 들렸다.민여진은 무너지듯 눈물을 쏟아냈다.박진성이 말했다.“네 어머니 맞지? 넌 딸이니까 엄마 목소
예전으로 돌아가자니...민여진은 무언가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점점 북받쳐 오는 감정이 뜨거워진 눈가가 빠르게 촉촉해졌다.“우린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9일만 버티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예전처럼 서로 예의를 지키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서로를 괴롭게 해봤자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아예 마음을 닫고 평생 무감각하게 살기만 하면 이렇게 흔들릴 일도 없을 테니 민여진은 그거면 충분했다.결국,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이번 생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난 그냥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무사하다면, 진성 씨가 약속을 지켜준다면, 나도... 최대한 예전으로 돌아가고 노력해볼게.”민여진은 애써 용기를 내어 해본 말이었지만 뜨거웠던 박진성의 눈동자는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민영미가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고?그렇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민영미는 이미...박진성은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9일 후면 민여진은 민영미와 만나게 된다.만약 민여진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정말 민여진을 잃게 될까?활기차고 생기 넘기는 민여진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박진성 씨...”힘이 잔뜩 들어간 박진성의 손아귀에 민여진이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뒤늦게 눈치챈 박진성이 다급히 손을 놓아주었다.“응.”박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럼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보자.”말을 마치자마자 박진성은 거울 속에 비진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박진성은 진지하고 불안해 보였다.그는 또 다른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9일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9일 동안 그는 최선을 다해 민여진의 사랑을 얻어야 했다.사랑만이 민여진을 죽음으로 밀어 넣지 않을 것이고, 박진성을 사랑해야만 민여진은 끝까지 살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떠나버린 거야?알레르기 반응으로 몸과 얼굴에는 붉은 발진이 가득 차고 호흡까지 힘든 이 상황에 민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떠나버렸다.“진성 씨... 왜 그래요? 여진 씨가 떠난 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문채연은 박진성과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박진성의 옆에 앉았다.“내가 진성 씨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하지만 문채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박진성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팔에 꽂혀있던 수액 바늘을 뽑아버렸다.“진성 씨! 뭐 하는 거예요?”문채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박진성은 빨개진 눈동자로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는 급히 아무 차나 잡아타고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알레르기 증상은 그대로였고 팔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그럴수록 분노만 밀려왔다.‘민여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매정할 수가 있어? 내 상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저택 2층.민여진은 발코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두 눈동자는 텅 비어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박진성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고, 혼란스러워서... 무서웠다.갑자기 다정해진 박진성이 무서웠다.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한 그의 모습이 민여진의 마음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했다. 엄마도 살아있고, 박진성의 매정함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박진성이 문채연과 결혼하게 된다면, 민여진은 아무 미련 없이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던 사이, 방 문이 세게 열렸다. 예기치 못한 인기척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거센 박진성의 손이 민여진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는 온몸으로 강렬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민여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박진성 씨?”민여진의 어깨를
강태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박진성의 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옷 소매에는 영문을 모를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사로서의 본능이 발동한 강태화가 곧바로 그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 팔은 멍 자국과 피로 섞여 엉망진창이었다.“팔로 뭘 부수신 건가요? 죄다 멍이에요. 대표님... 아예 팔 한쪽 버리고 싶으신 거예요?”예전이었다면 강태화도 이런 강압적인 말투로 박진성을 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걸 다 떠나서 그의 주치의로서 너무 화가 났다.“뒷좌석으로 가세요. 운전은 제가 직접 할게요. 여긴 마땅한 장비도 없어서, 자칫했다간 뼈에 문제 생겨요.”“괜찮다니까...”“강 선생님 말대로 해.”가만히 있던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은 흐릿했지만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병원부터 가는 게 급선무였다.민여진은 조수석에 올라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진성 씨까지 다치면,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잖아. 아직도 회사에는 진성 씨가 있어야 하는데.”박진성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민여진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걱정의 말을 듣고 싶었다.“고작 회사 때문에 그래? 그럼 너는?”“뭐?”민여진은 뒤늦게야 박진성이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박진성은 지금 민여진에게 자신을 필요로 하느냐를 묻고 있었다.예상 못 한 질문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열이 오른 손바닥에는 땀이 맺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사람은 바로 강태화였다.“대표님, 여진 씨, 연애는 병원 도착해서 하시죠, 네? 대표님 지금 얼굴도 붓기 시작했고,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이 상태로 그냥 뒀다간 정말 큰일 나요!”박진성은 더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뒷좌석에 올라타 민여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진성의 팔에는
남자는 일부러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누가 봐도 억만장자인 박진성의 돈을 뜯어내려 했다.“6천만 원이 저한테는 그렇게 큰돈이 아니긴 해요.”박진성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그러자 남녀는 화색을 띠었다. 하지만 박진성의 죽은 듯한 눈빛은 두 사람을 한없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그래도 당신 같은 사람들한테는 절대 줄 수 없을 것 같네요. 경찰에 신고할 거면 빨리 신고해요. 당신들이 신고 안 하면 내가 직접 신고할 테니까.”“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우릴 신고하겠다는 거예요?”박진성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갔다.“당신들이 친딸을 학대했으니까요.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구속 사유라고 보는데요.”박진성의 기세에 눌린 남자는 살짝 고개를 움츠리는 듯하더니 이내 뒤에서 등 떠미는 여자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누가 우리 딸을 학대했다는 거예요!”민여진은 점점 커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참다못한 그녀가 결국 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을 꺼냈다.“한 살 남짓한 여자애를 차에 두 시간 넘게 가둬놨으면서 그게 학대가 아니라고요? 차 안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아요? 여름이 아니라고 해도, 산소 부족한 차 안에 두 시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 애는 숨도 똑바로 못 쉬어요! 당신들이 그러고도 부모예요?”드디어 처음으로 화를 낸 민여진의 온몸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박진성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이윽고 다시 표정을 굳히더니 머리 위에 있는 감시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CCTV 있는데, 한 번 확인해 볼까요? 차에 언제 애 가둬놨는지 다 찍혀 있을 텐데요. 같이 경찰서 가서 확인 한 번 해볼까요?”“미친놈인가...”당황한 남자는 여자에게 고개를 돌려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내 상황 파악을 끝낸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고 자리를 떴다. 차가 멀리 떠난 후에도 민여진의 귓가에는 여자아이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맴돌았다.민여진
박진성은 늘 민여진의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해왔다. 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문채연과 닮아서 그런 줄만 알았지만 민여진이 얼굴을 다친 후에도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민여진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색하게만 흘러가는 기류에 대화 주제를 바꿔보고 싶었다. 그 순간,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민여진의 옷깃을 꽉 쥐었다.“왜 그래, 아가? 어디 불편해?”민여진은 예상치 못한 아이의 반응에 조금 긴장하는 듯했지만 이내 당황하지 않고 한 손으로 아이의 등을 살살 두드리다가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자연스럽게 이어진 민여진의 행동에 아이는 다시 울음을 그쳤다.박진성은 곁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아이가 자신과 민여진의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를 지배했다.그러면 민여진이 민영미의 죽음을 알게 되어도 아이를 위해 억지로 살아가려 하지 않을까? 그저 민여진이 살아있기만 한다면, 잘 살아가기만 한다면 두 번 다시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진성 씨, 박진성 씨?”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니 민여진이 박진성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르고 있었다. 그가 다급히 대답했다.“어, 왜 그래?”입술을 살짝 깨물던 민여진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굳이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애한테 뭔 일 있는지 한 번 봐줄래? 울음은 그쳤는데 계속 내 옷 잡고 놔주질 않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아.”아이는 침을 질질 흘리며 민여진의 옷깃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슬쩍 본 박진성이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배고픈 것 같아.”“배고파서 그래?”민여진은 박진성의 말에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애한테 뭐라도 좀 먹여야 하나? 아니면 애 부모 올 때까지 기다려?”박진성이 입을 열려던 그때, 먼 곳에서 한 쌍의 남녀가 뛰어오고 있었다.“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예요?”여자는 민여진의 품에서 아이를 빼앗아 들고는 그녀를 힘껏 밀쳐냈다.“애 훔
그리고 민여진은 망고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망고라는 그 강아지는 민여진이 울 때마다 함께 낑낑거리던 아이였다. 만약 망고가 지금 살아있었다면 늘 그래왔듯 민여진에게 다가가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지 않았을까?민여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민여진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박진성 역시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던 민여진이 걸음을 멈추었다.하마터면 그녀를 지나칠 뻔하던 박진성도 다급히 멈춰서며 뒤돌아 물었다.“왜 그래?”민여진이 이마를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애 울음소리라고?”박진성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있는 이곳은 교차로였고,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 연인이나 출퇴근 중인 직장인들이었던 탓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릴 일이 잘 없었다.“잘못 들은 거 아니야?”“아니야!”민여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내가 잘못 들었을 리 없어!”민여진은 앞이 안 보일 뿐이지, 귀가 안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 귀가 남들보다 더욱 민감했다.“분명 아기 울음소리였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민여진의 말에 박진성은 어쩔 수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쪽에 주차된 차를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차 안에는 겨우 한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가 덩그러니 갇혀 있었다. 얼마나 갇혀 있었던 건지 얼굴과 몸은 이미 땀으로 가득했고 온몸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 안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여기야!”박진성이 민여진에게 상황을 알렸다.“차 안에 아이가 갇혀 있어.”민여진의 혹시나 하던 불안함은 역시나 하는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차창에 몸을 기대 아이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울음소리는 더욱 명확하게 들려왔다. 울다가 지친 아이의 울음소리에도 점점 힘이 빠졌다.“이대로 뒀다가는 더 못 버틸 거야. 근
‘어디로 가는 걸까?’민여진은 물어봐야 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순순히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현관문에 도착했을 때, 박진성은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민여진에게 둘러 주고 나서야 문을 나섰다.민여진은 약간 불편함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목도리를 풀어 손에 쥐었다.“다 왔어.”박진성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민여진도 차에서 내렸다. 주변은 사람들의 소음과 차량 경적 소리로 가득했다. 아마도 번화가 한복판인 듯했다.박진성은 민여진과 나란히 서지는 않았지만 정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내 손 잡고 가.”그는 전에 없이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민여진은 머리가 텅 빈 상태로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갔다. “어서 오세요.”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여긴 어디야?”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 오늘 박진성의 행동은 평소와 너무 달랐던 것이다.“곧 알게 될 거야.”박진성은 대답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라는 그의 말처럼 그곳은 강아지 카페였다. 그녀가 입구에 서 있자마자 작은 강아지들이 몰려들어 낑낑거렸다.직원이 웃으며 민여진에게 말했다.“원래 여기는 유기견 보호소였는데, 박 대표님께서 후원을 해 주셔서 카페로 바뀌었어요. 지금도 유기견들을 돌보고 있지만 예전처럼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아요.”“박 대표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민여진은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오히려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이 유기견 보호소에 후원을 했다고? 왜? 그는 원래 고양이나 개를 싫어하지 않았나?’그녀가 아직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박진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손 내밀어 봐.”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그녀의 팔에 안겼다. 부드러운 털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강아지는 낑낑거렸다.박진성은 강아지를 보며 말했다.“네가 얘를 버렸을 때 내가 여기로 보냈어. 네가 볼 수 있었다면 알았겠지만,
박진성이 민여진에게 끌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첫 반응은 그에게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마치 자신이 섹스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쉬러 왔어.”“쉬러?”“어.”박진성이 말했다.“지금 우리 상태로는 민영미가 금방 눈치챌 거야. 네가 나한테 거부감을 느끼는 게 보여. 다행히 열흘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자연스러워지도록 노력해 보자.”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박진성은 한발 물러섰다.“불편하면 거절해도 괜찮아.”‘거절?’민여진은 잠시 멍해졌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민영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진성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진성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뭐라고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좋은 일이 생겼는데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민영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괜찮아. 당신만 괜찮다면 여기서 쉬어.”그녀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고 박진성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점차 마음이 편안해졌다. 민여진은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박진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민여진이 잠들자 박진성은 눈을 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마음속에 만족감이 차올랐다.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결국 악몽을 불러왔다.악몽 속에서 민여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의 목을 졸랐고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민여진은 끔찍한 얼굴로 울부짖었다.“살인자! 네가 우리 엄마를 죽였어! 그런데도 날 속이려고 해? 절대 용서 못 해! 평생 후회하게 만들 거야!”마지막에 민여진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안 돼! 민여진!”박진성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목에는 아직도 숨 막히는 느낌이 남아 있어 그는 숨을 크게 쉬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팔이 저린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자, 여자가 그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꿈이었다.다행히 꿈이었지
“진정한 사이?”박진성은 불쾌한 듯 물었다.“우리 진정한 사이는 어떤데?”그의 질문에 민여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박진성이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있으니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박진성은 민여진의 손목을 잡고 잘생긴 얼굴을 그녀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민여진, 우리는 부부 사이야. 그 사실만 기억해. 난 여러 여자를 사랑할 만큼 마음이 넓지 않아. 네가 채연에게 쓸데없는 짓만 안 하면 영원히 널 지켜줄 거야. 우린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박진성은 스스로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던 걸까?예전처럼 돌아간다고?민여진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한 채 귓가에는 박진성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무슨 뜻일까? 문채연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걸까?’머리가 지끈거렸고 바깥바람이 너무 매서워 생각하기 힘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박진성이 그녀를 품에 끌어당겼다.코트가 그녀를 감쌌다.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박진성의 체취만 남았다.낯선 감각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다.박진성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고 물었다.“너랑 연기해 달라며?”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나는 배우가 아니라서 네가 뭘 원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오늘부터 연습하는 거야. 네가 만족할 때쯤이면 네 어머니도 눈치 못 챌 거야.”확실히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민여진은 두 사람의 거리가 불편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예전처럼 하면 돼.”“예전이 언제인데?”“결혼한 그 2년 동안.”민여진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박진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때 너한테 잘해 주지 않았는데.”오히려 그 시절은 끔찍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그는 민여진을 단순한 욕구 해소 대상으로 여겼다. 잠자리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서재나 3층으로 향했다.“그걸로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