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이 일어나서 하정은의 옆을 지나가자 하정은은 진심으로 말했다.“사모님, 정말 아름다워요. 신혼 축하드려요.”유월영이 살짝 미소 지었다.계단을 내려오니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아홉 대의 화려한 차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연씨 가문의 규칙은 신랑이 직접 신부를 맞으러 가지 않고, 손윗사람들이 신부를 맞이하러 갔으며 보통 신랑의 부모가 데리러 갔으며 이는 신부에 대한 존중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연재준은 아버지를 부르지 않았으며 윤미숙은 더욱이 청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삼촌과 숙모가 신부를 맞이하러 갔고, 노현재가 차 행렬을 이끌고 함께 유월영의 집으로 향했다.그는 차 문 옆에 기대서서 하정은이 유월영을 부축하며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연재준의 삼촌과 숙모는 기쁜 마음으로 다가와 유월영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차 문을 열어주었다.유월영은 차에 타기 전에 노현재와 잠깐 눈을 마주쳤고, 잠시 후 고개를 숙이고 차에 탔다.노현재는 껌을 씹으며 돌아서서 외쳤다. “시간 되었으니 출발——”결혼식은 호텔에서 열렸으며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연재준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고 있었다.하객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도 그의 시선은 때때로 문밖을 향했으며 그런 그를 하객들은 신부를 빨리 보고 싶어 그런 거라며 놀렸다.연재준은 부정하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 도착할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한 하객이 그에게 다가와 예식장의 장식을 칭찬하자 연재준은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모두 그녀가 준비한 거죠.”이 ‘그녀’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한순간에 유월영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보다‘그녀’라는 표현이 더 친밀하고 애틋해 보였다. 그래서 모두 유월영의 미적 감각과 취향을 칭찬하고 있었다.연재준도 예식장을 한번 둘러보았다.예식장은 주로 생화로 꾸며져 있었으며 유월영은 유럽의 나무수국을 골랐다. 연두색 잎이 연두색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고 꽃봉오리가 쌍을 이루어 우아하고 몽환적이며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이영화는 문밖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삐삐 소리를 듣고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흰 가운을 입은 낯선 남자들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당신들은...”앞장선 남자가 즉시 손가락을 올리며 소리 내지 말라는 시늉 했다.“겁내지 마세요. 저는 지남이라고 합니다. 유월영 씨의 친구예요. 유월영 씨랑 상의하고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월영이! 우리 월영 괜찮나요?”지남이 대답했다. “네. 월영 씨 괜찮습니다. 시간 없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드릴게요. 우선 우리와 함께 가시죠!”“그래요. 그래요...”지남은 이영화에게 넓은 망토를 입히고 모자를 씌워 얼굴을 가린 뒤 곧장 이동했다.병원에는 24시간 연재준의 사람들이 이영화를 지키고 있었지만, 지남 일행은 경비가 교대하는 짧은 1분을 틈타 움직였다.그들이 계획된 경로를 따라 철수하는 동안 경비원들은 바로 이영화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당황하여 사람들을 조직해 지남을 추적하는 한편 바로 연재준에게 소식을 보고했다!보고를 받은 연재준은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꽉 움켜쥐었다. 그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가까이 있던 꽃병이 갑자기 터졌다!펑!도자기가 산산이 부서지고 연재준은 빠르게 몸을 피했다. 경호원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연 대표님, 조심하세요!”연재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이층 난간에 저격총이 보였다...아니, 한국에서는 총기를 소지할 수 없었기에, 그건 사격 클럽에서 사용하는 공포탄이 장전된 총이었다!이 총의 살상력은 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위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총을 들고 있는 여자는 세련된 단발머리에 깔끔한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한세인이였다. 그녀는 아래에 있는 연재준에게 도발하며 경례했다.연재준은 실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한세인은 다시 탄을 장전하고, 총대를 옆으로 휙 돌리며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스치는 곳마다 연회장에 꽂혀 있던 크고 작은 수국 화병이 하나하나 터졌다!펑! 펑! 펑!갑작스럽고 연속적인 폭
신부차 탈취와 예식장의 혼란은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신부차 행렬은 앞뒤로 두 대씩 차가 배치되어 중앙의 신부차를 둘러싸며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신호등을 지날 때 몇 대의 SUV가 갑자기 나타나 신부차를 고립시키려고 했다.신부차의 운전기사는 원래 연재준의 운전기사여서 매우 민첩했다. 주위에 차들이 몰려들자 순간 위험을 감지하고 노현재에게 연락했다.“노 대표님, 누군가 차를 미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노현재가 지시했다.“앞쪽에서 좌회전하세요.”문제의 SUV들도 신부차를 좌회전시키려고 했으며 좌회전하면 놈들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거나 더 위험이 있을 텐데 노현재가 왜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라고 하는 건지 운전기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운전기사는 핸들을 꽉 잡고 말했다.“노 대표님! 안 됩니다! 좌회전하면 결혼식장과 더 멀어져요!”노현재는 신부차 우측에서 따라오다가 갑자기 바짝 붙으며 말했다.“좌회전하라고!”신부차는 거의 부딪힐 뻔하면서 피하려다가 어쩔 수 없이 좌회전하여 다른 길로 들어섰다.뒷좌석의 유월영은 손에 들고 있던 부케를 꽉 쥐었다.신부차에 같이 타고 있던 연재준의 숙부와 숙모도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어왔다. 오직 유월영만이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날 노현재는 동해안에 가서 유월영에게 현시우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 그녀의 생일이므로 결혼식으로 변경하여 그들은 혼란을 틈타 행동할 계획이었다.유월영은 잊지 않고 안전벨트를 맸다.다음 순간, 뒤에 있던 차들 중 한 대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며 노현재의 차를 뒤에서 세게 들이받았다!노현재의 차는 몇 미터 앞으로 밀려났고, 그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사람으로 바꿔서 그럴 일이 없었다.그러다가 앞 유리창을 통해 그는 운전하는 사람이 이혁재인걸 알아챘다.‘이혁재가 어떻게?’이어, 큰 도로에서 하얀 승용차 몇 대가 빠르
유월영은 재빨리 차에 올라탔고 차는 계속해서 부두를 향해 질주했다. 노현재는 고개를 돌려 넓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그에게 다가온 것은 신부 행렬의 차 한 대였다. 차는 노현재 앞에서 급정거한 후 이혁재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그는 푸르딩딩한 얼굴로 노현재에게 달려와서 말했다. “전날 서덕궁에서 재준 형이 나에게 또 한 팀을 준비하라면서 몰래 신부차와 너를 감시하라고 하더라. 넌 형제나 마찬가지인데 나는 재준 형이 너무 쓸데없는 짓을 생각한다고 생각했지. 근데 네가 정말 이렇게 배은망덕한 놈이란걸 내가 몰랐네!”마지막 말을 하면서 이혁재는 발을 들어 노현재의 가슴을 세게 걷어찼다!“배은망덕한 놈아! 이기적인 놈! 너를 오늘 이 자리까지 올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이나 해 봤어? 재준이 형을 배신할 줄이야!”노현재는 서지욱의 발길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얼굴이 창백해진 채 씁쓸하게 웃었다. “재준이 형도 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었구나...그런데 지욱이 형, 그때 우리 같이 술을 마시며 형이 나한테 그랬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뺏어오라고, 남을 위해 착한 척하지 말고 자신이 행복해야 한다고.”이혁재는 잠시 멈칫하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유월영이라는 것을 깨닫고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다시 그를 걷어차려고 발을 들었다. ‘왜 하필이면 재준이 형의 여자를 좋아하냐고!’그때, 도로 옆에 몇 대의 차가 급정거하며 멈춰 섰고 연재준이 뒷좌석에서 내렸다.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한 연재준을 보자 노현재는 피하지 않고 그의 두 눈을 바라봤다. 연재준은 그의 옷깃을 잡아챘다.“월영이 어디 있어?”노현재는 숨을 고르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재준이 형, 월영 씨 모녀를 보내줘.”연재준은 얼굴이 굳어진 채 노현재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를 배신한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그렇게 보내면 월영의 목숨이 위험하다고!”노현재는 멍하니 서 있었고 연재준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
이영화는 그대로 풀밭에 쓰러졌고 유월영도 비틀거리다 따라 넘어졌다. 그곳은 작은 비탈길이었고 유월영은 넘어지면서 몇 미터나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들판에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유월영은 그 화살이 자신의 심장을 관통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낸 것처럼 느껴졌고 바람이 그 구멍을 통해 들어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유월영은 눈앞이 핏빛으로 물든듯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한가지 생각만 들었다.‘엄마, 엄마...’엄청난 고통이 온몸으로 번져왔다. 짧은 반 미터 거리도 유월영은 온 힘을 다해 기어가야만 이영화의 곁에 다가가 그녀의 옷소매를 잡을 수 있었다.‘엄마...’머릿속에는 마치 주마등처럼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조용한 오후, 두 모녀가 함께 실을 정리하며 나누던 대화들. 밖에서 일하는 자신을 생각하며 병상에서 목도리와 장갑을 떠주던 엄마의 모습. 그리고 밤마다 타주던 미숫가루, 몸에 좋다고 몰래 남겨두었던 꿀들. 유월영은 엄마와 밤새도록 이야기 나눈 그날 밤을 떠올렸다. 엄마는 그녀가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재벌 집으로 가서 괴롭힘을 당할가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딸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자신이 나서서 보호해 주지 못할걸 알기 때문이었다.유월영은 오열하며 땅바닥을 기어가 피투성이가 된 엄마를 껴안고 외쳤다. “119 불러줘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요! 구급-”그러나 그 순간, 땅에 엎드려 있던 엄마가 갑자기 움직이며 고개를 들었다!이건...유월영이 채 반응을 하기도 전에 엄마는 망토 아래에서 숨긴 칼을 꺼내어 유월영을 향해 찔러왔다—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고 유월영은 아직 엄청난 슬픔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눈앞의 상황에 놀라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충격과 경악으로 그녀의 얼굴은 점차 하얗게 질려왔다.칼끝이 그녀의 동공에 점점 가까워지며, 웨딩드레스를 찢고 리본을 끊었다. 그녀의 머리 화환은 넘어지면서 떨어졌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칼이 살에 닿기 직전, 엄마는 달려온 연재준에게 걷어
오늘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았다. 짙은 안개가 가득했고 정오가 가까워졌는데도 바다는 여전히 희뿌옇게 보였다. 세 대의 크루즈선이 나란히 부두에 정박해 있었고 짙은 안개 속에서 그들은 거대하고 조용한 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마치 움직이는 성 같았다.현시우가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알아채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계획은 조용하게 상대의 허를 찔러야 했다. 그는 크루즈선 갑판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부하에게 물었다.“지남과 한세인은 어떻게 됐어?”부하가 대답했다.“지남은 아직 연락이 안 되고 한세인은 성공했습니다.”이제 유월영만 기다리면 된다.현시우가 입을 열었다.“크루즈선 출발시켜.”사람이 도착하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부하는 그의 뜻을 이해하고 내려가 지시를 내렸다. 현시우는 손에 늘 가지고 다니던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잘생긴 외모는 푸른 바다 물결에 비쳐 더욱 눈에 띄었다.그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크루즈선 내부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불이야! 불이야!”현시우가 돌아보자 부하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대표님! 큰일 났어요! 크루즈선에 누군가가 불을 질렀습니다!”불길은 빠르게 번졌고, 순식간에 세 대의 크루즈선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마치 적벽대전의 '화공 전'처럼 바다 위에 화산이 형성되었다!해변 근처에 한 대의 승용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딸깍 소리와 함께 누군가 라이터를 켰고 오성민이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손가락으로 창밖에 재를 털었다.바다 위의 불길은 그가 서 있는 황야까지 퍼지지 않았다. 유월영은 지프차 지붕에 앉아 있는 윤영훈을 노려보고 있었으며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윤영훈이 손가락을 튕기자 미세한 전기 음이 나오다 이내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그가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차량 오디오 시스템은 야외 음악 페스티벌을 열 수 있을 정도였고, 한 마디 한 마디 명
윤영훈은 차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도발적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연재준은 그 순간 많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어떻게 이영화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떻게 결혼식에서 소란이 일어날 것이란 걸 미리 알았는지, 그들이 어떻게 ...많은 질문과 의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당장 그것을 신경 쓸 수 없었다. 연재준은 유월영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고, 윤영훈을 향해 화살을 쐈다!윤영훈은 민첩하게 차창을 통해 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사실 연재준의 목표는 그가 아니었고, 화살은 스피커를 뚫고 나갔다. 그러나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려 퍼졌으며 차 안 스피커에서 연재준이 이영화에 대한 압박이 계속 흘러나왔다.“장부 어디 있어요?”“우리 월영이 어디 있어!”“장부,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너, 월영이를 어떻게 한 거야! 이 짐승 같은 놈들아! 고 회장님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젠 그의 하나밖에 없는 딸도 해코지하려고 하는 거야!”“장부 어디 있어요?”‘장부 어디 있어요’’장부는 어디에 있습니까’ 연재준은 평온한 감정과 어조로 이 말만 반복했다. 유월영은 절망감이 느껴졌다. 녹음 속의 엄마를 생각하자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연재준의 손에서 빠져나와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온 세상이 회전하는 것 같았다.녹음에서는 이영화의 심장 모니터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마지막에는 경고음이 울리다가 이영화가 침대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영화가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들려왔다.“월영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걔에게 상처 주지 말고 모든 걸 나한테 풀어...”그 뒤로는 혼란스러운 응급처치 소리만 들렸다. “젠장! 환자 심장이 멈췄어! 빨리 응급실로 보내!”“빨리! 빨리!!”“...”녹음이 뚝 그쳤고 유월영의 머리도 텅 비었다. 그녀는 눈앞의 혼란스러운 싸움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차에 부딪히고,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땅에 쓰러지고, 누군가는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얼마나 어
“그리고 뭐요?”유월영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차 문을 꽉 잡았다.윤미숙은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나서, 재준이가 부하를 보내 네 엄마의 배터리 팩을 훔치게 했어. 너의 엄마는 금방 배터리가 다 떨어져 쓰러졌고. 아이고, 세상에 얼마나 냉혹하던지. 재준이가 일부러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어...내가 도착했을 때, 네 어머니의 몸은 이미—”윤미숙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었단다.”“...”가짜 이영화가 연재준이 쏜 화살에 맞는 걸 봤을 때 유월영은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녹음파일과 윤미숙의 생생한 묘사를 듣고 난 후, 유월영의 마음은...윤미숙은 유월영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이제야 흡족한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올리고 차는 천천히 떠났다.차가 떠난 후, 유월영은 온몸이 더 '텅 빈' 느낌을 받았다. 머리도, 심장도.“월영아! 더 이상 듣지 마, 우선 나와 함께 가자.”연재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혼란스러운 싸움판에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유월영은 그의 손에 끌려 비틀거리며 몇 걸음 걸었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는 결혼식에서 입은 연미복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앞은 짧고 뒤는 길어 그의 허리는 더욱 날씬해 보이고 다리는 길어 보였다. 그는 그녀 앞에서 걸으며 신속하고 단호하게 모든 방해물을 처리했다.유월영은 저항하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정말이에요? 재준 씨, 윤미숙 말이 모두 진짜예요?”연재준은 잠시 멈췄다. 그는 손에 화살을 들고 윤영훈의 사람을 쏘아 쓰러뜨리며 말했다. “서지욱도 곧 도착할 거야, 무서워하지 마.”윤미숙 말이 모두 꾸며낸 이야기라면, 연재준은 ‘진실이 아니야’한마디로 부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유월영은 눈이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껴 갑자기 연재준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연재준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즉시 돌아봤다. 유월영은 이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