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이 깨지는 소리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유월영에게 향했다.유월영이 건조하게 웃으며 말했다.“실수로 컵을 깼네요.”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 말투만큼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어 있고 햇볕에도 녹지 않는 차가운 느낌이었다.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백유진을 보며 눈에는 희미하게 핏발이 섰다.백유진도 위험을 감지하고 울며 뒤로 물러났다.연재준이 곧바로 다가가 유월영의 손을 붙잡았다. 유월영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유월영의 손을 살폈다.손바닥은 깨진 유리 조각에 베여 상처가 생겼고 피가 손등을 타고 타일 바닥에 떨어져 붉은 꽃처럼 퍼졌다. 다행히 상처는 생각만큼 깊지 않았고 게다가 그녀는 장갑을 끼는 습관이 있어서 상처는 얕았다.신현우가 가정부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구급상자를 가져오세요.”유월영이 힘껏 손을 빼려 했지만 연재준은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라서요. 연 대표님, 더 이상 선 넘지 마시죠.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연재준이 되물었다. “상관없어. 당신 나한테 자주 손찌검하잖아.”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유월영이 싸늘한 눈빛으로 연재준을 노려봤지만 그는 그저 침착하게 그녀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그 옆의 오성민과 신현우도 묵묵히 서로를 쳐다보았다.오성민은 미소를 지으며 술 한 모금을 마셨고 신현우의 시선은 살짝 뒤로 가서 강수영이 손에 들고 있던 두 잔의 술을 보았다.매실주는 옅은 녹색을 띠고 있어 마치 동화 속에서 불안한 기운을 풍기는 독약처럼 보였다.유월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백유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그만해도 된다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노현재가 백유진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술병을 들어 그녀의 입에 강제로 부었다.노현재는 결코 자신을 신사나 군자라고 자처한 적이 없었다. 그의 원칙은 단 하나였다. 유월영을 해친 사람은 모두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유월영이 조롱하듯 말했다.“연 대표님, 당
연재준이 세 번째 잔을 들자 노현재는 차마 볼 수 없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유월영만이 연재준을 말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입을 열었다.“월영 씨...”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유월영이 웃음을 띤 채 말했다.“이 사람 저 사람 다 못 마신다 그러면, 나보고 마시라는 건가요?”그녀는 일어나서 모여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오성민과 신현우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선물'을 보내는 목적이 무엇인지 유월영은 지금은 차분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그리고 연재준...유월영은 연재준이 들고 있던 술잔을 빼앗아 들고 거실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인사한 후 잔을 들어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그리고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던지자 술잔은 굴러서 곡선을 그리며 카펫 위로 떨어졌다.“오늘 밤 초대해 주신 신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술맛도 아주 좋았고 연극도 아주 재미있었네요. 늦었으니 저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 ‘선물'은 오 변호사님께 맡길게요.”오성민이 공손하게 물었다.“저 여자는 몇 년형을 살게 하고 싶으신가요?”유월영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오 변호사님께서 받아낼 수 있는 최대 형량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문을 향해 걸어 나갔고 노현재도 바로 그녀를 따라나섰다.하지만 한 발짝 나가자마자 강수영이 달려와 노현재의 앞을 막았다.“당신은 따라가면 안 돼!”노현재는 어이가 없었다.“왜?”강수영은 복잡한 표정으로 뭐라 설명하지 못하고 대신 연재준을 밀어냈다.“오빠, 오빠가 월영 씨를 데려다주는 게 좋겠어!”연재준이 피곤한 듯 말했다. “지금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은데.”강수영이 초조하게 발을 구르다 그의 등을 밀며 문밖으로 밀어냈다.“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따라가지 않을 거야? 오빠가 그 모양이니 아직 화해하지 못한 거야. 이번엔 내 말을 들어. 놓치지 말고 빨리 따라가라니까!”강수영은 또다시 그를 문밖으로 밀어냈다.연재준은 주춤거리다 할 수 없이 따라나섰다.강수영은 몸으로 현
한적한 밤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도로 중앙에 서 있는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고, 멀리 주차된 네 대의 승용차가 있었다. 그 차들 안에는 유월영의 경호원들이 타고 있었다.한세인이 없고 노현재도 자리를 비우자 경호원들은 명령을 내릴 상사가 없어 지시를 받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떼어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원칙적으로는 두 사람을 떼어놓아야 했지만 유월영이 저항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함부로 나서기에도 적절하지 않았다.경호원들은 잠시 논의한 끝에 유월영이 필요로 할 때 나설 수 있도록 일단 차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하지만 실제로는 유월영이 저항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항의 폭이 너무 작아 경호원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유월영은 한바탕 울분을 토해낸 후 점점 힘이 빠져 연재준의 가슴을 밀어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예전에도 비서로 일하면서 술자리에서 술을 마신 경험이 많아 자신의 주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마신 양은 절대 취할 정도가 아니었는데 어쩐지 팔다리가 힘이 없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혹시 매실주의 성분 때문에? 아니면 보통의 알코올과는 다른가?’‘모르겠어...’유월영은 목이 타는듯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더듬으며 차가운 것을 찾았다.그녀는 숨을 약간 거칠게 쉬었고 연재준의 특유한 차가운 향기가 그녀의 코끝으로 밀려들어 왔다.그의 그 숨결은 평소에는 그저 차갑고 소원하게만 느껴졌지만 지금은 사막에서의 오아시스처럼 거부하기 아쉬웠다.유월영은 무의식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녀의 코끝이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 그녀는 연재준의 냄새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며 뜨거운 숨결이 연재준의 목과 쇄골에 뿜어졌다.유월영이 불편함을 느끼듯 연재준 또한 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반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유월영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가 좋아했던 여자였으며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욕망을 품고 있었다.그녀와 함께했던 그 몇 년 동안, 마지막 반년을 제외하
유월영은 정신이 혼미하여 어떻게 연재준과 같이 산수원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삐삐삐, 현관문이 열리고 외부 사람들은 문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불을 켜지 않았다. 열린 커튼 틈으로 밖의 네온사인이 새어 들어왔고 오색영롱한 불빛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마치 그날 광장에서 펼쳐졌던 불꽃놀이 같았다.연재준은 유월영을 문에 밀친 채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남은 약간의 의식은 안 된다고 경종을 울렸지만 그녀의 몸은 전혀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외투는 바닥에 떨어졌고 스웨터와 셔츠도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었다.두 사람은 술에 취한 채 모든 원한과 증오를 잠시 잊어버렸다.결국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누웠다. 체온은 점점 뜨거워졌고 숨결이 거칠어졌다.연재준은 유월영의 허리에 베개를 받치고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유월영은 연재준이 잠시 몸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눈을 떴지만 다시 그의 존재가 그녀를 덮쳐왔다.밀폐된 방 안에서 짧은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유월영은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자 눈에 보인 것은 연재준의 까만 머리카락이었다.그가 유월영에게 그렇게 애무를 해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3년 전 잠깐 재결합했을 때 두 사람은 모든 걸 다 경험했었다.유월영은 땀에 젖어 온몸이 축축해졌다.그녀의 다리는 그의 어깨에 올려진 채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마음속에서 영혼은 점점 사라져갔다.연재준은 그녀의 숨결이 더 거칠어진 것을 느끼고 입맞춤하려 고개를 들었지만, 유월영은 바로 고개를 돌려 피했다.그가 웃으며 말했다.“뭐야. 싫어?”유월영이 눈을 흘겼다.물론 이 정도의 장난은 지금 상황에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수줍은 듯한 투정처럼 느껴져 사랑스러웠다.연재준이 침대 옆 탁자에서 물잔을 집어 들고 유월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침실에 불은 켜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밤바다에서 배를 안내하는 등대처럼.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헹군 후 유월
유월영은 분노와 수치심이 함께 폭발한 채 손을 휘둘렀고 연재준의 뺨에 얕은 할퀸 자국을 남겼다.연재준은 그녀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고 눈가는 욕망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는 잠시 유월영을 바라보다가 곧 알아챈 듯 입을 열었다.“오늘 우리가 같이 먹은 건 술뿐이야. 그 술은 신현우가 준비한 거고.”신현우는 최근에 두 사람을 화해하게 하고 싶어 했으니 그가 약을 타서 두 사람을 하룻밤을 보내게 했을 가능성이 짙어 보였다.하지만 유월영은 여전히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더 의심스러웠다.“신 대표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는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그럼 나는 그럴 사람인가?”연재준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내가 당신을 화나게 할까 봐 얼마나 눈치를 보는지 당신도 알잖아.”“...”두 사람의 몸은 아직도 밀착되어 있었고 서로의 체온과 사소한 몸의 변화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몽롱한 상태에서는 괜찮았지만 이제 정신이 든 유월영은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이 3년 동안 그녀는 관계를 가진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몸의 기억이 깨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유일하게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가졌던 남자에 의해 깨어났으니 약 효과가 거의 사라졌어도 그녀는 참기 어려웠다.더군다나 그의 입술과 혀는 방끔까지도...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떨어져요!”연재준은 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그는 유혹적이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로 계속하지 않을 거야? 나를 원하지 않아?”유월영은 잠시 유혹에 빠졌다.그리고 상대의 마음이 흔들린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이 남자의 특기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그는 바로 유월영의 살갗에 입술을 가져갔다.유월영의 온몸은 불타오르는 것 같았고 연재준은 흐느끼는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내가 깊이 안 할게...계속하자, 괜찮지?”‘당연히 안 괜찮지!’유월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성추행으로 감옥에 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연재준은 그
유월영은 그에게 다가가지 않고 문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연재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가정 의사에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저쪽도 봐주세요.”가정 의사는 상황을 이해하고 유월영에게 다가가 말했다.“아가씨, 손을 내밀어 주세요.”유월영은 손목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의사가 맥을 짚는 동안 유월영은 생각에 잠겼다.‘오늘 밤 있었던 일은 절대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돼. 특히 시우 씨가 알면 안 되는데...’연재준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멀리서 덤덤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 가정 의사는 비밀을 잘 지켜. 당신 약혼자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그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비꼼에 유월영은 대꾸했다.“그렇게 해주신다면 다행이네요. 시우 씨랑 저, 곧 결혼할 거니까요.”연재준이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고 볼 것 같아?”유월영이 그를 쳐다보았다. 연재준의 차가운 얼굴에는 강렬한 공격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유월영은 더 이상 그의 말에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의사가 맥을 다 짚은 후 유월영이 물었다.“누가 약을 탄 건지 알아냈어요?”연재준이 멈칫하며 대답했다.“아직 조사 중이야.”사실 아까 욕조에서 몸을 담그면서 유월영은 생각해 낸 게 있었다. 그녀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사촌 여동생이 범인이에요. 이런 짓한 게 이번 처음도 아니고요.”예전에도 강수영은 그들이 화해하도록 도와준다고 유월영을 작은 숲으로 유인해 연재준이 그녀를 구하도록 했던 적이 있었다.강수영은 이런 식의 수작을 즐겼다.사실 연재준도 이미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수영이 아직 어리니까 당신이 너무 뭐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유월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강수영이 신 대표의 집안에서 이런 짓을 벌였는데 과연 신 대표가 모르고 있었을까요?”정말로 누구에게 따져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가정 의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가씨, 다
조용한 방안에 오직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유월영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바쁜 척했지만 사실 몇 개의 앱을 오가며 아무런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메일함을 열어보았지만 이미 전날까지 모든 메일을 처리했기에 새로운 메일은 없었고 메일함은 텅 비어 있었다.유월영은 조서희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지만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2시 반이었다. 직장인이니 그녀는 분명히 자고 있을 터였다.할 일이 없으니 유월영의 기분은 점점 초조해졌고 괜히 하정은을 탓하고 싶어졌다. 평소에 하정은은 분명 일을 빠릿빠릿하게 처리했는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늦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연재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답답하면 서재에서 책 한 권 꺼내 보는 건 어때? 밖에 비가 와서 하 비서가 금방 오지 못할 거야.”유월영은 비가 오는 줄도 몰랐고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유리창에는 물방울이 흘러내려 도시의 불빛이 아무렇게나 비치고 있었다.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누가 심심하다고 했어요?”연재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보기엔 그래 보이는데. 이것도 시비로 받아들일 거야?”“...”유월영은 그가 자신을 너무 잘 이해하는 게 여전히 거슬렸다.그녀는 더욱 아니꼬운 말투로 대꾸했다.“그렇게 잘 나신 연 대표님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연재준이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우리 오늘 신 대표하고 오 변호사가 왜 백유진을 당신에게 보냈는지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유월영은 그가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려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조금 전에 한 말이 마치 애정 섞인 농담처럼 느껴져서 목이 더 답답해졌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재준은 상관없다는 듯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몇 분 후, 유월영은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물었다.“뭐, 연 대표님 생각은 뭔데요?”어차피 지금 당장 집에 갈 수도 없으니 앉아서 그의 조롱을 당하느니 쓸만
몇 시간 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시.자정 12시가 넘어 현시우는 사고가 난 놀이공원에서 호텔로 돌아왔다. 그는 욕실로 가서 손을 씻고 생수병을 열어 물을 마시며 오늘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현시우는 혼자 있을 때 항상 표정이 차갑고 무심했으며 유월영 앞에서 다정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그의 본래 성격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는 단지 한 사람에게만 특별할 뿐이었다.삑삑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한세인이 급히 들어와 서류를 내밀었다.현시우는 생수병을 옆에 두고 그녀가 건넨 서류를 몇 장 넘겨보고 웃으며 말했다.“이 여자 그래도 내 삼촌들보다 쓸모가 좀 더 있네.”한세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작년 그 교통사고 그리고 이번에 신현우와 손을 잡고 대표님께 문제를 일으킨 것까지, 꽤 성공적이었습니다.”“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아. 그렇지 않았다면 너에게 들키지도 않았겠지.”현시우는 서류를 식탁 위에 던졌다.놀이공원 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분명 내부에 공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현시우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들은 그 내부 공모자를 찾아냈다.그는 놀이공원의 부사장으로 생각보다 소심한 인물이었다. 현시우가 나타나자마자 그는 모든 것을 자백했고 그룹 내 세력 있는 인물이 그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약속했기에 그만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했다.“아마도 대표님과 아가씨의 결혼 소식이 마르세유에 전해졌고 그들이 긴장한 모양입니다. 만약 대표님께서 결혼하게 된다면 그룹의 5% 추가 지분을 받게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대표님의 세력이 커질까 봐 그들이 서둘러 움직인 것 같습니다.”내부 공모자가 너무 겁이 많아서 일이 이렇게 빨리 드러난 것이었다.현시우는 다시 생수병을 들어 물을 두 모금 더 마셨다.한세인은 그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그녀는 해고할 것인지 아니면 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제기할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현시우는 물을 다 마신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던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