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은 남하준이 그와 유미의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 덤덤하게 말했다.“나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 테니까 두 사람 얘기해요.”말을 마친 그녀가 손을 빼자 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약간 엄숙해지며 명령조로 말했다.“백완자. 여기 앉아.”정안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병실을 나왔다.남하준은 정안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짜증이 몰려왔고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짚고 심호흡했다.그는 정안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유미를 그렇게 신경 쓰더니 이제 와서 양보하려는 걸까?정안이 병실을 나온 뒤 유미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걱정하며 물었다.“다리 많이 다쳤어?”남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이불을 끌어다가 다리를 덮었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 그리고 당장 나가.”유미는 심호흡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남하준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준아. 네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 상관없어. 그냥 네 옆에서 일하며 네 얼굴 보고 너 보살펴줄 수만 있다면 난 만족해.”남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나 905 공정 후방 지원부 주임으로 옮겼어.”남하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유미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905 공정은 군전 그룹 무기 부서와 함께 새로 설립된 신형 전투기 연구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할 예정이었다.즉, 최근 개발 중인 신형 전투기는 905 공정팀과 합작 개발해야 하며 앞으로 장기간 왕래해야 한다.더욱이 그녀가 후방 지원부 주임이라면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무엇보다 정안은 출산 휴가가 끝나는 대로 이 신형 전투기 개발팀에 합류하여 수석 엔지니어로 일해야 한다.남하준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냉소를 지었다.사람은 군전 그룹에서 떠났지만, 그리 멀리 이동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승진까지 했고 앞으로 여전히 그들 부부와 자주 왕래하게 될 것이다.남하준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고 머릿속은 정안이 방금
남하준은 정안의 어깨를 잡고 살며시 밀어내며 깊고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나가지 말라니까 왜 내 말 안 들었어?”“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아서 자리를 피했죠.”정안이 해명하자 남하준이 감탄하며 말했다.“너무 무서운 편집증 환자야. 나한테 무례를 범했어.”정안은 긴장된 얼굴로 그의 팔을 잡고 올려다보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유미가 오빠에게 무례를 범했어요?”“정신적 무례도 속하나?”“속하죠!”“그러니까, 네가 방금 나 혼자 두고 나간 결과가 아주 심각해. 알겠어?”“미안해요.”정안은 손을 뻗어 남자의 볼을 감싸 안으며 미안한 눈빛을 했다.“진짜 미안해요. 유미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무례를 범했다고 느낀 거예요?”“내가 자기랑 인연을 끊어내지 못하는 걸 네가 알까 봐 널 내보냈대.”정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이런 미친년! 정신이 나갔나?”남하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정안의 통제 불능인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욕설을 하는 모습도 아주 귀여웠다.“웃음이 나와요?”정안은 이를 갈며 물었다.“정신 번쩍 차리게 한 대 때려 주지 그랬어요?”남하준은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여자를 때리면 남하준이 아니지.”정안이 분노해서 말했다.“내가 방금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내가 뺨을 후려갈겼어야 했는데. 자기 신분을 똑똑히 알려줘야죠!”남하준은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돌아서서 병실로 향했다.“근데 유미는 왜 인연을 끊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정안이 궁금해서 묻자 남하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905 공정 후방 지원부 주임으로 전근됐어.”정안의 발걸음이 멈추고 몸이 굳어버리자 남하준도 따라 멈춰서 그녀의 표정을 곁눈질했다.그의 예상대로 정안은 안색이 아주 어둡고 기분이 언짢았다.“무슨 생각해?”남하준이 묻자 정안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부축해 병상으로 향하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냥 유미는
정안은 남하준의 청혼에 응하지 않고 잠든 척 대답하지 않았다.그와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분간 할 수 없는 거였다.백인호가 체포되어 할머니의 복수가 이루어진 후에야 안심하고 시집갈 수 있을 것 같았다.지금 백인호가 체포되지 않았으니 하루도 마음 편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의사는 남하준의 상처에 감염 위험이 없다는 검사를 한 후에야 그를 퇴원시키는 데 동의했다.백씨 저택으로 돌아온 남하준은 지체 없이 아들의 방으로 가서 한 달 만에 만난 아들을 안고 이리저리 쳐다보았다.“역시. 집을 오래 비워두면 안 돼. 한 달 안 본 사이에 부쩍 커버렸어.”남하준이 감회에 젖어 말했다.정안은 옆에 앉아 남하준이 아이를 안는 자세를 보면서 아이가 그의 손에서 아주 작아 보이고 안정감이 느껴졌다.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 부드러운 눈매, 그리고 이 남자의 잘생긴 얼굴.정안은 아무리 봐도 이 그림이 정말 아름다웠다.아이도 남하준을 향해 씩 웃자 남하준이 참지 못하고 웃었다.“아빠 알아보겠어?”그때 문이 열리면서 세 살배기 백건이 작은 머리를 내밀고 들어왔다. 정안이 그를 발견하고 손을 내밀었다.“건아, 누나한테 와 봐.”남하준도 따라 백건을 뒤돌아보았다.백건은 정안을 한 번 보고 또 남하준을 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나 조카 안고 싶어요.”“조카?”남하준이 의혹스러워 묻자 정안이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건이 조카요.”남하준이 그에게 손짓하자 백건은 종종걸음으로 걸어갔고 애꿎은 눈빛은 겁을 먹은 듯했다.남하준은 몸을 굽혀 아들을 백건의 손에 쥐여주고 안는 법을 가르쳐주고는 인내심 있게 말했다.“건아, 조카 이름은 남우영이야. 우영이라고 불러도 되고 아기라고 불러도 돼.”“아기야.”백건은 손에 든 아기에게 반갑게 키스하고는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누나, 형부, 아기 너무 귀엽게 생겼네요. 저한테 주시면 안 돼요?”남하준과 정안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어린아이의 생각이 너무 귀여웠다.
“데려갈래요. 데려가서 분유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고 옷도 입혀주고 같이 잘 거예요.”“아기는 장난감이 아니야.”“하지만 장난감보다 재밌잖아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꾸꾸 소리도 내고.”그때 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건을 바라보며 이빨이 없는 입을 헤벌리며 말했다.“꾸...”“하하, 이것 봐요. 아기가 또 소리를 냈어요.”백건은 흥분에 차서 말하더니 아기를 안고 돌아섰다.“아가야, 삼촌이랑 방에 가서 놀자.”남하준은 급히 일어나 두 손으로 두 아이를 감싸고 다친 다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따라 밖으로 나갔다.정안은 어쩔 수 없이 긴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따라나섰다.거실에서 백정우와 서윤아는 남하준이 백건과 아기를 안고 안정적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급히 다가가 받았다.“하준아, 너 다리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둘이나 안으면 어떡해?”서윤아가 백건을 받고 백정우가 아이를 받았다.“이 정도 부상은 끄떡없어요.”남하준은 다들 너무 긴장한 것 같았다.“엄마, 나 아기 키울래요. 아기 키우고 싶어요.”백건이 서윤아의 품에서 투정 부리자 서윤아가 달랬다.“그래. 네가 키워.”“하지만 누나가 안 준단 말이에요.”백건은 계단을 내려오는 정안을 가리키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댔다.“누나 치사해!”서윤아가 웃으며 말했다.“누나가 아기 좀 더 키워서 걸을 수 있으면 당연히 너한테 줄 거야.”백건이 활짝 웃었다.“정말?”“정말이지!”백건이 정안을 보며 물었다.“누나, 정말이에요?”정안은 어이가 없었다.“그래. 그때 가서 줄게. 너 후회하지 말아.”“절대 후회 안 하죠. 난 아기 계속 키워줄 거예요. 돈 많이 벌어서 아기에게 장난감도 가득 사줄 거고.”정안은 당장 휴대전화를 꺼내 카메라를 켜고 백건을 비추었다.“동생아, 카메라에 대고 다시 한번 말해볼래? 누나가 증거를 남겨야겠어.”백정우와 남하준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두 사람이 장난치는 모습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백건은 카메
남하준은 입술을 오므리고 웃었다.집사가 선물을 받자 유동진은 남하준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괜찮은 거야?”“괜찮아.”남하준은 유동진에게 여전히 상냥한 얼굴이었다.유미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저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백정우와 서윤아는 남하준의 친구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들어가 앉아요.”유동진도 급하게 인사했다.“아저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그래요. 어서 들어가 앉아요.”소파에 앉아 두 아이를 돌보던 정안은 들어온 사람을 보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몹시 짜증 났다.‘어젯밤 병원에서 하준 오빠 본 거로 부족해서 오늘은 자기 오빠까지 대동해 여기까지 온 거야?’유동진이 다가가 정안에게 인사했다.“완자야. 오랜만이야.”“오랜만이에요.”정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손을 뻗어 청하는 동작을 취했다.“앉으세요.”유미는 정안에게 인사도 안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선은 오직 남하준에게 고정되어 부드럽고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정안의 부모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유미에게 간식과 차를 대접하며 계속 정중하게 대했다.유동진은 남하준의 부상과 근황에 대해, 그리고 실종된 한 달 사이 일에 관해 물었다.유미는 백건에게 말을 걸며 서윤아 앞에서 계속 아이가 귀엽다고 칭찬하기도 했다.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정안의 손에 있는 아기에게 가더니 물었다.“하준이 아들이에요?”이 말은 정안의 신분을 대놓고 무시한 거였고 정안은 살짝 넋이 나갔다.남하준의 안색도 어두워져서 유동진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유미를 언짢은 듯이 쳐다보았다.“아기 배고픈 것 같으니까 올라가서 도우미에게 분유 먹이라고 해야겠어요.”정안이 일어나서 유동진에게 말했다.“동진 오빠, 얘기 나누세요. 저 먼저 올라갈게요.”“그래.”유동진이 대답하자 정안이 몸을 돌려 떠났다.그러자 유미가 온화하게 웃더니 덤덤하게 툭 내뱉었다.“아기 모유 안 먹어요?”서윤아가 대답했다.“아니요.”“미숙아라 몸이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서윤아는 이미 안정감이 없어졌다.사위 곁에서 매일같이 군전 그룹 병사들이 집안을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남하준은 유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유동진에게 말했다.“서재로 가자. 할 말 있어.”“그래.”유동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유미를 보며 말했다.“유미야, 너 아저씨 아주머니랑 거실에 있어. 나 하준이랑 얘기하고 올게.”유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으며 시선은 남하준의 얼굴에 고정했다.“그래. 다녀와.”남하준과 유동진이 서재에 들어가자 유미는 할 일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집이 아주 크고 호화롭네요.”서윤아와 백정우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이 여자가 좀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그런가요.”서윤아가 대답하자 유미가 또 2층을 바라보며 물었다.“산후 도우미 몇 명이 아기를 돌보고 있어요?”“두 명이서 번갈아 보고 있죠.”“그럼 아기 엄마는요?”“지윤이도 있고 집에 도우미도 있어서 완자는 따로 산후 도우미를 두진 않았어요.”“아.”서윤아가 호기심에 물었다.“제 딸 사적인 일에 관심이 많은 신 것 같네요?”“친구니까 당연한 거죠.”“아. 얼마나 알고 지낸 거죠?”“십 년 넘게요.”“십 년이 넘어요? 왜 한 번도 완자가 그쪽을 언급한 걸 못 들은 것 같죠?”유미가 반응하고 웃으며 말했다.“아. 오해하셨나 보네요. 저는 하준이랑 십 년 넘은 친구예요. 완자랑은 안 지 얼마 안 됐어요.”서윤아는 그제야 딸이 왜 집에 손님이 왔는데 갑자기 아이를 안고 올라갔다가 아직 내려오지 않는지 깨달았다. 유미는 정안의 친구가 아니라 남편의 십년지기 친구였다.하지만 이 여자가 남하준을 보는 눈빛은 친구를 보는 느낌이 아니라 연인을 보는 듯 매우 뜨거웠다.“저 집 구경 좀 해도 될까요?”유미가 실례했지만 서윤아와 백정우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손님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집사님, 여기 아가씨 데리고 집 안내해 주세요.”서윤아가 외
유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며 경악해서 물었다.“하준이와 백완자가 같은 방을 써요?”집사 얼굴에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경악한 표정으로 정신 나간 손님을 바라보았다.유미는 그제야 반응하고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전에 그룹에서 근무할 때는 두 사람 방을 따로 썼어요.”집사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편하게 둘러보시죠. 저는 할 일이 있어 가봐야겠네요.”말을 마친 집사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떠났다.서재에서, 유동진은 남하준의 말을 듣고 안색이 아주 어두웠다.그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유미가 너 아주 오래 좋아했고 많이 좋아한 거 알아. 근데 네가 결혼하고 완자와 사이도 좋은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포기할 줄 알았어. 이렇게까지 집착할 줄은 몰랐네.”“정신과 의사한테 가 봐야 할 것 같아. 나에 대한 감정이 지나치게 집착이 강해서 이미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유동진이 긴장된 눈으로 남하준을 보며 물었다.“유미가 너한테 지나친 행동이라도 했어?”“아직 없다고 해서 앞으로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알겠어.”유동진이 급히 사과했다.“하준아, 미안하다. 내가 유미 생각을 몰랐어. 네가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다쳤다고 해서 난 네가 걱정돼서 왔던 거야. 근데 유미가 기어코 너랑 완자 아기 보러 오겠다고 해서 별생각 없이 같이 왔어.”남하준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괜찮아. 앞으로 나 만날 때 유미 데리고 오지 마.”“그래 알겠어.”유동진이 긴장하며 물었다.“근데 유미가 905공정으로 전근 간 것도 너랑 상관이 있는 거야?”남하준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905와 협업할 일이 있어?”“다음 달부터 시작하는 새 프로젝트에 있지.”“어쩐지!”유동진이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노기에 차서 말했다.“근데 유미가 어떻게 너희들 움직임을 안 거야?”“유미 절친이 정통 어르신 따님이잖아. 아는 건 어렵지 않지.”“구인아 그 여자도 보통내기는 아니야. 최근 자기 남편 선거를 지지하려
남하준과 유동진이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왔다.하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고 소리가 방에서 나는 것 같아 급히 다가가 살폈다.방의 문은 열려 있고 그 안은 정안의 화실로 곳곳에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 있고 벽 모서리 아래에도 그림이 많이 놓여 있었다.유미가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있는 커다란 액자를 일으켜 세우며 긴장한 척 말했다.“미안해. 하준아. 내가 실수로 이 그림을 넘어뜨렸어.”남하준이 차가운 얼굴로 가장자리에 서서 바라보았고 유동진이 급히 다가가 함께 그림을 일으켜 세웠다.그림을 세우는 순간, 유동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1.2m 정사각형 나무판, 그 위의 도화지는 정안이 그린 일가족 3명의 초상화였다.하지만 지금은 검은 먹물이 뿌려져 그림 전체가 망가졌다.유동진이 노기등등해서 말했다.“왜 남의 그림을 망가뜨려?”유미가 억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엎질러진 먹물을 가리키며 말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둘러보다가 이 그림에 부딪혔고 그림이 떨어지면서 땅바닥에 있는 먹물에 엎지른 거야.”유동진이 긴장한 채로 바닥에 있는 먹물을 보고 또 남하준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연신 사과했다.“하준아, 정말 미안하다. 이 그림을 어떻게 배상하면 좋을까?”남하준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으며 안색이 더 나빠지고 분노가 끓어올랐다.정안이 화실에서 세 식구의 그림을 그린 것도 몰랐고, 그림의 전모를 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망가졌다니.정안은 철저하고 양호한 습관을 갖고 있었으니 절대 먹물을 바닥에 놓을 리 없었다.남하준이 유동진을 보며 말했다.“이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유미는 16살이 아니라 26살이야. 자기 잘못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지.”유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미안해, 하준아. 내 잘못이야. 내가 부주의했어.”남하준이 조롱했다.“고의인지 아닌지는 네가 잘 알겠지.”남하준은 천천히 걸어 들어가 일으켜 세운 그림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시간이 워낙 귀한 아내가 이 그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 어떤 마음
경찰이 한 달간 배치한 작전이 오늘로 끝이 났다.산에서 거대한 독극물 재배 기지와 원자재가 발견되었고 2t의 현물도 압수되었다.남태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촬영기지의 투자자 육건우는 체포되어 입건되었다.다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그의 변호사가 와도 보석으로 풀려날 수 없었다.취조실.남태준은 쇠 옥에 갇힌 육건우를 향해 말했다.“침묵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에요. 당신이 말을 하든 안 하든 증거가 확실하다면 마찬가지로 형을 선고할 수 있어요.”육건우는 피식 웃더니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경찰이 아무리 검문해도 침묵으로 일관했다.“대장님, 잠깐 나와보셔야겠어요.”취조실 문이 열리면서 오신우가 그를 불렀다.남태준이 일어나서 떠나려고 할 때, 육건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남태준, 난 그저 평범한 영화 투자자일 뿐이야. 마약 같은 거에 손댄 적 없으니까 나 풀어줘.”남태준은 얼굴이 어두워져서 육건우를 돌아보니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눈가에 냉기가 돌았다.남태준이 나가 문을 닫는 순간 오신우가 긴장해서 말했다.“대장님. 지성이가 신고하러 왔어요.”“지성이가?”남태준이 긴장하며 얼굴을 찡그리자 오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남태준은 밖으로 나가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무슨 일이야?”“누나가 실종됐대요.”오신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태준은 황급히 달려나갔다.그는 달려가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종일 꺼둔 전원을 켰다.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계속 들어왔고 그중에 지성도 있었다.남태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경찰 프런트 데스크에서 뛰쳐나왔고 표정은 엄숙하고 무거웠다.지성은 남태준을 보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더욱 초조해서 말했다.“형...”남태준이 다급히 물었다.“지우가 왜?”지성은 눈시울이 흠뻑 젖은 채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누나가 아침에 장 보러 간다고 나갔다가 계속 집에 안 돌아왔어요. 누나 스쿠터는 길바닥에 쓰러져있는데 사람은 안 보여요.”그때 옆에
남태준은 경찰서로 돌아와 밤새 배치하고 새벽 4시에 많은 경찰 병력을 이끌고 이웃 마을 산꼭대기의 영화기지를 공격했다.산꼭대기에 가까운 사람들은 늦은 밤 총소리에 잠이 깼다.날이 밝자 많은 경찰차가 정적을 울렸고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다.지우가 한창 단잠에 빠져있는데 송수빈의 전화에 잠이 깼다.지우가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송수빈의 전화를 받자 송수빈은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지우야. 지우야. 얼른 인터넷 확인해봐. 세상에. 우리 마을에서 큰 뉴스가 났어. 어젯밤 얼마나 짜릿했는 줄 알아?”“우리 마을에서?”지우는 일어나 게슴츠레한 눈을 비볐고 송수빈이 황급히 수정했다.“아니. 우리 마을 아니고 옆 마을. 산에 있는 촬영기지 있잖아. 새벽 4~5시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경찰차가 잔뜩 오가고 난리가 났대.”새벽 4~5시? 지우는 남태준 생각이 나서 군말 없이 송수빈의 전화를 끊고 남태준의 휴대전화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지우는 그가 임무를 나갈 때 전원을 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음이 조마조마해진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해 인근의 기사를 검색했다.지우는 아침 내내 걱정하며 전화도 여러 번 했다.정오가 되자 지성이 밖에서 돌아와 득의만면한 얼굴로 물을 따라 마시더니 흥분해서 말했다.“누나! 육건우가 잡혔대. 하늘도 양심이 있지.”“육건우가 잡혔다고?”지우가 긴장하며 물었다.“마약 형사한테 잡혔대? 태준 씨는 괜찮아?”“누나 남자친구 괜찮던데? 내가 방금 육건우가 묵고 있는 호텔 입구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태준이 형이 경찰 몇 명과 함께 육건우를 경찰차에 태우는 걸 봤어.”아침 내내 근심하던 지우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육건우는 잡히면 사형 아니면 종신형이야. 네가 진 빚도 갚지 않아도 돼.”지성이 흥분해서 말했다.“그러니까 말이야. 죽어도 싸지 뭐.”“이번 사건으로 교훈을 얻어서 다시는 도박 하지 말고 착실하게 살아.”지성은 테이블에 있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소
남태준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물었다.“임다희가 내게 선물한 반지 같아서 질투하고 기분 나빴던 거야?”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이 가라앉았다.남태준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흥분하며 지우의 몸을 덥석 껴안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너도 나 좋아하지? 그래서 신경 쓰고 있는 거지?”“맞아요. 나 당신 좋아해요. 그 반지 돌려주면 안 돼요? 더 이상 갖고 있지 말아요. 네?”“지우야.”남태준은 흥분하는 말투로 달랬다.“다시 한번 말해주면 안 될까?”지우는 순순히 중복했다.“그 반지 돌려주라고요.”남태준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긴장해서 말했다.“그거 말고 첫 마디.”지우는 얼굴이 화끈거려 그의 가슴팍에 묻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줍게 말했다.“좋아해요. 태준 씨.”“나도 너 좋아해.”남태준은 크게 흥분하여 매력적인 목소리로 지우의 귓가에 속삭였다.“사랑해. 지우야.”“그럼 그 반지는...”남태준이 바로 말을 끊었다.“그거 임다희가 준 반지 아니야.”지우가 호기심에 고개를 들고 물었다.“그럼 누구 거예요?”“그때 큰 마약 조직을 잡으면서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물건도 압수했지만 배후의 보스만 잡지 못했어. 그 신비로운 배후의 보스는 다들 준영이 형이라고 부르는데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어.”“그 반지는 그 사람이 잠자리에 들 왕비로 선택받은 중요한 증거야. 그것만 있으면 그 사람 배에 탈 수 있거든.”지우는 충격적인 표정으로 남태준을 밀어내고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남색을 팔아 접근했던 거예요?”남태준이 피식 웃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난 선택받았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신분이 폭로됐어.”“만약 폭로되지 않았다면...”지우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용기가 없었고 남태준은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그 사람을 만났다면 지금쯤 아마 감옥에 갇혔겠지.”지우가 호기심에 물었다.“그 사람은 잠자리에서 어떤 역할인데요?”남태준은 미간을 잔
지우는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다른 서랍을 잽싸게 뒤지고 양말과 팬티를 챙긴 다음 옷장 문을 닫고 황급히 남태준의 집을 떠났다.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했지만 그럴수록 바늘에 가슴이 찔리는 듯 아파졌다.지우가 다시 병원에 돌아왔을 때 남태준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그녀는 짐가방을 가볍게 내려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의 옆을 지켰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보고 또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서글퍼졌다.‘임다희는 몇 번이나 당신을 해쳤는데 왜 그 여자가 준 반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전에는 당신을 죽일 뻔했고 지금은 당신을 이렇게 괴롭게 만들었는데 왜 계속 마음속에 그 여자 자리가 있냐고요.’지우는 생각할수록 슬퍼져서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그의 큰 손 옆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남태준의 따뜻한 큰 손을 만졌고 천천히 그와 손깍지를 꼈다.지금의 지우는 너무 불안하고 조금의 안정감도 느끼지 못했다.남태준이 아직도 임다희를 사랑할까 봐 두려웠다.남태준은 은은히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천천히 눈을 떴다.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자 지우의 거뭇거뭇한 머리가 그의 곁에 엎드려 자는 것이 보였다.여자의 손이 그와 맞닿았다.남태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녀가 금방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다.남태준은 달콤한 행복에 마음이 꽉 채워진 것 같았고 손바닥을 천천히 조여 여자의 부드럽고 작은 손과 더 단단하게 밀착시킨 후 다시 눈을 감았다.조용한 병실에서 지우의 존재가 가져다준 따뜻한 행복에 남태준은 그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그날 밤, 남태준은 몸 안의 약효가 빠지자 서둘러 퇴원절차를 마쳤다.지우는 그에게 하루 더 병원에 머물며 지켜보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새벽 네 시에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지금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남태준은 지우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고 그녀의
지우는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병원에 병 보러 오지 왜 왔겠어? 갑자기 왜 태준 씨를 물어?”임다희는 지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확인했다.“태준이가 당신 안 찾았어?”“아니.”지우가 고개를 젓자 임다희는 가볍게 웃었다.“그쪽이 아니라면 대체 누굴 찾아갔을까?”“그게 무슨 말이야?”지우가 일부러 이해가 안 가는 척 묻자 임다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두 사람 재결합한 거 맞지?”지우는 침묵했다.임다희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조롱했다.“거짓말할 필요 없어.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아니까. 태준이가 당신을 찾지 않은 건 아마 약효가 너무 강해 당신 같은 여린 몸을 망쳐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으니 다른 여자를 찾아 해결했나 보네.”“약효가 너무 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지우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며 그녀를 만족시켜줬다.임다희는 속이 편안해지며 여유롭게 말했다.“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고. 이 시간에 당신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지우의 안색이 확 가라앉았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앞의 이 악랄한 여자를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남태준을 그렇게 괴롭게 만들고 무슨 염치로 지금 까불고 있을까?만약 남태준이 그녀가 임다희와 정면충돌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면 지우는 절대 임다희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남태준의 뜻에 따라 얌전하고 철든 여자친구가 되어야 했다.지우는 괴로운 척 연기하며 겨우 눈물 한 방울을 짜냈다.임다희는 그녀의 괴로운 모습을 보고 마음속의 분한 감정을 잠재우고는 실소를 터뜨렸다.“이게 당신들 사랑이야? 하하. 우습네!”그녀의 비아냥거림과 함께 차 문이 닫히고 차량이 서서히 빠져나갔다.지우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택시를 잡아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태준을 걱정했다. 그의 옷이 흠뻑 젖어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지우는 기사에게 주소를 말하고는 남태준의 집에 가서 깨끗한 옷 몇 벌을 챙기려 했다.
잠시 후 한 남자 의사가 들어와 남태준이 평온하게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효과가 조금은 있네요.”말을 마친 그는 남태준의 아랫도리를 보더니 한마디 보탰다.“하지만 효과가 만족스럽지는 않네요. 휴. 환자분 물 많이 주시고 약효가 천천히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의사는 자리를 떠났고 지우는 급히 미지근한 물을 붓고 남태준의 아랫배를 슬쩍 쳐다봤다.병원의 이불이 너무 얇은 편도 아니었는데 남태준의 아랫배가 여전히 부풀어 올랐다.지우는 속으로 욕했다.‘늑대 같은 임다희! 빌어먹을!’“태준 씨. 물 좀 마셔요.”지우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남태준이 흐릿한 검은 눈동자를 뜨고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자 지우가 서둘러 그의 등을 부축해 주었다.“아직도 힘들어요?”지우가 관심하며 묻자 남태준은 대답하지 않고 물을 마시고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나 이제 괜찮으니까 너 집에 가서 쉬어.”“싫어요. 여기 있을래요.”남태준은 눈을 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돌아가라고.”“혹시 무슨 일 생겼는데 옆에 돌봐줄 사람 없으면 어떡해요?”“여기 의사도 있고 간호사도 있으니까 나 괜찮아.”“그래도 난 여기 있고 싶다고요.”남태준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흐릿한 검은 눈동자를 천천히 뜨고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몸 안의 불은 꺼졌지만 탄소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어. 넌 탄소 더미 옆의 디젤과 같아서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비유를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남태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지우는 그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여기 머무르는 게 어쩌면 그의 안정과 회복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좋아요. 나 먼저 갈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줘요.”“그래.”지우는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1층 로비에서 매니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약을 받는 임다희를 만났다.지우는 재빨리 기둥 뒤에 숨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허리와 다리를 다친
지우는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시골 옆집에서 종돈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매번 거래가 있을 때면 이웃 할아버지는 종돈에게 독한 약을 먹였고 약을 먹은 종돈은 열 몇 마리의 암퇘지와 교배를 했다.그녀는 그 장면을 본 적은 없지만 처절하고 끔찍한 돼지 울음소리는 그녀 어린 시절의 악몽이었다.정신이 번쩍 든 지우는 두말없이 펑 하고 문을 닫았다.갑작스레 문을 닫는 모습과 지우의 창백한 얼굴, 당황하는 모습에 남태준은 피식 웃었다.지우는 부랴부랴 택시를 잡았고 15분 후, 남태준은 지우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응급실에 가서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의사가 남태준 옆에 있는 지우를 가리키며 물었다.“환자분 여자친구예요?”남태준이 다급하게 말했다.“여동생이에요.”지우는 마음이 뭉클했다. 남태준은 스스로 고통을 참을지언정 그녀가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여자친구 있어요?”“없어요.”“내가 주소를 줄 테니 가서...”의사가 간단한 방법을 추천하려 하자 남태준이 엄숙하게 말했다.“나 경찰입니다.”의사는 말을 뚝 그치고 긴장된 듯 침을 삼키더니 웃어 보이며 애써 둘러댔다.“그러니까 제 말은 이런 경우 의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다는 거예요. 게다가 우리도 해독제가 없어요.”“진정제 놔주세요. 진정제가 안 되면 마취제라도...”“그런 약은 함부로 처방할 수 없고 일정한 수치에 도달해야 처방할 수 있어요. 환자분 같은 경우는...”의사는 난처해하더니 남태준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강한 카리스마에 겁을 먹고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진정제 놓아드리겠지만 효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거예요. 그저 괴로움을 조금 억제하는 정도예요.”“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괴롭게 참아내느라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다른 약도 같이 처방해 드릴게요.”의사가 약을 처방하며 말했다.“여자친구도 없고 그런 서비스도 받기 싫다면 여동생분께 성인 가게에 가서 사달라고 하세요.”지우는 이렇게 난처한 적이 없었다.
지우가 만약 숫처녀라면 아마 고생할 것이다.남태준은 생각하다가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 구급차를 불러 의사를 찾아 해결할 생각이었다. 휴대전화를 찾아 다이얼을 돌리려던 순간, 조수석 문이 열리면서 지우가 다급하게 들어와 앉더니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태준 씨?”남태준은 움찔 놀랐다. 뜨거운 눈으로 지우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니 입이 바짝 마르고 욕망이 최고조에 달했다.지우는 남자가 머리와 몸이 흠뻑 젖어 숨도 약간 헐떡이는 것을 보고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타오를 듯한 고온에 지우는 화들짝 놀랐다.“태준 씨 열 나요.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요.”남태준은 꾹 참으며 천천히 눈을 감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운전할 줄 알아?”“아니요.”지우가 긴장하며 말했다.“방금 택시 타고 왔어요. 택시 타고 병원에 데려다줄게요.”택시?남태준은 자신이 통제 불능이 되어 택시에서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몰라 걱정했다.지우는 휴지를 뽑아 그의 볼과 목의 물기를 닦아 줬다.여자의 몸에서 나는 향기, 손바닥의 부드러움은 치명적인 유혹처럼 그를 걷잡을 수 없이 달려들고 싶게 만들었다.“지우야.”남태준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눈을 감고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하며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방금 다희를 만났어.”지우는 땀을 닦는 동작을 멈추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티 나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리고요?”“그리고 이렇게 됐어. 너무 괴롭고 답답해 죽을 것 같아.”남태준은 침을 삼키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지우의 시선은 그의 고통스러운 안색에서 내려와 그의 가슴팍을 보니 기복이 아주 심했고 더 아래로 내려가니 운전석에 앉아도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임다희가 약을 먹였어요?”지우는 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어쩔 줄 몰랐다.그러자 남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어떡해요?”지우는 부랴부랴 고개를 내밀어 근처에 호텔이 있는지 살폈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그건 지난번에 이미 설명했잖아.”“그 사람 내가 만나야겠어. 주소와 연락처 줘.”“없어.”임다희는 냉정한 얼굴로 어금니를 깨물며 악에 받쳐 말했다.“내가 그렇게 큰 단서를 줘서 네가 공을 세웠는데 넌 내게 조금의 감사함도 없이 이런 태도로 날 심문해?”“네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내가 너 경찰서로 데려가 어떻게 해서 그 단서를 얻었는지 조사할 거야. 너 절대 쉽게 못 벗어나.”임다희는 피식 웃더니 심호흡을 하고 중얼거렸다.“정말 어이가 없어.”남태준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 술을 마신 후 몸이 따뜻해짐을 느꼈다.알코올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따뜻함이 점차 뜨거움으로 번지고 일부 기능은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해지며 의식이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컵을 보더니 와인을 바라보았다.컵은 닦았으니 틀림없이 문제가 없을 것이고 문제는 아마 개봉하지 않은 것 같은 와인에 있을 것이다그가 방심했다.남태준은 더 이상 임다희를 캐묻지 않고 벌떡 일어나 두말없이 성큼성큼 돌아서서 가버렸다.“태준아!”임다희가 급히 뒤쫓아가 남태준을 뒤에서 덥석 끌어안고 두 손을 놓지 않았다.“가지 마. 태준아. 사랑해.”임다희는 와인에 매우 강한 약을 넣었다. 소 열 마리라도 이 약효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남태준의 경계하고 신중한 성격을 알고 일부러 와인에 약을 넣은 다음 개봉하지 않은 것처럼 포장하여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했다.“이거 놔.”남태준은 화를 꾹 참고 나지막이 명령했지만 임다희는 한사코 놓지 않았다.그의 몸을 더 꽉 껴안고 자기 몸을 그의 몸에 문지르며 그를 통제 불능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남태준의 눈빛이 가라앉더니 임다희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겨 어깨너머로 세게 넘어뜨렸다.펑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임다희의 괴로운 울부짖음 소리가 들렸다. 고통스럽게 땅바닥에 뒹굴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초라했다.“내일 다시 봐.”남태준은 매섭게 말하고는 방에서 사라졌다.그는 걸으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