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이 들자 박진성은 애써 자신의 진심을 숨기기 위해 잠깐의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오늘은 그냥 중요한 일이 없어서 쉬러 왔을 뿐이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짧은 대화를 마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문채연은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이를 꽉 깨물더니 책상 위의 물건들을 미친 듯이 쓸어버렸다.민여진, 민여진. 그 지긋지긋한 민여진.만약 그녀만 없었다면 문채연과 박진성은 어젯밤 이미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박진성의 아이를 가졌을지로 모른다. 이 모든 게 다 민여진 때문에 망가져 버렸다.“이런 죽일 년! 넌 내가 죽여버릴 거야!”문채연은 묵혀뒀던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자 민망한 표정으로 서 있던 비서가 눈에 들어오자 또다시 당혹스러워했다.비서는 문채연의 시선을 마주하며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더니 입꼬리를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지어냈다.“채연 씨, 괜찮으세요? 아까 사무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전에 보셨다던 쥐가 또 나왔나 싶어서요.”“네.”문채연은 머리를 정리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냥 책상 위에 쥐가 있길래 깜짝 놀라서요. 방이 엉망이 돼버렸네요. 미안해요.”“괜찮아요.”비서가 말했다.“채연 씨가 괜찮으면 된 거죠. 나머지는 제가 다 정리할게요.”“네, 부탁할게요.”문채연은 음식을 들고 자리를 뜨려다 다시 문 앞에서 멈춰 입을 열었다.“비서님, 진성 씨는 다른 사람이 자기 물건에 함부로 손대는 걸 엄청 싫어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일은 보고해줄 필요 없어요. 혹시 우리 사이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잖아요. 괜히 얘기해 봤자 이득 보는 게 없는데.”“물론이죠, 채연 씨.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사소한 일까지 대표님께 보고드릴 필요는 없죠.”문채연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 미소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소가 지워진 그녀의 얼굴에 남은 것은 한겨울의 차가운 냉기 같은 표정
박진성이 원하는 바가 맞긴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따지듯 말하는 그 민여진의 태도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이는 당연히 낳아야지.”박진성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임신을 거부할 것 같진 않은데, 네가.”민여진이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셨다. 가슴이 답답해 숨이 꽉 막혔다.“누굴 위해서? 설마 진성 씨 당신을 위해서?”“그럼 누구겠어?”박진성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민여진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표정도 싸늘하게 굳어버렸다.“내가 아니면 네가 또 누굴 위해서 애를 낳을 건데?”민여진은 어이없는 박진성의 말에 헛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나오는 그 씁쓸함의 농도가 너무 짙어 입꼬리조차 올라가지 않았다.박진성은 이미 그녀의 첫 아이를 세상에서 지워버렸고 그로 인해 민여진은 엄마가 될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몸조리 잘하라며 큰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설마 고작 이런 거로 자신의 죄책감을 덜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민여진이 겪었던 그 고통을 자신이 상쇄해줄 수 있다고 믿는 걸까?민여진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참기 위해 혀로 윗니를 꾹 눌렀다. 하지만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몸은 여전히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민여진은 식탁 옆에 앉아 있던 박진성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필요 없어.”“뭐라고?”“필요 없다고!”민여진이 드디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큰 소리를 냈다.“차라리 평생 애를 못 낳고 말지. 굳이 사람까지 보내 가며 내 몸조리에 집중할 필요 없어.”“너 정말 왜 이래, 미친 거야?”박진성은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잔뜩 구겨진 얼굴로 민여진을 노려보았다.“그날 내 앞에서 울었던 건 다 뭐야? 그냥 쇼한 거였어? 그런 것도 아니면 그냥 내 아이를 낳기 싫다는 건가? 내 아이가 아니면 누구 아이를 낳을 건데? 방현수? 아니면 네가 요즘 꼬시고 있는 서원이?”냉소를 흘린 박진성은 이내 주먹을 꽉 움켜
“이제 제 말만 들으시고 이 약만 드시면 됩니다.”민여진의 텅 빈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차가운 입술로 두 글자 내뱉었다.“꺼져.”“민여진 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이는 언제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민여진은 손을 뻗어 약사발을 엎었다. 뜨거운 약물이 손에 쏟아졌지만 그녀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그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의사를 노려볼 뿐이었다.“꺼지라고 했어! 안 들려? 안 마신다고!”의사는 멈칫했지만 이내 민여진의 손을 살폈다.“민여진 씨, 손 데었잖아요!”“꺼져!”거칠게 저항하는 민여진 때문에 의사는 어쩔 줄 몰라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박진성이 중요한 회의를 중단하고 들어와 보니 민여진은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고 카펫에는 약사발이 엎어져 엉망이었다. 배를 감싼 왼손은 빨갛게 부어올라 물집이 생겨 있었다.‘나에게 아이를 낳아 주지 않기 위해 그녀는 이런 짓까지 서슴지 않다니.’박진성은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예전의 민여진이었다면 이런 일은 얼마나 큰 영광이었을까?“민여진, 또 무슨 짓이야? 내가 너한테 너무 관대했나?”그는 이를 갈며 민여진에게 다가갔다. 민여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박진성은 의사에게 물었다.“남은 약 있어?”“네, 있습니다!”강태화는 황급히 대답했다. 남은 약은 있었지만 너무 쓴 데다 약재 찌꺼기가 섞여 있어서 민여진이 힘들어할까 봐 주지 않았었다.“가져와!”의사가 약을 가져오자, 박진성은 민여진의 입가에 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마셔!”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네 어머니를 평생 보고 싶지 않다면 마시지 않아도 돼.”마침내 민여진이 반응을 보였다. 박진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공허했지만 강렬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다“뭘 멍하니 있어? 내가 먹여 줘야겠어?”박진성은 비웃으며 민여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민여진은 떨리는 손으로 약을 받아 한 모금
마침 그날 오후, 의사는 약재를 사러 나갔고 저택에는 민여진 혼자뿐이었다.방 안 공기가 답답했던 민여진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도착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처음에는 의사가 돌아온 줄 알았지만 곧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문채연이 거만한 모습으로 문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민여진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문채연의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민여진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문채연이 너무 늦게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문채연을 무시하고 소파에 앉았다. 문채연은 코를 찌르는 냄새에 비웃으며 말했다.“웬 한약 냄새가 이렇게 진동하지? 민여진, 너 죽기라도 하니?”집에 아무도 없자 문채연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여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널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아. 이 약은 내가 임신을 못 해서 박진성이 의사를 통해 지어준 거야. 꽤 보약이라고 하더라. 생각 있으면 너도 마셔 봐.”“뭐라고?!”문채연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고 정교한 얼굴이 일그러졌다.‘단지 민여진이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박진성이 의사를 불러 특별히 약을 달여 주기까지 했다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요즘 그녀는 박진성을 만나기조차 어려웠다.“거짓말! 네가 아이를 못 갖는 게 박진성하고 무슨 상관이야?”잠시 후, 문채연은 평정심을 되찾고 비웃었다.“민여진, 네가 어떤 위치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박진성은 내가 네 그 강아지의 배를 갈라 사지를 잘랐다는 걸 알면서도 날 용서했어. 그건 내가 그의 아내로서 첫 번째 후보라는 뜻이지. 그런 그가 뭐하러 중요하지도 않은 여자의 임신 여부에 신경이나 쓰겠어?”민여진이 답할 틈도 주지 않고 문채연은 잔뜩 비틀린 얼굴로 덧붙였다.“설사 그가 네 임신에 정말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건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임신이 힘들고 박씨 가문에는 후계자가 필요하기 때문일 뿐이야!”민여진은 순간 멍해졌다. 문채연의 말이 귓가에 똑똑히 박혔고 그 순간 박진성이 왜 그토록 그
그러나...곧 문채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통쾌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그 일을 알고 나면 민여진이 여전히 그렇게 날카로운 말을 할 수 있을까?’그녀는 기대했다.민여진은 문채연과 아래층에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잠깐만!”문채연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서둘러. 내가 오늘 온 건 다른 할 말이 있어서야.”“필요 없어.”민여진은 계속 위층으로 향했다.문채연은 길게 말을 끌었다.“정말 필요 없어? 이 일은 너의 어머니와 관련된 일인데.”민여진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어머니?’문채연이 하는 말에 좋은 소식은 없을 거라 짐작했지만 민여진은 어머니에 대한 소식이 너무나 궁금해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박진성은 항상 모든 것을 철저히 숨겼고 그날 주치의와 통화했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민여진은 뒤돌아보며 물었다.“뭔데?”문채연은 붉은 입술을 의기양양하게 올리며 말했다.“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직접 들어봐.”그녀는 준비해 온 녹음기를 켰다.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 서동구 은하타운 209호 별장에서 중년 여성 한 명이 3층에서 추락해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민여진의 눈빛은 멍해졌다. ‘서동구 은하타운 209호... 어째서 이 주소가 이렇게 익숙하게 들리는 걸까...’녹음은 계속 이어졌다.“알려진 바에 의하면, 추락 사고를 당한 여성은 정신질환 환자로 집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실수로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으로....”‘정신질환 환자?’갑작스럽게 민여진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그녀는 문채연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다.“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문채연, 경고하는데 우리 어머니 목숨 가지고 장난치지 마! 은하타운은 예전에 어머니가 살던 곳이야. 어머니는 이미 거기서 나오셨다고! 그런데 어떻게 추락사를 해!”문채연은 멍하고 무너진 민
자칫 숨이 넘어갈 뻔한 문채연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민여진이 다시 달려들었지만 남자가 막아섰다. 문채연은 말했다.“민여진, 박진성이 왜 너와 민영미를 만나게 해 주지 않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당연히 죽었으니까 그런 거지! 시신도 이미 화장했고! 그러니 네가 아무리 말을 잘 들어도 죽은 사람을 만날 순 없어.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직접 박진성에게 가서 물어봐. 뭐라고 대답하는지.”말을 마친 문채연은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남자와 함께 돌아섰다.민여진은 혼자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온몸으로 냉기가 스며들었지만 그녀는 멍하고 두려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박진성은 내가 죄를 뒤집어쓰면 어머니를 꼭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실 수 있단 말이야? 어떻게?”민여진은 몇 번이고 자신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머릿속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민영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박진성은 몹시 싫어하며 수많은 핑계를 댔다. 심지어 목소리 한 번 듣게 해 달라는 부탁도 거절했었다...민여진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돌아온 강태화는 차가운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민여진을 보고 들고 있던 약재를 내려놓고 달려왔다.“민여진 씨, 왜 바닥에 앉아 있어요? 몸도 안 좋은데 이렇게 찬 바닥에 앉으면 안 됩니다!”그는 다급하게 민여진을 부축하려 했다.민여진은 강태화의 손이 닿는 순간 그의 손을 붙잡고 핏발 선 눈으로 물었다.“박진성은 어디 있어요?”“박 대표님이요?”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대답했다.“동진으로 출장 가셨습니다. 3일 후에 돌아오실 겁니다.”‘3일 후?’민여진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당장 박진성에게 전화해요. 물어볼 게 있으니까!”강태화는 민여진의 상태가 좋지 않고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판단하여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연속 두 번을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그가 말했다.“민여진 씨, 박 대표님
“내 질문에만 답해 줘. 어머니께서 정말 살아 계시기는 한 거야?”민여진은 감정이 무너져 내렸고 쓴 눈물은 입속으로 스며들었다.“박진성! 당신 약속했잖아! 내가 문채연 대신 죄를 뒤집어쓰면 우리 어머니를 잘 돌봐 주겠다고!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야!”‘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야!’박진성의 마음도 흔들렸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목소리는 차가워졌다.“민영미는 살아 있어. 병원에 있다고! 민여진, 너 이상한 소문에 휘둘리지 마. 스스로 생각해야지. 민영미가 죽었다면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뭐 하러 너를 속이겠어?”민여진은 흐느껴 울며 고개를 저었다. 거의 미쳐가는 듯한 모습이었다.“나도 모르겠어...”박진성이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녹음과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은 민여진으로 하여금 문채연의 말을 믿게 만들었다.“살아 있다면 지금 당장 만나게 해 줘.”“안 돼!”박진성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설명했다.“민여진, 주치의가 분명히 말했잖아. 민영미는 지금 너를 만날 수 없어. 네 어머니가 너 때문에 흥분해서 병세가 악화되는 걸 원해?”물론 민여진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핑계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으면 직접 만나야 하고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보고 싶었다.“난 이미 얼굴이 망가졌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우리 둘만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날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거야.”민여진은 쇄골 부분에 힘을 주며 눈가의 붉은 기를 애써 감췄다.“그냥 어머니를 별장으로 데려와서 잠시 이야기만 나누게 해 줘. 살아 계신 것만 확인하면 돼... 박진성,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마지막에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민여진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박진성은 마음이 복잡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진실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하지
여기서 떨어지면 2층에서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갈비뼈 몇 대 부러지고 병원에서 나와 다시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이 층에서 떨어진다면 죽을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바람을 느끼는 민여진의 마음속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난간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허공에 드리웠다.이 순간,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했다. 빈민가 연못가에서 물장난을 치던 그때처럼,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편안함이 가득했다.강태화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2층에서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민여진 씨! 제발 충동적인 행동은 하지 마세요! 빨리 내려오세요!”“가까이 오지 마세요.”민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텅 빈 눈빛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뛰어내릴 거예요!”강태화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그야말로 살아날 길이 없었다.그는 민여진을 최대한 달랬다.“안 갈게요, 안 갈게요! 하지만 민여진 씨, 여기는 정말 위험합니다. 바람을 좋아한다면 제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 드릴게요. 여기는 너무 위험해요. 떨어지면 어떡합니까?”“떨어지면 어떡하냐고?”민여진은 잠시 멍한 듯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죽겠죠. 하지만 강 선생님, 내가 무서울 것 같아요? 이렇게 사는 게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그녀의 말투는 차분했고 조급함이 없었다. 마치 다음 순간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강태화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얼굴 근육이 씰룩거렸다.“민여진 씨, 그런 생각 마세요. 세상에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닙니까!”그 말은 민여진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소중한 사람? 소중한 사람 하나는 박진성 때문에 미래를 잃었고 다른 하나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데.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이 누가 남았단 말인가?’“나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박진성에게 전화해서 당장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하세요.”민여진은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