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마음을 추스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기대하는 말투로 물었다.“완아. 너 나 사랑해서 내 아이를 임신하고 싶고 M국에 머물고 싶은 거야?”정안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끝이 저릴 정도로 아팠다.남하준은 진지한 눈빛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너만 남고 싶다면 난 목숨을 걸고 너 보호할 거야. Z국이 아무리 강해도, 내가 있는 한 넌 무조건 안전해. 모든 일은 내가 책임질게.”정안은 눈물을 참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난 오빠가 목숨 거는 것도, Z국과 적이 되는 것도, 오빠 몸이 부서지는 것도 전부 원하지 않아요.’남하준은 점점 뒷걸음질 치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정안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굽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완아, 너도 나 사랑하지?”정안은 눈물을 참고 코를 훌쩍이며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요. 나 Z국으로 돌아가면 일하느라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냥 오빠 유전자가 탐나서 아이를 낳고 싶었을 뿐이에요.”남하준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는데 눈가에 눈물이 가득했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정안의 그 말은 수백 개의 화살처럼 그의 심장을 찌르고, 피와 살을 헤집어 피가 뚝뚝 떨어져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그는 웃었다. 우는 것보다 더 못생기게 웃는 그의 눈 밑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분노에 차서 나지막이 화를 냈다.“날 사랑하지 않아도 돼. 근데 왜 그렇게 잔인한 수단으로 나 괴롭히려는 거야?”정안은 눈물범벅이 되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남하준이 소파 가장자리에 가서 방금 떨어뜨린 핸드폰을 주워 정안을 등지자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난 널 만난 적도, 사랑한 적도 없는 거야. 앞으로 남은 인생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익숙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정안은 마음을 가다듬고 무릎에서 고개를 들어 두 손으로 눈물을 닦고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지윤의 전화인 것을 보고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귓가에 연결했다.“지윤아.”정안이 부드럽게 입을 열자 지윤이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언니 지금 어디예요?”정안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 바지의 먼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금원이야.”“내가 주소 하나 보낼 테니까 지금 당장 와요.”지윤은 다급해 보였고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었다.정안은 그녀가 이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봐서 금원을 뛰쳐나가며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언니 할머니 찾았어요.”정안은 마음이 급해져 더 빨리 뛰었다.“어디야? 할머니 어디 계셔? 주소 보내.”“보낼게요. 근데 마음 단단히 먹어요.”순간 정안은 머릿속이 하얘지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그녀는 택시를 타고 지윤이 보낸 주소를 따라 외진 교외로 나가 낡은 건물 공사장에 멈춰 섰다.그녀가 공사장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이미 경찰차 여러 대가 주차돼 있었고 주변은 폴리스라인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폴리스라인 밖에서 두 명의 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이를 본 정안은 더욱 당황했고 공포와 불안이 점점 더 심해지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언니!”지윤이 멀리서 그녀를 보고 무거운 표정으로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정안의 손은 차갑고 몸은 가늘게 떨고 있었고 목소리마저 떨리며 긴장해서 물었다.“할머니는?”지윤이 하늘을 가리키자 정안이 고개를 들었다.순간 정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깊이 타들어 가는 공포가 온몸에 번져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 허공에 매달린 할머니를 바라보니 가슴이 칼로 에는 듯 아팠고 너무 아파 미쳐버릴 것 같았다.포승줄에 묶인 할머니는 몸에 폭탄 같은 것을 가지고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할머니를 들어 올린 건 대형 크레인이었다.정안은 경찰 앞에 달려들어 그들의 손을 덥석 잡으며 다급하
“저건 원격 조종 폭탄이에요. 올라가면 죽는다고요!”“아니요. 저 사람들은 나 못 죽여요. 내가 있는 한 절대 폭파하지 못해요. 빨리 알려주세요. 내가 올라가요.”전문가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이거 미친 여자네. 당장 끌고 나가!”정안은 전문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올라가게 해 주세요. 나 정안이에요. 절대 나 죽이지 못한다고요. 빨리 어떻게 제거하는지 알려주세요. 내가 할게요.”전문가들은 생명을 구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는 건 이해하지 못했다.“그쪽이 누구든 당장 폴리스라인 밖으로 물러나세요!”그때 머리 위에서 여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완자야. 우리 완자...”정안이 고개를 번뜩 들었지만 눈물이 그녀의 시야를 흐려 할머니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급히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으며 울먹였다.“할머니, 괜찮아요. 내가 할머니 구하러 왔으니까 곧 내려올 수 있어요.”여은수가 웃으며 말했다.“완자야. 할머니가 많이 사랑해. 내가 우리 손녀 아주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정안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나 알아요. 지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우리 집에 돌아가서 얘기해요. 네?”여은수가 큰소리로 외쳤다.“나 네 엄마랑 아빠 만났다. 그리고 한 살짜리 네 동생도 봤고. 완자야. 이 할미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내가 하늘에서 너희들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지켜주마.”정안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오장육부가 저린 것 같았고 목소리가 떨렸다. “할머니,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어디 있어요? 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국내에 있는 한 별장에 구금됐는데 주소도 모르고 주변도 잘 보이지 않았어.”정안은 할머니의 허약한 몸을 보고는 폭탄 제거 전문가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제발 저 올라가게 해 주세요. 블랙 섀도우 조직이든 백인호든 절대 나 죽이지 못해요. 나 올라가게만 해 주면 내가 할머니 구할 수 있어요.”폭탄 제거 전문가가 경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경찰이 즉시 돌진해 와서 정안을 부
“할머니 괜찮은 거지? 괜찮지?”정안은 고함을 지르며 애간장이 찢어질 듯 울부짖고 애통해하며 두 발이 힘없이 흘러내렸다.지윤은 그녀를 끌어안고 미끄러져 내려갔고 두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서로를 꼭 껴안았다.정안은 통곡하며 목놓아 울었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할머니가 눈앞에서 죽었는데도 할머니를 구하지 못했으니 자신ㅇ 너무 무능하다고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할머니가 눈앞에서 사라졌다.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정안은 두 손으로 가슴팍의 옷을 꽉 움켜쥐고 심장을 짓눌렀지만 따끔거리는 느낌은 점점 강해지고 호흡은 점점 옅어졌다.그녀는 결국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윤의 품에서 기절할 때까지 울었다.정안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지윤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밤새 그녀를 지켜보다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급히 그녀의 이마를 만지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언니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물 좀 줄까요?”정안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슬픈 기색이 가득했지만 더 이상 울지 않았다.지윤이 또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하준 도련님께서 언니 보러 왔어요. 아침에도 왔다가 이제 막 갔어요.”정안은 유유히 고개를 돌린 채 눈시울을 적시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오빠가 뭐래?”“백인호는 이미 1급 수배범으로 분류되어 전국에서 수배 중이라고 하셨어요.”정안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지윤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께서 언니 옆에 있어 주지 못한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쪽에도 지금 일이 많아요.”정안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탓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이미 인연을 끊겠다고 밝힌 남하준이 그녀의 할머니가 사고 난 후 두 번이나 그녀를 보러 왔으니 그 사랑이 깊어 여전히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말한다.지윤은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자 무슨 뜻인지 몰라 계속 설명했다.“류청 씨 말 들어보니까, 어제 점심에 정호를 호송하던 죄수 차량이 습격당했고 도로에서 격렬한 총격전과 폭
정안은 화가 나서 온몸이 불편했고 또박또박 소리쳤다.“네가 원하는 건 돈이잖아. 가문의 모든 재산을 주겠다는데 왜 할머니를 죽여? 왜 우리 가족을 모두 해치는 거냐고?”백인호가 피식 웃더니 느릿느릿 말했다. “지금 백씨 가문 돈은 해외로 나갈 수 없어. 난 M국 수배범이고. 나를 이렇게 만든 이상 나도 본때를 보여줘야지 않겠어? 안 그럼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잖아?”정안은 얼굴이 굳어지고 불끈 쥔 주먹이 가늘게 떨리며 가슴에 한이 맺혔다.백인호가 말을 이었다.“나 방금 결혼했어. 아내 이름이 한이서야. 내일부터 이서가 돌아가 모든 재산을 상속받고 그룹 회장직을 맡을 거야. 이서 손에 이미 네 할아버지 임명장과 자산 이전 협의서가 있어. 만약 너희 가족이 하나둘씩 할머니를 따라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이서가 재산 상속받는 거 막지 마. 남하준이 이 일에 끼어드는 건 더더욱 안 되고. 내가 돈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네 가족은 잿더미가 될 거야.”정안에게 가족의 안전을 제외한 모든 건 보잘것없었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내 가족들 해치지 않는다면 뭐든 들어줄 수 있어.”백인호가 웃으며 말했다.“좋아. 그럼 경분자도 줘.”“그건 네가 가져도 쓸모없는 물건이야. 나만 그 원리와 사용법을 알고 있어.”“하지만 내가 팔 수는 있잖아? 1g에 1조억 원. 이건 천문학적 수치야.”정안이 코웃음을 쳤다.“욕심이 끝도 없네.”그러자 백인호가 명령했다.“내일 경분자 48g을 이서에게 건네.”“좋아.”말을 마친 정안은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옆으로 던졌다.지윤이 눈을 부릅뜨고 긴장된 표정으로 정안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정안이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고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이 세상에서 진짜 경분자를 연구해 본 사람은 나 말고 군전 그룹의 그 노교수들뿐이야.”지윤이 지난번 군전 그룹 폭발 사건을 떠올리니 바로 그 교수들이 2g 경분자 연구에 실패했었다.그녀는 순간 정안의 뜻을 이해했다. “설마 백인호
연결음이 막 들려오자 정안은 갑자기 전화를 끊더니 휴대전화를 지윤에게 넘겼다.“전화 안 해요?”지윤이 의문스러워 묻자 정안은 시무룩해서 말했다.“오빠는 지금 나 만나고 싶지도 않고 나랑 연락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네가 말해줘.”“그럴 리가요?”지윤이 경악해서 말하자 정안은 말없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다가 머리까지 덮고 슬픈 마음으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지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남하준의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곧바로 귓가에 대고 바로 자신임을 밝혔다.“도련님, 저 지윤이에요.”남하준이 흠칫 놀라더니 물었다.“완이 깼어요?”“네.”“몸은 좀 어때요?”“괜찮아요. 다만 아직 많이 슬퍼해요.”“나한테 무슨 일로 전화했죠?”지윤은 이불을 덮은 정안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언니가 도련님 연구팀에 스파이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어요.”“알고 있어요.”“네? 알고 계신다고요?”“가짜 백하린 정체가 탄로 난 뒤부터 계속 조사하고 있었어요.”지윤은 입술을 오므리고 웃더니 탄복하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피어났다.“언니랑 통화하시겠어요?”남하준이 침묵하자 지윤은 분위기가 조금 이상함을 감지했다.그때 남하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잘 돌봐주세요.”지윤은 정말 이해가 안 갔다. 남하준은 분명 정안을 그렇게 걱정하면서 왜 갑자기 냉담한 태도를 보일까?정안의 가족이 세상을 떠나서 위로가 가장 필요한 지금 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행동할까?지윤은 별말 없이 간단히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정안은 이불 속에 숨으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할머니의 별세도 슬프고 남하준이 고한 이별도 더욱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다음날 점심.정안은 백인호의 아내 한이서를 만났다.생김새는 평범하지만 세련되고 야무진 여자였다.그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그룹에 들어가 회장직을 인수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신원과 가업 승계를 위한 서류를 발표했다.그날의 인기 검색어는 모두 백가의 뉴스였다.백완자가 Z국 출신이라 재산을 상속
지윤은 너무 궁금했다. 정안과 남하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남녀 간의 감정이란 두 사람의 일이지 외부인이 도와줄 수 없었다.정안과 지윤은 호텔에 투숙했고 그 후 며칠 동안 여은수의 장례를 치렀다.호상이 아닌 데다 가족들이 모두 곁에 없어 정안은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고 환경이 아름다운 묘지를 찾아 할머니의 약간 남은 유골을 묻었다.정안은 모든 연락을 차단하고 뉴스도 보지 않고 그룹의 동태도 살피지 않고 매일 호텔에 숨어 마음을 다스렸다.그녀는 M국 지도를 보며 백인호가 그녀의 가족을 어디에 가뒀을 지 연구하기 시작했다.저녁 무렵.지윤이 호텔 로비의 음식을 들고 방으로 돌아와 안쓰러워하며 말했다.“언니, 뭐 좀 먹어요. 요 며칠 동안 잘 먹지 못해서 살이 빠졌어요.”“배 안 고파.”정안은 티테이블에 엎드려 지도 연구에 몰두했다. 각 지역을 백인호의 상황과 비교하며 그의 은신처를 추측했다.지윤은 음식을 그녀의 앞에 내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도 좀 먹어야죠.”정안이 고개를 들어 긴장된 표정으로 지윤을 바라보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너 혹시 백씨 별장에 도청 장치 설치하지 않았어?”지윤이 탄식했다.“설치했죠. 근데 이미 모두 신호가 끊겼어요.”정안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가 끓어올랐다.‘역시 1급 범죄자다워. 반 수사 능력이 대단하군.’“그럼 한이서에게 24시간 미행은 붙였어?”지윤이 듣자마자 웃었다.“언니, 하준 도련님 부하가 이미 한이서를 몰래 미행하고 있고, 제 사람들도 뒤를 밟고 있어요. 한이서를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 백인호를 만나기만 하면 우린 잡을 수 있어요.”정안은 지도를 내려놓고 일어서서 지윤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지윤아. 네가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지윤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난 언니 사람이에요. 원하는 건 명령만 하세요. 부탁할 필요 없어요.”정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윤의 달콤한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
인기척이 없는 깊은 밤, 유원의 불은 여전히 환하게 빛났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온 유미가 소파에 누워 있는 유동진을 보니 얼굴이 빨갛고 술기운이 돌았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해서 물었다.“한밤중에 웬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유동진이 덤덤하게 웃었다.“어쩔 수 없었어. 하준이 취하게 하려면 마셔야지.”유미가 그의 곁에 다가가 앉더니 물었다.“왜 하준이 취하게 하는데?”유동진이 고개를 들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약간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오늘 백완자가 나 찾아왔었어. 글쎄 남하준을 원한다고 하지 뭐야.”유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동진은 바보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 처음에는 하준이한테 프러포즈하겠다는 말인 줄 알았다? 근데 두 사람 반년 넘게 부부 생활을 했는데도 깨끗한 몸이라니 너무 충격적이었어. 나...”유미가 일어나서 급하게 밖으로 나가자 유동진이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가며 그녀를 낚아챘다.“어디 가려고?”유미가 소리쳤다.“하준이 구하러 가야지!”유동진은 취기가 좀 가시더니 소리쳤다.“구하긴 뭘 구해?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네가 왜 끼어들어?”유미는 눈이 빨개져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누가 서로 사랑한대? 백완자는 앞으로 Z국으로 돌아가서 살 거라고. 하준이 옆에 있지 않아. 하준이가 사랑했던 사람은 예전에 그 첫사랑이지 지금 그 이기적인 여자가 아니라고!”“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준이가 누구를 좋아하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정신 좀 차려!”유미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두 사람 이미 깨끗하게 끝났어. 보름 넘게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준이가 이미 그 여자 포기하기로 했는데 왜 그 나쁜 여자를 도와 하준이를 해치려는 거야?”유동진은 중요한 포인트를 잡아내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두 사람 보름 넘게 연락 안 한 거 네가 어떻게 알아? 하준이 사람 매수했니?”유미는 유동진의 손을 홱 뿌리치고 소리쳤다.“이거 놔! 나 하준이 구하러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