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연은 하루 휴가를 냈고 주말이 다가왔다.그녀는 3일 동안 계속 방에 틀어박혀 외출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잠자는 것 외에는 노래를 듣거나 아무 생각 없이 베란다 바깥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을 비웠다.그때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발신 번호를 보니 동료 여다혜에게서 온 전화였다.“여보세요. 다혜 씨.”남서연은 핸즈프리를 켜놓고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른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서연아, 영화 보러 가자.”여다혜가 긴장해서 말했지만 남서연은 흥미가 돋지 않았다.“싫어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9시면 끝나. 나와. 내가 멋진 남자 소개해줄게.”남서연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이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또 다혜 씨 큰 오빠요?”“맞아. 너 계속 연애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22살인데 아직 연애도 못 해보고. 우리 큰 오빠 만나봐.”“우리 어울리지 않아요.”남서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다혜 씨 큰오빠 아주 잘생긴 건 알지만 우린 안 맞아요.”가문 계급이 어울리지 않으면 그녀의 가족도 혼사를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여다혜는 그녀의 가정 형편은 모르고 항상 자신의 큰 오빠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했다.“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여다혜가 반문하자 남서연의 머릿속에는 백건이 다음 달에 결혼한다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그녀와 백건은 평생 불가능할 운명인데, 굳이 자신을 괴롭히면서 불가능한 남자에게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남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주소 보내줘요.”그러자 여다혜는 흥분해서 말했다.“좋아. 바로 보내줄 테니까 꼭 나와야 해.”남서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30분 후, 타임스퀘어 4층 영화관 입구.남서연은 멀리서부터 여다혜가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와 함께 서서 반갑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남서연은 방
남서연은 당황해서 황급히 설명했다. “아니에요. 동료 오빠예요. 방금 알았어요.”여민찬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안녕하세요.”유승아는 피식 웃더니 화제를 돌려 물었다.“영화 어느 타임이야?”“7시, 2번 홀이에요.”여민찬이 대답하자 유승아가 아쉬워했다.“아쉽네요. 우리는 6시 45분, 6번 홀인데.”남서연은 웃음을 짜내어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그러게요. 아쉽네요.”그때 여다혜가 팝콘이랑 음료수를 들고 와서 여민찬에게 건네주고 유승아를 보았다.유승아는 그들이 확실히 세 사람인 걸 확인하고 급한 척 자리를 피했다.“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건이가 걱정할 거야. 나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유승아는 돌아서서 떠났다.백건과 유승아가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고?남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있으면서 마음이 차갑고 답답하고 괴로웠다.좋은 기분은 사라지고 잔잔한 감상이 밀려왔다.그녀는 슬픈 동시에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느꼈다.백건이 약혼녀와 같이 데이트하고 영화 보는 건 정상이 아닌가?외부인인 그녀가 왜 질투를 하고 슬퍼할까?그녀는 전혀 자격이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서연아, 가자. 10분 후면 시작이니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자.”여민찬이 물건을 들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유승아는 영화관에 들어서자 고모 유미에게 콜라를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 밖에서 남서연을 만났어요. 동료와 그 동료 오빠랑 셋이서 2번 홀에서 영화를 본대요.”유미는 열심히 영화를 보며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느릿느릿 말했다.“이럴 땐 백건에게 전화라도 해야 했던 거 아니야?”“왜요?”유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바보야, 전에 네가 말했잖아. 백건이 남서연을 좋아한다고. 두 사람이 비록 친척이긴 하지만 혈연관계가 있는 건 아니야. 그럼 서연이가 너의 가장 큰 연적이라고. 모르겠어?”유승아는 유미의 뜻을 알아듣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돌리며 영화
육나리에게 지금 당장 일을 핑계로 여다혜를 불러내라고 했다.15분 후.여다혜는 부랴부랴 영화관을 나서며 투덜댔다.“젠장. 주말인데 웬 PPT를 급하게 만들라고 지랄이야. 내일 써야 한다면서 사람을들들 볶아? 그럼 미리 얘기라도 해주든가! 지금이 몇 시야? 젠장...”여다혜는 폭언을 퍼부으며 빠른 걸음으로 유승아의 곁을 지나쳐 영화관을 빠져나갔다.곧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두 시간 후, 남서연은 여민찬과 나란히 영화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내가 데려다줄게요.”여민찬이 예의 바르게 입을 열자 남서연이 엷게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그건 위험하죠.”“정말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광장 한복판에서 멈추었다. 심장 박자가 엇나가며 긴장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차량을 바라보았다.고급 차량의 운전석에는 백건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남서연과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백건의 안색은 극도로 음산했으며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며 온몸에는 음울하고 무서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남서연은 백건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몰랐다.그녀는 너무 당황하고 불안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난처하고 긴장하고 수치스러우며 손바닥에 땀이 났다. 감히 그와 마주 볼 용기가 없어 서서히 시선을 내리뜨렸다.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태연하게 백건과 유승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유승아가 안에서 나와 남서연의 옆을 지나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건이가 벌써 차를 몰고 왔네. 나 먼저 갈게 서연아.”남서연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유승아에게 손을 흔들었다.“잘 가요. 언니.”“안녕.”말을 마친 그녀는 백건의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백건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네가 왜 앉아?”유승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고모가 일이 있어서 차를 몰고 갔어. 가는 길에 나 좀 태워다 줘.”기분이 최악인 백건은 차가운 말투로 명령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택시 기사는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외쳤다.남서연은 사색에서 깨어나 황급히 눈물을 닦고 현금을 꺼내어 지불했다.“감사합니다.”남서연은 결제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내렸다.문이 닫히자 택시가 천천히 떠났다.남서연은 고개를 들어 불빛이 환한 별장을 올려다보며 침울한 숨을 내쉬었고 고개를 떨구고 걸어갔다.그녀가 막 철문에 접근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서 쫓아오더니 번개처럼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어느새 옆의 벽에 눌렸다.“악!”남서연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두운 그림자에 눌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앞에 확대된 얼굴을 보았다. 어렴풋이 백건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발버둥 쳤다.“음!”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남자는 더욱 그녀를 짓눌러 숨도 쉴 수 없게 했고 그녀의 두 손목을 잡고 머리 위로 눌렀다. 그녀의 몸은 남자의 건장하고 튼튼한 가슴으로 촘촘히 짓눌려 있었다.남자의 키스는 마치 폭풍우가 습격하듯 사나웠다. 그녀의 입술과 혀를 아플 정도로 빨아들여 그녀는 산소 부족을 느꼈다. 당장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포악한 분위기와 광야적인 기세를 풍겼다.남서연은 사나워진 남자의 키스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마치 백건에게 잡아 먹힐 듯 했고 여태껏 느낀 적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녀는 키스로 인해 산소가 부족하고, 입술이 부풀어 올라 아프고, 몸은 눌려 숨이 막히고, 등에는 땀이 나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결국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흘러 그녀의 하얀 뺨 위로 흘러내렸다.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었고 목구멍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남자는 눈물의 짠맛을 맛보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떠났다.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그녀의 이마를 맞대고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서연이 부풀어 오른 입술을 가볍게
남서연은 당황했다.이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남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도 흘러내리지 않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백건은 그녀의 억울하고 멍한 표정을 보니 화가 났다.“내 말 알아들었어?”남서연은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서연이 한마디 던졌다.“알아들었어요. 나 책임질 필요 없어요. 나도 당신 귀찮게 매달리지 않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가슴팍이 아팠다.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숙여 심장 깊숙한 곳의 통증을 완화했다.순간, 그는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제 네가 나를 책임져야겠어.”남서연은 화들짝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며 물었다.“내가... 당신을 책임져요?”백건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맞아.”남서연은 굳어버렸고 머리가 흐리멍덩했다.분명 먼저 잠자리를 원한 건 이 남자였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았더라고 피동적인 입장이었고 과정은 너무 아팠다. 전혀 즐기지 못했으니 아무리 봐도 손해 본 쪽은 남서연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더러 책임을 지라니?무엇보다 이 남자에게는 약혼녀도 있는데 어떻게 책임지라는 걸까?설마 백건은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 관계를 유지하고 그녀더러 빛을 못 보는 내연녀가 되라는 걸까?그건 때려죽여도 원하지 않았다.당황한 남서연이 황급히 거절했다.“싫어요.”백건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맑고 예쁜 여자의 눈을 주시하며 눈에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찼으며 약간의 노기를 띠고 있었다.“남서연, 네가 나랑 잠자리에 든 순간, 네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남서연은 한 기류의 냉기가 발바닥에서 이마에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완전히 당황했다.백건은 애초부터 그녀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계획이었을까?탈락한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고 해외 행사에도 데리고 가서 같은 방에 묵었다.알고 보니, 이는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기 위함이었고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육체관계를 유지하는 숨겨진 연인으로 삼으려는 의
남서연은 깜짝 놀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를 원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남자의 미색과 육체에 대한 탐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바칠 정도일까?백건이 그녀를 원한다니.그녀를 내연녀로 전락시키면 그녀의 집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 이 남자는 두렵지 않을까?이 남자는 양심이라곤 없을까?남서연은 제대로 화가 났다.“이거 놔!”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남서연은 아픈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그런 생각은 단념하세요. 승아 언니와 결혼해서 절대 언니를 저버리지 말고 잘 살아요. 다시는 그딴 생각 말고.”말을 마친 남서연은 화가 나서 자리를 뜨더니 옆의 큰 철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그녀는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백건을 욕했다.‘백건, 이 개자식.’‘네게 여자친구만 없었어도, 약혼녀만 없었어도, 아내만 없었어도 난 승낙했을 거야.평생 너와 육체적 관계만 유지하며 명분이 서지 않는 비밀 연인이 되더라도 난 기꺼이 원했을 거야.’‘하지만 승아 언니는 너와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고 다음 달이면 결혼하잖아? 근데 지금 와서 나를 건드려?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백씨 가문 별장.백건이 피곤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서자 도우미가 마중 나왔다.“큰 도련님 오셨어요?”백건은 침울한 기색이 역력하여 손에 들고 있던 양복 외투를 도우미의 손에 내동댕이치고 넥타이를 풀며 걸었다.거실을 지나갈 때 안에서 정안의 소리가 들렸다.“동생 돌아왔어?”정안이 외치자 백건은 소파에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그의 어머니와 누나였다.“저 돌아왔어요.”백건은 담담하게 인사하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어디 갔다 와?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정안이 묻자 서윤아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원망으로 가득 찼다. “수백억을 손해 봐도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는 녀석이야. 오직 그 여자만 네 동생을 저 몰골로 만들 수 있어.”“유승아를 말하는 거예요?”서윤아가 격분해서 말했다.“만약 승아였으
서윤아는 화를 꾹 참고 또박또박 말했다.“넌 오랫동안 국경에서 일해서 건이가 얼마나 변태적인지 몰라. 서연이는 건이를 삼촌이라고 불러. 두 사람은 친척이야. 근데 건이는 어렸을 때부터 서연이를 몰래 좋아했어. 서연이의 고무줄, 물컵, 인형, 그리고 많은 잡다한 물건들을 훔치고 심지어 서연이가 버린 필통까지 주워 담으며 쓰던 볼펜 한 자루도 놓치지 않았어. 남씨 가문에 갈 때마다 서연이가 쓰던 물건들을 몰래 가지고 와서 숨겼어. 어느 집 남자가 일기를 쓰는데 그 안에 온통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뿐이겠어? 서연의 물건을 훔칠 뿐만 아니라 숨어서 몰래 서연이를 훔쳐보고 미행하고, 그림책은 전부 서연이의 초상화뿐이야. 내가 정말... 방법이 없어서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강요했더니 승아와 둘이 짜고 나를 속였어. 건이를 외국으로 보낸 것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정안은 화가 치밀어 말을 끊었다.“엄마, 왜 건이 일기를 훔쳐봤어요?”“다 건이를 위해서지.”서윤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정안은 아픈 머리를 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참 숨 막히는 모성애네요.”“내가 만약 일기를 훔쳐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 자식 마음이 저렇게 깊은 줄 알았겠어? 내가 만약 그 변태적인 행동을 미리 막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몰라.”정안은 어이없기 짝이 없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엄마, 건이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내성적이고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요. 한 여자 아이를 짝사랑하면 그 여자 물건을 훔치는 건 정상이죠. 미행한 건 어쩌면 보호하고 있었고 더 많이 보고 싶었을 수도 있죠. 서연이가 목욕하는 걸 훔쳐본 것도 아니고 서연이 속옷을 훔친 것도 아닌데 왜 엄마는 그걸 변태라고 해요?”서윤아는 항상 보수적인 사상이 있어 정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서연이가 자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 촌수가 어떤지 자기가 몰라? 이것도 변태가 아니면 꼭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패륜을 저질러야 변태라고 할 수 있는 거니?”정안은 그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한 번 또 한 번.백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쓸쓸한 눈동자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안의 소리로 바뀔 때까지.“건아. 나야.”정안은 비록 집에 있는 시간이 적지만 백건의 마음속에 누나는 따뜻하고 친절한 존재였다. 어머니에게서 얻을 수 없는 모든 정을 누나가 줬다.그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걸어가서 그림을 한 방향으로 돌려 다시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정안은 어두운 안색으로 눈 밑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백건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무슨 일이에요?”백건이 묻자 정안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나 네 방에 들어가 좀 앉아도 돼?”백건은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들어와요.”정안이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방은 조명이 밝았지만 단조롭고 썰렁했다.커다란 침대 하나, 한 줄로 늘어선 캐비닛, 소파 의자 하나, 마치 그의 성격처럼 매우 차가운 색조였다.그가 남서연을 짝사랑하는 것도 당연했다.남서연은 아주 밝고 따뜻한 여자로 모든 악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정안은 소파에 가서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거꾸로 바닥에 놓인 그림에 시선이 꽂혔다.그녀는 빙긋 웃으며 옆자리를 토닥였다.“건아, 너도 앉아.”백건은 그녀 옆에 앉아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정안은 백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젊고, 준수하고, 부자이고, 남서연보다 다섯 살 많았다. 성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정직하고 착한 남자였고, 끈기와 책임감이 있어 어머니의 마귀 같은 가훈을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버텼다.남서연이 그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백건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다음 달 네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나와 하준 오빠 돌아왔어.”백건은 얼굴이 굳어지며 차갑게 말했다.“결혼식은 없어요.”“엄마는 이미 모든 지인에게 청첩장을 돌렸어.”백건은 잠자코 있자니 눈 밑의 냉기가 더욱 깊어졌다.“내 생각에 엄마는
이른 아침,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커튼 사이로 방에 비쳤다.따뜻한 큰 침대에서 남서연은 적나라한 백건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더니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깜박이며 정신을 차렸다.백건도 그녀의 움직임에 깨어났고 흐릿한 눈동자를 늘어뜨리고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보니 기분이 꽤 좋았다.그는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감고 속삭였다.“굿모닝.”백건은 참지 못하고 얼굴로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뺨을 문지르며 매력적인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깼어?”“네.”백건은 몸을 살짝 뒤척여 그녀의 몸 위에 올라갔다. 그녀의 목에 머리를 묻고 저도 모르게 뽀뽀하고 비볐다.간지러움을 느낀 남서연은 목을 움츠리고 두 손으로 그의 튼튼한 가슴을 밀며 수줍게 말했다. “오빠. 아침부터 이러지 마요.”이 오빠라는 말이 그를 흥분하게 했다그와 남서연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예전에는 남서연을 안고 잠을 자고 그녀와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하는 일은 꿈에서밖에 일어나지 않았다.비록 지금 그 꿈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설렘과 소중한 긴장감이 생겼다.그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다.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하고 그녀를 사랑할 시간이 부족하고 잠자리도 부족했다.그의 몸도 마찬가지였다.그렇게 탐욕스럽고, 그렇게 절실하고, 그렇게 신경 쓰고 있었다.방금 잠에서 깨어났는데 또 그녀의 몸을 원하고 있었다.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통제 불능이 되는 것을 보고 싶고, 그녀의 수줍은 신음소리를 듣고 싶고, 그녀를 행복한 구름 위에서 흔들리게 하고 싶었다.백건은 그녀의 몸을 따라 내려가서 키스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남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주체할 수 없는 감촉을 은근히 참았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이불을 꼭 잡아당기며 그의 서비스를 즐겼다.그녀는 백건이 자신의 몸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항상 그녀를 만지고, 키스하고
“말도 안 돼, 너희들...”누군가 믿기지 않는 듯 입을 열자 백정우가 엄숙하게 말을 끊었다.“친척 관계가 좀 있지만 서연이가 우리를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거 못 들었어?”다들 장난인 줄 알았지만 남서연 혼자 속으로 감동했다.백정우가 그녀의 신분을 인정했으니 적어도 요 며칠 동안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다만 서윤아만 여전히 원래의 생각을 고수하고 있었다.그녀를 좋아하면서도 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아 했다.저녁.하루 종일 힘들었던 남서연은 집에 돌아온 후 백정우와 서윤아와 인사를 하고는 방에 돌아갔다.그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지친 어깨와 목을 문지르고 잠자리에 들려고 침대에 누웠다.그때 핸드폰 벨이 두 번 울려 확인하니 백건의 메시지였다.[문 열어. 보고 싶어.]남서연은 일어나 앉아 답장했다.[시간이 늦었어요.]그녀도 백건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여기는 그의 부모님 댁이었다.그들의 방을 나눈 것은 서윤아의 의도가 분명했다. 남서연은 서윤아를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일주일 동안 넌 내 부모님과 시간을 보냈어. 주말에도 널 못 봤는데 그럼 난 어떡해?]그리고 울상을 짓는 이모티콘까지 보냈다.남서연은 그가 안쓰러워 하는 수 없이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백건은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가 한 손으로 남서연을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 문을 잠갔다.남서연이 고개를 들어 말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과 혀를 절박하고 열정적으로 탐하며 그녀를 안고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갑작스러운 진한 키스에 남서연은 좀 견디기 어려웠다.남자의 몸은 더없이 강직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고 침대로 갔다.둘 다 침대에 떨어졌을 때 남서연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치고 가까스로 얼굴을 돌린 후 그의 입술에서 빠져나왔다.남자의 키스가 아래로 내려갔다.남서연은 숨을 몰아쉬며 힘없이 부탁했다.“오빠. 이러지 말아요. 부모
백정우가 너털웃음을 지었다.“난 네 엄마가 춤추는 걸 처음 봤는데 잘 추네. 아주 잘 춰.”칭찬을 받은 서윤아는 조금 쑥스러웠다.남서연은 그녀를 끌고 카메라 앞으로 와서 몇 가지 간단한 스텝을 가르쳐 주었다.서윤아는 저도 모르게 또 따라 배우고 있었다.부끄러워 웃으면서도 계속 춤을 추고 있었다.백정우는 아내가 늙은 펭귄처럼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거실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순간 유승아는 자신이 이 집에 전혀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같았다.그녀는 남서연이 모두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리고 왜 다들 그녀를 예뻐하는지 마침내 알게 되었다.그녀의 이런 가식 없는 성격에, 자라지 않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니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이런 장면을 본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방에 돌아간 유승아는 유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모, 나와 백건은 정말 가망이 없는 것 같아요. 나 포기할래요.]이윽고 유미가 메시지를 보내왔다.[벌써 포기하는 건 절대 허락하지 않아. 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이길지 모르는 거야.]유승아는 또 고민했다.거실.남서연은 춤을 추다 지쳤고 서윤아와 백정우도 마음껏 놀고 방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서재를 바라보았다.백건의 서재에 들어가 볼까 말까 마음속으로 고민했다.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어쨌든 이곳은 백건의 부모님 댁이고 어른들이 계시니 규칙을 잘 지켜야 했다.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방으로 돌아갔다.이튿날 아침.백건은 방에서 나와 남서연의 방문 앞에 가서 두드렸다.안에서 응답이 없자 문을 열고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그녀가 이미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조금 허탈했다.방에서 나올 때 유승아를 만났다.“서연이는 네 부모님과 함께 아침 운동하러 갔어.”유승아가 엷게 웃으며 말하자 백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넌 왜 안 갔어?”유승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난 네 부모님께 잘 보일 필
백건이 웃자 남서연도 은근히 웃음을 참았다.경제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도 웃는 두 사람을 보고 경악했다.그들을 더욱 놀라게 한 건 백건이었다.언제나 차분하고 우아하며 성격이 냉담하고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세 사람은 눈이 멀뚱멀뚱해서 바라보았다.오늘 본 백건의 웃음은 지난 일 년 치보다 많았다.백건이 가볍게 웃으며 나지막이 물었다.“또 다른 얘기도 있어?”남서연은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술을 오므려 생각하더니 또 말했다.“거북이는 토끼와 달리기를 하고 싶었어요. 근데 토끼는 시큰둥했어요. 네 조상이 우리를 한 번 이긴 건 허점을 노린 것이니 절대 망상하지 말라고. 거북이가 계속 졸랐지만 토끼가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근데 거북이가 2만 원을 건네며 이건 출연료라고 하니 토끼가 활짝 웃으며 말했어요. 거북이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뛰어드릴게요.”이야기는 별로 웃기지 않았지만 남서연이 진지하게 그를 기쁘게 하려는 모습에 백건은 즐거웠다.남서연이 그를 걱정하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의 기분을 신경 쓰고 있었다.이런 배려가 가장 달콤하고 가장 좋은 이야기였다.남서연이 말한 이야기가 따분해도 그는 매우 기뻤다.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했고 다른 세 사람과 강한 분리 감을 형성했다.저녁 식사 후.남서연은 방에 돌아가 씻고 백건은 서재로 가서 일했다.유승아는 참다못해 서재 문을 두드렸다.백건이 담담하게 말했다.“들어와.”유승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백건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계속 일에 몰두했다.유승아가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서연이 아주 재밌나 봐. 같이 있으면 그렇게 즐거워?”“응.”백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덤덤하게 대꾸했다.유승아는 그의 책상 앞에 앉아 얼굴빛을 흐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이런 재밌는 신선감이 지나가면 두 사람 뭐로 미래를 살아갈 건데?”백건은 서류를 휙 덮고 차가운 눈을 가늘게 뜨고 유승아를 노려보며 냉담한
남서연은 백건의 품에서 나와 팔짱을 끼고 거실로 당당히 걸어가며 말했다.“승아 언니가 왔어요. 우리 가서 앉아요.”유승아는 백건의 웃음을 보고 또 그와 남서연의 진한 포옹을 보면서 자신은 백건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느꼈다.이런 모습의 백건을 본 적이 없었다.남서연을 보는 그의 눈빛은 물처럼 부드럽고 말하는 말투도 말이 안 될 정도로 나른했다.놀란 건 유승아뿐만 아니라 백건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서윤아는 남서연이 백건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자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퇴근했니?”백건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덤덤하게 답했다.“네.”두 사람은 서로 손깍지를 끼고 유승아와 서윤아의 맞은편에 앉았다.백정우가 궁금해하며 물었다.“오늘 행사가 밤 9시에 끝나는 거 아니었어?”“일정은 끝났고 리셉션에 참석하지 않고 돌아왔어요.”백정우는 감탄하며 말했다.“역시 결혼을 해야 해. 집에 그리운 사람이 있으니 일찍 집에 돌아올 줄도 알고 말이야.”유승아의 안색이 일순간 어두워졌다.서윤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일부러 말했다.“평소 이렇게 일찍 집에 오는 걸 자주 못 봤는데 오늘은 승아가 와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돌아온 거지?”“저는 승아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이 한마디에 유승아는 무색하기 짝이 없었다.도우미가 저녁 준비를 마치자 집사가 와서 그들을 불렀다.남서연이 백건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하자 서윤아가 일어나서 물었다.“저녁 먹을 시간인데 두 사람 어디 가?”남서연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오빠 데리고 손 씻으러 가려고요 어머님.”서윤아는 허탈하게 웃었다.백정우는 서윤아와 나란히 식탁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손 씻는 것도 둘이 가다니. 우리 건이가 서연이 때문에 잘못 길들어지겠어.”“그러니까요. 정말 점점 유치해져요.”“우리 건이가 무뚝뚝한 애잖아. 서연이는 워낙 활기차서 서연이가 집에 있으니 집안이 시끌벅적해진 것 같네.”“애가 워낙 활발하고 잘 웃잖아요.”“건이도 서연이와 함께 있으니 더 많이 웃는 것 같아.”서윤아는 갑자기
서윤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냥 우영이 따라 불러.”남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싫어요. 난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를 거예요!”“아버님, 어머님!”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웃음은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다.백정우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 찬란하게 웃으며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아이고, 착해라.”서윤아는 웃음이 나오지 않아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네가 우리와 함께 지내겠다고 해서 아주 기뻤어. 네 방을 준비했으니까 같이 가보자.”남서연은 서윤아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고마워요. 어머님.”서윤아는 어쩔 수 없이 탄식했다. 속으로는 언짢았지만 남서연의 달콤한 목소리와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고 거절하기 어려웠다.남서연은 서윤아를 따라 올라가서 방을 보았다.그제야 그녀와 백건이 같은 방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서윤아는 그녀의 방을 백건에서 가장 먼 곳에 배치했다.어쩐지, 백건은 어젯밤에 세 번이나 했는데도 피곤해하지 않더라니.알고 보니 여기에 와서는 따로 자야 했다.거실 아래, 백정우가 백건의 곁으로 가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아빠.”백건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백정우가 담담하게 웃었다.“서연이는 정말 귀여운 애야. 같이 있으면 분명 재미있을 거야. 아빠는 네 마음을 알아. 하지만 네 엄마는 네 미래를 고려해서 너와 서연이는 서로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어.”백건이 되물었다.“서연이는 어떤 세상에 살고, 난 또 어떤 세상에 사는데요?”백정우가 진지하게 답했다.“서연의 세상은 태양처럼 밝고 웃음과 활기가 가득하지만 네 세상은 비즈니스계에서 전쟁을 해야 하잖아. 네게는 서연이처럼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너를 정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이 필요한 거야.”백건은 침울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서재로 갔다.백정우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그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저 어렸을 때부터 잘 웃지 않는 마음이 복잡한 남자가 천진난만한
백건의 얼굴빛이 돌변했다.“그건 절대 안 돼.”남우영과 남서연은 어리둥절하여 근심 가득한 표정의 백건을 바라보았다.남서연이 물었다.“왜 안 돼요?”“난 그분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어. 같이 살게 되면 너만 더 상처받고 힘들어질 거야. 난 반대야.”남서연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두 분은 계속 내게 잘해주셨어요.”“서연아, 지금 네 신분이 달라졌잖아. 예전과는 다른 상황이야.”“나 시도해보고 싶어요. 네? 내게 기회를 주면 안 돼요? 정말 나를 받아들이게 할 자신 있단 말이에요.”남우영이 옆에서 부추겼다.“난 너 지지해 서연아.”백건은 차가운 눈으로 남우영을 쏘아보았다.“너 오늘 한가해?”남우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한가하지는 않지만 멀리 계신 엄마가 서연이의 결혼을 걱정하셔서 내게 꼭 서연이를 보호해 달라고 당부하셨어.”“이 일은 절대 안 돼.”백건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남우영이 남서연에게 눈빛을 보냈다.남서연은 그 눈빛을 알아채고 황급히 백건의 옆에 앉아 그의 팔을 잡고는 애교를 부렸다.“오빠, 나 한 번만 시도해볼게요. 혹시 알아요? 내가 해낼지?”마음이 조금 약해진 백건은 말투가 부드러워졌다.“서연아, 내가 우리 부모님을 잘 알아.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어. 너만 더 힘들어져.”남서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불쾌한 듯 볼을 부풀렸다.남우영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연아, 네 필살기를 보여줘.”남서연은 어렴풋이 남우영의 힌트를 듣고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납작한 입술로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촉촉한 큰 눈을 깜박이며 억울한 듯 울먹였다.“오빠, 나 사랑하지 않죠?”백건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억울하게 울먹이는 남서연의 모습을 처음 보았는데 반짝이는 수정 같은 눈물이 눈에 밟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백건은 그녀의 울먹이는 작은 얼굴을 끌어안고 당황할 정도로 긴장했다. “서연아, 아니야... 나 너 사랑해. 난...”“아니에요. 오빠는 나 사랑하지 않아
“나 당신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진심으로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요.”남서연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백건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잡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그의 진한 키스는 매우 뜨거웠다.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바짝 끌어당겼는데 그녀를 마음속 깊이 새겨넣고 싶어 했다.그들은 부엌에서 키스를 나눴다.거실에서 남우영이 들어와 사방을 기웃거렸다.그는 주방 문으로 가서 휙 스쳐 지나갔는데 어색하고 난처한 듯 즉시 몸을 돌려 나가며 큰소리로 외쳤다.“삼촌!”남서연은 소리를 듣고 백건을 밀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지고 숨을 헐떡였다.“우영 오빠 목소리에요.”아직 키스에 취한 백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신경 쓰지 마.”“안 돼요!”남서연은 두 손으로 백건의 가슴팍을 힘껏 밀었고 백건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남서연이 먼저 주방을 나갔다.거실에 도착한 남서연은 남우영의 의미심장한 표정과 놀리는 듯한 눈빛을 보고 왠지 모르게 수줍고 당황했다.“오빠 무슨 일이에요?”남서연은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남우영은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답했다.“네가 잘 지내는지 보려고 왔지.”남서연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나 잘 지내요.”“그럼 됐어. 우리 엄마의 뜻을 받들어 내가 너와 삼촌이 무사하게 결혼할 수 있도록 도울 거야.”남서연이 의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남우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가 나더러 내일 너를 데리고 우리 외할머니 만나러 가서 결혼에 대해 상의하라고 하셨어.”남서연이 긴장해서 돌아보자 백건이 음식을 들고나와 식탁에 올려놓았다. 남우영의 말을 들은 그는 걸어와 덤덤하게 말했다.“아직은 때가 아니야.”남우영이 불쾌하게 말했다.“삼촌, 이건 피할 수 없는 거야. 서연이 언젠가는 우리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만나야지.”백건은 남서연이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는 걸 원치 않았다.“만날 필요 없는 사람은 안 만나면 그만이야.”
남서연은 덤덤하게 말했다.“네. 하지만 당신만큼 중요하지 않아요.”“그 자식이 나랑 헤어지라고 했지?”남서연은 침묵했다.그러자 백건은 괴로워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팔에 힘주어 그녀를 더 꽉 안았다. 눈을 감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서연아,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절대 나와 헤어질 생각하지 마. 내가 너를 잡은 이상 절대 놓지 않을 거야.”남서연은 마음이 괴로웠고 그의 마음속 깊이 숨겨둔 짝사랑이 너무 안쓰러웠다.그녀도 마찬가지로 백건을 짝사랑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너무 순수하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 외에는 그 어떤 노력도 대가도 치르지 않았고 심지어 넘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남서연은 손을 뻗어 백건의 목을 걸고 발끝을 세워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비밀 하나 말해줄까요?”백건은 궁금한 마음에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다가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나 사실 10년 넘게 짝사랑한 남자가 있어요.”남서연이 속삭이자 백건은 몸이 뻣뻣해져서 멍해졌다.그는 안색이 돌변해 남서연의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아당겨 목에서 빼고 거리를 두면서 덤덤하게 말했다.“듣고 싶지 않아.”남서연은 갑자기 차가워진 그의 안색에 놀랐다.백건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겨 식탁을 돌아보며 물었다.“아직 저녁 안 먹었어?”“아직이요.”남서연은 마음이 좀 아팠다. 방금 그 좋은 분위기에서 백건에게 고백하고 싶었는데 지금 그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였다.“앞으론 나 기다리지 마. 나 제때 밥 챙겨 먹지 않아서 저녁은 안 먹는 날이 더 많아.”남서연은 억울해하며 말했다.“아.”백건은 양복 재킷을 벗고 식탁으로 향했다.“내가 음식 데울 테니까 같이 먹자.”백건은 음식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고 남서연이 천천히 따라갔다.그는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었고 남서연은 주방 입구에 서서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두 손으로 연단을 받치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기다리는 그의 온몸에는 은은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남서연은 용기를 내어 걸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