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연재준에게 시선을 옮긴 유월영은 두 눈에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이렇게 ‘싸구려’인 내가 어떻게 연 대표님과 어울리겠어요?”연재준은 잠시 당황했다.똑똑한 그는 당연히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조금 전 서일권 부부에게 했던 말이 그녀에게도 상처를 준 것이다.“널 말한 게 아니야.”연재준은 나지막이 말했다.“그리고 내가 지금 너한테 푹 빠져 있다는 거 모르겠어?” 유월영은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공격했다.“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내가 일일이 다 반응해야 하나?”“...”하, 젠장.그녀를 도와주려고 했던 말이 그녀에게 무기가 되어 이젠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연재준은 지금처럼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은 적이 있었나 싶다.느리고 무거운 숨결을 뱉으며 연재준이 뭐라 말을 꺼내려는데 문 뒤에서 갑작스럽게 조롱하는 듯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사실 룸 문은 그저 형식만 갖춘 가림판이었고, 누군가에게 열린 문 뒤로 윤영훈이 벽에 기댄 채 숨넘어갈 정도로 웃고 있었다.“굿! 아주 맞는 말입니다, 유월영 씨. 저처럼 그쪽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죠. 아시다시피 전 이 남자랑 달라요. 좋아한다고 해서 대답을 요구한 적이 없었죠. 저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날 만나는 게 낫지 않겠어요?”유월영은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요?”둘 중 하나?‘윤영훈이 나랑 비교가 돼?’연재준은 낮게 깔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윤 대표님, 조금 전에 이모와 이모부 두 분 다 가셨는데 배웅도 안 해드립니까?”윤영훈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기사가 있는데 제가 왜 굳이 나가요. 오랜만입니다, 유월영 씨.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연재준은 강경한 태도로 막았다.“저랑 같이 안 가도 밖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으니 윤 대표님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윤영훈은 단번에 허를 찔렀다.“이 변호사님요? 방금 남편분이 데리러 오신 걸 봤는데요. 두 분이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걸 보아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가 윤 대표님이 운영하는 식당도 아니고, 그쪽도 오는데 제가 왜 못 옵니까?”연재준이 의자를 꺼내 유월영 바로 옆에 앉았다.메뉴판을 넘기는 유월영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당연히 오셔도 되는데 왜 연 대표님께서는 굳이 우리 테이블에 앉으시는 거죠?”연재준은 유월영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식당이 만석이라서요.” 눈도 깜박이지 않고 헛소리를 해댄다. 분명 빈자리가 저렇게 많은데... 윤영훈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재준을 보호하기 위해 몰래 숨어 있던 경호원들이 무리 지어 들어와 두 사람당 한 테이블씩, 식당의 나머지 빈 자리를 한꺼번에 차지했다.“...”윤영훈은 삐딱하게 말을 바꾸었다.“자리가 없더라도 연 대표님과의 합석을 동의한 적 없는데요? 저희는 지금 연인끼리 데이트 중인데 연 대표님처럼 큰 분이 끼어드시니 조금 불편하네요.”연재준은 줄곧 유월영만 바라보며 말했다.“너랑 저 사람 연인 사이야?”유월영의 속눈썹이 흠칫 떨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영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말이 없으면 인정하는 거죠. 대답이 되셨나요, 연 대표님?”“윤 대표님의 억지스러운 논리대로면 그렇죠.”연재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난 네 남자 아니야? 해가 바뀌고 며칠 동안 우리 매일 밤 같이 있지 않았나?”“?!”연재준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낼 거라고 유월영은 상상이나 했을까?“무언은 곧 긍정. 새해 첫날에도 같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남자의 연인이 됐어?”연재준이 덧붙였다.“못된 여자네.”“...”이 사람이 미쳤나!유월영은 짜증도 나고 화도 치밀었다. 일부러 그녀가 말하게끔 자극한다는 걸 알지만 그럴수록 더 말하기 싫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나가려고 했지만 연재준이 길을 막자 그를 노려보았다.‘일어나!’윤영훈의 손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유월영을 붙잡았다.“가더라도 저 사람이 가야죠. 연 대표님께서 오시니 제 여자 친구가 밥도 제대로 못 먹잖아요.”연재준은 대놓고 몰아붙
유월영은 말이 없었다.윤영훈은 잠자코 있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떠보면서 물었다.“혹시 화났어요?”사실 유월영은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윤영훈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꼭 말을 꺼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의 사촌 여동생이고, 사이도 좋아 그녀를 도와 입을 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유월영은 비꼬듯 말했다.“1억에서 20억이라니, 그냥 가격이 너무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드네요.”20배였다.윤영훈은 코웃음 쳤다.“당신이 이모부한테 100억 얘기한 걸 알고 있어요.”그는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 100억은 어디 연 대표님한테 드리는 돈인가요? 까놓고 말해서 미래 사위한테 주는 돈이죠. 우리 이모부하고 이모가 연씨 가문이랑 사돈 맺고 싶어 하는데, 정말 결혼이 성사되면 그건 부부 공동 재산이 되겠죠. 그러니 그 100억은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투자하는 거예요.”유월영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 만약 연재준이 그 100억을 받았다며, 그녀가 연재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며, 그러면 그들은 시름 놓고 그녀를 상대할 것이고 서정희도 연재준과 잘 될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정말 꿩 먹고 알 먹고였다.“저희 이모와 이모부가 워낙 정희를 예뻐하셔서 정말 정희가 감옥에 간다면 모든 걸 걸고 당신을 상대할 거예요. 협박하는 건 아니고, 물론 그분들이 당신에게 뭘 하려는지 알게 되면 제가 막을 겁니다...그리고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연재준 씨도 아마 당신을 도울 거예요.”“다만 이런다고 당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평생 이렇게 숨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당신도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밖에도 나가고 평생 집 안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항상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할 수도 없고.”유월영은 가만히 듣고 있었고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당신도 언젠가 혼자 일 때가 있을 텐데, 그들이 그 틈을 타 손을 쓸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생명에 지장이 없
유월영이 호텔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연은 그녀에게 전화하고, 그녀가 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 바로 올라왔다.이승연도 지금 이 호텔에 묵고 있었다.방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목도리를 벗고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월영아, 오후에 혁재가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와 먼저 갔어. 미안해, 너한테 말 안 하고.”“괜찮아, 그래서 일은 다 봤어?”“...”이승연은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혁재가 말한 급한 일이란,‘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임신 시기’였으며, 그는 그녀를 호텔로 급하게 끌고 갔다...모든 게 끝난 후 이승연은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남자의 희고 준수한 얼굴에 붉은 자국이 하나 더 생겼지만, 보고 있자니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이혁재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듯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은 채 웃으며 말했다.“엄마가 계산해 준 건데, 이 시간에 잠자리 하면, 하나는 물론이고, 운이 좋으면 쌍둥이도 낳을 수 있다 했어.”이혁재는 마마보이가 아니었으며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순전히 이승연 때문에 지성에 왔지만, 그녀는 매일 그를 버리고 일하러 나갔고, 혼자 있는 것이 지루한 나머지 피가 끓어올라 그녀를 꾀어냈다.황당하지만, 스물 몇 살의 청년이 충분히 꾸며낼 수 있는 일이었다. 이승연은 대충 둘러댔다.“잘 해결했어. 근데 아까 가면서 윤영훈을 본 것 같은데?”유월영은 소파에 웅크린 채 손에 컵을 들고 있었다. 눈밭에서 잠시 떨었더니 아직도 코끝이 약간 빨갰다.“응. 20억 줄 테니 자기 사촌 여동생을 한 번만 봐 달라고 부탁했어.”이승연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면 물었다.“그럼 너의 생각은 어떤데?”“거절했어.”이승연의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눈치채고, 유월영은 가볍게 물었다.“언니도 내가 합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이승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법적 차원에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는 이 소송에서 이길 수 있기에 충분해. 서정희는 1년에서 3
유월영은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러다 그의 몸에서 나는 열에 그만 놀랐다. 그녀의 손은 연재준의 가슴팍에 닿았고, 옷을 몇 겹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열기가 느껴졌다. 연재준은 그녀가 그렇게 밀치자 '저항할 힘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거실의 불빛에 비친 연재준의 하얀 얼굴에는 붉은빛이 살짝 감돌고 있었다.이마에 짧은 머리도 늘어뜨려져 그의 가느다란 눈을 가려 평소의 날카로운 모습이 감춰졌다. 유월영은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입술에 아직도 그의 온기가 가시지 않아,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유월영은 연재준에게 그녀의 방 키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여긴 왜 왔어요?”오늘 밤 사람들이 그녀에게 계속 비슷한 말을 건넨 생각에,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연 대표님도 서정희와의 화해를 권유하러 오셨나요? 현재 가격은20억인데, 연 대표님은 얼마를 더 추가하실 생각인가요?”10억?아니지. 적어도 대표님인데 아마 기세등등해서 바로 두 배를 부를 수도.유월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그가 감히 입을 연다면 그녀는 정말...그녀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연재준은 고개를 들고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치자 유월영은 잠시 사고가 정지되었다.그는 잠긴 목소리로 완전히 다른 얘기를 꺼냈다. "자기야, 나 열 나.”유월영은 목구멍이 갑자기 무언가에 짓눌린 것 같았다.그녀는 잠이 덜 깨서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연재준을 보면서 마치 강아지를 보는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귀를 축 늘어뜨린 채 가엾게 사람들 앞으로 달려가 구애의 손길을 청하는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유월영은 그가 눈밭에 서 있던 장면을 떠올리며 가슴이 막혀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열이 나면 하 비서더러 병원에 데려가서 의사를 불러달라고 해야죠, 왜 나를 찾아왔어요? 난 병을 고칠 줄 몰라요.”연재준은 대답했다.“지난번에 내가 아팠을 때 당신이 날 돌봐줬잖아.”유월영의 마음은 바람이 부는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이 일었
연재준은 평소 항상 컨디션이 좋아 손이 따뜻했다. 그래서 지금 화로처럼 뜨거운 열기가 유월영의 몸에까지 전해졌다. 연재준은 또 그녀를 불렀다. “자기,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유월영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뭘 해줬다고 나 보고 화 풀라고 하는 거지?’그녀는 자기 손을 빼려 했지만, 연재준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실랑이하다 유월영은 마음이 심란해서 힘껏 자신의 손을 빼냈다.연재준은 그렇게 밀리고 좌절감을 느낀 듯 무거운 눈꺼풀을 들며 나른해서 말했다“간병인을 매수한 사람은 백유진이 아니야. 그럴 배짱이 없어. 자기, 날 한 번만 믿어줘.”말할 때 내뱉는 숨결까지도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하지만 유월영은 변명이라고만 생각했다.‘백유진이 아니면 누구야?’‘그럼 누군지 말을 하던지!’유월영은 출근할 필요가 없었지만 서둘러 지성을 떠나려 했던 건 그를 다시 만나기 싫어서였다. 그런데 그가 지성까지 쫓아올 줄 생각도 못 했다.그녀는 짜증이 나고 마음이 심란해져 눈앞의 손님을 바로 내쫓았다. “외간 남녀가 한 방에 이렇게 있으면 부적절하죠. 연 대표님, 이만 가보시죠?”하지만 그는 연재준이었다. 그녀에게 굽신거리고 목소리를 낮춰 그녀를 달래보고, 설명도 했지만 그녀가 봐주지 않자 그의 목소리도 한결 차가워졌다.“어디가 부적절해? 당신 부모님이 아래층에서 주무시는데, 다락방에서 나랑 할 때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안 들고, 지금 호텔 방에서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유월영은 그가 이 묵은 일을 꺼내자, 쿠션 하나를 들어 그에게로 던졌다. “나쁜 자식! 꺼져버려! 내 방에서 나가라고!”연재준은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를 담담하게 쳐다보다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겨우 두 발짝 걸어가고, 소파를 지나가다 그는 결국 비틀거리다 앞으로 꼬꾸라졌다.유월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안았으며, 그 역시 그녀의 몸 위에 쓰러져 다시 그녀를 소파로 밀어붙였다.자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유월영은 즉시 알아챘고 연재준이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몇 초 후, 연재준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자기, 날 돌봐줘,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널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그 한마디에 유월영은 화가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좋아한다고 자기 입으로 명확하게 말했다.이 남자는 정말 약점을 잘 찔렀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좋아해 준 사람은 별로 없었다.엄마, 아빠가 그녀를 좋아했는지? 하지만 그녀는 가끔 그들이 그녀로 빚을 갚기로 약속했던 일을 기억나곤 했다.제 부모도 이런데, 다른 사람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윤영훈은 말로만 그녀를 좋아한다고 했고, 현시우는 그녀를 두고 해외로 나가버렸다.줄곧 그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몇 없었다. 연재준의 이 직설적인 말에 그녀는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그도 그녀를 좋아한다니? ‘그가 좋아하는 것은 백유진이 아니었어? 개자식.’그도 그녀를 속이고 있었다. 유월영의 침대에 담요가 깔려 있었고, 그녀는 담요의 가장자리를 잡고 힘껏 아래로 잡아당겨 연재준을 담요와 함께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침대가 높지 않지만 땅에 부딪히면 조금 아플 것 같았다. 연재준은 얼굴을 찡그린 채 끙 소리를 냈지만, 기력이 없었는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유월영은 혼자 침대에 누운 채 더 이상 그를 상관하지 않았다‘그가 죽든 말든 내가 왜?’그의 사랑하는 여인은 그녀의 어머니를 거의 죽일 뻔했다. 하지만 그는 온갖 변호를 다 하더니, 이제 와서 몇 마디 말로 불쌍한 척하고 있었다.‘흥. 아프다고 해서 내가 봐줄 줄 알고.’유월영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밤은 깊어졌고,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유월영은 오늘 많은 사람을 상대하느라 피곤했는데, 시간도 늦어서, 그녀는 이내 잠들었다.하지만 깊게는 자지 못하고 줄곧 비몽사몽인 상태였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잠을 푹 자지 못해서 머리도 약간 아파졌다. 일어나 보니 연재준은 아직도
연재준은 줄곧 유월영이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그녀는 용의주도한 비서였고, 사회에서 오랜 세월을 사람들을 겪어보면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많이 겪어봤었다. 그래서 보통 한 끼 식사 시간이면, 그녀는 상대방을 거의 다 꿰뚫어 보고 그 사람에게 맞춰 줄 수 있었다. 연재준과 같이 지낸 지 3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단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와 같아, 그녀가 떠나도 그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자 그는 오히려 거의 집착하다시피 그에게로 돌아오도록 압박했다. 그녀는 그의 주위에 여자들이 무수히 많아,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는 그녀에게만 중독되어 있고 그녀만을 원한다고 했다.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기껏해야, 정복 욕구나 소유욕 그리고 약간의 지기 싫은 마음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 그는 또 그녀를 데리고 불꽃 보러도 가고 그녀에게 새해 인사도 해주었다. 자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고 하기도 했었다...“난 백유진을 좋아하지 않아.”지금 그는 또 그녀에게 백유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유월영은 단념하듯 방바닥에 누웠다. 하얀 카펫 위로 갈색 긴 머리가 굽이굽이 늘어뜨려서 마치 뒤죽박죽된 그녀의 마음과 영혼과도 같았다. ‘좋아하지 않는다고?’그는 백유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유월영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믿지 않았고 믿을 수 없었다. 연재준은 그녀의 턱을 감싸 안아 더는 흔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 곁에 그녀가 설 수 있었던 거 다 네가 먼저 날 화나게 했기 때문이야.”“내가 뭘 화나게 했어요?”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그를 화나게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지금은 마치 그가 그녀를 추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유월영은 자신이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