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천의 눈에는 차가운 살기가 스쳤다.바로 그때, 멀리서 차량 행렬의 소리가 들려왔다.다들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흑기린의 차량 행렬이었다.“사령관님, 저 대원들은 사령관님이 부른 겁니까?”“이렇게 평범한 사람을 하나 처리하는데 우리 몇 명이면 충분합니다.”“사령관님, 조금 지나친 것 같습니다.”고인권은 측근들은 고인권이 흑기린 대원들을 부른 줄 알았다.하지만 고인권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고인권은 부사령관에게 전화해 사람을 부른 적이 없었다.방금 받은 유일한 전화는 부사령관의 전화였는데 소하비가 외출할 거라는 사실만 전했을 뿐이었다.그런데 예상외로 흑기린 대원들이 전부 여기로 온 것이다.“이 청년이 이렇게 태연한 게 이유가 있었네.”고인권은 이 청년이 샛터 소하비 왕자와 관련이 있다는 걸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우리 대원들은 내가 부른 게 아니야.”침묵을 지키던 고인권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 사령관님이 아닙니까? 그럼 왜 대원들이 다 여기로 온 거죠?”심홍천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방금 부사령관이 소하비 왕자가 외출한다고 내게 전했어.”고인권의 말에 다들 더 궁금해졌다.“네? 소하비 왕자도 여기에 온다고요? 왕자가 왜 오는 거죠?”“설마 이 청년 도우러 온 거 아니겠죠?”누군가 농담을 툭 던졌지만 고인권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너 소하비 왕자와 무슨 관계인 거야?”고인권이 진서준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진서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소하비 왕자 여동생 생명의 은인입니다.”“헛소리 집어치워! 너 같은 서울시 평범한 시민이 어떻게 샛터 소하비 왕자와 관계가 있을 수 있어?”고우현은 진서준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서현욱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서현욱은 진서준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다.진서준의 의술이 대한민국에서 일인자 수준이라고 단언할 순 없어도 적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 순 있었다.그래서 진서준이 샛터 왕자와 어떤 관련이 있는 가능성도 충분
“무슨 뜻이야?”서현욱은 굳어진 얼굴로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자기는 이미 흑기린에 들어갈 자격을 잃었는데 뭘 더 하겠다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설마 자기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아까 분명 말했지? 오늘 네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줄 거라고.”진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왜?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전에 날 반년 동안 고자로 만든 걸로도 부족하단 말이야?”서현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옆에 있던 고우현은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반년 동안 고자로 살았다는 건 고우현이 서현욱을 만나면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그럼 혹시 어젯밤에 서현욱이 가짜 물건으로 자기를 속였던 건가?“반년은 너무 짧았어. 차라리 평생 남자 노릇하지 말고 살아.”진서준은 한 걸음 앞으로 서현욱에게 다가갔다.“안 돼! 거기 서! 너, 가까이 오지 마!”서현욱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서현욱은 진서준의 눈빛에서 그 말이 장난이 아님을 눈치챘다.“이제야 겁먹은 거야? 어젯밤 거만한 태도는 어디 갔어? 조금 전 이를 악물고 날 비방하던 그 태도는 또 어디 갔어?”진서준은 차갑게 웃으며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보였다.서현욱은 진서준을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자극했고 그 정도가 진서준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아버님, 도와주세요. 제발요.”서현욱은 급히 고인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그만둬, 청년, 너도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잖아. 이 일은 그냥 넘어가자.” 고인권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왜요? 설마 이 녀석 편을 들어줄 건가요?”진서준은 고인권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야. 너 사령관님에게 그 말투가 뭐야?”심홍천이 분노하며 외쳤다.“샛터 왕자만 여기 없었다면 아까 난 널 톡톡히 혼뜨검 냈을 거야!”“꺼져.”진서준은 칼날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심홍천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심홍천은 진서준의 말에 흠칫하며 몸이 저절로 떨렸다.이 눈빛은 정말
“다들 이 녀석 잡아!”고인권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쳤다.“고 사령관님, 진서준은 제 친구입니다...”소하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인권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소하비 왕자님, 우리가 받은 임무는 당신을 보호하는 것뿐입니다.”고인권이 은근슬쩍 자기를 무시하자 소하비는 순간 몹시 불쾌했다.“진서준은 제 여동생 생명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고 사령관님, 제 여동생의 은인을 공격하겠단 말씀입니까?”“이 청년이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다면 그것 또한 법을 위반한 겁니다. 저는 이 청년을 체포할 권리가 있습니다.”고인권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진서준은 웃으며 물었다.“고 사령관님, 그럼 제가 묻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고의로 군관을 모함했다면 그 죄는 어떻게 처리되나요?”“군관을 모함한다고?”고인권은 그 말에 멈칫하더니 진서준을 노려보며 말했다.“너 설마 자기가 군관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농담도 정도껏 해. 나이가 드신 선배님들 제외하고는 지금 군관 중에서 40살 이하인 사람이 하나도 없어.”평화 시대에 평범한 병사가 군관이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다.누군가 40살 전에 군관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야무진 꿈이 아니라 황당한 망상일 것이다.진서준은 느긋하게 주머니에서 작은 증서를 꺼냈다.고인권은 그 증서를 받아 들자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진서준은 거짓을 말한 게 아니었다. 진서준도 고인권과 마찬가지로 계급이 소장이었다.소장인 고인권은 증서 위에 적힌 번호와 도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 군관증은 허술하게 제조한 짝퉁이 아닌 진짜 군관증이었고 위에 적힌 이름과 사진도 진서준이 버젓이 등록되어 있었다.“너 소장이었어?”고인권은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진서준이 소장이라면 고인권은 진서준을 체포할 권한이 없었다.“뭐라고요? 이 녀석이 소장이라고요? 그럴 리가 없죠.”“그 군관증은 가짜일 겁니다. 이렇게 어린 사람이 어떻게 소장이 될 수 있겠어요?”“이렇게 어린 소장이 군부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
서정훈의 태도에 고인권은 순간 멈칫했다.자기 아들이 이런 호된 짓을 당했는데도 모든 게 자초한 거라고 쌀쌀맞게 말하다니, 이 사람이 정말 서현욱의 친아버지가 맞는가?비록 서현욱이 과한 짓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고자 만들어도 되는 건 아니었다.“이 자식이 이전에 몇 번이나 일부러 진서준 심기를 건드렸으니 이렇게 된 것도 자업자득이죠.”서정훈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서 시장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서준이 한 짓은 선을 너무 넘었습니다.”고인권의 말에 서정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혀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고 사령관님, 전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많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서정훈은 서현욱을 아예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병원을 떠났다.고인권은 이 상황이 우스운지 서글픈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인권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자기 조카를 쳐다봤다.“우현아, 솔직히 말해 봐. 왜 그 영지를 사러 갔어?”“서현욱이 제안했어요. 서현욱은 영지를 사서 큰아버지께 드리려고 했어요. 큰아버지에게 잘 보여서 흑기린에 들어가려고 했거든요.”고우현은 이때다 싶어 모든 걸 다 털어놓았다.조카의 말을 들은 고인권은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서정훈이 왜 서현욱을 신경 쓰지 않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이 녀석은 서정훈의 말대로 모든 게 자업자득이었다.사실 고인권은 서정훈의 힘을 빌려 진서준을 혼내주게 하려고 했다.하지만 지금 서정훈이 자기 아들을 신경 쓰지도 않는데 외부인인 자기가 굳이 나설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우현아, 앞으로 이 녀석과 관계를 끊고 살아.”고인권의 진지한 말에 고우현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큰아버지. 앞으로 다시는 서현욱과 연락하지 않을게요.”지금의 서현욱은 이미 고자가 되었으니 고우현은 절대 서현욱과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다.만에 하나 결혼한다면 고우현은 평생 과부살이를 해야 할 것이다.밤이 되자 소하비의 형 행크가 사람들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형, 예린의 병
“베컨 닥터, 바보 동생이 장난치는 것도 모자라 닥터까지 장난에 끼어든 겁니까?”행크가 버럭 화내며 베컨을 꾸짖었다.편견이란 건 정말 무서운 존재였다.많은 사람이 편견 때문에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심지어 인생에 중요한 사람을 놓치기도 한다.행크는 의술이 뛰어난 사람은 최소한 40대 후반 이상이어야 하고 진서준 같은 청년은 병원에서 인턴 기간이 2년 반도 되지 않는 새내기라는 편견이 있었다.“그 말은 내 의술을 믿지 않는다는 거야?”진서준이 차분하게 물었다.“당연히 믿지 않아. 너 같은 어린놈이 무슨 자격으로 감히 의술을 운운해? 그리고 난 너뿐만 아니라 너희 대한민국 한의학 자체를 믿지 않아.”행크의 편견에 진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한의학은 수천 년을 전해 내려온 의술이야. 너희 서양 의학이 발달한 지 얼마나 됐다고 감히 한의학을 업신여겨? 서양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우리는 한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어. 넌 우리 한의학을 깍아내릴 수 있는 자격도 없어.”진서준이 단호하고 당당하게 반박하자 행크는 순간 당황했다.“터무니없는 소리야. 너희 한의학엔 과학이 전혀 없거든?”행크는 정신을 차린 뒤 바로 반박했다.요즘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은 과학에 집착한다.심지어 적지 않은 대한민국 사람이 한의학을 믿지 않고 서양 의학을 선택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서양 의학은 과학이 깃든 의술이었기 때문이다.“과학은 개뿔, 그건 너희가 만들어낸 이론에 불과해. 우리 한의학에도 나름의 이론이 있어.”진서준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반박하자 행크는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그만해, 내가 여기 온 건 너와 논쟁하러 온 게 아니야. 지금 당장 예린 공주를 데려가!”행크가 데려온 사람들이 그 지시를 따라 서둘러 움직이며 예린을 데려가려고 했다.진서준은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그러자 갑자기 행크에게 기운이 날아갔고 똑바로 서 있던 행크는 다리가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닥에 앉아버렸다.“왕자님, 왜 그러십니까?”경호원들이
“네가 우리 한의학을 모욕하잖아. 그럼 내가 조금 벌을 주는 것도 정상이잖아.”진서준은 냉정하게 말했다.행크가 한의학을 모욕하지 않았다면 진서준이 굳이 행크를 혼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고인권은 의아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며 속으로 내심 칭찬했다.이전에는 약간 얄미운 감정이 있었던 진서준이지만 지금은 사람이 괜찮아 보였다.“얼른 내 다리를 치료해!”행크가 진지한 목소리로 명령했다.“한의학에 사과하면 치료해 줄게.”진서준이 담담하게 대응했다.“꿈도 꾸지 마. 내가 말했지? 너희 한의학은 우리 서양 의학과 전혀 비교도 안 돼.”행크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고 사과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소하비는 한쪽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럼 계속 쭈그리고 앉아 있어. 시간이 지나면 네 다리는 완전히 망가질 거야.”“이놈이 감히 날 겁줘?”말은 그렇게 해도 행크의 눈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행크는 한 나라의 왕자이자 앞으로 샛터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었다.만약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 된다면 샛터의 국왕이 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겁주는 건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거야.”진서준은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다.“어디서 개수작이야? 다들 저놈을 혼내줘!”행크가 이를 악물며 명령하자 따라온 경호원들이 즉시 진서준을 둘러쌌다.“동작 그만!”고인권이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이건 나와 저 녀석 사이의 사적인 문제입니다. 당신들 군대 사람은 간섭할 자격이 없습니다.”행크가 냉정하게 말했다.행크는 흑기린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이 특전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리한 칼날과도 같은 조직이었다.막다른 길에 들어서지 않은 이상, 아무도 흑기린과 적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이 진 선생님은 우리 군부 소장입니다.”고인권이 천천히 해명했다.“내가 당신들 나라 소장을 공격하면 당신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겁니까?”행크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
“네가 이기면 내가 정식으로 사과할게. 하지만 네가 지면 넌 내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거야.”진서준은 뜻밖의 제안에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의학으로 대결하자고? 확실해?”“물론이지. 왜? 이제야 이 상황이 두려운 거야?”행크의 도발적인 질문에 진서준은 무덤덤하게 답했다.“난 전혀 두렵지 않아. 오히려 너희가 너무 처참하게 질까 봐 걱정하는 거야. 전통적인 대결은 나도 이젠 너무 식상해. 너 독약을 잘 제조하는 의사나 데려와. 난 그 의사랑 독을 제조하는 대결을 할 거야. 서로가 제조한 독을 먹고 해독할 수 있으면 이기는 거야. 어때?”이 대결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하나는 상대방이 독약을 제조하는 실력을 시험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해독하는 의술도 시험할 수 있었다.“으하하! 너 스스로 들어가 누울 무덤을 파는구나.”행크는 그 말에 신나서 웃음을 터뜨렸다.옆에 있던 소하비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서준 씨, 불과 얼마 전에 우리 왕실에 독약을 연구하는 의사가 왔습니다. 그 사람이 만든 독약은 정말 강력했고 그 사람 자신도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습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자 가볍게 웃어넘겼다.“잘됐네. 그럼 그 사람 내일 당장 여기로 데려와.”“먼저 내 다리부터 치료해!”행크가 갑자기 중요한 문제를 떠올렸다.“하루 더 기다려도 늦지 않아.”진서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바로 병실을 떠났다.“이 빌어먹을 놈, 정말 괘씸하네.”진서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자 행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형, 오늘은 옆방에서 쉬는 게 어때?”소하비가 미소를 지으며 제안하자 행크는 소하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환자가 아니야.”두 형제는 사실 암암리에 힘을 겨루고 있었다.샛터 왕위 계승자는 한 명뿐이지만 현재 샛터 국왕의 아들은 열 명이 넘었다.이 왕자들은 어릴 때부터 이미 수면위와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고 있었다.그리고 왕자들이 성인이 되면서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하지만 중요
진서준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진서준이 서정훈과 허성태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 게 아니었지만 서현욱은 여러 번 반성할 기회를 줘도 거만한 성격이 고쳐지지 않았다.파리처럼 계속 옆에서 윙윙거리면 누구든지 싫어지기 마련이다.진서준이 서현욱을 죽이지 않은 건 서정훈 부부의 체면을 고려해서였다.진서준의 어머니 조희선은 조용히 옆에 앉아 다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아들 진서준은 어느새 훌쩍 자라 충분히 자기 선택을 할 권리가 있었다.어머니인 조희선은 자기 아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만약 진서준을 궁지로 몰아넣을 정도로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진서준도 굳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진서준, 아버지가 말한 대로 해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절대 누군가에게 쉽게 부탁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이번 한 번만은 도와줘.”허윤진의 눈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괜찮아, 서준아. 네가 난감하다면 그냥 없던 일로 하자.”허성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그때, 갑자기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심해윤이 진서준 앞에 무릎을 꿇었다.“어머님, 뭐 하시는 건가요? 얼른 일어나세요.”진서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이며 급히 심해윤을 일으키려 했다.“뭐 하는 거야? 그놈은 자업자득이야. 왜 무릎을 꿇으며 사람 난처하게 해?”서정훈은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심해윤이 무릎을 꿇은 이유는 진서준에게 다시 한번 아들을 구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였다.“서준아, 이렇게 부탁할게. 이번 한 번만 현욱이를 구해줘. 내가 약속할게. 현욱이 완치되면 바로 해외로 보내서 다시는 대한민국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게. 사실 이 아이가 어릴 때는 참 착했어. 근데 나와 우리 남편이 일 때문에 바삐 돌아다니느라 현욱의 교육을 소홀히 했어. 그러니 현욱이 자연스레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 거야. 서준아, 한 아들 어미로서 제발 부탁할게.”심해윤은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부탁했다.“어머님, 일어나세요.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리겠습니다.”진서준이 드디어 부탁에
천년홍련은 진서라의 체내 독을 치료할 수 있는 희귀 약재 중 하나였다.지금까지도, 진서준은 어디에서 천년홍련을 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소정태가 빨간 연꽃을 봤다고 말하자 진서준은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나타났다고 간주했다.진서라의 체내 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만약 독이 폭발하면 진서준도 그 독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그게 진 교관님이 말씀한 천년홍련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게 아니라 망원경으로 멀리서 봤거든요.”소정태가 한마디 보탰다.“그리고 그 산은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데, 저는 우리 대원들 안전을 위해 깊은 산 속으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진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말했다.“좋아요, 그럼 두 부사령관과 함께 설표 특전대에 가겠습니다. 8대 특전대 대회 후에 사령관님이 말한 그 죽음의 산을 한번 확인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 진 교관님. 우리 설표 특전대 모든 대원이 교관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소정태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누를 수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진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사연에게 말하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진 교관님, 내일 출발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모님과 더 시간을 보내세요.”고소연이 배려 깊게 말했다.진서준은 그 말에 빙그레 웃고는 허사연의 방으로 갔다.방에는 진서라도 함께 있었고 둘은 진서준을 보고 내심 반가워했다.“오빠, 돌아왔어?”진서준을 보자 두 사람은 기뻐하며 말했다.“사연아, 내일 설표 특전대에 가야 해. 방금 소정태가 전화했는데, 그쪽 사람 중 하나가 천년홍련을 봤다고 해. 진위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볼 거야. 서라의 체내 독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진서준은 허사연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알겠어, 난 다 이해해.”허사연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사실 날 너무 걱정하지도 않아도 돼, 몸 상태가 거의 다 나아진 것 같거든.”“오빠, 이번에 가면 위험하지 않아?”진서라는 허사연과
“그럼 방금 시간 나면 연락하겠다고 말한 건 뭐야?”허윤진이 팔짱을 끼고 진서준과 따졌다.“그건 그냥 예의상 한 말이야.”진서준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웃기고 있네, 너희 남자들은 다 똑같아. 내가 모를 줄 알아?”허윤진은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그 공주는 샛터 왕실 공주잖아. 그 공주를 아내로 맞으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나저나 너 요즘 왜 그 용란 공주랑 연락이 없어?”허윤진은 갑자기 비꼬는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진서준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네가 말한 건 다 억측이야. 난 그 두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그럼 명주시 황씨 가문 그 여자는?”허윤진이 또 묻자 진서준은 이내 대답했다.“그 사람도 아무 관계 없어.”“윤진아, 너 도대체 집에 갈 거야, 말 거야?”진서준은 답답한 나머지 바로 화제를 돌렸다.허윤진이 계속 이렇게 질문 공격을 한다면 결국 엄청난 질투에 빠진 허윤진을 달래줘야 할 게 뻔했다.집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집 앞에 군용차가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혹시 흑기린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 건가?”진서준은 속으로 나름 추측했다.“무슨 일이야? 또 사람이 온 거야?”허윤진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거실에 들어가자 진서준은 낯익은 두 사람을 발견했다.어엿하고 늠름한 고소연, 그리고 이미 종사의 기세를 갖춘 박준명이었다.이 두 사람은 설표 특전대의 부사령관이란 신분 외에 진서준의 특별한 제자라는 신분도 있었다.“너희가 무슨 일로 여기 왔어?”진서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교관님, 안녕하세요!”두 사람은 재빨리 일어나 진서준에게 경례하며 경외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진서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이렇게 엄청난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앉아. 내 앞에서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두 사람에게 앉으라고 말했다.“교관님, 이틀 후면 8대 특전대 대회가 시작됩니다. 저희는 소 사령관님 명령을 받고 교관님을 모시러 왔습니다.”고소연이
이전에 예린이 이런 요청을 했다면 샛터 국왕은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달라졌다.“아빠가 허락할게. 다만, 내가 다른 친위대를 보내 너희 안전을 지킬 거야. 너희는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 머물 순 없어.”샛터 국왕은 담담하게 조건을 내걸었다.“고마워요, 아빠. 저와 소하비 오빠는 될수록 빨리 돌아갈 거예요.”예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워했다.예린은 내심 기뻐했지만 허윤진은 속으로 불만이 슬슬 피어올랐다.허윤진은 이 공주가 지금 바로 귀국하지 않는 이유가 진서준 때문이라고 거의 확신했다.“정말 귀찮네.”허윤진은 속으로 터지는 화를 삭이지 못해 진서준의 허벅지 살을 꽉 꼬집었다.진서준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빛으로 허윤진을 살펴봤다.자기가 분명 허윤진의 심기를 건드린 게 없을 텐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허윤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불만스럽게 콧김을 내쉬며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허윤진의 뾰로통한 모습에 진서준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다.예린은 영상 통화를 끊고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진서준 씨, 앞으로 며칠 동안 잘 부탁드려요.”“네? 무슨 뜻이죠?”진서준은 얼굴이 굳어졌다.“설마 한동안 서울에 머무를 계획인가요?”“네, 진서준 씨, 혹시 절 환영하지 않나요?”예린이 웃으며 묻자 진서준은 넌지시 농담을 던졌다.“물론 환영하죠. 공주님과 왕자님이 우리 지역 경제 발전에 큰 지원을 해 준다면 더 환영이겠네요.”이 두 사람은 걸어 다니는 재벌 수준이었다.이 둘이 투자만 한다면 서울시 경제가 발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문제없어요, 이틀 동안 우리에게 서울 가이드를 해주세요. 항목이 괜찮아 보이면 직접 투자도 고려할 수 있어요, 여기 경제 발전을 지원할게요.”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린 공주님, 미안하지만 실망하실 거예요. 진서준은 요즘 바쁘셔서 여기서 공주님을 데리고 놀러 다닐 시간이 없어요.”허윤진이 바로 대화에 끼어들어 진서준의 팔을 끌어당기며 미소를 지었
“혹시 침술 핑계로 이 아가씨를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지?”진서준은 허윤진의 질투 섞인 톤을 단번에 알아채고 급히 해명했다.“그렇게 걱정된다면 옆에서 지켜봐도 돼.”“당연히 안 나가. 난 여기서 철저히 감독할 거야.”허윤진은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허윤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샛터 공주는 몸매며 외모며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이렇게 경쟁력 있는 매혹적인 여자를 진서준과 단둘이 두게 할 순 없었다.안타깝게도 허윤진은 진서준이 이미 예린의 알몸을 다 만져봤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오빠, 먼저 나가 있어요.”예린이 부끄러운 듯 소하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난 밖에서 기다릴게.”소하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을 나갔다.허윤진이 남아 있기에 진서준이 선을 넘는 실수를 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일단 고개 돌려.”허윤진이 손으로 진서준을 잡아 돌렸다.예린은 고마운 눈빛으로 허윤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기다랗고 하얀 다리가 허윤진의 눈에 들어왔다.이 다리는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하고 부드러워 보여 같은 여자인 허윤진조차 부러움을 느꼈다.“됐어. 돌아봐도 돼.”허윤진이 마지못해 말하자 진서준은 몸을 돌렸다.비록 전에 이미 본 적 있었지만 다시 보니 여전히 눈부신 느낌이었다.“예린 공주님,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세요. 나머지는 저에게 맡기세요.”“그럼 잘 부탁드려요.”진서준의 말에 예린의 두 뺨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고 잘 익은 사과처럼 한입 베어 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진서준은 더 이상 빤히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은침을 들고 다가가 침을 놓기 시작했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침술은 끝났다.“다 됐어요. 옷 입으셔도 됩니다.”“네? 벌써 끝난 거예요?”예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까 은침이 몸에 닿을 때의 따끈따끈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무척 좋았고 몸 안에 따스한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다.“네, 앞으로 며칠간 제가 적어준 처방에 따라
바젠의 설명을 들은 행크는 즉시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을 받았다.샛터 왕자인 자기가 그런 걸 먹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행크는 곧바로 손가락을 뻗어 목구멍을 긁으려 했다.하지만 이미 소화가 시작된 상황에서 행크가 아무리 긁어도 소용이 없었다.허윤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입을 꼭 다물었다.소하비와 예린 역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부르르 떨었다.“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나한테 그런 걸 먹여?”어찌해도 토해낼 수 없자 행크는 이를 갈며 진서준을 노려보았다.“안 먹었으면 지금쯤 넌 이미 저승에 갔어.”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미리 말했으면 난 죽어도 그런 건 안 먹었을 거야.”행크가 뒤늦게 큰소리를 쳤다.“그래? 여기 독약이 한 병 더 있는데, 한 번 더 마셔볼래?”진서준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말발 센 사람은 많이 봤지만 행크처럼 말다툼에서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은 드물었다.행크는 진서준의 말에 기세가 순식간에 꺾였다.“진 씨, 두고 보자. 오늘 네게 당한 치욕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행크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놨다.그 말을 들은 진서준은 태연하게 말했다.“난 널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야. 생명의 은인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은인은 개뿔, 난 지금 널 갈기갈기 찢어 물고기 밥으로 주고 싶다고!”행크는 이를 악물며 거칠게 말했다.오늘은 행크의 생애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었다.그리고 그 모든 치욕은 진서준 덕분이었다.행크는 오늘 일을 마음 깊이 새기며 절대 잊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쯧쯧, 좋은 일 해도 욕만 먹네.”진서준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소하비, 너 정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행크는 소하비와 예린을 향해 다시 물었다.행크가 이번에 대한민국에 온 주요한 임무는 두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었다.“형, 예린 병이 나아지기 전까지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소하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좋아. 여기서 있었던 일은
“웃기고 있네. 내가 독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넌 아직 기저귀나 차고 있었을 거야.”바젠은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아까 진서준에게 철저히 농락당해 분노했던 모습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듯했다.“으아악!”바로 그때, 갑자기 행크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극심한 고통 탓에 행크의 얼굴은 일그러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왕자님!”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무슨 일이죠? 조금 전까진 괜찮으셨잖아요? 갑자기 왜 이런 거죠?”친위대 대장이 굳어진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연골산 해독제를 만들었는데요.”바젠은 당황해하며 변명했다.하지만 행크의 상태는 아까보다 더 악화하여 보였고 어느새 코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진서준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인생 선배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 내 앞에서 죽게 생겼구나. 내가 처방전을 제대로 써줬는데도 제대로 듣지 않더니 결국 일이 터졌잖아?”“닥쳐! 빈정대는 것도 지금뿐이야. 이따가 왕자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너도 같이 죽을 줄 알아.”바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그럼 지금이라도 내 처방전을 들고 다시 가서 해독제를 만들어 오지 그래?”진서준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도발하듯 말했다.만약 바젠이 처음부터 진서준의 말을 들었다면 행크가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뭐해? 지금 당장 해독제를 만들러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정말 우리 형을 여기서 죽게 할 생각이야?”소하비가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행크가 여기서 죽는다면 바젠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바젠은 이를 꽉 악물고 자기가 아까 바닥에 던졌던 처방전을 다시 주워 들고 급히 뛰어나갔다.시간은 일분일초 빠르게 흘러갔다.행크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고 얼굴은 하얀 종이처럼 창백해졌으며 입술엔 핏기가 사라졌다.행크의 모습은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처럼 보였다.“형, 꼭 버텨내야 해.”소하비와 예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행크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완벽하게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젠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분노에 휩싸인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불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겨우 스무 살 남짓한 젊은 놈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니, 이 치욕은 무릎을 꿇고 사과한 행크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이 빌어먹을 녀석이 감히 날 가지고 놀아?”바젠은 이를 악문 채, 거의 이를 쪼개며 쌍욕을 내뱉었다.“내가 언제 널 가지고 놀았다고 그래? 네가 스스로 착각해서 내가 쇄골수를 사용했다고 착각한 것뿐이지.”진서준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응했다.“그게 무슨 소리지?”행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왕자님, 이 녀석이 방금 왕자님께 먹인 건 쇄골수가 아니라 연골산입니다.”바젠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연골산이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죠.”“네 이놈! 그럼 왜 처음부터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거야?”행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머리카락이 곤두섰고 그 모습은 광기에 휩싸인 사자 같았다.“저, 저도 그저 착각한...”“닥치고 얼른 해독제나 만들어 와!”행크는 바젠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바젠의 실수 덕분에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큰 망신을 당했다.이 일이 고국에 알려진다면 바젠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마지막 약재는 절대 빠뜨리면 안 돼, 알겠어?”진서준이 차분히 한마디 던졌다.그제야 바젠은 진서준이 처방전에 적어둔 마지막 약재를 발견했다.“이게 정말 해독제 재료가 맞아?”바젠은 화난 목소리로 진서준에게 따졌다.“이 독을 만든 건 나야. 해독제를 뭐로 만들어야 할지 내가 모를 것 같아?”진서준은 도발하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흥, 연골산이라면 네 처방전 따위 필요 없어.”바젠은 자신만만하게 진서준이 건넨 처방전을 바닥에 던졌다.진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행크를 쳐다봤다.“봤어? 난 분명 처방전을 줬어. 근데 저 녀석이 안 받은 거야.”“이제 내 두 다리를 치료해 줄 수 있겠지?”행크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샛터 왕자 행크가 명령한다. 당장 내 독을 해독해!”행크는 공포에 질린 채 고함을 질렀지만 바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독약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사람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진서준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맡기지 말라고 했지?”지금 행크의 목숨은 진서준의 손안에 있었다.행크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고 뼈를 찢어내는 듯한 고통에 나지막한 신음을 입 밖으로 흘렸다.“해독제를 줘.”“해독제를 원한다고? 물론 줄 수 있지.”진서준은 팔짱을 끼고 요구를 제시했다.“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해독제를 줄게.”“대한민국 애송이야, 정도껏 해!”바젠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행크는 샛터 왕실 첫째 왕자야. 행크 왕자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넌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그래?”진서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어차피 난 천한 목숨이야, 죽어도 아무렇지 않지. 근데 저 녀석은 달라. 한 나라의 어엿한 왕자가 한낱 평민인 나랑 목숨을 맞바꾸는 게 과연 가치 있을까? 그리고 저 녀석이 죽더라도 날 찾아내서 잡을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 아니겠어?”“네놈!”바젠은 진서준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맨발인 자는 신발 신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행크처럼 고귀한 신분이 진서준과 목숨을 맞바꾸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이득이 되지 않았다.그렇다고 행크가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면 샛터 왕자는 앞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마주하겠는가?“좋아, 내가 졌어. 해독제를 줘.”행크는 이를 악물고 패배를 인정했다.고통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기에 행크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이 정도의 고통만 아니었다면 샛터 왕자인 행크는 절대 결코 천한 신분인 진서준에게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내 말 까먹었어? 살고 싶으면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지?”하지만 진서준은 여전히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진서준, 네놈이 감히 날 우롱해?”행크는 진서준의 태
뼈를 도려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순간 밀려왔다.이 순간, 행크는 누군가가 칼로 자기 뼈를 긁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말 그대로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었다.“왕자님, 무슨 일이십니까?”바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독 효과가 나타났네.”진서준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이게 중독 현상이라고? 설마 그 맑은 물처럼 보이던 게 진짜 독이었어?”바젠은 믿기 힘든 표정으로 빈 잔을 집어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하지만 아무리 맡아도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무색무취의 독약은 절대 흔하지 않아.”바젠은 급히 행크에게 다가가 물었다.“왕자님, 지금 어떤 느낌입니까?”“뼈가 아파요... 누가 내 뼈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행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진서준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근데 저 녀석은 왜 아직도 멀쩡한 겁니까?”“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바젠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독약은 행크가 더 나중에 마셨는데 지금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건 행크였고 진서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했다.이렇게 신기한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설마 아까 진서준의 말대로 자기가 제조한 독약이 진서준에게는 정말 효과가 없는 걸까?“이봐, 넌 대체 언제 내 독약을 해독한 거야?”바젠은 진서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분명 말했지? 네 독약은 나한테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진서준은 냉랭하게 대꾸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 네놈 거짓말하는 거지?”“내가 보기엔 빨리 해독제를 연구해서 저 녀석을 구하는 게 좋겠는데? 안 그러면 저 녀석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거야. 그리고 나중에는 뼈와 살까지 전부 녹아서 고름으로 될 거야.”진서준은 행크를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그 말에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등골이 서늘해졌다.뼈까지 녹아내리는 독이라니, 얼마나 강력한 독약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바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네가 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