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이 연회 부인의 손을 잡고 빛나는 단상에 오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그녀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중요한 내용은 어머니께서 다 말씀하셨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딱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이 다시 연회를 즐기시길 바랍니다.”유월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이번에 돌아가서 공식적으로 고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28년의 이야기는 이제 끝을 맺을 때가 되었습니다.”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단호한 표정과 결의에 찬 눈빛은 어떤 말보다 강렬했다. 마치 반드시 정의를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를 말하는 듯했다.조용하던 연회장은 구석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로 깨어났다. 가장 먼저 박수를 친 이는 어두운 불빛 아래 서 있던 현시우였다. 아무도 그가 시작한 것을 알지 못했지만, 곧 넓은 연회장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내 전 객석을 채웠다.이 박수는 다양한 의미로 들려왔다.누군가에겐 친척과 친구의 지지였을 수도 있고, 극적인 이야기에 대한 감탄이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단순히 구경꾼으로서의 흥미와 응원을 보낸 것일 수도 있다.선의든, 비꼬는 마음이든 상관없었다.어쨌든 오늘 밤, 이 엄청난 선언으로 인해 28년 전의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었다....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이혁재가 입을 열었다.“난 처음부터 월영 씨가 직접 무대에 올라 말할 줄 알았어.”그러자 서지욱이 말했다.“고씨 가문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연회 부인이지, 유월영 씨가 아니잖아. 연회 부인이 나서야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설명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월영 씨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의심했을 거야. ‘당신은 당시 갓난아기였는데 어떻게 이 모든 일을 알지? 이런 주장을 어디서 들었지?’ 혹은 ‘네 개 가문이 사법부를 압박했다고 주장하는데, 지금 당신이야말
결혼식 다음 날, 유월영은 팀과 함께 전세기를 타고 13시간의 긴 비행을 거쳐 신주시에 도착했다.긴 여정을 마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쉴 틈도 없이 공항에서 바로 경찰서로 향해 사건을 정식으로 신고했다.이 모든 과정은 이미 대기 중이던 언론에 의해 촬영되었고, 그 영상은 빠르게 온라인에 퍼졌다.처음에 네티즌들은 단순히 해외에서 열린 화려한 귀족 결혼식을 구경하며 레온 가문의 신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그들은 금빛 화려한 장식을 보며 “부자면 부자답게 조용히 결혼식을 치를 것이지.”, ‘드디어 유럽 재벌 가문의 결혼식을 보는군.’ 같은 농담을 하며 대체로 구경하는 분위기였다.그러나 하룻밤 새, 수십 년 동안 감춰졌던 억울한 사건이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결혼식 연회에서 한 연회 부인의 발언은 편집되지 않은 채 외국 인터넷에 그대로 올라갔고, 그 내용은 다시 국내 주요 플랫폼으로 퍼졌다.곧바로‘고해양’, ‘4대 재벌 가문’, ‘음모’, ‘장부’ , ‘재심’ 등의 키워드가 연이어 검색어에 오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조용했던 시기에 터진 이 충격적인 사건은 대중의 관심을 단숨에 끌며 뜨거운 토론으로 이어졌다.유월영의 경찰 서 방문은 이미 뜨거운 사건에 또 다른 불씨를 던졌고, 논란은 더욱 격렬해졌다.하지만 경찰서에 신고한다고 해서 바로 수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경찰은 최대 7일이 걸릴 수 있다고 답했지만, 4일이 지나도 유월영은 별다른 연락을 받지 못했다.이는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이승연이 미리 충고했듯이, 이 사건은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라 여러 방면에서 신중함이 요구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5일째가 되자, 유월영은 한 권위 있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대중의 관심사에 대해 차분히 답했다.특히 한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이 있었다. “고해양 씨 사건이 잘못된 판결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잘못된 판결이라면 단순히 네 가문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사건을 다룬 사법 체계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의미였다.유월영은
유월영은 상대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고발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대중들이 그녀를 ‘선택적 복수’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 것이었다.만약 그녀가 윤영훈, 신현우, 오성민을 고소하면서 연재준에 대해서만 감춘다면, 사건이 불분명하게 보일 수 있고, 진심으로 공정한 판결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편 가르기’로 비춰질 위험이 있었다.연재준의 죄목을 따져보면 유일한 범죄는 그녀에게 화살을 쏜 후 바다에 던진 고의적 상해죄였다. 그 외에는 별다른 죄목이 없었다.인터뷰 방송 이후 큰 논란이 일었다.유월영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일부는 그녀가 자작극으로 관심을 끌며 여론을 선동하려 한다고 주장했다.심지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들을 사랑하다니,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니냐”라는 비아냥도 나왔다.그러나 유월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부정적인 목소리 때문에 3년 넘게 준비한 복수 계획을 멈출 그녀가 아니었다.신고한 지 7일이 지나도 경찰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사건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특별 수사가 필요하며 수사 시작까지 최대 30일이 걸릴 수 있다고 답했다.이 사건에서 유월영은 어떤 인맥도 이용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규정과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극도로 외부에 노출된 상황에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확대 해석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사건 심사를 재촉하려는 행동마저 왜곡될 수 있었다.유월영은 자신이 원하는 공정한 판결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기로 다짐했다.그녀는 조급해하지 않고 신주시와 마르세유를 오가며 통보를 기다렸다.그 사이, 유월영은 다니엘 부인에게서 받은 10%의 주식을 기존에 갖고 있던 10%의 지분과 합쳐, 레온 그룹 내에서 현시우 다음으로 큰 주주가 되었다.현시우의 친여동생인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편에 섰고, 레온 가문에 속한 후 현시우가 그룹을 지배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하지만 주주총회에서 주식 상속을 논의하는 자리에 현시우 대신 한세인이 참석했으며, 정작 현시우는 모습을 드러내
사건이 공식적으로 접수된 후, 경찰은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고 범죄 혐의자들의 수법이 은밀했던 탓에 수사는 쉽지 않았다.다행히 유월영과 현시우가 지난 3년간 수집한 방대한 증거를 정리해 제출하면서 경찰의 수사 난이도를 크게 낮췄다.그로부터 1년 뒤인 다음 해 5월, 경찰은 수사를 마무리하고 관련 자료를 법원에 제출했다.법원은 사건을 접수한 지 보름 만에 공개 재판을 열었고, 모든 관련자를 법정에 소환했다.이미 사망한 연민철과 신민우는 출석할 수 없었고, 해외에 숨어 있던 오정훈과 윤이창은 체포되어 송환되었다.그러나 연재준은 출석하지 않았다.경찰 조사 단계에서 오성민은 연재준이 과거 유월영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경찰은 이를 확인한 후 연재준을 고의 상해죄로 체포하기로 결정했으나, 당시 연재준은 마르세유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결국 보석을 신청한 그는 석방 상태로 재판을 받았고, 건강상의 이유로 변호사를 통해 대신 출석했다.한편, 연회 부인은 마르세유에서 신주시로 날아와 고해양 사건의 중요한 증인으로 출석했고, 유월영과 이영화는 이른바 ‘2세 사건’의 증인으로 나섰다.‘2세 사건’은 네티즌들이 붙인 이름으로, 네 재벌 가문의 2세들이 저지른 범죄를 가리킨다.공개 재판이었기에 법원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를 진행했다.비록 사건 발생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다.접속자 수는 천만 명을 돌파하며, 최근 몇 년간 가장 주목받는 사건이 되었다.두 사건 모두 하루 8시간 이상의 재판이 이어졌고, 결국 판결이 내려졌다.오정훈과 윤이창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29년 동안 도망친 두 사람은 결국 60세에 가까운 나이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2세 사건’에서, 법원은 오성민에게 고의 상해죄, 고의 살인죄, 살인 미수죄, 뇌물죄, 불법 감금죄, 범죄 교사죄, 공공 안전 위협 죄, 국제 범죄 등 수많은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오성민은 이 판결을 듣고 전혀 놀라지 않
결국 신현우는 벌금과 서면 경고를 받았고 재판이 끝난 후 바로 석방되었다.하지만 그는 더 이상 회사의 대표가 아니었다.지난해, 그는 심각한 손해를 입은 기업을 매각했고 상당한 매각 대금을 얻었다.그러나 그중 삼 분의 일은 폭발 사고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되었다.비록 법적으로는 이미 보상이 이루어졌지만 신현우는 다시 한번 자발적으로 피해자들에게 보상했다.그도 오성민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였으며, 본질적으로 고해양 사건과 ‘2세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신현우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하여 법적 제재를 피했지만 신현우는 아버지가 고씨 가문을 억압해 얻은 이익을 누렸다는 점에서 그 역시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남은 돈의 삼 분의 일을 그는 유월영에게 보상으로 전달했고, 유월영은 이를 자신과 윤영훈이 공동 창립한 ‘비상’ 자선 재단에 전액 기부했다.처음에는 윤영훈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설립된 재단이었지만, 지금은 본래의 목적을 잃지 않고 계속 운영되고 있었다.재단은 지난해 말 시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경찰이 신현우의 수갑을 풀어주자, 그는 배심석을 바라보았다.윤영훈보다 운이 좋았던 그는 그곳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강수영을 발견했다.연재준은 신현우와 마찬가지로 공모 범죄에 해당하지 않았다.다만, 고의 상해죄는 증거가 명확했지만 피해자인 유월영의 용서를 받은 점, 경찰이 오성민 사건을 해결하는 데 기여한 공로, 당시 상황의 불가피성을 참작 받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모든 피고는 법정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했고 항소하지 않았다.이로써 두 사건은 완전히 종결되었다.29년에 걸친 이 사건은 재심이 시작된 시점부터 계산하더라도 정확히 1년 1개월이 걸려 마침내 결말을 맺었다.판결이 내려지자 법정에 있던 유월영의 지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박수를 쳤다.이는 공정한 법 집행에 대한 찬사이자, 긴 세월 동안의 한을 푼 유월영을 위한 박수였다.유월영은 그제야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감을 느꼈다.조서희가
유월영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연재준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연재준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가 유월영이 떨어뜨린 외투를 집어 들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어린애처럼 옷을 던지며 놀고 있네?”익숙한 향기가 유월영의 코끝을 스쳤다. 덥게 느껴지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그녀는 편안함을 느꼈다.정신을 차린 유월영이 물었다.“언제 돌아왔어요?”“방금.”사실 연재준은 며칠 전에 비행기를 탔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재판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비행기가 태풍을 만나 다른 나라에 비상 착륙해야 했다. 결국, 다음 날에서야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그의 손에는 유월영이 좋아하는 수국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축하해. 네가 원하던 대로 이루어져서 다행이야.”유월영은 두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 가슴에 안았다.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는 듯했다. 사건이 마무리된 건 좋은 일이었다.그동안 한 번도 진정으로 쉬거나 행복했던 적이 없었지만, 이제 마음이 비어 새로운 것들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꽃을 들여다보며 향기를 맡았다. 사실 수국은 향이 거의 없었지만, 그녀는 수국의 화려함과 다채로운 색상을 좋아했다.유월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이렇게 큰 일에 겨우 꽃 한 다발이에요?”연재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유월영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연재준은 입술이 아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이거.”그는 접힌 A4 용지 한 장을 건넸다.유월영은 아무 생각 없이 종이를 받아 펼쳤다. 그러나 한 줄의 문장이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보고서는 연재준의 이름이 적힌 의학 보고서였다.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유월영은 급히 연재준을 쳐다보았다.연재준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계속 읽으라는 시늉을 했다.유월영은 서둘러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보고서에는 수술명, 진단, 수술 지시 사항, 과정, 병리 보고서, 그리고 수술 후 회복 상태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수술 후 환자의 회복 상태는 양호하
연재준은 그녀와 꽃다발을 함께 안았다.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와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섞이며 수국의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당신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 오로지 판결에만 집중하길 바래서 모두에게 부탁해서 수술 사실을 숨긴 거야.”유월영은 그의 옷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그러다 수술이 실패하면 어쩌려고...나한테 말도 안 하고! 재준 씨는 정말...”연재준은 진지하게 말했다.“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야. 당신에게 꼭 살겠다고 약속했잖아.”유월영은 그의 팔을 꽉 물었다. 그래야만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 같았다.연재준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오히려 홀가분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수술 일정을 확정한 후, 그는 반 달 동안 60통의 편지를 썼다.각 편지에는 모두 다른 내용이 가득 적혀 있었다.만약 수술이 실패해 다시는 유월영을 볼 수 없게 된다면, 그 편지들을 매년 하나씩 열어보게 해서 그녀가 80살이 넘을 때까지 함께하도록 남기려 했다.그는 이렇게 이기적이었다. 그녀가 평생 자신을 기억하기를 바랐다.물론 수술이 성공한 후, 그 편지들은 밀폐된 상자에 담겨 다니엘 저택의 나무 밑에 묻혀버렸다.마치 그 편지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한참 후, 유월영이 말했다.“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죠. 저도 선물이 있어요.”연재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선물?”유월영은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여유롭게 웃고 있던 연재준의 얼굴이 굳어졌다.살짝 부른 그녀의 배는 부드럽고 따뜻했다.잠시 당황한 연재준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월영은 천천히 말했다.“벌써 4개월 됐어요.”그녀는 설 연휴 무렵 임신한 것이었다.마르세유에 가지 않았던 이유도 임신 초기 무리한 여행이 태아에게 좋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유월영은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걱정되어 알리지 않았다.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녀와 가까이 일하는 조서희, 그리고 가장 먼저 눈치챈 이승연뿐
[번외편 시작]“벌써 4개월이나 됐다고?”다음 날 저녁 축하연에서 유월영이 임신 사실을 공개하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 소식은 연재준의 수술 성공보다도 더 큰 충격을 안겼다.사실, 연재준의 수술 사실은 유월영과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 비밀로 부쳐졌었다.조서희와 이승연 부부도 몰랐고, 특히 이혁재에게는 철저히 숨겼다.이혁재가 알게 되면 이승연이 당연히 알게 될 것이고, 결국 유월영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유월영의 임신 사실은 더욱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 두 명뿐이었다.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역시 이혁재였다.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혁재였다.“여보, 나한테 비밀이 있었던 거야?”이승연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대꾸하지 않았다.이혁재는 식사 내내 아내가 자신에게 비밀을 숨겼다는 사실에 빠져 있었다.그러나 풀이 죽은 그를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두 번째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연회 부인과 이영화였다.연재준이 수술 사실을 숨긴 것만으로도 큰 일이었는데, 유월영까지 몇 달 동안 임신 사실을 비밀로 하며 신주시에서 수사 사건을 홀로 처리해 온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두 어머니는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떠올리며 마음 아파했다.연회 부인은 즉시 웨이터를 불렀다.“여기 임산부에게 좋은 요리를 몇 가지 더 추가해 주세요!”며칠 전 친구 딸의 임신 소식을 들었던 그녀는 그때의 식단을 떠올리며 여러 음식을 주문했다.이영화는 테이블 위에서 유월영이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조심스럽게 치우기 시작했다.유월영은 연재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어머니들의 배려에 감동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임신 사실을 숨긴 게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사실 이 아이는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었다.그녀와 연재준은 결혼 후 피임을 하지 않았다.결혼 후 1년 동안, 최근 4개월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주 마르세유로 갔던 그녀는 해운 그룹보다 레온 그룹의 명품 계열사에 더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