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30분쯤 유월영은 연재준의 집에서 나왔다.원래 예정 시간보다 거의 두 시간 늦어진 시간이었다.그녀는 미리 한세인과 운전기사에게 마중을 나오라고 연락해 두었고 대문을 나설 때도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한세인이 차 문을 열어주자 유월영이 차에 올라탔고 목소리 역시 평온했다.“출발해요.”그녀의 표정이나 태도 어디에서도 식사를 마친 뒤 연재준과 또 한 번 충동적으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하지만 아침의 일로 허리는 더 아팠고 다리는 더욱 저렸다.특히 허벅지 안쪽 피부에 스치는 듯한 따끔거림이 있었다.그것은 연재준의 짧은 머리카락이 쓸리면서 생긴 것이었다.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욕구를 억눌러 왔던 탓일 수도 있고 연재준의 ‘서비스’ 태도가 너무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그는 자신의 불편함을 무시한 채 유월영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두었고 그녀를 두 번이나 절정에 보낸 후에야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결론적으로 어젯밤 술기운에 흐릿했던 기억이든, 대낮의 선명한 경험이든 그녀에게는 모두 만족스러웠다.유일하게 심기를 건드린 건 연재준이 유월영이 떠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아쉬워하며 그녀의 어깨를 물었다는 것이다.남겨진 깊은 치아 자국은 옷감에 스칠 때마다 가렵게 했고 유월영은 무표정으로 어깨를 긁었다.그리고 한세인에게 물었다.“오성민은 잡았어요?”“...또 도망쳤습니다.”유월영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또 도망쳤다고요? 이번엔 어떻게 도망친 거죠?”“좀 이상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가 우리 사람들로부터 오성민을 빼앗아 갔습니다.”유월영이 미간을 찌푸렸다.“그 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겠죠?”“제 생각엔 아닌 것 같습니다.”한세인은 앞좌석에서 고개를 돌렸다가 유월영의 목에 남은 키스 자국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그리고 침착하게 말했다.“그 높은 분들이야말로 그를 죽이고 싶어 하죠. 오성민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 무리가 나타나자마자 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마치 구세주
유월영은 한세인이 현시우에게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항상 보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날 밤 노현재가 그녀를 찾아왔던 일이나, 그녀가 산수원에서 하루 넘게 머물렀던 일도 현시우는 멀리 마르세유에 있으면서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그렇다면 노현재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녀와 연재준이 무엇을 했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현시우가 이틀 동안 아무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녀와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지금 드디어 연락을 해왔다.유월영은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크로노스’라는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지만 그녀는 그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핸드폰이 울린 지 10초쯤 지나자 유월영은 손을 뻗어 전화를 끊었다.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녀는 옆의 버튼을 눌러 등받이를 뒤로 기울게 했다.몸이 편안해졌지만 정신은 여전히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몇 분이 지나고 나서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현시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하는 중이야. 끝나면 연락할 게.]현시우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유월영은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풀었지만 억눌린 답답한 감정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 한 병을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하지만 그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유월영은 또다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전에 연재준이 남긴 치아 자국은 희미해졌지만 그녀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유월영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들고 연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재준은 이틀 동안 그녀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해성 그룹이 그간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면서 주가가 폭락했고 해운 그룹 역시 덩달아 타격을 입었다.회의실에서 이사진들이 몇 시간 동안 격렬히 언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해운 그룹이라는 이 기업이 몰락하더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유월영에게서
유월영은 머리를 염색을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완전한 검은색도 아니었고 조명 아래에서 차가운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이전에는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녀의 외할머니가 유명한 다니엘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건 곧 유월영도 1/4 혼혈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유전적인 이유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연재준은 느긋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머리카락은 상태가 아주 좋았고 부드럽고 풍성해서 만질 때의 촉감이 매우 좋았다.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채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 끝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러다 갑자기 물었다.“좋아?”‘뭐가 좋다는 거지?’“...”유월영은 순간적으로 그의 질문에 당황해 얼굴이 달아올라 그를 밀어냈다.“연 대표님. 그 나이에 이런 질문을 하다니 유치하지 않아요?”연재준은 그녀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곧 그녀가 오해했음을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내 말은 그게 좋았냐가 아니라, 아까 들어왔을 때 당신이 찌푸린 얼굴로 기분 나빠 보여서 지금은 좀 나아졌는지 물어보는 거야. 내 ‘서비스’가 당신이 생각하는 도구의 기준에 부합했나 해서.”유월영은 잠시 할 말을 잃자 연재준이 부드럽게 말했다.“자신감 없는 남자들만 그런 걸 묻지. 나는 답변이 필요 없어.”그는 이미 그녀의 반응에서 가장 솔직한 대답을 얻었다.게다가 두 사람을 3년을 함께했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가 어떤 포인트에서 반응하는지 모든 걸 알고 있었다.유월영은 자신이 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둘 사이의 분위기가 애매모호해지기 전에 그를 조롱했다.“연 대표님, 이제 고객의 피드백까지 받으려는 건가요? 혹시 해운 그룹이 파산하면 여기 와서 취직하려는 속셈은 아니죠?”그녀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회사의 상황을 저주했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로 침착했다.“만약 고 대표님께서 받아준다면.”유월영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내연남이 되겠다고요? 그것도 연
매 순간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의 흐름 속에서 싸우고 있다. 마치 야수들이 모여 있는 정글과 같이 조금이라도 병든 모습을 드러내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 발견되면 주변의 굶주린 포식자들이 즉시 기회를 엿보며 움직일 것이다.해운 그룹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해운 그룹이라는 이 큰 비곗덩이를 호시탐탐 노리는 회사들이라면, 지금쯤 아마 모두 이 재무 보고서를 한 부씩 가지고 있을 게 불 보듯 뻔했다.하지만 연재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다른 회사들이 가지고 있는 보고서는 분명히 유월영의 손에 들고 있는 이 보고서만큼 진실하고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할 것이다.연재준의 손에 들린 이 보고서는 바로 해운 그룹의 대표인 자신이 직접 수정한 것이었고 유월영에게 바로 무적의 무기를 직접 쥐여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그는 펜을 들고 천천히 읽으며 틀린 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려 표시하고 정확하지 않은 숫자를 수정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외부인들이 모르는 비밀 정보까지 덧붙였다.마지막 페이지까지 수정하고 나니, 벌써 새벽 2시 30분이었다.연재준은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티슈를 뽑아 입을 틀어막고 방문을 살폈다.그래도 기침이 멈추지 않자 그는 몇 장의 문서를 들고 급히 사무실을 나갔다. 문을 닫고 유월영이 있는 방까지 들리지 않을 거라 확인한 뒤 접견실 소파에 앉아 몸을 굽힌 채 한참 동안 기침을 했다.기침이 가라앉을 때쯤,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표정은 매우 차분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탄산수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또다시 문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유월영이 깨어났을 때는 오전 9시였다.오랜만의 운동 덕분에 평소보다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남자의 흔적은 없었고 그 기운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하지만 유월영은 신경 쓰지 않고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어젯밤에 어질러 놓은 욕실도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연 대표가 정리한 건가?’‘곱게 자란 귀공자가 이제 이런 것까
유월영은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불렀어요.”한세인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아가씨, 이번만 두 번째인데 다시 연 대표님과 재결합하려는 건가요?”“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필요하면 그 사람을 부를 거예요. 재결합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내 불안을 잠재우는 데 꽤 유효해요.”유월영은 꾸밈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한세인은 한순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냐고, 왜 하필 연재준이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두 사람은 철천지원수 관계인데 어떻게 그런 밤을 보내고 난 뒤에도 다시 그에게 복수할 마음을 굳힐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유월영은 한세인의 망설이는 행동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어냈지만 깊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죽을 떠먹으며 물었다.“한 비서님, 예전에 저와 시우 씨가 사귀는 걸 반대했었잖아요. 그때 이미 저와 시우 씨가 어떤 관계였는지 알고 있었던 거예요?”한세인은 눈길을 피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유월영은 말없이 웃었다.한세인은 사실 유월영에게 현시우와 결혼식을 어떻게 할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현시우와 유월영은 그녀의 상사였고, 자신은 그저 부하에 불과했기 때문에 선뜻 간섭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어차피 이제 4일밖에 남지 않았고 결혼하든 안 하든, 어떻게 하든 결국 답은 나올 것이다....오후 4시, 마르세유는 아침 9시였다.유월영은 어제마저 못한 전화를 다시 걸었다.현시우가 빠르게 전화를 받자 유월영은 평소와 변함없는 말투로 말했다.“크로노스 씨, 어제는 무슨 일로 전화했어?”“결혼식에 빨간 장미를 써도 돼?”그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하고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유월영은 단숨에 그가 날밤을 새운 걸 알아챘다.“그럼 괜찮지. 그걸 물어보려고 어제 전화한 거야?”현시우가 물었다.“결혼식까지 4일 남았어. 언제 돌아올 거야?”유월영이 웃으
유월영은 체념하듯 말했다.“시우 씨가 그만둘 생각이 없다면, 그럼 계속 진행해.”전화 건너편의 현시우가 말이 없었지만 유월영은 그의 숨소리가 떨려오는 걸 알 수 있었다.유월영은 일어나 커피머신 앞에 다가가 핸드폰 스피커를 켠 채 한쪽에 두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만들기 시작했다.그녀는 원만한 바리스타들보다 훨씬 더 잘 커피를 만들었다.비서로 일하면서 자주 상사나 손님을 위해 커피를 만드는 일이 흔했으며 그녀의 성격상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으면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었다.유월영은 원두 가루를 포터 필터에 담아 조금씩 눌러가며 느긋하게 말했다.“생각해 보니, 내 인생도 참...기구해.”“어머니라는 사람은 오빠만 데려가셨고 나는 혼자 집에 남겨졌다가 우연히 양부모님한테 입양되었어. 그리고 시우 씨와 사랑에 빠졌을 때 시우 씨는 내게 이별을 고했고 양부모는 나를 빚쟁이들한테 보냈지.”“그러다 비 오는 날 연 대표가 나를 구해줬고 그 사람의 비서가 됐지만 결국 연 대표도 나를 속였어. 그이한테 목숨까지 잃을 뻔했고.”“시우 씨가 데리러 왔을 때 난 운명 같은 재회라 생각했어. 시우 씨와 연회 부인에게 속았다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딸깍 소리와 함께 포터 필터가 그라인더에 고정되었고 유월영은 유리장 속에서 예쁜 커피잔을 꺼냈다.“나는 이젠 익숙해졌어. 이번 일도 그러려니 하고 있으니 결혼식을 계속하고 싶고 내가 시우 씨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면 여전히 당신의 손에 이끌려서 결혼식에서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걸어 들어갈 거야.”물의 온도는 맞춤하게 94도였고 유월영은 추출 버튼을 눌렀다. 진한 갈색 액체가 잔에 담기면서 커피 향이 풍기기 시작했다.그녀는 커피를 들고 한 번 더 향을 맡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설탕이나 우유는 넣지 않은 순수한 맛.고소하고 쌉쌀했다.현시우는 커피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의 책상에도 커피 한 잔이 있었지만 이미 다 식어 있었다.그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쓴맛이 퍼졌다.현시우가 한
유월영이 웃음을 거두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누군가 오성민을 빼내 갔어. 국내에 있으면 살아남지 못할 거야. 그래서 해외로 도망갈 거라고 생각해. 언니가 그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아니까, 혹시 해외로 도망간다면 어디로 갈 것 같아?”이승연은 유월영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차분해졌다.그녀의 머릿속에 오성민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오성민은 그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었다.“우리 다음 생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몸서리쳐졌다.“그렇다면 아마 한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이 없는 나라로 도망갈 것 같긴 한데, 우선 그 사람처럼 신분과 권력이 있는 사람을 보호해 주는 나라를 고를 거야.”유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예를 들면?”이승연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많지. 미국, 영국...”“그럼 범위를 좁혀볼 수 있을까?”이승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직감적으로 미국일 것 같아. 나와 오성민이 미국에서 공부했었으니까. 나에 대한 집착도 아직 강하고 아마 그곳으로 갈 거야.”그녀는 입가에 살짝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심리학적으로도 불안할 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익숙한 곳으로 도망간다고 하잖아.”유월영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알겠어.”헤어지면서 유월영은 우선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중에 이혁재가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봤지만 이승연은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다.이혁재가 상처받은 듯 투덜거리자 이승연은 참지 않고 그의 입술을 잡고 말했다.“계속 시끄럽게 굴면 오늘 밤은 손님 방에서 자.”이혁재는 그제야 조용해졌다.저녁이 되어 어두운 밤이 깔렸다.신주시 항구.시간은 아직 여덟 시가 조금 넘었지만 낮에 사람들로 붐비던 항구에는 파도 소리만 들려왔다.그때, 검은 벤 한 대가 항구로 와서 멈췄다.차 문이 쾅 열리면서 네 명의 건장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를 붙잡아 끌어내렸다.그 남자는 양손과 발
하정은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한 번 쳐다봤다.“오 변호사가 나보고 맹세 하라고 하더라고. 그가 사람을 풀어주고 나서도 내가 그를 해외로 보내지 않으면 나는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연재준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 비열하지...하지만 나는 맹세했으니 어쩌겠어. 그를 풀어줄 수밖에.”하정은은 연재준이 신이나 불교를 믿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 그가 왜 그런 허무맹랑한 맹세까지 신경 쓰는지 의문이 들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차 속도를 늦추었다.“연 대표님.”하지만 연재준은 더 이상 말을 이으려 하지 않았다.“진주만으로 가지.”하정은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진주만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조금 넘었고 마침 이혁재와 이승연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 중이었다.네 사람은 함께 집에 들어가며 이혁재가 투덜거리며 말했다.“너랑 유월영 씨는 천생연분인 것 같아.”연재준이 슬리퍼를 갈아 신으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그 말을 들으니 기분 좋네. 자주 말해 줘.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야?”이혁재가 주방으로 들어가 우유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오늘 오후에 유월영 씨를 만나고 들어오는 길이야. 그리고 지금은 네가 이렇게 왔잖아. 이렇게 타이밍이 딱 맞는 게 부부가 아니고 뭐야?”연재준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월영이를 만나고 왔다고? 무슨 일인데?”이혁재는 낮에 일을 떠올리고 기분이 잡친 듯 입을 열었다.“월영 씨가 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나 봐. 우리 부부 사이를 갈라놓고 있어.”연재준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이혁재는 우유를 이승연 앞에 놓았다. 그 위에는 말린 장미 한 송이가 장식되어 있었다.그리고 연재준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넸다.이승연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네가 꼭 따라오겠다고 고집부려서 같이 간 거잖아. 월영이가 사적인 일을 얘기하는데 꼭 옆에 붙어서 들어야겠어?”이혁재는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