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듣던 하정은도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았다.이 일을 연 대표님이 아시명 반드시 유 비서를 도와드릴 거라고 생각해서 하정은은 먼저 떠났다.“유 비서, 어머님 잘 보살펴. 난 그 간병인을 알아보러 갈게.”하정은은 그녀가 아는 인맥들이 있어서 그녀가 찾는 속도가 가장 빠를 것이다.유월영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부탁해.”하정은은 일 처리가 매우 효율적이었다. 이영화의 재검사 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그녀는 그 간병인을 찾아서 직접 데려왔다.병원 주차장 구석.간병인은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지만 네 명의 건장하고 험상궂게 생긴 경호원들이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놀라서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간병인은 침을 삼키고 목을 뻣뻣하게 쳐들고 말했다.“당신들은 누구야? 뭐 하는 짓이야? 납치는 불법이야!”“너도 법을 알아?”유월영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간병인은 고개를 돌려 그녀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그녀라니!간병인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너, 너 뭐 하는 거야? 잘 들어, 사람을 때리는 건 불법이야!”유월영은 말했다.“사람을 죽이면 불법이 아닌가?”간병인은 순간적으로 대답했다.“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유월영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만약 증거가 없었다면 오늘에 너를 찾지 못했을 거야. 우리 엄마가 차고 있는 시계는 녹음 기능이 있어. 네가 그날 그녀에게 한 말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녹음되었으니 넌 끝났어.”녹음, 녹음??어떻게 녹음까지 된다고! 간병인은 두 다리에 힘이 빠지고 안색이 점점 나빠졌고 이때 유월영은 그녀에게 한발 한발 다가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고 결국 벽에 부딪혔다.“엄마가 충격을 받으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아빠의 안 좋은 얘기를 꺼냈지.네 덕분에 엄마의 심장이 멎어 죽을 뻔했어! 이게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면 뭐야!”간병인은 당황했다.“나, 나, 난... 아냐”유월영은 크게 소리쳤다.“네가 직접 한 말이니 법원
유월영은 휴대전화를 꽉 잡았다. 그는 아까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 지금은 오히려 차분해졌다.“또 무슨 짓을 했어? 다 말해”간병인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없어요, 정말 없어요.”하정은의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네, 알겠습니다.”“유 비서, 지금 이 일을 연 대표님께 보고할게. 대표님이 처리해 줄 거야.”하정은은 후회했다. 지금 이 일이 백유진과 관련될 줄 알았더라면 그녀는 제멋대로 유월영을 도와 찾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백유진이 또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우리... 먼저 어머님을 뵈러 가자, 의사가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문제가 좀 있다고 하더라고.”유월영은 눈을 한번 감더니 일어났다.“그래.”하정은은 망설이며 간병인을 바라보았다.“그럼 이 사람은...”“그냥 놔줘.”아니면? 설마 그들이 간병인을 처리해 줄 수 나 있고?유월영은 손에 녹음도 없었다. 그저 그녀를 속인 것뿐이었다.유월영은 이 간병인이 엄마를 죽일 뻔 했다는 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을수록 백유진에 대한 원한이 다시 깊어져만 갔다!유월영은 의사를 뵈러 왔고 하정은은 따라 들어가려다가 다시 연재준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하였다.조수는 영어로 말을 하였고 유월영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한마디로 이영화의 반응이 늦어진 것은 수술 후유증이 아니라 수술 전 뇌에 산소가 부족해 실신한 것이 뇌세포 손상을 입혔다는 것이다.유월영은 그게 언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니는 그녀에게 말한 적이 없어서 그녀는 또 그 간병인 때문이지 않을까 의심했다.유월영은 항상 남이 자신을 건들지 않으면 그녀도 남을 건들지 않았다. 그때의 그녀는 연재준과 아무 사이도 아니고 백유진을 먼저 건들지 않았지만 백유진은 계속해서 그녀를 해쳤고 심지어 그녀의 엄마의 목숨까지 건드렸다!‘내가 이렇게 만만해?’하정은은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발견했다.“월영아, 좀 진정해. 이미 이 일을 연 대표님에게 말했으니 널 도와드릴 거야.”유월영은 연재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아파트 입구에 빠르게 도착한 유월영은 차에서 내려 아파트 안으로 향했다.노현재는 사람 하나 죽일 듯한 그녀의 태세에 주저하지 않고 따라갔고, 유월영은 그를 무시한 채 곧장 백유진의 집 대문으로 향했다.그런데 그때 입구에서 연재준이 기다리고 있었다.유월영은 바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고, 아니나 다를까 백유진의 집은 이미 한참 전에 텅 비어 있었다.“...”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문밖으로 나와 연재준을 바라보았다.“백유진 어디 숨겼어?”연재준은 말했다.“애초에 여기 없었어.”“여기 없었다고? 그럼 여긴 왜 왔어?”유월영은 그의 헛소리를 믿지 않았다.하정은이 미리 그에게 알려줘서 자신이 백유진에게 복수하러 올 거라고 짐작한 그가 백유진을 일찍 보낸 것이 분명했다!연재준은 얼굴을 찡그렸다.“월영아, 그건 간병인 입장일 뿐이지 그 말이 꼭 사실인 것도 아니잖아. 한 번 매수한 사람 두 번은 못 하겠어?”“그럼 누군가 백유진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간병인을 매수했다는 거야?”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연 대표님께서 어디 말씀해 보시죠. 그 간병인은 누구한테 뇌물을 받았고, 그 사람은 왜 백유진을 모함한 거죠?”연재준의 얼굴이 검푸르게 상기되며 서늘한 바람 속에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고 유월영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말 못 하시겠죠?”그녀는 매섭고도 독한 어투로 말했다!“애초에 백유진이 한 짓이니까! 그 여자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처음엔 나를 함정에 빠뜨리고, 그다음엔 우리 엄마의 심장을 훔치고, 인터넷에서 나를 비방하면서 명예훼손까지 했어. 그렇게 더러운 일을 하나씩 저지르고 있었다고. 내가 모진 게 아니라 그 여자가 날 계속 저격한 거라고! 난 이미 참을 만큼 참았어. 연재준, 이래도 그 여자 나한테 안 넘겨?”연재준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제대로 얘기를 나누려는 듯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려 했지만, 유월영은 이제 그의 입장을 알고 그의 손이 닿기
유월영은 즉시 그의 품에서 벗어나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대낮에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연재준의 눈꺼풀이 살짝 내려앉으며 대꾸했다.“그럼 밤에 다시 올까?”유월영은 쓸데없는 그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아 마른침을 삼켰다.“오늘 밤 서울로 돌아가는 KTX 예매했어. 짐 챙겨야 하는데 연 대표님이 여기 계시면 불편하니 나가주세요.” “신현우가 출근하라고 하지 않았잖아.”연재준은 자리에 앉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며칠만 더 있어 줘.”“굳이 출근하지 않더라도 연 대표님께 제 눈앞에서 사라지셨으면 좋겠네요.”연재준이 고개를 들자 바로 뒤에 발코니 창문으로 어스름한 불빛이 비쳤다. 빛을 등진 채 살짝 흐려진 그의 윤곽은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말투도 훨씬 부드러워졌다.“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백유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유월영은 그가 자신을 달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보기 드문 일이네. 나를 달랠 때도 있고.’사실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나름 그녀를 잘 대해주는 편이었다.도와주고, 곁에 있어 주고, 지켜주고, 그녀의 말대로 다 해주는 걸 봐서 자신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연재준이 아무리 잘해줘도 유월영은 다시 만나자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대체 왜일까?과거의 일들은 심장 끝에 박힌 가시와 같아서 심장이 한 번씩 뛸 때마다 가시는 한 뼘씩 더 깊숙이 박히며 설렘의 대가가 무엇인지 고통스럽게 상기시켜 주었다.오늘 백유진을 보호하려는 그의 행동 또한 그녀에게 악몽 같은 과거를 떠올리게 했고 그 과정에서 피가 흥건해질 때까지 여러 차례 그녀를 찔렀다.유월영이 물었다.“연 대표님,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연재준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고 지는 노을처럼 타오르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고작 말 몇 마디에 거슬려 하시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백유진이 저한테 어떤 짓을 했는데요,
유월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부드럽게 말했다.“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난 아빠한테 불만 없어. 대부분 딸은 원래 크면서 아빠랑 유현석은 그녀의 말을 못 들었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래도 걱정 마. 다시는 너한테 미안할 짓 안 해. 그 사람들이 널 찾으러 오면 이번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널 지켜줄게.”걸음을 멈춘 유월영은 그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아빠, 그게 무슨 말이야?”유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괜찮아,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모든 걸 깔끔하게 처리할 거다.골목 입구에 도착했을 때 미리 부른 택시가 이미 와 있었다.캐리어를 차에 싣는 유현석을 보며 유월영은 뭔가 생각난 듯 이렇게 말했다.“아빠, 그 한의사가 아빠를 치료해 주긴 했어도 조금 이상한 사람이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니까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다시 가지 마.”알겠다는 유현석의 대답을 뒤로하고 유월영은 차를 타고 역으로 이동해 서울로 돌아가는 KTX에 탑승했다.자리에 앉은 그녀는 조용한 주위와 반대로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으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어 백유진의 교사 행위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역시나 유월영이 생각한 것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힘들어. 증거도 없고 간병인이 증인으로 출석한다고 해도 승소하기 어려워. 증거가 너무 약해서 법원이 네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즉 그녀는 백유진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백유진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유월영이 한숨을 쉬자 이승연은 말했다.“한숨 쉬지 마. 아직 좋은 소식이 있어. 서정희의 범죄에 대한 모든 증거를 수집했고 형을 선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어.”이건 확실히 좋은 소식이었다.유월영은 콧대를 꾹 누르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쪽에 전문인 친구를 두니 좋긴 좋네. 휴가 중에도 날 위해 일해주다니. 내일은 고생한 우리 이 변호사님을 위해 내가 특별히 저녁 살게.”“내일은 안 될 것 같아. 방금 호텔에서 나와서 공항으로
이승연은 멈칫했다.“하 비서가 월영이를 도와 간병인을 구해줬는데, 그 간병인이 백유진인 걸 밝혔다고 하 비서를 잘랐어?”이승연은 코웃음치며 말했다.“백유진을 그렇게 싸고 돌 거면 월영이랑 화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대체 누가 짐승이라는 거야?”“그래그래, 사람은 원래 끼리끼리야. 나도 지금 기분 안 좋아. 더 이상 유월영 씨 사건 맡지 말았으면 좋겠어.”이혁재는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크지 않은 병실 침대에 덩치 큰 남자가 올라오자 이승연은 그에게 단단히 갇혀버렸고 움직일 틈이 전혀 없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승연이 남자를 발로 차 침대에서 떨어뜨렸다.이혁재가 워낙 민첩해서 볼썽사납게 넘어지진 않았지만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있었고 여자에게 발로 차여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이 무척 자존심 상했다.얼굴이 확 굳어진 그가 처음으로 여자의 이름 세 글자를 외쳤다.“이승연!”이승연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내가 있는 한 네가 나설 곳은 없어.”웃는 이혁재의 눈가에 서늘함이 스며 나왔다.“왜, 다른 사람들이 동부 지역 최고의 형사 전문 변호사라고 칭찬하니까 정말 잘난 것 같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넌…”“난 뭐?”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표정하던 이승연의 얼굴이 이제 완전히 차가워졌다.“말해봐.”“내가 네 부모님 무덤 앞에 가서 일러바칠 거야, 하나도 조신하지 않다고. 다른 집 아내들은 다 남편 말 듣는데 당신만 안 듣잖아.”곧바로 말투가 바뀐 이혁재는 조금 전까지 보였던 날카로움은 온데간데없이 푸들처럼 그녀에게 달라붙었다.“여보, 의사 선생님이 이 상태에서도 할 수 있다고 했어? 병원에서는 안 해봤는데.”남자가 목에 입을 맞추려 했지만 이승연이 그의 턱을 잡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어찌 보면 자기가 커오는 걸 옆에서 함께 봐온 남자는 어렸을 때보다 더 잘생기고 성숙해지면서 점점 더 속내를 알 수 없게 변했다.“이혁재, 당신과 당신 엄마가 왜 나를 데려갔는지 나 다 알아. 나도 마침 당신이 필요했고, 우린 각자
#그들은 단순히 전화 한 통으로 끝내지 않고 신현우를 통해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이승연은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굳이 고소할 거면 재판 기일 전까지 상대방과 접촉하지 않는 게 좋아.”한편 유월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가 거절할 줄 알았기 때문에 가운데 있는 심 대표님께 부탁한 거야.”그들이 무슨 말을 할 지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도 나름 몇 년 동안 비서실장 직책을 맡았던 터라 그런 말 속에 담긴 함정을 간파하는데 능통했다.결국 유월영은 그들과 만나기로 했고 이승연이 동행했다. 장소 역시 그녀가 정한 플로팅 라이프였다. 그곳으로 들어가기 전 이승연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표정이 굳어졌다.“서씨 가문에서 방금 서정희를 보석으로 풀어줬어요.”“대체 무슨 근거로요?”유월영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서정희가 함정을 꾸민 증거가 명백한데도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서정희 씨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진단서를 가져왔습니다. 구치소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경찰이 보석으로 석방하고 주거 감시로 변경하기로 합의했습니다.”우울증이라니, 허.보석도 보석인데, 그것도 하필 유월영을 만나기 전에 풀려났다. 이는 그녀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 아닌가?유월영은 고개를 들어 ‘플로팅 라이프'의 사진을 올려다보고 안으로 들어갔다.룸에는 서씨 가문 내외가 이미 와 있었는데 그들이 와도 일어나기는커녕 안진화가 유월영을 바라보는 눈엔 원망과 증오까지 담겨 있었다.그들 눈에는 아직도 유월영이 귀한 자기 딸을 망친 걸로 보이나 보다.마침 유월영도 그럴 생각이었다.자리에 앉기 바쁘게 안진화가 거만하게 말했다.“유월영 씨,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솔직하게 얘기하죠. 얼마를 주면 합의해 주실래요?”합의서만 있다면 서정희는 가벼운 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유월영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커다란 원탁을 사이에 두고 그들에게 되물었다.“합의금으로 얼마를 주실 생각인데요?”서권일은 차분하게 말했다.“SK그룹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월세 아끼려고
유월영은 덤덤하게 말했다.“따님이 이번 교훈을 통해 앞으로 더 큰 사고를 치지 않기 위해 모든 행동에 신중을 가할 거라 믿습니다.”안진화는 테이블을 에둘러 유월영 앞에 달려갔다.“네까짓 게 뭔데 내 딸을 가르치려고 들어! 잘 생각해 봐. 내 딸이 정말 감옥에 가면 우리 서씨 가문은 널 끝장낼 거야!”이승연은 안진화를 말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사모님, 지금 제 의뢰인을 협박하는 겁니까?”“서로 속 시원히 털어놓고 얘기하자는 겁니다.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잖아요. 유월영 씨, 어차피 다친 것도 없는데 돈 받고 맘 편히 살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저희와 맞서려는 겁니까!”서권일이 비웃으며 말했다.“아까 그쪽 개인 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됐다고 했는데 일부 네티즌들은 원래 공격적으로 행동합니다. 설마 당신과 당신 가족이 영원히 공포 속에서 살길 원하는 건 아니겠죠?”유월영은 자신에 대한 명백한 경고라는 걸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감히 건드리기만 해 봐요!”“우리가 못할 것 같아?”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한 겨울 차가운 눈 같은 서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좋습니다. 저도 할 수 있는지 보고 싶네요.”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연재준이 등장하자마자 방금 전까지 오만했던 서일권 내외는 순식간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돌변했다.일부러 연재준이 신주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건데 어떻게 이곳 서울에 나타난 걸까?연재준의 무심한 눈빛이 서씨 내외를 휩쓸고 지나갔다.“두 분께서는 뭘 하실 생각입니까?”“...”연재준이 있는데 그들이 감히 무슨 짓을 하겠나.안진화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연재준, 이 무정한 놈! 우리 정희는 10년 가까이 널 좋아하면서 청춘을 바쳤어.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여자 때문에 그 애한테 상처를 줘? 걔가 얼마나 아파할지 생각해 봤어?”연재준은 이를 흥미롭게 여겼는지 눈매가 살짝 휘어지는 모습이 상당히 보기 좋았다.“그 여자가 나를 10년 동안 좋아했으면 나도 좋아해야 하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