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우리 언니는 네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잠이 안 온대.”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허사연의 방으로 들어갔다.방으로 들어온 후에야 진서준은 자기가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이미 깊은 잠에 빠진 허사연의 호흡은 고르고 평온했다.허사연 곁에 잠시 앉아 있다가 진서준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떠났다.“허윤진, 너 또 날 속이었어?”밖으로 나가다가 마침 허윤진을 마주친 진서준은 눈을 부릅뜨며 화난 척했다.하지만 허윤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손으로 눈을 찡그리며 장난스러운 얼굴을 했다.“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넌 우리 언니를 보지 않을 거잖아?”“무슨 소리야? 네가 안 그래도 당연히 볼 거야.”진서준은 못마땅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럼 난? 난 볼 거야?”허윤진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진서준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며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네가 크게 다쳤다면 당연히 너도 보살필 거야.”진서준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허윤진은 눈을 부라렸다.“그래, 계속 그렇게 얼버무려. 더 이상 얼버무리지 못할 때 어떻게 대응하나 보자.”말을 마친 허윤진은 몸을 돌려 매끈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를 흔들며 자기 방으로 향했다.진서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두 여자를 품에 안고 복을 누리는 건 아마 모든 남자의 꿈일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은 여자와의 관계에 너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진서준은 진서라의 독을 치료할 약재를 찾아야 했고 또 아버지 진요한을 구해야 했다.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진서준은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진서준은 소하비의 전화를 받았다.“빨리 오세요.”소하비의 목소리는 큰 일이 일어난 것처럼 급박하게 들렸다.“무슨 일이 일어났죠?”진서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밥도 먹지 않고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빨리 오세요.”그 말을 끝으로 소하비는 전화를 끊었다.진서준은 속도를 최대한으로 내며 병원으로
맨 앞에서 달리는 군용 지프차에는 깃발이 하나 걸려 있었다.그 깃발에는 흑기린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차 행렬은 무척이나 위풍당당했고 지나가는 곳마다 막힘없었고 어떤 차도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모든 사람이 이 깃발이 대한민국의 가장 예리한 검인 흑기린이란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국가를 대표하는 날카로운 검이 왜 갑자기 이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 서울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서정훈 역시 출근한 뒤에야 흑기린이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서울시 최고 책임자로서, 서정훈은 직접 흑기린의 사령관 고인권을 맞이했다.“고 사령관님, 흑기린을 데리고 서울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서정훈의 질문에 고인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서 시장님, 우리 군의 임무는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알겠습니다. 그럼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서정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겁니다.”이번 임무는 샛터에서 온 왕자를 보호하는 일이었다.그 왕자는 늦어도 내일이면 떠날 것이고 왕자가 떠나면 흑기린의 임무도 끝나게 된다.샛터와 대한민국은 오래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번 임무는 샛터 왕자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알겠습니다. 관련 부서에 즉시 통보해 흑기린 임무를 전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서정훈은 즉시 서울을 대표해 입장을 밝혔다.두 사람이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고인권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큰아버지, 서울에 도착하셨나요?”고인권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고우현의 전화를 받았다.“도착했어. 근데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만난 후에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무엇보다 흑기린의 임무가 가장 중요했다.고우현은 큰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알겠어요, 큰아버지. 호텔에서 기다릴게요.”고우현은 달콤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고 서현욱에게 말했다
소하비는 경호원들에게 물러나라고 지시한 후, 한 걸음 앞으로 나가 고인권과 악수했다.“고 사령관님, 이렇게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동생과 제 안전을 걱정해 주신 상부에도 감사드립니다.”소하비는 흑기린의 보호를 거절할 수 없었다.대놓고 거절한다면 대한민국 고위층에게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소하비 왕자님, 다른 일이 없으시면 병원에서 떠나지 마세요. 저는 잠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러 가야 합니다.”고인권의 부탁에 소하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럴게요. 고 사령관님, 편하게 가셔도 됩니다.”고인권은 측근 몇 명만 데리고 병원을 떠났다.고인권이 고우현이 말한 호텔에 도착하자 호텔 입구에서 고우현과 서현욱을 만났다.“큰아버지!”고우현은 고인권을 보자마자 기뻐하며 달려갔다.“우현아, 어젯밤에 서현욱과 함께 호텔에서 잤어?”고인권은 서현욱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고씨 집안의 어른들은 대체로 보수적이기에 결혼하기 전에는 남녀가 함께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서현욱은 아침 일찍 절 찾으러 온 거예요.”고우현은 서둘러 해명했다.“맞아요, 아버님. 저는 어젯밤에 집에 돌아가서 쉬었어요. 사실, 우리 아버지는 제 교육에 아주 엄격하세요.”서현욱도 급히 해명에 나섰다.“방금 네 아버지를 만났어. 대단한 분인 것 같더라.”고인권은 그제야 표정이 부드러워졌다.“너도 아버지를 닮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아버님, 과찬입니다.”고인권의 말에 서현욱은 내심 기뻤다.흑기린에 들어가려면 고인권에게 잘 보여야 했다.“자,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고인권은 고우현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큰아버지, 사실 어제 우리는 약국에 가서 큰아버지 보양식을 사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백년영지를 사서 큰아버지께 드리려고 했죠. 근데 우리가 결제하려고 할 때, 진서준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진서준 씨, 모범수로 조기 석방되었습니다.”높은 담장 밖엔 잡초가 무성하고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진서준은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먼 곳을 바라봤다. 두 눈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감옥에 있는 3년 동안 엄마랑 서라는 잘 있나 모르겠네.”감옥에 갇힌 3년 동안 엄마와 여동생은 단 한 번도 그를 면회하러 오지 않았다. 이에 진서준은 걱정이 스치기 마련이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진서준은 헝겊을 가득 꿰맨 가방에서 편지 한 통 꺼냈다.편지봉투를 열자 안에는 쪽지와 ‘천기각’이라고 새겨진 옥패 한 개가 들어 있었다.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옥패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아마 가장 좋은 화씨 옥으로 조각한 듯싶다.진서준은 옥패를 허리춤에 차고 쪽지를 펼쳐보았는데 단 두 문장만 적혀 있었다.「서준아, 넌 앞으로 천기각의 주인이고 이 옥패가 바로 그 증표야.」「내년 3월 꽃 필 무렵에 옥패를 가지고 신농산에 가면 모든 걸 알게 될 거다.」이건 진서준이 출소 전에 감방 동기 구창욱 어르신께 받은 편지이다.구창욱 어르신은 종일 신경질적이어서 감방에 아무도 그와 얘기 나누려는 자가 없다. 오직 진서준만 별일 없을 때 어르신을 찾아와 얘기를 나눈다.어르신은 매일 자신이 천기각 주인이라고 허풍을 치셨다. 천문학과 지리학을 꿰뚫고 의술도 뛰어나다고 하셨다.진서준은 애초에 어르신이 자신을 속이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어르신을 따라 무술을 연마하고 온갖 기이한 것들을 배우면서 조금씩 어르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3년 동안 진서준은 많은 재능을 습득했다.이젠 그의 두 손으로 사람을 구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감옥에 들어온 이유는 바야흐로 3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3년 전 진서준은 여자 친구 유지수와 함께 갓 졸업하고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어느 한 비즈니스 미팅에서 이지성이라는 바이어가 유지수를 탐내면서 그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고 제안했다.진서준은 한창 젊고 패기가 넘쳐 술병을 번쩍 들더니 이지성의 얼굴에 가차 없이 내리쳤다.결국...
유지수가 이지성에게 시집갔다고?본인은 그녈 위해 감방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정작 유지수는 원수 놈에게 시집갔단 말인가?진서준의 두 손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고 눈가에 살의가 굳었다.조희선은 손으로 가볍게 얼굴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돈을 모으기 위해 그녀는 유지수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만 그녀는 집에 돈이 없다는 핑계로 일전 한 푼 내놓지 않았고 심지어 조희선에게 고액 연봉의 일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그 당시 조희선은 그녀에게 엄청 고마워하기까지 했다!하지만 정작 유지수가 소개한 직장에 와 보니 그녀를 기다리는 건 배불뚝이가 된 몇몇 중년 남성들이었다.조희선은 일이 점점 더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눈치채고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상대가 그녀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절망의 끝자락에 다다른 조희선은 깨진 유리 조각으로 제 얼굴을 그었다.그녀의 얼굴에 난 험상궂은 긴 흉터에 놈들은 분노가 차올라 그녀의 양쪽 다리를 부러뜨리고 길바닥에 내던졌다.진서라가 퇴근하고 마침 그 길을 지나며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조희선은 일찌감치 죽었을 것이다!“이런 짐승만도 못한 것들. 내가 조만간 아작을 내고 말겠어. 죽지 못해 사는 고통이 뭔지 보여줄게!”진서준은 이마에 핏줄이 튀어 오르고 주먹으로 양철 벽에 구멍을 냈다.조희선은 연신 머리를 내저으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준아, 이제 막 나왔는데 또 싸워서 들어가면 어떡해! 일자리 구해서 열심히 일해. 더는 사고 치지 말고.”진서준은 손등에 핏줄이 튀어 오르고 온몸의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처럼 울화가 치밀었다.“그래도 이건 도저히 못 참겠어요!”이때 거친 목소리가 집 밖에서 들려왔다.“할망구, 돈 갚아야지!”순간 조희선의 수척해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극도로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진서준이 미간을 구기고 나가려 하자 조희선이 재빨리 그를 잡아당겼다.“서준아, 너 여기서 꼼짝 마. 엄마가 알아서 할게.”조희선의 애원하는 눈빛에 진서준은 걸음을 멈췄다.그녀는
진서준은 엄마를 보더니 몸에 스친 살의가 일찌감치 사라졌다.“엄마, 내가 감방에서 아주 대단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내게 무술과 의술을 가르쳐줬어요. 엄마 얼굴에 난 상처랑 부러진 다리까지 전부 치료해 드릴게요.”가슴이 움찔거렸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네가 이런 마음을 지닌 건 고맙지만 엄마는 네가 참 걱정이구나! 절대 두 번 다시 사고 치지 말아. 일자리 찾아서 이씨 일가에 진 빚을 다 갚고 우리 열심히 살아보자꾸나.”진서준이 엄마를 다독이며 대답했다.“네, 엄마 말 들을게요. 지금 바로 나가서 일자리 찾아볼게요.”“그래, 일찍 돌아오너라. 이따가 서라한테 전화해서 퇴근하고 올 때 너 먹일 영양제 좀 사 오라고 해야겠어.”조희선은 마음속에 어렴풋이 희망이 생겨났다.집을 나선 진서준은 깊은 눈동자 속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지난날의 피맺힌 원한을 오늘 반드시 백 배로 갚게 해 줄 거야!’...“아빠, 조금만 버텨요. 병원 거의 다 왔어요! 언니, 좀 더 빨리 몰아!”창백한 얼굴에 겨우 숨을 몰아쉬는 아빠를 보며 허윤진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울지 마, 윤진아. 아빠 괜찮아.”허성태가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콰당!전력 질주하던 마이바흐가 갑자기 급정거했고 뒤에 앉은 허성태 부녀가 화들짝 놀랐다.허윤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언니, 왜 갑자기 급정거해?”운전하던 허사연이 안전벨트를 풀고 허둥지둥 차 문을 열었다.“나 사람 쳤어!”“뭐?”허 씨네 세 부녀가 함께 차에서 내렸다.진서준은 안 그래도 화가 나 있었는데 차에 부딪히기까지 하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운전 어떻게 하는 거야? 똑바로 못 해?!”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병원 모시고 가서 검사시켜 드릴까요?”허사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녀의 진심 어린 태도에 진서준은 분노가 많이 가라앉았다.한편 뒤에 서 있는 허윤진은 팔짱을 끼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언니, 이딴 사람에게 왜
두 자매가 아무리 의술을 몰라도 아빠의 혈색으로 보아 확실히 병세를 진정시켜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로 눈앞의 이 미쳐 날뛴 소년이 구해주었다!허성태가 비스듬히 눈을 떴다. 가슴에 꽉 막혔던 그 기운도 말끔히 사라졌다.“아빠, 괜찮으세요?”허윤진이 감격에 겨워하며 물었다.“괜찮아. 아까보다 몸이 훨씬 개운해진 것 같구나.”허성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꼼꼼한 허사연은 아빠 몸에 꽂은 은침을 아직 빼내지 않았다는 걸 바로 발견했다.그녀가 막 빼내려 할 때 진서준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움직이지 말아요! 지금 잠시 아버님 병세를 진정시켜 드렸을 뿐이에요. 침은 아직 빼면 안 돼요.”일곱 개의 은침은 북두칠성 모양으로 허성태의 몸에 꽂혀 있었다.이것은 청하13침 중의 일곱 번째 침, 이름하여 연명침이다!허성태가 두 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감격에 겨운 눈길로 진서준을 쳐다봤다.“살려줘서 고맙네 젊은이!”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따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줘서 아버님을 구해드린 겁니다.”허사연과 허윤진은 진서준이 방금 말한 그 일이 떠올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두 사람 중 한 명만 진서준과 결혼하면 그녀들도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뜻밖에도 둘 다 시집가게 생겼으니 차오르는 수치심은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 무슨 부탁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허성태가 의아한 듯 물었다.그는 방금 혼미 상태에 빠져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아버님을 구해드리면 제게 20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진서준이 말했다.이건 허윤진이 방금 꺼낸 얘기이다.두 자매가 동시에 그와 결혼하는 건 단지 오만한 허윤진을 처벌하기 위한 진서준의 장난일 뿐이다.설사 결혼한다고 해도 허사연처럼 온화하고 착한 언니와 결혼하겠지.진서준이 두 자매가 동시에 그와 결혼해야 한다는 일을 언급하지 않자 그제야 허사연 자매도 본인들이 놀림을 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안도의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허윤진은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우리 두 자매가 설마
“그 파렴치한 년과 결혼을 안 했으니 망정이지!”진서준이 싸늘한 눈길로 말을 내뱉었다.“안 그러면 당신들 같은 집구석에 걸려들었을 거잖아. 생각만 해도 끔찍해! 꿈에 나올까 봐 두렵네.”유건우는 바닥에서 일어났는데 입이 삐뚤어 바보 꼴이 되었다.“감히 날 때려? 매형에게 이를 거야. 너 또 감방에 처넣을 거라고!”그는 화가 나서 두 눈이 벌게졌다.진서준의 눈 밑에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다.“어디 한번 해보시던가! 내가 이미 나왔으니 이지성과의 원한은 반드시 결판을 낼 거야!”말을 마친 진서준은 몸을 홱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이제 막 오션 호텔로 출발하려 할 때 주머니 속의 옛날 폰이 갑자기 울렸다.전화를 받자 허사연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서준 씨, 얼른 병원으로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빠가 위급해요!”“또 위독해지셨어요?”진서준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그는 청하13침 중의 전 일곱 침으로 허성태의 병세를 안정시켰고 은침을 뽑지 않아 생명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지금 위급하다는 건 누군가가 허성태의 은침을 건드렸다는 뜻이다.“지금 어느 병원이죠?”진서준이 물었다.“서울 병원에 있어요. 얼른 와보세요, 얼른요!”전화를 끊은 후 허사연은 병실로 돌아가 낯빛이 창백한 아빠를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허윤진의 예쁘장한 얼굴도 사색이 되었고 두 눈에 두려움으로 휩싸였다.허성태가 이렇게 된 건 오롯이 허윤진이 설쳐댔기 때문이다.병원에 도착한 후 허사연은 화장실에 다녀왔다.그녀가 화장실로 간 틈을 타 허윤진이 아빠의 몸에 꽂은 은침을 보더니 또다시 진서준의 당부와 그 거만한 자태가 떠올라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그녀는 몰래 은침 한 개를 뺐는데 아빠의 상태가 급격히 저하됐다.허윤진은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병원 의사들도 이 상황을 보더니 전부 속수무책이었다.허사연 자매가 착잡해하고 있을 때 진서준이 병실로 들어왔다.“서준 씨!”허사연이 재빨리 앞으로 마중 가며 진서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차가운 섬섬옥수에 따
소하비는 경호원들에게 물러나라고 지시한 후, 한 걸음 앞으로 나가 고인권과 악수했다.“고 사령관님, 이렇게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동생과 제 안전을 걱정해 주신 상부에도 감사드립니다.”소하비는 흑기린의 보호를 거절할 수 없었다.대놓고 거절한다면 대한민국 고위층에게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소하비 왕자님, 다른 일이 없으시면 병원에서 떠나지 마세요. 저는 잠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러 가야 합니다.”고인권의 부탁에 소하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럴게요. 고 사령관님, 편하게 가셔도 됩니다.”고인권은 측근 몇 명만 데리고 병원을 떠났다.고인권이 고우현이 말한 호텔에 도착하자 호텔 입구에서 고우현과 서현욱을 만났다.“큰아버지!”고우현은 고인권을 보자마자 기뻐하며 달려갔다.“우현아, 어젯밤에 서현욱과 함께 호텔에서 잤어?”고인권은 서현욱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고씨 집안의 어른들은 대체로 보수적이기에 결혼하기 전에는 남녀가 함께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서현욱은 아침 일찍 절 찾으러 온 거예요.”고우현은 서둘러 해명했다.“맞아요, 아버님. 저는 어젯밤에 집에 돌아가서 쉬었어요. 사실, 우리 아버지는 제 교육에 아주 엄격하세요.”서현욱도 급히 해명에 나섰다.“방금 네 아버지를 만났어. 대단한 분인 것 같더라.”고인권은 그제야 표정이 부드러워졌다.“너도 아버지를 닮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아버님, 과찬입니다.”고인권의 말에 서현욱은 내심 기뻤다.흑기린에 들어가려면 고인권에게 잘 보여야 했다.“자,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고인권은 고우현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큰아버지, 사실 어제 우리는 약국에 가서 큰아버지 보양식을 사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백년영지를 사서 큰아버지께 드리려고 했죠. 근데 우리가 결제하려고 할 때, 진서준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맨 앞에서 달리는 군용 지프차에는 깃발이 하나 걸려 있었다.그 깃발에는 흑기린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차 행렬은 무척이나 위풍당당했고 지나가는 곳마다 막힘없었고 어떤 차도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모든 사람이 이 깃발이 대한민국의 가장 예리한 검인 흑기린이란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국가를 대표하는 날카로운 검이 왜 갑자기 이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 서울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서정훈 역시 출근한 뒤에야 흑기린이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서울시 최고 책임자로서, 서정훈은 직접 흑기린의 사령관 고인권을 맞이했다.“고 사령관님, 흑기린을 데리고 서울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서정훈의 질문에 고인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서 시장님, 우리 군의 임무는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알겠습니다. 그럼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서정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겁니다.”이번 임무는 샛터에서 온 왕자를 보호하는 일이었다.그 왕자는 늦어도 내일이면 떠날 것이고 왕자가 떠나면 흑기린의 임무도 끝나게 된다.샛터와 대한민국은 오래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번 임무는 샛터 왕자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알겠습니다. 관련 부서에 즉시 통보해 흑기린 임무를 전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서정훈은 즉시 서울을 대표해 입장을 밝혔다.두 사람이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고인권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큰아버지, 서울에 도착하셨나요?”고인권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고우현의 전화를 받았다.“도착했어. 근데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만난 후에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무엇보다 흑기린의 임무가 가장 중요했다.고우현은 큰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알겠어요, 큰아버지. 호텔에서 기다릴게요.”고우현은 달콤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고 서현욱에게 말했다
“아니, 우리 언니는 네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잠이 안 온대.”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허사연의 방으로 들어갔다.방으로 들어온 후에야 진서준은 자기가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이미 깊은 잠에 빠진 허사연의 호흡은 고르고 평온했다.허사연 곁에 잠시 앉아 있다가 진서준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떠났다.“허윤진, 너 또 날 속이었어?”밖으로 나가다가 마침 허윤진을 마주친 진서준은 눈을 부릅뜨며 화난 척했다.하지만 허윤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손으로 눈을 찡그리며 장난스러운 얼굴을 했다.“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넌 우리 언니를 보지 않을 거잖아?”“무슨 소리야? 네가 안 그래도 당연히 볼 거야.”진서준은 못마땅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럼 난? 난 볼 거야?”허윤진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진서준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며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네가 크게 다쳤다면 당연히 너도 보살필 거야.”진서준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허윤진은 눈을 부라렸다.“그래, 계속 그렇게 얼버무려. 더 이상 얼버무리지 못할 때 어떻게 대응하나 보자.”말을 마친 허윤진은 몸을 돌려 매끈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를 흔들며 자기 방으로 향했다.진서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두 여자를 품에 안고 복을 누리는 건 아마 모든 남자의 꿈일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은 여자와의 관계에 너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진서준은 진서라의 독을 치료할 약재를 찾아야 했고 또 아버지 진요한을 구해야 했다.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진서준은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진서준은 소하비의 전화를 받았다.“빨리 오세요.”소하비의 목소리는 큰 일이 일어난 것처럼 급박하게 들렸다.“무슨 일이 일어났죠?”진서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밥도 먹지 않고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빨리 오세요.”그 말을 끝으로 소하비는 전화를 끊었다.진서준은 속도를 최대한으로 내며 병원으로
“우현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게 전화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전화 너머에서 한 중년 남자의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위엄을 뿜어냈고 옆에 있던 서현욱의 얼굴이 순간 움찔했다.“큰아버지, 어떤 남자가 절 괴롭혔어요.”고우현은 이내 울먹이며 억울함을 토로했다.“큰아버지, 제발 저를 위해 정의를 구현해 주세요.”고인권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우현아, 큰아버지는 군인이지 지하 조직 킬러가 아니야.”흑기린 사령관은 법률과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고인권은 군인이지 절대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큰아버지, 저는 큰아버지가 군인인 거 알아요. 근데 그 사람은 단지 저를 괴롭힌 것뿐만 아니라 큰아버지가 소속된 흑기린도 모욕했어요. 그 사람은 흑기린이 우습다면서 무시했어요. 큰아버지가 흑기린 대원을 데리고 오면 흑기린을 무너뜨릴 자신이 있다면 엄청 나댔어요.”어차피 고인권이 알 수 없었기에 고우현은 일부러 사실을 왜곡했다.고우현이 임의로 거짓말을 꾸며도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그 말을 들은 고인권의 미간 사이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우현아, 너 날 속은 건 아니겠지?”“큰아버지, 제가 그럴 사람이에요? 제가 왜 큰아버지를 속이겠어요?”고우현이 갑자기 서현욱을 꺼내 들었다.“그때 서현욱이 제 옆에 있었어요. 못 믿으시면 서현욱에게 물어보세요.”말을 마치고 고우현은 전화를 서현욱에게 넘겼다.“아버님, 안녕하세요.”서현욱은 존경스럽고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사실 서현욱은 자기 아버지 서정훈에게도 이렇게 진지한 말투로 말한 적이 없었다.“현욱아, 우리 조카가 말한 게 사실이야?”고인권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너도 내 성격을 잘 알 텐데, 날 속이지 마.”“아버님, 우현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괴롭힌 사람은 그냥 우현을 조롱한 것뿐만 아니라 흑기린도 대놓고 모욕했습니다. 제 실력으로 그 사람들과 상대할 수 없어서 좀 안타까웠어요. 상대할 수만 있었다면 그
흑기린 사령관이 아무리 강해도 이런 신분의 인물에게 대놓고 공격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병원에 돌아온 진서준은 즉시 약재를 제조하기 시작했다.소하비는 예린이 걱정스러워 곧바로 병실로 향했다.예린은 병실을 옮겼고 이제 방 안에 고약한 악취는 없었다.침대 옆에 다가선 소하비는 예린이 누워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현재 예린은 얼굴에 혈기가 돌았고 호흡이 고른 상태로 누워 있었고 이전보다 훨씬 정신이 맑아 보였다.“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여동생이 무사한 걸 확인한 소하비는 마음속에 고여 있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소하비가 미처 기뻐할 틈도 없이, 휴대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전화를 건 상대를 확인한 소하비의 얼굴이 굳어졌고 썩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잠시 고민한 후, 소하비는 전화를 받았다.“소하비야, 예린을 어디로 데려간 거야?”전화 너머에서 한 남자의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버지, 예린을 대한민국으로 데려와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소하비는 이를 악물고 힘겹게 진실을 털어놨다.전화 너머의 사람은 바로 소하비의 아버지인 샛터 국왕이었다.아버지 앞에서는 소하비도 감히 불경하게 대할 수 없었다.“무슨 미친 짓이야? 베컨 닥터를 초청하지 않았어? 근데 왜 예린을 데려간 거야?”“베컨 닥터는 예린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진서준만이 예린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린의 상태는 이제 안정되었습니다. 진서준이 만든 약을 먹으면 병이 완치될 겁니다.”소하비가 즉시 설명했다.“어처구니없네. 어떻게 대한민국 주술을 믿을 수 있어? 지금 당장 예린을 데려와. 그렇지 않으면 네 형이 친위대와 함께 널 잡아 올 거야.”지금은 예린 치료의 중요한 시점이라 소하비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아버지, 저는 예린이 완치될 때까지 절대 데려가지 않습니다.”이건 소하비가 처음으로 샛터 국왕에게 반항한 순간이었다.“너 이 자식, 사춘기에 들어섰어? 내일 저녁, 형이 친위대를 데리고 갈 거야. 네가 돌아오면 난 네게 조용한 곳에서
흑기린의 명성은 널리 퍼져 있었고 심지어 일반인들도 그 이름을 알 정도였다.흑기린은 대한민국의 가장 예리한 검이었다.비록 백 명의 병력밖에 없지만 흑기린은 예전부터 여러 차례 대단한 공적을 세웠다.군부에서 전신전 외에는 흑기린과 비교할 만한 부대가 없었다.그리고 이 영지를 사려는 여자가 바로 흑기린 사령관의 조카라니, 그 신분의 고귀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난 저 녀석이 혈령지를 순순히 여자에게 내줄 거라고 확신해.”“당연하지, 누가 감히 흑기린 사령관의 체면을 보지 않겠어?”“작은 도시 서울에서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나타날 줄은 몰랐네.”주변 사람들은 진서준을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겨우 운 좋게 얻은 영지인데 이 여자의 특별한 신분 때문에 돌려줘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고우현은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으며 턱을 높게 치켜들고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물건은 내놓아. 넌 그만 가 봐.”고우현은 눈앞의 이 청년이 분명 영지를 내놓고 쭈뼛거리며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진서준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너 미친 건 아니야?”고우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미친 건 너겠지. 방금 서현욱이 한 말을 못 들었어? 난 흑기린 사령관 조카란 말이야!”고우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자기 신분을 강조했다.진서준이 자기 신분을 듣고도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한편, 서현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서현욱은 진서준과 고우현 사이에 큰 갈등이 발생하기를 기대했다.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면 고우현의 손을 빌려 진서준을 제대로 혼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서정훈은 겉보기엔 서울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지만 흑기린 사령관 앞에서는 한낱 평범한 사람이었다.“네가 그 사람 딸이라고 해도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아.”진서준이 차갑게 말하자 고우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이 요동쳤다.“넌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해? 귀먹지 않은 이상 내 신분을 제대로 들었을 거야. 그런데도 이런 태도
“근데 넌 이게 쓰레기인 걸 번연히 알면서도 돈 주고 사? 미련하기 짝이 없구나!”약재를 사러 온 손님들도 진서준이 구제 불능이라 여겼다.“이 녀석 정말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5억이나 주고 이런 쓰레기를 사? 대체 무슨 의도일까? 그 돈으로 여자라도 꼬시면 얼마나 좋아?”“돈만 많고 머리가 텅텅 빈 바보 도련님 같아. 돈이 많으니까 멍청한 짓도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닐까?”사람들이 수군대며 조롱하는데도 진서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영지 앞으로 다가가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띠었다.“다들 이렇게 거대한 영지가 왜 말라 죽었을까 궁금하지 않아?”진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뭐라고?”다들 진서준의 말에 의아해하며 멈칫했다.진서준의 말대로 누구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 듯했다.가게 주인은 순간 큰 손해를 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왜 말라 죽었죠?”소하비도 무척 궁금했다.진서준은 영지에 손가락을 살짝 댔다.콰직!얼굴 크기만 한 영지가 순식간에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씨X, 쓰지 않을 거면서 왜 굳이 날 사게 한 거야?”소하비는 저도 몰래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욕설을 터뜨렸다.5억이나 주고 산 물건이 이렇게 한순간에 깨져버리다니, 정신 상태가 이상하지 않고서야 이런 황당한 일을 벌일 수 없었다.서현욱은 그 모습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진서준, 너 진짜 또라이구나.”고우현도 서현욱을 흘겨보며 물었다.“이런 또라이를 넌 또 어떻게 알고 지낸 거야?”다들 지금 이 순간 진서준이 정신 상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상자 속에서 손을 뻗어 영지를 한 번 더 찾았다.그리고 이내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지만 완벽한 혈색을 띤 영지를 꺼내 들었다.이 영지는 정교하고 아담한 크기였고 얼핏 봐도 일반적인 영지가 아닌 것 같았다.“이건 혈령지잖아요?”샛터 왕자답게 눈썰미가 있는 소하비의 눈이 번쩍였다.예전에 한 부자가 소하비에게 이 혈령지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 소하비는
서현욱의 아버지를 부른다고 하자 서현욱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이 일이 서정훈에게 알려지면 흑기린에 입단하는 건 고사하고 서정훈에게 맞아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14억 원을 손해 보는 것이 눈앞에 다가오자 서현욱은 소하비에게 시선을 돌렸다.“선생님, 방금 이 영지를 원하셨죠?”서현욱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에 보인 교만하고 거만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아까는 원했지만 지금은 필요 없어.”소하비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난 돈이 넘쳐나긴 해도 억 단위를 들이며 이런 나무 덩어리를 사는 바보는 아니야.”소하비가 가장 부족하지 않은 게 돈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바보는 아니었다.이 영지는 어떻게 봐도 그냥 쓸모없는 물건이었다.이걸 산다고 해도 그냥 돈 낭비일 뿐이었다.“오해입니다. 이건 나무가 아니라 진짜 영지예요. 믿기지 않으면 냄새라도 맡아보세요. 제가 필요하긴 하지만 선생님이 정 원하신다면 제가 후하게 팔아드릴게요. 10억이면 어때요?”서현욱은 흥정하면서도 속이 찌릿찌릿 아팠다.운 좋게 팔아도 4억을 손해 보게 될 터였고 팔지 못한다면 14억 원을 그대로 날리게 될 것이다.어느 선택이 더 현명한지 서현욱도 잘 알고 있었다.“안 사, 그냥 공짜로 줘도 안 받을 거야.”소하비는 돌아서서 진서준과 함께 떠날 준비를 했다.그때,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 영지, 내가 살게.”“뭐라고?”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놀라서 일제히 물었다.쓰레기가 분명한데 굳이 사겠다니, 진서준이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건지 서정훈 시장 아들에게 대놓고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짓이라면 그 대가가 너무 컸다.이건 14만도 아닌 14억이었다.대다수 사람이 평생 일해도 벌 수 없는 거액이었다.“확실한 거야? 장난치는 건 아니지?”서현욱은 혹여나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자기 귀를 의심했다.“물론 확실해.”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서둘러 서현욱에게 팔지 말아야 했다.서현욱은 즉시 지갑에 있는 모든 신용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몇 분 후, 신용카드 다섯 장을 전부 긁은 후, 1억 4천만을 겨우 모을 수 있었다.서현욱은 그제야 시름 놓고 진서준을 도발하기 시작했다.“진서준, 난 이내 흑기린에 입단할 거야. 그때가 되면 허사연이 날 다시 평가하게 될 거고 넌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거야.”진서준은 서현욱의 말이 너무 이상했다.소정태가 흑기린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흑기린은 대한민국 8대 특전대 중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특전대였다.“흑기린은 이제 쓰레기도 막 받아들이게 됐어?”진서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너야말로 쓰레기야.”서현욱은 즉시 반박했다.“내가 흑기린에서 새롭게 태어나면 예전의 모든 원한을 다 갚아줄 거야.”서현욱은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으름장을 놓았다.아무래도 예전에 진서준과 있었던 불쾌한 일을 여전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하지만 진서준은 서현욱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난 선생님과 진서준 사이에 무슨 모순이 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백년 영지는 내게 꼭 필요한 약재입니다.”소하비가 둘의 대황에 끼어들었다.“내가 200억을 낼 게요. 내게 양보하세요.”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작 14억짜리 물건을 200억에 사겠다니, 이 사람의 부유한 정도가 진심으로 궁금해질 정도였다.서현욱은 그 말에 멈칫하더니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난 그따위 돈이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진서준과 친구가 아니었다면 팔았을지도 몰라요. 근데 당신이 진서준과 친분이 있다면 2조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서현욱은 상자를 열었다.“자, 14억짜리 영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해 봐.”서현욱은 일부러 진서준과 소하비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서현욱은 상자에서 얼굴 크기만 한 영지를 껴안고 내왔다.영지는 크지만 뜻밖에도 너무 마른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