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은 아버지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으며 부모의 품을 떠나 화제를 돌렸다. “아빠, 엄마, 어떻게 나왔어요?”“하준이가 우리를 구했어. 남하준을 알아?”정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방금 멈춘 눈물이 또 왈칵 쏟아졌다.남하준은 그녀의 남편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딸, 너 하준이와 결혼했어?”서윤아가 묻자 정안이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백정우와 서윤아는 기쁨에 겨워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눈물을 글썽였다.“어쩐지 우리를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르더라니!”“참 잘했어. 하준이와 결혼하다니!”서윤아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정안은 여전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밖을 내다보고 또 옆에 서 있는 부하들을 보고 다시 부모님을 보며 긴장해서 물었다.“근데 하준 오빠는 안 돌아왔어요?”정안은 순간 부모님만 왔을까 봐 당황했다.“우리더러 먼저 헬기 타고 오라고 하고 하준이는 아직 섬에 있어.”서윤아가 말하자 정안이 의문스러워 물었다.“섬에요?”그러자 백정우가 대답했다.“그래.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계속 외딴 섬에 갇혀 있었어. 하준이 병사들이 아주 많이 갔으니까 하준이 걱정 마.”“하지만 하준이가 좀 다쳤어.”백정우가 탄식하더니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남하준의 부상 소식을 들은 정안은 걱정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급히 도우미를 불러 부모님과 어린 동생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쉬게 했다.백정우는 여전히 어머니를 찾아다녔다.도우미에게 물었지만 도우미가 대답하지 않자 백정우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백진에게 거듭 캐물어 어머니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50대 중반의 중년 남자는 방에서 눈물범벅이 된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이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었지만 백정우와 서윤아는 배후의 인물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백진이 백인호라고 알려줬을 때 그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백인호는 지난 몇 년간 그들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고 또 백인호를 친 형제처
남태준의 말에 남하준은 속으로 걱정되었지만 짐짓 덤덤한 척 웃었다.“하하. 완자 성격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빨리 알려줘. 집에서 너 돌아오기만 기다리면서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되겠어?”“응. 이따가 전화해야지.”남태준이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남하준은 그의 침울한 표정을 보며 물었다.“형, 눈도 안 보이면서 전화해서 안부만 물으면 되지 왜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어?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남태준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자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확실히 너에게 부탁이 있긴 해.”“뭔데. 말해봐.”“만약 백인호를 잡으면 죽이지 말아줄래?”남하준은 움찔 놀랐고 얼굴에는 의혹스러움이 가득했다.“형,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백인호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생포해서 잠시만 붙잡아두면 안 될까? 나 뇌수술 받고 싶어.”남하준이 경악하더니 엄숙하게 말했다.“그건 절대 안 돼. 아주 위험하고 악랄한 인물이야. 형 머리를 맡기는 건 목숨을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라고.”남태준이 엷게 웃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만약 네 머리를 맡기면 인호는 주저하지 않고 너 죽이겠지만 나는 해치지 않을 거야.”“만약 형을 해친다면?”“그럼 운명을 받아들여야지.”남하준은 그의 모험을 허락할 수 없었다.백인호는 보기 드문 뇌 외과 의사이고 조예가 깊지만 그런 인물은 너무 위험했다.그에게 수술을 청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노릇이고 또 그의 조건을 들어줘야 할 것이다.남하준이 극구 반대했다.“형, 그건 절대 안 돼. 형 일상생활이 불편한 건 알겠어. 근데 그건 도우미 구하면 사는 데 크게 문제 될 것 없잖아. 만약 백인호에게 머리를 맡긴다면 그 인간 손에 형 목숨을 쥐여주는 거나 마찬가지야.”남태준이 흔들림 없이 말했다.“하준아, 형이 언제 너한테 부탁한 적 있어? 나에게 눈은 아주 중요해. 이렇게 도박할 만큼.”“형은 지금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거야. 그리고 워낙 수술 난이도가 높아서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어.”“알아.”“
남하준은 남태준의 마음을 이해했다.만약 남하준이었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번쯤 모험했을 거다.남태준은 깊은 한숨 소리만 들렸고 한참 후 물었다.“하준아, 너 도와줄 수 있지?”“최선을 다해 볼게.남하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난 그래도 형이 다시 잘 생각해봤으면 해. 가뜩이나 위험한 수술을 백인호에게 맡기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 그때 가서 백인호가 제기한 무리한 요구를 우리가 만족시킬 수 없다면 형 수술 해주지 않을 거야.”“넌 목숨만 살려둬.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남하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고마워 하준아.”“우리 사이에 고맙다니.”“네가 인호를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많지 않거든.”남하준이 고개를 돌려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지우는 계속 맞선 보고 있어. 좋은 남자 만나면 바로 결혼할 거야.”남하준은 그제야 반응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지우 씨가 계속 맞선을 본다는 건 형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는 거잖아? 형이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남태준은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지 않았다.“형은 지우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잖아. 근데 형 스타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내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남자야?”남태준이 되묻자 남하준이 멋쩍게 웃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감정에는 외모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그럼 넌 지우가 예쁘다고 생각해?”“완자보단 안 예쁘지.”“하필 비교해도 참. 네 눈에 완자보다 예쁜 여자가 세상에 존재하긴 해?”남하준도 동의하며 웃을 뿐 말하지 않았다.“지우가 예뻐, 아니면 유미가 예뻐?”남하준은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비교했다.“그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난 지우 씨가 더 예쁜 것 같고 유미는 더 성숙한 분위기지.”“유미도 이미 충분히 예쁜데. 그러니까 지우가 유미보다 예쁘다, 그거지?”“아마도? 난 유미가 어디가 예쁜지 잘 모르겠어.”유미
정안이 다가가 남태준의 손을 부축했다.“오빠 내가 데려다줄게요.”남하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말하기 미안했다.허공에 손을 내놓고 입을 벌렸다가 마지못해 내려놓았다.남태준은 정안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서 나왔고 운전기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완자야. 돌아가. 하준이 기다려.”정안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저 사람 나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내가 류 비서 협박해서 여기 있는 거 알아내지 않았다면 아마 나 계속 속였을 거예요.”“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준이가 왜 너 안 보고 싶어 해? 아마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할걸? 다만 하준이가 다친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뿐이야.”정안이 입술을 오므리고 남태준을 차에 태웠다.차에 올라탄 남태준이 급히 설명했다.“완자야, 유미 얘기는 내가 먼저 꺼냈어. 하준이 탓하지 말고 질투하지도 마.”역시 형제애가 남달랐다.“알겠어요. 잘 가요.”정안은 말을 마치고 문을 닫았고 차량이 떠난 후, 그녀는 뒤돌아 병원으로 돌아왔다.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오자마자 남하준이 긴 복도에 서서 난간을 잡고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긴장한 기색으로 그녀의 모습을 찾고 있는 것을 보았다.“왜 나왔어요?”정안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남하준은 소리를 듣고 정안을 뒤돌아보더니 다친 다리를 돌볼 겨를도 없이 절룩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마음이 급해진 정안은 달려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남하준은 허리를 굽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몸을 꼭 껴안고, 뜨겁고 가쁜 숨을 그녀의 피부에 내쉬었다.그는 심장이 출렁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완아... 완아...”정안은 원래 마음속에 약간의 원한이 있었지만 남자의 품에서 그의 온도를 느끼는 순간, 흥분과 기쁨 외에 다른 감정은 전부 사라졌다.눈이 걷잡을 수 없이 흠뻑 젖었다.지금 그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
정안은 남하준이 안도록 내버려 두었고 눈을 감고 그에게 기댄 채 마음은 여전히 설렜다.그의 체온, 그의 호흡, 그의 심장 박동이 이렇게도 행복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정안이 행복한 포옹에 빠져 있을 때 남하준이 그녀의 턱을 살짝 걷어 올렸다.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입술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촉촉한 남자의 입술에 의해 뒤덮였고 이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그녀는 미간을 젖히고 남하준의 가슴에 두 손을 바짝 대고 그를 밀어내려고 몇 번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남하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허리 뒤로 꺾어 그녀의 손을 고정한 후, 오랫동안 갈망한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음음.”정안이 고개를 가로젓자 남하준이 아쉬운 듯 입술을 떼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정안은 키스로 인해 촉촉해진 입술을 오므리고 수줍어하며 말했다.“여긴 병원이에요. 간호사들이 자주 드나들 텐데. 이러지 말아요.”남하준이 피식 웃더니 눈동자가 더욱 뜨거워져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허스키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잠깐 키스하는 건 괜찮아.”“방금 급해 하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 누군데?”정안이 일부러 비꼬자 남하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입술에 빨리 키스했다.“다르단 말이야.”“비슷해요.”남하준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그녀의 머리를 고정하고 뜨거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노려보며 속삭였다.“나 키스하고 싶어. 아주 잠깐만. 응?”정안은 얼굴을 홱 돌리고 그의 입술을 피했다.“싫어요. 여긴 불편하니까 집에 돌아가서 얘기해요.”남하준이 손을 뻗어 침대 커튼을 쳤다.“이러면 되지?”“안 돼요.”“1분만.”“싫어요.”“30초만.”“싫어요.”“그럼 2초.”“싫!어!”“완아...”남하준은 무기력하게 말했고 가라앉은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역력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정안은 슬쩍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으며 그가 서운하고 갈망하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그를 놀리고 싶지 않았다.어쩌면 남태준의 말처럼
남하준은 좁은 싱글 침대를 보고 곧바로 동의했다.“그래. 내가 밑에서 잘 테니까 넌 내 가슴 위에서 자.”정안이 수줍게 웃었다.“난 보호자 침대에서 자면 돼요.”하지만 남하준은 단호한 태도였다.“내 위에서 자.”“오빠 다리 다쳤잖아요. 상처 눌리면 어떡해요.”“괜찮아. 내 가슴 위에서 자.”“싫어요.”“어차피 넌 오늘 여기서 나랑 잘 거야.”정안이 뜨끔 하더니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나 집에 돌아갈게요.”남하준이 긴 한숨을 내쉬며 정안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너 일부러 그러지?”“뭘요?”“내가 기뻐하는 꼴을 못 보겠지?”정안은 피식 웃더니 그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오빠 착하죠. 내일 아침에 다시 보러 올게요.”남하준은 그녀의 허리를 덥석 껴안아 품에 안은 채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나랑 여기 있어.”“나...”정안이 말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유미의 목소리가 들렸다.“하준아...”순간 남하준과 정안은 동시에 얼굴빛이 가라앉았고 남하준이 침대 커튼을 젖히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정안은 차가운 얼굴로 남하준의 품에서 일어났다.유미는 과일 바구니와 꽃다발을 손에 든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다친 곳은 괜찮아?”남하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지막이 화를 냈다.“누가 알려줬어?”“뭐?”유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자 남하준이 다시 물었다.“나 여기 있다는 거 누가 알려줬냐고?”“백완자에게도 누가 알려줬는지 따져 묻지 그래?”유미가 정안을 가리키며 묻자 남하준이 냉소를 지었다.“네가 내 아내랑 같아?”유미의 출현으로 정안은 좋던 기분이 와르르 무너졌고 괴롭고 짜증이 났다.하지만 유미는 여전히 당당한 태도였다.“너 지금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건 기밀에 속한다는 거 알아. 근데 왜 백완자에게는 말해주고 나한텐 말해주면 안 되는 건데? 난 그저 네가 걱정돼서 와봤을 뿐이야
정안은 남하준이 그와 유미의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 덤덤하게 말했다.“나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 테니까 두 사람 얘기해요.”말을 마친 그녀가 손을 빼자 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약간 엄숙해지며 명령조로 말했다.“백완자. 여기 앉아.”정안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병실을 나왔다.남하준은 정안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짜증이 몰려왔고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짚고 심호흡했다.그는 정안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유미를 그렇게 신경 쓰더니 이제 와서 양보하려는 걸까?정안이 병실을 나온 뒤 유미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걱정하며 물었다.“다리 많이 다쳤어?”남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이불을 끌어다가 다리를 덮었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 그리고 당장 나가.”유미는 심호흡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남하준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준아. 네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 상관없어. 그냥 네 옆에서 일하며 네 얼굴 보고 너 보살펴줄 수만 있다면 난 만족해.”남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나 905 공정 후방 지원부 주임으로 옮겼어.”남하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유미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905 공정은 군전 그룹 무기 부서와 함께 새로 설립된 신형 전투기 연구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할 예정이었다.즉, 최근 개발 중인 신형 전투기는 905 공정팀과 합작 개발해야 하며 앞으로 장기간 왕래해야 한다.더욱이 그녀가 후방 지원부 주임이라면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무엇보다 정안은 출산 휴가가 끝나는 대로 이 신형 전투기 개발팀에 합류하여 수석 엔지니어로 일해야 한다.남하준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냉소를 지었다.사람은 군전 그룹에서 떠났지만, 그리 멀리 이동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승진까지 했고 앞으로 여전히 그들 부부와 자주 왕래하게 될 것이다.남하준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고 머릿속은 정안이 방금
남하준은 정안의 어깨를 잡고 살며시 밀어내며 깊고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나가지 말라니까 왜 내 말 안 들었어?”“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아서 자리를 피했죠.”정안이 해명하자 남하준이 감탄하며 말했다.“너무 무서운 편집증 환자야. 나한테 무례를 범했어.”정안은 긴장된 얼굴로 그의 팔을 잡고 올려다보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유미가 오빠에게 무례를 범했어요?”“정신적 무례도 속하나?”“속하죠!”“그러니까, 네가 방금 나 혼자 두고 나간 결과가 아주 심각해. 알겠어?”“미안해요.”정안은 손을 뻗어 남자의 볼을 감싸 안으며 미안한 눈빛을 했다.“진짜 미안해요. 유미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무례를 범했다고 느낀 거예요?”“내가 자기랑 인연을 끊어내지 못하는 걸 네가 알까 봐 널 내보냈대.”정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이런 미친년! 정신이 나갔나?”남하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정안의 통제 불능인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욕설을 하는 모습도 아주 귀여웠다.“웃음이 나와요?”정안은 이를 갈며 물었다.“정신 번쩍 차리게 한 대 때려 주지 그랬어요?”남하준은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여자를 때리면 남하준이 아니지.”정안이 분노해서 말했다.“내가 방금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내가 뺨을 후려갈겼어야 했는데. 자기 신분을 똑똑히 알려줘야죠!”남하준은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돌아서서 병실로 향했다.“근데 유미는 왜 인연을 끊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정안이 궁금해서 묻자 남하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905 공정 후방 지원부 주임으로 전근됐어.”정안의 발걸음이 멈추고 몸이 굳어버리자 남하준도 따라 멈춰서 그녀의 표정을 곁눈질했다.그의 예상대로 정안은 안색이 아주 어둡고 기분이 언짢았다.“무슨 생각해?”남하준이 묻자 정안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부축해 병상으로 향하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냥 유미는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