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왠지 안 본 사이에 그가 많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늘 차갑게 보이던 연재준의 눈빛은 어느 순간부터 날카로움과 냉정을 잃고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듯한 차분함으로 변했다. 다만, 그 모습은 유난히 부드럽고 평온해 보였다.이승연이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연재준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이승연은 처음엔 경계하던 마음이 점점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당황스럽고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하정은은 이미 눈시울이 붉어졌다....이승연의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밤 10시 반이었다. 차가운 밤바람에 연재준은 다시 한번 쿨럭거렸다.하정은이 급히 차 문을 열며 말했다.“대표님, 차에 타시죠.”하지만 연재준은 핸드폰을 꺼내 유월영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밤 내가 필요해?]유월영은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그 메시지 속에는 비록 몇 글자만 있었지만, 그녀의 조롱 섞인 어조가 느껴졌다.[이제 역할에 점점 능숙해지네요.]연재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직 한참 멀었어. 당신은 나의 유일한 고객이니까 연습을 더 해야 해.]몇 분이 지나도 그녀가 답장이 없자 연재준은 그제야 몸을 숙여 차에 올랐다.그리고 하정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뒤로 하고 여느 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나중에 늦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바로 말해줄게. 하 비서와 조 비서, 그동안 수고했어. 두 사람의 공로는 잊지 않을 거야. 퇴직금은 걱정하지 말고.”하정은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 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았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하며 다시 메시지가 왔다.유월영이었다.[샤워했어요? 내가 청결에 예민해서요.]연재준은 웃으며 답장했다.[어디야?]유월영은 바로 위치를 보냈다.[1시간 줄게요.]연재준은 위치를 보고 잠시 생각하다 하정은에게 말했다.“집으로 가지. 그리고 하 비서는 바로 퇴근해.”“알겠습니다.”연재준은 집에 도착해 바로
오성민은 자신이 살아서 육지로 올라올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생선 통조림으로 가득 찬 화물선의 가장 낮은 층에서 기어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그의 시든 얼굴에는 다시 희망이 되살아났다.여기, 이곳은 미국이 아닌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의 항구였다.하지만 미국으로 가는 화물선 선장들은 그 누구도 그를 태워주려고 하지 않았고, 그는 기구한 신세를 지어내며 설득해서야 겨우 동남아로 가는 선장 한 명이 그를 태워주겠다고 승낙했다.“괜찮아. 동남아도 나쁘지 않지.” 오성민은 항구에서 기어 나오면서 속으로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우선 숨을 곳을 찾아야 하고 그다음엔 사람들과 연락을 해야 했다.아직 잡히지 않은 몇몇 심복들이 있었고 그들이 어떻게든 그에게 돈을 송금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돈을 받으면 살 수 있어.”“살아야 해. 반드시 살아야 해...”그는 신경이 곤두섰고 눈빛이 예리하게 변하면서 오직 이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그러다 오성민은 실수로 사람과 부딪혔다.그는 서투른 동남아시아어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방향을 돌렸다.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가슴을 발로 찼고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뜻밖의 공격에 오성민은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딘가 싸늘한 눈빛과 마주쳤다.“오 변호사님. 며칠 못 뵈었더니 왜 이렇게 초라해지셨나요?”오성민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유월영? 당신이 어떻게...”동남아시아는 더운 날씨에 유월영도 시원한 옷을 입고 있었다.민소매 상의와 청 반바지를 입은 그녀는 백조처럼 길고 균형 잡힌 다리와 목을 드러냈으며 그 위에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발에는 긴 부츠를 신었다.유월영은 꽤 신경을 써서 단장한 듯했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리고 오성민을 바라보는 눈빛에 조롱이 가득했다.오성민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뒤쪽에서 네 명의 건장한 경호원이 그를 가로막았다.항구는 사람들로 붐비고 보는 눈도 많았다.유월영의 눈짓 한 번에 경호원들
유월영은 정신 상태가 안 좋은 오성민을 보고 더 이상 그와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그만해요, 오 변호사님. 내 질문에 잘 대답하면 당신을 경찰에 넘길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살아서 경찰에 잡혀왔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당신을 노리는 사람들도 당분간 손을 뗄 테니 적어도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 거예요.”“하지만 내가 묻는 말에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을 풀어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숨어든 장소도 바로 공개할 거고요. 외국에서 사람 목숨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오성민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유월영, 당신은 진짜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경찰에 잡히더라도 그 사람들이 나를 없앨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여론이 다가 아니야.”유월영은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럼 후자를 선택하겠다는 거네요? 좋아요. 오 변호사님 의견을 존중해야죠. 한 비서님, 지금 바로 소문을 퍼뜨리세요. 동남아시아에 그 유명한 오 변호사가 도착했다고.”“잠깐!”오성민의 눈이 갑자기 번뜩였다. 그는 여전히 살아남고 싶었다.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그는 살아가고 싶었다.오성민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뭘 물어보려고 하는 거지? 당신 이미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유월영은 상체를 숙이고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그의 독사 같은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물었다.“내 양어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죽었죠? 인공 심장 배터리를 훔치라고 지시한 사람, 누구였어요?”예상 밖의 질문에 오성민은 놀란 듯 중얼거렸다.“그렇군. 당신이 물어보고 싶었던 게 그거였네...”유월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윤 대표, 신 대표, 그리고 연 대표한테도 물어봤어요. 이제 오 변호사님 차례예요.”“그걸 물어보려고 한 거였어...”오성민은 중얼거리며 얼굴이 뒤틀리듯 웃음을 터뜨렸다.“누구긴 누구야. 연재준이지.”“...”유월영은 계속해서 여러 사람에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고 변하지 않았다.“윤
“...”청천벽력 같은 오성민의 말에 한세인은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유월영을 쳐다봤다.하지만 유월영은 놀란 기색 없이 여전히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오 변호사님,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어요?”유월영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고요한 호수 같았다.“우리 엄마는 대낮에 길에서 쓰러졌고 시우 씨의 사람이 직접 숨을 거두는 순간을 확인했어요. 큰언니가 장례를 치렀고 엄마의 유골은 봉현진에 묻혔죠. 내가 매주 엄마를 보러 가는데, 지금 우리 엄마가 살아 있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해요?”유월영은 오성민이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미친 척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오성민은 예전의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누가 알았겠어? 연 대표가 그런 일을 꾸몄을 줄을.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 엄마가 죽었다고 알리면서 몰래 그녀를 살려두고 숨겨 놓은 거지. 내가 우연히 이영화 씨를 찾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거야. 사실 3년 전에 죽지 않은 사람이 월영 씨뿐만 아니라는 걸.”유월영은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오 변호사가 직접 봤다고요? 우리 엄마를요?”“맞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멀쩡히 살아계시고 지금은 신주시 근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어. 낮에는 노인정에서 노래도 배우고, 작년 설에 마을에서 축제가 있었는데 그때 연극단과 함께 무대에 올라 노래도 하고 예전보다 더 편안하고 즐겁게 살고 있더라고.”오성민이 그럴듯하게 말하자 유월영은 순간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그리고 나서 내가 이영화 씨를 데려갔지. 그런 게 아니라면 연 대표가 왜 날 풀어줬겠어? 당연히 내가 이영화 씨로 그를 협박하니까 별수 없이 나를 풀어준 거야.”유월영은 어느새 그의 말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오성민은 정말 세 치 혀로 사람을 설득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정말일까? 엄마가 정말 죽지 않았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야?’“증거가 있어요?
오성민이 끌려간 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창고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듯했다.유월영의 얼굴은 마치 먹구름이 낀 듯했고 표정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웠다.한세인이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가씨...”유월영은 눈을 감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속 한구석이 아프기도 하고 저리기도 했다.그러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한 비서님. 오성민 말이 진짜일까요? 정말로 엄마가 3년 전에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을까요?”한세인도 충격을 받았다. 아니, 사실 이미 많은 것들이 그녀의 생각을 뒤흔들어 놓았다.요 며칠 동안 봐온 연재준은 예전에 그녀가 알고 있던 연재준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한세인이 알고 있던 연재준은 냉혈 인간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연재준은 유월영을 위해 지구 끝까지 따라갈 사람이었다.유월영을 구하기 위해 절벽에서도 뛰어내렸고 홀몸으로 마르세유까지 쫓아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는 유월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그 점을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한세인조차도 비난할 말을 할 수 없었다.“아가씨, 저는 모르겠습니다.”유월영이 쓴웃음을 지었다.“오 변호사의 말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해요. 연 대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연재준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고 그를 과소평가해선 안 됐다.그는 언제나 유월영의 곁을 맴돌았으며 그녀의 모든 동선을 꿰고 있었다.그런 점에서 그는 충분히 오성민이 말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꼈다.그래서 유월영은 자신의 양엄마가 죽지 않았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살아 있다니...”“그러면서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몇 번이고 당신한테 물어봤었는데, 그럴 때마다 재준 씨는 자기가 살인자라고 인정하며 진실을 말하지 않았어...”연재준은 유월영이 계속해서 자신을 증오하기를 바랐다.어머니를 죽였다는 오해 때문에 유월영은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입을 닫고
유월영이 마르세유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다니엘 정원은 충분히 크고 뒤쪽에는 개인 비행기 활주로가 있어서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곧바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 저택은 한 달 전 떠날 때와는 매우 달라져 있었다.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유리창으로 꾸며진 저택은 여러 가지 생화로 장식되어 있어 독특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정원에는 원래 현시우가 좋아하던 청아한 색의 꽃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강렬하고 화려하게 만개한 장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정원에도 풍선과 장식용 리본들이 넘쳐났고 가정부들도 검은색과 흰색의 전통적인 복장을 벗고 분홍색과 흰색으로 된 메이드 복으로 갈아입었다.유월영이 입을 열었다.“아마 다니엘 정원이 건설된 이래 가장 고생스러운 행사일 거예요.”집사가 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아가씨, 내일은 가장 경사스러운 날인데 그런 말은 하시면 안 됩니다!”유월영이 얕게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재수 없는 말은 하지 말죠. 그럼 우리 두 사람 백년해로하길 바랄게요.”집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야지요. 이 정원은 한 세기 동안 이렇게 시끌벅적한 적이 없어요. 연회 부인의 결혼식은 마르세유에서 하지 않았고 다니엘 부인의 결혼식은 레온 정원에서 했으니까요.”“그야말로 영광이네요.”유월영은 집사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집사가 흐뭇하게 말했다.“아가씨의 결혼식을 준비할 수 있어 우리도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아가씨가 아직 식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주방에서 식사 준비했습니다. 천천히 드시면서 제가 내일 결혼식의 세부 사항을 설명드리겠습니다.”“좋아요.”유월영이 저택으로 들어갔다.저택 안도 곳곳에 못 보던 장식들이 가득했고 그녀는 무심코 현관에 있는 도자기 꽃병을 매만졌다.그러다 유월영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시우 씨는 어디 있나요?”그러자 집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크로노스 씨는 결혼식을 전통대로 진행하자고 하셨습니다. 결혼식 전에 신랑은 신부를 만나지 않는 게 전통입
4월의 세상은 봄의 따스한 햇살과 맑은 경치로 가득 차 있었다.유월영과 신연우는 정원 뒷마당에서 천천히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봄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고 장미 향기가 섞여 퍼졌다.두 사람은 아직 결혼식 예복을 벗지 않았다. 신연우가 벗으려 했지만 유월영은 옷을 입고 걸어봐야 어느 부분이 불편한지 알 수 있다고 했다.“내일이 결혼식인데, 식전에 예복을 입고 움직여 봐야 불편한 부분을 고칠 수 있죠. 아니면 결혼식에서 가서야 알아채면 그 옷을 입고 고생할 수밖에요.”신연우도 그녀의 말에 설득되어 예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혼자서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두 사람은 서두를 필요가 없어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그날, 시우가 나한테 전화해서 우리는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어요.”신연우가 말을 꺼냈다.유월영이 물었다.“우리 관계에 대해 털어놓던가요?”“네.”“그럼 많이 놀랐겠네요?”유월영은 그 황당한 진실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듯 신연우를 놀리며 말했다.신연우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뭐라고 말을 꺼낼지 망설이다 결국 침묵했다.앞에서는 한 무리의 가정부들이 손님들이 사용할 식기를 옮기고 있었다.그 식기들은 모두 베르나르도 도자기에서 생산된 것들이었으며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많은 궁전 연회에서 사용된 명품이었다.식기들은 매우 정교하고 비쌌지만 깨지기 쉬워 가정부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신연우가 입을 열었다.“그렇지만 시우의 말을 다 듣고 나니 그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유월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네?”“월영 씨도 알겠지만, 다니엘 부인이 살아있을 당시 그분은 능력 있고 권위까지 가진 사람이었어요. 레온 가문의 모든 일은 거의 그분의 말 한마디에 결정되었고 아무도 그분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죠. 설령 그분이 자리를 손자에게 물려주려 해도 레온 가문 사람들은 탐탁지 않아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죠.”유월영이
신연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시우는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월영 씨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월영 씨를 곁에 두고 싶어 했죠. 하지만 이제 시우도 깨달았어요. 월영 씨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월영 씨 대신 결정을 내리거나 심지어 강요하는 건 잘못된 일이란 걸요. 그래서 시우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유월영이 물었다.“신 교수님과 결혼하든지, 아니면 그와 결혼하든지요?”신연우가 말했다.“나와 결혼하든지, 아니면 결혼식을 취소하든지요.”유월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레온 가문의 명성은 포기하고요?”신연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건 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요. 시우한테는 월영 씨가 더 중요하죠.”유월영은 신연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고 신연우도 유월영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여전히 금속 체인으로 된 테 안경을 쓰고, 눈빛은 부드럽고 다정했다.유월영이 잠깐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신 교수님은 예복이 참 잘 어울려요.”신연우는 약간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불가리 호텔은 세계적으로 몇 개밖에 없는 최고급 호텔로 기본 객실조차도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고 스위트룸의 가격은 몇천만 원을 호가했다.사람들은 레온 가문에서 이번 결혼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현시우는 호텔을 일주일 동안 통째로 예약해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들을 맞이했다.그 비용만으로도 몇십억 원에 달했으며 강수영마저 그 사치스러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조금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사촌 오빠가 진 것 같은데.”연재준과 강수영도 결혼식에 초대받은 손님이었기 때문에 불가리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유월영은 정말로 연재준에게 청첩장을 보냈고 연재준도 보란 듯이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다.강수영은 이 상황이 너무 막장처럼 느껴졌다.연재준은 불쾌한 표정 없이 이런 의미 없는 비교에 화내지 않았다. 그는 큰 창가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창밖은 마르세유의 야경이 펼쳐졌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