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어야 희망이 있다고?”민여진에게 그 말은 엄청난 조롱처럼 들렸다.그녀는 늘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 결과는 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뿐이었다.“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난 이 꼴이 됐는데... 내게 무슨 희망이 있다는 거죠?”그녀는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서원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절망적인 삶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서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박진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진정하고 민여진을 쏘아보며 물었다.“누가 네 어머니가 죽었다고 했어?”“이제 와서 또 날 속이려는 거야?”민여진은 증오와 절망에 찬 눈으로 박진성을 바라보았다.“어머니가 살아있다면 왜 여기 데려오지 않았어? 박진성, 날 속이고 어머니를 이용해서 날 협박하는 게 그렇게 즐거워?”그녀의 절규에 박진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민영미의 죽음은 그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단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 이상이었다. 민여진은 살아갈 희망을 잃고 영원히 그를 미워하고 거부할 터였으니까.그건 박진성이 절대로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내가 말했지. 내가 널 속일 이유가 없다고. 네 어머니가 짧은 시간 안에 병원에서 나와 널 찾아오는 게 가능할 것 같아? 못 믿겠으면 들어봐!”박진성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병원에 부탁해서 녹음한 거야.”그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잡음과 함께 민영미의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내 딸? 응, 참 착하고 예쁜 아인데. 근데 나랑 같이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아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많이 보고 싶지만 사람들이 이제 다 큰 애니까 엄마 곁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화도 못 했고... 난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우리 딸이 내 생각이 나서 언젠가 날 한 번만 보러 와주면 좋겠어...”테라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녹음된 목소리는 매우 또렷하게 들렸다.민여진은 무너지듯 눈물을 쏟아냈다.박진성이 말했다.“네 어머니 맞지? 넌 딸이니까 엄마 목소
강태화도 달려와 민여진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말했다.“방으로 옮겨야겠어요! 몸이 약해서 감기 든 것 같습니다.”박진성은 민여진을 안아들고 방으로 내려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에어컨을 켜주었다. 그녀의 체온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조금 가셨다.이제 남은 건 의사인 강태화에게 맡기면 되었다.박진성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왔다. 서원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박진성을 보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그는 고개를 숙인 채 복잡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민여진 씨 어머니... 정말 살아 계신 건가요?”박진성은 차갑게 그를 쏘아보며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서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민여진 씨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지 않다면 이건 영원히 유지될 수 없는 거짓말입니다. 민여진 씨에게 차라리 짧고 굵게 아픈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짧고 굵게?”박진성은 주먹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내리쳐 산산조각 내며 이를 갈았다.“말이 쉽지. 민여진 상태 못 봤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민여진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민여진의 눈에 가득했던 고통과 절망, 세상에 대한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채 죽음을 향해 뛰어들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그는 이 끔찍한 거짓말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그는 민여진이 다시 자살을 시도하는 걸 볼 수 없었다. 방금 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그 느낌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네 입이나 잘 간수해.. 네가 뭘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생각하라고. 알겠어?”박진성은 차갑게 경고했다. 민여진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서원은 여기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서원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강태화가 방문을 열고 나와보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이때 박진성이 물었다.“상태는 어때?”“별로 좋지 않습니다
모두 민영미에 대한 이야기였다.박진성은 오래전부터 민영미가 민여진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민영미는 민여진 때문에 병을 얻었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딸을 부양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재가하지 않았다.민여진은 전에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진성 씨, 당신은 내 마음속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야.”그때 마음이 초조했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충 물었다.“그럼 첫 번째는 누군데?”“당연히 우리 어머니지!”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그가 질투하는 줄 알고 허둥지둥 변명했다. “오해하지 마!”“내가 뭘 오해한다는 거야?”민여진은 다시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어머니는 날 위해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셨어. 어머니가 단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면 난 죽어도 좋아.”그때의 민여진은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고 민영미가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민영미는 그녀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존재였다.그런 민영미의 죽음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박진성은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비겁하다고 해도 좋고 치졸하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니 이 거짓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지되어야만 했다.하지만 보름 안에 무슨 핑계를 대야 할까?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극심한 피로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후유증으로 박진성은 탈진 상태였다. 그는 차라리 민여진을 품에 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의외로 다음 날 오후에야 깨어난 박진성은 반사적으로 품 안을 확인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그의 가슴에 기댄 여자의 얼굴은 더 이상 창백하지 않았다. 병색이 완연한 붉은 기가 뺨에 어려 있었고 불안한 듯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얕은 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박진성은 잠시 멍해졌다.지난 2년간 그들이 함께 잠에서 깨어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하고 그리운 감정이 들었다.그때, 민여진이 멍한 눈으로
“이젠... 안 그럴 거야...”민여진은 빨갛게 부어오른 손을 감싸 쥐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살아야지. 살아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니까...”그 말에 박진성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는 넥타이를 매려고 했지만 초조함에 제대로 맬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민여진을 잡아당겨 그녀의 손에 넥타이를 쥐여주었다.“매 줘.”민여진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넥타이를 받아들었다. 오랜만이었지만 능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박진성의 아내로서 부족함 없이 행동하기 위해 매일같이 연습했던 덕분이었다.그러나 박진성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박진성은 단지 화제를 돌리려고 민여진에게 넥타이를 매달라고 했을 뿐인데 그녀가 너무나 능숙하게 넥타이를 매는 모습에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잘 매네. 방현수가 손수 가르쳐 줬나 보지? 그 촌구석 의사가 양복 입을 일이 뭐가 있다고.”갑작스럽게 방현수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가슴이 아팠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박진성은 재빨리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다그쳤다.“벙어리야? 말해!”“뭘 말하라는 거야?”민여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현수 씨랑 무슨 상관인데? 그는 이미 이 도시를 떠났잖아...”이미 떠난 사람인데 박진성은 언제까지 틈만 나면 방현수를 언급하며 비아냥거릴 것인지...“떠났다고 해서 예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잖아!”박진성은 깔끔하게 매어진 자신의 넥타이를 보며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민여진을 노려보았다.“이거 누가 가르쳐 줬냐고!”“혼자 배웠어...”박진성은 코웃음 쳤다.“눈도 안 보이는 게 혼자 배웠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예전에 당신이 넥타이 매는 걸 보고 배웠어.”그녀는 전에 그의 넥타이를 가져다가 가정부의 목에 걸고 연습했었다. 언젠가 그에게 넥타이를 매어 줄 날을 꿈꾸면서.그토록 바라던 날이 왔지만 박진성은 냉소적인 말만 쏟아냈고 그녀의 마음은 더
그녀는 더 이상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도, 마음도 없었다. 오직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진성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화난 얼굴을 들이밀었다.“민여진, 네가 거짓말할 때 다 티 나는 거 알아? 너 자꾸 이렇게 말 안 들으면 민영미 못 만나게 할 거야!”민여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결국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박진성, 내가 사실대로 말하면 내 말 믿을 거야?”그 말에 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또 무슨 잔꾀를 부리려는 거야? 네가 진실을 말한다면 내가 왜 못 믿겠어?”“문채연이야.”민여진은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박진성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조하며 말을 이었다.“어제 문채연이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흥분했던 거고 심지어 죽겠다고까지 했던 거야...”박진성은 깊은 눈으로 민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거짓말을 꾸며낸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잠시 침묵하던 민여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 말 안 믿어도 괜찮아.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하지만 박진성은 그 일이 결코 지나간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민영미는 이미 죽었고 그는 보름 안에 민여진을 안심시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모든 것이 다 이 일 때문이었다.‘정말 문채연이 그런 짓을 했을까? 그녀가 정말 그렇게 잔인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단 말인가? 누구든 그 일이 민여진과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을 텐데.’그는 아무 대답 없이 돌아서서 나갔다. 회사로 가던 중 그가 갑자기 말했다.“회사 말고 채연이네 집으로 가.”운전기사는 곧바로 차를 돌렸다. 십여 분쯤 달려 도착한 집 앞에는 이미 가정부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문채
“어쩌다...”문채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더니 다급하게 물었다.“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민여진 씨 괜찮아요? 어떻게 그런 일로 뛰어내리려고...”“구했어.”“다행이네요...”문채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뭔가 생각난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박진성을 바라보았다.“진성 씨, 그런데 왜 저한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어디에 갔었는지까지 묻고... 설마 제가 민여진 씨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줬다고 의심하는 거예요?”박진성은 침묵하자 문채연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민여진 씨가 그랬어요? 제가 말했다고요?”“아니야.”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냥 물어본 것뿐이야.”문채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민여진 편들지 마세요. 민여진이 먼저 말하지 않았으면 저를 의심했겠어요? 그리고 진성 씨, 저 정말 서운해요. 어떻게 제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 강아지 때문인가요?”“맞아요! 인정해요! 그 가정부가 한 짓, 반은 내가 시킨 거예요. 하지만 그 개가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설사 내가 시켰다고 해도 그게 잘못된 거예요? 민여진이 날 모함해서 죽을 뻔하게 만들었고 내 다리도 망가뜨렸어요. 그런데 이제 당신까지 뺏어가려고 하는데!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돼요? 당신을 그 여자한테 순순히 넘겨야 하냐고요!”문채연은 흐느끼며 서럽게 울었다.억울하게 우는 그녀를 보며 박진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채연아...”“아란아, 어제 내가 쓴 영수증들 다 가져와!”문채연은 눈물을 닦으며 지시했다. 가정부가 영수증을 가져오자 문채연은 그것을 박진성에게 건넸다.“이게 어제 오전부터 오후까지 쓴 영수증들이에요. 시간이 다 나와 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내가 있던 곳에서 당신 별장까지는 차로 왕복 두 시간이 걸려요. 내가 별장에 갔었는지 이 영수증들이 증명해 줄 거예요.”박진성은 영수증을 들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문채연은 더 이상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위층으
그런데도 민여진은 악랄한 본성을 버리지 못했다. 자신도 바보 같았다. 그 말을 듣고 문채연을 의심하다니.박진성은 차가운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옆으로 한 여자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저기, 혼자예요?”“꺼져.”박진성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잘생기면 다야...”그 말에 여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시간이 늦어지자 상우가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이제 그만 가시죠?”“어딜 가?”박진성은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같이 마셔.”상우는 박진성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이렇게 술을 마시는 날이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상우는 정중하게 거절했다.“저는 운전해야 합니다.”박진성은 억지로 권하지 않고 술을 더욱 맹렬하게 마셨다. 몇 병을 비우자 그의 얼굴색이 변하고 눈빛이 흐려졌다.상우는 재빨리 계산하고 박진성을 부축해 차에 태웠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그는 박진성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물었다.“대표님, 물 좀 드릴까요?”박진성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바라보다가 숨을 몰아쉬고는 2층에 있는 민여진의 방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예전에는 그가 술에 취하면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걱정하며 자신을 돌봐 주었는데 이제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다니.“민여진, 당장 내려오라고 해!”상우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2층으로 올라가 민여진의 방문을 두드렸다.한참 후,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리더니 민여진이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상우가 대답했다.“대표님이 오늘 좀 많이 취하셨습니다.”민여진은 술 냄새를 맡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우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상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 씨가 내려와서 돌봐 드리길 바라십니다.”민여진은 놀란 눈으로 상우를 바라보았다. 상우 역시 어이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박진성은 차가운 눈으로 민여진을 쏘아보며 말했다.“이제 남이 시켜야 움직인다 이거야? 민여진, 넌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잖아. 내 비위를 맞추는 게 네가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어?”그의 원망 섞인 말에 민여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나한테 묻는 거야? 내가 술 마셨을 때 네가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 안 나?”민여진은 그제야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뻗어 박진성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그의 턱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넥타이를 풀었다.셔츠 단추를 몇 개 푸니 박진성의 숨소리가 조금은 편안해졌다. 민여진은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관자놀이를 살살 눌러 주었다. 술 마셔서 머리 아플 테니 조금이라도 풀어주려는 마음이었다.그러나 박진성은 평소처럼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무표정한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얼굴에 마음이 드러난다는 말, 예전엔 안 믿었는데 이젠 네 얼굴을 보면 딱 알겠어.”민여진의 손길이 멈칫했다. 박진성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네 말을 믿고 채연이를 의심했지.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고 조사까지 했어. 넌 입만 열면 거짓말인데 내가 또 속아 넘어가다니, 내가 미친놈이지.”그는 민여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거칠게 물었다.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야?”아마도 너무 아파서였을까. 민여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무슨 소리야? 조사 다 했어?”“그날 채연이가 백화점에 있었던 CCTV 영상까지 확인했어. 그래도 부족해?”박진성이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민여진은 그대로 무너져 그의 품에 떨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핏발 선 눈으로 쏘아붙였다.“채연이는 그렇게 멀리에 있었는데도 넌 누명을 뒤집어씌웠잖아! 네 마음이 얼마나 악독하면 그래? 채연이가 얼마나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날 봤는지 알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 내가 널 믿고 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