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내는 그 시각 문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키다리가 말했다.“넌 여기서 지키고 있어. 난 형님 좀 만나고 올게. 잘 지켜야 해. 절대 도망치게 두면 안 돼.”난쟁이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걱정 마. 여자 혼자 무슨 수로 도망가겠어? 게다가 약까지 흡입했잖아. 아마 지금쯤 다리에 힘이 풀려 걷지도 못할걸?”“일반 수면제 사용한 거 아니었어?”“그날 밤에 수림에서 만난 뒤로 계속 생각나더라고.”“그래서 최음제를 썼다고?”“그래. 어서 다녀와. 너 돌아오면 같이 들어가자. 어차피 형님은 따먹지 말란 말은 안 했잖아.”키다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가버렸다. 난쟁이 사내는 군침을 질질 흘리며 유월영을 안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안에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안에 있어야 할 여자는 보이지 않고 풀어진 끈과 테이프만 보일 뿐이었다.놀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유월영은 문 뒤에 숨어 있다가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다급히 방을 뛰쳐나가서 밖으로 문을 잠갔다.그리고 미친듯이 달렸다.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유월영은 비틀거리며 복도를 달렸다. 하지만 격렬한 움직임은 약의 확산 속도를 가속화할 뿐이었다. 그녀는 점점 목이 타고 시야가 흐릿해졌다.고개를 돌려 보니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었다.뒤돌아선 그녀는 극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핸드폰은 이미 놈들에게 빼앗긴 뒤였다.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시라도 빨리 동료들에게 돌아가는 일이었다.조금만 더… 조금만 더… 유월영은 벽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두 다리가 떨리고 호흡이 가빠졌다.흐릿한 시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키다리가 돌아온 걸까?그녀는 다급히 몸을 숨기려고 주변을 둘러봤다.창고라는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클럽 청소부들이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곳이었다.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에서 문을 잠그려 했지만 잠금 장치가 망가져
옛날 일이 떠오르자 약효 때문인지 그녀의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두 손은 저도 모르게 연재준의 허리를 더듬고 있었다.남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는 만약 자신이 마침 이 클럽에 오지 않았고 우연히 그녀를 발견하고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다른 남자에게 안겼을 것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약에 취한 달뜬 여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차라리 제정신일 때보다 이런 모습이 조금 더 예뻐 보이기는 했다.하지만 그의 그런 시선은 유월영의 자존심을 자극했다.결국 그녀는 이성으로 본능을 누르고 그를 밀어냈다.“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연재준은 그대로 그녀를 벽으로 밀어버렸다.도망갈 곳이 없게 된 유월영은 성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몸 상태가 이 지경인데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여기를 나가면 또 어느 남자한테 도움을 요청할 거야?”그의 말투에서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신연우? 걔 너 버리고 가버렸어. 네가 선택한 남자가 네가 위험한 상황에서 가버렸다고. 현시우? 걔 아마 지금 영안에 있을걸? 하지만 네가 이러고 있는 걸 알기나 할까?”유월영은 혼탁해진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몸은 자꾸만 그의 품을 파고들고 있었다.“현시우?”여기서 현시우가 왜 나오지?연재준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현시우한테 가고 싶어? 하지만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나야!”그는 그날 현시우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이나 지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었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월영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가?그렇다면 오늘도 보고만 있기를 바랄게.연재준은 유월영의 볼을 잡고 그대로 입술을 덮쳤다.남자의 강렬한 기운이 그녀를 감쌌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이미 약효가 온몸에 퍼진 상태라 밀어낼 수도 없었다.머릿속에 그와 사랑을 나누던 지난 날과 최근 두 달 사이에 자신을 압박하던 연재준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입에서 현시우의 이름이 나와서인지, 오늘의 연재준은 여느 때보다 더 거칠게 그녀를 유린했다.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고 유월영은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연재준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힘 빼.”유월영은 바짝 긴장했다. 벨소리를 들어보니 자신의 핸드폰 알림음인 것 같았다.분명 핸드폰은 놈들에게 빼앗긴 줄 알았는데?아니었던 걸까?그때 당시 이미 약에 취해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당연히 놈들이 핸드폰을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신고를 포기했었다.그런데 멍청한 두 녀석은 그녀를 묶어놓기만 했지 핸드폰을 가져가지 않은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경찰 부르는 건데….’그녀는 속으로 경솔했던 자신을 탓했다.처음부터 이 술집에 오는 게 아니었다.연재준은 한바탕 욕구를 풀어낸 뒤에야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남자친구가 전화 왔나 본데?”신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유월영은 달뜬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연재준은 일부러 그러는 듯, 다시 그녀의 예민한 곳을 공략했다.“이 나쁜 자식아!”유월영이 욕설을 내뱉자 남자의 표정도 사납게 일그러졌다.“걔랑도 했을 거 아니야? 걔는 네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알까?”유월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슨 미친 소리야?”“내가 틀린 말했어?”연재준은 그녀의 겉옷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조급해진 유월영이 소리쳤다.“연재준, 핸드폰 건드리기만 하면 죽어서도 용서 안 할 거야!”연재준이 피식 웃자 그녀의 두 눈에는 분노와 절망감이 가득했다.그는 그녀의 눈앞에서 핸드폰을 흔들며 물었다.“그렇게 싫어?”굴욕감을 견디지 못한 유월영이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연재준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지금도 울려대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발신자는 신연우가 아닌 큰언니 유은연이었다.그제야 그는 살짝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받을래?”하지만 이 상태로 어떻게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연재준은 계속해서 그녀의 눈앞에 대고 핸드폰을 흔들며 다시 물었다.“정말 안 받
그 시각, 신주병원에서 유은영은 동생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속을 끓이고 있었다.갑자기 혼수상태에 다시 빠진 이영화는 다시 응급실로 실려 들어갔다.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유은영은 고통스럽고 두려웠다.그래서 엄마의 부탁도 잊고 유월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리 전화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그녀가 다시 전화를 걸려던 순간, 응급조치를 끝낸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고비는 넘겼습니다. 대뇌 산소 공급 부족으로 잠깐 의식을 잃으셨던 것 같아요.”“지금은 괜찮은 거죠?”“꼭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하면 뇌신경 손상 등 여러가지 합병증을 불러옵니다. 수술 후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도 크고요.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유은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았다.의사가 뭐라고 하는 거지? 합병증이 뭔데? 수술 위험부담이 더 커졌다는 걸까?‘내가 잘못한 걸까?’유은영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월영이가 전화를 안 받아서 이렇게 된 거야. 난 아무것도 몰라. 수술도 월영이가 하자고 한 거잖아.’유은영은 엄마 나이도 있는데 병에 걸려 돌아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돈을 들여 치료할 바에는 차라리 생활비에 보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수술 후 합병증이 생기더라도 전부 유월영의 탓이라며 자아위안을 했다.사실 문제 클럽의 사장은 주영문이었다.키다리와 난쟁이는 그의 부하였기에 최음제를 구하는 일도 그들에게는 간단했다.그들은 주영문의 지시를 받고 유월영을 납치한 것이었다. 본인들 아지트였기에 시름 놓고 일을 벌인 건데 다 잡은 유월영이 도망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주영문은 부하들을 소집하여 클럽을 봉쇄하고 사방에 흩어져서 유월영을 찾기 시작했다.그들은 사람을 찾지 못하자 CCTV영상을 뒤졌다. 유월영이 창고에 있는 것을 확인한 주영문은 부하들을 소집하여 창고로 갔다.그들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연재준이 단정한 자세로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옷깃을 으스러지게 잡았다.연재준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주영문에게 말했다.“미연이? 주 사장이 사람을 잘못 봤네. 얘는 내 비서거든.”주영문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아까 얼굴을 봤는데 걔는 제가 아는 미연이가 맞습니다. 착각했을 리가 없어요.”연재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니까 내가 내 비서도 못 알아봤다는 소리네?”높지도 않은 언성이었지만 그는 거기 서 있는 것 자체로 강한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그것은 태어나서부터 재벌가에서 자라며 쌓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카리스마였고 해운그룹이라는 전국 일류 대기업의 오너가 주는 강압적인 분위기였다.연재준은 오만하고 성격이 거칠었지만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그는 주영문에게 그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었다.주영문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적당히 겁줘서 여자만 내려놓고 보낼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겁을 먹은 건 이쪽이었다.연재준은 유월영을 안고 주영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못 믿겠으면 얼굴을 한번 확인해 봐. 주 사장이 말하는 미연이가 맞는지 아니면 나 연재준의 비서인지 확인하라고.”유월영은 단지 그가 자신을 안고 주영문에게 다가갔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철렁했다.주영문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연재준을 노려보았다.둘은 한참이나 대치하고 있다가 결국 주영문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대표님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거겠죠. 살펴가십시오.”눈치 없는 난쟁이가 소리쳤다.“형님! 저 여자가 틀림없어요. 이대로 보내면 안 돼요! 쟤 아는 게 많단 말이에요!”주영문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연 대표님이 비서라고 하면 비서인 거야. 비켜!”그제야 난쟁이와 키다리 듀오가 길을 비켰다.연재준은 그대로 유월영을 안고 그들의 앞을 지나쳤다.등 뒤에서 주영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연 대표님, 밤길 조심하십시오.”클럽을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맡은 순간에서야 유월영은 긴장을 풀 수가 있었다.연재준은 길가를 걸으며
연재준은 담배를 비벼끄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자.”“그래.”전화를 끊은 뒤, 그는 방으로 돌아가서 잠든 여자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자리에 누웠다.다음 날 아침, 유월영은 갑갑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남자에게 물건을 집어던졌다.“꺼져!”연재준은 자다가 봉변을 당한 격이었다. 무거운 담배 재떨이가 그의 이마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랐다.그는 발광하는 그녀의 손을 침대머리에 고정했다. 유월영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연재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겨우 살려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이게 무슨 짓이야? 나 아니었으면 너도 지금쯤 산에 묻혔을지도 몰라.”유월영은 씩씩거리며 그에게 말했다.“나가.”연재준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폭력에 재미라도 들렸어? 내가 그랬지? 다시 내 몸에 손대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거라고.”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놀란 유월영은 힘껏 고개를 비틀며 반항했다.하지만 연재준의 한 마디에 그녀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어제 사진 잊었어?”유월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어젯밤 주영문의 손에서 그녀를 구해준 감사함도 그 한마디로 전부 사라져 버렸다.그녀가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연재준,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연재준은 그녀가 욕설을 뱉든 말든 입술로 그녀의 목덜미를 탐했다.유월영은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연재준은 처음부터 그녀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마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3년을 그의 옆을 지켰지만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명분을 준 적이 없었다. 연 회장 부부가 결혼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온갖 짜증을 부렸다.그리고 친구 생일 파티에서 대놓고 그녀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이었다.그러면서도 헤어진 뒤에도 그녀를 찾아와 더러운 욕망만 채웠다.‘처음부터 당신은 나를 욕망을 풀
유월영은 사진첩을 열심히 뒤졌지만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연재준의 카톡을 클릭하고 자신의 연락처를 찾았다.하지만 대화창구는 공백으로 되어 있었다.설마 처음부터 사진은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유월영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속으면 안 돼. 수 틀리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야. 어쩌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은밀히 보관했을 수도 있어.’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자 유월영은 핸드폰을 벽에 패대기쳤다.탁!욕실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온 연재준은 바닥에 두 동강이 난 핸드폰과 유월영을 번갈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미련하게 핸드폰에 사진을 숨겼겠어? 클라우드 저장공간도 있는데?”유월영은 분노를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됐잖아요. 아직도 뭐가 부족한데요?”연재준은 욕실가운을 걸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느긋하게 말했다.“부족하지 않아. 우리 유 비서가 해주는 서비스는 항상 날 즐겁게 해줬으니까.”그 말이 유월영에게는 굉장히 굴욕적으로 들렸다.“사진 삭제해요.”연재준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이 즐거움을 더 오래 가져가고 싶은데 내가 왜 굳이 그래야 할까?”설마 그 사진으로 협박해서 잠자리를 가지겠다는 걸까?유월영은 갑자기 숨이 막혔다.“정말 고소할 수도 있어요.”연재준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힐끗 보고는 소파에 앉아 하정은에게 전화를 걸어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유월영이 말했다.“제가 입을 옷도 좀 부탁한다고 해줘요.”하정은은 유월영이 비서실에서 일할 때 사이가 꽤 돈독했던 동료였기에 그녀와 연재준의 애매모호한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물론 눈치 빠른 하정은은 한 번도 그들의 앞에서 티를 낸 적 없었다. 유월영은 그녀의 그런 점이 매우 고마웠다.그렇게 조심스럽게 지켜온 비밀인데 연재준이 수 틀리면 당장 사진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혀왔다.한참이 지나 호텔에 도착한 하정은은 옷만 전해주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나버
언니가 말이 없자 유월영은 다급히 물었다.“언니? 듣고 있어?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조급한 목소리에 언니가 말했다.“괜찮아. 어제 엄마가 너 보고 싶다고 전화하셨는데 네가 안 받아서…. 모자 완성됐어. 또 뭐 필요하냐고 엄마가 물으셔.”그제야 굳었던 유월영의 표정이 풀렸다.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으면 한번만 울리고 끊었을 리 없다며 스스로 위안했다.“난 괜찮으니까 엄마 무리하지 말라고 해. 뜨개질도 정력이 필요하잖아.”유월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엄마는 깨셨어? 엄마 좀 바꿔줘.”“엄마 지금 수액 맞는 중이라 불편해. 수액 다 맞고 연락하신대.”“그래.”그 대화를 끝으로 유월영은 전화를 끊었다.언니는 괜찮다고 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어제 그런 일을 겪어서 놀란 탓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밖으로 나가면서 신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수화기 너머로 신연우의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 씨, 괜찮은 거죠?”유월영은 담담히 대답했다.“괜찮아요.”“어제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걱정했어요. 카톡으로 문자하니까 나를 차단했더라고요. 어제 그렇게 두고 가서 화난 줄 알았어요.”유월영은 그 말을 듣고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연아 때문에 기분이 안 풀린 거라면 내가 연아 많이 혼냈어요. 연아도 이제 잘못을 알았으니 오늘 직접 사과한대요.”유월영은 연재준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장난질 쳤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어제 술이 좀 취했는데 핸드폰 하다가 잘못 눌렸나 봐요. 이따가 다시 추가할게요.”“지금 어디예요? 아까 방으로 찾아갔는데 없더라고요.”신연우가 물었다.“네. 너무 취해서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 잤어요.”신연우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더 물어볼 수는 없었다.“그럼 언제 돌아와요? 내가 데리러 갈까요?”이때,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손이 유월영의 허리를 감쌌다.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연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