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진서준이 서정훈과 허성태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 게 아니었지만 서현욱은 여러 번 반성할 기회를 줘도 거만한 성격이 고쳐지지 않았다.파리처럼 계속 옆에서 윙윙거리면 누구든지 싫어지기 마련이다.진서준이 서현욱을 죽이지 않은 건 서정훈 부부의 체면을 고려해서였다.진서준의 어머니 조희선은 조용히 옆에 앉아 다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아들 진서준은 어느새 훌쩍 자라 충분히 자기 선택을 할 권리가 있었다.어머니인 조희선은 자기 아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만약 진서준을 궁지로 몰아넣을 정도로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진서준도 굳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진서준, 아버지가 말한 대로 해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절대 누군가에게 쉽게 부탁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이번 한 번만은 도와줘.”허윤진의 눈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괜찮아, 서준아. 네가 난감하다면 그냥 없던 일로 하자.”허성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그때, 갑자기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심해윤이 진서준 앞에 무릎을 꿇었다.“어머님, 뭐 하시는 건가요? 얼른 일어나세요.”진서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이며 급히 심해윤을 일으키려 했다.“뭐 하는 거야? 그놈은 자업자득이야. 왜 무릎을 꿇으며 사람 난처하게 해?”서정훈은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심해윤이 무릎을 꿇은 이유는 진서준에게 다시 한번 아들을 구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였다.“서준아, 이렇게 부탁할게. 이번 한 번만 현욱이를 구해줘. 내가 약속할게. 현욱이 완치되면 바로 해외로 보내서 다시는 대한민국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게. 사실 이 아이가 어릴 때는 참 착했어. 근데 나와 우리 남편이 일 때문에 바삐 돌아다니느라 현욱의 교육을 소홀히 했어. 그러니 현욱이 자연스레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 거야. 서준아, 한 아들 어미로서 제발 부탁할게.”심해윤은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부탁했다.“어머님, 일어나세요.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리겠습니다.”진서준이 드디어 부탁에
“그 자식 혼자 해외에 보내도 나쁠 건 없어. 여기 있어봤자 계속 소란을 피울 거야. 이번에 허성태와 당신 덕분에 저놈이 고자가 되는 신세를 면한 거야. 우리 서씨 가문은 대체 뭘 잘못한 거야? 어떻게 이런 불효자식이 태어날 수가 있어?”서정훈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서정훈과 아내는 타고난 천재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신분도 높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엘리트라고 할 수 있었다.그런데 서현욱은 왜 이런 꼴로 사는 걸까?서정훈 부부는 서현욱의 교육에 심혈을 전부 퍼부었지만 자식 농사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만해요, 화 좀 풀어요. 이따가 서준이 나오면 제대로 고맙다고 전해야죠.”심해윤이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어떻게 고맙다고 전할 건데?”서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서준은 돈도 부족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도 우리보다 훨씬 높아. 우리가 과연 어떻게 감사하다고 말해야 해? 우리 집이 서준에게 진 빚은 아마 평생 갚지 못할 거야.”서정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서정훈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진서준은 지금 돈도 부족하지 않았고 직급도 서정훈보다 훨씬 높았다.돈과 권력으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솔직히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그건 맞는 말이에요..”심해윤도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둘이 고민하고 있을 때, 진서준이 병실에서 나왔다.“서준아, 어떻게 됐어?”심해윤이 초조한 얼굴로 묻자 진서준이 이내 대답했다.“괜찮아요, 어머님. 이 약제를 하루에 한 번만 발라주시면 반달 후엔 다 나을 겁니다.”진서준은 나머지 약제를 병실에 뒀다.약을 바르는 일은 누군가에게 맡기면 되니 진서준이 굳이 매일 올 필요는 없었다.진서준도 요새 할 일이 너무 많았다.“정말 고마워, 서준아.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심해윤은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괜찮아요, 어머님. 전 그럼 이만 가볼게요.”진서준은 빙그레 웃으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남편이랑 함께 널 배웅해 줄게.”“당신
위험한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진서준은 허윤진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어라? 혹시 서현욱 치료하러 온 거야?”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허윤진이 의아해했다.어제 서현욱을 치료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추가적인 치료가 더 필요한 건가?“아니야. 독약 만드는 시합 하러 온 거야.”진서준이 솔직히 털어놓자 허유진은 깜짝 놀랐다.“뭐라고? 독약 만들기 시합이라고?”독약을 만드는 걸 시합한다는 건 허윤진도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상대가 누구야? 왜 너랑 독약 만들기 시합을 하자는 거야? 위험한 건 아니지?”허윤진은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쏟아냈다.“잠시 후 만나 보면 누군지 알게 될 거야. 위험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도 확신할 수 없어.”진서준이 추가로 설명했다.현재 진서준의 몸은 모든 독이 침투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세상 대부분의 독약은 이미 진서준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설령 위협이 있더라도 진서준은 장청결로 언제든 해독할 수 있었다.“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럼 가지 말고 우리 빨리 돌아가자.”허윤진이 진서준의 팔을 잡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안 돼. 독약 만들자는 건 내가 제안한 거야. 장본인이 여기 오지 않으면 안 되잖아.”진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미쳤어? 독약 만들자는 걸 왜 제안했어?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거야? 우리 언니는 아직 병상에 누워 있어. 너도 거기 함께 눕고 싶어 이러는 거야?”허윤진은 강경한 태도로 한마디 보탰다.“얼른 나랑 집으로 돌아가자.”“윤진아, 이번엔 정말 네 말을 들을 수 없어. 대신 하나만 약속할게. 난 절대 목숨을 위협하는 큰 일을 당하지 않을 거야. 다만 상대방이 무슨 일을 겪을지는 내가 장담 못해.”진서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진서준은 사람을 구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독약을 제조하는 기술도 탁월했다.진서준이 만든 독약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었다.“정말이야?”허윤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당연
“이놈이 드디어 왔구나. 혹시라도 겁먹고 안 올 줄 알았는데.”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행크가 진서준을 노려보며 말했다.그 눈빛은 당장이라도 진서준을 죽여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널 조금만 더 기다리게 하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왜 겁먹고 안 오겠어?”진서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행크는 화가 나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이 녀석이 정말 사람 화나게 하는 데 재간이 있네. 오늘 반드시 네놈을 바닥에 무릎 꿇고 잘못을 빌게 할 거야.”행크는 진서준 같은 괴짜를 처음 만났다.곧이어 행크는 옆에 서 있던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노인은 서양인의 외모가 70%, 동양인의 외모가 30% 정도 섞인 혼혈이었다.“바젠 닥터, 이제부터 닥터님에게 맡기겠습니다.”행크가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진서준이 오기 전에 행크는 이미 이번 시합 규칙을 바젠에게 설명해 두었다.바젠은 얼핏 봐도 어려 보이는 진서준을 흘긋 쳐다보며 경멸 어린 눈빛을 보였다.“행크 왕자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녀석은 곧 무릎을 꿇고 해독제를 구걸하게 될 겁니다.”바젠의 말투는 이번 승부가 이미 정해진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진서준 씨, 이 사람은 우리 왕실이 동남아에서 거액을 들여 초빙한 의사입니다. 의술도 대단하지만 독약 제조 기술은 특히 뛰어나다고 해요. 듣기로는 예전에 동남아 묘강에서 한동안 머문 적도 있다던데, 아무쪼록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소하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예린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서준 씨, 그냥 시합 안 하시면 안 될까요...”하지만 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내 사전에 포기란 단어는 없어요.”“이봐, 유언은 다 남겼어?”바젠이 서투른 대한민국어로 진서준을 향해 말했다.진서준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바젠을 힐끗 바라본 뒤, 다시 행크에게 시선을 돌렸다.“한의를 모욕한 건 너야. 그러니 내가 이따가 만든 독약은 네가 먹어야 해.”“웃기고 있네, 내가 왜 굳이 먹어야
바젠은 코웃음을 치며 더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독약 제작에 집중했다.진서준 역시 조용히 작업에 몰두했다.현장은 비록 쥐 죽은 듯이 고요했지만 곳곳에 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오빠, 진서준 씨 정말 괜찮을까요?”예린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바젠의 독약 제조 실력은 샛터 왕실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바젠은 독약 단 한 방울로 건장한 코끼리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그 기술이 뛰어났다.진서준이 비록 의술에 능하지만 독약 제조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업종이 다르면 사실 업종 사이에는 거대한 산이 존재하는 것과 같았다.“아마 별문제 없을 거야. 진서준이 대결을 받아들였으니 뭔가 자신이 있을 테지.”소하비는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몹시 불안했다.소하비는 사실 진서준을 접촉한 시간이 너무 짧아서 진서준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하... 다 제 잘못이에요. 저 때문에 진서준 씨와 바젠 선생님이 독약 대결을 하게 된 거잖아요.”예린은 자책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죠? 왜 공주님 잘못인데요?”허윤진은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설마 이 외국 여자가 진서준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가? 그래서 이 망나니 같은 녀석이 날 따라오지 말라고 한 거였어?’“전 중병을 앓고 있어요. 제 오빠가 진서준 씨를 모셔 와 치료를 부탁했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이 사실을 몰라요.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께서 큰오빠를 보내 날 데려가려고 하셨지만 진서준 씨가 막으셨어요.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된 거예요.”예린은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했다.그 말을 듣자 허윤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당신들은 대체 누구죠?”“저는 샛터 왕실 공주 예린이고요, 저 사람은 우리 셋째 오빠 소하비 왕자예요. 그리고 저쪽은 우리 큰오빠 행크 왕자예요.”예린이 손짓으로 설명하자 허윤진은 깜짝 놀랐다.“뭐라고요? 샛터 왕실 사람이라고요?”샛터라는 나라 이름만 들어도 대다수 사람이 떠올리는 건 단 하나, 바로 돈이었다.샛터 왕실이라면
바젠은 냉소를 지으며 사람을 시켜 병을 진서준에게 건넸다.진서준은 병을 받아 들고는 별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단숨에 들이켰다.“진서준!”허윤진은 긴장한 나머지 두 손을 꽉 움켜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에 깊게 파고들어 자국을 남길 정도였다.소하비와 예린 남매 역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이 녀석이 독약을 통째로 마시다니,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소하비는 혀를 끌끌 찼다.“이봐, 넌 이제 후회할 기회도 없어. 무릎 꿇고 빌 준비나 해.”행크는 사정없이 진서준을 비웃었고 눈에는 뻔한 우월감이 가득했다.행크는 이미 진서준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 듯했다.바젠도 거만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대한민국 애송이야, 내가 만든 독이 뭔지는 알고 마신 거야?”“알지, 뭐. 오독수에 학정홍을 살짝 섞은 게 아니야?”진서준의 목소리엔 여유가 묻어났다.“이딴 게 독이라면 독이긴 하지. 근데 나한테는 너무 약하다고.”바젠의 눈꺼풀이 떨리며 얼굴이 일그러졌다.독약을 한 번 맛본 것만으로 전부 맞춰냈다니, 이 녀석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바젠 자신도 이런 경지엔 도달할 수 없었다.“바젠 닥터, 도대체 무슨 일이죠? 먹은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왜 이 녀석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죠?”행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조급해하지 마세요. 아마 약효가 아직 발휘되지 않았을 겁니다.”바젠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진서준이 독의 성분을 알아냈다고 해도 해독할 수는 없을 것이다.바젠이 그 독약에 다른 물질도 추가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바젠은 진서준이 독약을 마신 이후로 해독제를 복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대체 어찌 된 거지? 설마 저 녀석도 해독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포기한 건가?’바젠은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그러는 사이 반나절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그럼에도 진서준은 여전히 아무런 중독 현상 없이 멀쩡했다.그 시각, 진서준도 드디어
뼈를 도려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순간 밀려왔다.이 순간, 행크는 누군가가 칼로 자기 뼈를 긁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말 그대로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었다.“왕자님, 무슨 일이십니까?”바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독 효과가 나타났네.”진서준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이게 중독 현상이라고? 설마 그 맑은 물처럼 보이던 게 진짜 독이었어?”바젠은 믿기 힘든 표정으로 빈 잔을 집어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하지만 아무리 맡아도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무색무취의 독약은 절대 흔하지 않아.”바젠은 급히 행크에게 다가가 물었다.“왕자님, 지금 어떤 느낌입니까?”“뼈가 아파요... 누가 내 뼈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행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진서준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근데 저 녀석은 왜 아직도 멀쩡한 겁니까?”“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바젠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독약은 행크가 더 나중에 마셨는데 지금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건 행크였고 진서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했다.이렇게 신기한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설마 아까 진서준의 말대로 자기가 제조한 독약이 진서준에게는 정말 효과가 없는 걸까?“이봐, 넌 대체 언제 내 독약을 해독한 거야?”바젠은 진서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분명 말했지? 네 독약은 나한테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진서준은 냉랭하게 대꾸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 네놈 거짓말하는 거지?”“내가 보기엔 빨리 해독제를 연구해서 저 녀석을 구하는 게 좋겠는데? 안 그러면 저 녀석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거야. 그리고 나중에는 뼈와 살까지 전부 녹아서 고름으로 될 거야.”진서준은 행크를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그 말에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등골이 서늘해졌다.뼈까지 녹아내리는 독이라니, 얼마나 강력한 독약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바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네가 만든
“샛터 왕자 행크가 명령한다. 당장 내 독을 해독해!”행크는 공포에 질린 채 고함을 질렀지만 바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독약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사람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진서준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맡기지 말라고 했지?”지금 행크의 목숨은 진서준의 손안에 있었다.행크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고 뼈를 찢어내는 듯한 고통에 나지막한 신음을 입 밖으로 흘렸다.“해독제를 줘.”“해독제를 원한다고? 물론 줄 수 있지.”진서준은 팔짱을 끼고 요구를 제시했다.“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해독제를 줄게.”“대한민국 애송이야, 정도껏 해!”바젠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행크는 샛터 왕실 첫째 왕자야. 행크 왕자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넌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그래?”진서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어차피 난 천한 목숨이야, 죽어도 아무렇지 않지. 근데 저 녀석은 달라. 한 나라의 어엿한 왕자가 한낱 평민인 나랑 목숨을 맞바꾸는 게 과연 가치 있을까? 그리고 저 녀석이 죽더라도 날 찾아내서 잡을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 아니겠어?”“네놈!”바젠은 진서준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맨발인 자는 신발 신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행크처럼 고귀한 신분이 진서준과 목숨을 맞바꾸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이득이 되지 않았다.그렇다고 행크가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면 샛터 왕자는 앞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마주하겠는가?“좋아, 내가 졌어. 해독제를 줘.”행크는 이를 악물고 패배를 인정했다.고통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기에 행크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이 정도의 고통만 아니었다면 샛터 왕자인 행크는 절대 결코 천한 신분인 진서준에게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내 말 까먹었어? 살고 싶으면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지?”하지만 진서준은 여전히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진서준, 네놈이 감히 날 우롱해?”행크는 진서준의 태
천년홍련은 진서라의 체내 독을 치료할 수 있는 희귀 약재 중 하나였다.지금까지도, 진서준은 어디에서 천년홍련을 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소정태가 빨간 연꽃을 봤다고 말하자 진서준은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나타났다고 간주했다.진서라의 체내 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만약 독이 폭발하면 진서준도 그 독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그게 진 교관님이 말씀한 천년홍련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게 아니라 망원경으로 멀리서 봤거든요.”소정태가 한마디 보탰다.“그리고 그 산은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데, 저는 우리 대원들 안전을 위해 깊은 산 속으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진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말했다.“좋아요, 그럼 두 부사령관과 함께 설표 특전대에 가겠습니다. 8대 특전대 대회 후에 사령관님이 말한 그 죽음의 산을 한번 확인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 진 교관님. 우리 설표 특전대 모든 대원이 교관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소정태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누를 수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진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사연에게 말하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진 교관님, 내일 출발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모님과 더 시간을 보내세요.”고소연이 배려 깊게 말했다.진서준은 그 말에 빙그레 웃고는 허사연의 방으로 갔다.방에는 진서라도 함께 있었고 둘은 진서준을 보고 내심 반가워했다.“오빠, 돌아왔어?”진서준을 보자 두 사람은 기뻐하며 말했다.“사연아, 내일 설표 특전대에 가야 해. 방금 소정태가 전화했는데, 그쪽 사람 중 하나가 천년홍련을 봤다고 해. 진위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볼 거야. 서라의 체내 독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진서준은 허사연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알겠어, 난 다 이해해.”허사연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사실 날 너무 걱정하지도 않아도 돼, 몸 상태가 거의 다 나아진 것 같거든.”“오빠, 이번에 가면 위험하지 않아?”진서라는 허사연과
“그럼 방금 시간 나면 연락하겠다고 말한 건 뭐야?”허윤진이 팔짱을 끼고 진서준과 따졌다.“그건 그냥 예의상 한 말이야.”진서준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웃기고 있네, 너희 남자들은 다 똑같아. 내가 모를 줄 알아?”허윤진은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그 공주는 샛터 왕실 공주잖아. 그 공주를 아내로 맞으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나저나 너 요즘 왜 그 용란 공주랑 연락이 없어?”허윤진은 갑자기 비꼬는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진서준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네가 말한 건 다 억측이야. 난 그 두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그럼 명주시 황씨 가문 그 여자는?”허윤진이 또 묻자 진서준은 이내 대답했다.“그 사람도 아무 관계 없어.”“윤진아, 너 도대체 집에 갈 거야, 말 거야?”진서준은 답답한 나머지 바로 화제를 돌렸다.허윤진이 계속 이렇게 질문 공격을 한다면 결국 엄청난 질투에 빠진 허윤진을 달래줘야 할 게 뻔했다.집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집 앞에 군용차가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혹시 흑기린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 건가?”진서준은 속으로 나름 추측했다.“무슨 일이야? 또 사람이 온 거야?”허윤진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거실에 들어가자 진서준은 낯익은 두 사람을 발견했다.어엿하고 늠름한 고소연, 그리고 이미 종사의 기세를 갖춘 박준명이었다.이 두 사람은 설표 특전대의 부사령관이란 신분 외에 진서준의 특별한 제자라는 신분도 있었다.“너희가 무슨 일로 여기 왔어?”진서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교관님, 안녕하세요!”두 사람은 재빨리 일어나 진서준에게 경례하며 경외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진서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이렇게 엄청난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앉아. 내 앞에서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두 사람에게 앉으라고 말했다.“교관님, 이틀 후면 8대 특전대 대회가 시작됩니다. 저희는 소 사령관님 명령을 받고 교관님을 모시러 왔습니다.”고소연이
이전에 예린이 이런 요청을 했다면 샛터 국왕은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달라졌다.“아빠가 허락할게. 다만, 내가 다른 친위대를 보내 너희 안전을 지킬 거야. 너희는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 머물 순 없어.”샛터 국왕은 담담하게 조건을 내걸었다.“고마워요, 아빠. 저와 소하비 오빠는 될수록 빨리 돌아갈 거예요.”예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워했다.예린은 내심 기뻐했지만 허윤진은 속으로 불만이 슬슬 피어올랐다.허윤진은 이 공주가 지금 바로 귀국하지 않는 이유가 진서준 때문이라고 거의 확신했다.“정말 귀찮네.”허윤진은 속으로 터지는 화를 삭이지 못해 진서준의 허벅지 살을 꽉 꼬집었다.진서준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빛으로 허윤진을 살펴봤다.자기가 분명 허윤진의 심기를 건드린 게 없을 텐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허윤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불만스럽게 콧김을 내쉬며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허윤진의 뾰로통한 모습에 진서준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다.예린은 영상 통화를 끊고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진서준 씨, 앞으로 며칠 동안 잘 부탁드려요.”“네? 무슨 뜻이죠?”진서준은 얼굴이 굳어졌다.“설마 한동안 서울에 머무를 계획인가요?”“네, 진서준 씨, 혹시 절 환영하지 않나요?”예린이 웃으며 묻자 진서준은 넌지시 농담을 던졌다.“물론 환영하죠. 공주님과 왕자님이 우리 지역 경제 발전에 큰 지원을 해 준다면 더 환영이겠네요.”이 두 사람은 걸어 다니는 재벌 수준이었다.이 둘이 투자만 한다면 서울시 경제가 발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문제없어요, 이틀 동안 우리에게 서울 가이드를 해주세요. 항목이 괜찮아 보이면 직접 투자도 고려할 수 있어요, 여기 경제 발전을 지원할게요.”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린 공주님, 미안하지만 실망하실 거예요. 진서준은 요즘 바쁘셔서 여기서 공주님을 데리고 놀러 다닐 시간이 없어요.”허윤진이 바로 대화에 끼어들어 진서준의 팔을 끌어당기며 미소를 지었
“혹시 침술 핑계로 이 아가씨를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지?”진서준은 허윤진의 질투 섞인 톤을 단번에 알아채고 급히 해명했다.“그렇게 걱정된다면 옆에서 지켜봐도 돼.”“당연히 안 나가. 난 여기서 철저히 감독할 거야.”허윤진은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허윤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샛터 공주는 몸매며 외모며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이렇게 경쟁력 있는 매혹적인 여자를 진서준과 단둘이 두게 할 순 없었다.안타깝게도 허윤진은 진서준이 이미 예린의 알몸을 다 만져봤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오빠, 먼저 나가 있어요.”예린이 부끄러운 듯 소하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난 밖에서 기다릴게.”소하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을 나갔다.허윤진이 남아 있기에 진서준이 선을 넘는 실수를 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일단 고개 돌려.”허윤진이 손으로 진서준을 잡아 돌렸다.예린은 고마운 눈빛으로 허윤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기다랗고 하얀 다리가 허윤진의 눈에 들어왔다.이 다리는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하고 부드러워 보여 같은 여자인 허윤진조차 부러움을 느꼈다.“됐어. 돌아봐도 돼.”허윤진이 마지못해 말하자 진서준은 몸을 돌렸다.비록 전에 이미 본 적 있었지만 다시 보니 여전히 눈부신 느낌이었다.“예린 공주님,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세요. 나머지는 저에게 맡기세요.”“그럼 잘 부탁드려요.”진서준의 말에 예린의 두 뺨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고 잘 익은 사과처럼 한입 베어 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진서준은 더 이상 빤히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은침을 들고 다가가 침을 놓기 시작했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침술은 끝났다.“다 됐어요. 옷 입으셔도 됩니다.”“네? 벌써 끝난 거예요?”예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까 은침이 몸에 닿을 때의 따끈따끈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무척 좋았고 몸 안에 따스한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다.“네, 앞으로 며칠간 제가 적어준 처방에 따라
바젠의 설명을 들은 행크는 즉시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을 받았다.샛터 왕자인 자기가 그런 걸 먹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행크는 곧바로 손가락을 뻗어 목구멍을 긁으려 했다.하지만 이미 소화가 시작된 상황에서 행크가 아무리 긁어도 소용이 없었다.허윤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입을 꼭 다물었다.소하비와 예린 역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부르르 떨었다.“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나한테 그런 걸 먹여?”어찌해도 토해낼 수 없자 행크는 이를 갈며 진서준을 노려보았다.“안 먹었으면 지금쯤 넌 이미 저승에 갔어.”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미리 말했으면 난 죽어도 그런 건 안 먹었을 거야.”행크가 뒤늦게 큰소리를 쳤다.“그래? 여기 독약이 한 병 더 있는데, 한 번 더 마셔볼래?”진서준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말발 센 사람은 많이 봤지만 행크처럼 말다툼에서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은 드물었다.행크는 진서준의 말에 기세가 순식간에 꺾였다.“진 씨, 두고 보자. 오늘 네게 당한 치욕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행크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놨다.그 말을 들은 진서준은 태연하게 말했다.“난 널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야. 생명의 은인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은인은 개뿔, 난 지금 널 갈기갈기 찢어 물고기 밥으로 주고 싶다고!”행크는 이를 악물며 거칠게 말했다.오늘은 행크의 생애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었다.그리고 그 모든 치욕은 진서준 덕분이었다.행크는 오늘 일을 마음 깊이 새기며 절대 잊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쯧쯧, 좋은 일 해도 욕만 먹네.”진서준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소하비, 너 정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행크는 소하비와 예린을 향해 다시 물었다.행크가 이번에 대한민국에 온 주요한 임무는 두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었다.“형, 예린 병이 나아지기 전까지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소하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좋아. 여기서 있었던 일은
“웃기고 있네. 내가 독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넌 아직 기저귀나 차고 있었을 거야.”바젠은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아까 진서준에게 철저히 농락당해 분노했던 모습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듯했다.“으아악!”바로 그때, 갑자기 행크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극심한 고통 탓에 행크의 얼굴은 일그러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왕자님!”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무슨 일이죠? 조금 전까진 괜찮으셨잖아요? 갑자기 왜 이런 거죠?”친위대 대장이 굳어진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연골산 해독제를 만들었는데요.”바젠은 당황해하며 변명했다.하지만 행크의 상태는 아까보다 더 악화하여 보였고 어느새 코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진서준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인생 선배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 내 앞에서 죽게 생겼구나. 내가 처방전을 제대로 써줬는데도 제대로 듣지 않더니 결국 일이 터졌잖아?”“닥쳐! 빈정대는 것도 지금뿐이야. 이따가 왕자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너도 같이 죽을 줄 알아.”바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그럼 지금이라도 내 처방전을 들고 다시 가서 해독제를 만들어 오지 그래?”진서준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도발하듯 말했다.만약 바젠이 처음부터 진서준의 말을 들었다면 행크가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뭐해? 지금 당장 해독제를 만들러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정말 우리 형을 여기서 죽게 할 생각이야?”소하비가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행크가 여기서 죽는다면 바젠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바젠은 이를 꽉 악물고 자기가 아까 바닥에 던졌던 처방전을 다시 주워 들고 급히 뛰어나갔다.시간은 일분일초 빠르게 흘러갔다.행크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고 얼굴은 하얀 종이처럼 창백해졌으며 입술엔 핏기가 사라졌다.행크의 모습은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처럼 보였다.“형, 꼭 버텨내야 해.”소하비와 예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행크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완벽하게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젠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분노에 휩싸인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불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겨우 스무 살 남짓한 젊은 놈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니, 이 치욕은 무릎을 꿇고 사과한 행크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이 빌어먹을 녀석이 감히 날 가지고 놀아?”바젠은 이를 악문 채, 거의 이를 쪼개며 쌍욕을 내뱉었다.“내가 언제 널 가지고 놀았다고 그래? 네가 스스로 착각해서 내가 쇄골수를 사용했다고 착각한 것뿐이지.”진서준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응했다.“그게 무슨 소리지?”행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왕자님, 이 녀석이 방금 왕자님께 먹인 건 쇄골수가 아니라 연골산입니다.”바젠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연골산이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죠.”“네 이놈! 그럼 왜 처음부터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거야?”행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머리카락이 곤두섰고 그 모습은 광기에 휩싸인 사자 같았다.“저, 저도 그저 착각한...”“닥치고 얼른 해독제나 만들어 와!”행크는 바젠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바젠의 실수 덕분에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큰 망신을 당했다.이 일이 고국에 알려진다면 바젠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마지막 약재는 절대 빠뜨리면 안 돼, 알겠어?”진서준이 차분히 한마디 던졌다.그제야 바젠은 진서준이 처방전에 적어둔 마지막 약재를 발견했다.“이게 정말 해독제 재료가 맞아?”바젠은 화난 목소리로 진서준에게 따졌다.“이 독을 만든 건 나야. 해독제를 뭐로 만들어야 할지 내가 모를 것 같아?”진서준은 도발하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흥, 연골산이라면 네 처방전 따위 필요 없어.”바젠은 자신만만하게 진서준이 건넨 처방전을 바닥에 던졌다.진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행크를 쳐다봤다.“봤어? 난 분명 처방전을 줬어. 근데 저 녀석이 안 받은 거야.”“이제 내 두 다리를 치료해 줄 수 있겠지?”행크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샛터 왕자 행크가 명령한다. 당장 내 독을 해독해!”행크는 공포에 질린 채 고함을 질렀지만 바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독약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사람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진서준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맡기지 말라고 했지?”지금 행크의 목숨은 진서준의 손안에 있었다.행크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고 뼈를 찢어내는 듯한 고통에 나지막한 신음을 입 밖으로 흘렸다.“해독제를 줘.”“해독제를 원한다고? 물론 줄 수 있지.”진서준은 팔짱을 끼고 요구를 제시했다.“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해독제를 줄게.”“대한민국 애송이야, 정도껏 해!”바젠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행크는 샛터 왕실 첫째 왕자야. 행크 왕자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넌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그래?”진서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어차피 난 천한 목숨이야, 죽어도 아무렇지 않지. 근데 저 녀석은 달라. 한 나라의 어엿한 왕자가 한낱 평민인 나랑 목숨을 맞바꾸는 게 과연 가치 있을까? 그리고 저 녀석이 죽더라도 날 찾아내서 잡을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 아니겠어?”“네놈!”바젠은 진서준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맨발인 자는 신발 신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행크처럼 고귀한 신분이 진서준과 목숨을 맞바꾸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이득이 되지 않았다.그렇다고 행크가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면 샛터 왕자는 앞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마주하겠는가?“좋아, 내가 졌어. 해독제를 줘.”행크는 이를 악물고 패배를 인정했다.고통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기에 행크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이 정도의 고통만 아니었다면 샛터 왕자인 행크는 절대 결코 천한 신분인 진서준에게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내 말 까먹었어? 살고 싶으면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지?”하지만 진서준은 여전히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진서준, 네놈이 감히 날 우롱해?”행크는 진서준의 태
뼈를 도려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순간 밀려왔다.이 순간, 행크는 누군가가 칼로 자기 뼈를 긁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말 그대로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었다.“왕자님, 무슨 일이십니까?”바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독 효과가 나타났네.”진서준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이게 중독 현상이라고? 설마 그 맑은 물처럼 보이던 게 진짜 독이었어?”바젠은 믿기 힘든 표정으로 빈 잔을 집어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하지만 아무리 맡아도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무색무취의 독약은 절대 흔하지 않아.”바젠은 급히 행크에게 다가가 물었다.“왕자님, 지금 어떤 느낌입니까?”“뼈가 아파요... 누가 내 뼈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행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진서준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근데 저 녀석은 왜 아직도 멀쩡한 겁니까?”“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바젠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독약은 행크가 더 나중에 마셨는데 지금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건 행크였고 진서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했다.이렇게 신기한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설마 아까 진서준의 말대로 자기가 제조한 독약이 진서준에게는 정말 효과가 없는 걸까?“이봐, 넌 대체 언제 내 독약을 해독한 거야?”바젠은 진서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분명 말했지? 네 독약은 나한테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진서준은 냉랭하게 대꾸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 네놈 거짓말하는 거지?”“내가 보기엔 빨리 해독제를 연구해서 저 녀석을 구하는 게 좋겠는데? 안 그러면 저 녀석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거야. 그리고 나중에는 뼈와 살까지 전부 녹아서 고름으로 될 거야.”진서준은 행크를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그 말에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등골이 서늘해졌다.뼈까지 녹아내리는 독이라니, 얼마나 강력한 독약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바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네가 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